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짧은 글, 긴 생각

대만인들의 장점 중 한 가지

雲靜, 仰天 2019. 1. 20. 22:17

대만인들의 장점 중 한 가지

 

대만에 온지 벌써 2주가 지났네요. 달력을 보니 오늘은 마침 꼭 100년 전 고종황제가 독살된 날이군요. 잘나나 못나나 일국의 황제인데 왜 외세에 의해 혀와 치아가 타서 없어지고 전신이 퉁퉁 부어오른 독살을 당했을까? 국가와 국가간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국 인간의 문제라는 생각으로 귀결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네요. 이 생각은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됨과 동시에 내가 와 있는 이곳 대만인들을 다시 보게 되고 장단점 중 장점 한 가지를 소개하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지만 사회와 국가도 완벽하고 완전무결한 나라는 없습니다. 대만은 과거 젊은 시절 한때 내가 12년 가까이 살았던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비교적 장점과 단점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이곳도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 중엔 한국에 대해서 배울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듯이 우리도 대만에 대해서 배울 것이 적지 않습니다.
 

18세기 청대의 사찰건물로 유명한 타이뻬이시 龍山寺 앞에 선 멀대. 이곳은 대만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의 필수 코스다. 그래서 나도 타이뻬이에서 10여년을 사는 동안 한국에서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오면 그들을 안내하느라 여러번 많이 다녔던 곳이다.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통상 寺가 들어가 있는 곳은 불교의 절이고, 宮자가 들어가 있는 곳은 도교사원이다. 龍山寺는 절이고, 도교사원으로 꽤 규모가 큰 타이뻬이 木柵의 指南宮은 말 그대로 도교 사원이다. 그러나 이곳 용산사는 도교의 도사나 도교적 기물을 접할 수 있는, 도교와 같이 혼재하는 곳이다.

 
그중에 한두 가지만 소개하면, 이곳의 지난 세기 정치지도자들은 대국적 견지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머문 1980~2000년까지는 일반인들 사이에도 자질구레한 개인 간의 다툼과 알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한국 보다는 적어 보였습니다. 그 원인은 말에 높낮이가 없는 중국어와 높낮이가 심한 한국어라는 언어의 차이, 남의 일에 관여(나아가 간섭)하기 꺼려하는, 그래서 그것이 존중되는 문화의 차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으로서 대국이라는 자의식에 바탕을 둔 역사적 전통의 공유 등등 여러 가지가 복합돼 있는 거 같습니다. 이 주제도 매우 흥미있는 것인데 향후 구체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예를 들면, 중국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에게 패해 중국대륙에서 쫓겨 와 서로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지만, 중국과 대만의 두 정치 실체는 서로 대화를 통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위기관리를 해오고 있습니다. 鄧小平과 蔣介石의 장자 蔣經國은 젊은 시절 한때 소련에서 같이 공부한 同學이었는데 뒷날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중국의 패자 자리를 두고 건곤일척 한 판 승부를 겨룬 끝에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해 왔었죠. 그 뒤 작달만하고 키가 작은 이 두 사람은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밀사를 보내 통일을 위해, 또 전쟁을 막기 위해 빈번하게 의사소통을 해왔었습니다. 그 한 가지 일환으로 이산가족의 상호 방문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호 친지 방문은 규모가 확대되어 지금은 군인, 정치인, 언론인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만해협 양안의 모든 사람들이 투자도, 교역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여행도 자유롭게 다닙니다. 또한 유학생들과 학자들의 교류, 무역과 투자는 물론, 심지어 방송도 매일매일 뻬이징-홍콩-타이뻬이를 잇는 실시간 방송('兩岸三點')을 하고 있을 정도로 상호 포용적으로 개방돼 있습니다.

 

내가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1년 간 방문학자로 소속되어 있는 이곳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와 대만의 명문대인 대만대학, 정치대학 등등의 대학들에는 중국에서 유학온 학생들과 교환방문 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대만 학자들과 학생들도 중국에 자유롭게 유학을 하고 방문교류도 활성화 되고 있습니다. 어제 아내와 함께 간 국립 고궁박물관도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을 정도로 붐볐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접하게 되면 분단된 지 70년이나 지나도 이산가족 상봉은커녕 서신교환도 정례화, 제도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남북한 관계와 크게 비교가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네요.
 
 

1987년 12월 31일, 내가 경향신문 재직시 휴가를 얻어 처음으로 대만, 홍콩, 마카오 여행을 했을 때 찾았던 고궁박물관. 그 뒤로 이곳도 내가 많이 찾았던 명소 중의 한 곳이다. 여기에 소장돼 있는 60만 점이 넘는 각종 중국 전통 예술품들의 진가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로 소개할 생각이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박물관 사무직원들이 행정을 보는 사무실들이 모여 있는 행정처이다.

 
그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사람들의 통이 한 몫 하는 것 같습니다. 중화민국 정부에서 나를 방문학자로 초청하고 그 자격요건에 대한 심의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분명 중국공산당 직할 ‘중공창당중심’의 해외특약 연구원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대만정부(대만 외교부와 주 한국 대만 대표부 대사)는 그것은 학문분야이기 때문에 전혀 결격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쪽에서도 내가 이쪽 대만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데다 많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게 한결 같이 대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본격적으로 중공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지 않고 있어서 우호적으로 대해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인구 약 2350만 명의 대만은 면적이 일본 큐슈(九州)와 같고 우리 남한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조그마한 섬나라이지만 과거 중국의 인문학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지식 본위의 사회를 이끌고 학문과 학자에 대한 대우가 상당히 좋습니다.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투자도 엄청나게 합니다. 1980년대 말 다니던 직장을 과감히 그만 두고 내가 대만으로 유학을 오길 결정한 것도 석사반 이상 학생들에겐 학비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쪽 현지 학생들에게는 매달 생활비도 보조해줬습니다. 단돈 50만 원만 달랑 들고 무작정 유학을 오게 된 내게 대만은 참으로 고마운 나라였습니다.
 
대만 최고의 국가연구기관인 이곳 중앙연구원도 좋은 예가 됩니다.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1928년 6월에 설립된 이곳 중앙연구원은 총통부 직할로 1000명에 육박하는 연구원 및 직원들이 있는, 아시아 최고의 시설과 최고의 연구능력을 가지고 있는 국책연구원입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내가 다녀본 바 홍콩, 싱가포르는 물론, 일본도 이런 연구원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많은 미국 학자들까지도 이 연구원의 시설과 연구성과 등을 알고 최고로 평가하는 학술기관이죠.


난징(南京)에 있는 明나라 시대 國子監의 故地(옛터)에서 시작된 국립 중앙연구원의 옛모습


국제적인 수준에 걸맞게 규모와 예산도 굉장히 방대합니다. 예컨대 이곳 중앙연구원 내 근대사연구소는 연구원들이 약 5~60명 정도 되고 해외에서 오는 방문학자들도 해마다 적지 않습니다. 이런 규모의 연구원이 자연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을 다 합쳐서 총 24개의 연구소와 8개의 연구센터가 있고 각 연구소의 소장 위에 전체 중앙연구원을 총괄하고 대표하는 중앙연구원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습니다.
 
그리고 대만에는 국립인 중앙연구원 소속 학자든, 외부 국립 및 사립대학의 학자이든 전체 대만인 출신들 중에 세계학계에서 인정 받는 최고의 학자를 뽑아 대우해주는 이른바 "院士"제도가 있는데, 이 원사에 뽑히면 모든 면에서 총리급 대우를 받습니다. 해외를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로 총리급 대우를 해 줍니다. 학자들에 대한 대우라는 면에선 우리나라의 학술원회원 제도와 완전히 격이 다릅니다.
 
 

중앙연구원 원사 제도는 1948년부터 시작되었다. 위 사진은 1948년 남경 시절의 중앙연구원 제1계(屆) 원사로 뽑힌 연구원들과 연구원들의 합동 기념촬영

아시아 최대, 최고를 자랑하는 국립 중앙연구원 전경. 인문학과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연구기관까지도 함께 있는 대만의 최대 학술기관이다. 박정희 시대에 만든 한국의 정신문화연구원은 이곳을 본 따 만든 것이다.
중앙연구원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안내 약도

 
전체 예산 규모도 방대한데, 예를 들어 내가 공부하던 30여년 전 근대사연구소의 한 도서관에 책정된 도서 구입비만 1년에 4억 원이 넘는다는 소릴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더 많아졌겠죠. 전체 중앙연구원의 1년 예산은 아마도 엄청날 겁니다. 2018년도 한 해 예산이 대략 新臺幣로 125억 위앤(한화 약 5250억 원)이었으니까요.

 

오늘은 아침부터 쓸데없이 긴 얘기를 한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고종황제가 독살된 날이다 보니 인간과 역사에 대한 이런저런 걸 생각하게 되고, 결국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다 보니 마침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 대만과 비교가 되어서 한 말씀 드렸습니다. 한 주도 재밌게,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2019. 1. 20. 10:30
고종이 독살된 날
臺北 寓居에서
雲靜

 

위 글은 내가 참여하고 있는 형산수필문학회 단톡방에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