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외면한 외로운 투쟁 : 티베트 독립운동 50년사
서상문(중앙대 강사)
1959년 3월, 티베트인의 정신적 지주 제14세 달라이 라마는 눈 덮힌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올랐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조국산하의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두고 온 신민들은 언제 구원할 수 있을까? 2,600㎞나 되는 긴 여정의 인도로 가는 말 위에 탄 달라이 라마의 머리를 가득 채운 화두였다. 그로부터 꼭 50년. 그가 주석했던 티베트 라사(拉薩)의 포탈라궁에는 불교의 정법과 티베트를 상징하는 설산사자기(雪山獅子旗) 대신 중국의 오성홍기가 펄럭이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지금도 여전히 망명지인 인도북부 산촌마을 다람살라(Dharamshala)에 거주하고 있다. 해외 티베트인들은 물론 티베트자치구 등 국내외를 통틀어 600만 티베트인의 정신적 지주로서 그의 지위와 명성은 변함없지만 그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은 세계가 외면한 가운데 폭풍과 같은 큰 변화가 있었다. 안으로 새로이 대두된 강경 독립투쟁파로부터 변함없는 그의 비폭력 평화적 대화 원칙이 시험대에 오르게 된지 오래고, 밖으로는 중국의 대 티베트정책이 더욱 강경해 요지부동, 완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달라이 라마가 차지하는 정치적 위상과 기능은 그의 명칭에서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는 큰 바다(大海)라는 뜻의 몽골어 ‘달라이’와 고승을 가리키는 ‘라마’라는 티베트어의 합성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란 곧 학식이 큰 바다와 같은 고승, 큰 바다와 같은 영적 지도자를 의미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특히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정교일치사회가 만들어낸 유산으로서 부처의 환생이라고 믿어지는 살아 있는 부처, 즉 활불의 존재로서 티베트인의 정신적 지주임은 물론 세속의 정치권력까지 갖춘 법왕이다. 활불제도는 17세기 제5세 달라이 라마였던 나왕 롭상 갸초(1617~1682)가 확립한 것이다. 나왕 롭상 갸초는 그 이전 네 명의 달라이 라마들이 모두 종교적 권위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최초로 세속적 권력을 행사한 달라이 라마였다.
현재의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텐진 갸초가 속명이다. 그는 제13세 달라이 라마 툽텐 갸초(1875~1933)가 사망하고 2년 후인 1935년 라사에서 1,600㎞ 떨어진 티베트 북동부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새로운 달라이 라마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티베트 포탈라궁의 섭정은 어느 날 우연히 호수 수면에 어떤 미지의 사원과 가옥, 그리고 아이의 모습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이 아이가 바로 텐진 갸초였다.
두 살배기 아이는 티베트 섭정이 급파한 조사대가 도착했을 때 편벽한 한촌에서 태어났음에도 라사말을 알아들었고, 일행 중 변장하고 있던 라마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또 제13대 달라이 라마였던 툽텐 갸초의 환생여부를 가리는 시험에서도 툽텐 갸초가 생전에 쓰던 염주, 주장자, 북을 정확히 구별했다.
이로써 텐진 갸초는 달라이 라마 유고시 정치적 수반 역할을 하는 티베트 섭정으로부터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난 ‘환생 아이’, 즉 ‘轉世靈童’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는 포탈라궁으로 데려가져 수년간 달라이 라마 수업을 받은 후 1950년 만 17세가 되던 해에 티베트의 제14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해 친정을 했다. 비운의 소년법왕은 티베트민족의 운명을 홀로 걸머진 고독한 존재로서 외로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예나 지금이나 조국 티베트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중심이요, 땅으로부터 한 가운데요, 나라의 심장이요, 빙하가 성곽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모든 강의 머리”라고 형용되는, 두고 온 산하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곳의 백성들을 영원히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단 자신이 돌아가고자 하는 티베트가 중국정부가 아닌 티베트인 스스로의 자치가 보장되는 상황이 돼야 하는 전제에서다.
중국정부도 달라이 라마의 귀국을 환영한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티베트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을까? 그것은 자신과 중국정부의 요구조건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와 그의 티베트망명정부는 중국정부의 수용 범위를 넘어서는 수준의 자치권을 요구하고 있다. 이른바 ‘중도노선’으로 불리는 높은 수준의 자치권 획득은 티베트망명정부의 공식노선이다.
티베트 내부에 존재하는 달라이 라마의 자치노선이나 독립을 추구하는 강경노선이나 모두 궁극적으로 티베트가 중국과 문화적, 종족적, 정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엄연한 문화적 실체라는 사실에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이 자신들의 조국이 중국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독립이 돼야 한다는 당위성의 근거다. 즉 ‘티베트 독립론’인 것이다.
반면 중국은 역사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티베트가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이기 때문에 독립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즉 ‘티베트 종속론’이다. 여기에는 최근 수년 사이 제고된 국제위상을 바탕으로 달라이 라마를 무시해도 무방하다는 인식이 감춰져 있다.
‘티베트 독립론’과 ‘티베트 종속론’은 각기 내세우는 역사적 근거들이 존재한다. 즉 전자는 티베트 독립국의 역사적 전승을 근거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후자는 독립불가의 이론적 근거를 티베트는 역대 중국왕조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관점에 따라 해석이 모호해지는 역사적 사실들에서 찾는다.
제각기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 상호 설복이 용이하지 않은 양측의 주장은 특히 1967년 티베트인으로서 티베트독립의 정당성을 학문적으로 규명한 쩨폰 샤캅파(Tsepon W. D. Shakabpa)의 서적이 출간됨에 따라 더욱 격해졌다. 이때부터 격앙된 티베트망명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성명전은 정치, 외교 차원을 넘어 역사논쟁의 형식을 띠고 있다. 티베트측의 주장에는 중국인으로서 공산정부에 반기를 드는 반체제민주인사―중국에서는 “異議人士”라고 불린다―들이 다수 동조하고, ‘중국측’에도 티베트의 ‘중국예속설’을 주장하는 티베트인 학자들이 가세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티베트는 티베트인들의 주장대로 중국과 다른 별개의 독립국가였었는가? 독립국이었다면 그 역사적 근거는 무엇인가? 반대로 중국이 티베트가 자국의 고유한 영토라고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는 무엇인가? 양측이 주장하는 논거는 정당한가? 티베트와 중국, 그 선연과 악연의 역사는 크게 티베트 독립왕국 시기, 티베트의 몽골예속과 明․淸과의 특수관계 시기, 독립과 강점의 혼돈기로 구분해볼 수 있다. 각 시기별 양국관계의 역사적 상황과 그에 대한 양측의 주장을 짚어보기엔 주어진 지면이 한정돼 있어 여기선 부득이 양측 주장의 결론만을 소개하는 수밖에 없다.
티베트-중국의 독립론 및 종속론을 둘러싼 역사적 공방을 총괄하면 중국측의 주장은 이렇다. 즉 티베트는 당조부터 중국에 예속된 관계에 있어왔고, 그 후 13세기 중엽인 원조에 들어와 중국의 판도에 들어온 이래 700여년 동안 불가분의 중국영토로서 통치를 받아왔는데, 20세기에 들어 청조가 멸망하는 혼란기에 잠시 제국주의의 획책으로 중앙정부로부터 이완돼 있던 것을 새로운 국가가 수립된 후인 1950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해방’했다는 것이다.
티베트 측은 6세기 말, 7세기 초의 吐蕃시대부터 중국과 대등한 별개의 독립국가로 출발했으며, 이러한 독립 상태는 중화민국시대까지 줄곧 유지돼왔지만 신중국이 들어서고 난 뒤 강점됐다는 주장이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독립을 주장하는 근거는 티베트와 여타 외국 혹은 중국과 제3국이 맺은 각종 조약들이다.
예를 들어 1792년 티베트가 단독으로 네팔과 맺은 조약, 1842년 잠 藩王과 맺은 조약, 1856년의 조약, 1890년 티베트를 대신해 청조가 영국과 맺은 조약, 1893년 통상 장정, 1904년의 영국-티베트 조약, 1912년의 몽골-티베트 독립 조약, 1914년 티베트가 영국-중국 양국과 체결한 심라(Simla)조약 등이 있다. 이 조약들이 모두 티베트의 주권이 대외적으로 행사된 증거라는 주장이다.
중국의 저명한 반체제 인사 웨이징셩(魏京生)은 중화민국시대 중국과 티베트는 일종의 자발적인 ‘주권연합’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티베트 측의 티베트 독립론에 대한 논박에 앞장선 중국 측의 대표적 사학자 가운데 한사람인 왕꾸이(王貴)도 해방 전 티베트는 독립국가 지위를 득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도 “해방 전 서장 지방정부가 중앙의 허다한 사무적 영도에 복종하지 않고 민국정부와 국민정부의 명령과 결정, 지시의 집행을 거절하여 독립경향을 보인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인정한 바 있다.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으로 약함)은 1년 뒤인 1950년 10월 1일 티베트‘해방’ 성명을 발표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한국전쟁에 군대를 보내기 직전 티베트에 먼저 군대를 보내 점령하고자 한 것이다. 이 성명이 있고 1주일이 지난 후 10월 7일 중국군의 군사행동이 시작됐고, 10월 19일에는 동서 양로로 나누어 신장(新疆)과 촨캉(川康)방면에서 진격해 들어감에 따라 티베트 동부 캄區의 성도인 참도(昌都)가 함락됐다. 물론 이 사실은 극비로 부쳐졌고, 중국정부가 티베트 점령을 위한 군사행동 개시를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같은 달 25일이었다.
이 때 마오쩌둥은 티베트 점령에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신속히 티베트를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이유는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한국전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틈을 타 영국, 미국, 인도 등 과거 티베트와 관련이 있던 강대국들이 미처 손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의 티베트 점령에 대해 먼저 국제사회가 개입했다. 그러나 중도에서 성과 없이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1950년 11월 엘살바도르가 제5차 유엔총회에 중국군의 티베트 진주를 “외국군대의 티베트 침략”이라는 의제로 추가하도록 요청함과 동시에 “티베트에 대한 침략을 비난하고 총회가 취할 조치를 연구할 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취지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에 따라 유엔총회 내에 일반위원회까지 설립됐지만 유엔총회 일반위원회에서 이 문제는 티베트―중국 두 당사자간에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의제채택 결정을 연기해야 한다는 영국과 인도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 제안은 심의가 연기되고 말았던 것이다.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달라이 라마로선 중공군의 티베트 점령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어 1951년 5월 23일 어쩔 수 없이 중국이 제시한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명기한 이른바 중국―티베트간 ‘17조 평화협정’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티베트가 그간 외쳐온 독립주장은 전부 철회됐을 뿐만 아니라 군사, 외교상의 권한마저 박탈됐고, 티베트에게 주어진 자치나 종교의 자유 등에 관해서도 티베트 주둔 중국군으로부터 각종 간섭을 받아 유명무실한 것이 돼 버렸다.
티베트를 점령한 중국은 티베트를 ‘해방’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인민‘해방’군은 이때부터 자신들이 내세운 명분과 반대로 티베트의 경제, 민족, 전통종교, 전통문화 등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토지개혁, 농업 집단화, 한인이주, 농노계층의 해방,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티베트의 사회체제를 “극도로 반동적인 노예제 체제”로 인식한 중공 수뇌부는 티베트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오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책들은 “민주적 혁신정책”으로 포장됐지만 사실은 ‘연속혁명’으로 자본주의 잔재를 청산하고 중국을 사회주의로 개조할 수 있다고 확신한 마오쩌둥이 밀어붙인 일련의 정책들의 연장선에서 전개된 것들이었다. 요컨대 1957년부터 시작된 전국적 규모의 반우파 탄압, 각급 인민공사의 급조, 그리고 1958년부터 개시된 대약진운동의 전조가 티베트에 먼저 불어 닥친 것이다.
마오쩌둥의 티베트정책은 공산주의의 계급투쟁과 大漢族的 대국주의가 배합된 것이었다. 건국 후 마오쩌둥이 전국적으로 실시하고자 한 사회주의과도기 건설노선은 티베트를 비켜가지 않았다. 여기에는 지주계급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이 내포돼 있었다. 농노해방이라는 미명하에 지주를 타도해야 할 계급의 적으로 삼아 노동자, 농민, 특히 티베트의 전통적인 농노계급들로 하여금 지주의 토지를 몰수, 공평하게 분배케 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이 과정에서 토지를 겸병한 사원들이 ‘개조’됐다. 지주들과 승려계급이 각개격파 당한 것이다. 동시에 중국 내지에서 한인들을 티베트로 이주시켰다. 또 티베트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이 모호한 티베트인들을 끌어들여 그들을 기초 행정요원으로 고용함으로써 중국동화, 즉 漢化의 저변확대에 나섰다.
티베트 점령 이래 중공이 40여 년간 티베트인을 티베트인 행정 간부로 길러낸 수가 3만 8,000명에 달한다. 그들은 티베트자치구의 1급, 현급, 현급 이하의 각종 지도급 직무를 담당하면서 티베트족 가운데 새로운 귀족계층을 형성했다. 그들 중의 대다수는 티베트독립을 찬성하지 않는다. 티베트 기술간부도 현재 1만 8,000여명이 있는데, 이들도 대다수가 티베트독립을 찬성하지 않는다.
중공 당국이 1955년부터 1956년 사이에 시행한 토지개혁은 암도와 캄지방에서 처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티베트의 전통 작물인 보리 대신 밀을 경작하라는 지시에 따라 휴경지로 남겨두어 가축 떼를 위한 방목장으로 사용하던 드넓은 밀밭과 계곡에까지 밀이 경작됐지만 이 지역의 기후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제대로 익지 않거나 수확도 하기 전에 얼어버렸다.
수확량이 평년치를 밑도는 상황에서도 중국 당국의 지시에 따라 한 사람당 약 15㎏의 식량이 강제 징수됐다. 티베트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유목민을 한 곳에 정착시키기 위해 그들의 가축을 몰수하여 인민공사 소유로 만들기도 했다. 농업집단화를 의미한 이러한 인민공사의 설립은 티베트의 여타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돼 갔다.
종교개혁은 곧 티베트의 정치, 사회적 지도층이자 그 자체로 권력집단화 돼 있던 불교가 대상이 됐고, 종교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진행된 불교개혁은 승려를 환속시켰고, 수천 개의 사원을 파괴시켰다. 이 시기 중공의 폭압과 인민재판에서 살아남은 사원의 승려들은 밭으로 떠밀려 이른바 ‘인간개조’의 일환으로 육체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들에게는 가정을 꾸리라는 명령, 즉 환속명령이 내려졌다. 기득권의 해체작업이었다.
또 중공은 승려들을 환속시킬 수단으로 여자들로 하여금 승려 한 사람의 정조를 빼앗을 때마다, 또는 음탕한 말과 함께 성관계를 가질 때마다 그 여자들에게 중국돈 100위안까지 지급했다고 한다. 인간성 파탄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일이 실제였을까 믿기지 않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높은 산, 맑은 땅, 그리고 선량한 나라”에 사는 티베트인들이지만, 그들의 불평불만은 날로 심화되어 가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토지개혁의 폐해가 가장 심했던 암도와 캄 지역 주민 사이에 극도로 고조됐다. 결국 티베트민족 중에서 가장 용맹하고 과감한 것으로 알려진 캄파족(Khampas)이 1956년경부터 티베트 동북지방에서 반중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이미 1956년초에 이르러 티베트의 중부, 남부로 확산되어 전국적인 것이 됐다.
티베트는 크게 중앙부의 우창(U-Tsang=衛藏), 동남부의 캄(Kam=康, 西康), 동북부의 암도(Amdo=安多), 고지대로서 인구가 희박한 서부의 응아리(Ngari=阿里), 사막지대인 북부의 짱단(Zyang Thang) 등 다섯 개 지구로 나뉘는데, 수도 라사와 두 번째로 큰 도시 쉬가체(Shigatse=日喀則)는 우창지역에 있고, 암도지역은 오늘날 칭하이(靑海)성 남부에 해당한다.
1958년 들어 티베트 측은 승려가 중심이 된 護敎지원군 4,000명을 조직했고, 이듬해 3월 티베트 국민회의가 독립을 선포함에 따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어떤 무장 봉기든 그 한 가운데는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가 시위대를 견인하는 자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라사 주재 중공당국은 무장봉기를 근본적으로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한 모종의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것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음모였다. 음모를 꾸민 라사의 중국군 지도부는 1959년 2월 7일 조캉사원에서 형이상학 분야의 최종 지도자 시험을 치르고 있던 달라이 라마에게 정중하게 라사의 중국군사령부로 초청할테니 연극을 같이 감상하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장관들이나 경호원의 호위 없이 단신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달라이 라마를 살해하거나 혹은 납치 연금하려는 저의로 여길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표면적인 평온 속에 포탈라궁과 중국당국 양측 사이에 달라이 라마의 군구 방문 날자와 의전문제로 의견이 오고간 뒤 3월 10일에 달라이 라마가 군구로 가서 공연을 보기로 정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라사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가 살해될 것으로 직감했고, 이 불길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항간에는 “군구가 달라이 라마를 독살하려고 한다”라거나 “군구가 달라이 라마를 북경으로 압송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준비해뒀다”는 등의 소문이 난무했다.
3월 10일 점점 불어난 수만 명의 군중이 한인들에게 티베트를 떠날 것을 종용하고 티베트의 독립을 요구하는 적대적 슬로건을 외치면서 포탈라 궁을 에워싸고 달라이 라마를 보호했다. 티베트어로 수가바티, 즉 “신들이 사는 극락의 땅” 라사에 일촉즉발의 긴장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자신의 정치 고문들 간에 망명여부를 두고 격론이 벌어지는 와중에 달라이 라마는 탈출을 결심했다. 중국이 자신과 그의 민족들을 박해하는 환경을 벗어나는 것이 티베트의 운명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3월 17일 밤 10시 경, 군복을 입고 티베트 병사로 위장한 달라이 라마는 정부의 고위직 수명, 자신의 가족 등의 일행 400여 명과 함께 약 200여 명의 티베트군 경호부대의 호위 속에 포화를 뚫고 포탈라궁을 빠져 나와 만년 설산의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다. 미국에서 훈련을 받은 티베트 공수요원들이 달라이 라마 일행을 보호했고, 그들은 무선으로 매일 미국CIA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3월 27일 달라이 라마는 미국CIA의 통신망을 통해 “티베트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일행은 혹한 속의 연속된 긴장과 때로 비통함과 참담함이 엄습한 고뇌어린 역정 끝에 3월 30일 인도령 타왕(Tawang)에 도달했다. 그 후 테즈푸르(Tezpur)를 거쳐 그들이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인도북부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산촌도시 다람살라였다. 그의 나이 만 24세였다.
달라이 라마 일행이 이곳에 망명정부를 꾸릴 수 있었던 것은 달라이 라마의 사전 망명요청을 받아들인 인도 수상 네루(Jawaharlal Nehru)의 ‘인도주의’적 선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티베트가 중국과의 완충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의미도 없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티베트와 관계가 깊었고 중국과 경쟁관계에 있던 인도사회는 중국의 폭거를 비난하고 달라이 라마 일행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사실상 티베트는 지리상으로도 인도와 가깝지만 정신문명의 관점으로 봐도 중국문화라기 보다 인도문명권에 속한다.
네루는 그들을 환영했지만 그것은 정치와 분리된 인도주의적 차원의 것이었다. 네루는 이 보다 5년 전 중국과의 협정에서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측의 주장에 손을 들어준 바 있는데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를 외교적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했다—인도정부는 지금도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의 망명허용은 중국정부를 격분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20세기 중반 수년간 중국-인도간의 관계가 꼬이고 악화되는 계기가 됐다.
한편 라사에서 일어난 일련의 티베트민중의 저항은 중국군의 가차 없는 진압을 당해 1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달라이 라마 측은 당시 이 봉기에서 8만 7,000여명이 살해되고, 2만 5,000여명이 투옥됐다고 주장한다. 중국군의 티베트 강점에서부터 사회주의정책을 시행하고 강제하는 과정에서 티베트 전체 인구의 7분의 1이상에 해당하는 1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중국당국의 압제를 피해 국외로 빠져나간 티베트인 망명자는 물경 1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티베트로부터 대량의 난민들이 중국정부의 학정과 압제를 피해 달라이 라마를 따라 인도로 도피하는 민족의 엑서더스가 시작됐다. 1962년까지 자신의 군주이자 법왕과 함께 하려는 난민들이 7만 명에 달했으며, 3년 뒤인 1965년에는 약 8만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에게 영적 스승이 없는 티베트에서의 삶은 육신만 연명할 뿐 정신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다람살라의 망명정부는 세계 10여국에 흩어져 있는 10여만 명과 내지 티베트인을 포함해 전체 600만 티베트민족의 운명을 걸머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달라이 라마는 망명 초기 한동안 강경노선을 걸었다. 그는 먼저 1959년 8월 30일 성명을 발표해 “모든 문명국가”들이 티베트의 자유와 독립을 지지해주기를 바라면서 국제사회에 정의를 호소했다. 이어서 9월 9일 그는 유엔총회에 서한을 보내 중국의 침략을 철회시켜주도록 유엔이 개입해주기를 요청했다. 이로부터 티베트망명정부의 명의로 총 다섯 차례나 유엔에 티베트문제를 의제로 채택해줄 것을 제의했다.
하지만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티베트문제가 의제로 채택되어 심의된 제14차 유엔총회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제14차 유엔총회 본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헌장 및 세계인권선언의 원칙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티베트인의 기본적인 인권과 그들의 문화적, 종교적 생활을 존중할 것을 호소한다”는 것이었다.
유엔총회의 이 결의에 대해 중국은 내정간섭이고 유엔헌장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티베트인의 인권 및 기본적인 자유의 존중에 대한 호소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또한 중국정부는 1959년 국제법률가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s)가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 ‘티베트 문제와 법의 지배’에 대해서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1952년 중국인을 추방한 티베트의 지위는 사실상 독립의 하나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중국에 대한 법적 종속의 어떠한 형식도 소멸되고 말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강한 법적 근거가 있다. 따라서 1911년~1912년에 발생한 사건은 티베트가 중국의 지배로부터 사실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독립한 완전한 주권국으로서 재출현을 획하는 것이라는 의견을 제출한다.”
여기서 “1911년~1912년에 발생한 사건”이란 1911년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중화민국이 들어섰을 때 티베트와 중국 사이 또는 달라이 라마와 중화민국 총통 사이에는 전통적인 ‘檀越관계’가 사라지고, 티베트가 독립국가임을 선포한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중국 측은 한 마디로 “티베트는 과거나 현재나 중국의 일부이고, 지금도 그렇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 자국의 입장만 변할 수 없는 ‘원칙’이라고 강조했을 뿐 티베트의 입장은 철저하게 무시했다.
달라이 라마는 국제사회에 자국에 대한 우호적인 중재를 요청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다람살라 망명정부의 체제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인도에 망명한 그 해에 먼저 구헌법을 대신할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고, 정치제도의 혁파와 망명정부 기관들의 민주화를 유도했다.
또한 이를 토대로 이듬해에는 자신을 수반으로 한 티베트망명정부의 내각을 구성했으며, 교육부, 위생부, 재정부, 안전부, 내무부, 정보 및 국제관계부, 종교 및 문화부 등 7개 부처를 설치했다. 그리고 각 부의 장관으로 종교인과 일반속인 책임자를 별도로 임명해오던 전통적인 양극체제를 폐지했다. 1959년 3월까지 영속된 구헌법은 제5세 달라이 라마가 만든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헌법에 기초하여 제정된 티베트헌법은 1963년 3월 10일 제4차 티베트 봉기기념일에 공포됐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국민의회를 설립하고, 의회를 통해 구체제 하에서 보장된 고위 승려들, 공직자들과 귀족들의 특권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던 그들의 모든 직위들을 무효화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의원들을 선출하기로 했다. 삼권분립, 의회구성에 이어 내각총리 선출, 선거의 1인 1표제 등도 시행했다. 또한 7세기부터 없어졌다고 하지만 공공연하게 살아 있던 사형제도를 폐지했고, 정교일치의 전통적인 봉건농노제도 없앴다.
반면, 다람살라가 개혁으로 거듭날 때 달라이 라마가 빠져 나가고 없는 티베트는 중국당국의 완전한 통제에 놓여 민주화는커녕 많은 이들이 이질적인 정치문화를 강요받았다. 3월 23일 포탈라궁 지붕에 내걸린 오성홍기가 험난한 길을 예고했다. 달라이 라마가 사라지고 난 뒤인 3월 20일에서 23일의 단 사흘 사이에 수도 라사에서만 살해된 티베트인이 1만 5,000명이었다고 전해진다.
티베트는 바로 “西藏자치구 준비위원회가 결성됐으며, ‘민주개혁’이라는 기치 아래 7월 1일부터 이른바 “3반 운동”과 감세, 이자삭감 운동(7월 22일)이 실시됐고, 8월부터는 인민폐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토지개혁, 토지의 국가귀속,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공유제, 인민공사 등의 사회주의정책 시행과 함께 중공 당제도와 인민대표제가 도입됐고, 1965년 9월 티베트는 행정상 정식으로 “西藏자치구”로 편입됐다.
티베트는 현재 중국정부의 행정체제 가운데 소수민족 거주지역의 1급 행정구인 5개 자치구에 속해 있다. 면적은 122만 8,400㎢으로 중국 전체의 8분의 1이고, 한반도 전체의 약 여섯 배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것도 자치구에 편입되면서 전통적인 면적보다 대폭 줄어든 것이다. 원래는 중국 전체의 약 5분의 1이나 되는 광대한 곳이었다.
중공은 티베트자치구를 만들면서 동부 캄지역의 동쪽은 스촨(四川)성의 일부로, 암도는 칭하이성의 일부로, 여타 지역은 중국의 깐수(甘肅)성과 윈난(雲南)성에 병합시켰다. 이로 인해 티베트의 판도는 원래 면적 보다 상당히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 티베트민족의 수도 50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급감했다.
1966년부터 대륙 천지를 뒤흔든 문화대혁명이 발발함에 따라 홍위병들이 티베트에까지 찾아들었다. 이들의 광폭성 때문에 문혁 10년 동안 티베트는 모든 면에서 황폐화 됐다. 특히 홍위병들의 눈에 봉건잔재의 대표로 여겨진 불교가 집중적으로 탄압됐다. 그 결과 6,000여 개의 사원이 파괴됐고 남은 것은 애오라지 45개뿐이었다. 승려는 59만 명 가운데 11만 명이 사망했고, 25만 명이 환속했다.
문혁이 끝나갈 즈음 마오쩌둥 사망에 이어 문혁의 주역이었던 4인방이 체포되고 나서야 홍위병들의 광란이 진정됐다. 티베트의 수난도 격감했으며, 중국의 티베트정책도 변화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국가권력의 중추부에 재등장한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 정책을 단행함에 따라 중국당국은 기존 티베트에 대한 수탈, 강경일변도 정책에서 한발 물러나 억압을 완화하고 달라이 라마를 인정하는 듯한 정책으로 선회했다. 1979년에 들어가자 중공은 문혁파가 1969년 2월 이래 시행해온 티베트 강압정책을 철회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그후 8월 중공지도부는 홍콩에 밀사를 보내 달라이 라마의 친형인 걀로 톤둡(1929~)과 접촉케 하고, 그에게 베이징(北京)을 방문해 덩샤오핑을 만날 것을 요청했다. 걀로 톤둡을 대표로 한 다람살라측의 대표단이 2주 동안 베이징을 방문해 중공 측 지도자들과 격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뿐이었고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같은 시기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도 “식민지 통치와 같은 티베트 정책을 없애라”고 지시했다. 1980년 후야오방은 향후 티베트문제의 해결방안과 달라이 라마를 대우하는 5개 방침을 발표했고, 그의 티베트 귀환을 요청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중국으로 돌아오면” 예전의 지위와 특권을 부여하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특권이 중요한 게 아니라 티베트문제의 근본해결책이 우선이라고 하면서 “티베트인의 권리와 미래”에 대해 보장하라고 응수했다. 덩샤오핑은 1982년 티베트가 독립을 외치지만 않는다면 기타 어떠한 것도 대화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말하자면 그는 티베트의 완전 독립을 제외한 기타 티베트와 관련한 문제는 모두 협상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덩샤오핑이 티베트정책을 바꾼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더 이상 티베트의 전통종교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 변화는 티베트종교가 새로이 되살아나는 배경이 됐다.
그러나 덩샤오핑과 중공 지도부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공이 티베트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면 티베트민족 전체가 종교를 믿게 되고, 이 신자들은 종교자도자에게 복종하게 된다. 여기서 종교란 불교를 가리키는 것은 물론이고, 달라이 라마는 바로 티베트종교의 지도자이고, 동시에 중공의 티베트 통치를 반대하는 정치지도자다. 덩샤오핑은 이 같은 연쇄적인 메카니즘으로 구조화된 티베트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람살라-베이징간의 해빙기운은 연극의 막간처럼 잠시 막이 올랐다가 1980년대 중후반 들어 이내 사라지기 시작했다. 티베트에 발생한 대규모 반중 독립시위와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에 따른 공산주의체제 위기가 닥침에 따라 덩샤오핑과 수구파 당 원로들은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크게 보아 두 가지 사건이 그 계기가 됐다. 하나는 1987년 9월 달라이 라마가 미국의회에서 티베트문제 해결방식을 언급한 ‘5개조의 평화안’을 제시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뒤이어 달포 뒤인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 행사장에서 티베트 승려들이 벌인 “독립요구 시위” 때문이었다.
‘5개조의 평화안’은 첫째, 티베트 전역의 평화와 비폭력 지역화, 둘째, 티베트의 인구분포를 변화시키는 한인이주정책의 포기, 셋째, 티베트인의 기본인권 및 민주적 자유 보장, 넷째, 티베트 환경보호 및 티베트 내의 모든 핵 활동 중지, 다섯째, 티베트의 미래 지위 및 중국-티베트인민 간의 관계를 위한 교섭 착수 등이다. 이에 대해 중국측은 분리를 선동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이 평화안을 일축했다.
달라이 라마의 미 의회연설과 그에 대한 중공지도부의 거부는 티베트 승려들의 자극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 행사장에서 독립을 요구한 시위를 일으켰던 승려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후 반중 독립시위는 티베트 현지로 파급돼 라사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 더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숨졌다. 그리고 이 태 뒤인 1989년 3월 5일~6일 라사에 또 다시 반정부소요가 발생했다.
그러자 중국정부는 다음 날 7일 즉각 티베트에 계엄령을 선포했다―티베트의 계엄령 상태는 11년간 지속되다가 2000년에 들어와서야 해제됐다. 사흘간 계속된 이 시위는 1959년 3월 이래 가장 격렬한 것이었다. 당시 47세의 후진타오(胡錦濤)가 티베트자치구 당 서기로 파견돼 진압을 총지휘한 것이 이 때였다. 그는 철모를 쓰고 직접 계엄군을 진두지휘했다. 후진타오는 티베트의 반중시위를 제압한 것을 계기로 중국지도부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게 됐고, 그것은 그 후 그가 국가지도자급으로 발돋음 하게 된 정치적 자산이 됐다.
폭력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달라이 라마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것은 불교의 業說에 기반을 둔 비폭력주의(ahimsa)로 내리친 죽비이자 중국과 티베트 독립과 격파를 동시에 부정한 ‘兩個錯誤論’이기도 했다. 저항에 대한 적대적 진압과정에서 벌어진 폭력과 살생을 두고 그는 “이 모든 비극적 사태들은 자신이 과거에 행한 카르마(Karma=業)가 본질적 원인”이라고 하면서 “중국군은 외면적인 원인이며, 더 근원적인 원인은 티베트의 악업이다”라고 설했다.
폭력시위를 주도한 젊은 층과 과격파를 향해서도 “폭력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1,000명이 목숨을 희생한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사태가 “통제 불능상태가 되면 내가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배수진까지 치면서 폭력을 자제해주기를 호소했고, 티베트인은 중국정부에 대해 ‘비폭력’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평화적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과 불살생 및 비폭력주의는 그의 종교적 신념이자 정치사상과 노선을 관통하는 붉은 실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이미 1981년 10월 29일『월스트리트 저널』에 불교와 공산주의 간에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가 공산중국과의 대화가 가능하고, 그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이유는 중공의 정치이념인 공산주의도 불교처럼 창조주의 개념을 믿지 않고 인간의 능력을 믿는다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면에서 불교와 공산주의는 공존할 수 있다”고 했다. 보시와 자비를 중요시 하는 불교지도자인 그가 적대적 증오에 바탕을 둔 계급투쟁을 추구하는 공산주의를 인정한 것은 티베트민족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동기야 어쨌든 국제사회는 그의 비폭력주의에 호응했다. 1989년 10월 달라이 라마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도 이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노벨상 수상은 120만 명의 티베트동포들이 자신들의 전통, 자존, 종교적 신념과 독립 등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 희생한 대가였다.
‘5개조의 평화안’에 이어 약 1년 뒤 달라이 라마는 ‘5개조의 평화안’보다 더 중국지도부를 자극하게 됐다. 즉 1988년 6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그가 티베트의 미래에 관한 견해를 발표하면서 중국 측에게 요구한 제안을 말한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티베트 전 지역을 전 국민이 동의하는 법률을 통해 중국정부와 연계된 자치적인 민주실체로 만들고, 티베트의 외교는 중국정부가 책임을 지되, 종교, 통상 등의 비정치적 대외관계에 대해서는 티베트정부가 자치적으로 설립한 外事局을 통해 계속 유지,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또한 티베트지역 차원의 평화회의를 개최해 티베트를 비군사화, 중립화 한 후 단계적으로 진실로 평화가 보장되는 성지가 되도록 하고, 티베트가 민주제정부를 가지며, 티베트와 티베트인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하도록 중국정부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티베트의 독립이든 자치든 티베트의 미래 및 통치형태에 대한 최후의 결정은 티베트인 전체가 참여하는 국민투표로 결정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에 대해 중국지도부는 달라이 라마가 주권과 독립을 외국에 팔아넘기려는 술책이라고 비난하면서 그것을 티베트 독립선언으로 해석했다. 그들에게 “민주제정부” 수립을 운운한 것은 자신들이 기피하는 “1국 2체제”를 도입하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었으며, 이에 토대를 둔 “티베트인에 의한 티베트 자치”방안도 결국 독립의 전단계로 생각된 것이다.
“티베트 민주제 정부” 수립과 “티베트인에 의한 티베트 자치”가 제기된 후로 베이징과 다람살라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됐다. 이로부터 2002년 9월 달라이 라마의 특사단이 베이징을 방문할 때까지 15년 동안 일체 주고받는 대화 없이 꽁꽁 얼어붙었다. 이 사이 베이징과 다람살라는 각기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달라이 라마 측은 그간 주장해왔던 티베트의 외교적, 군사적 독립을 요구한 ‘스트라스부르 방안’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방안을 제기해 투표로 기존 노선을 재신임 받았다. 그리고 자치권의 확실한 보장을 요구하는 노선으로 선회했다. 여기엔 자신들이 내심 바라마지 않는 완전한 독립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이 깔려 있었으며, 내부 독립 강경파와의 노선투쟁의 성격도 없지 않았다.
티베트망명정부 내에는 젊은 계층을 중심으로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강경파가 존재했다. 그들은 주로 달라이 라마의 망명길에 데려져 나온 뒤 유럽의 스위스, 영국, 독일 등지로 보내져 그 곳에서 유학한 엘리트들이었다. 그들은 서방세계를 잘 알고 있고, 민주주의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활동능력 면에서도 티베트망명자들 내의 원로파를 능가하고 있다. 그 대표적 단체가 ‘티베트청년회의’다.
‘티베트청년회의’는 달라이 라마의 입회하에 발족됐는데, 티베트망명자 단체 가운데 세력이 가장 큰 소장파 조직이다. 미국 뉴욕 등 세계 각지에 15개의 지부가 있고, 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그 핵심 리더들 대부분은 서방의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티베트 청년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주가 주창하는 비폭력 정책과 달라이 라마의 접근방식을 대단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달라이 라마의 임시적 권위에 대해서 문제 삼는 것은 아니었다.
1995년 달라이 라마는 이들과 전개된 대중국 노선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과정에서 네 가지 노선 가운데 한 가지를 전체 티베트인들이 국민투표로 선택하자는 방안을 제기했다. 네 가지 노선은 티베트 독립노선, 중도노선, 티베트 자치노선과 정의운동노선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티베트망명정부가 취할 수 있는 노선은 현실적으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티베트 독립노선은 무장투쟁을 전제하고, 그것으로 독립이 실현될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나 조건상 쉽지 않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독립노선은 아예 불가하다. 중도노선도 민주제정부를 설립하고, 티베트의 비군사적 중립화를 지향하면서 티베트문제는 티베트인이 결정하겠다고 하는 이상 베이징정부에게 받아들여질리 없는 것이다.
동시에 중도노선은 중국이라는 상대가 독립불가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 선택지가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한 단계적, 점진적 대응임에 틀림없지만 티베트 독립노선을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부정된다. 자치노선은 티베트인의 자치권만 요구하고 여타 다른 요구는 당분간 제기하지 말자는 주장이기 때문에 중도노선 보다 일보 물러선 것이다.
당장 현실적으로 티베트의 운명은 티베트인 스스로 국민투표로 결정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다람살라 등 해외의 티베트인들뿐만 아니라 중국 내 자치구의 티베트인들까지를 포함한 전체 티베트인이 참여해야 하는데 중국 내 티베트자치구에 거주하는 티베트인들이 중공의 허락 없이 투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실현되기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중도노선에 대해 재신임을 받으면서 전술을 변경했다. 중국 한인 가운데 티베트독립을 지지하는 반체제인사들과 연대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성취해야 할 첫 걸음은 우선 티베트자치구로 귀환해 이 지역을 티베트인이 자치하는 명실상부한 자치를 실현시키는 일이지만 중국정부가 더 이상의 양보를 하지 않고 티베트 독립에 관한 한 중국 한족들의 여론도 긍정적이지 않고 가까운 시일 내 실현되기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그들의 지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한족들이 전체 인구의 93% 이상 차지하고 있고 정치, 사회적으로도 민주화가 성숙되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극소수 반체제 민주인사들만이 티베트의 독립이나 티베트인에 의한 자치에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반체제 민주인사라고 해서 전부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중공 정권을 극히 극단적으로 반대하지만 티베트 문제에 관해서는 중공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
달라이 라마의 이 전술은 마오쩌둥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13억 인구의 중국인들 중 한인이 최소 90%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중국 전체를 상대해선 목적달성은 요원하고 불가항력이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이 1950년대 티베트사회를 분열시켜 장악했듯이 달라이 라마도 중국 내 자신의 동조세력을 규합하고자 한 것이다.
현재 달라이 라마의 노선을 지지하고 그 정부에 협력하는 한인세력은 주로 1989년의 ‘6.4’천안문사태에 참여한 반체제민주인사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6.4’천안문사태에 참여했던 자들로서 중공의 체포를 피해 해외로 망명하여 반중공조직을 결성했다. 대표적인 조직체로는 옌자치(嚴家琪), 완룬난(萬潤南), 린시링(林希翎) 등이 주축이 돼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한 ‘중국민주연맹’과 미국에 유학한 중국인 학생들이 주축이 된 ‘중국민주단결연맹’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저명한 천체물리학자인 팡리즈(方勵之), 웨이징셩 등의 유명인사들도 달라이 라마와의 반중공‘동맹’에 참여하고 있다. 그들이 다람살라의 티베트망명정부와 연합하는 까닭은 ‘6.4’천안문사태 이후 중국 국내에 대두된 ‘중국연방론’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티베트의 운명은 티베트인의 선택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또는 연방형식으로 티베트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선은 달라이 라마의 노선과도 통한다. 이 연방형식은 아이러니 하지만 일정 부분 과거 존재했던 ‘檀越관계’의 복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쪽에서는 티베트에 대한 개발과 통일전선에 착수했다. 이 전환을 견인한 것은 티베트민중의 반중시위 진압에서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일약 중공 내에 ‘티베트문제 전문가’로 부상한 후진타오가 제시한 해법이었다. 1989년 12월 후진타오는 티베트 관련 보고서에서 티베트인의 반중시위를 “조국을 분열시키고, 공산당을 반대하고, 사회주의제도를 부정하는 심각한 투쟁”으로 규정하면서 향후 중국정부의 티베트정책에 시금석이 된 ‘통일전선’을 주장했다. “한 손으로 반분열 투쟁을 장악하고, 다른 한 손으로 건설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진타오의 해법을 받아들여 중국당국이 펼친 티베트 정책의 수단은 ‘당근과 채찍’ 그리고 대외 홍보강화로 요약된다. 물론 ‘당근과 채찍’은 티베트의 반중시위를 무마하는 전술이었다.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지만 때로 경제지원으로 티베트인들을 유혹, 회유하는 방식으로 다람살라 측을 분열시키려고 했다. 즉 중국정부는 해외에 망명한 티베트인의 귀국을 권유하면서 독립운동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귀국만 하면 정착금과 직업을 제공하겠다고 그들을 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외 티베트인들의 호응은 그다지 높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은 중국정부에 티베트독립운동 세력의 동맹투쟁으로 답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티베트망명자 대표, 신장 아이사그룹의 대표와 해외의 ‘내몽골해방진선’대표들이 결성한 ‘3자 동맹회’가 반중공 투쟁을 전개해오고 있는 것이다.
당근으로는 티베트의 경제 및 지역개발, 당시 문맹률이 전국 최고였던 티베트족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채찍으로는 불교권의 정치개입을 차단하고, 현지인의 시위 통제 및 제압, 이동과 정보에 대한 제한, 표현의 자유, 평화적 시위권리 및 외신의 접근 등에 대해 제한하고 인권탄압이 가해졌다.
먼저 개발측면에서 중국정부는 117개의 티베트 개발프로젝트를 수립하고, 1994년부터 2004년까지 11년간 800억 위안을 투입해 도로, 교량, 비행장, 교통 통신망 등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 교육설비 등을 갖추거나 개선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누구를 위한 지원이고, 누구를 위한 개발이냐는 것이었다. 사실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면 당시 중국내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 가운데 하나였던 티베트자치구는 누가 정권을 담당하든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야 할 필요성은 존재했다.
달라이 라마가 크게 상심하고 있듯이 ‘서부 대개발’류의 각종 개발로 인해 무구한 천혜의 티베트지역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개발논리와 명분으로 티베트에 한족을 대거 이주시킨 결과 스촨성, 허난(河南)성 등지로부터 한족들이 대거 이주해오는 바람에 티베트인들의 인구비율이 크게 감소했다.
원래 티베트자치구 내에 거주하고 있는 티베트족의 인구비중은 93.94%였다. 이것은 중공당국이 실시한, 가구당 두 명으로 제한한 산아정책으로 원래 정체돼오던 상대적 인구감소를 더욱 가중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티베트인들의 한화가 급속하게 진행됨으로써 티베트의 전통과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티베트인이지만 티베트어를 사용하지 않은 티베트인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어 더욱 그렇다.
또한 현지 티베트인들은 경제적으로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라사에는 한족이 경영하는 음식점, 상점이 즐비하고 그들은 티베트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빈부격차, 민족갈등과 기본권제한 문제 등의 현실을 무시하고 중공은 과거의 청조와 달리 근대중국이 주조해낸 ‘5족協和’의 ‘중화민족’이라는 강력한 민족주의, 국가주의로 티베트를 중국에 밀착시킨다. 물론 그것은 한족 위주의 통합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티베트사회의 일부에 중국정부의 경제적 지원에 따른 ‘떡 고물’을 환영하는 분위기도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자신의 빈부를 자신의 숙업으로 인식하고 살아왔던 전통적인 가치관이 현대화의 물결로 흔들리고 있다는 증표다. 이로 인해 티베트인들 중 일부는 중국정부의 원조를 받기 위해 “돈이 필요하면 시위하면 된다”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다.
중국정부는 서부대개발로 티베트를 경제적,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면 티베트인들이 중국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될지는 미지수다.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이중적이고,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통일전선의 방법 가운데 하나인 분열전술의 한 일환으로 베이징지도부는 달라이 라마의 후계자 선출을 무력화할 목적으로 18세기 청조가 시행한 ‘금병추첨제’를 부활시켰다. ‘금병추첨제’란 한마디로 달라이 라마의 환생, 즉 그 계승자를 뽑는 제도다. 금으로 만든 병에다 전세영동 후보자들의 이름을 적은 상아막대기를 넣어 해당되는 상아막대기를 뽑아야만 환생자로 인정하게 돼 있다.
‘금병추첨제’는 티베트불교의 고승들이 전세영동을 신탁하고 이에 대한 심사, 승인하는 티베트전통의 달라이 라마 계승방법을 무시하는 셈이 된다. 이 때문에 티베트 측은 중국정부가 달라이 라마의 선발권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간주했고, 이 제도를 거부해오던 중이었다.
1995년 11월 29일, 중국당국은 ‘금병추첨제’로 겐둔 최키 니마(1989~?)와 같은 마을 출신이자 같은 나이인 노르부(중국명은 堅贊諾布)라는 티베트 아동을 제11대 판첸 라마로 골랐다. 달라이 라마가 전세영동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전통적인 라마선출방법으로 선정한 겐둔 최키 니마를 무효화하기 위해서였다. 그 전에 1995년 5월 15일, 달라이 라마는 낙추 지방 라리 출생의 당시 6세였던 겐둔 최키 니마를 1989년 1월 28일 쉬가체에서 사망한 제10세 판첸 라마 최키 걀첸(1938~1989)의 환생으로 인정했다.
겐둔 최키 니마는 제11세 판첸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된 뒤 중국측에 납치된 후로 지금까지 행방과 소식을 알 수 없는 상태다. 그가 살아 있다면 올해 꼭 20세가 된다. 베이징 지도부는 달라이 라마의 판첸 라마 선출을 “불법”으로 규탄하고, 그 몇 주 후 제11대 판첸 라마를 지명한 것이다. 최종적인 목적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겐둔 최키 니마를 대신해 노르부가 달라이 라마 후계자를 지명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다. 일설에 따르면 노르부는 티베트지역 중공 당 간부의 아들이라고 한다.
전술한 바 있는 베이징-다람살라 간의 끊어진 대화는 2002년 9월에 가서 재개됐다. 즉 달라이 라마는 베이징에 보낸 특별사절단 편으로 중국정부에게 과거 보다 완화된 협상조건을 전달했다. 즉 “중국이 외교와 국방을 맡고, 티베트는 내치와 문화, 종교, 경제를 책임”지고, “완전한 독립이나 분리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티베트인들이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보존할 수 있도록 진정한 자치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그는 “언제든지 중국지도자들,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만날 용의가 있다”며 베이징-다람살라 간의 대화 재개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 역시 중국정부의 변통 없는 원칙에 막혀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중국이 협상에 응하지 않고 티베트의 자치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네 가지로 짚어볼 수 있다.
첫째, 해당 소수민족에게 자치를 맡겨선 안 되고, 어디까지나 중앙정부가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大中華主義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중국인의 전통적 관념 가운데 하나는 가정의 식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국가의 판도는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것이다. 역사상 대일통사상이 자주 출현하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대국주의가 드러나는 이유다.
원래의 티베트는 중국 전역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광활한 지역이었던 만큼 중국이 생각하는 대국을 형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다. 티베트가 중화제국의 판도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그 만큼의 국력약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상상하기 싫은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소수민족에 대한 구심력 이완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티베트가 독립하도록 방치하면 곧 북쪽 신장자치구의 위구르족들과 내몽골자치구의 몽골족의 분리운동이 드세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티베트독립운동이 어느 정도 상승세를 타게 되면 이 지역은 해외 티베트망명자 대표, 신장 위구르 아이사 조직의 대표와 해외의 ‘내몽골 해방진선’ 대표들의 중국내 자민족의 독립운동 지원이 더욱 활성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 단체 대표들은 1993년 1월 독일에서 연석회의를 갖고 세 조직이 연합한 ‘3자 동맹회’를 결성한 뒤 ‘뮨헨 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들은 매년 회의를 소집하고, 일체화를 지향하면서 중국에 대한 투쟁과 중국통치로부터의 해방운동을 전개해오고 있다. 중국이 티베트자치를 일정 수준 이상 허락하지 않고 있는 배경이다.
셋째, 티베트의 각종 부존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티베트는 우라늄을 비롯해 보크사이트, 구리, 리튬, 금광, 라듐, 철광석, 철, 석유, 석탄, 연, 망간석탄, 크롬, 다이아몬드, 마그네슘 등 70여종의 다양한 광물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수자원도 보유량이 2억㎾로 중국 전체의 30%를 차지하는 보고다. 특히 철광석은 삽으로 퍼낼 정도라고 한다. 또한 삼림 축적량도 14억㎥으로 중국 내 5위다. 티베트 내에는 지금도 석유유전과 천연가스 등이 새롭게 발굴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넷째, 이미 확보한 안보, 군사 전략적 요충지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티베트를 중국 남서부 방어에 매우 중요한 전략지역으로 여겼다. 티베트자치구에는 6개의 軍分區가 있고, 50만 명의 군병력이 주둔하고 있다. 그 중 2개의 독립육군사단의 6개의 변방연대, 5개의 독립변방대대, 3개의 포병연대가 있고, 중국공군의 10개 군용비행장이 있다.
또 ‘東風四’호, ‘東風五’호 등 전략핵탄두가 배치되어 있다. 중국 전체의 핵무기의 3분의 1이 티베트 경내에 저장되어 있으며, 화학무기를 사용한 군사연습도 빈번하게 실시하고 있다. 스촨 몐양(綿陽)시는 중국이 핵무기를 최초로 개발한 곳이고, 현재 핵무기 설계본부가 소재해 있다. 광위앤(廣元)시에 핵 생산 원료인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중국의 강경하고 완강한 태도는 다람살라의 티베트망명정부 내에 강경노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이 주장을 펴는 과격파는 달라이 라마가 요구하고 있는 고도의 자치가 아니라 완전한 독립을 원하고 있다. 그들은 비폭력중도노선과 대화를 통한 해결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티베트민족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논리적으로 보면 가까운 장래에 국한할 경우 네 가지 구도가 있을 수 있다. 첫째, 현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둘째, 티베트민족의 한화가 가속화되는 것이다. 셋째, 중국이 달라이 라마의 자치요구를 들어주어 그로 하여금 귀환토록 하여 티베트인 자체의 자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넷째는 티베트 독립파의 희망대로 티베트자치구가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다.
위 네 가지 가능성 중 첫째 가능성이 가장 현실성이 높다. 다만 현 상황의 지속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곧 두 번째 가능성인 티베트민족의 한화 가속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네 번째의 독립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중국정부가 독립불가의 원칙 고수는 물론, 달라이 라마가 요구하는 자치방식, 즉 티베트인이 자체적으로 통치하는 자치는 허락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허여되면 그 다음으로 ‘스트라스부르’방안 정도의 자치로 갈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상황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면 끝이 날 공산이 크다. 그 때까지 중국은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를 기피할 것이다. 이러한 동향은 당장 최근 중국지도부의 언동을 보면 알 수 있다. ‘2008년 3월 시위’가 진압되고 나서 중국정부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도 즉각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달라이 라마를 지목하고 그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극소수 세력이 잔인한 방법으로 무고한 시민을 때려죽이고 차량과 공공시설, 상점과 학교를 파괴했다”고 비난했다. 티베트자치구 중공 당 서기 장칭리(張慶黎)는 “달라이 라마는 승복으로 갈아입은 늑대”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고, 중국 외교부 친강(秦剛)대변인은 “종교의 간판 아래 국제사회에서 조국 분열을 꾀하고 민족단결을 파괴해온 정치 망명자”로 규정했다.
이들의 발언 속에는 달라이 라마를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재의 후진타오정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각종 수단을 동원해 티베트와 중국이 하나이며, 티베트가 중국영토라고 국제사회에 널리 홍보해오고 있다. 라사 고립정책인 것이다. 작년 여름 베이징올림픽 성화봉송행사를 라사에서 무장경찰을 동원하면서까지 강행한 이유도 그 일환이다. 그는 특히 ‘문화공정’과 ‘조화사회론’을 표방하면서 ‘漢藏 일체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둘째, ‘자치구’라고 하지만 실제는 티베트가 티베트인이 아니라 중국당국의 직접 통치하에 놓여 있고, 한인의 대량 이주로 인한 티베트인의 한화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칭짱(靑藏)절도가 개통됨으로써 경제, 군사력의 티베트 투사 거리가 48시간으로 단축돼 티베트에 대한 베이징정부의 장악력이 한층 증강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은 중공 지구당 조직과 한인 관료들을 티베트에 투입하여 티베트를 직접 통치하면서 부족한 부분은 지난 40여 년간 중공이 길러낸 3만 8,000명의 티베트인 행정 간부들과 기술간부 1만 8,000여명을 티베트 통치에 우군으로 활용한다. 또한 중국당국은 일명 ‘애국훈련’이라 불려지는 ‘티베트인의 한화’인 민족동화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것은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 라마에 대한 비난을 강요하거나, 혹은 사찰에서 승려들을 모아놓고 돌아가며 달라이 라마의 초상을 차례로 밝고 지나가게 하고 비난하도록 강요하는 비열하고 악명 높은 방식이다. 티베트인이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가진 사실이 발각되면 즉각 체포된다.
2006년 7월 10일 개통된 칭하이성 거얼무(格爾木)-라사 간 1,142㎞의 칭짱철도는 수도 베이징 서역에서 출발하면 라사까지 총 4,046㎞이고, 47시간 28분 내로 주파할 수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상하이(上海), 청두(成都) 등의 주요 거점 도시로부터도 모두 이틀이면 라사에 도달할 수 있다. 중국은 이 철도로 연간 250만 명의 인원과 대단위 물자를 실어 나른다. 게다가 티베트에 대한 중국군의 기동력과 무기, 장비 등의 후방공급능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환언하면, 이제 칭짱철도로 중국은 과거 천혜의 요지로서 문명세계와 아득히 격절돼 있던 티베트를 불과 이틀 생활권에 넣어두게 됐고, 어떤 목적이든 필요할 경우 언제든지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어 티베트에 대한 확고한 장악에 거보를 디딘 셈이다. 2008년 6월 하순 티베트자치구 중공 당서기 장칭리가 “베이징과 티베트를 하나로 연결”하면 “오성홍기는 티베트 하늘 아래에 영원히 휘날릴 것”이라고 하면서 티베트 장악에 자신감을 보인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반면,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철도는 티베트인을 한화시키려는 도구로 보이게 마련이고, 그 만큼 티베트의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이 철도를 통해 한족이민을 장려하여 티베트 내 한족비율을 높이고, 지하자원을 개발할 뿐만 아니라 군사 기동력까지 제고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고대 당나라가 티베트에 불교를 전해주었다면 지금은 칭짱철도를 통해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이식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중국정부가 달라이 라마의 ‘귀국’을 바라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기존 대국주의에 바탕을 둔 티베트에 대한 직접 통제정책을 철회할 가능성이 전무한 상태에서는 백기투항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가 이에 응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반면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제의에 응하지 않는 상태에서 중국이 굳이 달라이 라마의 요구에 응해줄 필요는 없다. 이와 관련해 중국은 달라이 라마의 후계자문제를 가지고 티베트 문제를 해결하려는 복안이 엿보인다.
현재 73세의 고령인 달라이 라마가 서거할 때까지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여긴 듯하다. 즉 달라이 라마가 사망할 때까지 ‘시간 끌기’전략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최종적으로 판정하는 판첸라마가 자신들의 수중에 있어 티베트망명정부가 제15대 달라이 라마를 선출한다고 해도 베이징의 판첸라마가 그의 환생을 인정하지 않으면 무위로 끌날 수 있고, 결국 달라이 라마가 없는 티베트는 구심점을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이러한 의도를 헤아린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이 원한다면 나는 다시 환생해 (제15세) 달라이 라마가 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중국측의 저의에 쐐기를 박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달라이 라마 제도 역시) 왔다가 갈 것이고 현실상황에 따라 별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2007년 11월 일본 산케이 신문과 인터뷰에서 자신의 후계자인 제15대 달라이 라마를 고승들의 투표로 선출하거나 자신이 직접 지명하는 방식까지 거론한 바 있고, 또 “차기 달라이 라마는 중국 밖에서 환생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온 배경이 여기에 있다.
넷째,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노선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무력을 보유하지 않고 있는 다람살라측이 13억 인구의 전 중국을 상대로 하기엔 전력이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유일하게 기대를 걸 수 있는 희망이 세계여론을 움직여 중공을 압박하는 것이지만 이미 세계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고려해 중국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티베트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있다. 2008년 3월, 49년 전 중국의 티베트강점에 맞서 항거한 기념일에 맞춰 티베트민중이 벌인 티베트인들의 격렬한 반중 시위는 수일간 계속됐지만 종국에는 탱크와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중국군에게 무참히 진압되고 말았다.
티베트민중의 반중시위는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무장봉기 제50주년에 행한 연설에 촉발돼 올해에도 발생했지만 예상대로 순식간에 진압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민간여론 차원에서 세계 각국에서 보도, 거론, 항의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 사태에 관심을 기울여 중국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국가는 없었다.
달라이 라마의 연설이 기폭제가 돼 발생한 티베트 승려, 학생 등의 티베트독립 시위는 미국, 호주, 뉴델리, 서울 등지에서도 벌어졌지만 각국의 정부를 움직이기는 역부족이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입김에 티베트문제를 거론하려 들지 않고 있다. 1950~60년대 한 동안 미국은 티베트망명정부를 도와 그들의 반중공 저항운동을 부추기고, 티베트 침투작전을 지원한 적도 있었건만 현재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더 이상 티베트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눈치를 보는 이러한 의도된 외면과 무관심은 앞으로도 심화되면 됐지 덜 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 구도가 깨지지 않는 한 티베트문제에 대한 열쇠는 중국이 쥐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2008년 3월과 2009년 3월의 시위는 티베트의 운명을 가름한 분수령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이 반영하듯 현재 달라이 라마는 딜레마상황에 처해 있다. 비폭력 평화주의 원칙으로 중국정부와 대화로서 의미 있는 결실을 이끌어 내야 할 책임이 있지만 중국당국이 이에 응해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고, 다른 한편으로 급진적 민족주의, 무장독립투쟁노선을 걷는 해외 티베트망명자들의 의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견지되어온 달라이 라마의 중도노선이 계속 유지될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여전히 중도노선을 걷고 있고, 그것은 2009년 5월 현재도 변함없이 티베트망명정부의 공식 노선이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가 세상을 뜨고 난 뒤에도 이 노선이 그대로 유지가 될 지는 불투명하다. 티베트망명정부 내 무장독립노선을 추구하는 강경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향후 십수 년 내에 베이징과 다람살라에는 다시 한 번 지축을 흔들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견된다. 모든 것은 달라이 라마의 사망여부에 달려 있다. 그가 사망하면 티베트망명정부는 달라이 라마에게 집중돼 있는 신성성을 잃게 되고, 그것은 베이징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이로 인해 다람살라의 망명정부는 분열에 휩싸이거나 최소한 동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
달라이 라마는 한 외신의 질의에 답한 인터뷰에서 “티베트가 해방되면 헌법을 새로 제정해 모든 권력을 이양하고 나는 은퇴해 평범한 승려로 살겠다”고 한 바 있다. 살아생전에 그의 꿈이 실현될지 아니면 그가 언급한 대로 다시 제15세 달라이 라마로 환생해서 비폭력 투쟁을 계속할지는 전적으로 중국과 세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서거하기 전에 달라이 라마는 친히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참관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뜻을 세웠었지만 번번이 중국의 압력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한국방문은 가능할까? 죽기 전에 자신과 모든 티베트인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티베트인에 의한 자치와 조국의 독립을 목도하기란 요원한 일인가? 아, “랑젠”(티베트어로 자유와 독립을 뜻하는 말)이여!
위 글은『현상과 본질』, 2009년 여름호(2009년 6월 1일)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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