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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와 ‘6․4’, 그리고 중국의 미래

雲靜, 仰天 2012. 3. 30. 22:14

‘5.4’와 ‘6.4’ 그리고 중국의 미래 

 

서상문(중앙대 강사)

 

5월 4일, ‘5.4운동’이 발생한 지 90년이 되는 날이다. 달포 뒤면 ‘6.4천안문 사건’발발 20주년이다. ‘5.4’가 현대 중국의 起線으로서 새출발, 희망, 서광을 의미했다면 ‘6.4’는 역사의 퇴행, 절망, 암흑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두 사건은 시공과 지향을 달리한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상 성찰과 개혁을 요구한 점에서 같은 몸, 다른 쓰임새다. 두 사건을 관통하는 것은 구국을 위한 자기성찰과 개혁정신이다. 그것은 막힌 곳을 뚫고자 하는 집단욕구의 분출로서 오늘날 중국에게 절실한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5.4운동의 구국 및 개혁정신으로 태어난 중국공산당과 신중국은 스스로 5.4운동의 아들이요, 體와 用의 관계임을 얘기하지만 해마다 ‘5.4운동’만 선양, 부각시키면서 ‘6.4’에 대해서는 경계, 터부시한다. ‘5.4’에 대해서는 4인방의 폭압에 저항한 문혁시기와 같이 꺼져가는 희망을 지피는 부싯돌로 기념하면서 그 역사적 의의를 수 없이 찬양, 해석해왔다. 하지만 세계를 해석만 할 게 아니라 실천하라고 마르크스가 갈파했듯이 ‘5.4’의 정신은 해석이 아니고 실천이다.

 

 

1919년 5.4운동 시기 상해 지역의 노동자총연합회(약칭 總工會)가 스트라이커를 벌이고 있는 광경
5.4운동은 이른바 "신문화운동"을 불러있으켰다. 북경과 상해가 중심이 됐다. 이 운동의 주축인 청년 학생들

  

무얼 실천하느냐고? 시대마다 없어져야 할 게 있고, 있어야 할 게 있듯이 버릴 것과 취할 것에 대한 결단의 실천이다. ‘5.4운동’의 정신을 “掃蕩廢物, 催發新生”으로 파악한 魯迅이 그랬던 것처럼 버릴 것은 단순히 ‘舊物’이 아니라 ‘廢物’이었고, 취할 것은 ‘救亡’과 ‘啓蒙’이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압박에서 벗어나고, 부패와 무능의 상징인 군벌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구태를 반성하고 정신을 개혁하자는 ‘신문화운동’이었다.

  

당시 중국사회에 없어져야 할 폐물이 禮敎지상주의의 유교와 전근대성이었다면, 21세기의 오늘날 제거해야 할 폐물은 안팎의 막힌 곳을 뚫는 일이다.

 

밖으로 대국의식에 충만한 협애한 중국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는 우려를 불식해야 한다. ‘5.4’시에 표출된 자신들 선배들의 분노가 제국주의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과 집단적 패배의식의 다른 표현이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신중화주의의 부활이라는 중국적 가치 대신 인권 및 기본권의 존중, 자원사용의 절제, 환경보존 등 인류보편의 가치가 중국사회에 꽈리를 틀어야 한다.

 

안으로는 과도한 국가주의를 지양하고, 사회계층간의 거리단축에 힘쓸 일이다. 심각한 빈부격차, 만연한 부패, 기본권의 제한 등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에 대한 미해소와 체증으로 발생한 것이 ‘6.4천안문 사건’이 아니던가?

  

중국은 또 한 차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하지만, 세계경제 회복을 견인할 희망으로서 그 역할에 인색해선 안 될 때다. 중국인의 의식주가 해결되면 그 자체가 세계에 대한 공헌이라고 인식한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중국이 세계경제를 걱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6.4’의 앙금은 털고 가야 한다. 집단기억 속의 상흔이 치유되도록 중공이 능동적으로 사건의 진상 공개, 사망자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를 취하고, 이를 통해 증오와 반목을 21세기형 통합의 장에다 용해시킬 필요가 있다.

 

중공 수뇌부로선 시기가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다. 또 긁어 부스럼 만들 게 있느냐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발전의 동력을 가로막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소지가 있다. 참회와 국민통합의 측면에서 족쇄풀기가 선결되고 나서 중국이라는 역사발전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구해져야 한다.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通則不痛, 不通則痛).” 중국이 통하면 세계가 아프지 않고, 중국이 통하지 않으면 한국도 아플 수 있다. 우리에게도 중국은 희망이다.

 

위 글은 2009년 5월 4일자『경북일보』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