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역할 : 히틀러시대 독일지식인들과 21세기 한국의 지식인들
언제, 어떤 나라에서든 늘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인이다. 지식인라고 해서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별없는 지식인, 학문과 양심이 따로 놀아 진실을 외면하고선 특정 정치세력의 입이 되는 지식인, 본업인 학문연구 및 교육은 부업이 되고 부업인 정치를 본업으로 삼는 폴리페서 류의 어용지식인, 서푼어치 지식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대는 사이비 지식인이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하는가? 그 범주는 어떤가? 지식인에 대한 개념과 범위를 두고 역사학과 사회학 위주의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의가 있어 왔다. 나는 이 글에서 지식인의 범주를 협의로 본다. 그래서 특정 분야 전문지식의 소유자로서 그 지식이 바탕이 되어 대학 이상의 교육과 학문연구에 종사하면서 일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에 국한하고자 한다.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은 학문연구를 일차적 소임으로 삼아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소신껏 사안의 본질을 말하거나 진실과 진리를 얘기할 뿐만 아니라 지성적인 비판자 역할을 하고, 인간 본연의 양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한 사회, 한 국가 나아가 한 시대의 성쇠와 흥망은 가히 이들 지식인들의 양심과 역할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어느 시대든, 어느 사회에서든 지식인의 향방과 역할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다. 그들이 학자적 본분을 지켜나갈 때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고, 그들이 본분을 망각하고 궤도에서 벗어나 있을 때 진실과 허위, 흑과 백의 전도가 따른다.
지식인이라면 사회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데서 일어나는 혼란에 대해선 그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혼란을 통해서 제자리를 잡아가는 게 역사의 율이었다. 혼란이 아니라 전도되는 게 문제인 것이다. 지난 세기 지식인은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비유됐다. 계기가 발달하지 못해 해저의 잠수함 속에 산소가 부족한지 가늠하기 위해 실어놓은 토끼가 산소가 부족하면 비실대고 곧 이어 승조원들도 영향을 받듯이 지식인이 숨을 쉬지 못할 때 사회는 질식한다. 그래서 지식인은 지성과 몰지성, 자유와 방종, 민주와 독재, 평등과 특권, 사상의 개화와 혼돈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표석이자 한 사회의 성숙과 미숙이 가늠되는 바로미터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에서 국가 최고지도자가 지식인을 손안에 넣고 고분고분 따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통제하거나 억압하다가 일어난 사건들이 그토록 많았던 이유다. 일국 차원이 아니라 인류사에 크게 영향을 미친 사건만 꼽아도 고대 중국의 진시황이 단행한 분서갱유, 1930년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8)의 지식인 세뇌와 박해 및 서적 소각, 동시기 장개석의 지식인 통제, 1960년대 모택동이 추동한 소위 ‘문화대혁명’(이는 잘못된 용어이지만 이미 고유명사가 되다시피 돼 있어 그대로 쓴다)이 모두 지식인이 문제가 되거나 지식인을 대상으로 삼았던 역사적 사건들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지성을 시험한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 ; Drefus Affair)도 카톨릭 교계가 세속권력에 간여해오던 대로 거짓을 옹호하면서 지식인을 압박하거나 길들이려 한 동기가 존재한다는 측면에선 광의로는 권력이 지식인을 길들이려 한 문제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또 반대로 지식인의 역할이 항구여일, 시종일관 비척대지 않고 견고했었더라면, 일국사 수준이 아니라 세계사 수준에서 역사의 흐름이 달라졌을 수 있는 상황들이 많았다. 지식인들이 절대권력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고 비판자역할을 올곧게 했더라면, 대외 제국주의 침략 노선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던 일본의 메이지(明治), 다이쇼(大正), 쇼와(昭和) 시대, 광기의 반유태 종족주의, 나치 전체주의와 대외 침략전쟁으로 나아가기 힘들었던 히틀러 시대, 지식인들이 모택동의 개인숭배 조짐에 대해 흔들림 없이 가열찬 비판이 있었더라면 그 뒤 광란의 문화대혁명이 뒤따르지 않을 수 있었던 1950~70년대의 모택동시대가 반면교사로 떠오른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근대사에선 일제의 한일강제 병합에 찬성하고 일본 국수주의침략자들의 편에 서서 강점과 착취를 도왔던 ‘을사 오적신’은 모두 지식인들이었다. 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 이 다섯 國賊들 중에 특히 이완용은 촉망 받던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박정희의 유신개헌에 찬동함으로써 단축될 수 있었을 수도 있던 군사독재를 연장시켜 준 것도 당대의 이름난 지식인들이 그 체제에 영합한 탓이 컸다.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21세기의 최근 십수년 간 한국사회에서 4대강사업 여부가 논란이 됐을 때 일부 지식인들이 보여준 사실왜곡과 부역, 정치적으로 악용한 집권당의 ‘세월호 침몰사건’에 대한 곡해, 대일 과거사 및 일본군강제성피해여성 문제에 대한 곡해도 모두 지식인들이 주도한 것들이다.
이처럼 최근 10여년 사이, 한국사회에서는 중대한 이슈가 된 4대강사업, 세월호침몰사건, 일본군강제성노예피해여성 문제, 한국인 강제징용피해 노무자들에 대한 배상문제 등등에 대해 지식인들의 분별없는 대정부 비판 및 일본 두둔발언, 번지수를 찾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몰지성 등의 일탈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거나 논박하려면 한 권의 두툼한 백서를 써야 할 판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여건상 제약이 있는 나로선 버거운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20세기 전반기 히틀러 시대 독일 지식인들이 자기가 처한 시대상황을 어떻게 인식했고, 권력과의 관계는 어떠했으며, 나치즘과 반유태종족주의(anti-Semitism) 및 대외침략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을 했는지 그들이 걸은 행보의 일단 그리고 지금의 한국지식인들은 어떻게 살고,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점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 과제를 대신한다.
히틀러 시대의 지식인 문제는 현대사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식인의 역할과 존재에 관해서 가장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고 있는데, 한국지식인과의 비교가 본고의 주제는 아니다. 전문적인 학술논문이 아니어서 단지 양쪽에서 일어난 사실들을 중심으로 서술할 것이다. 양자에 대한 심층적인 비교 분석은 차후의 과제로 남겨놓겠다.
지금부터 전개될 본론은 지난 세기 독일지성사의 상황을 축으로 먼저 히틀러의 이야기와 그가 국가권력을 잡게 된 상황을 거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히틀러의 집권이 가능하게 된 것은 독일국민들이 스스로 만든 자업자득의 과보였다. 나치즘이 씨를 뿌리고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스, Nazi Party)의 당원들이 발호할 수 있게 만든 것은 국민들의 현실불만, 민족적 열패감 등이 비옥한 토양이 돼줬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나치즘 시대의 발흥에는 독일의 국가 최고지도자였던,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라는 명성 덕에 1925년 바이마르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이 된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의 실수와 무능이 숙주역할을 했다. 그는 히틀러가 선동 공작을 하고 다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법률을 조속히 개정하거나 제정해서 미리 히틀러라는 위험인물을 제거했어야 했는데 우유부단하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44세에 불과한 히틀러 같은 나이 젊은 정치초짜 쯤이야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가볍게 생각한 나머지 보수세력이 나치세력과 연정하게 되면 히틀러가 맘대로 할 수 없으리라 자신했다.
8년 뒤인 1933년 1월 20일, 힌덴부르크는 오스트리아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나 무일푼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히틀러를 내각 수상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나서 이듬해 8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가 사라지자 독일은 완전히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내각 수상에서 즉각 대통령의 권력까지 움켜 쥔 히틀러는 먼저 의회의 견제 혹은 반발을 무력화시키고자 게르만민족의 부흥과 의회제도를 부정한 반민주, 반볼세비키즘을 역설하는 선전선동과 교묘한 정치적 술수들을 통해 의회를 장악하면서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전쟁을 포함한 의회의 모든 권한을 자기 수하의 내각으로 옮겨버리고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전권을 이양하는 법”(Ermächtigungsgesetz)까지 통과시켰다. 결과적으로 보면 힌덴부르크가 나치세력이 야금야금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해 들어가도록 히틀러에게 합법적인 활동공간을 넓혀준 셈이다.
그런데 나치독일의 제3제국은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실패에서만 생겨난 게 아니다. 패배와 고난 가운데 다시 사람들에게 명예감정과 자기의식을 회복시켜 주는 메시아 같은 구원자에 대한 민중적 대망에서 비극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었다. 당시 독일민중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재정의 몰락에 대한 기억, 바이마르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과 방향상실, 달러당 1,300억 마르크로 치솟은 인프레와 극심한 실업문제 등에 대해서 대단히 불안해하거나 불만이 많았다. 게다가 1932년에는 전반적인 불황도 독일사회를 덮쳐 실직자가 600만 명을 넘어섰다.
또 민주주의는 독일의 패배로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들(영국, 프랑스 등)로부터 강제로 주입된 것이라고 인식되었고, 독일국민들은 오히려 그때까지 관헌국가의 권위적 사상에 포박되어 있었다. 또한 경제의 대공황과 실업자의 증가로 견고했던 삶의 터전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독일 국민들은 환상적인 공포와 터무니없는 희망을 환영했다.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서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새로운 독일을 약속하고 독일국민의 민족주의의식을 강화할 것을 내세워서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유럽 근대사에서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만든 것이 예술이었다면, 독일을 독일답게 만든 것은 뭐니 해도 관념철학이었다. 미국이 법을 우선시 했다면 독일은 철학을 우선시했다. 프랑스인들이 사회철학을 선호했다면, 독일인들은 관념철학을 즐겼다. 독일에선 철학자가 보통 연예계의 스타와 비슷하게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그가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일반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연예계 스타들이 세속적인 것은 독일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독일에선 철학자는 스타들과는 다른 초월적인 존재로 믿어지고 있다. 마치 일반인들에게 사회 전체의 유산처럼 성직자들이 현실을 뛰어넘어 사고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믿어지는 것과 같이 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런 정신적 유산 속에서 독일 국민들은 철학자를 높이 평가해왔다.
독일의 일반인들이 그랬듯이 히틀러도 철학자를 높이 평가했다. 철학은 젊은 그에게 우상으로 우뚝 서 있었다. 20대의 젊은 시절 바이에른 주정부를 전복했다는 죄목으로 5년 형을 선고 받아 란츠베르크 옥중에서 쓴 『Mein Kampf』(마인 캄프프), 즉 『나의 투쟁』이라는 자서전에서 히틀러는 근대 독일사회에서 이름을 날린 저명한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 예술가들의 사상을 떠받들 듯이 기술한 것이 그 예다.
프리드리히 니체, 임마누엘 칸트, 마틴 하이데거, 카를 야스퍼스, 베네딕트 스피노자, 아더 쇼펜하우어, 카를 슈미트, 찰스 다아윈, 리차드 바그너 등이 숭모자로서 자서전의 한 페이지를 차지했다. 그는 옥중에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과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등 독일의 고전적 사상가들의 사상을 많이 답습하거나 모방을 했다.
히틀러는 철학과 사상의 대가들이 펼친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논리 정연한 사상 및 주장들을 접하면서 그들을 추종하거나 모방을 해댔다. 프리드리히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가 외세의 압제자에 대한 게르만민족의 봉기를 주창하는 내용을 담은 희곡 ‘빌헬름 텔’(Wilhelm Tell)이 했던 “강자는 가장 고독하다”는 말을 듣고 히틀러는 그게 마치 자기가 그런 것인양 행동한 것이 비근한 한 예다. (실제로 그는 이 말을 자기 자서전 ‘나의 투쟁’ 제2권 제8장의 표제어로 삼았다.) 그러다가 나중엔 1930년대에 가선 그 자신이 곧 철학에 일가를 이룬 철학의 대가연하고 다녔다.
히틀러가 칸트, 니체, 독일 사회다아윈주의자들의 사상과 관념을 접한 결과였는지 반유태종족주의를 추구하고 대외침략 전쟁으로 몰고 간 자신의 통치철학의 연원을 그들의 사상에 두었다. 그런데 히틀러가 사상의 창조자가 아니라 철학의 모방자이자 소비자의 수준에 머물러 혼자서 자족하던 때는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오히려 1933년 1월 30일, 독일 제3공화국 정부의 내각 총리로 취임하기 이전까지는 한 때나마 히틀러는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로 보였었다.
문제는 그 뒤부터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힌덴부르크의 오판으로 히틀러가 겨우 43세의 나이로 독일정부의 내각 총리로 등극하면서 일단 권력을 잡고나자 그때부터는 군대와 자기가 결성한 SA로 불린 암살단 내 숙청뿐만 아니라 공산당, 사회민주당, 카톨릭 중도파, 민족주의자 등 정치적 반대자들을 살육하듯이 죽이고 잡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지식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학술계 내의 유태인 학자들을 모두 쫓아냈다.
참고로 이 시기 히틀러가 재판도 거치지 않는 잔인하고 무제한의 폭력을 사용한 갱단의 공포스런 범죄방식을 통해 죽인 사람은 대략 500명이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든 관련 서류도 불태워졌다. 처형하기 전에 왜 재판을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히틀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독일 국민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다. 내가 바로 최고의 정의다. 그리고 장래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을 시도한다면 그의 운명은 죽음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한다."
히틀러 정권의 폭거 앞에 독일의 철학계, 사상계의 지식인들은 사분오열돼 크게 두 부류로 양분됐다. 히틀러의 반유태종족주의와 침략전쟁에 협력해 이름을 날리고 세속적으로 출세한, 자신을 속인 양심불량의 비겁한 지식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히틀러의 나치즘과 그 통치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다가 삶은 완전히 파탄을 맞았지만 떳떳한 양심적인 지식인들로 극명하게 갈렸다.
절대 권력으로 독재를 시작해 독일민족의 영혼을 바꾸고자 한 히틀러에게 협력한 지식인들은 어떤 인물들이었을까? 그들은 히틀러에게 무엇을 제공했을까? 그 대가로 그들은 히틀러로부터 어떤 과보를 받았을까? 히틀러는 사상적으로 자신과 부합하는 지식인들을 기용하거나 발탁했다. 그가 발탁한 지식인 가운데는 반유태주의 및 나치즘 확산의 캠페인과 침략전쟁의 이념과 필요성을 고취시킬 수행자로 알프레드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라는 지식인이 대표적이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아 생소한 느낌이 드는 인물이지만, 사실 로젠베르크는 히틀러보다 더 빨리 나치스당에 입당한 나치스당의 중요한 멤버로서 인종학의 이론가이자 당시 독일 지성계의 사상적 지도자였다. 어릴 때부터 철학에 대해서 많은 흥미를 가졌든 로젠베르크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칸트와 쇼펜하우어 그리고 헤겔의 저서를 섭렵한 지식인이었다. 칸트에 대해서는 게르만 민족의 문화적 영웅으로 평하기도 했던 그였다.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의 인종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자였다. 그의 종족이론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1934년에 출간한 20세기의 신화, 즉 『The Myth of Twentieth Century』라는 저서에 담겨 있다. 이 책은 히틀러로부터 “아무도 알 수 없는 것”, “저자는 편협한 발트족이며, 그의 사고방식은 무서울 정도로 회삽적(晦澁的, 즉 난해)이다”라고 작가의 인물 됨됨이까지 싸잡아 혹평을 당했던 저서였다.
그럼에도 이 책은 1945년에 이르기까지 100만권 이상이 팔려나갔다. 이 책에서 로젠베르크는 “유태인문제”처럼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뤘는데, 그의 “인류종족 사다리”(Human Racial Ladder)이론이 나치스당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으며, 그에 힙 입어 그도 수석 종족이론가로 천거되었다.
로젠베르크의 종족이론은 아주 간단하다. 세계의 수많은 종족들 중에 태생적인 우열을 나누고 최상의 우등종족으로 백인을 친 반면, 최고 열등한 종족층에는 아프리카인과 유태인을 두었다. 여기서 백인들이란 바로 북유럽인을 가리켰는데, 북유럽인들은 여타 아리안족으로 구성된 종족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하면서 북유럽인들도 우열로 분류했다. 즉 영국인들과 몇개 종족들을 제외하고선 북유럽의 우수한 민족들은 주로 독일인들로 이뤄져 있고, 로젠베르크 자신이 에스토니아 혈통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동유럽민족들도 우수한 아리안종족이라고 주장했다. 로젠베르크가 분류한 이 모든 주장들은 생물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황당무계한 괴변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치스당의 정신적 지도자, 철학교사로 떠받들어졌다.
로젠베르크의 인종이론과 히틀러의 그것은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히틀러가 인종주의 정책으로 게르만 민족뿐만 아니라 여타 세계의 민족 전체를 구원할 수 있다고 봤다는 것이다. 여기에 호응한 지식인들도 유사한 인식을 가졌다. 민족과 민족 간 우열을 가리고 가장 우수한 게르만민족이 여타 민족을 지도해야 한다는 사고가 도달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귀결점은 폭력과 전쟁이 필연적이었다. 요컨대 나중에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은 이미 나치당의 인종관과 인종정책에 사상적으로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히틀러 치하에서 로젠베르크가 한 일은 민주주의를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나치주의 이념을 세워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사회의 일각에 내려오던 반유태주의 정서를 최대한으로 악용했다. 로젠베르크는 히틀러가 독일을 통치한 몇 년 동안 이러한 지식인들의 생각, 관념, 해석, 주장들을 받아들여 정치선전에 활용했다. 이 가운데 우리가 결코 잊어선 안 될 사실이 있다. 그것은 히틀러가 독일철학자들에게서 반유태주의의 실마리를 찾고선 종족, 강권, 전쟁관념을 변형해 개작함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합법화하고 정당화 하는 데에 이용한 점이다.
히틀러에 부역한 또 다른 지식인으로는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교수 에른스터 크리히(Ernst Kriech, 1882~1947), 히틀러 정권의 교육상 러스트, 히틀러를 도와 헌법을 제정한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 등을 꼽을 수 있다. 로젠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모두 히틀러의 하수인이었다.
이들처럼 나치즘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거나 혹은 히틀러의 헌법제정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거나 반유태주의 그리고 이웃국가들에 대한 침략전쟁으로 몰고 간 히틀러의 나치사상을 뒷받침한 학자들은 적지 않았다.
이런 황당무계하게 왜곡된 주장들을 정부 관료들에게 주입하고 국민들에게 받들어지게 하려면 행정 수단이 동원돼야 하고 교육도 국가에서 장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독일의 교육을 나치즘을 받들도록 철저하게 바꾸기 위해 학술 및 교육계내의 협력자가 필요했다. 이 목적달성을 위해 알프레트 보임러(Alfred Bäumler, 1887~1986)라는 철학자도 기용됐다.
반면, 히틀러의 통치 사상에 반대했거나 협력하지 않은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현직에서 일자리를 잃었거나, 감옥에 수감됐다. 그게 아니면 혹은 해외로 망명을 떠났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치스당에게 처결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만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카를 야스퍼스, 테오도르 아도르노,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그의 연인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절친 발터 벤야민, 커트 후버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각기 자신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어법으로 히틀러와 나치즘을 비판하거나 반대했다. 그러한 비판과 반대는 공통적으로 의회 기능을 말살한 전제적인 나치당의 폭압적인 통치, 나치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축인 종족적 우열을 자의적으로 가름하고 탄압한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와 비판으로 수렴된다.
이들 중 한나 아렌트는 전후에도 이스라엘 국가안전부에서 나치스 친위대 중령으로 유태인담당 과장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을 추적, 체포해 법정에 세웠을 때 재판과정을 보도하고 나중에 그 보도기사를 수정해 책("Eichmann in Jerusalem"=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출간해 끝까지 나치스의 부역자들을 응징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히틀러의 민족정책과 관련된 민족개념은 해방공간에서 간접적으로 잠시 한반도에까지 흘러들어온 듯하다. 과거 독일(국립 훔볼트학술재단의 연구과정)에 유학한 안호상(1902~1999)을 통해서였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있다가 1948년 정부수립 때 초대 문교부장관이 된 안호상은 자신이 강조해온 “민족”을 중시하고 이것을 교육철학의 모토로 삼아 ‘민주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안호상은 한국의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민주적 민족주의’라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민족’에 종속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하위에 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나치즘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선 이것이 나치 독일의 반유태종족주의 같은 민족개념으로까지는 이행되지 않았는데, 나는 이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1930~40년대 나치 독일의 상황과 2010년대 한국의 상황을 단순 비교할 순 없다.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과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은 한반도처럼 나라가 둘로 분단된 건 아니었다. 다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결과 강대국들에게 배상금지불과 함께 민족적 수치를 당함으로써 국민적 분노와 낭패감이 충만해 있던 상황이었다. 또 한반도처럼 친일청산이라는 국가적 과제 대신 부국강병이라는 국민들의 여망을 업고 등장한 히틀러에 의해 나치이념을 헌법 보다 상위에 둔 상태에서 헌법, 사상, 교육은 모두 이를 위해 움직였다.
이와 달리 비슷한 시기 한국은 일제에서 광복을 찾은 뒤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고,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친일부역자들이 “반공이념”을 들고 나와 반공애국자로 치장하고선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를 완전히 깔아뭉개 무화시켜버리고 권력과 재력을 모두 거머쥐게 됐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바로 이들의 후손들이 사회 지배층의 일부가 돼 선대가 거머쥔 기득권을 유지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구축한 체제 속에서 작동되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공간이 다르다고 해서 독일과 한국 두 나라를 관통하는 요소가 없는 건 아니다. 본고의 주제인 지식인의 역할과 관련해 무릇 지식인이라면 진실을 외면하고 양심을 팔지 말고 지식인 본연의 정신과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요구된 바 있고, 지금도 요구되고 있다는 점이다.
히틀러 정권이 행한 유태인 학살의 대명사격인 아우슈비츠(폴란드에 있어 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으로 불림)와 홀로코스트(Holocaust)의 만행과 참상을 직접 목도하고도 지식인들이 눈을 감았듯이, 히틀러에 부역한 독일 지식인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21세기 이 땅의 한국사회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사실을 호도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지식인들의 “양심 팔이”는 끊이지 않고 있다.
독재자를 추수해서 나치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 나치와 같은 법률 제정, 나치와 같은 교육을 실시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선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정치를 논하면서 제기한 ‘소명으로서의 정치’와 유사한 개념 혹은 정신자세로 살아가는 지식인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막스 베버는 “정치인, 지도자는 정치적 소명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정치적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말한 정치적 소명의식이란 “내면적 신념 혹은 내면적 신념윤리의 원천으로서의 소명의식”으로서 “어떤 목적의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 또는 신념을 통해 갖게 된 스스로의 내면적 믿음이 그로 하여금 어떤 외부적 보상이나 제제가 아니더라도 무조건적으로 마땅히 그가 해야 할 의무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신념을 현실 속에서 이행해야 할 책무, 즉 텍스트(‘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말하는 ‘책임윤리’의 도덕적 원천으로서의 소명의식이다.”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폴리테이아』, 제1부 강의 : 정치가는 누구인가? 37쪽.) 막스 베버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원용하면 소명의식이 없는 이가 정치인이 돼선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지식인이 돼서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시대 한국의 지식인에게 부여된 인류적, 국가적, 사회적 소명의식은 “어떤 목적의식” 없이 오로지 “내면적 신념 혹은 내면적 신념윤리의 원천”에 입각해 대승적, 대국적 관점에서 세계평화의 지속과 전쟁방지, 지구적 생태계의 보존 유지, 남북평화통일 여건 조성,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의 실현, 복지와 평등이 구유된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데 힘을 보태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에 역행하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최근, 일본 아베 총리가 도발한 대한 수출 규제로 인해 한일 간에 무역전쟁이 점화돼 불붙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 반응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언행에서 여과 없이 민낯으로 드러난 것도 그 한 가지 예다. 지식인으로서 비판자, 견제자 역할을 한답시고 대승적, 대국적 견지가 아니라 소승적, 당파적 이익을 위해 현 집권세력을 근거 박약한 사실로 과도하게 비판하다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결국 아베의 나팔수가 되거나 호응 세력이 돼 아베에게 부역하는 결과를 안겨 주는 자들이 그들이다.
국가에 대한 배상은 끝났다 치더라도 침략 시 강제징용자들의 개인적 청구권은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 현대 국제법의 추세이며, 게다가 일본의 해당 기업들은 직접 중국과 미국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까지 찾아가서 그들에게는 보상을 약속했고, 또 실제로 보상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기회를 정권을 바꾸는 기회로 보고 문제를 도발한 아베에겐 큰 비난 없이 의례적인 지적만 하면서 가벼운 잽만 날리고선 자국의 대통령에겐 다련장포를 퍼부어대는 지식인들의 정치공학적 망언, 비판을 위한 비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대는 친일적 작태는 아베 만큼이나 화를 돋군다.
한국사회에는 만일 히틀러 같은 광기의 선동자가 국가권력을 잡는다면 그를 따르고 부역할 지식인들이 많아 보인다. 그건 지식인들만이 아니다. 이 글의 모두에서 제시한 히틀러 정권이 등장하게 된 배경의 하나로 소개한 독일국민들의 이성상실과 배타적 욕망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일베”와 같은 극우적 세력은 광기의 선동자가 국가권력을 잡게 되기를 열망하고 있다. 나는 이미 세월호침몰 사건에서 우리사회의 번뜩이는 광기를 봤다.
현재는 당분간 히틀러 대신 반공이념과 아베가 그 위치를 대신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이 어떤 형태든 한국을 공격해오면 버선발로 뛰쳐나가 쌍수 들고 그들을 환영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해 유력한 정치인 ‘나경원’이 이 땅의 젊은이들로부터 “나베”로 조롱 받고 있는 게 어떤 내적 함의를 지닌 것인지 당사자는 자신의 언행을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정치인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출신으로서 “학문과 사상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온전치 못한 식민지근대화론을 숭앙하고 전파하는 지식인들도 광기의 선동자가 출현하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고 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지식인들은 정치 자체에 대해서나 혹은 정부와 의회, 정치지도자의 오류를 비판하고 시정이나 개선을 요구할 수 있다. 그건 지식인만의 특권이나 전유물이 아니다. 일반인도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인은 정치, 경제 사회, 외교나 국방 등 제분야에서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반응하는데 반해 전문분야의 지식인은 무의식적이 아니라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판단해서 의견을 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전문적인 비판은 지식인의 소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제기나 비판시에는 객관성이 담보되고, 사물 및 사안에 내재돼 있는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는 균형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기 진영이라고 무조건 감싸고 돌면 망국적인 정쟁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기 편이라도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양심을 속이지 않는 참 지식인이다. 양심이 상실되면 지식인임을 포기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자신은 오늘날 같은 역사의 전환기에, 한국 땅에서 진정 무얼 위해 사느냐고? 스스로 답이 떳떳하지 못함을 느낀다면, 그는 무엇 보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회복하는데 진력해야 한다.
2019. 8. 31. 12:05
臺北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연구실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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