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꾸자 이야기② 야꾸자의 개념 정의
지난 번 글을 통해 ‘야꾸자’(八九三)라는 말의 유래를 알아봤다. 이번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일본사회에서 야꾸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 개념을 알아본다. 『大辞泉』나 『新辞源』 같은 제법 두툼한 일본어 대사전에는 ‘야꾸자’의 뜻풀이로 두 가지를 설명해놓고 있다. 첫째, 도움이 되지 않는 일, 가치 없는 일, 또는 그런 자다. 둘째, 도박꾼, 폭력단원 등, 정상적인 업이 아니라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해서 살아가는 자들의 총칭이다.
보통 일본인들의 뇌리에는 야꾸자란 대략 “조직을 만들어 폭력을 배경으로 직업적으로 범죄활동에 종사해 수입을 얻는 자”로 각인돼 있다. 지난 글에서 봤듯이 본래 ‘야꾸자’는 떠돌이, 사는 곳이 일정하지 않는 자(根無し草), 건달, 무뢰한, 깡패, 불량배 등과 동의어이고, 그렇게 사는 방식에 익숙한 자를 가리킨다. 야꾸자라는 말 자체가 도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은 지난번에 소개했다.
이처럼 야꾸자는 도박이나 하찮은 거리의 장사치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물론 도박을 생업으로 하는 노름꾼은“바꾸또”(博徒)라고 불렸는데, “데끼야”(的屋)라고 불리는 떠돌이 노점상과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노름꾼보다는 떠돌이 노점상의 기원이 더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조금 자세히 들쳐보자.
우선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도박의 역사는 길다. 노름꾼의 기원은 6~7세기 경의 헤이안(平安)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 '俠客'(협객)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무사를 뜻하지 않는다. 우리와 달리 일본에서는 도박꾼, 건달, 주먹잡이 등등의 불량배를 일컫는 말이다. 협객이 아니라 협잡꾼이 더 어울린다.
이런 무리를 가리키는 “협객”의 기원은 무로마찌(室町)시대에 있다. 건달이나 도박꾼을 가리키는 다른 말인 도세이닝(渡世人)이라고도 불렸다. 노천상 등이 주가 된 떠돌이 노점상의 경우는 쬬모토(張元), 쬬와끼(帳脇), 와까슈가시라(若衆頭, 젊은 야꾸자들 사이의 행동대장 쯤 되는 야꾸자), 세와닝(世話人, 단체나 회합 등의 운영이나 사무에 종사하면서 성가신 일들을 봐주는 사람), 와까슈(若衆, 젊은 사내) 등으로 나눠진다.
쬬모토는 도박을 할 때 그날 판돈에서 올라온 수입을 가져가는 ‘오야붕’이다. 누가 쬬모토를 맡는가에 따라 그 오야붕의 인덕, 인기, 인연 등등으로 끗발이 붙어 돈을 딸 수도 있고, 다 잃을 수도 있다. 도박장에 오는 손님은 주로 기업체 사장, 상인, 부자집 아들, 야꾸자 오야붕 등등의 각계 사람들이다.
그들은 왕왕 쬬모토의 얼굴 체면을 세워주려고 오는데 자칫 잘못하면 돈을 몽땅 털리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선 도박 중 이들 사이에 간혹 시비가 붙어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쬬모토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쬬와끼는 도박판에서 도박에 거는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나 혹은 그 자리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17세기 초에 시작된 에도(江戶)시대에는 절이나 신사의 경내 등지에서 도박을 붙여 수입을 챙기는 이들이 생겨났다. 옛날 우리 세대가 자랄 적에 길거리에서 흔히 봤던 과거 야바위꾼 비슷한 도박꾼은 도시만이 아니라 작은 지방에도 존재했다. 도박이 일상화 보편화 되면 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가정이 파탄 나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비슷했다. 그래서 일본사회에서도 최고 통치자인 막부의 쇼군(征夷大將軍)이 도박을 중범죄로 엄하게 단속시켰다. 그래도 근절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에도 중기 이후부터는 도박을 상습적으로 행하는 도박꾼 패거리까지 생겨났으니 말이다.
반면, 떠돌이 노점상은 ‘히닝’(非人, 에도시대 사형장에서 잡역에 종사하던 사람) 신분으로 취급됐다. 노름꾼과 떠돌이 노점상은 둘 다 생계를 위한 생업이라는 점에선 공통점이 있지만, 일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일본에선 떠돌이 노점상은 축제 기간에 번잡한 노상에서 흥행을 위해 요술 따위를 벌이거나 또는 싸구려 물건을 소리쳐 파는 사람을 뜻하는 ‘야시’(野師), 혹은 ‘꼬우구시’(香具師)라고도 불린다.
야꾸자는 노름을 일삼는 도박꾼, 도박판을 만들어 도박을 붙여 먹고 사는 도박꾼, 떠돌이 노점상들이 패거리를 만든 조직이었다. 과거의 도박판은 통상 부랑민, 무숙자의 숙박지에 차려졌다. 도박계에 위계가 존재했다. 오야붕은 ‘까시모토’(貸元)라고 불리고, 그 아래 오야붕의 보좌 역할을 하는 자로서 ‘다이가시’(代貸)라고 불리는 자가 있다.
오야붕을 까시모토라 부른 데는 도박장에서 돈에 대한 책임은 그가 지고, 잃은 자에게 돈도 빌려줬기 때문이었다. 오야붕은 돈을 꿔준 이가 도박에서 따면 “데라”(口錢을 뜻하는 일본어)로 5할이나 떼어갔으니 속된 말로 무지막지한 도둑놈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다.
도박계의 야꾸자 조직들 중에서는 代貸부터가 간부급에 속한다. 그 아래 組員으로는 ‘혼데가타’(本出方), ‘스케데가타’(助出方), ‘산시타’(三下)라고 불린 여러 급이 있었다. 산시타는 이 바닥에서 최하급 존재인데, 한국어에서 쓰이고 있는 “시타바리”를 말한다. 도박장을 운영하는 조직이 본체인 야꾸자를 말한다. 이것은 옛날부터 있던 야꾸자로서 도박계통의 야꾸자조직 이외에는 떠돌이 노점상 계열의 데끼야가 있다. 한국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는 일본어 “나와바리”(繩張)라는 말은 이 계통에서 나온 용어다.
도박판에 건달들이나 조직폭력배들이 진을 치는 건 현대에 생긴 게 아니라 옛날부터 그랬다. 양자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들은 도박판에서 돈을 잃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면서 선 이자를 떼는, 소위 말해서 “꽁지수입”과 고리대로 먹고 살기 때문 도박판 주위엔 늘 이러한 기생 인간들이 진을 치고 있다.
도박판에 여러 조직들이 생겨나다보니 자기들 동업종끼리도 경쟁이 심해졌다. 이익과 기회가 크지 않고 한정되다 보니 얼마 안 되는 이권을 위해 나와바리싸움도 생겨났다. 이러한 배경이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조직화되는 원인이 된다. 도박꾼, 떠돌이 장사치 류의 직업인들은 오늘날에도 기득권층에서 봤을 때는 불법과 친한 “사회 틀 밖”의 사람들이다.
야꾸자 조직들의 명칭은 에도시대까지는 상가의 옥호가 사용됐다. 예컨대 19세기 에도 말기 도박꾼이자 야꾸자로서 사회사업가로도 이름을 날린 시미즈노 지로우쬬우(清水次郎長, 본명은 야마모또 쬬우고로山本長五郎, 1820~1893)는 자기 이름을 따서 자기 술집의 옥호를 ‘次郎長지루우쬬우’를 사용했다. 물론 쿄우토(京都)의 유명한 야꾸자 조직 아이즈고떼쯔까이(会津小鉄会)처럼 ‘大瓢箪’(오오효우딴, 큰 표주박)을 사용한 경우도 있었다.
야꾸자 조직들이 일가를 조직의 명칭으로 삼는 것은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에도 시대가 아니었다면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시대에 많이 사용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떠돌이 노점상의 영향이 아니었을까하고 추측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혹은 이들을 단속한 정부의 내무성 담당자들이 그들을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다는 설이 있다.
메이지 시대의『東海遊俠傳』에는 위에서 소개한 지로쬬우(次郎長, 山本長五郎의 통칭)의 패거리를 중국어로 형을 의미하는 ‘따꺼’(大哥)로 불렀다. 따꺼는 일본인들의 사회적 혹은 언어감각으로는 오야붕은 아니고 중국인들 사이의 관계처럼 그냥 ‘형님’쯤 될 것이다. 그러면 조직에 ‘구미’(組)라는 말은 붙인 것은 일본사회에서 ‘구미’의 쓰임새에서 자연스레 그렇게 불렸을 것이다. 문명사회를 지향한다고 표방한 메이지 신정부는 그에 걸맞게 실제적인 조치를 취했다. 즉 1884년 도박꾼은 제재 없이 10년의 징역을 가하기로 한 ‘오까리꼬미(大刈込み, 도박범 처분규칙)를 시행했다.
그러자 많은 도박꾼들은 이 법령을 피해가거나 그에 대한 대책으로서 토목건축 청부의 간판을 내걸고 자기 조직명에 ○○‘구미’라고 이름을 대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는 1925년 말, 오늘날의 요코하마(横浜)시 쯔루미(鶴見)구에서 발생한 야꾸자들 간의 난투사건인 이른바 ‘쯔루미(鶴見)소요사건'에서 유래됐다. 이 사건은 야꾸자 조직들간의 벌어진 일본최대의 조폭싸움으로 유명한데, 500명 이상이 검거되고 소요죄(현재의 소란죄)로 기소된 바 있다. 구미란 그야말로 단체를 뜻하는 보통명사일 뿐인데, 도박이라는 범죄조직의 혐의를 불식키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또 야꾸자 보다 좀 더 합법적인 성격을 지닌 이른바 ‘가오야꾸’(顔役, 유지 혹은 유력자)라고 불리는 자도 있다. 가오야꾸는 의협심(俠風)이 있는 남성으로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받들어지는 ‘유지’로 받아들여진다. 가오야꾸에게는 “그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다”는 꼬붕들이 다수 추종하기도 해서 자연스레 지역사회에 은연중에 힘을 지니면서 행사하기도 한다. 그리 멀리 않은 과거에 이들 중에는 버젓이 변호사가 된 자도 있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사람 사는 데는 어디든 유사한 현상들이 있는 모양이다.
야꾸자라는 말은 앞의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끼와 유교의 숫자 개념, 도박 등에서 유래됐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야꾸자가 도박판에서 만들어진 말이라는 설에 대해 알아 봤다.
그런데 일본사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야꾸자라는 말이 폭력조직의 구성원을 가리키게 됐다. 이유는 노름꾼, 떠돌이 노점상들 가운데서 사회적으로 하잘 것 없이 천하게 여겨진 “하류인생”의 “야꾸자”들이 많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폭력단이라는 말이 일반화 되자 주로 폭력단의 구성원을 뜻하게 됐기 때문이다.
2019. 9. 28. 09:00
臺灣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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