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지 음과 양을 같이 봐야 한다!
미국이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미국에 대해 전체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자신이 서 있는 정치적 좌표에 따라 편의적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미국을 싫어하는 이들은 반미주의자라고 할 정도로 좋지 않은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킨다.
반면, 미국을 좋아하는 이들은 미국의 노예인가 하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미국과 전혀 관계없는 국내 정치적 시위를 하면서도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들고 마구 흔들어댄다. 양쪽 모두 이성적인 사고력과 균형감각이 결여된 모습들이다.
세상에는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양이 있으면 음이 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임과 동시에 역사에도 적용되는 哲理다. 단지 그 정도의 차이와 질의 차이, 성격의 차이가 문제될 뿐이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임과 동시에 최빈국, 과학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임과 동시에 조금 과장하면 거의 원시상태나 중세의 상황도 같이 존재하는 양면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나라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와 대우도 마찬가지다.
19~20세기 어간 기독교의 한국전파 과정에서 현대식 교육제도, 군사제도 및 각종 현대적 행정제도, 과학 기술 등 문명이기의 이식,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래 지금까지 북한의 남침야욕을 억제한 한국의 안보와 고도경제성장은 미국의 힘이 컸다는 사실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시기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분명 독재정치를 휘둘렀음에도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고 눈을 감고 무조건적으로 그를 지지, 지원해준 것, 신군부의 권력 가로채기를 용인한 미국 때문에 역사발전에 걸림돌이 된 경우도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전자가 음, 즉 그림자라면 후자는 양, 즉 빛이다. 둘 중 한 가지만 알고, 한 가지만 강조하면 외눈박이의 역사이해다. 외눈박이 역사이해는 균형감각을 상실한, 그래서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양 진영 간의 끝없는 갈등과 마찰 같은 새로운 문제들을 일으키는 요인이 돼오고 있다. 무릇 역사는 변증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빛이 있다면 그 빛 속에는 그림자가 있고, 그림자가 있다면 그 그림자 속에는 빛을 머금고 있는 것이 역사의 제양상에도 동일하게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우리에게 끼친 긍정적 영향에 대해선 많은 얘기들이 떠돌고 있다. 그에 반해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소개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해서 오늘은 대중적인 필치로 후자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이 주제와 관련해 미국이 우리 민족의 운명과 관계된 사실만 들여다보면 19세기말 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우리를 어떻게 대했는지, 어떤 나라였는지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양면의 얼굴을 하고 있는 미국이 우리민족에게 드리운 그림자들을 역사적 시계열별로 알아보자.
1. 1905년 7월 29일, 러일전쟁 당시 미국은 제정 러시아의 태평양 및 동아시아 남진을 막기 위해 전쟁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War)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를 동경에 들르게 해 일제의 총리 겸 외무대신 가츠라 타로우(桂太郞)와 이른바 ‘태프트-가츠라’ 밀약(Taft-Katsura Agreement)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양해해줬다. 이 밀약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배를 서로 인정한, 양국의 이해관계에 대한 상호 확인이었다. 이것은 결국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도와준 결과를 초래했다. 태프트는 나중에 제27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2. 미국은 중국 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가 패망했어도 그에 대한 교전국 자격을 획득할 수 없었다. 중화민국의 장개석은 1940년대에 들어와 임시정부를 승인해주고 싶었지만 미국이 반대를 했기 때문에 인정하지 못했다. 당시 중국 내 공산당 세력을 뿌리 뽑으려고 한 장개석은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한국 임정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3. 일제 패망 직전, 중국 중경 소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 OSS와 협조하여 한반도 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나 미국은 일제가 항복하자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환국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것은 해방공간의 새로운 국가수립(state building) 과정에서 독립운동세력이 주도적이 되지 못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다. 이 사실은 미국이 전후 한국에 대해 편파적으로, 때로는 무지하게 대한 정책들 중에 가장 중대한 실책이었고, 우리에게는 뼈아픈 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국가의 주인이 친일파가 되도록 한 근원적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4.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음에도 미국은 일제 항복과 함께 미군을 한반도에 진주시켜서 “일본군은 미군이 올 때까지 무장해제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명령함으로써 한국인 스스로 일제에 대해 독자적이고 주도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일제 36년간 수탈과 억압의 대명사 조선총독부 건물 국기 게양대에 여전히 일장기가 걸려 있게 하고, 미군 진주 후 조선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9일에 가서야 일장기를 내리게 한 것이 상징한다. 그것도 일장기 대신 게양된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군을 ‘해방군’이라고 환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그들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을 뿐이다. 이 내용은 ‘맥아더 포고문 제1호’(“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서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戰捷軍은 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함”)에 분명히 명시돼 있다.
5. 오키나와 주둔 미 육군 제24군단 사령관이었던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미 군정청의 최고 책임자가 된 인물인데, 그는 “조선인들은 일본놈들과 마찬가지로 교활한 종자”(The Koreans are the same breed of cats as the Japs)”라는 말을 할 정도로 아시아 정세는 물론, 한국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는 중국에서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보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를 더 신뢰했을 뿐만 아니라 친일 경찰과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로 기용해 그저 군정을 유지시키는데 급급해 했을 뿐이다. 미군정 통치기간 중에 그가 친일파들을 기용하고 임시정부와 국내 정치세력을 악의적으로 배제한 것은 우리가 친일파를 청산할 기회를 놓치게 된 주요 배경이 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6. 1945년 8월 일제 패망 이후 시작된 해방공간에서 미군정이 김구, 김규식, 조소앙을 위시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으로 대한 반면, 초기와 달리 미국 찬미자이자 추수자로서 미국의 한국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더군다나 미국은 이승만의 친미적인 반공세력에게 미국을 추종하도록 유도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용공분자나 빨갱이로 몰아서 탄압하는데 방조했다.
7. 미국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개시된 소련의 한반도 진출이 더 이상 남한까지 내려오지 못하도록 저지하기 위해 38도선을 편의적으로 분할함으로써 분단의 단초를 열었다. 이 사실은 아마도 미국의 정치인들 중에 미국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공유된 인식일 것이다. 단적인 예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을 때 트럼프가 남북분단이 미국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는 정상회담 후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남북의 경계선은 인위적으로 아주 오래전에 생겨났습니다. 우리들에 의해서 말이죠. (휴전선은) 인공적인 국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전선은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씨앗이 바로 당신이 가진 것입니다.”
8. 미국은 소련군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38도선을 편의적으로 분할해 분단의 단초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 전 상태의 영토를 반환하게 한다는 방침에서 제주도, 울릉도, 거문도만 한반도 영토라고 함으로써 독도를 일본이 자국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는 1952년 4월 28일 미국의 의지가 작동돼 발효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대일강화조약)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것은 당시 미국 외교관들의 한국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9. 미국은 패전한 일본에게 전쟁배상금을 물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침략국 일본을 단죄하기보다 오히려 재건을 위해 협조하고 지원했으며, 특히 전후처리문제 중 중요한 사안이었던 전범처리 문제에서도 일본관동군이 만주에서 저질렀던 천인공노할 범죄인 사람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 관련 자료들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1급 전범인 도조 히데끼(東條英機)등 4명만 처형하는 선에서 전범처리를 종결지어버렸다. 즉 그 뒤 한일관계에서 끝 없는 반목과 갈등의 불씨를 남긴 구도를 만든 것이다.
10. 미국은 김일성을 앞세워 한국 전역을 공산화 시키려던 스탈린의 흉심을 간파하지 못하고 북한과 소련의 남침전쟁 준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김일성에게 오판하도록 만든 원인 제공자가 된 셈이다. 해방과 동시에 북한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동시에 철수하기로 한 약정에 의거해 미국은 남한 주둔 미군 중 군사고문관 약 500명 정도만 남겨 놓고 전투 병력은 모두 철군시켰으면서도 한국정부의 군사무기 장비의 지원 요청에 대해서는 방어용 무기 장비 위주의 제한적 지원만 허용했다. 이는 결국 스탈린이 북한 주둔 소련군을 완전 철수한다고 선언해놓고 상당 부분 그대로 북한에 남아 김일성의 남침전쟁 준비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소련제 무기 장비를 북한에 제공한 것에 힘입어 남한의 군사력을 앞지르게 만드는데 전혀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11. 미국은 편의적으로 남북을 갈라놓고선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다는 자국의 세계전략 구도 속에서 북한의 남침을 예견하면서도 1950년 1월 12일 이른바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인 ‘애치슨라인’(Acheson line)을 선포하여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남한과 타이완을 제외했다. 김일성은 이 선언 때문에 남침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선언이 그의 대남침략에 대한 자신감을 더해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2. 6.25동족상잔의 전쟁 중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에 일본군이 한반도에 참전토록 용인했으며, 패전국 일본의 경제가 부흥되도록 전쟁특수를 선사했는데, 그것은 우리민족의 희생 속에 이뤄진 것이었다. 더욱이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포함한 한국의 전체 국민들이 휴전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미국이 일방적으로 중국 및 북한과 휴전협상을 추진해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체결한 점이다. 물론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로 체결한 한미동맹에 근거해 미군의 남한 주둔을 합법화했다. 한국에 주둔한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 두 가지를 동시에 평가해야 한다.
13. 미국은 1951년 9월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Treaty of Peace with Japan, 또는 San Francisco Peace Treaty, 일본명 日本国との平和条約)에서 독도를 한국영토에서 빼놓았다. 즉 동 조약 제2조 제1항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평화조약문에 독도가 우연히 빠진 게 아니라 이 조약체결을 위한 일련의 회담에서 미국이 식민지 피해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한국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고 독도를 제외해야 한다는 일본 대표의 설득을 받아 들여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한국의 영토로 규정하면서도 독도만 한국 영토에서 뺀 것이다. 이는 1905년 ‘가츠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해준 것과 같다.
14. 미국은 자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국익 때문에 한국을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도록 주선하면서 국교수립이 일본에 유리하도록 노력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을 건성으로 대했다. 1965년 협정 체결 당시 미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한국과 일본에 대해 전문적 지식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았으면서도 한일 관계의 틀을 결정지을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특히, 일본인을 처로 맞은 장인의 나라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윌리엄 시볼드(William Sebold)는 한국에 대한 악의적으로 보고 있던 반면에 완전히 일본 편에 서서 일했다.
원래 이 자는 샌프란시스코 회의 과정에서 독도를 한국영토에서 제외하도록 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기도 했다. 한일 국교수립시에도 조약이 일본에 유리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한국에 편견은 한일협정 조인 직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인은 일본인과 달리 폭력 성향이 있다”며 “시대에 뒤떨어져 억압받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침묵하고, 시무룩한 슬픈 사람들의 나라다”라고 일방적으로 폄훼했다. 하지만 과거 일제의 침략과 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강제동원 등에 대해선 입도 떼지 않았다.
15. 미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말기인 1970년대 중후반 비밀리에 착수한 핵개발을 저지했다. 이것은 미국이 자주 국가의 독립성을 훼손한 사례였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것은 우리 정부의 자주국방이 이뤄지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한 북한 보다 재래식 무기 장비의 우위를 점하면서도 미국으로부터 각종 군사 무기 장비를 대량으로 사들여야 하고, 나아가 북한에게 끌려 다니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또한 학술적으로 규명이 돼야 할 문제로서 향후 면밀하게 연구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살해된 것 배경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6. 미국은 과거 일제 시기 만주의 한국독립군을 토벌하며 공산주의자로서 남로당 요원이었던 박정희를 지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12.12사태’ 후 1980년 신군부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휴전선의 병력을 빼다가 후방 광주사태에 투입해 광주의 양민들을 학살하면서 진압한 군사반란까지 묵인하거나 용인했다. 이것은 과거 중남미국가들의 예들이 말해주듯이 쿠데타를 일으키든, 독재자이든 간에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자라면 지지해주는 미국의 비도덕성을 새삼 재확인해준 것인데, 한국사회에 깊은 역사적 상흔을 만들어 오랜 세월 동안 사회통합과 정치발전에 장애요인이 된 결과를 초래했다.
17. 미국은 지금까지 교묘한 수단을 동원해 남북대화를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북핵문제해결을 이런저런 핑계로 무산시켜왔다. 1990년대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핵 개발에 나섰을 때 미국은 제네바협상을 성사시켰고, 중수로 대신 경수로 발전소를 북한의 함경남도 신포에 건설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2002년 11월 부시 정권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 프로그램 개발 의혹을 빌미 삼아 제네바합의에 따른 중유공급을 중단해버렸다. 이로 인해 결국 한국정부도 11억 3,000만 달러를 고스란히 날린 채 신포 경수로 공사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북한이 바로 그 이듬해 1월 NPT를 탈퇴하고 핵 개발에 나섰다.
그 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2003년 8월, 6자(남·북·미·중·러·일)회담이 시작되었고, 2005년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이 도출되고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다시 NPT, IAEA로 복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무슨 심사인지 미국은 곧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 문제를 걸어 북한 자금에 대한 동결에 나섰고, 북한은 ‘9·19공동성명’ 이행을 거부한 채 이듬해 제1차 핵실험으로 나아갔다. 제네바합의의 파기와 방코델타아시아은행 문제에서 북한에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볼 순 없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미국은 북한의 핵을 예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내던져 버렸던 셈이다.
지금까지 나열한 사실들의 특징은 몇 가지로 귀납된다. 첫째,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한국을 도와주는 지원은 부차적인 것이다. 둘째, 미국은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기보다 자국의 세계전략, 자국의 안보논리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대한반도 정책을 편다. 셋째, 이런 이유로 미국이 한국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르지 않고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과 판단에 따르게 돼 있다. 넷째, 한민족의 근현대사, 남한 내 주요 사건들의 이면에는 언제나 미국정부의 모종의 정치적 공작이나 아니면 음모적 성격의 작위들이 내재돼 있었다.
위 내용들은 국내에 있건, 미국에 살건 한국인들이 대부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미국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고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대국에 다 해당되는 사실이지만, 상대국에 대한 역사인식이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그들에게 휘둘리거나 내부 정쟁의 정도가 줄어들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새삼스런 얘기지만,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없지만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자 친구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영원한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는 소리다.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어느 나라도 외세가 아닌 나라가 없듯이 주한 미군도 분명 외국군이다. 그들은 지금 자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정말 싼 값으로 주둔하고 있는 셈이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이 땅을 떠날 것이다. 미국은 자국의 세계전략에 맞춰 한반도 정책을 펴고 그에 따라 가고 오고를 결정하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움직여주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미국은 늘 미국 편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부강하고 경제력, 문화력, 군사력 등 총체적인 국력이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됐을 때만이 과거 나라를 뺏긴 구한말과 광복 후의 상황처럼 열강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진정한 자주국으로서의 자존감과 인정은 그때 가서야 비로소 보장받을 수 있다.
어제 밤 송년회 겸해서 모인 자리에서 지인들과 나눈 미국 관련 대화 후 귀가해서 우리에게 끼친 미국의 양면을 정리해봤다. 이 주제로 학술 차원의 심층적인 담론을 펼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한다. 환언하면 이 졸문이 완전해지려면 미국의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을 논한 만큼의 비중으로 같이 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시사적인 수준에서 쓴 것이고, 위 글에서 못다 한 언급이나 미필적 缺落은 그때에 가서 다시 메울 것이다.
끝으로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나는 무조건적인 반미주의자도 아니고, 무조건적인 친미주의자도 아니다. 단지 우리나라 국익을 우선시한 합리적 실용주의자라는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
2018. 12. 23. 01:0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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