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도 유전인가? : 취중에 생각해보는 헤밍웨이의 자살 동기
1961년 7월 2일 오늘, 군사 쿠데타로 국가권력을 잡은 박정희(1917~1979)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했다. 18년 후 자신이 부하에게 총을 맞고 죽으리라곤 상상도 못한 채.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날, 태평양 건너에선 미국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최고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가 자신의 입에다 엽총을 쏘아 자살했다. 총기로 길지 않는 62년의 생을 마감한 그의 자살엔 몽환과 현실 사이의 갭을 메우지 못한 정신착란적 요소가 엿보여 道家的, 불교적 如如然然함이 있었더라면 하는 처연한 감정이 일렁인다. 한편으로는 그의 심정이 십분 공감되면서도 말이다.
헤밍웨이가 유명한 그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저자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1954년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한 동안은 1949년에 5년 먼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William Cuthbert Faulkner, 1897~1962)와 함께 미국인들의 자부심이었던 문학가로서 명성을 누리고 잘 살았다.
그런데 헤밍웨이는 왜 그다지 오래 살지도 않은 초로의 나이에 자살을 택했을까? 실패하긴 했지만 그의 외조부도 자살을 시도했었고, 부친, 형, 누이 심지어 그의 손녀도 자살했듯이 집안 내력으로서의 유전적 충동 때문이었을까? 그것만이 전부였을까?
근대 유럽인들의 자살 발생 원인을 밝히고 학문적으로 정의를 내린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껭(Emile Durkheim, David Emile Durkheim, 1858~1917)은 자살의 유형으로 ‘이기적(利己的) 자살’, ‘이타적(利他的) 자살’, ‘아노미(Anomie)적 자살’, ‘숙명적(宿命的) 자살’ 네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이 중에 헤밍웨이의 자살은 개인이 국가나 공동체에 지나치게 통합된 이들에게 일어난다는 ‘이타적 자살’ 그리고 과도한 사회적 규제로 인해 발생한다는 ‘숙명적 자살’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고, 여러 가지 동기가 착종돼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일단 뒤르껭의 네 가지 자살 유형 중엔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의 원인들이 혼재된 것에 가깝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덜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개인이 집단 내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교류가 적거나 소속 집단의 공통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살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독신자의 자살률이 기혼자의 그것보다 높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아노미적 자살은 근대 유럽 산업사회의 특징을 반영하는 자살유형으로서 개인의 사회적 기대와 그 실현 사이의 불균형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는 일상 속 기존 공동체가 무너질 때 일어나는데,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낙오된 결과 삶을 지탱할 힘을 상실한 나머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는 것이다. 뒤르껭은 유럽인들의 자살유형으로서 특히 아노미적 자살에 주목했는데, 서양인인 헤밍웨이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요컨대 헤밍웨이 개인의 사회적 기대와 그 실현 사이에 균형이 맞지 않아서 격심하게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라는 소리다. 이 밖에도 마초적 근성과 안팎이 일치하지 못한 페르소나(persona), 나이 들면서 세간의 조명이 끊어진 것에 대한 심리적 불안정, 내면 깊숙이 인자화 된 허무주의, 말년의 당뇨와 우울증 등의 병인, 글이 뜻대로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좌절감 등이 얽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단 헤밍웨이의 경우, 자살 요인으로 가력을 무시할 수 없는 거 같다. 헤밍웨이가 자살을 택한 수단은 1928년 29세에 자살한 자기 부친의 전철을 밟아 선친이 사용한 사냥용 엽총이었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생일날 어머니가 소포로 보낸 선물로 자기 아버지가 자살할 때 썼던 그 엽총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정상적인 부모로선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기억이 어린 헤밍웨이에게 그냥 무심코 지나가진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중에 헤밍웨이의 형과 누이도 자살했으니 자살 자체가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을 것이다. 심지어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1996년 7월 2일 오늘, 모델이자 영화배우였던 헤밍웨이의 손녀 마고 헤밍웨이(Margot Hemingway, 1954~1996)도 약물중독을 앓다가 42살 되던 해 그의 조부가 자살한 같은 날을 골라 자살했으니 대를 이어 자살이 지속된 것이다.
유달리 자살자가 많았던 헤밍웨이 집안사람들이 자살을 선호(?)한 것은 제각기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을 것이나 헤밍웨이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성격을 가지고 추론하면 그 집안사람들에겐 공통적으로 마음이 허무의식에 깊이 닿아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저 유명한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모두 작품 밑바닥에 허무의식이 흐르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듯이 말이다.
이 작품들 외에도 헤밍웨이가 자살을 감행할 수 있음을 시사한 건은 벌써 초기 작품인 ‘인디언 캠프’(Indian Camp, 1924년 발표)라는 단편 소설에서도 암시된 바 있다. 한 의사가 산고의 통증에 몸부림치는 임신부를 마취제 없이 수술하게 됐는데 이를 지켜본 그 남편이 아내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수술 중에 위층에 올라가서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했다. 수술이 끝나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지만 남편의 시체가 발견되자 이를 본 소설의 주인공이자 의사의 아들인 닉은 수술을 마친 그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죽는 건 힘든가요?” 아버지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주 쉬울 거야.”
이런 문학적 이야기의 전개가 있었으니 영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 문학사상 허무주의 작가로선 빼놓을 수 없이 헤밍웨이를 손꼽는 이유가 아닐까? 이외에도 유소년 시절부터 당한 성 정체성의 강요에서 받은 불만 그리고 마초적 기질, 장신의 거구와 달리 섬약한 성격을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성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한 페르소나 등도 복합돼 있었던 거 같다.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헤밍웨이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강요로 자주 여장을 강요당했으며, 여장 차림으로 지인들을 만나는 일을 경험했다. 이 때문이었는지 모친과는 평생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여성 참정권도 없던 시절이었음에도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낚시, 사냥 등을 하며 집 밖을 배회했다. 가정의 주도권이 어머니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나이 들어가면서 쇠락해지자 전직 음악가였던 잔소리 많은 부인과 자주 다퉜다. 이 때문에 과묵한 성격의 초라한 아버지와 대조되는 모친의 모습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헤밍웨이는 사냥꾼, 모험가 기질을 가진 아버지를 따랐고 평생 롤 모델로 삼았다.
헤밍웨이가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엔 소식을 듣고선 헤밍웨이는 달려갔다. 하지만 ‘노인과 바다’를 쓸 무렵이긴 했지만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을 땐 그는 “난 글을 마저 써야 한다. 돈을 부치면 가족들이 알아서 할 거다”라면서 가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헤밍웨이의 성정은 분명 남성적이었다. 체격도 성인이 됐을 때 6피트(183cm)가 넘는 우람한 거구였다. 이미 19세 때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때 적십자사의 일원으로 이탈리아 북부 호사루타 전선에서 앰뷸런스 기사로 일했으며, 종군기자로도 일한 바 있듯이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었다.
헤밍웨이가 여장을 강요한 어머니를 싫어했지만, 명석했던 데다 강인한 남성의 표본이기까지 한 아버지를 닮고자 한 것은 그의 성 정체성이 남성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도 사실은 성격이 몸집과 달리 내성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와 별개로 헤밍웨이가 일생을 산 이미지는 남성미 넘치는 모습이었다. 예컨대 그는 늘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사냥, 복싱 등 위험하고 강렬한 스포츠를 즐겼으며, 싸움도 꽤 잘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자신이 강인하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막상 정식으로 복싱 대결을 붙여주자 슬그머니 도망갔다고 증언한 지인도 있었다. 그의 사망 뒤에 그의 한 친구는 헤밍웨이의 성격은 남성답게 보였을 뿐 실제로는 겁쟁이에 울보라고 밝힌 바 있다. 아마도 그 말이 사실이라면 헤밍웨이가 평생토록 인생을 격렬하고 폭력적인 모습의 마초로 산 것도 실제 내성적인 모습을 감추려는 의도적인 행위로서 페르소나의 한 단면이었을 수 있다.
사실이었든, 가식이었든 간에 헤밍웨이의 마초적 성격은 그의 문체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평이한 단어들과 구문이 주를 이루고 있어 남성미를 느끼게 한다. 아마도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 간결한 신문체가 몸에 밴 탓이었을 것이다.
영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영문학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로 그가 꼽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나도 대학시절 영어공부 한답시고 ‘노인과 바다’의 영문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영어실력이 대단하지 않은 나도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같은 시기 읽었던 에밀리 브론테(Emily Jane Bronte, 1818~1848)의 ‘폭풍의 언덕’ 같은 작품 보다 훨씬 더 쉽게 읽힌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펴면 마치 중학교 영어교과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소리가 과장이 아닌 셈이다. 영미문학 전문가들에 의하면, 헤밍웨이의 문체는 당시 유행하던, 잡다한 수식 없는 하드보일드(Hard-Boiled Style) 대중소설들(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되는데, 암튼 그의 남성미가 문체에서도 간결함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 한 가지 자살의 동기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있다. 헤밍웨이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늙어 약해지는 자신에 대한 혐오 내지 불만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여기엔 그의 건강상태도 크게 작용된 듯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입었다. 또 말년에 가선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치기도 했다. 더군다나 당뇨병과 우울증까지 겹쳐 병원에서 요양할 수밖에 없던 신세였다.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 후유증을 일으켜서 삶의 의욕을 저하시킨 게 아닐까 싶다. 헤밍웨이가 말년에 정신착란을 일으신 것도 과거 상처로 인한 신체적인 노쇠함을 이겨내기 위해, 또 강건한 남자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냥에 더 몰두하다가 일으키게 된 것이다. 정말 그는 죽을 때까지 남성우월적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초였을까?
헤밍웨이가 자살한 이유들 중 하나가 자신이 늙어 유명세가 지속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걸 견디지 못했던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세상에 과시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 연예인이나 된 것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 인사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또 결혼과 이혼을 네 차례나 했고, 결혼 중에도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나는 등 문란한 사생활을 보여줬다. 그렇지만 이제 세상은 그에게 더 이상의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여기에다 훗날 사실로 밝혀졌지만 1940년대 헤밍웨이는 FBI로부터 도청과 계속되는 감시를 받은 것도 작지 않은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이 도청과 감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에서는 그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갔으니 스트레스는 더욱 가중됐을 것이다. 또 일설에는 헤밍웨이가 우울증 치료차 전기자극 치료를 받고 기억이 손상된 것에 크게 상실감을 느껴서 우울증세가 더 심해지면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유일한 심리적 탈출구는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무엇 보다 자살 동기로 늘그막에 쓰고자 한 작품이 지지부진해 고민해 온 것이 커다란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자살 전 몇 달 간 글을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찢고 다시 썼다가 또 찢어서 던져버리곤 했다. 이 일로 그는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다.
죽기 직전인 1961년 6월 28일, 헤밍웨이는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뒤 “이젠 써지지 않는다! 써지질 않아!”라면서 절망했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숨쉬기와 같은 것이다. 들숨날숨을 통해 부조리한 세상에 자신을 대비시켜 울분과 위안을 뱉고 토로함으로써 삶의 리비도를 유지시킨다. 그런데 글쓰기마저 막힐 땐 답답함과 무력감을 넘어 삶의 의미와 존재의의를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
병들고 늙어가는 육신, 세인의 이목에서 멀어져가는 노후생활, 이를 상쇄해줄 글쓰기도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은 자신의 내면에 총알처럼 박혀 있는 허무감과 무의미함이 꿈틀거리거나 배증될 수 있다. 그는 죽기 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현대전쟁에서 죽는 것에 전혀 아름다운 것도 타당한 것도 없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개처럼 죽을 따름이다.” 모든 것이 덧없어 죽으면 그뿐임을 자각한 심사의 표현이었을 터다.
1961년 7월 2일 이른 새벽, 헤밍웨이는 앞선 세 명의 부인 보다 가장 긴 시간을 같이 했으며, 자신에게 가장 헌신적이었던 아내가 자는 것을 뒤로 한 채 엽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의 유골은 1946~61년까지 삶의 황혼을 함께 한 아내 메리 웰쉬 헤밍웨이(Mery Welsh Hemingway, 1908~1986)의 손에 거둬졌다.
빗발이 뿌리고 바람 불어 음산한 날 오전, 헤밍웨이가 생전에 즐겨 마신 모히또 칵테일 대신 동동주 한 잔을 걸쭉하게 들이킨다. 30여 마리나 키웠을 만큼 헤밍웨이가 좋아한 고양이의 눈들이 한꺼번에 나를 향해 다가온다. 취중에 깨어보니 내가 헤밍웨이인지 그가 나인지, 여전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雨中이다.
2018. 7. 2. 13:59
구파발 선술집에서
雲靜
추기 : 음산한 날씨에 비도 내리고 해서 헤밍웨이가 생전에 즐겨 찾은 쿠바의 술집으로 안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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