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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새해 정초에 권하는 智談

雲靜, 仰天 2017. 2. 4. 13:47

정유년 새해 정초에 권하는 智談

 

설 명절 연휴가 금새 지나갔다. 우리는 여전히 음력을 고수하고 있으니 이제사 정유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통상 설날에는, 새해를 맞이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자는 의미에서 희망을 얘기하고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덕담은 설 연휴 동안 주고받은 것으로 충분하다. 덕담은 마음에 담아두고 이제 가슴에 새길 좀 더 근원적인 자기성찰의 智談이 필요한 차례다.

  

한국인들은 1년에 1인당 평균 맥주 120병, 소주 90병, 커피 330잔을 마신다는 통계가 있다. 또 매일 스마트폰을 3시간 이상 손에서 놓지 않고, 텔레비전에는 3시간씩이나 눈을 고정시키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런데 책은 1년에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친구, 동창들끼리 만나고 모이는 것은 엄청스레 좋아하면서도 인문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에는 대단히 인색하다. 아니 그런 대화의 필요성은 물론, 대화를 나누는 방법조차 잘 모르고 산다고 하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또 일반인은 논해선 안 될 영역이고 학자들만 논하는 소위 ‘먹물’들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문학에 대해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거나 대학이나 학술세미나에서 할 일이지 일상생활 속에서나 저잣거리에서는 논할 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사는 게 일반적이다.

 

어쩌다가 사석에서 인문학적 주제를 얘기할라치면 “골치 아픈 얘기 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자”고 하면서 핀잔을 주거나 뒤돌아서서 잘난 체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게 대다수다. 과연 이런 나라에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을까?

  

하루에 평균 40명이 넘는 이들이 매일 자살로 죽어가고, 1년이면 만 명하고도 수천 명이 더 되는 사회적 약자들이나 억울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자살로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하고 있는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손을 놓고 있다. 일반인들은 자기와 자기 가족의 일이 아니라고 해서 관심도 없고, 이런 참담한 사실을 알지도 못한다. 극심한 경쟁사회로 내몰린 결과 남이야 죽든 살든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에 과연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문학을 거론하기 이전에 우선 음주를 줄이는 만큼 독서량이 늘어나야 한다. 인문학의 사회적 인프라라고 할 수 있는 독서는 한 나라의 지적, 문화적, 안정성과 성숙도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이웃 나라 일본인들의 독서열과 학구열은 잘 알려져 있다.

 

요즘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추세에 있지만, 한 때 지난 1세기 이상은 대단했었다. 약 150년 전인 메이지유신 후인 1872년 2월 초편이 출간되고 마지막 제17편이 출간된 1876년 11월에 이르는 4년 남짓한 사이에 후쿠자와 유끼찌(福澤諭吉)의 저서『학문의 권장』(學問の勸め)은 500만 권이나 팔렸다. 요즘 말로 스테디셀러가 된 것이다.

 

 

학문의 권장 선장본. 근대 일본어 고어체로 씌여져 있어 요즘의 일본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읽기 쉽게 현대 일본어로 번역된 '학문의 권장'

 

이 책이 소설이라면 우리도 1980년대 이후부터는 인구 대비 일본만큼 스테디셀러가 된 책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학문의 권장』은 자유, 독립, 평등 개념을 주요 축으로 국법, 국민과 학자의 직분 등 일본인들이 접하지 못했거나 모르고 있었던 개념들을 일깨운 인문학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은 저자가 원래 충의를 근간으로 한 유교적 가치관과 결별한 근대 시민국가를 세우려는 구상과 달리 일왕에 대한 충의를 일의적 덕목으로 삼은 '천황제 국가'의 확립에 크게 일조한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사회학적 측면에서는 근대 일본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일본인들의 평균적 지력과 사고력을 거국적으로 끌어올리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삶의 행태에 크게 영향을 미친 국민적 필독서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가 된 것은 어쩌면 이 같은 독서의 국민적 넓이와 그 응용이라는 지식의 생산과 소비의 격차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독서를 통한 사유와 자기성찰 그리고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이 부족하거나 헤먹은 사회는 단기간의 압축적 성장으로 겉보기엔 번지르르 할지 몰라도 알맹이는 속빈 강정처럼 실속이 없고 취약할 수밖에 없다. 허우대만 그럴싸할 뿐 정신과 얼이 없는 것이다.

 

인문학이 가져다주는 이성과 합리, 인문주의적 인식과 성찰과 균형감각이 없는 사회는 자본주의적 변방을 개척한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일약 떼부자가 된 ‘뉴보리시’(졸부)들이 보여준 바 있듯이 반인간적이고 몰역사적인 배금주의와 행태만 사회적 추종가치의 대세로 만들뿐 집단 지혜와 활력을 사라지게 만들어 윤기가 없어지게 마련이다.

  

고개를 돌려보라. 종교, 학문, 예술, 과학, 기술, 체육, 정치, 외교, 군사, 안보, 등등 각 분야에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진을 치고 있지만, 우리가 가꿔왔던 사람 위주의 기존 공동체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가? 공동체가 무너지면 곧 자신을 포함한 가족이 안으로부터 무너지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사회 저층에서 가족이 해체되고 이웃들 간에 반목과 질시가 배증되는가 하면, 사회적 차원에서는 계층간, 연령간, 성별간, 지역간의 몰이해나 적대의식에서 비롯된 갖가지 알력과 쟁투가 일상화, 영속화 되고 있다.

 

이는 대부분 역사의식과 지도자로서의 소명의식 대신 국민의 허기진 욕구를 등에 업은 탐욕이 몸에 베인 국가지도자들과 그 패거리들이 자신과 일족들만의 이익을 위해 국민에게 마땅히 돌려줘야 할 각종 기본권과 권익을 극소수 기업들에게 몰아주는 식으로 합법적인 권력을 사유화하는 농단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과 성찰 없이 신앙처럼 그런 지도자를 뽑은 국민에게 있다. 자업자득인 셈이다. 현명한 유권자에게 사악하고 탐욕스런 정치지도자는 발붙이지 못하는 것이 이치임에도 현실은 그 반대다. 오히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아니냐는 식으로 서로 결탁한다. 유권자가 현명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희박한 인문학적 토양이 자라나려는 정의 의식의 목을 비틀어버리기 때문이다.

  

정유년 새해 벽두에 소망하는 게 있다면 주위에 관심을 가지고, 이웃과 사회 나아가 국가 대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작금 우리사회가 불행하게도 대통령의 탄핵사태에 이르게 된 까닭은 국민 개개인이 평소 나 이외의 ‘그들’ 나아가 나를 포함한 ‘우리’라는 문제를 외면하는 등의 인문학적 성찰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성찰은 독서를 통한 사유와 대화의 힘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새해에만 행할 게 아니라 1년을 하루 같이 실천할 일이지만, 1년에 5천만 명의 전국민이 마셔대는 국민 한 사람당 평균 130병의 맥주와 90병의 소주 대신 그 10분의 1이라도 책을 읽고 생각하고 대화함으로써 이성과 합리성을 증장시키는 인문학적 삶이 일상화되면 좋겠다.

 

나아가 욕심을 더 내면, 독서와 사색과 대화로만 끝나는 정보와 지식은 온전한 것이 아니며, 모든 정보와 지식은 일상생활에서 실천되고 지역사회 혹은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이어질 때 유용하고 적실성이 더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2017. 1. 31

雲靜

 

위 글은 2017년 2월 4일자 『축제와 뉴스』인터넷 신문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