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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밴 논리비약의 지속은 사회적 질병!

雲靜, 仰天 2020. 8. 26. 14:10

몸에 밴 논리비약의 지속은 사회적 질병!

 
이따금씩 나도 모르게 초청돼 있는 천 명이 넘는 이들이 참여한 어떤 단체카톡방에서 올라오는 글들을 보곤 한다. 글의 내용들이 대부분 기독교와 관련된 것들이다.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다는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많다. 나를 이 단톡방에 초청한 이도 기독교 신자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는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어떤 주장을 펴고자 하는 경우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제대로 쓴 글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평소 이 단톡방이 아닌 곳에서도 느끼는 점이지만, 특히 상대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더욱 심한 비논리적, 초논리적 경향을 보인다. 인간은 원래 비논리적인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육수준이 과거보다 월등하게 높아진 오늘날의 한국인들이라면 대폭 개선돼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소리다.
 
논리의 정합성이란 사실과의 부합성, 맥락의 비모순성, 논지의 수미일관성 등등의 합리적인 요소들이 내포돼 있는 말이나 주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논리를 무시하니 논리적으로 대화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특히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제어하는 경향이 농후한 기독교도(특히 한국의 기독교도)들에게 더욱 심하다. 이런 경향이 사회 전반적으로 격심해지면 전체주의로 이행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오늘 아침에도 이 소통의 공간에 올라온, 일명 "빤스 목사"로도 통하는 전○○ 먹사를 중심으로 8.15광복절 기념일에 광화문에 모여 시위를 하자는 호소문을 보니 곳곳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비논리적 선동이 많이 보인다. 일일이 예를 드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게 느껴져서 그 예들의 제시는 생략한다. 다만, 한국사회엔 이런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오랜 세월 누적된 사회적 차원에서의 집단적 習이 발현된 결과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대표적으로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지난 세기 1936년 8월 9일, 손기정과 남승룡 두 선수가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각기 1위와 3위로 골인했다. 손기정 선수가 골인하는 순간과 두 사람이 시상대 위에 서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면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사진은 80여년이 흐른 지금의 내가 봐도 감격적인데 당시 일제에 짓눌려 살던 조선인들에게서야 감격을 넘어 엄청난 쾌거였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가운데 월계관을 쓰고 월계수 잎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 선수가 손기정, 왼쪽의 일장기가 그려진 옷을 입은 선수가 남승룡 선수다.

그래서 당시 이 소식을 접한 소설가 심훈은 감격과 울분이 교차된 심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오늘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어 잡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하여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그런데 심훈의 이 말은 개개의 사실을 전체의 특성인 것으로 착각한 논리의 비약이다. 그의 말은 호쾌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사실 당시 조선이 처한 한민족의 역량을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고, 일시적으로 고달픈 식민지 처지를 애써 위안하려는 콤플렉스에 쩐 약자의 넋두리나 혹은 허장성세에 지나지 않는다.
 
어째서 한 사람의 한인 마라톤 선수가 일본선수를 누르고 세계대회를 석권했다고 해서 당시 우리민족이 "강한 족속"이었으며, 조선이 강국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조선이 강했다면 일본에게 식민지배는 왜 당했단 말인가? 물론 심훈 자신은 일제에 대한 민족적 울분을 토로하고 싶어서 이렇게 외친 것이었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두고 말하고자 하는 동기는 딴 곳에 있다. 이러한 논리의 비약이 80년이 더 지난 오늘날에도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왜 문제이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내 말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최근 며칠 사이 8.15집회를 강행해 코로나 확진자를 증가시킨 전○○ 목사의 S교회 변호인단이 8월 26일 “정세균 국무총리 등이 8월 19일부터 비대면 예배만을 강제하는 행정명령을 내렸고, 그 내용을 강제하기 위해 행정권을 이용했다”며 “교인들의 비대면 예배를 강제하고, 예배를 금지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로서의 대면 예배를 드릴 권한 행사를 방해한 것”이라며 국무총리, 보건복지부 장관, 서울시장 권한대행, 서울지방경찰청장을 직권남용, 강요, 예배방해 혐의 등으로 수사해 달라고 고발한 것도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freedom of religion)를 확대해석한 논리의 비약이다. 근거가 뭘까?
 
대한민국 헌법(제20조)에서 말하는 ‘종교의 자유’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신앙, 종교적 행사, 종교적 집회 및 결사, 선교활동 등을 행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신앙을 가지지 아니할 자유, 즉 무신앙의 자유, 종교적 행사 및 종교적 집회, 결사 또는 선교활동 등을 강제 받지 않을 소극적 자유까지도 포함돼 있다.

 

종교자유의 구체적인 발현형태에는 종교선택의 자유, 개종(改宗)의 자유, 무신앙의 자유, 신앙고백의 자유, 자기가 신앙하는 종교를 외부의 강제로 인해 표명하지 않을 자유(즉 신앙 불표현 혹은 침묵의 자유) 등이 포함된다.
 
전○○ 먹사의 S교회가 내세우는 종교행사의 자유(기도나 예배, 독경이나 예불처럼 신앙을 외부에 표현하는 모든 의식과 축전), 종교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종교적인 목적으로 신자들끼리 회합하거나 결합한 단체 조직), 선교나 포교활동과 종교교육의 자유(자신이 믿는 종교의 선전, 신자를 규합하기 위한 활동 및 종교교육행위) 등도 오늘날에는 내심의 작용인 신앙의 자유를 제외한 그 밖의 종교적 행사, 종교적 집회, 결사, 선교 및 종교교육의 자유 따위는 모두 국가안전보장, 사회의 질서유지, 국민이 안전하고 건강할 권리 등의 공공복리가 침해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된다. 즉 국가의 존속과 국민의 생존에 필요한 이러한 가치들을 위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법률로써 종교적 행사, 종교적 집회, 결사, 선교 및 종교교육의 자유에 대해선 제한이 가능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S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제외한 종교적 행사, 집회, 결사, 선교 및 종교교육의 자유 등은 그것으로 인해 국가와 국민의 안전과 건강이 위협 받을 때는 법률로써 제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고 억지를 쓰는 이기적인 행태이거나 이 사실을 알고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주장하는 생떼를 피우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문재인 정권의 실정에 대한 비판은 별개의 사안으로서 다른 시기에 다른 수단으로 논의되거나 전개될 수 있음!)

 

한 마디로, 신앙의 형태나 형식에까지 무제한으로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논리의 비약(a jump of logic 혹은 a logical leap)인 것이다. 종교선택의 자유와 그 종교를 어떻게 믿는가라는 점은 다른 사안이다. 즉 종교를 믿되 반인륜적, 반국가적, 반사회적으로 믿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혼동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종교 신앙의 자유란 어떤 종교를 믿든 국가가 개의치 않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이지 자신이 믿는 종교를 어떻게 믿든 방임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형식의 논리비약은 기독교계가 유독 심할 뿐이지 다른 영역에선 없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무지해서 그렇든, 아니면 알고도 떼를 쓰든 이런 식의 의도적인 논리의 비약과 미필적 고의의 논리비약은 대통령선거 후보들의 토론장에서도, 국회 정책심의장에서도, 고위 관료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방송의 시사토론 프로그램에서도, 학자들이 모여 토론하는 각종 세미나에서도, 심지어는 교육의 장인 대학과 각급 일선 교육현장에서까지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이게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니 일반인들의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오늘 아침처럼 천 명이 넘는 기독교도들이 주가 된 다중이 참여하는 단톡방에서야 오죽하랴! 그런 곳엔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이 믿는 기독교적인 발상에서 자신들만의 생각만 일방적으로, 그것도 비논리적인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해대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기독교도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논리비약자에게 논리적으로 반박해 간접적으로 오류를 지적하거나 탓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쳇말로 씨알도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에 가득차고 넘쳐나는 비논리성과 논리의 비약성은 개인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건전한 대화와 소통을 가로 막는 가장 중증의 장애물이다. 그것은 소통장애로 인한 개인들간의 인간관계를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까지 치르게 만든다는 점에서 사회적 질병이랄 수 있다.

 

비논리성과 논리의 비약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독단성과 배타성, 아집성과 폐쇄성을 제어하려면 사회교육만으로는 개선에 한계가 있다. 앞서 말했지만 정치인, 종교인, "방송인", 언론인, 교육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비논리적인 언행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으니 일반인들은 늘 이걸 보고 들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習)이 되고 전체적으로는 사회적인 습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학교교육의 교과과정부터 전면적으로 개편해서 적어도 중등교육과정에서부터는 논리학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당장 고쳐지진 않겠지만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러한 사회적 질병은 영원히 치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논리성을 결여한 억지 주장들에 정상인들의 말문이 막히면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해 할 사람들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만큼 사회는 병이 깊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질환이기 때문에 국가가 치유시키고 개선시키는 데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그런데 국가를 운영하는 고위 공무원들, 법조인들, 정치인들과 대통령까지도 이 문제에 대해서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 정말 이를 어찌해야 할꼬?!

 

2020. 8. 9. 09:05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