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아시아사

미얀마 현대사①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 산의 독립투쟁과 죽음

雲靜, 仰天 2021. 2. 2. 10:30

어제 미얀마에 또 다시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한 모양이다. 미얀마에는 왜 저렇게 군사쿠데타가 끊이지 않을까? 이번 쿠데타를 계기로 미얀마에 군사쿠데타가 빈발한 원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미얀마 현대사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싣는 순서는 아래와 같다.
 
미얀마 현대사①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 산의 독립투쟁과 죽음
미얀마 현대사② 비극의 출발선 : 아웅 산의 암살배경과 그 의미
미얀마 현대사아웅 산이 꿈 꾼 버마의 미래상
미얀마 현대사 아웅 산이 남긴 유산 : 유가족의 삶과 동지의 배신
미얀마 현대사⑤ 민주화의 상징 아웅 산 수찌의 등장
미얀마 현대사⑥ 미얀마 군부와 아웅 산 수찌의 관계 : 적인가? 동지인가?
 
이 여섯 편의 글은 모두 2019년 9월 초 내가 미얀마를 여행하면서 써놓은 글을 오늘 일부 어구를 수정하고 약간 보충한 것들이다. 이 글들은 내용이 미흡한 면이 있어 차후에 다시 보충할 것이다. 그 전에 오늘은 우선 아쉬운 대로 그 첫번째 순서로 먼저 미얀마 현대사의 출발점이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닌 독립영웅 아웅 산의 독립투쟁과 그의 죽음에 관한 글을 올린다. -2021. 2. 2. 10:43. 雲靜 
 

 

미얀마 현대사① 미얀마 독립영웅 아웅 산의 독립투쟁과 죽음

 

인도 꼴까따 여행을 마치고 이웃나라 미얀마로 건너왔다. 내가 내린 미얀마의 옛날 수도 양곤(영국식 영어로는 ‘랑군’)은 9월 중순임에도 한국의 여름처럼 덥다. 나는 여장을 풀자마자 바로 미얀마의 독립운동 지도자 '보죠케'(Bogyoke, 장군이라는 뜻의 미얀마어) 아웅 산(Aung San, 1915~1947)이 묻혀 있는 묘소와 생전에 살았던 집을 찾아 나섰다. 기왕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에 어렵사리 온 김에 그와 미얀마 현대사에 대해 겉핥기로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소박한 발심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가보고 싶었던 아웅 산 장군의 막내딸로서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아웅 산 수찌(Aung San Suu Kyi, 1945~) 여사의 가택연금 현장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또 유엔사무총장을 지낸 우 탄트(U Thant, 1909~1974)의 묘소도 양곤 시내 쉐다곤 파고다(Shwe Dagon Pagoda)의 남문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음에도 가보지 못했다.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나는 먼저 쉐다곤 파고다 북문 건너편에 조성돼 있는 아웅 산의 묘소에 들러 참배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입구 오른편에 1983년 10월 북한공작원들이 벌인 ‘아웅 산 폭파테러사건’에 희생된 전두환 정권의 각료들을 추모한 비부터 들러 묵념을 올렸다. 현대 미술의 모뉴멘탈 조각작품을 연상시키는 제법 큰 기념탑으로 서 있는 붉은 별이 퍽 이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주위의 벽에는 과거 아웅 산이 뛰어들었던 투쟁의 순간들을 파노라마로 처리해놨다. 전시내용들이 간단해 바로 이곳을 떠나도 지하의 아웅 산은 더 이상 나를 잡아놓지 않을 것 같았다.
 
 

파고다의 나라 미얀마에서 쉐다곤 사원을 보지 않고 미얀마를 말하는 건 서울을 보지 않고 한국을 이야기 하는 것과 같다. 승려들과 위빠사나 수행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 좋은 공부가 됐다.
아웅산 묘역은 쉐다곤 사원이 보일 정도로 지척에 있다.
북한공작원의 폭탄테러로 순국한 전두환 정권의 각료들이 잠들어 있는 아웅산 묘역 입구
당시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을 비롯해 사망자 총 17명의 성명과 직함이 새겨져 있다. 사건 당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두환 정권에는 정말 인재들이 많았다"고, "그런데 정말 아까운 인재들은 대거 죽고, 전두환은 살아 돌아왔으니 이게 무슨 하늘의 뜻인가?"라고 말이다.
추모비에서 묵념을 드린 뒤의 필자
아웅 산 묘소의 상징적인 모뉴멘트다.
아웅 산의 독립투쟁에서부터 서거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활동들을 전시해놓았다.

 
남국의 하절기 태양은 결코 친밀감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오랜 경험으로 체득한 나다. 해서, 태양이 더 커지기 전에 나는 양곤 시내 중심가에서 택시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아웅 산의 고택으로 달렸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정원으로 들어서니 그가 생전에 살던 집은 현재 ‘아웅 산 장군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었고, 정원 중간에 동화 속 집 같은 아름다운 서양식 양옥이 눈에 들어왔다.
 
 

아웅 산 장군 박물관 입구
박물관 내부에서 내다 본 정원
아웅 산 박물관 본관. 이 건물이 임시정부 수반 시절 아웅 산과 그 가족이 살았던 집이다.

 
그런데 내부 전시물은 그다지 많지 않아 아웅 산 장군의 독립운동의 역정을 비롯해 그의 삶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전시된 자료가 충분치 않아 보였다. 그저 그가 생전에 살던 실내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둔 채 그의 많지 않은 빛바랜 사진들, 그가 쓰던 서적들, 집기, 가구, 물건 등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임시정부 시기 아웅 산 장군의 계급은 육군 준장이었다.
버마의 남성 전통복장(론지) 차림의 아웅 산

 
늘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겉모양의 외관이 아니다. 그것이 품고 있는 고갱이가 어떤 것이냐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웅 산 장군의 보이지 않는 그의 혼과 정신이나 사상을 간취해내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임은 두말 할 나위 없다.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자의 몫이다. 첫 느낌! 전체 미얀마인들에게 부동의 독립영웅이 돼 있는 아웅 산은 성역화 돼 거의 국부처럼 받들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민간 정부가 들어선 지금도 배후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는 미얀마 군부도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 산 수찌 여사를 거의 손안에 넣어 통제 혹은 견제하곤 있어도 아웅 산 장군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대지 않고 있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현실적인 명망에서도 그러하지만 그 역사적 평가와 권위를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1915년 2월 13일, 미얀마 중부 삐규 요마(Pegu Yoma) 산맥 북쪽에 있는 마구에라는 縣의 낫마욱(Natmauk)에서 태어난 아웅 산 장군은 1947년 7월 이곳 양곤에서 암살당했으니 불과 32세라는 짧은 삶 밖에 살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다. 32세라는 단명에도 이처럼 미얀마 국민들 사이에 절대적인 영웅이 된 이유는 뭘까? 이것이 내가 이곳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서 맨 먼저 떠오른 의문이었다.
 
 

젊은 시절의 아웅 산. 내부에 전시된 초상화다.
혼례를 올린 모습의 신랑 아웅 산과 신부 마 킨 찌(Ma Khin Kyi). 두 사람은 1942년 9월 6일 결혼했다. 이 때 신랑은 27세였고, 신부는 신랑 보다 3세 연상인 서른 살이었다.
간호사 신분에서 군인이자 혁명가를 남편으로 맞은 킨 찌 여사. 심신이 쇠미해진 아웅 산이 랑군종합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을 때 고참 간호사였던 킨 찌는 젊은 청년 장군을 온 정성을 다해 간호해줬는데, 아웅 산은 이에 마음이 움직였지만, 킨 찌는 아웅 산에게 이성적으로는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전후 독립한 대부분의 신생국들이 다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듯이 현대 미얀마 역사의 산고와 비극은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기인된다. 해가 지지 않았다는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은 결코 인도 하나만으로 만족해할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인도가 대륙처럼 넓고 자원이 풍부했다고 해도 인도 한 나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대영제국은 아시아 식민지를 확장하려는 꿈을 접지 않는 한 그 목적을 달성해 줄 거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 동쪽의 중국세력과 완충지역에 위치한 버마(당시 국호)를 넘보기 시작했다.
 
버마로 침략의 마수를 뻗친 영국은 버마인들의 저항에 부딪쳐 1824년부터 세 차례 군사적으로 격렬한 진압작전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긴 세월 동안 저항이 만만하진 않았지만 최후의 결과는 뻔했다. 1858년 대영제국은 인도를 지배한 무굴제국(Mughal Emperor)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자파르(Bahadur Shah Zafar, 1775~1862)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버마의 수도 양곤으로 추방한 사실은 영국의 속셈을 짐작하게 해주는 일화다. 샤 자파르는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버마에서 죽었다.
 
 

무굴 제국 최후의 황제 샤 자파르의 초상

 
1885년 영국은 이번엔 만달레이(Mandalay)에 기반을 둔 버마 마지막 왕조의 젊은 군주 띠보 왕(Thibaw, Theebaw라고도 씀, 1858~1916)을 몰아내고 인도 서해안의 한적한 어촌 라트나기리(Ratnagiri)라는 곳에다 유폐시켜버렸다. (그는 그곳에서 30년이나 유배돼 있다가 결국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버마가 식민지로 전락하기 1년 전이었다. 마침내 1886년 버마가 영국에 합병돼 식민지가 됐다.
 
영국이 버마를 합병하자 아웅 산의 가문은 일약 반영국 저항운동을 주도한 가문으로 떠올랐다. 아웅 산은 반영국 투쟁으로 명성이 자자한 자기 부모의 피를 속일 순 없었던 모양이다. 패기와 꿈을 적당히 나눠 가진 이 젊은 청년은 10대 때부터 영국 제국주의에 대해 반감을 품은 반제의식이 표출되는 것에서부터 혁명가, 정치인으로서의 삶의 역정이 시작됐다. 앎은 힘의 원천이자 행동의 에너지였다. 1932년 17세의 나이로 ‘랑군대학교’(현 양곤대학교)에 들어간 아웅 산은 재학 중 학생회서기로 활동하면서 사회의식에 눈 뜨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을 정상적인 시간에 하지 못한 그는 1936년 2월 자신보다 여덟 살이 많았던 친구 우 누(U Nu, 1907~1995. 누가 이름이고, 우는 버마인들의 칭호의 관습대로 아랫사람들이 높여 부를 때 붙이는 존칭 접두어임)와 함께 동맹휴학을 이끌었다. 우 누와 함께 동맹휴학을 이끌던 1936년 그해 아웅 산은 버마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에 뽑혔다. 학생회 간부의 직함이 서기장이라니 어쩐지 무시무시하다는 느낌이다. 현대 미얀마어 사전엔 서기장이라는 단어가 나와 있지 않은 걸로 봐선 서기장이 아니라 미얀마어로 드어바버디(dhəbabədi)로 발음되는 သဘာပတိ, 즉 의장으로 불리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아웅 산은 1937년 버마가 영국 식민치하에서 영연방의 일원인 인도에서 분리되고, 그 이듬해인 1938년 입학한지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졸업 후, 아웅 산은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인 ‘도바마 아시아요네’(Dobama Asiayone)와 ‘우리버마인협회’(We Burmans Association, 약칭 DAA)에서 일하다가 1939년 이 조직의 총서기가 됐다. 이어서 그는 버마 독립을 표방하고 나선 급진정당인 타킨당(Thakhins 버마어로는 သခင)에 입당한 뒤 여기에서도 나중에 당 서기장까지 올라갔다.
 
식민지 종주국 영국은 아웅 산의 반영국 저항활동을 좌시하지 않았다. 영국 당국의 체포령이 떨어지자 아웅 산은 1940년 8월 일본으로 탈출했다. 일본에서 아웅 산은 버마 공작기관의 스즈끼 케이지(鈴木敬司, 1897~1967) 대좌와 만나 그의 지원을 약속받고 비밀리에 중국의 하이난(海南)도로 가서 그곳에서 버마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뒤 아웅 산은 인도에 잠시 머물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41년 12월 26일 일본에서 함께 훈련을 받은 ‘30인의 동지’와 태국 방콕에서 버마독립의용군을 창설한 뒤 그들을 이끌고 1942년 3월 8일 일본군과 함께 양곤으로 진입해 영국세력을 버마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버마는 1943년 8월 1일 독립을 선언하면서 영미에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일본과 동맹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일본은 영국을 몰아내고 난 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가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국보다 더 잔인하게 버마를 통치했다. 서구 식민지역사에서 가장 악랄하게 식민통치를 한 것으로는 프랑스가 영국 보다 더 악질적이었지만 일본은 프랑스 보다 더 악질이었다. 그런 일본을 불러들였으니 승냥이를 쫓아내려다가 이리를 불러들인 꼴이었다. 그만큼 당시 아웅 산 등의 젊은 “운동권” 지도자들이 일제를 몰랐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악랄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1944년 8월 ‘30인의 동지’들과 함께 반(反)파시스트 조직인 인민자유동맹(AFPFL)을 결성해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한 아웅 산은 1945년 3월 27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에 호응해 내지에서 버마를 침략한 일본군과도 싸웠다. 일본이 버마를 점령한 1942년부터 패망해 물러난 1945년까지 버마의 독립운동은 기존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웅 산이 주도한 군부 등 세 세력이 주도했었다. 아웅 산은 버마공산당의 창당발기인으로서 사회주의자들의 리더이자 군부의 지도자였다. 일제의 항복으로 일본군이 버마에서 철수하자 아웅 산은 바 마우(Ba Maw, 1893~1977)가 이끄는 버마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이 됐다. 그의 나이 불과 27세였다.
 
그런데 일본군이 물러난 베트남에 옛날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가 다시 들어와 국가권력을 장악했듯이 영국도 아웅 산이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도와준 것을 명분으로 1945년 10월 버마 총독으로 임명한 도만 스미스(Sir Reginald Dorman-Smith, 1899~1977)를 앞세워서 버마로 재차 돌아와서 다시 행정, 군사, 외교의 제반 권력을 장악했다. 영국의 치하에서 아웅 산은 인민자유동맹 총재 자격으로 영국총독의 행정참사회에도 참가하는 등 사실상의 국가총리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입법거부권을 가진 영국인 총독 밑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자 1947년 1월 2일 버마 독립을 협의하기 위해 양곤을 떠난 아웅 산은 도중에 인도 뉴델리에 들러 네루 수상과 버마의 독립 및 영국이 버마에 주둔시키고 있는 인도군의 철군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눈 뒤 1월 27일 런던에서 영국노동당 출신으로 내각의 수장이 된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 1883~1967) 총리와 담판을 벌여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고 영국이 1년 안에 버마의 완전독립을 약속한다는 내용의 협정서를 발표했다. 버마독립을 위한 거보를 내디뎠던 것이다. 국민적 영웅을 향한 명성과 권위가 쌓이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이 공로로 아웅 산은 1947년 4월에 치러진 제헌의회선거에서 자신이 이끈 반군국주의국민자유연맹(AFPFL)이 총 202석 가운데 196석을 얻어 압도적인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국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영국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비난까지 받았지만 끝까지 영국연방에서 벗어나고자 한 독립결의안을 지지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버마는 1948년 1월 4일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국호 ‘버마연방’(Union of Burma)으로 새로 출발했다.
 
그런데 버마가 영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립은 이뤄냈지만 새로운 버마정부가 수립되기 전 아웅 산 총리는 랑군 시내 임시정부 청사 회의실에서 자신의 친형이 포함된 9명의 내각 요원(행정참사 회원)들과 함께 행정참사회 회의를 주재하던 중 신원불명의 4명의 괴한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 1947년 7월 19일 오전 10시 18분이었다. 버마의 독립에 결정적 공헌을 한 그였지만 공교롭게도 독립을 보기 6개월 전이었다. 독립 이후 버마연방의 지도자로 내정된 상황에서 맞은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막내 딸 수찌가 2살 때였다.
 
범인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반대해온 전직 수상 갈론 우 쏘(Galoon U Saw)가 보낸 4명의 암살단이었다. 배후에는 공범자들이 더 있었지만 당시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임시정부 청사 정문을 통과한 뒤 회의실로 들어서면서부터 난사해서 내각 요원 9명이 전원 현장에서 즉사했다. 특히, 암살자들의 집중 사격을 받은 아웅 산은 13발의 총탄을 받았으니 절명할 수밖에 없었다. 암살의 배후 인물인 우 쏘는 영국 총독 스미스가 직접 임명한 식민어용정부의 마지막 수상으로서 버마 독립을 약정한 “아웅 산-애틀리”합의를 줄곧 반대해오던 자였다. 저격범의 우두머리 마웅 쏘(Maung Soe)는 사형을 선고 받고 1948년 5월에 처형됐다.
 
아웅 산이 반대 세력으로부터 암살당하자 우 누가 아웅 산 대신 정식으로 버마의 초대 총리에 취임했다. 영국의 버마 식민통치가 무르익던 시절, 1907년 버마의 와께마(Wakema)라는 곳에서 태어난 우 누는 얼마 뒤 버마 친일과도정부에서 외무부 장관과 제헌의회 의장을 역임했고, 1948년 독립된 버마의 초대 수상에 취임해 1958년까지 그리고 1960년부터 62년까지 2년을 더 재임한 인물이다. 아웅 산의 과실을 그가 따먹은 셈이다. 그리고 독립전쟁 기간 동안 우간다에 억류돼 있던 아웅 산의 정적 우 사우가 아웅 산의 암살과 관련됐다는 혐의로 처형됐는데, 정치적인 냄새가 난다.
 
32년이라는 짧은 인생 동안 오로지 버마를 위해 살았던 아웅 산 장군이었다. 그리고 버마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사로서의 삶은 17세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그가 독립투사로서 살았던 삶은 대략 15년 정도였다.
 
러시아를 떠나 유럽 각국을 떠돌면서 운동을 펼친 레닌이나, 중국에서 오랫동안 항일운동을 펼친 김구와 호치민에 비하면 그다지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이 기간 동안 독립추구에 헌신해 영국과 일본에 무력 항쟁하여 버마의 독립을 이끌어냈으면서도 건국과정에서 아쉽게도 요절한 삶을 산 아웅 산 장군은 미얀마 국민들에게는 국부와 같은 존재가 됐다. 이제 그가 타계함으로써 미얀마 현대사의 일단이 매듭지어진 듯하다.
 
나는 요절처럼 느껴지는 아웅 산 장군의 죽음 앞에 서자 그가 살아생전에 꿈 꿨던 정치적 이상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웅 산이 일찍 살해되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버마의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 따가운 여름 햇살에 벌레들만 소리를 내고 하늘만 푸를 뿐, 아무런 답이 없다. 여행이 늘 그렇듯이 나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문제다. 뜻하지 않게 미답지에 기왕에 내디딘 발을 아웅 산이 추구하고자 한 정치적 꿈의 세계로 성큼 한 걸음 더 들여놓아보기로 했다.  (제1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