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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 성찰과 제언

雲靜, 仰天 2015. 6. 23. 10:33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 성찰과 제언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한일 양국이 국교를 수립하고 관계를 정상화 한지 올해로 꼭 50년이다. 인간으로 치면 ‘지천명’(知天命)의 연륜이 쌓인 것이다. 축하 할 일이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의 궤적을 되돌아보면 양국관계는 ‘하늘의 뜻’을 알고 지내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한일 관계는 극우의 기치를 내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이래 계속적으로 악화돼 현재는 최악이다. 꼬일대로 꼬인 한일관계의 매듭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1951년 교섭을 시작한 한일은 총 7회의 회담을 끝으로 만 13년 8개월 만인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으로도 불림)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12월 18일에 비준됨에 따라 두 나라는 형식논리론 적대관계가 청산되고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라는 동일한 이념을 추구하는 이웃국가가 됐다. 광복된 지 20년 만의 일로서 한일 국교정상화에 기초한 한일관계의 틀인 이른바 ‘1965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이로써 당시 동아시아지역 전체가 냉전에 휩싸여 있던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참여한 미국의 반공망이 구축됐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엄존하는 북한의 위협과 도발을 억지하는 근원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후진국이었던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선진 기술, 자원과 자본을 지원 받아 경제개발에 착수한 결과 경제성장을 이루는 밑거름이 됐으며, 일본은 한국시장을 확보해 작지 않은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지난 50년 간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인적, 물적 교류는 확대일로에 있어왔지만 시야를 안보와 경제 측면에만 고정해놓고 보면 양국은 처음 국교를 정상화하고자 한 목적, 즉 냉전구도 하에서 반공에 대한 공동 대응을 기반으로 한 안보적 협력과 경제선진국 일본과의 경협이라는 두 가지 필요성을 충족시킨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체제경쟁이 가열된 상황에서 한국이 한일 국교 정상화로 안보를 다지고 일본의 지원금을 경제발전에 활용할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한일 국교수립은 식민지국가와 피식민지 관계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평등, 대등한 수평적 관계로 전환된, 세계사적으로 귀감이 되는 좋은 본보기다. 올해 각종 국교정상화 기념 및 경축 행사들로 두 나라를 바쁘게 만드는 배경이다.

  

그러나 작금 온전하지 못한 한일협정의 여파로 현재까지도 후유증이 심각한 양국의 현실을 보면 마냥 축하할 때만은 아니다. 양국관계의 개선을 위해선 ‘1965체제’가 근본적으로 수정돼야 한다. 따라서 축하 보다 한일협상 체결의 실상과 본질을 아는 게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시점이다. 바둑 복기하듯 한일기본조약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따져보고, 또 조약 내용이 가진 한계에서 기인한 양국 관계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대응책을 모색해보는 게 더 긴요하다.

  

한일협상은 처음부터 한계를 안고 출발한 회담이었다. 한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주도한 일본 측 주역들은 하나 같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식민 지배했다는 의식이 전혀 없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협상에서는 왕왕 협상상대에 대한 인식과 힘의 우열에 따라 협상의 의지와 목표가 달라지지 않는가?

 

당시 협상에 응하고 지원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수상,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수상, 노동운동가이자 낭인정치가인 야쯔기 가즈오(矢次一夫), 양명학의 대가로서 전후 일본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야스오카 세이토쿠(安岡正篤) 등 이른바 일본정계의 실력자들이었던 그들은 모두 80대의 노인들이었다. 그리고 한국을 자신들의 ‘집안’이라고 생각하고 ‘집안의 어른처럼’ 행세하면서 “집안 끼리 침략이고 제국주의고 할 게 뭐가 있느냐?”는 인식이 머리에 박힌 이들이었다.

 

그들의 친한행적은 진정성이 결여된 가식이었다. 평소 한국을 위하는 척 하는 발언들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1982년 정작 일본 문무상이 역사교과서 왜곡 망언이 나와 한일 관계가 험악해져 올바른 질책이 필요할 때였건만 그들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했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것은 전후 자신들이 벌인 대외 침략전쟁 등의 과거사를 스스로 청산할 수 없었던 구조가 만든 당연한 결과였다. 전쟁범죄를 단죄할 수 있는 칼자루를 쥔 미국이 전후처리를 어물쩍 자국이익에 맞춰 편의적으로 한 데에 원인이 있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일본을 중국과 소련 등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을 방파제로 상정, 육성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선회되면서 일본군 전범 단죄는 불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전전 일본제국주의의 1급 전범이었지만 정략적 필요에 의해 사면돼 나중엔 수상으로까지 등극했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정권이 미군정의 허락을 받아 1950~51년에 적극적으로 추진한 군국주의자의 공직추방 해제로 정치적 권리가 회복된 사람들 중에는 군 고위직으로 복직하거나 국회의원, 내각 관료와 기업의 중역으로 부활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요시다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된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가 대표적인 예다.

  

이것이 전후 일본 보수주의를 강고하게 만들고 극우로 치달을 수 있게 된 인적 토대였다. 그들은 보수연합체제인 이른바 ‘55체제’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한국과의 수교협상이 진행되던 1955년 2월 중의원 선거에서 새로운 정부여당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한 민주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그 해 11월 자유민주당과 통합해 새로운 자유민주당(自民黨)으로 출범시킨 것이다. 요시다는 ‘55체제’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정부는 이런 극우세력을 상대로 힘든 협상을 벌여야 했다. 그들은 한민족에게 가한 잔악한 식민통치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기는커녕 식민통치가 착취였다고 생각하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것에 그치지 않고 근대화된 일본이 후진국 조선에게 베푼 근대화의 시혜였다고 생각했다. 한일 수교협상 테이블에 올라올 보따리가 작을 수밖에 없던 한계였다. 한국은 조약 체결로 일본정부로부터 3억 달러의 무상원조와 2억 달러의 청구권자금을 지원받았는데, 당시 환율(달러당 270원) 기준으로 2,160억 원에 해당한다.

 

그 시절 한국정부의 한 해 예산이 약 3억2,000만 달러, 외환보유고가 1억4,000만 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일본 측에선 이 돈이 많거나 적절한 금액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이 액수는 일본이 여타 아시아 국가들에게 지원한 금액과 비교하면 결코 큰 게 아니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잠시 침략했던 미얀마에 2억 달러(1954년 2월), 필리핀에 5억5,500만 달러(1956년 5월), 인도네시아에 2억2,000만 달러(1958년 1월)를 원조했다. 이 원조에 더해 이 세 나라에 총 7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는 식민지 상태로 36년 동안이나 착취를 당한 게 아닌가? 일본이 우리에게서 착취해간 물자와 우리 민족에게 강요한 희생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돈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한국전쟁 시기 우리가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피로써 일본의 안전을 지켜준 덕택에 경제대국을 이루지 않았던가? 이 시기 미국은 일본에게서 미군용 군사장비를 대량 구입했는데, 1951년에 약 6억 달러, 1952년과 53년에 각각 8억 달러가 넘는 수입을 가져다 줬다. 막대한 달러의 유입은 일본경제에 윤활유가 돼 공장 및 설비에 신규투자를 가능하게 만들어 일본경제가 회복되는 밑거름이 됐다.

  

한일협정의 조약 내용도 문제가 적지 않았다. 기본관계 협상에서 한국 측은 1910년의 한일 강제병합조약과 그 이전 한일 간의 모든 조약·협정들이 폭력적 강압과 불법으로 체결됐기 때문에 애초부터 성립이 되지 않는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일본 측은 당시 국제사회가 용인한 합법적인 체결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는 합법적이었으며, 단지 1965년 시점에 무효가 됐다고 주장했다. 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됐지만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already null and void)는 외교적 수사로 절충돼 애매하게 처리돼 훗날 외교, 영토문제가 된 불씨를 남겼다.

 

‘5․16’ 후 정권의 기반이 약한데다 일본의 경제지원이 절실한 약자 처지의 한국정부는 ‘안보경협’의 필요성에 따라 일본의 한국강제병합의 불법성을 인정케 하는 것을 관철하지 못하고 한일 청구권협정에 배상조항을 삽입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식민지배상과 관련해 “최종적이고 완전한 해결”(제2조 제1항)을 한 것으로 합의가 됐다. 이는 전후 미국의 편파적인 중재로 체결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선례에 따른 결과였다. 미국은 이 평화조약에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한 피해국이었음에도 한국을 제외하고 불법 식민지배 피해자들에게 대한 손해배상문제와 한국의 독도영유권 명기를 기피했다.

  

그러나 2005년 8월 26일 한국에서 공개된 한일협정 외교문서에 의하면 “최종적이고 완전한 해결”이라는 어구는 자국민에 대한 주권국가 간의 ‘외교적 보호권’(diplomatic protection)을 포기한 것에 불과했다. 표현을 달리 하면, 한일협정은 국가 간의 협정에 불과할 뿐 피해자 개인들의 손해까지 해결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일본이 한국정부에 제공한 유무상 총 6억 달러도 식민지배의 불법성에 대한 손해배상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고 경제를 개발시키기 위한 시혜차원에서 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개발 협력자금’이었다. 따라서 현대 국제법의 추세에 따라 일본군 성노예, 원폭피해자, 사할린 동포 등 식민지 시절 당한 피해자 개인들은 법적 권한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일본정부에 개인의 국제법상 ‘손해 배상권’을 청구할 수 있다.

  

봉합된 한일협정은 국제법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 응당 해결해야 할 과거사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족쇄가 돼버렸다. 역사문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다 보니 독도문제도 역사문제가 아니라 영토문제로 변질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사회가 극우화 되고 정치인들이 일본을 전후의 평화헌법을 고쳐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끌고 갈 수 있는 토양이다.

 

일본은 이미 국가의 중심축이 극우화로 기울었다. ‘극우’란 평화헌법을 근간으로 한 평화체제를 깨고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몰고 가고자 하는 세력을 가리킨다. 평화체제를 옹호하거나 지속시키려는 세력은 우익이며, 좌익은 이 체제를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세력이다.

  

일본의 극우화에 ‘총대’를 멘 이는 아베 신조 총리다. 지난 워싱턴 방문으로 평화체제를 뒤 엎을 수 있는 환경과 동력을 만들어 놓은 상태다. 그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미 의회의 환대를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승인받은 표증으로 여기면서 득의만만해 한다. 또 “일본의 안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주변 지역 사태”에만 개입하는 것으로 수정한 1997년의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또 한 번 개악해 미일의 역할분담을 명분으로 미군과 협력하는 자위대의 활동범위를 일본주변 지역을 넘어 전세계로 확대했다. 일본군 성노예도 국가가 강제한 게 아니라 사적인 ‘인신매매’범죄 차원의 개인적인 문제로 격하시켜 국가의 책임을 회피했다.

 

아베는 일본자위대가 전세계 어디서든 미군에게 후방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미국에 협조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과거사에 관한 사면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아베는 미국의 지원 아래 자국 내 정치에서도 장기 집권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일본은 누가 뭐래도 제 갈 길을 갈 것이며, 머지않아 평화헌법도 개정될 것이다. 당장 아베는 그저께 5월 14일 임시각의를 열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내용의 11개 안보 법률의 제정 및 개정안을 의결했다. 전쟁부인과 ‘전수방위’를 명시한 이른바 ‘평화헌법’ 제9조를 허물겠다는 의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일본 국내에는 크게 평화헌법에 대한 무관심, 호헌과 개헌으로 여론이 갈려 있고, 지금까지는 호헌의 표가 많기 때문에 국회에서 수정이 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역전될 것이다. 그 역전을 최대한 막아야 하고, 개헌되더라도 우리가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준비를 갖추는 게 지금 한국이 할 일이다.

  

첫째, 일본과의 관계에서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원칙에 집착하기보다 실리 외교를 펼쳐야 한다. 적절한 명분을 찾아 외교를 정상화하면서 민간 교류를 지속, 확대시키는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독도영유권 문제, ‘일본군 성노예’ 등의 과거사문제와 여타 대북협력, 경제협력 등의 현안문제는 분리해서 대응하자는 것이다. 감정적 발산으로 그치고 말거나 혹은 표를 의식한 대일 비난을 지양하고 독도와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정의, 도덕, 인권, 양성평등 등 인류 보편적 문제로 접근해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을 상대로 적극 홍보해 공감대를 확대해나가는 식으로 일본정부를 압박해야 할 것이다.

  

둘째,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우리를 위협하고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일본과 '일정한 수준'까지는 안보협력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원칙만 고집하다간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양자택일 상황으로 내몰리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한미일, 한중일 등 동북아 지역 주요 국가들간의 다자협력 네트워킹을 만들어가야 한다. 무엇보다 대화 단절이 지속되고 있는 북한과의 대화에 물꼬를 터 한미일, 한중일 관계의 고립을 타개할 입지와 운신의 폭을 넓히는 게 시급하다.

  

셋째, 외교력이란 국력이 뒷받침 될 때 힘이 실리듯이 다시 한 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국력을 증강시켜야 한다. 국력증강은 사회를 뿌리 채 흔드는 총체적인 부패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국가 지배구조의 틀을 갱신하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 일본은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약자에 대해선 만만히 보고 무시하고 억압하지만 강자에게는 비굴하리만치 철저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호가호위 근성이 있다. 그들은 중국과 달리 한국에 대해선 아쉬운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상대로 보고 있다. 이런 구도가 바뀌지 않는 한 일본이 우리의 말을 들어주길 기대하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려는 연목구어다.

 

위 글은 월간『自由』지 2015년 7월호에 실린 기사의 원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