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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해 365일이 매일 새해 첫날처럼 되려면

雲靜, 仰天 2018. 12. 31. 00:00

호랑이해 365일이 매일 새해 첫날처럼 되려면 

 

검붉은 해가 솟구쳐 올랐다. 19세기 말 갑오년 동학농민전쟁과 20세기 중반 한국전쟁 때 만큼 어지러웠던 2021 신축년이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고 임인년의 새해가 밝았다. 중국발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세계사적으로 기록될 공포스런 한 해가 지속되었다. 신축년에서 임인년으로 바뀌는 데는 단 1초 차이(사실은 더 짧은 시간)였다.

 

 

 

그러나 우리가 감각기관으로 감지하는 경험적 시간(experiential time)으로 새해를 실감하려면 자정을 넘겨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봐야 한다. 경험적 시간은 사건들의 순서와 그 사건들의 지속시간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을 말한다. 어제 본 해와 오늘 새해 아침에 떠오른 해는 ‘감각적’으로는 크게 다를 게 없다.

 

경험적 시간이란 한 마디로 몸이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시간을 말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를 보기도 전에 이미 자정을 기해 새해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해마다 새해 첫날 해돋이 명소는 일출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또 저마다 지나간 1년을 되돌아보면서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무언가를 염원하고 소망한다. 각오도 새롭게 다진다. 작게는 개인사, 가정사에서부터 크게는 사회적, 국가적, 인류적 간구와 소원도 있으리라.

  

이처럼 단 ‘1초’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얼까? 모든 사물에 대한 이해의 토대인 시간(time)을 축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인간이 공간과 함께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는 주된 개념이다.

 

사실 하늘을 보는 관찰자의 자오선을 기준으로 ‘시각’을 측정하므로 그 위치가 다르면 시각의 값이 달라진다.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즉 관찰자)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기준으로 측정한 평균 태양시를 세계 표준시각인 세계시로 정하고 있지만 이는 자연계의 진리와 다른 하나의 가설적 개념이다. 지구 자전 속도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무질서의 정도)의 증가에 관한 과학적 검증 결과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만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사실이 증명 된지 오래다. 자연계의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지만 자체의 질량이 없어 쌓이지는 않는다. 간극 없이 연속되는 시간 가운데 매일매일은 동일한 하루임에도 인간은 365일(티베트인, 인도인, 인디언 등 종족에 따라 일수가 다르기도 함)을 1년으로 만들어 시간을 쌓아가면서 과거를 망각하고, 기억하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를 인습적 시간(conventional time)이라고 한다.

 

 

인습적 시간이란 이 지도에서 각 지역의 시간이 표시돼 있는 것처럼 한 마디로 인간이 인류 공동으로 약속한 시간이다.

  

인습적 시간이란 연속되는 시간을 초, 분, 시간, 일, 월, 년 등 분리된 시간으로 나누는데 사용되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장치를 말한다. 가령 1시간을 60분, 하루를 24시간, 1년을 365일로 정한 게 그런 예다. 이는 자연계의 현상적 시간과 별개로 인간이 고안해낸 발명품으로서 인식의 틀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철학에서 시간을 외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내부의 형식(혹은 개념)으로 보는 이유다.(베르그송, 칸트, 헤겔 등).

 

불교철학에서도 시간은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편의적으로 설정된 인간의 관념(과거, 현재, 미래의 3세, 찰나, 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1초 차이로 해가 달라지는 건 인습적 시간으로 인식한 결과일 뿐 자연계의 물리적 진리와는 다르다.

 

시간이라는 인식의 틀에 예속돼 단 1초 차이로 사람들은 나이를 더 먹고, 에너지가 모이고 각오가 달라지는 것처럼 마음이 달라지고 많은 변화를 수반한다. 1년 주기와 나이가 표상하듯이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을 누적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인습적 시간 때문이다. 사실 1초라는 시간은 물리적으로 역사에서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추동하기 어려운 시간의 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마음과 인식은 이 1초 사이에 완전히 달라진다. 이 1초는 매년 ‘새해’의 ‘주술’이다.

  

그런데 만약 물리적으로 동일한 시간일지라도 시간을 분절해 1년을 하나의 단위로 매듭을 만드는 1년 주기가 없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밤낮만 바뀌는 ‘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인간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삼세 개념과 변화의 의미를 부여하고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문명적 기능이 없게 된다. 당연히 역사와 문화도 생성되지 않는다. 무엇 보다 인류의 태반이 정신적 질환을 앓을 수 있다. 망각하고 심기일전하는 마음의 작용이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사회가 혼돈과 광란의 도가니가 될 수도 있다.

 

필자가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발견 또는 발명품들, 예컨대 문자, 불, 숫자(특히 아랍인이 만든 제로 개념), 제철기술, 4대발명품(종이, 화약, 목판인쇄술, 나침판), 증기기관, 페니실린, 컴퓨터 등등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문명의 이기보다 1년을 365일을 주기로 정한 ‘1년 주기’가 더 秀勝한 지혜의 결정체라고 보는 이유다.

  

인습적 시간은 공간, 사람의 마음과 숫자 등과 함께 현실에 대한 인간들의 표상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식의 도구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그러한 인위적인 개념적 틀에 구애 받지 않고 ‘해 바뀜’을 인습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게 좋다. 시간에 끄둘려 살기보다 시간을 통제해 삶의 주인이 될 필요가 있다는 거다. 이는 평소 365일을 매일 새해 첫날처럼 살아갈 수 있는 비결 가운데 하나다.

 

물론 새해가 지니는 문명적 의미를 부정하는 의미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새해 첫날 국민적 에너지의 결집이 이날에만 각오를 새롭게 하고 결의를 다지고 끝나버리는 연례적 ‘작심삼일’의 반복이 되선 안 된다는 소리다. 개인적인, 가정적인 소망에 머물러도 소시민적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망들이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와 국가의 공동체적, 범인류적인 것으로 확대되고 1년 365일이 ‘새해’ 첫날처럼 늘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깨어 있어 소망한 바를 실천으로 옮기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새해 첫날의 태양을 구랍의 태양과 다르게 인식하려면, 연례적인 소망과 결의를 다가 오는 대선에서 정치지도자의 오만과 아집, 무지와 독선, 무오류의 자기확신편향증과 시대착오적 리더십으로 인해 켜켜이 쌓인 사회적, 정치적 적폐 및 원혼들을 제거할 국민적 힘으로 승화시켜야 가능해진다.

 

특히나 2022년 올해는 그 어떤 지난 선거 때보다 중요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중차대한 대통령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느냐에 따라 국가와 국민의 운명이 결정된다. 집단지성이 이번 대선만큼 현명하게 발휘돼야 할 선거도 없다. 후보자가 내뱉은 수많은 공약들이 거짓말로 판명되거나 말을 바꿈으로써 단지 당선되기 위해 공약을 낸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나고 독재시대로 되돌아가면서 정치적 반대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참극과 광란의 시대, 태양이 빛을 잃은 암흑의 시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21. 1. 1. 05:39

北漢山 淸勝齋에서

雲靜

 

위 글은 2015년 1월 5일자『대경일보』에 "양의 해 365일이 매일 새해 첫날처럼 되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칼럼을 제목에서 '소'의 해 대신 '호랑이'의 해로 고치고 글 첫 단락에 "중국발 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만 보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