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총통 차이잉원의 과거사 인식과 해법
서상문(고려대학교 한국전쟁 Archive 연구교수)
동아시아 지역은 목하 과거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지 않는 곳이 없다. 대략 1980년대부터 시작된 과거사문제가 현실 정치문제가 된지 수십 년이 된다. 이는 동아시아지역이 암울했던 제국주의시대와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독재정권이 남긴 과거사의 유산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표증이다.
우리에게 남긴 문제의 제공자는 대부분 제국주의침략을 획책한 일본과 서방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면, 식민지 잔재의 파장 속에 똬리를 튼 독재정권이다. 그들이 남겨놓은 유산은 국내적으로 민족 구성원들 간의 화합을 가로 막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처럼 지역공동체로 나아가는데 작지 않은 걸림돌로 남아 있다.
미국 흑인노예사의 아픈 속살을 예리하게 파헤친 볼드 윈(James Boldwin)이 말한 대로 역사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 교묘하게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다양한 형태로 지금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단돈 100억 원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일본에게 덥석 합의해준 일본군성피해여성 합의문제와 일본의 독도영유권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 일본의 전면 침략을 본격화 한 1937년의 중일전쟁 발발 80주년을 맞아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일제의 침략전쟁이 남긴 후유증이 문제가 되고 있다. 대만에서는 과거 1947년 중국국민당이 대만 주민들을 대량으로 살해한 이른바 ‘2·28사건’이 다시금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집권세력이 이 사건에 대한 해결의지를 표명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2·28사건이란 1947년 2월 28일 타이페이(臺北) 시내 톈마다방(天馬茶房)이라는 곳에서 전매특허인 담배의 불법 판매를 단속하던 국민당정부의 관헌이 담배를 몰래 팔던 노파를 살해한 게 발단이 돼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현장을 목격한 주변 시민들이 그 관헌에게 항거했고, 결국 나중에는 국민당 군대까지 투입돼 백주에 보이는 대로 시민들을 살해하는 백색테러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원인일뿐, 거시적으로 보면 일제 패퇴 후 대만으로 들어온 외성인(外省人)인 중국인들과 다수를 점한 대만 본토인인 대만인(‘원주님’이라고 불린 약 50만 명의 9개 소수민족과 명청대 이래 중국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한족과 客家族)들 사이에 존재한 상호 오해, 편견, 무시, 차별, 갈등과 알력이 빚어낸 비극으로서 국민당의 착취와 비민주적 폭압정치에 대한 대만민중의 저항에 대한 과도한 진압이 사건발생의 본질이다.
국민당군이 연일 공산군에 밀리는 패전상황이 지속되자 최고 실력자 장졔스(蔣介石)가 중국대륙에서 대만으로 천도할 것을 대비해 미리 자신의 오른팔 천청(陳誠)을 대만에 보내 통치기반을 닦게 하는 과정에서 대만민중에게 압제를 가한 것이었다.
대만인들은 국민당의 탈법적이고 과도한 세금징수, 대만청년들의 징발 및 국공내전 투입, 대만어 사용금지 등의 토착문화에 대한 압제, 대만인들에 대한 각종 제도적, 신분적 제한에 불만이 쌓여가던 중 이 사건에 분노가 폭발했다. 국민당 관헌들에게 저항했다가 군대까지 투입된 국민당의 잔혹한 진압을 당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타이페이 소재 2·28기념재단에서 추정하고 있는 통계에 의하면, 당시 이 사건으로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한 희생자는 무려 1만8,000~2만8,000명에 달했다. 이는 1992년 리덩후이(李登輝) 정권 시절 대만 행정원에서 낸『2·28사건연구보고서』의 추정에 근거한 것이다. 현재 대만 2·28기념재단의 심사에서 증거자료가 입증돼 피해자로 인정된 수는 겨우 2,302명이고, 이 가운데 사망자수는 685명이며, 실종자 수는 180명이라는 사실이 이 사건의 해결이 지난한 과정에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2·28사건은 대만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대만 현대정치의 아킬레스건이다. 깊게 패인 이 한과 상흔의 치유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국민화합은 물론, 더 나은 미래로 한 발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국가와 사회발전을 가로 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지난 달 2월 28일, 2·28사건 발생 70주년을 맞아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직접 나서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해 해결방향을 제시했다. 차이 총통의 담화내용은 같은 여성지도자인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사인식 및 해법과 도드라지게 비교가 된다.
첫째, 차이잉원 총통은 2·28사건에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없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사실 역사적 사건에서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듯이 가해자 없는 피해자는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해자인 국민당은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차이 총통은 지금까지 2만 명 이상이나 되는 피해자들만 있고,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는 모호한 상황을 그대로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가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파헤쳐 이 임무를 반드시 완성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가해자로서 국민당 지도자로 추앙 받아온 장졔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직결되는 문제다. 차이 총통은 타이페이 시내 중심에 넓게 자리 잡은 장졔스 기념관의 성격까지 바꿀 것을 시사했다.
장졔스의 이름을 딴 ‘中正紀念堂’은 장졔스 총통을 기리는 기념관으로서 과거 독재정권의 상징물이었다. 장졔스는 중국대륙에서 중국공산당에게 밀려 대만으로 건너온 뒤 대만을 발전시킨 위대한 지도자로 숭앙돼 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당 후퇴시에 그들을 따라 대만해협을 넘어온 200만 이상의 외성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무력을 지닌 그들로부터 갖가지 핍박과 착취를 당한 역사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는 내성인(內省人)들에게 중정기념당은 독재와 압박의 상징으로서 철거 대상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미화와 성역화도 모자라 중고등 학교의 역사교과서까지 국정화로 되돌리려는 박근혜 정부의 과거사 정책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둘째, 사건의 진상규명이 있어야 바르고 진정한 화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이를 향후 문제해결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진정한 화해는 사건의 진상 규명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차이 총통의 역사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한 마디로 2·28사건은 국가권력이 자행한 폭력으로서 대만인들의 한이 서린 집단적 상처이자 악몽이다. 진상규명을 위해 차이 총통은 며칠 전 대만 國史館에 밀장돼 있던 2·28사건 관련 새로운 기록물들을 전면 공개하도록 조치했다.
또 대만 국가문서보관서(國家檔案局)에 소장돼 있는 2·28사건 관련 기밀 문건들도 모두 해제하기로 하고, 3월 1일부터 대만 국가문서보관서가 주관이 돼 정치 기록물 처리 관련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하기로 했다. 각급 기관들에는 2·28사건이나 20여년 이상 지속된 계엄시기 국민당 독재세력에 저항하다 체포된 내성인 민주투사들에게 강요한 자백서, 각종 법적 공판기록 및 판결서 등이 소장돼 있는데, 관련 기관들의 공문서들을 일일이 찾아내기로 한 것이다. 이 기록물들은 ‘국가과거청산조사보고서’의 바탕이 될 것이며, 앞으로 이 조사보고서에 2·28사건을 다루는 장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셋째, 2·28사건의 책임자를 분명히 가려내겠다는 의지를 밝힌 점도 주목할 만하다. 차이 총통은 담화에서 신중하게 이 사건에 관한 책임귀속을 다룰 것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다. 이는 지난 정권, 특히 가해자인 국민당이 추진해온 사건 해결노력이 전면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내성인의 불만을 조응한 조치였다. 국민당도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자발적이고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여론의 압박에 밀려 마지못해 시행한 것이었으며, 저항 세력의 방해도 잇달았기 때문에 진상규명에 한계가 있었다.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정부 국책연구기관인 중앙연구원 소속 근대사연구소에서『2·28事件資料選輯』을 간행해왔지만 국민당 관방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상 한계가 있었다. 2·28사건에 대한 국민당의 입장은 지도자에 따라, 인물에 따라 달랐다.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은 집권 시 매년 사과하고 진실을 계속 밝히겠다고 수차례 언약했지만, 국민당 내 보수세력의 집요한 저항에 부딪쳤다. 그들은 마잉주 총통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써냐”고 따지기도 했다. 또 “이미 지나간 일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고 미래를 봐야한다”거나, “독재시대 통치자의 시비와 공과는 역사에 맡기자”고 하고, “경제가 훨씬 더 중요한 시점에 왜 과거청산을 해야 하느냐”, 심지어 “과거사 청산은 정치투쟁”이라고 비난했다.
차이 총통은 사건진상 규명과 책임소재의 규명을 반대해온 국민당과 그 지지자들을 겨냥해 “진상규명이 없으면 지나가야 할 일도 영원히 지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또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의도 아주 중요하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그는 “발전과 정의가 함께 존재하는 나라의 건설”을 대만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이정표로 제시했다. 총통의 의지를 실현시키려면 입법부의 법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지난 2월 23일, 2·28사건과 국민당정권이 자행한 백색테러의 진상규명을 목적으로 대만 정부의 행정원(한국의 국무총리실과 유사함)과 집권당인 민진당 국회의원들이 이번 국회 회기 중에 우선적으로 처리하기로 한 법안으로 ‘과거청산촉진조례’(促進轉型正義條例)를 결정했다. 국회 회기 중에 이 ‘과거청산촉진조례’가 통과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차이 총통은 법안이 통과되면 과거청산에 관한 일을 처리할 독립적인 기관도 설립하겠다고 공언했다.
역사인식이 제대로 된 지도자에게는 과거 비명에 간 국민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그들의 구원을 풀어주는 게 경제적으로 조금 더 잘 살게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는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로 인한 폐해를 은폐하면서 산업화, 수출신장을 통한 경제성장의 공에 대해 노동자, 농민, 해외 근로자들의 피와 땀은 무시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만 돌리는 등 역사를 정치도구화, 사유화 하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인식과 또 한 번 대비된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역사 인식과 해결방향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국민통합과 국가 및 사회의 안정은 물론, 정신문화의 질적 성장에까지 영향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좋은 예다.
넷째, 사건해결의 방법으로 폭력이나 비이성을 배격하고,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대화를 제시한 점도 인상적이다. 이는 전국민이 참여함으로써 역사 앞에 당당하고 역사의 주인이 되게 하겠다는 의지로 이해된다. 차이 총통은 “과거사 청산은 온 국민이 함께 할 때 가능하며, 과거를 당당하게 직면할 수 있어야 국가의 미래가 밝게 된다”고 역설했다.
차이 총통은 자신의 희망과 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대만의 모든 정당과 모든 민족들이 착한 인간의 본성을 갖고 과거의 고난을 함께 마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날이 오게 되면 대만은 새로운 국가로 탈바꿈”하게 되고, “대만의 민주주의도 한 발 더 나아갈 것이다.”
다섯째, 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소재를 분명히 밝힌 후 가해자의 진정어린 사죄와 피해자의 용서를 통한 국민화합을 제시했다. 차이 총통은 “과거청산은 투쟁이 아닌 화해를 추구하는 것”이라면서 이는 대만정부가 단호히 지켜야 할 원칙이라고 못 박고, 진실을 완전히 밝혀내어 가해자가 사과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사실 가해자가 진정성 있는 사과도 하지 않는데 용서해주는 것은 정략적인 면벌부일 뿐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포용이 아니다. 그것은 이를 추진하고자 한 정치지도자의 개인 치적을 드러내려는 욕심일 뿐이다.
진정한 화해와 이를 토대로 한 국민통합은 어떤 경우라도 진상규명,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 피해자가 용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재발방지가 담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의미 있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한국 역대 정권 중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세력의 지도적 인물들을 사면했을 때 그들의 진실한 사과 없이 사면해준 몰역사적인 과거사 처리행태와 대비된다.
여섯째, 2·28사건 때문에 더 이상 누가 누구를 질책하고, 난처해서 피할 필요가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또한 “다시는 금기가 없고 금기를 언급하면 안 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1990년대 초기에 들어오면서부터 국민당 독재정권이 느슨해짐에 따라 2·28사건에 대한 금기가 풀리기 시작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원이 반목이 해소되지 않고 있어 정체성 충돌이 종식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차이 총통은 “가해자였던 독일 사람과 피해자였던 이스라엘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대만이 배워야 할 가장 좋은 모델”로 보고 “이런 장면을 언젠가 대만에서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과거사를 청산하면 대만에서는 어떤 정당이든 다시는 권위주의, 즉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과연 반세기 이상 맺힌 대만인들의 내상과 응어리가 풀려서 차이잉원 총통과 대만인들이 바라는 대로 대만 전역에 화창하고 꽃 피는 봄날(春暖花開)이 올까? 이는 전적으로 총통을 위시한 집권당의 일관되고 지혜로운 정책적 노력 그리고 국민당 세력이 얼마만큼 호응하는 가에 달려 있다. 대만의 과거사문제 해결이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위 글은 2017년 3월 2일자『오마이뉴스』에「대만 차이 총통과 박근혜 대통령과 도드라진 차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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