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서양사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

雲靜, 仰天 2018. 3. 15. 08:05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

 

3월 15일 오늘,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이 제각기 태어나고 죽은 날이다. 한 사람은 18세기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쳤던 사람이었어. 한 사람은 오늘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사람은 오늘 세상에 태어났었지.
 
한 사람은 사상가이자 사회혁명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과학자, 이론 물리학자였지만 둘 사이엔 공통점이 있었다네. 독일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도 그렇지만, 시제마쿰 독일을 떠나 한 사람은 영국에서, 다른 한 사람은 스위스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가서 생을 마감했듯이 조국을 떠난 삶을 산 것도 공통점이야.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도 같았어.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다고? 그럼 조금 더 들어보시게.

 

전자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 넘게 인류역사에서 미증유의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노동자는 쇠사슬 이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세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The worker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s. They have a world to gain, Workers of the world, united!)고 갈파한 자였지. 후자는 상대성이론을 창시했고, 광양자 가설, 브라운운동, 특수 및 일반 상대성이론 정립 등, 인류과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192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인물일세.
 
한 사람은 누구인지 알겠는데, 아직도 다른 한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다고?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와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여. 마르크스는 1818년 5월에 태어나서 1883년 오늘 죽었고, 아인슈타인은 1879년 오늘 태어나 1955년 4월에 사망했다네.
 
두 사람이 같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시간은 불과 4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군. 그 4년도 지역이 달랐던 데다 하나는 죽기 일보 직전의 노인네였었고, 다른 하나는 강보에서 나온지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였어. 그래서 둘은 서로 알 턱이 없었고, 더구나 하는 업이 달라서 같은 시기 오랫동안, 같은 나라에서 활동했다고 치더라도 과격한 사회운동가로 알려진 혁명가와 성정이 온순한 과학자가 쉽게 조우하기는 어려웠을 것이야.
 
그런데 왜 두 사람을 엮어 같이 거론하냐고? 눈치가 빠른 '분'은 벌써 감을 잡으셨겠지만, 모르는 '놈'은 잡아 족쳐도 몰러~ 둘을 엮어서 竝提相論하고자 하는 이유는 당시 세상과 시대를 보는 눈이 너무나 유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갔어!? 그 중심에 자본주의의 비정함과 냉혹함이 놓여 있었다네. 우선, 인생 선배인 마르크스부터 기본 소개를 하고, 이어서 한참 후배인 아인슈타인에 대한 소개를 더 하고나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독일 라인 州의 프리에르 시에서 부유하고 교양 있는 변호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창시자,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 그리고 과학적 경제학의 정립자였어.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쩌고 하니 어째 좀 으스스해지나?
 
아님 ‘빨갱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가? 그런 것에 신경 쓰지마~ 요즘은 마르크스를 들먹이는 이는 경제학자들 중에서도 극소수 진보성향의 학자들 몇 빼고는 없지만, 과거 냉전 시기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마르크스 형님은 억울하게도 자신의 이론이나 진의가 잘못 전해졌거나 혹은 이념 투쟁이나 안보장사 하던 세력들에게 고의적으로 왜곡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암튼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어서 마르크스를 얘기해도 관심을 두질 않아. 오히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비인간적인 폐해 그리고 그것이 뿜어낸 온갖 악취들을 도려내고 더 나은 자본주의와 더 건강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는 요즘이야말로 마르크스 형님이 당시 고뇌했던 사회적 조건이나 문제의식, 사고의 틀, 적용이론과 비전을 더 많이 접하고 구체적으로 현실에 적용해볼 필요가 있어. 물론 당연히 그 이론들의 한계와 모순들을 같이 거론해야 하지만 말이야.
 
서론이 길다고? 아, 그래 알써, 알았으니 보채지마. 다음 소개는 아인슈타인이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들어 봤을 거다. 사실 나도 소싯적에 수학, 물리 이딴 거 골치 아파서 공부하지 않고 그림이나 그리고 운동선수질(?)이나 하곤 했는데, 결국 머리가 나빠 예술과 인문학을 택했기 때문에 상대성 이론을 전공자처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 그러니 난처하게 더 묻지는 말고 잠자코 듣기만 해.
 
내가 듣고 이해한 바로는 상대성이론이란 한 마디로 이런 거라데. 서로 같은 짓을 하면 다른 게 잘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걸 하면 다름이 잘 드러나고, 누가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같은 물리적 시간도 질적 느낌이 달라진다는 식이야.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이걸 그냥 물리학 이론에서 말하는 대로 소개하면 이래. 서로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을 관측자가 보면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원리 그리고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는 관측자의 운동에 관계없이 항상 일정하다는 광속도 불변의 법칙을 합친 것이래. 그는 이 상대성이론을 집대성해 특수상대성 이론이라는 것도 세웠다고 해. 이 이론이 적용돼 태양 같은 큰 중력을 갖는 별 가까이를 지나는 빛은 태양의 만유인력에 의해 구부러진다는 사실도 밝혀졌다지.
 
 

 
근데 그런 과학 이바구 하려고 마르크스와 아이슈타인을 끄집어 낸 게 아니야. 과학에 대해선 내게 더 이상 묻지 말고 물리학자들에게 질문해주시구랴.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긴 아이슈타인이 꽤 양심적이고 물리학자이면서도 사회에 많은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살았다는 점이야. 예를 들어 그가 했다는 아래 발언을 보면 단박에 감이 와. 인용문이 조금 길지만 한 번 봐줄만 해.
 
“나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온갖 해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거대한 생산자 공동체가 있으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서로 노동의 결실을 상대방으로부터 빼앗으려고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다. 물론 이런 투쟁은 폭력이 아니라 대체로 법으로 정해진 규칙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생산수단이 합법적으로 개인의 사유 재산일 수 있으며, 또 현실적으로 대체로 그렇다는 사실이다. (......)
   자본 사유제에 기반한 경제에서 두드러진 상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으로 특징 지워진다. 첫째, 생산 수단(자본)은 개인이 소유하고 그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이를 적절하게 처리한다. 둘째,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이런 의미에서의 ‘순수한’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특정 노동 분야의 경우 노동자들이 장기간에 걸친 치열한 정치투쟁을 통해 다소 개선된 형태의 ‘자유노동계약’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현재의 경제상황은 ‘순수’ 자본주의경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은 사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윤을 얻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과 의욕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언제라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그 때문에 거의 언제나 ‘실업자군’이 존재하게 된다. 노동자는 항상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실업 또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시장을 위축시키고 그에 따라 소비재 생산이 감소하면서 경제 상황은 큰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기술의 발전은 힘겨운 육체노동의 부담을 덜어 주기보다는 실업을 유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윤 동기는 자본가들의 상호 경쟁과 함께 자본의 축적과 활용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더욱 심한 경기침체를 가져온다. 무한 경쟁은 노동력의 엄청난 낭비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내가 앞서 언급한 개인의 사회의식도 크게 마비시킨다.
   나는 이처럼 개인의 사회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 폐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전체 교육제도도 이런 폐해로 병들고 있다. 학생들에게 과도한 경쟁의식을 주입시켜 물질적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여기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심각한 폐해를 없애는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 사회적 목표를 지향하는 교육제도가 수반돼야 할 것이다. 이런 경제체제에서는 생산 수단을 사회 자체가 소유해 계획에 따라 활용한다. 공동체의 요구에 따라 생산량을 조절하는 계획경제체제는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나눠주고 남녀노소 모두의 생계를 보장해 줄 것이다. 타고난 능력의 개발을 포함한 개인에 대한 교육은 권력과 성공을 미화하고 숭배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육 대신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 의식을 키워 주는 방향으로 이뤄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경제가 아직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같은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제대로 실현하려면 매우 어려운 몇몇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의 광범한 집중화에 비춰 볼 때 관료조직이 자만심에 가득 찬 전능한 기구로 바뀌는 것을 과연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의 권리를 어떤 형태로 보호하고 또 관료조직의 힘을 견제할 민주적 장치는 어떻게 강구할 것인가?”〔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저, 홍수원, 구자현 옮김,『아인슈타인의 나의 세계관』(서울 : 중심, 2003년), 200~203쪽.〕
 
위 글은 1945년 5월 아인슈타인이 미국의 사회주의 저널인 Monthly Review의 창간호에 실은 “Why Socialism?”(“왜 사회주의인가?”)라는 기고문에 나와 있는 것이야. 아인슈타인은 이 글에서 이렇게 결론지었어.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주의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다. 이 악을 제거하는 길은 사회주의경제를 세워 사회 전체를 위한 교육체계를 수립하는 길 뿐이다.”
 
세상에나! 아인슈타인이 이 같은 말을 했다니 믿을 수 있을까? 믿기지 않거나 마지못해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장 인류가 존경해마지 않는 아이슈타인이 ‘빨갱이’ 아녀라는 의심이 들 거야.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영락없이 '마녀사냥'으로 상대성이론 같은 업적은 이뤄질 수가 없었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 사회주의경제를 세워 사회 전체를 교육하고 이끌어가자고 하니 말이야. 뒤에서 좀 더 언급할 테지만, 이건 맛 뵈기여. 그 전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뭐가 다른지 둘을 혼동하지 말아야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이 고심한 문제의식을 이해할 수가 있다는 점을 얘기해둘게.
 
암튼 위 글은 그가 당시 자신이 살던 시대와 세상을 보고선 왜 사회주의여야 하는가를 갈파한 것이야. 그가 말한 경제적 무정부주의라는 게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이익을 빨아들이는 자본 본래의 확장성, 자기증식적 성격과 자본가의 비도덕적 탐욕을 두고 하는 말이지. 왜냐하면 당시 사회주의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는 게 아니라 국가가 시장과 임금이든, 경제계획이든 모든 것을 통제했거든. 이른바 사회주의계획경제지.
 
그런데 이런 발언이 과학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건 아인슈타인이 연구실에서만 실험기기들만 만지작거리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겠지. 그만큼 사회 돌아가는 것에도 관심이 깊었다는 소리야. 또 사회의 부조리를 보고도 못 본체 하고 넘어가는 용렬한 서생이 아니라 현실문제에 깊이 개입하기까지는 않더라도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까지 제시할 정도의 양심을 지닌, 썩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는 얘기가 된다고 봐. 자본주의에 폐해를 본 사회적 약자들이 생겨나는 당시 상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순 없었던 게 아니갔어?
 
아인슈타인의 세상 보는 눈은 어쩌면 마르크스 형님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몰라. 면밀히 검토해봐야 알겠지만, 분명한 건 마르크스의 사회, 국가권력, 역사발전에 대한 문제의식과 아인슈타인의 문제의식이 상당 부분 포개진다는 점이야. 그럼 마르크스는 왜 공산주의를 미증유의 인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했을까?
 
먼저 간명하게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보세. 인류사는 반드시 원시 채집경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시대를 거쳐 다가올 미래에는 공산주의 시대로 나아간다는 5단계의 역사발전 단계를 거치는 것이 필연이라고 본 게 그의 역사관이야. 그의 예언대로 되지 않은 게 실제 근현대 역사였지만,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할 당시에는 확인되지 않은 가설이었을 뿐이었어. 이 때 역사발전을 이끄는 동인은 유심론적인 철학, 사상, 법률 등이 아니라 물질이라고 봤지. 즉 유물론적인 계급적 관점을 적용시킨 것이야.
 
여기서 복잡한 유물론을 더 논할 생각은 없고, 그가 강조한 세계변혁의 무기는 혁명이었어. 혁명을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을 변형시키는 운동으로 본거지. 그리고 그는 혁명을 일으켜야 할 당위론 즉, 혁명의 정당성을 이렇게 봤어. 즉 사회생활은 생산수단과 생산양식에 따라 좌우된다고 보고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의 관계를 명백하게 규정할 수 있다고 본 것이야.
 
그리고 신흥 부르주아지의 지배계급은 정치제도를 통해 국가권력을 행사하고 국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낡은 정부를 전복하고자 한 정치혁명을 거치지 않고서는 낡은 사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지향한 사회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게 마르크스의 생각이었어. 요컨대 정치혁명은 광범위한 사회혁명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네.

 
마르크스 형님의 이론이나 주장에 허점이 적지 않고, 역사도 실제 그가 말한 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상이 깡그리 현실의 적실성이 전혀 없는 쓸모없는 것만은 아녀~ 오히려 세상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모순과 충돌로 설정한 것이라든가, 인간사가 자연환경적인, 심리적인, 문화적인, 역사적인 요인들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이 상호 복합적으로 얽히고설켜서 일어나는 것임에도 오직 물질만이 유일한 역사발전의 추동력으로 본 것이라든가 하는 몇 가지 허점만 배제하면 자본주의의 약점과 허점을 보완할 수 있는 내용도 많아.
 
자본주의 무한경쟁, 그로 인한 인간의 소외와 계층간의 빈부격차 등등의 문제를 해소하려면 자본에 대한 인간의 탐욕을 양심에 맡겨두지 않고 법과 제도로 제한하거나 혹은 견제해야 한다는 게야. 법과 제도로 견제하는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으면 자본가의 탐욕은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기 십상이지.

 

마르크스는 봉건시대에서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국왕, 귀족, 기독교 성직자들의 연합체인 전제국가체제를 무너뜨린 부르주아지혁명이 성공했지만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고 주장했어. 프롤레타리아가 사회혁명의 주체가 돼 역사발전의 마지막 단계인 사유재산과 착취자가 없는 공산주의를 가져올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혁명, 즉 사회주의혁명을 일국을 넘어 전 세계적 차원에서 국제적으로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
 
그는 이를 노동자의 연대에 의한 세계혁명이라고 했지. 마르크스는 자본의 독과점적 횡포가 일국만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본의 속성상 일국을 넘어 이웃 나라들, 더 나아가서 세계적 수준으로 뻗어나간다고 주장했어.

 

반면, 마르크스의 사상적 제자인 레닌(Vladimir Ilyich Lenin, 1870~1924)은 이것을 ‘제국주의’라고 했네. 노동자들이 사회의 다수가 될 때 자본가계급이 붕괴되고 공산사회의 도래는 필연이라고 했잖아. 마르크스가 세계 노동자들 더러 노동자들은 조국이 없응께 국제적으로 단결하라고 호소한 사상적 배경이지. 바로 이 지점이 아인슈타인의 눈과 마주치는 곳이야. 강대국이나 식민국가는 거개가 남의 땅을 소유하고, 남의 바다를 가로챘지. 정복 아니면 침략, 약탈 아니면 갈취로 국가의 곳간을 살찌웠어.

 

어쨌거나 마르크스는 살아생전에 노동자계급이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고, 소유제와 사유재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가 사라지고 없는 유토피아(Utopia)를 꿈꾸었어.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꿈같은 소리였어. 불가능하거나 안 된다는 의미의 접두어 U와 곳이나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topia가 결합된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토피아란 그야말로 이룰 수 없고, 다다를 수 없는 곳이야. 인간이 인간을 착취, 억압하고 국가가 합법적인 폭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폭거는 사라지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생산물을 가져가는 평등사회를 꿈 꿨다는 거 아니냐.
 
하지만 인간의 욕구나 욕망을 근본적으로 거세하지 못하는 한 인간들간의 경쟁과 소유욕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권력이 완전히 없어지지가 않거든. 권력이 살아 있는 한 인류역사상 오랜 관습인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작위적으로 없앨 수가 없기 때문이지.
 
 

마르크스는 역사가 먼저 비극으로, 다음엔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했는데, 역사가 그대로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라서 한 소리였을까?

 
그런데 마르크스 사후 마르크스가 생전에 말한, 국가가 무너지고 계급이 사라지는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이를 실현시킬 전술과 방법과 수단에서는 마르크스와 달리 생각하고 주장하는 일군의 이론가들이 있었다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논객이 칼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 1854~1938)와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이었어.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사이에는 노선 차이가 약간 존재하지만 크게 봐서 수정주의자들로 묶을 수 있어.
 
어쨌든 이 두 사람도 독일 태생의 마르크스 추종자들이었지만, 레닌과 노선을 달리하다보니 마르크스사상의 정통 계승자로 자처한 레닌과 뜨로츠키(Lev Davidovichy Trotsky, 1879~1940) 일파로부터 수정주의자로 비판당했지.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이 폭력을 배제하고 선거를 통해 의회의 다수파가 돼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꿈인 사회주의를 만들어보고자 했다면, 레닌과 뜨로츠키(이 두 사람도 혁명노선이 조금 달랐지만 여기서 그 문제까지 짚을 순 없음)는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이 제시한 의회 장악으로는 먹혀들지 않는, 비겁한 퇴보라고 비난하고 그들을 마르크스 사상을 고친, 즉 수정주의자들로 매도하면서 오직 노동자계급의 폭력만이 기존 체제와 범세계적 차원에서 자행되고 있는 제국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세계적 차원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호소했네. 그래서 그들이 일견 성공해보인 것이 바로 1917년 10월 소련에서 일어난 이른바 볼셰비키의 ‘10월혁명’(October Revolution)이잖아.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은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이 두 사람 사이에도 조금씩 생각이 달랐지만, 훗날 그들의 사상과 주장을 추종하던 자들이 레닌의 지도 하에 성공한 볼셰비키혁명으로 들어선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를 주창했는데, 오늘날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이나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당들이 모두 이 수정주의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는 거지.
 
아인슈타인은 인간에 대한 계급적 차별을 부당한 것으로 봤어. 사회적 평등, 개인의 자유, 개체의 독립성과 민주주의를 추구하면서 이상적인 평등사회를 갈망했지. 그래서 그는 1930년대 세계공황을 개탄했는데, 그게 다 자본가들의 농간이라고 봤기 때문이야. 그가 임금, 노동시간 규제, 독점 산업에 대한 가격규제 등등의 면에서 정부개입을 찬성하고 나선 이유였어.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바랄 게 없으니 행복하다는 아인슈타인의 물질에 대한 삶의 자세는 불교의 무소유, 도가의 無作爲의 경계를 연상시킨다.

 
아인슈타인이 사회주의자의 길에 발을 들여 놓은 건 19~20세기에 걸쳐 유럽사회와 미국 사회에서 자본과 자본가들의 독과점이 만들어낸 참혹한 실상이었어. 유럽에선 기업들이 임금을 줄이고자 어린 10대 초반의 아동, 여성들을 동원해 혹사시켜 임금은 적게 주면서 흡혈귀처럼 노동력을 착취한 건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잖아.
 
미국에서 상위 1%가 전체 국민소득의 20% 가량을 차지했을 정도로 독점기업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들은 생활이 처참할 정도로 빈궁해졌어. 미국이나 한국이나 할 것 없이 21세기인 지금은 이 보다 훨씬 더 하지만 말일세.
 
여하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마련돼 있지 않는 상황에서 폭발한 대공황은 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든 가운데 노동자들만 벼랑으로 몰렸어. 이걸 직접 목도한 아이슈타인은 자본주의 스스로는 이러한 전대미문의 위기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본 모양이야. 그가 평생 동안 부와 출세에 대해 거부감을 표출하고 소박하고 분수를 지키는 삶이 바람직하다고 본 배경이지.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자본가계급의 독과점을 없애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로 가는 듯이 보였던, 그래서 자신의 소박한 이상이 실현될 듯해 보인 소련의 혁명을 찬양했어. 그가 레닌이 몰아부친, 같은 소련공산당원임에도 반대파인 멘셰비키에 대한 볼셰비키들의 비정한 탄압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레닌에 대해서만큼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 “그와 같은 인간들은 확실히 인류 양심을 보존해주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네.
 
당시 네루와 같은 인도주의자, 평화주의자, 그리고 소련공산당의 국익우선 정책을 역설한 레닌의 ‘반제통일전선’의 실제 혁명전술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코민테른 내 소수 약소민족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한 인도 출신 공산주의자 로이(Manabendra Nath Roy, 1887~1954) 같은 세계주의자를 포함해 전세계 식민지 해방 투사들이 볼셰비키들과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혁명과 초기의 소련을 긍정하고 동경했지.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당시로서는 역사상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10월혁명이 거둔 급진성과 해방성에 자신의 시야를 고정시킨 점이야.
 
대체 10월혁명에서 뭐가 달라졌길래 급진성과 해방성 어쩌고 하지? 정말 내가 봐도 당시 레닌과 그의 후계자 스탈린이 처음에 취한 일련의 사회주의 정책 결과 소련이 거둔 성과는 정치체제문제와 민족문제에서부터 개인의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넓고 다층적인 것이었어. 예를 몇 가지만 들어 볼까?
 
가장 눈에 띄는 건 짜르 전제 체제가 무너지고, 그 체제를 지탱해오던 자본가 계급의 독과점 체제가 붕괴한 것이라네.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 유럽의 식민지 모국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같은 후진국 민족들을 모멸 차게 차별했고, 식민지에서 법적으로 백인과 비백인들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현지 식민지인들에 대해 엄청나게 차별 대우를 하고 있었음에 반해 레닌은 서방 열강의 식민지국가들에게 보란듯이 신생 노농국가이자 소비에트 러시아연방, 즉 소련정부는 식민지를 모두 철폐한다고 선언했지.
 
그리고 국내에서도 짜르 러시아 체제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유태인인 트로츠키나 시골 그루지야 촌놈인 요시프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도 당내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기에 세계 약소국 노동자들에겐 레닌정권이 치켜든 “민족차별 철폐”, 민족간 평등이라는 슬로건의 진정성을 보여줬던 것이지. 이 모든 것은 국가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들이 급진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였어.
 
사회정책 면에서도 소련정부의 급진성이 마찬가지로 나타났어. 같은 시기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부유한 열강에서도 무상의료나 무상교육은 꿈같은 것이었지만, 서구 열강이 가난한 독재국가라고 조롱한 소련에서는 벌써 손을 대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 서방 열강들에게 짜르 정부가 진 대외 부채를 모두 갚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엄청난 적대감을 유발시킨 레닌정권이 빈곤할 수밖에 없었는데도 말일세. 또 평등사회를 만들겠다는 기존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해주고 남녀의 완전한 평등도 법제화했어.
 
이는 동시대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 선진국이라고 뻐긴 영국, 프랑스 등과 확연히 비교되는 것이었어. 여성은 물론, 여성 투표권 쟁취 투쟁을 지지해온 많은 지식인들과 사회운동가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선사했다네. 영국은 여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게 아마도 1928년이었을 걸?!...아동과 여성들을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프랑스도 1946년에 가서야 겨우 여성 투표권을 허락해줬잖아.
 
우리가 앞에서 본 그의 장문의 인용문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아인슈타인이 사회주의를 찬양하고 레닌을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일련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성과들일 게야. 그는 이걸 보고 한 마디로 시쳇말로 “뻑 갔어!” 그래서 자본주의는 필경 무너질 거라고 예언했어. 또 그는 시민권과 자유언론에 대한 강력한 후원자로 자처하기도 했지.
 
이러한 좌파적, 반정부적 성향 때문에 그는 미국 FBI의 감시대상, 즉 요즘말로 하면 요주의인물이었어. FBI는 1933년 아인슈타인이 3번째로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부터 그에 관한 서류를 모아 파일을 만들기 시작해 나중에는 1,427쪽에 달한 방대한 분량이 됐다는데, 주로 그의 사회주의, 평화주의 발언에 관한 것 그리고 사회주의 단체와 어떻게 관련돼 있는가 하는 것을 캐보려고 한 의도에서 만들었다고 해.
 

어때? 이 글을 계속 읽어나갈 수 있갔어? 글이 재미도 없는 것이 골치만 아프면서 너무 길지 않아? 뭐, 지루하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할 말이야 산더미 같이 많지만, 자~ 그만 접고 대략 이쯤에서 매듭을 짓는 게 맞다고 봐. 몇 가지만 더 얘기하고스리 고만할 게.

 
 

아인슈타인의 도가적인 그런 생각에 끌려서 워싱턴을 찾은 김에 그를 찾아가서 다시 그를 떠올려 봤다.

  
아인슈타인은 군계일학의 출중한 과학자로서 우주의 신비를 풀어낸 세기적인 학자였고, 사회주의에도 상당한 지지를 보냈지만, 미래에 다가올 사회변화에 대해선 제대로 예측하지는 못한 셈이라고 봐야겠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리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으니 말이야.
 
예컨대 지금까지 인류는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경제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자본주의는 수정주의자들의 노선을 밟아서 국가가 주도적으로 빈부격차를 줄이면서 중산층을 육성하고 사회복지 체제를 갖추면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어. 이처럼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사실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기억해야 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이론을 무조건 죄악시 하지 말고 그의 사상과 주장 중에는 신자유주의가 극성을 부리면서 인류의 빈부격차를 19세기 중반 수준 이상으로 벌려 놓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상, 주장도 완전무결한 게 어디 있겠는가? 각 사상과 주장의 장단점을 상보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사진은 프랑스공산당이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제150주년을 맞아 기관지의 표지로 실은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의 수정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구미 그리고 많은 면에서 미국을 열심히 추종하고 있는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에선 198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지구촌 전체를 강타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심하게 빈부격차를 벌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범위에서 환경과 생태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수준이 되는 등 각종 문제들을 양산하고 있어.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이 환생한다면 이걸 보고 뭐라고 할까? 두 사람이 찬양한 사회주의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체제를 압도하지는 못하고 하나의 길고 긴 실험으로 끝났지만, 특히 마르크스가 제시한 몇 가지 주장은 지금이라도 다시 끄집어 내 자본주의의 폐단과 해악을 해소하기 위한 처방전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2018. 3. 15. 07:48
구파발에서
雲靜 初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