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 어느 기독교도 단톡방내 기독교들간의 시비

雲靜, 仰天 2020. 9. 2. 08:52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 어느 기독교도 단톡방내 기독교도들간의 시비


참여자들이 천 수백 명에 이르는 어떤 단체 카톡방에서 기독교인들이 저도 나도 글을 올리는 가운데 의견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댓글로 서로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그 중엔 인신공격성 발언도 없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이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목사라고 밝힌 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어떤 분이 그 단톡방에 초대해줘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곳에 들어가 있었다. 가끔씩 간간이 짧은 글을 올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올라오는 글들을 별 생각 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휴식 중에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이들 중 어떤 사람이 근래 말 많은 신천지 교도인 듯한 글을 계속적으로 올렸다. 그러자 다른 기독교 신도들이 그를 두고선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신천지교도인 것 같으니 조심하라면서 그에 대한 반박 글들을 여럿 올렸다. 그러던 중 어떤 신도가 지금 이 나라가 망해가는 징조가 보이는데, 모든 것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그렇다는 글을 올리자 즉각 신천지교도인 듯이 보인 그 신도가 아래의 댓글을 달았다.

“나라가 망하든 흥하든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임.”

이걸 지켜보던 나는 퍼뜩 우리나라 곳곳에 정신이상자들이 없는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어이가 없고, 다른 한편으론 불쌍한 영혼들이라는 생각이었다. 오 주여! 어찌 하오리까? 그래서 재미 삼아 아래의 긴 글을 올려 봤다.

「내 친구 영식이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대단한 기독교도였다. 언제부터인가 심장에 뭔가 이상이 있음을 알고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 이끌어 주실 줄 알고 병원에는 가지 않고 기도만 죽자 살자 했다. 그랬더니 정말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셨는지 오래지 않아 죽어버렸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예수는 히브리어를 몰랐고 아랍 지역의 아람어라는 사투리를 썼는데, 히브리어로 옮기면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타니!”(Eloi, Eloi, lama sabachthani)

Eloi, Eloi, lama sabachthani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音寫한 것이지 마가복음에 기록돼 있는 아람어가 아니다. 마가복음에는 히브리어 ‘엘리’ 대신 아람어로 ‘엘로이’라고 한다. (막 15:34).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한다. (마 27:46).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 말씀하신 일곱 가지 말씀, 곧 ‘架上七言’ 가운데 하나로서 메시아 시편으로 알려진 시편 22:1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후세 사람들이 다 자기들 좋자고 예수를 선지자에서 신으로 떠받들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다수파의 신부들이 성부, 성자, 성령의 소위 삼위일체설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유대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예수는 선지자의 한 사람인 것으로 인식돼 왔었지 않는가?

서양 중세 11세기 본체론적으로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한 신부이자 신학자인 안젤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는 이렇게 논증한 바 있다. “신은 완전하다. 완전성은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고. 즉 완전자라는 개념 안에는 이미 신이 실존한다는 논리이다.

이는 벌써 동시대에 같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 가우닐로(Gaunilo 혹은 Gaunillon)로부터 신이 “개념적으로는 있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로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고 비판 받은 바 있다. 안젤무스의 신의 존재증명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에게 여지없이 깨지게 된 이래 서구사회에선 더 이상 논의가 확장되지 않고 있다.

화이트 헤드. 그의 이름처럼 白頭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이도 있다.


그런데 한국엔 웬 사이비 기독교도들이 이다지도 많은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우리사회가 시끄럽고 혼탁한 책임을 전적으로 정치인들에게만 미룰 수 없지 않는가? 주님은 결코 인간세상의 도덕과 윤리, 법과 질서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기 전의 이 세상에서도 도덕과 윤리, 법과 질서를 지키고 존중해야 하지 않는가? 국가는 지금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높은 단계에서 요구되어지는 질서의 구현체인데, 왜 그것의 운명이나 운영을 신에게 맡기는가? 신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서 일일이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는가? 만약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겠다고 했더라면 이미 수 천 차례나 있었던 인류의 수많은 전쟁들, 가깝게는 세월호 사건 같은 야만적 사건도 미리 막았을 것이다. 」

내가 단 위의 긴 댓글이 여러 사람들에게 읽힐 정도로 시간이 지났는가 싶었다. 그랬더니 위에서 “나라가 망하든 흥하든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임”이라고 댓글을 단 그 신도가 바로 퇴장해 버렸고, 그때서야 격렬한 댓글 입씨름들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내부 분위기는 나의 이 글로 인해 뜨악한 느낌이었다. 조금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보고만 있을 자들이 아닐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이교도로 보이는 듯한 나를 가만 둬선 안 되겠다는 식의 “대응”이 나타났다. 자신이 관리자라는 이의 퇴장 권고였다. 내가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아 보이는 장문의 코멘트를 올린 것에 대해 나더러 “여긴 점잖은 분들이 많은 곳이니 단톡방에서 나가 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졸지에 교양 없는 점잖치 못한 자가 돼 버렸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래 “점잖은 분들이” 어디 할 일이 없어 견해나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 비난하거나 공격을 해대는 말싸움을 격하게 벌인단 말인가? 점잖은 분이 되는 조건이 기독교 신앙여부여야 하는가? 또 점잖으신 분들이 “나라가 망하든 흥하든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이라고 해놓고 왜 “빨갱이”들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욕하고 소릴 치는가? “빨갱이”들이 나라를 망하게 하든 어떻게 하든 그것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것이 아닌가? 또 나라가 망해도 하나님께서 뭘 하시겠지 하고 기다리면서 조용히 기도나 하면 될 걸 왜 시끄럽게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까? 나에게 나가달라고 한 이는 자기들의 그런 언사가 점잖은 것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도 판단하지 못하는 판단장애자란 말인가? 이처럼 자기가 한 말도 제대로 맥락이나 모순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을 가르치려 드니 나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널리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망각한 ‘입 따로 몸 따로’의 배타적인 작태였지만,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모두 미신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기독교들끼리만 모이고 뭉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두말없이 나가줬다. 점잖은 자들끼리 계속 박터지게 싸우라고...

암튼 어이 없는 재미를 넘어 다소 우려가 되긴 하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한국 기독교도의 群像들 모습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현대와 같은 다원화된 시대에 같은 종교를 믿는 자신들 밖에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인식이란!! 참으로 우리사회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40대에 선을 봤을 때 "선 보는" 이야기는 일체 없고 만나자마자 나더러 기독교를 믿어야 결혼이 가능하다는 한 여성 극렬 기독교인이 떠오른다. 이래 저래 참 재밋는 세상이다.

2020. 8. 9. 15:01
북한산 淸勝齋에서
할 일이 없어 시비만 일삼는 룸펜 중의 상룸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