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와 안중근
서상문(고려대학교 한국전쟁 Archive 연구교수)
노기 마레스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쟁영웅. 러일전쟁에서 육군중위의 두 아들을 잃고도 비통함을 내색하지 않은 외강내강형.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이래 배출된 34명의 근대 일본군 대장 가운데 한 사람. 국가중대사에는 늘 “노기장군을 부르라”라고 한 명치 일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백작. 일왕 출상 직후 10년 연하의 아내와 동반 할복으로 63세의 생을 마감한, 일본인들에게 군신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노기는 전근대형 군인의 한계를 넘지 못한 고루한 황국주의자의 표상일 뿐이다. 그가 강조한 인간의 도는 일본인에게만 국한된 편협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 왕족 자제들에게 인간이 “도에 벗어난 짓을 하고도 수치를 모르는 자는 금수만도 못하다”고 가르쳤지만 그가 말한 ‘도’란 일본인에게만 적용된 것이다. 승전의 대가와 군의 사기진작을 명분으로 전쟁범죄도 당연히 여겼다. 자의적으로 날조한 ‘구미위협론’과 국수주의를 넘지 못한 근대형 군인의 한계였다.
요즘은 초급장교라도 민군관계의 엄격함을 중시하지만, 세기 전 전쟁에서는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전쟁범죄가 보편적이었다. 1860년 청나라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자 병사들에게 포상으로 3일간 무제한 약탈, 강간, 방화 등 온갖 범죄를 자행하도록 허용한 영불연합군이 비근한 예다.
청일전쟁시 일본군도 뤼순 점령 후 4일간에 걸쳐 최소 2만여 명을 학살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당시 한 일본군 병사가 가족에게 “적지에서의 노획은 이긴 자의 자유”라고 써 보낸 편지는 일본군의 사기를 유지시킨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해준다. 적지에서의 노획은 지휘관이 용인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1900년 의화단사건에서도 8개국 연합군의 일원으로 베이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3일간 약탈과 겁탈의 자유를 만끽했다.
러일전쟁에서 기승을 부린 일본군 병사들의 노략질, 강간, 겁탈에 대해 중국이 항의하자 노기는 “그대들은 자신의 영토도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막대한 경비를 들이고 무수한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그대들의 국토를 대신 수복시켰다. 저 하찮은 여성과 재물을 우리군대에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일갈했다. 군사령관이 3탈(약탈, 강탈, 겁탈)의 파렴치한 전쟁범죄를 승자가 누리는 당연한 보상으로 여겼으니 휘하 사병들이야 오죽했으랴!
전쟁범죄가 공공연한 시대였지만 모든 지휘관이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시공을 초월한 사람으로서의 도리, 인륜, 도덕과 군인으로서의 품위, 명예와 군기를 생명처럼 중요시 한 군인이 존재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같은 시기 우리에겐 안중근이 있었다. 그는 근대형 군인의 한계를 넘어선 시공 초월적 군인상의 남상(濫觴)이다.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풀어주기도 했고, 동양평화를 파괴한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시에도 이토만 가슴과 복부에 정확하게 3발을 조준 사격했을 뿐, 수행비서 3명에게는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오른팔과 오른발만 맞추었다. 하얼빈역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된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동양평화론』은 일국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지향한 것이다.
노기는 일본인들에게만 애국군인의 표상이지만, 안중근은 한국인과 중국인은 물론, 세계인들로부터도 숭고한 사상가와 의사로 숭앙받는다. 일본인들 중엔 안중근을 신으로 모시는 이들도 있다. 그의 웅혼한 사상과 순결한 영혼과 편협한 천황주의자, 국수주의자인 노기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런 일이다.
이런 안중근에게 일본 극우파는 ‘테러리스트’로 ‘역사테러’를 가해왔다. 아베정권은 평화헌법 개정에 필요한 맹목적 애국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대의 희생자인 애처로운 황국주의자 노기를 나라 위해 희생한 군신으로 떠받들고 있다. 안중근 사형일인 오늘, 일본은 당장 정치적 오브제(object)로 악용하는 협량함에서 벗어나 노기를 군신 자리에서 내려놓고 도마를 세계주의와 인류보편사상을 실천한 평화사상가의 자리에 올려놓아야 한다.
위 글은 2017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제107주년에 즈음해 2017년 3월 24일자『서울신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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