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남의 눈물과 우리정부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
지난 2월 11일,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의 평창 동계올림픽 경축 공연 중 통일과 민족화합을 담은 “백두와 한나는 내조국”이라는 노래를 부른 현송월의 열창을 들으면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이 눈물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누구든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아흔의 노구를 이끌고 방남한 그의 가슴엔 분명 혁명도, 전쟁도 겪어보지 못한 젊은 김여정과는 다른 남다른 소회가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 때부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민족이 뭔지 몸으로 실감한 자일테니까. 그보다 한 세대 이상이 더 젊지만, 평소 ‘한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말만 들어도 가슴 뭉클함을 느끼는 나도 눈물을 훔쳤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게 있다. 북한정권은 지금까지 한시도 민족의 통일 보다 정권의 지속과 안위를 더 우선시 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남침의 원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북침을 한 원죄 같은 건 없지만, 민족통일 보다 정권의 존속과 집권 연장을 더 우선시 하기는 역대 대부분의 남한정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민족통일을 정권의 연장보다 더 높이 받들지 않는 한, 어렵사리 물꼬가 트인 남북대화를 의미 있게 진전시키는 것도, 진정한 대화도 “쉽지 않을 것”이다.
누가 봐도 북한은 지금 시간을 벌고자 하는 게 보인다. 김정은의 전격적인 대화 모드로의 전환은 공갈인지 진담인지 묘연하지만 트럼프가 큰 소리 친, 대북 예방전쟁을 일으킬 위기상황을 누그러뜨려보기 위한 국면전환용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북한에 가해진 외교적 고립과 경제제재를 더는 견뎌내기 어렵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실적으로 이번이 아니면 대화의 기회는 잡기 어렵다는 상황판단도 했음직하다.
김정은이 평창에 급히 하나 뿐인 친여동생인 ‘백두혈통’을 보낸 것은 미국의 군사적 옵션이 실제일 수 있는 정보가 그로 하여금 ‘결단’하게 만든 측면이 있어 보인다. 이 점에서 우리는 국내외 정세를 거시적으로, 구조적으로 볼 필요가 있고, 북한을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압박해온 미국의 역할을 그 ‘의도’와 달리 무조건 백안시 할 필요까지는 없다.
실제 트럼프는 전쟁을 벌일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선 그걸 막아야 한다는 게 현상황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문재인 정부가 국내 야당과 보수세력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남북단일팀으로 평창에 참여시킨 의도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이스하키팀은 굳이 단일화 할 거까지는 없어 보였는데 무슨 속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전쟁위협으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는 ‘자기정치’를 하려는 트럼프의 반인류적, 반민족적 술수에 현명하게 대처해 말려들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게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고 정치력이다.
김정은이 통일을 우선시해서 이처럼 급작스럽게 대화모드로 나온 게 아니다. 올림픽 참가와 김여정의 방남에는 다양한 목적이 있어 보이지만, 분명한 건 남한과의 흉금을 터놓은 대화를 원해서가 아니라 그는 그대로 자신의 정치를 전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도, 시진핑도, 아베도, 푸틴도 마찬가지다. 남북통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마다 한반도에 전개되고 있는 상충된 국익을 자국에 유리한 국면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우리정부도 우리 정치를 펼쳐야 한다.
우리는 남북대화에 나서면서 절대로 같은 민족이라는 감상에 젖어선 안 된다. 이번에도 “한민족은 하나다”라는 감성에 끌려 “우리민족끼리 잘 해보자”라는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해 또 다시 군사도발이라는 배신을 당하면 남한 내 수구세력은 당연하고, 통일문제에 무관심한 일반대중들이 급속히 등을 돌릴 것이다. 완성을 선언한 북핵을 현실적으로 저지할 수단이 없다고 치더라도 북한의 대남 군사도발까지도 화해와 포용이라는 명분하에 아무 일 없다는 식으로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미 김대중 정권 때 겪은 학습효과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통일문제를 추동시킬 동력은 급속히 묽어지게 될 것이고, 전쟁까지 불사해야 한다면서 트럼프의 전쟁발동을 지지할 태세인 호전세력이 발호하도록 만들어선 안 된다. 일반인들이야 감정발산 차원에서 전쟁이니 핵이니 쉽게 얘기하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반문명적인 파괴력을 지닌 것들인지, 그것이 현실화되면 한반도에 어느 정도의 괴멸적인 결과를 안겨줄 것인지 제대로 알기나 알고 말하겠는가?
“우리민족끼리 잘 해보자”라는 구호는 말로선 당위론적 참이지만, 현실에선 늘 생존을 위해 냉철하게 주판을 두드려가며 ‘통미봉남’과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해온 북한 전술의 일환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에는 ‘통미봉남’전술이 먹혀들지 않고, 오히려 전임 오바마 행정부의 이른바 ‘전략적 인해’정책을 폐기하고 대북 군사공격을 검토하고 있으니 ‘통남통미’전술로 갈아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거와 다른 김정은의 절박감이 숨겨져 있는 듯이 보인다. 90노인인 김영남의 눈물이 그것을 시사한다. 그의 눈물이 국면전환용 쇼가 아니길 바란다. 진심으로 악어가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길 바라마지 않는다.
이번 기회가 동서독이 걸어온 것처럼 남북 간에 제발 진정성이 바탕이 된 지속성 있는 교류로 이어지도록 만들면 좋겠다. 우리정부가 남북대화와 평화체제전환 의지에 대한 진정성을 보이며, 웃음을 띠되 민족적 감성이 아니라 냉철하고 엄격하게 정책적이고 구조적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다.
북한정권은 남한정권의 성과를 내려는 데 조급하고, 이 같은 열망을 약점으로 삼아 온갖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이다. 이번만큼은 우리가 자주 보아온 데자뷰, 즉 북한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꼼수로 대화나 평화몸짓을 한 게 아니기를 바라지만, 혹여 그럴 땐 대화를 위한 대화, 보여주기식 성과가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인지시키고, 어떤 정권이든 통일문제를 정권의 재집권 보다 더 상위에 두고 있음을 주지시켜야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지나친 억지와 요구가 있다면 그에 대해선 손을 털고 대화를 중단하는 당당함을 보여줘야 한다. 즉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북한에 끌려 다녀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남북 간의 도토리 키재기에 있지 않다. 이 보다 더욱 중요하고 절박한 게 있다. 트럼프의 대북 강경 군사정책의 축이 변화되도록 평화유지와 미국의 국익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조로 한 설득과 호소로 태도나 입장 변화를 이끌어 내는 일이다.
트럼프가 권좌에 있는 동안은 마지막이 될 이번 북한과의 짧은 만남이 정례화 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느냐 마느냐 하는 열쇠는 북한도 아니고, 남한도 아니고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은 말로는 남북대화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패럴럼픽이 끝나고 나면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재개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정말 그렇게 해버리면 북한은 미국이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시그널로 받아 들여 지금까지 보여준 대화 의지나 제스처를 모두 거둬들일 공산이 대단히 높다.
지금은 미국을 설득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 정부는 이 점을 유념해 모든 채널을 가동하고 총력을 기울여 북미대화가 이뤄지도록 미국의 대북 정책변화를 전향적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는데 공을 들이기보다 그 전에 먼저 미국에 특사를 보내야 한다. 당장은 남북정상회담을 논하기보다 한반도 위기관리와 평화유지가 더 촉급한 과제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2018. 2. 14. 08:59
마산행 KTX 열차 안에서
국민개헌을 추진하는 시민단체 단톡방에 올린 글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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