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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의 “12월 10일” 오늘 小稿

雲靜, 仰天 2019. 12. 10. 16:49

역사상의 “12월 10일” 오늘 小稿

 

1948년 12월 10일 오늘은 나혜석(1896~1948)이 서울의 한 병원에 무연고 신원불명의 행려병자로 입원해 있다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난 날이다. 나혜석은 한국 근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몇 가지 “조선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여성이다. 조선 최초로 유럽여행을 떠난 여성이었고, 여성으로선 조선 최초로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미술을 정식으로 배웠으며, 또 최초로 서울에서 “여류화가”(여성 차별적인 명칭임)의 유화작품전시회를 연 신여성이었다.

 

지난달 덕수궁에서 전시된 나혜석의 작품을 다시 보면서 재차 평한 바 있지만, 사실 나혜석의 작품 자체는 작품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 형태와 색을 단순화 시킨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그의 인물화는 요즘으로 치면 중고등학생이 그린 수준 정도다.
 
다만 최초로 여성이 그림을, 그것도 서양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인 의의가 있기 때문에 높이 평가될 뿐이다. 뭐든지 항상 최초의 것은 가치가 높은 이유다.
 
 

나혜석 자신이 그린 자화상(캔바스에 유채, 62cm×50cm,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 소장) 나혜석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뒤 김일엽과 함께 『여자계』, 『신여자』 등 여성 계몽잡지의 발간에 적극 참여하면서 여성해방운동도 적극 주도했다. 당시 일제 식민지 사회에서 선구적인 여성해방운동가이면서 소설가로도 활동한 "신여성"으로서 연애결혼 얘기에서부터 남녀 간의 스캔들에 가까운 이혼 고백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핫이슈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로 인한 사회의 나쁜 평판 때문에 말년에는 가족으로부터도 완전히 버림받고 시립 자제원에서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나혜석에게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그가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다는 사실보다는 전근대적 가치와 인습과 관습이 견고했던 시대에 선구적인 여성해방운동가로서의 삶을 산 점이다. 그는 전근대적인 남녀불평등의 고루한 시대상황에 처해 있던 조선 여성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과감하게 소리를 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보란 듯이 자유연애를 하는 등 생활 속에서 실천도 했다. 그는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느 베이유와 시몬느 보봐르가 외쳤듯이 이렇게 외쳤다.

 

“여자도 인간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여자도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누려야 한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부덕을 장려한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良父賢父는 없는가?”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부덕을 장려한 것이다.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良父賢父는 없는가?”라는 빈정대는 투의 자조가 폐부를 찌른다!
 
위 내용을 보면 당시 나혜석은 근대성(modernity)을 인식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현모양처라는 말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나혜석은 어머니로서는 그다지 모범적인 삶을 살지는 못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노처녀였던 25살의 나이에 그는 6년이나 자기를 따라다닌 김우영 변호사와 결혼했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10세나 연상이었던 데다 요즘말로 '돌싱'(사별한 전처 사이에 딸이 있었음)이었다.
 
 

밀당 끝에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 나혜석과 김우영

 
그런데 나혜석이 당돌하게, 아니 어쩌면 큰 소리 칠만한 조건이어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김우영에게 결혼해주는 대신 세 가지는 평생 동안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첫째가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가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따로 살게 해주시오"라는 것이었다. 
 
 

나혜석이 요구한 결혼 조건은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중에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진 출처 : KBS)

 

그렇게 어렵사리 결혼한 나혜석이었건만 결국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말년엔 가족들에게까지 버림을 받은 비참한 삶을 살았다. 남녀평등으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타인과의 공존을 도외시하고 지나치게 자신만의 만족을 추구한 이기심이 그런 과보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혜석이 죽고 17년 뒤인 1965년 12월 오늘, 세계 최초로 여권신장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미니스커트가 등장했다. 영국 런던에서 사상 처음으로 의상실을 연 디자이너 메리 퀸트(Mary Quant, 1934~)가 미국에서 개최한 ‘The Look’이란 이름의 패션쇼에 미니스커트 입은 모델들을 출연시켜서 선을 보인 것이다. 퀸트는 기존의 주류 의상인 긴 드레스의 밑단을 싹둑 자른 듯이 미니스커트를 만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모델들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로 주변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서양에서 "여자를 완성한 여자"로 평가 받는 메리 퀸트의 젊은 시절,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자신이 만든 미니스커를 입고 두 다리를 내놓고 있다.

 

그로부터 14년 뒤인 1979년 12월 10일 오늘, 인도의 마더 테레사 ‘수녀’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말이 나온 김에 사족 한마디 덧붙이자면, 修女라는 명칭도 완전히 남성 위주의 역사관이 반영된 아주 잘못된 용어다. 천주교에서 남자 성직자는 “神父”로 부르고, 여자 성직자는 ‘修女’라고 한다. 왜 여자는 마음이든 몸이든 늘, 아니 죽을 때까지 닦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되고, 남자는 완성된 독립 개체임을 뜻하는 신적 존재 같은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천주교계가 크게 반성하고 시정할 일이다.
 
 

고아와 빈민 아이들의 대모 마더 테레사 수녀. 종교인으로서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아도,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추기경이나 교황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기는커녕 신부라고도 불릴 수 없다. 작년 캘커타를 여행하면서 테레사 수녀원을 방문하기로 해놓고 사정이 생겨 가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하지만 교황, 추기경, 수도원장, 대주교, 주교 등등의 권력이 모두 남성에게 장악돼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교황이 다스리는 바티칸시티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 천주교계에선, 교권이 모두 남성들 손에 쥐어져 있는 로마 교황청이 절대로 솔선해서 이를 전향적으로 개선하진 않을 것이다.
 
 

세상은 모순 덩어리다. 그래도 세상이 굴러가는 걸 보면 신기하기 짝이 없다. 한국이고 외국이고 간에 주위를 돌아보면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많지 않다.

 
현재 교황을 선출하는 투표권은 추기경만 가지고 있고, 남성은 추기경이 될 수 있기에 참정권(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는 반면 여성은 추기경에 오를 수가 없다. 요컨대 여성의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티칸의 여성들은 어떻게 사나? 이의 시정은 일반 신자나 혹은 남녀평등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이 각성하고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할 힘 없는 자들의 몫인가?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해선 따르고 존경한다면서, 심지어 위대하다고까지 칭송한다. 또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 딸은 애지중지하고 남녀평등 차별 받지 않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여성 전체에 대해선 낮춰보면서 각종 불평등과 불이익을 안겨주는 법률, 제도나 관습의 개선 혹은 척결에는 소극적이다. 대단히 이율배반적이다. 불과 지난 세기까지도 극심했고, 지금도 그런 차별과 불평등이 여전히 남아 있다. 철저하게 남성 위주의 역사, 남성 주도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론 1928년인가 영국에서 사상최초로 보통 선거가 실시되면서 여성에게도 선거권이 주어졌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본향으로서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는 영국과 미국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지만 이것은 오히려 뉴질랜드 보다 한참 늦은 것이었다.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한 게 뜻밖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1893년이었으니 1920년에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한 미국보다 약 30년 가까이, 그리고 1928년에 여성투표권이 주어진 영국 보다 무려 35년이나 앞섰다.
 
여성투표권 인정이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이뤄진 게 “뜻밖”일 수 있지만 사실은 뜻밖이 아니다.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이민 간 사람들은 순 잡범들이 몰려간 호주와 달리 영국에서 각종 민주적 요구를 하다가 잡힌 정치범, 사상범들이 위주였기 때문이다. 호주는 그래도 모국인 영국 보다 빠른 1902년에 여성 투표권을 인정했다. 프랑스는 1946년부터, 스위스는 1971년에 투표권을 인정했다.

 

인권이나 여권이 주제가 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게 아직도 여성들이 온갖 불평등과 차별의 질곡 속에 살고 있는 이슬람 국가들이다. 여권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적으로 인권 사각지대인 중동은 서방세계는 물론, 아시아 국가들보다도 훨씬 더 늦다. 쿠웨이트는 세기를 넘겨 2005년이 돼서야 여성이 투표할 수 있고 선거에 나설 수 있게 됐지만, 같은 중동의 이슬람국가로서 미국과 관계가 좋다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아직도 여성투표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시아에서 여성 참정권을 가장 빨리 인정한 나라는 의외로 미얀마와 태국이었다. 각기 1922년과 1932년이었다. 한국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임시헌법에 남녀평등을 보장했지만 실제로 여성참정권이 실행된 것은 해방 후인 1948년이었다. 만년불변의 천황제 국가 일본은 전후인 1945년에 실행됐는데, 역사적으로 강고하게 유지돼온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봤을 때 맥아더가 군정을 실시하지 않았더라면 여권의 실행은 정말 요원했을 것이다.

 

아시아권에서 최초로 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중화민국은 여성 참정권이 생각보다 늦었는데, 북한과 함께 1946년이었다. 그렇지만 공산혁명을 거친 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피부로 느끼는 남녀평등과 여권은 한국 보다 훨씬 앞서 있다. 흔히 말하는 공산주의 평등사상 때문이 아니라 이미 1910년대와 20년대에 전반 西化의 계몽운동과 맞물려서 여권신장 운동이 전국적으로 고양된 역사적 영향을 받은 결과다.
 
더 놀랄만한 것은 중국은 이미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 때 홍수전의 태평군에 가담한 군대에 여성이 말을 타고 전투에 나가 여군과 남성 병졸들을 지휘한 여성 지휘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지금이야 여군도 보편화 돼 있고, 여성 장군도 생겨났지만 상황을 보면 아직도 하나의 사회운동으로서 남녀평등의 정착을 위해 더 분발할 필요가 있다.
 
 

말을 타고 전투에서 여군들을 지휘하고 있는 洪宣嬌, 그는 전설상의 얘기가 아닌 실제 인물이다.

 

주장이나 사상으로서의 남녀평등과 여권신장이야 이미 19세기 태평천국시에도, 동학혁명시에도, 20세기 러시아혁명시에도,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1956) 등 인도의 사회운동가들에게도 있었다. 그 보다 더 전에 일부 유럽의 지성사에서도 있었다. 문제는 역사가 늘 그랬듯이 당위론적 주장과 달리 실행은 바로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도 사회개혁의 선구자 암베드카르, 나는 수년 전 인도를 여행하면서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돼 그를 한국사회에 소개하려고 그의 자서전 등 관련 책도 여러 권 구입해왔지만 다른 일로 손도 대지 못했다. 그에게 많이 미안한 감이 든다. 식민지 영국에 대한 무저항 비폭력 운동으로 이름난 간디보다 훨씬 주목받아야 할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간디는 수천년 간 전승돼온 인도사회의 최대 치부이자 금기사항인 불가촉천민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체제순응적인 태도로 일관한 것에 반해 암베드카르는 과감하게 이 제도의 야만성과 비인권성을 들춰내고 철폐를 실천으로 옮긴 인물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시각에서 암베드카르를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양성평등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당연한 가치인 듯해도 실제로는 여전히 많은 부분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남녀 급여의 차이에서부터 근무조건, 승진기회, 가사 등에 이르기까지,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인식 혹은 인습과 관습상의 불평등도 개선할 게 많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2019. 12. 10. 09:51
北京 望京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