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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과 정의의 회복이 없다면 한국사회는 미래가 없다! ③

雲靜, 仰天 2018. 10. 17. 08:32

공정성과 정의의 회복이 없다면 한국사회는 미래가 없다!

 

서상문(공정사회신문 주간 겸 공정사회운동중앙회 부회장)


윗물이 맑지 못하니 아랫물이 맑을 리가 없다. 불공정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비리와 부정은 정치권 외에 일반 조직사회에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 사회 전체가 흐려서 눈이 따가울 지경이다. 최근 일부 언론의 여론조사와 언론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70%가 우리 사회가 불공정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경기도 K시 공무원노조가 2,700여 명의 전 직원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687명의 62%가 조직평가나 승진이 불공정하다고 답변했다. 민선 6K시 승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요인을 묻는 질문엔 72%학연, 지연, 혈연 인사라고 답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도시만 그런 게 아니라 상황은 전국의 다른 지자체도 엇비슷할 것이다.

 

 

연금 수령액이 이처럼 차이가 난다는 자체가 우리사회의 비합리성과 불공정성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과연 국가 전체의 공정성 제고를 위해 자기가 받는 연금을 조금 삭감하자고 하면 공무원들 중에 과연 몇 명이 찬성할까? 공무원을 지낸 나는 어떡하겠냐고? 나는 기꺼이 응하겠다!

 

한 사회의 부정과 불공정이 어찌 정치인, 공무원, 기업, 판검사 등등 이른바 힘 있는 자들만의 문제인가? 권력을 부리면 그기에 호응해서 남 보다 더 약싹 빠르게 이익을 취하고자 영합하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일반 국민의 의식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닌 것이다.

 

적지 않은 시민들은 공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리 옳은 얘기를 해도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가지 않거나 자기에게 잘 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주장하는 이를 뒤에서 험담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들은 자연 생태계 및 환경문제, 선거, 각종 정책의 시행 등의 공적 일에는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을 경우엔 대부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방관자로 지낸다. 방관자는 바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소극적 협력자이자 조장자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냉소주의, 개인이기주의가 정의와 공정성을 가로 막는다.

 

법을 엄정하고 공정하게 지켜서 사회를 맑고 투명하게 만들어 국가경쟁력을 키우는데 일조하면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는 드물다. 오히려 법을 제대로 지키면 도리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법의 허점을 피하거나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슬그머니 불법을 저지른다. 그래놓고선 자신의 불법행위는 잊은 듯 타인이나 정치인의 비리를 비난하고 욕을 해댄다. 사무실 수리, 각종 물품대금을 카드로 지불하겠다고 하면 주인은 부가가치세를 내야 된다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이런 예는 전국적으로 거의 보편화 돼 있다.

 

또 어촌에선 치어를 보호하기 위해 어족의 종류에 따라 잡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어기(해삼은 7월 한 달, 방게는 4월까지)가 정해져 있다. 그럼에도 어민들, 특히 잠수기 어민들은 불법인줄 알면서도 금어기에 방게나 해삼, 전복 등을 마구 잡이로 채취해 팔아 100만원을 벌어 벌금 30만 원을 갚는 쪽을 택한다. 법이 엄정하지 않고, 경찰, 공무원 등 감시 감독하는 공기관의 단속도 느슨하고 헐렁하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일들은 전국 도처에 비일비재하다.

 

불공정과 불평등, 부정과 비리들은 약삭빠른 일부의 배만 불려주게 돼 결국 최종적으로는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로 나타나고, 그것이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시장경제의 자유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계층간 소득과 자산의 격차 확대가 불가피하다. 즉 소득격차에 따른 빈부격차와 계층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소리다. 그런 나라일수록 경쟁이 치열해져 시장경쟁에서 승자는 독식의 형태가 되어 소수가 된다. 이것의 실증적인 예는 이미 심각한 상황에 접어든 한국의 빈부격차인데, 한국이 2000년대에 이미 30여개의 경제협력개발기구 소속 국가들 가운데 빈곤층(전 국민 가운데 소득이 중위소득의 절반 미만인 계층)이 여섯 번째로 많은 나라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은 멕시코, 스위스, 미국에 이어 네 번째로 중위소득과 빈곤층의 평균 소득의 차이를 나타내는 빈곤격차(poverty gab)가 큰 나라다. 하위 10% 소득 대비 중위소득 비율이 2.5배 정도로 멕시코, 미국, 터키에 이어 네 번째다. 이마저도 한국의 불평등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처럼 보이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통계청 자료는 최상위 계층의 소득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평균 소득이나 중위소득 등은 국세청 자료 보다 상당히 높게 잡혀 있는데 통계청이 이 같은 표본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각종 불평등 관련 지표를 산출해내고, 그것을 경제협력개발기구에 보고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책의 방향 및 이념적 지표 차원에서는 광복 후 지금까지 잘 살아 보자는 일념 하에 70년 이상 자유 민주만 강조하고 평등을 등한시한 결과다.

 

계층 간 격차의 확대는 곧 불공정의 원인이 되는 악순환이 되거니와 사회 저층의 전반적인 삶의 질도 낮아진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외국인투자들에게 거의 모든 부분에서 국부를 유출당하고 무장해제를 당한 상태였다. 국내적으로 자본시장이 대폭 확대되었고, 각종 규제완화와 민영화가 크게 진행됐으며,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대폭 확대됐다.

 

게다가 수출입 비중이 높아져 대외적으로는 세계화의 미명하에 국내 시장으로 밀고 들어온 외국자본세력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형태다.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임에 따라 실업, 비정규직, 빈곤, 양극화로 내몰려 생활수단의 상실, 건강악화, 가정해체, 사회안전망의 부재로 인해 자살하는 사회하층민들이 해마다 평균 13,000명이나 돼 OECD국가 중 부동의 1위를 지켜오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사회공동체가 다 무너지고 남미 국가들이 되거나 혹은 19세기 유럽 사회로 되돌아가 새로운 형태의 사회변혁 상황이 재연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정말이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대체 불가능한 위대한 경제학자로 평가되는 미국의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z)가 지적한 경고를 무시해선 안 된다. 부유한 자들이 정치적 힘을 이용해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기업에게 과도한 이익을 몰아줄 경우 긴급한 수요처에 투입돼야 할 정부세입이 사회 전반의 복지향상에 쓰이지 않고 소수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또 남미 국가들이 공정성과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결과 그로 인해 야기된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이 수십 년 동안 내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높은 범죄율과 사회불안에다 사회적 결속을 이루지 못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그가 강조한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진지하게 공정성과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 왜 절박하게 필요한 과제인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그에 따른 전체 국민들의 인식을 새로 하도록 해야 할뿐만 아니라 법과 제도도 그에 상응하도록 재수립하고, 법집행도 엄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미래가 없다. 답보와 퇴보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법과 금권을 쥐는 자는 더 잘 살게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늘 억울하게 값질을 당하면서 더 가난해지는 구조를 걷어내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2018. 9. 29

雲靜

 

위 글은 2018103일자공정사회신문의 칼럼으로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