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민단체의 단체 카톡방에서 주고받은 대화
오늘, ‘국민주권개헌행동’이라는 시민단체 회원들의 단체 카톡방에 안내문이 올라왔다. 화성문화원과 한국불교문인협회, 한국불교학회 공동주관으로 모레 2018년 4월 7일 서화성 농협에서 “정신문화유산으로서의 원효사상과 화성 唐城”을 주제로 제2회 화성불교문화유적 학술발표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이 행사의 총책을 맡은 김해 봉화산 정토원장 선진규 선생의 말씀이 곁들어졌다.
“지금 대내외적으로 큰 변화의 물결에 휩싸였는데 원효 스님의 一心和合思想이 절실할 때라 생각합니다. 이럴 때 시기적절한 학술발표회라 사료됩니다. 때맞춰 개최되는 내용이라 더욱 의의가 크다 하겠습니다. 큰 관심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보고 雲靜이 반가운 마음에 아래의 댓글을 달았다.
“우리민족이 걸어온 반만년 역사를, ‘단일민족’이니, ‘평화를 애호한 백의민족’이니 어쩌니 하는 식의 자기도취적이고 몰지성적인 태도에 빠지지 않고 역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보면, 특히 여말선초 이후부터는 사대부들이 원효 聖師의, 정말 우리민족의 전통사상이 세계성을 담보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히 秀勝한 和諍사상을 받들기는커녕 내팽겨 쳤기 때문에 피로 물든 소아적, 파당적, 섹트주의적 분열과 당쟁의 역사를 만든 원인이라고 본다. ‘단일민족’이니, ‘백의민족’이니 하는 것은 허구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몰아에 빠져 객관적 상황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집단적 환각제요, 희망을 넣어 버무린 이념에 불과하다. 흔히 우리 선조들은 평화를 사랑한 민족이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한다.
하지만 그런 식의 평화 강조는 대륙에서의 흥망을 거듭한 동아시아 국제질서, 또 한말에 가서는 해양으로 츰입해온 西勢東漸의 약육강식의 근대적 도전에 능히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국력)이 없었던 현실을 교묘히 비튼 비겁한 굴종이었는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원효의 和諍십문설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는 촉매제가 되었음 더 없이 좋겠다.
제발, 정치인은 물론이고, 시민사회에서도 개인과 진영의 이익을 넘어서서 大局的, 大乘的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마인드가 보편적 행동양식이 됐으면 원이 없겠다! 제발! 한반도에 갑작스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주변 열강에 대한 대응이 신중하고 지혜로워야 할 시기다. 그러니 파당적 정쟁을 지양하는 大乘的이고 민족사 앞에 겸허해지는 행보가 아니면 근 70년 만에 찾아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그랬더니 이번엔 정수덕이라는 분이 아래 댓글을 올렸다. 아마도 그 분은 위 원효 관련 학술행사와 관련이 있는 분으로 보였다.
“서상문 선생님! 글 감사합니다. 현시대에, 우리의 바른 정신문화가 빈약합니다. 일본제국주의, 군벌시대와 일본 패망이었지만, 그런 군벌 추종세력들이 미군정에서 대한민국의 지배층으로 전환되어서, 일제보다 더 악랄하게 백성들을 괴롭히고, 해방 후, 그리고 전쟁을 극복하고 우리민족이 생존해 왔습니다. 일제 군국주의와 미군정으로... 군사문화가 시대를 주도하면서 독재와 억압, 거친 문화였습니다. 근본적인 정신문화는 원효 대사의 큰 가르침을 본받아야 합니다. 구시대의 특수한 환경을... 한탄보다는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雲靜이 다시 이렇게 화답했다.
“옳으신 진단입니다. 한 말씀도 그른 게 없으십니다. 사실 저는 근대화의 가치를 밑둥에서부터 회의하는 편이지만, 암튼 그것이 거부할 수 없었던 세계적 조류와 시대정신이었다면, 기왕에 그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주체적으로 수용해서 創新적, 創發적 융섭이 이뤄졌어야 함에도 당시 국제정세는 그걸 순순히 허용할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다 우리의 사대부들마저도 소아적 파당성에 매몰되고 갈갈이 사분오열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죠. 근대화가 타자의 강압에 의해 이식되고 절합(切合)된 방식으로 이뤄진 게 문제였습니다.
밖에서 가치를 찾을 게 아니라 우리 내부로 눈을 돌려보면 홍익인간, 재세이화, 화쟁사상, 다산의 민본적 목민관, 한말의 民國사상, 근현대 언저리 조소앙의 삼균사상 등등 참으로 훌륭한 사상의 보물들이 널려 있는데도 찾으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있죠.
문제는 과거사가 어떻게 됐어야 했고,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규범적이고 인식론적인 수용 자세와 해석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이 보다 더 시급한 게 최근 한반도에 일어나고 있는 갑작스런 변화의 호기를 어떻게 주체적이고 주도적으로 살려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겠죠!
한반도와 동북아의 시대사적 전환점의 고빗사위 길에 서서 우리에게 갑자기 불어 닥치고 있는 거센 ‘春風’에 조응해 그 어느 때보다 주변 열강에 대한 대응이 신중하고 지혜로워야 할 시기이니만큼 파당적 정쟁을 지양하는 大乘的이고, 민족사 앞에 겸허해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아니면 근 70년 만에 찾아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려가 제발 개인적 기우로 끝나길 간곡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시험대에 올라서게 되는 이 중차대한 시기, 무릇 현대판 선비라고 스스로 자임한다면 모두가 無私死生的 각오를 다져야 할 때입니다!”
계속해서 雲靜은 이 카톡방에 개헌문제, 인권, 교육, 환경문제 등 다양한 내용의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의식해 이렇게 매듭을 지었다.
“개헌? 남북관계? 인권? 교육? 환경? 각기 따로국밥이 아니죠. 중층적으로, 一卽多, 多卽一의 관계로 안과 밖, 위와 아래, 사방으로 뻗어 있는 인드라의 그물코로 연결돼 있습니다. 전체와 부분, 시간(역사)과 공간(현실)을 유기적, 변증법적으로 인식해야 할 소이연입니다.”
그렇다. 우리에겐 정치인이든, 일반인이든 다투지 않아도 될 문제나 사안을 두고 너무 지나치게 박터지게 싸워대고 있다. 다툼을 위한 다툼, 싸움을 위한 싸움, 이게 당파싸움이다. 정치는 서로 간의, 혹은 크게는 세력 간의 이익, 정의와 부정의 간의 승부가 결부돼 있는 것이니 때로 싸움도 필요하다.
진보와 보수 등의 사회세력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일반인들도 다투지 않아도, 싸우지 않아도 될 것까지 다투고 싸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의 해결 비법은 원효의 화쟁사상에 있다. 오랜만에 화쟁사상이 거론 되는 것이 반가워서 한 말씀 드렸다.
2018. 4. 6.
구파발 寓居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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