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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파워’ 개념에서 본 나폴레옹 전쟁 시기 이베리아반도 전쟁

雲靜, 仰天 2012. 3. 31. 06:33

‘스마트 파워’ 개념에서 본 나폴레옹 전쟁 시기 이베리아반도 전쟁

 

서상문(중앙대학교 강사)

 

1. 들어가는 말

 

최첨단 무기 장비의 출현과 전쟁수행시의 복잡다기한 다층적 고려요인으로 인해 현대전의 양태가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기존의 하드 파워나 소프트 파워의 어느 한쪽만으로는 전쟁에서 패하기 십상이고, 이 둘의 치밀하고 탁월한 조합 및 운용만이 승리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전쟁지도 또한 스마트 파워(smart power)의 운용이 한층 더 요구되어지고 있다.

 

‘스마트 파워’란 상대를 제압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힘, 즉 권력을 얻기 위해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의 적절한 배합 혹은 조합으로서 두 파워를 모두 운용해 목표를 달성시킬 수단 및 도구들의 모음을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역사상 스마트 파워의 발휘 여부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경우는 부지기수다. 나폴레옹 전쟁(1800~1815) 기간 중의 이베리아반도 전쟁(1807~1814)도 그 중 하나다. 이 전쟁은 영국의 웰링턴(Arther Wellisley Wellington, 1769~1852) 장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함으로써 프랑스군이 이베리아반도 및 러시아의 반프랑스 동맹군으로부터 포위당하게 된 결과를 가져왔으며, 나폴레옹(Bonaparte Napoleon, 1769~1821)의 모스크바 원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스마트 파워 개념에서 이베리아반도 전쟁의 승패요인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전사적 시사점이 무엇인지 교훈을 도출해 보도록 하겠다.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세계전사에 한 획을 긋게 된 웰링턴 장군
나폴레옹전쟁 요도(사진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2. 이베리아반도 전쟁의 배경과 과정

 

이베리아반도 전쟁의 배경은 두 가지다. 크게는 1803년 5월 16일 프랑스혁명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영국왕이 취한 ‘대륙봉쇄정책’에 대항해 나폴레옹이 결행한 영국봉쇄 정책이다. 1783년 이래 영국과 프랑스가 벌여온 경제적 패권다툼의 연장선에서 영국은 도버해협과 북해로 통하는 프랑스항구들을 봉쇄하려고 한 것이다. 작게는 나폴레옹이 영국봉쇄의 일환으로 영국의 對프랑스 동맹국인 포르투갈을 포함해 이베리아반도 전역을 장악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항구들과 함께 영국과의 무역거래가 이루어졌던 유일한 통로였다.

  

해군력의 미비로 영국본토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 칙령’의 발표와 함께 북해―지중해―흑해 입구의 다다넬스 해협에 이르는 대규모 대륙봉쇄를 단행했다. 영국의 주된 무역판로인 유럽대륙의 고객을 끊어 영국의 은행과 산업, 무기제조를 와해시키려는 의도였다.

 

 

알프스산의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고 있는 나폴레옹의 초상화(루이 다비드작). 실제는 말을 탄 게 아니라 노새를 타고 넘었다.

  

그 전에 나폴레옹은 먼저 포르투갈 해군을 탈취할 목적으로 휘하의 쥐노(Andoche Junot) 장군에게 1만 4,000명의 병력으로 스페인점령에 이어 포르투갈로 침공해 1807년 12월 1일 수도 리스본을 점령케 했다. 이에 영국은 1808년 5월 2일 즉각 무기, 장비와 자금을 포르투갈과 스페인 게릴라군에게 지원하는 한편 8월 1일 웰링턴 장군을 지원군 사령관으로 한 1만 7,000명의 병력을 리스본 북쪽에 상륙시켰다.

 

한편 프랑스군의 스페인 진주를 승인한 스페인국왕에 반대한 봉기군은 별도 정부를 구성했고, 전국에 걸쳐 게릴라전을 벌였다. 수도 마드리드 점령 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Joseph Bonaparte)를 스페인 왕으로 앉혔다.

  

웰링턴군은 스페인 게릴라들의 협조하에 8월 21일 리스본에 주둔한 쥐노군을 격퇴한 데에 이어 9월 프랑스군을 스페인 북부의 에브로 강 선으로 몰아냈다. 영국군의 공격을 피해 조제프까지 마드리드를 떠나게 되는 위기상황이 되자 나폴레옹은 11월 5일 19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친히 스페인으로 출정해 몇 주에 걸쳐 8만 명의 스페인 정규군을 모두 제압했다. 그리고 12월 4일 마드리드를 수중에 넣고 도피해 있던 조제프를 다시 불러들였다. 나폴레옹은 점령군 지휘관들에게 저항세력을 뿌리 뽑으라고 지시한 후 1809년 1월 1일 파리로 돌아갔다.

  

그 후 술트(Nicolas Jean De Dieu Soult), 마르몽(Auguste-Frederic Louis Viesse de Marmont), 마세나(Andre Massena)군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군과 웰링턴 및 무어(John Moore)장군이 이끈 영국군은 웰링턴이 최후의 반격을 시작한 1813년 5월 이전까지 리스본과 북부 항구 포르투, 토레스베드라스 축선과 스페인 북부 등지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했고, 마드리드를 주고 빼앗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한 때 사라고싸가 프랑스군에게 공략됨에 따라 스페인정부가 투항했다.

 

반격에 나선 웰링턴은 1813년 5월 17만여 명의 병력으로 재차 스페인을 공격해 약 20만 명의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마드리드를 재탈환했다. 이어서 프랑스 공격을 개시한 그가 마침내 1814년 4월 10일 프랑스군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완전히 이베리아반도에서 내쫓자 이베리아반도 전쟁이 끝났다.

 

3. 승패요인 분석

 

나폴레옹군이 이베리아반도 전쟁에서 패한 원인은 소프트 파워상의 오류, 즉 국가전략적 차원의 동맹국 운용면에서 트라팔가 해전의 여파로 스페인을 프랑스 편으로 묶어 놓지 못한 구도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베리아반도로까지 확대한 실책이다. 이는 영국이 프랑스의 동맹국인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황제를 설득해 영러 동맹을 맺은 것과 대조된다.

 

나폴레옹이 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스마트 파워를 발휘했다면 스페인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 편에 서게 됐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제해권 확보에 실패한 프랑스군의 하드 파워에서 비롯됐는데, 제해권의 미확보는 복합적인 세 가지 연쇄적 사태로 이어졌다.

  

첫째, 나폴레옹에게 영국봉쇄정책을 강행하게 만든 계기를 제공했다. 이 정책은 영국을 봉쇄하면 영국이 유럽대륙에 상품을 수출할 수가 없게 돼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나친 낙관론에 근거한 실책이었다. 또한 나폴레옹이 프랑스 위성국들에게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서만 무역을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프랑스와 나폴레옹에 대한 불만을 가중시켜 프랑스 저항 세력이 생겨나게 만든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원인이었다.

  

둘째,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정책이 자신의 운신 폭을 좁힌 족쇄가 돼버린 점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은 상대적으로 운신이 자유로웠다. 마음먹기에 따라 전쟁을 할 수도 있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베를린칙령을 공표함에 따라 스스로 그 칙령에 예속됐다. 이로 인해 동맹국들에게 자신의 대륙봉쇄령이 준수하도록 하거나 혹은 효과를 내게 하기 위해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해야 했고, 결국 1812년 6월 러시아원정까지 결행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 배경이 됐다. 

  

셋째, 나폴레옹이 스페인점령 초기 스페인내 정파간의 갈등을 중재해서 평화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고, 스페인 민중들을 과소평가해 프랑스점령군의 약탈과 만행을 묵과한 오류를 범하게 했다. 그 반대였더라면 명분 없는 반도점령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지 않음으로써 무용하게 병력을 너무 많이 잃지도 않게 돼 심각한 병력부족 상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저항운동이 낳을 영향 및 파장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영국에게 후방 보급로를 허용해주게 돼 영국군의 교두보가 마련됨과 동시에 포르투갈군과 스페인 반군들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결국 나폴레옹의 대륙봉쇄정책이 스스로 전쟁을 이베리아반도로까지 확대하게 만들어 이베리아반도와 러시아에서 동시에 2개의 전장을 가지게 됨으로써 남북으로 포위당하게 된 형국을 초래한 셈이다. 웰링턴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것은 나폴레옹의 무리한 러시아원정과 함께 나폴레옹왕정의 종말을 앞당긴 원인이 됐다. 

  

영국군의 군사전략적 승리요인은 웰링턴의 전술적 선견지명과 “知彼知己 百戰不殆”의 예지가 결합된 리더십에 있었다.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경유해 내습할 것을 예견한 그는 미리 방어 전략을 세워 리스본 북부의 토레스베드라스에 견고한 보루를 구축했던 것이 주효했다. 세 겹의 산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은 높이가 약 600m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지대였지만 산맥이 해안에서 급하게 멈춰 서있어 지세는 험준한 편이었다.

 

웰링턴은 포르투갈의 협력을 얻어 이곳에서 비밀리에 1년 반의 시간을 들여 반영구적인 성을 쌓아올렸다. 웰링턴군 격퇴임무를 띠고 이곳에 당도한 프랑스군의 명장 마세나가 그 축성의 견고함에 놀랐을 정도였다. 마세나는 6만 5,000명의 병력으로 토레스베드라스를 에워쌌지만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웰링턴이 포르투갈 내 프랑스군을 일소할 수 있었던 데는 이곳을 근거지로 후방의 해군으로부터 보급을 받으면서 수시로 전진, 후퇴를 유연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병사의 충원, 수송, 무기 장비, 전쟁물자의 확보 및 지원 등 전쟁 승패를 좌우하는 후방지원의 확보 여부가 이베리아반도 전쟁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병참의 원활성 여부는 양편이 두드러지게 비교된다. 프랑스군에 편입된 프러시아, 이탈리아 등의 프랑스 동맹군은 식량부족, 성병이나 감염성 이질, 위생이나 의료시설의 미흡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사망률이 높았다. 

  

이에 반해 영국군은 보급품 공급에서 유리한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웰링턴은 영국 해군이 건재하는 한 병력충원은 물론 탄약, 식량 등의 보급을 얻을 수가 있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영국군에게는 해상이 열려 있었고, 영국 본국과 통했기 때문에 보급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웰링턴은 안전한 항구에 배치한 통신부대를 통해 효과적으로 병참과 신병을 보충 받았다.

 

게다가 그는 포르투갈 민중 대부분이 나폴레옹군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물자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세나군에게 동절기에 더해 식량난까지 겹치게 해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의 근거지로 물러나도록 강요한 원인이 됐으며, 웰링턴이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 내부로 나폴레옹군을 압박할 수 있었던 필요조건 중의 하나였다.

  

웰링턴은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의 적정 및 전략, 전술을 심도 있게 연구했고, 연구가 실제 전투 목적달성에 수렴되도록 스마트 파워를 발휘했다. 웰링턴이 “프랑스 육군은 충분한 경험과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들은 공방임과 동시에 종대다. 나는 여기에 횡대로 대항해 반드시 승리해 보이고야 말겠다”고 언명하면서 전투상황과 지형 등을 고려해서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한 것이 좋은 예다. 

  

또한 그는 프랑스군이 행군시 식량을 2, 3일 분량 밖에 휴대하지 않고, 부족분은 주로 현지조달로 해결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실제로 나폴레옹군은 급여가 충분치 못했으며, 운송수단도 없어 늪이나 강물을 마셔야 할 정도로 식량배급이 부실해 현지에서 도둑질이나 강탈로 식량을 조달했다. 말들의 사료, 군화, 군복, 텐트와 야영장비 역시 부족했다. 웰링턴은 치밀하게 사전 스페인국경에서부터 포르투갈 영내에 이르는 전역에 쌀 한 톨, 물 한 방울도 적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포르투갈 정부가 협조한다는 약속을 받아 놓았다. 

  

병력 보충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사상자를 내선 안 된다고 생각한 웰링턴은 주도면밀하게 작전계획을 세워 체계적으로 실행했다. 방어선과 공격선을 중심으로 전진과 후퇴를 되풀이하면서 적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펼쳤는데, 그것은 적의 보급상태를 감안한 대응이었다. 공격하기보다 지구전으로 적의 붕괴를 기다리는 게 최선의 방책이라고 믿은 웰링턴은 먼저 공격하지 않고 적이 공격해오도록 유도하는 전술을 구사한 것도 마찬가지다.

 

마세나의 10만 대군이 진격해오자 그는 적과 접촉은 유지하되 전투는 하지 않고 전술적으로 후퇴했다. 마세나 군이 후퇴했을 때도 적 후미에 밀착해 추격하면서 전투는 피하고 적군이 식량보급을 받을 수 없는 초토화된 농촌지역으로 유인한 후에 공격했다. 이것은 마세나군이 식량부족으로 하는 수 없이 프랑스로 철수하게 된 요인이었다. 

  

여기에다 프랑스군에게 병력을 치안과 질서유지, 주둔지 방어와 병참선 보호를 위해 투입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전체 프랑스군의 전력 약화에 크게 공헌한 스페인 게릴라들의 저항이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다 준 한 계기가 됐다. 게릴라들이 이베리아반도 전쟁 동안 프랑스군에 입힌 인명 피해는 약 15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전체 나폴레옹전쟁 기간 중 프랑스군 사상자의 절반에 육박하는 수치다. 훗날 나폴레옹 자신이 스페인에서의 실패가 일생일대의 실패였다고 회고한 대로 스페인 게릴라들은 프랑스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치명적인 함정”이었던 셈이다. 

  

한편, 전쟁환경면에서 나폴레옹군은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결함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프랑스 국민들이 염전심리 상태에 있었고, 특히 처참했던 1812~13년간의 전투들로 국가재정이 고갈된 뒤부터는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더군다나 프랑스 장군들은 매사에 의욕이 없었고, 승리의 의지나 바람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우체국 소인 검사자”(post-office inspector)처럼 임무를 수행했다. 또 장군들간에 경쟁의식이 작용해 전투시 상호 협조마저 원활하지 못했다. 이것은 한 지점에 힘을 응축하고 부대를 이루는 여러 소부대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적을 분산시키기 위해 빠르게 기동하는 나폴레옹의 전술적 장점이 후기로 갈수록 제대로 발휘되지 않은 이유였고, 이것은 보급 실패로 더욱 상승작용을 했다.

 

4. 교훈 및 맺음말   

 

이베리아반도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은 제해권 장악과 그리고 그것을 실제 전투수행에 이점으로 살릴 수 있도록 스마트 파워를 잘 운용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영국군의 승리는 웰링턴이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해군의 후방 병력 및 보급물자 지원을 매 전투시 효율적인 지형지물 이용, 기동전과 포사격 지원에 유리하도록 결합한 스마트 파워에 힘입은 것이었다.

 

반면, 나폴레옹이 패한 것은 프랑스군이 약했거나 영국군이 특출하게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웰링턴이 영국 해군의 제해권 장악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스마트 파워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해권의 미장악에서 파생된 병참문제의 취약성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컨대 러시아와 이베리아반도의 두 전장을 유기적으로 파악하거나 이 전투에 필요한 병력, 보급품의 소요를 전체적으로 예측하지 못해 그에 따른 가용자원 및 획득 가능한 보급품과 그 양, 조직과 행정, 수송 및 병참선 확보에 실패했다.

 

따라서 이 전쟁은 나폴레옹이 “해군의 운명이 세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고 한 자신의 예언대로 해군력의 열세 때문에 영국을 제압하지 못한 결과 자신과 프랑스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제해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역사적 사례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재확인할 수 있는 교훈은 동일한 단위의 전쟁에선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상보적으로 연결하면서 각 전투상황을 유기적으로 통합 지휘하는 스마트 파워를 발휘할 수 있도록 치밀한 숙고가 필요하고, 그러한 전쟁수행 환경을 조성하는데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해․공군력의 강화와 함께 다양한 상황에 卽應할 수 있는 육․해․공군의 유기적이고 총합적인 합동성(jointness) 강화로 해결될 것이다.

 

또한 스페인 게릴라들의 역할에서 보듯이 비정규전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고 평시에도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될 미래의 비정규전 및 게릴라전에 대비한 제반 준비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위 글은『국방리더십 저널』, 제51호(2011년 9월 22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