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를 능멸해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
서상문(한국역사연구원 상임연구위원 겸 김구재단 김구포럼 학술기획위원)
‘나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금언이 심한 모욕을 당했다. 이 말은 동양평화를 유린하고 대한제국의 식민화를 획책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안 의사께서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 2시간 전 일본헌병 간수 치바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준 유묵의 글귀다.
뤼순(旅順) 감옥 수감 중 검찰을 오간 안 의사를 호송하면서 그의 평화애호사상과 고결한 인품에 감복해 안 의사를 기릴 상징물을 부탁한 것이다. 안 의사를 숭앙한 치바는 죽을 때까지 매일 그의 명복을 빌면서 살았다.
이 유묵은 뜻이 간단해 보이지만 언중에 담긴 의미는 결코 공당의 원내대변인이 일개 병사의 탈법을 감싸기 위해 정무적 판단 없이 천박하게 인용할 만큼 가볍지 않다. 현직의 법무장관 아들이 과거 카투사군복무 시절 전화 한 통화로 두 차례 병가와 정기휴가 23일을 부대복귀 없이 단번에 사용한 걸 두고 그 아들이 수술까지 받으며 군인본분을 다 했다면서 안 의사의 “나라 위해 헌신”하는 “군인의 본분”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고 호도했다.
유력정치인 아들이 아니고선 상상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특혜”를 정당화하고 그 아들을 감싼답시고 안 의사의 말씀을 끌어다 썼지만 text와 context도 분간하지 못했다. 비유의 맥락이 전혀 다르고, 격도 맞지 않다. 공당 대변인이 갖춰야 할 역사지식과 역사의식의 천박함을 스스로 세상에 폭로한 셈이다. 자신의 비유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기나 할지 정무적 판단능력마저 의심된다. 그런 무지는 맥락적 이해에 치중할 수 없는 우리 역사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대변인 본인의 역사지식 및 역사의식의 불비 탓이다.
일본군인의 부탁에 안 의사는 왜 하필 군인본분을 강조한 글귀를 써줬을까? 여기엔 절대성과 상대성을 지닌 중층적 의미가 내재돼 있다. 하나는 비록 적군이지만 국가 민족을 넘어 개인차원에선 치바를 결코 탓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던 안 의사의 이러한 국가 민족을 초월한 절대적인 사랑의 실천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승천할 때 보여준 정신에 부합한다. 예수가 빌라도 총독 앞에서 표변해 “예수를 죽여라!”라고 광기로 외친 민중들 그리고 자기 손발에 못을 박아 사형을 집행한 간수들을 보고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한 말과 상통한다.
다른 하나는 안 의사 본인을 얘기한 것이다. 자신이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이토 개인에 대한 증오와 원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이토가 아시아평화를 유린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던 제국주의적 패도의 설계자이자 집행자였기에 대한의군 의병참모 중장이라는 신분에서 그를 단죄했다는 의미였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의 군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군인의 본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민족의 고통으로 자기만 잘 살겠다고 남을 짓밟는 침략자를 응징한 義의 실행이었다.
과연 추 장관 아들의 탈법행위가 인류보편의 사랑실천이었고, 나라 위해 일신을 버린 義의 실천이었는가? 보편적 사랑과 의를 위해 몸을 던지기는커녕 극히 일신상의 개인이익에 불과한 휴가를 찾아먹기 위해 “엄마찬스”를 쓴 게 아닌가? 개인차원의 그런 일탈이 안 의사처럼 목숨까지 던져서 나라를 구한, 군인의 본분을 다한 행위가 아님이 명백한 이상 그 대변인에게는 안 의사를 능멸하고 모욕한 죄를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여론이 악화되자 바로 글을 내리고 일단 사과를 했지만 바닥이 드러난 공당 대변인의 무지가 어디 사과 한 마디로 메워질 일인가? 현행법으론 어쩔 수 없다 해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정치인의 역사지식과 역사의식은 개인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공당 대변인 정도의 정치인이라면 애초부터 역사의식과 균형감각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 앉아선 안 된다. 새털만큼 가볍고 경박스런 그런 빈천한 역사지식과 정무감각으로 대변인역할을 감당해선 안 된다.
여야를 가릴 게 못 된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두 거대 정당이 사이비진보와 엉터리보수인 이상 서로 다르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들이 비판하고 질타해오던 상대의 위법을 똑 같이 해댄다. 정치인 자질 이전에 사람으로서의 자기성찰이 체화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無邪心은 기대할 바도 못 된다. 나라가 제대로 미쳐간다.
2020. 9. 21. 15:05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위 글은 2020년 9월 21일자 『경북매일신문』에도 칼럼으로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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