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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보편사상과 호연지기의 결합 : 윤봉길의 상하이의거와 그 의의

雲靜, 仰天 2017. 3. 8. 19:06

인류보편사상과 호연지기의 결합 :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의거와 그 의의

 

서상문(고려대학교 연구교수)

 

형형한 눈빛의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 그는 왜 사랑하는 부모형제, 처자식과 이별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형장의 이슬 길을 가기로 결심했을까? 그것은 인류 공동의 지고한 가치인 자유와 정의를 위함이었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부활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한 살신성인 정신이었다. 약육강식의 논리와 패도가 횡행한 20세기 전반기, 강권의 일본제국주의가 악이 아니었으면 무엇이었고, 식민지 약소민족이 선이 아니었으면 무엇이었겠는가? 침략과 피침략,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깨겠다는 것이 정의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청년 윤봉길에게 정의의 실행을 가능하게 만든 원초적 힘은 인류보편의 가치와 호연지기가 강고하게 결합된 정신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그가 중국으로 장도에 오르기 전 고향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했을 때 농민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만든 농민독본을『자유』라고 이름 붙인 사실을 보면 수미일관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농민들에게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고 하면서 한국인이 처한 상황을 두고 “머리에 돌이 눌리우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으로 비유하고 일제에게 빼앗긴 “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고 설파했다.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약관 20세였다. 그는 이미 암울한 조국을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정신력을 연마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일신을 내던질 각오를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김구를 찾아갔다. 김구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의거가 성사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었다. 김구와 함께 극비리에 거사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쇼와(昭和)‘천황’의 생일로서 일본사회에서 가장 성대한 축일인 ‘천장절’ 경축을 겸해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 성공을 자축하는 행사가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김구와 윤봉길이 거사를 결행하기로 한 뒤 기념으로 같이 찍은 사진
목엔 서약문을 목에 걸고 양 손엔 권총과 수류탄을 들고 비장한 각오의 표정을 한 윤봉길 의사

 

혼잡을 막기 위해 예년엔 허가했던 장내의 각종 매점들을 폐지하는 대신 일본인들 각자가 점심과 음료수 등을 지참케 해서 입장시킬 계획이었다. 이 소식이『上海日日新聞』에 보도되자 윤봉길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보고 일본 요인들을 처단할 결심을 하고선 먼저 김구를 찾아가 거사를 결행하겠다고 자청했다. 거사에 사용할 폭탄은 중국 군부가 제조해줬다.

   

아침부터 잔뜩 흐린 날씨였던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경, 미리 식장에 잠입해 있던 윤봉길은 일본국가인 기미가요(君ガ代)의 제창이 막 끝나갈 때 어깨에 메고 있던 수통 폭탄을 상하이지구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을 위시해 단상 위에 도열해 있던 8명의 일본 군부 및 외교계 요인들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가 내장이 터져 나와 현장에서 즉사했고, 해군 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실명했다.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은 다리가 잘렸으며,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시게미츠(重光葵)는 다리를 심하게 다쳐 절단하게 됐다. 거물 시라카와 대장은 온몸에 파편이 204군데나 박혀 결국 며칠 후 사망했다. 중국 주재 일본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일본거류민단 간부 토모노(友野盛)도 크게 다쳤다.

 

 

윤의사가 던진 폭탄이 단상에 떨어진 직후 피폭된 일인 요인들이 쓰러지거나 단상에서 부축돼 내려오는 장면

   

일본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 사건을 두고 테러라고 칭한다.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는 “조선의 테러리스트”라고 평하는 게 대다수다. 이는 윤봉길 의사가 일본인들을 살상시킨 사실에만 주목할 뿐 윤 의사가 왜 상하이침공을 진두지휘한 시라카와와 노무라 등을 처단하려고 했는지 시대적 배경과 동기에 대해서는 안중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윤 의사가 지향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애써 외면하고 일본인이라는 편협한 관점만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윤 의사의 폭탄투척은 대일 교전단체인 임시정부가 보낸 독립투사로서 행한 엄연한 교전행위였기에 테러가 아니라 의거였다. 그런데도 당시 일본 당국은 사건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를 그 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金澤) 교외 육군공병학교 내 외진 곳에서 총살할 때까지 줄곧 테러범으로 취급했다.

 

 

총살 당하는 윤봉길 의사. 이승에서의 마지막 살아 있던 장면이다. 눈이 감긴 흰 천 위의 이마에 총알이 관통한 구멍이 일제의 만행과 잔악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공공의 선을 지향하는 의거는 정당하지 못한 인명살상을 수단으로 사적 이익 혹은 반인륜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테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윤 의사는 자유와 독립, 정의와 평화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해하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저항으로서 침략자들을 제거해야만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인들이 침해 받은 평화와 행복이 되살아난다고 본 것이다.

 

일본에서도 의사라는 말을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일본의 아시아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를 심문한 일본 검찰관 미조구치(溝口)가 그에게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의사”라고 했듯이 의사는 인류 공동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의거를 행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그 영향과 역사적 의의가 온전히 드러난다. 이를 보면 그가 실현하려고 한 인류보편의 정신적 가치가 무엇을 지향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첫째, 한민족의 항일의지와 독립운동이 사장된 게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었다는 점을 한국 국내,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알리는 효과가 있었다. 사건 당일 중국, 일본, 한국의 언론들이 긴급뉴스의 호외까지 발행해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중국조야에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대표적인 신문『New York Times』를 위시해 서방의 유력일간지들이 모두 상하이발 인용기사로 연일 보도했듯이 이 소식은 동아시아 지역을 넘어 세계적인 빅뉴스가 됐다.

   

둘째, 제국주의 침략의 길로 나아간 일제의 침략원흉들이 중상을 입거나 폭살됨에 따라 일왕의 권위를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윤 의사가 폭탄을 투척했을 순간 제창이 막 끝나가던 일본국가 기미가요는 ‘천황’을 상징한다. ‘천황’이 어떤 자인가? 그는 한일강제병합을 당한 한국인에게도, 만주사변을 당한 중국인에게도 공히 침략의 원흉이었지만, 일본의 입장에선 신성불가침의 ‘現人神的’ 권위를 지닌 국가 최고지도자가 아니었던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에게 “皇軍의 威武를 中外로 선양하라”고 명한 일왕은 1932년 2월 일본군 증원부대 사령관으로 상하이사변에 투입된 시라카와 대장에게 초기 고전한 상하이침공 작전의 조기 수습을 명했고, 이 작전을 승전으로 이끈 시라카와를 크게 찬양한 바 있다.

   그런데 상하이침략의 선두에 선 일왕의 충직한 하수인들이 윤봉길이라는 무명의 한국인 청년에게 폭탄 세례를 당해 일왕의 절대적 권위가 곤두박질쳤던 것이다. 실제 일왕은 사건 후 상황보고를 받고 매우 침통해 했다. 일왕의 구겨진 위신과 체통은 사건 후 일본에서 김구를 배후 지령자로 지명 수배하고 그의 목에 현상금으로 60만 위안을 내건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시 60만 위안은 현재의 한화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백억 원대나 되는 거액이다.

   

셋째, 일제의 폭압통치에 짓눌려 고사돼가던 우리의 민족정신을 되살렸고, 피압박약소국 민족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됐다. 또한 임시정부가 상하이시대를 마감하고 “유랑”의 시대로 들어감과 동시에 김구시대를 열게 됐다. 명성이 치솟은 김구를 성원하는 성금이 해외 한인동포들과 중국의 조야로부터 엄청나게 들어와 임시정부가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활력을 찾게 됐다. 윤 의사 의거 직전인 1930년 재정수입이 급감해 직원의 급여도 주지 못해 빚만 수만 위안을 진 채 고사 직전에 있던 임시정부였다. 재정악화의 영향을 받아 1920년대 중반부터 ‘임시정부 무용론’ 및 ‘해체론’마저 불거져 나온 가운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의거 이후 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로부터 한인교민들의 성원과 지원금이 잇달았다. 1932년 4월 말부터 이 해 10월 9일까지 김구가 받은 물질적 원조는 현금 지원액만 해도 총 9건에 미화 2만9,200달러에 달했다. 모두 윤 의사 의거에 촉발돼 의거 후 6개월 이내에 모인 것이었다. 중국 조야의 각계각층으로부터도 상당한 성원과 지원이 답지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만성적인 재정 악화상태에서 벗어났고 침체된 임시정부의 대일항쟁 및 독립운동 의지도 되살아났다.

   

넷째,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을 변화시켜 한중관계가 크게 개선됐다. 중국국민당의 대한국정책 실무자는 윤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는 26년간의 임시정부 역사 중 가장 특기할만한 것이자 임시정부가 주도한 항일운동 중 가장 돋보이는 사건으로 평가한 바 있다. 또 이 의거는 그 전해 5~7월 간 만주에서 발생한 완바오산(萬寶山)사건으로 인해 최악으로 치달은 한중 양국민들 간의 상호 비난 혹은 멸시 등의 악감정을 일거에 바뀌게 만들었다.

   또 중국인들에게 한인들의 항일의지가 높이 평가되면서 중국사회에 한국독립운동 단체가 중국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려지게 됐다. 공동의 적에 대한 통쾌한 승리감이 매개가 된 피침략민족으로서 동병상련의 연대감을 공유하게 되고 중국내 한인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는 체포된 윤봉길 및 안창호의 석방노력과 그 가족을 돌보기 위한 모금과 함께 수많은 중국인들의 지지로 표현됐다.

   

다섯째, 무엇보다 중국국민당 주석이자 중국의 최고 실력자 장졔스(蔣介石) 총통이 한국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됐다. 윤 의사의 의거에 대해 보고를 받은 장졔스는 자신의 일기에 “한국인 윤봉길이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황의 탄신기념대회에서 일본군 사령관 및 공사를 폭살시켰다는 것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장졔스 총통이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중국국민당에게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한국인 청년들이 국민당 군사학교에 입학해 군사인재로 육성됨에 따라 공동 항일을 위한 한중 협력의 길이 열리게 된 것도 장졔스의 관심 표명에 따른 결과였다.

   

개인적 친분관계에서 이뤄져 왔던 그간의 지원형태와 달리 정부차원에서 한국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중국정부는 1933년부터 중국화폐로 매달 1,500위안을 임시정부에 지원했다. 1930년대 초반 중국에서 생활한 안창호가 그랬듯이 당시 한 달치 집세와 식사비를 다 합쳐도 중국돈 25위안이면 족했는데, 1,500위안이라면 대단한 거금이었다.

 

그 뒤에도 중국정부는 1941년 12월 6만 위안을 시작으로, 1942년 매월 20만 위안, 1944년 매월 50만 위안, 1945년에는 매월 300만 위안의 돈을 임시정부에 지원했다. 중국 화폐가치의 하락과 함께 치솟은 물가를 감안해 해마다 지원금을 증가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지급된 지원금만 총 3,232만 위안이었다. 이 금액은 같은 기간 국민정부의 재정지출 가운데 특별지출비 총 7,496만5,615위안의 43%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만약 김구에게 보낸 ‘특별 기밀비’까지를 더한다면 아마도 전체 국민정부의 특별지출비 중에서 최소한 절반은 됐을 것으로 추산된다.

   

장졔스 총통은 외교적으로도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을 지지하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면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을 설득해 ‘코리아 조항’이라는 특별조항을 넣어 독립의 단서를 마련하게 만든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승만 박사 역시 장졔스의 이러한 한국독립 제안과 선언문의 명문화는 윤 의사의 의거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일신을 초개 같이 버리고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부활을 위해 목숨을 바쳐 한민족의 정신 속에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윤봉길 의사! 윤 의사의 호연지기와 애국애족의 희생정신은 정의로운 사회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살아 있는 귀감이다. 특히 국익은 뒷전에 두고 사익을 위해 끝없이 이전투구를 벌이는 삿된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대오각성 시킬 살아 있는 교재다. 지금 우리 사회는 윤봉길 청년처럼 호연지기와 살신성인 정신을 펴는 의사들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

 

위 글은「상해에서 폭발한 윤봉길의 의거」라는 제목으로『월간 自由』, 제523호(2017년 3월 2일)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