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레깅스, 민문연 집행부, 자유민주주의

雲靜, 仰天 2019. 4. 7. 15:40

레깅스, 민문연 집행부, 자유민주주의

 

 

 

요즘 미국에서는 레깅스의 무분별한 착용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는 모양이다. 레깅스를 입든, 뭣을 입든 그건 입는 사람의 자유다. 다만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아무 때나, 특히 공공장소에 하의로 레깅스만 달랑 입고 나타나는 건 반대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유를 만끽하는 행위가 타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전제되는 것이어선 안 된다.

 

https://news.v.daum.net/v/20190407060017522?rcmd=rn&f=m

 

무인도나 첩첩산중에서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모두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라면 모든 것은 때와 장소와 상황이 있다. 상황은 때와 장소가 매개돼 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때와 장소와 상황을 가려서 해야 한다.

 

버스나 전철 안에서 컵라면이나 햄버그를 먹어서 냄새를 싫어하는 다른 승객들에게 피해를 줘서 안 되듯이, 비키니를 입고 출근해서 시선공해로 느낄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줘선 안 되듯이,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교통사고 현장의 부모에게 보험 가입하라고 권유해서 유가족에게 불난 집에 부채질해선 안 되듯이, 교회나 사찰 혹은 여타 공공장소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지나친 애정표현을 해서 뭇사람들에게 민망함을 줘선 안 되듯이, ‘민족문제연구소회원인데도 문제제기를 한다는 이유로 총회출입을 금지하거나 발언을 금지해선 안 되듯이 말이다.

 

만약 집안이나 실내 헬스장이 아닌 곳, 즉 바깥 출입시 하의로 레깅스만 입고 나서는 사람이 그 어떤 옷을 입든 그건 자신의 자유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동시에 그 복장을 한 자신을 뚫어지게 보거나 신체의 한 특정부위만 계속 보는 등 어떤 식으로 봐도 그것을 탓해선 안 된다. 레깅스가 아니라 그 어떤 민망할 정도의 옷차림을 하더라도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을 뭐라고 해선 안 된다. 그 또한 보는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가 타인이나 인위적 장치나 제도의 제한을 전혀 받지 않는 천부적 자신의 권리나 권한이라고 생각해서 아무 것이나 마음대로, 임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 조화로운 상태의 지속을 가로 막는 해악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해서 자유와 민주가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무제한으로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지금 현재 민문연 집행부의 발상인 듯하다.

 

이 세상에, 심지어 자연상태에서도 완벽한 자유란 있을 수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라. 인생에서나, 사회생활에서나 자신의 욕구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다 할 수 있는 게 한 가지라도 있는지 말이다. 실존철학자 야스퍼스가 예술가는 제비처럼 자유로워야 된다고 했지만, 예술가의 자유분망함이 창작의 기를 승하게 만드는 요체라는 걸 강조한 비유일 뿐, 사실 그 제비조차도 마음껏 하늘을 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제비뿐만 아니라 모든 날짐승들도 이런저런 대자연의 제약을 받는데, 폭우가 쏟아지거나 기상이변이 있으면 날지 않는다. 자연도 마찬가지다. 꽃도, 수목도, 비바람도, 산과 강들도 자기 의지대로 마음껏 피거나 확장하고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다 보이지 않는 전체로서의 하나를 유지시키고 조화롭게 만드는 내재적 인과율에 의해 제한을 받는다.

 

아래 동영상 속의 꽃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가? 그건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람은 자신이 불고 싶어서 부는가? 그건 기압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힘 때문이다. 그 힘은 저절로 생기는 것인가? 아니다. 기압이 차이 나도록 하는 대기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대기의 움직임은 원인 없이 일어나는가? 지구상의 강, 바다 등 액체의 증발로 인한 기체의 변화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물과 현상의 발생 원인을 소급해서 찾아가면 무한대로 계속 원인이 존재한다. 표현을 달리 하면 인과율, 혹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연기법이라는 한 가지 법칙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시공 초월적 절대 진리다. 그 한 가지에서 삼라만상의 로 전개되고 각기 개체로서 현현된다. 다는 하나로 귀일하는 순환을 반복하는 것이다.

 

 

  

요컨대 一卽多, 多卽一로 끝없이 순환하는 과정 속의 상보적, 순기능적 관계다. 마치 모든 존재의 개체들이, 모든 생명체들이 자신도 모르게 전체로서의 그 하나의 율에 맞게 함으로써 자연의 생태계가 유지되고 인간사회가 유지되듯이 그 인과율이 바로 우주와 자연 그리고 생명의 존재와 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전체로서의 이 무너지고 만다. 이 무너지면 는 혼란과 싸움이 시작되고, 나아가 혼란과 싸움이 극에 다다르는 과정으로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의 지속이 있을 뿐이다. 종국에는 모두가 무너지는 공멸이 기다리고 있다.

 

레깅스를 입는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민문연 집행부 사람들도 자유, 전체와 개체, 조화와 지속의 관계성이라는 근본적인 철리를 알고 생각을 깊이 하면 좋겠다. 이런 기본적인 율을 모르고 어떻게 역사니, 친일파청산이니, 새 시대 민족문제니, 문화의 힘이니 말할 수 있을까?

 

자유개념의 본질을 아는 것은 곧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곧 겸손과 겸허함을 아는 것이다. 자유주의 개념의 정확한 이해와 일상에서의 실천은 민주주의 실현의 토대다. 레깅스, 민문연 집행부, 자유민주주의가 모두 당사자들이 사안의 본질을 몰라 일시적이고 제한적으로 주어진 자유나 권한을 제한 없이 누리고자 욕심을 내는 이들 때문에 혼돈상태에서 모두 시험에 든 것이다.다.

    

2019. 4 . 6. 10:23

臺灣 臺北市 寓居에서

雲靜 草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