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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俳句)와 일본인

雲靜, 仰天 2019. 6. 9. 14:58

하이쿠(俳句)와 일본인

 

가장 짧은 시는 마음에 찍는 한 점이리라. 가히 禪的 경계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면 현실에서는 어떨까? 현실에서 문자로 된 시로는 이 세상에서 일본의 定型短詩인 하이쿠(俳句)가 가장 짧다. 나는 직관과 촌철살인의 미를 느낄 수 있고, 상상의 여백이 있는 하이쿠를 좋아 한다. 잘 쓰지는 못해도 이따금씩 아마추어로서의 기분을 내서 쓰기도 한다. 어느덧 써놓은 게 이미 수십 수가 된다.

 

일본인들도 하이쿠가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라고 크게 자랑해오고 있다. 원래 하이쿠란 5. 7. 5. 7. 7, 즉 총 31(소리)의 글자 이내로 짓는 짧은 單歌 형식의 와카(和歌)에서 앞 發句5. 7. 5의 음(7. 7付句는 생략)으로 하되 그 중에 매듭말인 키레지(切字)가 들어가는 시로서 일본인들에게 널리 사랑 받고 있는 대중적인 문학의 한 장르다. 발구로만 적을 때는 반드시 5. 7. 5의 소리 17음만으로 지어야 하니 짧기를 자랑할 만도 하다.

 

키레지란 連歌(렌가, 두 사람 이상이 和歌上句下句를 서로 번갈아 가며 읽어 나가는 형식의 노래인데, 하이케이(俳諧)와는 대비되는 양식임)나 하이케이용어로서 근대적 하이쿠에서 구가 독립한 1구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구중에서 발구나 말구 중에서 특별히 끊어지는 역할을 하는 자()를 말한다. 예를 들어 마쯔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하이쿠 古池とび중의 가 이에 해당된다.

 

최초 連歌에 대해서 알려졌다가 아시까가 타까우지(足利

尊氏)가 개창한 무로마치(室町)시대(1228~1573)에 이르러 18개의 기레지가 정해졌고, 점차 수를 늘려서 하이케이에도 이어졌다. 여기엔 , かな, けり, , , , らん 등과 같이 조사, 조동사 류가 많지만 용언의 어미나 체언도 있다. 하이쿠가 17개 음의 얼마 되지 않은 소리로 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키레지와 계절을 나타내는 기고’(季語)의 효과 때문이다.

 

하이쿠는 대략 에도(江戶)시대(토쿠가와家가 개막하고 통치한 1603~1867) 전반기인 17세기 때부터 문인들 사이에서 작시되기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하이쿠라는 말로 불린 건 아니었다. 오늘날, 5. 7. 5음 형식의 짧은 시를 일반적으로 하이쿠라고 부르고 있지만, 에도시대 이전에는 하이케이라고 불렀다. 俳句는 바로 俳楷의 준말이다.

 

하이케이는 원래 무로마치시대 말기 이후에 유행한 익살스런(骨稽) 連歌俳楷連歌發句(5. 7. 5)로 되어 있는 구 중의 첫 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5. 7. 5란 세 의 각 구를 반드시 다섯 음(소리), 일곱 음, 다섯 음으로 맞춰야 함을 말한다. 이 때 5. 7. 5는 글자가 아니라 음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글자와 음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는 조금 뒤 다시 언급하겠다. 發句를 에도시대에 마쯔나가 테이또꾸(松永貞德)라는 이가 독립시켜 하이케이로 확립했다고 한다. 하이케이의 일부가 발구가 되고 俳諧發句가 바로 하이쿠로 이어진 것이다.

 

하이쿠라는 용어가 문학상의 전문 용어로 정착되고 일반에서도 하이쿠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를 지나 1868년부터 개시된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에 들어와서 부터였다. 하이쿠가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것은 특히 마사오까 시끼(正岡子規)라는 歌人이 하이쿠라고 부른 데에서 비롯됐다.

 

초기 하이쿠의 작품들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했다고 한다. 문학적으로 질이 한층 높아진 것은 에도시대 마쯔오 바쇼라는, 일본문학사에서 큰 획을 그은 걸출한 인물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일본에선 오늘날 하이쿠의 원류는 문예적 發句를 시작한 바쇼에 두고 있다. 간결미와 物事의 정수를 짧은 구로 뽑아내는 언어조탁의 극치를 보여주는 바쇼의 작품들은 가히 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하이쿠는 언어로 언어를 잊게 하는 언어 이전의 경계에 서게 만든다. 바쇼가 자고로 일본인들에게 하이쿠의 성인(俳聖)으로 추앙되고 있는 이유다. 바쇼는 짧은 51세의 삶 밖에 살지 못했지만 그의 작품들이 일본인들에게 칭송되고 있어 일본인들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다.

 

 

일본인들에게 하이쿠의 성인(俳聖)으로 추앙되고 있는 마쯔오 바쇼의 초상화. 하이쿠가 직관을 지향하듯이 일본인들이 독도문제와 과거사를 바로 직관하면 좋겠다.

  

하이쿠의 특징 중에 일정한 이 정해져 있고 계절어(이를 기고季語라고 함)가 들어가 있는 것을 有季定型이라고 한다. 요컨대 5. 7. 5음의 짧은 세 구로 이뤄진다는 점 외에 반드시 계절이나 절기를 나타내는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일차적 특징인 것이다. 따라서 有季定型이 돼 있으면 그것은 하이쿠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계절어로는 한 단어만 쓰는 것으로 정해져 있지만, 두 개의 계절어가 들어가게 되는 경우를 계절 겹침’(季重なり)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定型과 관련해 17음을 넘어 소리가 많아지게 된 것을 글자 넘침’(지아마리=字余)이라고 하고, 17음에 달하지 못한 것을 글자 모자람’(지타라즈=字足らず)이라고 한다. 지아마리지타라즈는 모두 하이쿠 作詩 시에 가능하면 피해야 하는 것이지만, 절대적인 규칙인 것은 아니다. 옛날 시인들의 이름난 하이쿠에도 지아마리와 지타라즈가 있는 작품들이 꽤 많다

  

하이쿠의 총 17음은 글자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선 바쇼의 유명한 작품 古池蛙飛びこむ을 예로 들어보면 알 수 있다. 17음을 차례로 읽으면 5. 7. 5음으로 돼 있는 것인데, 즉 아래와 같다.

 

古池(ふるいけ)ふるいけや

(かえる)()びこむかえるとびこむ

(みず)(おと)みずのおと

 

자수로는 제1구가 3(古池), 2구가 5(蛙飛びこむ), 3구가 3()로 돼 있지만, 이 글자들을 읽으면 소리는 제1구가 후루이께야’, 2구가 가에루토비꼬무’, 3구가 미즈노오또가 되니 5. 7. 5음이 되는 것이다. 위 작품의 뜻은 이렇다.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 드는

물소리

 

조용한 연못에 개구리가 한 마리 뛰어드니 "퐁당!"하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깨어지는 광경이 손에 잡힐듯 망막에 맺히지 않는가? 바쇼는 정적이니 적막하다느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적막한 자연의 한 순간을 포착해낸다. 일본인들은 이런 것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한국인들과는 조금 다른 일본인 특유의 미감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과 사물에 대한 느낌이나 설명을 하는 걸 최대한으로 많이 생략하고 (마치 카메라로 사물을 찍는 것처럼) 읽는 이들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 느끼고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하이쿠의 또 다른 특징이다.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넌지시 암시하거나 혹은 상상하게 하는 여백의 미와 상상의 미를 중요시한다. 계절과 절기의 분위기에 젖어 마음이 그와 연동되면서 세상사의 七情(희노애락애오욕)을 표현하는 데는 하이꾸만한 게 없다.

 

일본에서는 꼭 하이쿠 전문 시인만 하이쿠를 짓는 게 아니다. 많은 일반인들도 하이쿠를 감상하고, 쓰고, 애송한다. 한 마디로 전국민이 즐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쿠 시인은 수십만 명이 있는데 전국에 넘쳐난다. 자유시의 현대시를 쓰는 시인도 별도로 있다. 시인이라 해봐야 기껏해야 1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우리는 그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일선 학교에서도 교과목에서 하이쿠를 가르치지만 전국 곳곳에 하이쿠 전문 강좌도 수두룩하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하이쿠 작시 대회도 수시로 열린다. 가히 일본은 그들이 자랑하듯이 하이쿠 왕국이라고 할만하다. 이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지자체, 교육기관과 언론이다. 그 선두에 일본 최대의 공영방송 NHK의 하이쿠를 보급 진작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방송이 나서서 하이쿠 왕국이 간다”(俳句王国がゆく) 등과 같은 문예프로그램을 제작해 전국에 방영한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일본인들은 스스로 자연을 사랑하고 하이쿠를 애호하는 최고의 일등 문화민족이라고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하이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실상을 알고 보면 고대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의 옛말인데, 그걸 순수한 일본어로 된 최고의 서사시라고 자랑해오고 있는 '만요슈'(萬葉集)도 자신들이 최고의 문화민족임을 표증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가장 오래된 귀중한 유산이라고 떠벌리고 있다.

 

그러나 그래봤자 일본사회에 시를 쓰는 이들이 그렇게 많아도 매년 독도, 일본군성피해여성, 과거사 관련 망언을 반복하고 있는 걸 보면 詩心이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절대로 지난 세기 선대의 일본인들이 아시아를 침략하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사실은 얘기하지 않는다

 

무릇 시란 언어의 경계가 무너지는 마음자리에 설 때 나오는 것이다. 그 때야 만이 비로소 시가 살면서 내면에 고이게 되는 삶의 찌꺼기를 없애고 마음과 영혼을 정화시키는 수단이 된다시를 쓰는 과정에서 작시를 통해 마음과 영혼이 맑아진다면, 그것은 곧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양심을 회복하는 게 아닌가? 특히나 하이쿠는 직관을 중시하는, 달리 말하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직관력을 높여주는 시가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하이쿠가 생활화 돼 있다고 자랑하는 일본인들은 과거사를 직관, 즉 바로 보지 않는다. 초중고 학생들에게까지 자기 조상들이 걸어온 침략으로 얼룩진 과거사의 진실을 왜곡해서 가르친다. 어릴 때부터 가면을 쓰고 거짓을 가르치는 이런 교육을 받은 일본인이어서 그런지 국가가 국민을 기만하는 불의에도 무기력하게 힘껏 저항하지 못한다. 하기야 현실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각종 종교들이 저리도 언설을 높이고 세를 자랑하고 있어도 인간들의 양심은 전혀 회복되지 않고 있는데, 하물며 그까짓 시가 무슨 대수가 되겠나이까?

 

평소 예술과 정치권력은 다른 문제이고, 시와 인간의 욕망은 늘 별개로 노는 거라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저잣거리에 시들이 넘쳐난다고 해서 국민들이 모두 마음까지 참되고 과거 침략사의 잘못을 바르게 볼 것이라는 전제가 지나친 일반화이며, 논리의 비약이란 걸 모르는 것도 아니다. 시와 언행인 전혀 별개인 시인도 부지기수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꼭 어김없이 한국인들의 속을 뒤집는 망언들을 되풀이는 하는 일본인들이 올해는 또 어떤 헛소리를 뱉어낼지 벌써부터 우려가 돼서 조금 무리해서 그 자체로는 아무 잘못이 없는 하이쿠에 엇걸어서 일본인들의 겉 다르고 속 다른 혼네(本音)와 타떼마에(建前)를 비웃으려고 해보는 소리다.

 

21세기, 일본은 아직도 국화와 칼처럼 극과 극의 모순과 길항, 순종과 대세에 길들여진 우매함으로 가득 차 있는 나라다. 이대로 간다면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따라 하이쿠가 더 없이 측은하게 느껴진다.

 

2019. 6. 9. 06:44

臺灣 臺北 西園路 居所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