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불교의 역사 : 저잣거리를 밝히는 청정 승가의 빛
徐相文(臺灣國立政治大學 역사연구소 박사과정 수료, 현 사단법인 한국태교연구소 이사)
1. 불교의 대만이입
대만불교의 역사는 길게 잡아도 400년이 되지 않는다. 여타 중국대륙, 동남아국가 혹은 한국과 일본에 견준다면 시간의 축심이 깊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천한 역사의 대만불교지만 막상 그 역사성과 특징을 한정된 짧은 지면으로 끌어내려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대만불교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먼저 전반적인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불교의 대만이입과 그 변천과정을 한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역사적인 조감도를 제시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대만불교를 역사적으로 조감하는데는 미시적인 분류와 거시적인 분류 두 가지 획기방법이 있을 수 있다. 전자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대만침공기―대만 남부에 상륙한 1642년부터 시작, 정성공(鄭成功) 시기, 만청(滿淸) 시기, 일제 시기, 중화민국 시기의 다섯 단계로 세분할 수 있겠지만, 후자는 대만불교를 크게 일제 시기와 중화민국의 대만주재 두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이다. 전자의 후반 두 시기는 후자와 중첩된다. 따라서 먼저 전자의 세 시기의 특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난 후 후자를 비중 있게 살펴보는 순서를 취하겠다.
네덜란드의 대만침공기와 정성공 시기는 대만불교의 초기 이입기에 해당하는데, 시기적으로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인 16세기말에서 17세기 중반시기였다. 이 시기 대만불교에 관해서는 그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사적과 구체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료들이 충분하게 발견되지 않고 있는 관계로 정확한 소개는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렇다고 당시 불교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초기 대륙불교의 대만이입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몇 가지 사료상의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대만의 불교전입은 명청의 왕조교체기에 이루어졌다. 1644년을 전후하여 대륙으로부터 대략 2만 5,000호 정도의 유이민이 대만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대개가 정치적으로 명조를 무너뜨린 만주족(滿洲族)의 청조에 반대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자신의 텃밭을 버리고 대만해협을 건넌 사람들인데 주로 복건(福建), 광동(廣東)성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은 대만으로 건너올 때 대대로 집안에서 모시던 소형 신상(神象)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는 불상도 포함되었다. 유이민은 광동성보다도 대만의 대안에 위치한 복건성 출신이 많았다. 오늘날 대만불교에서 관음신앙이 유행하고 있는 연원도 알고 보면 이 시기 복건성에서 건너온 다수의 유이민자들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성공 시기는 이 시기의 정치, 경제가 대만남부, 즉 현재의 대남시(臺南市)를 중심으로 발흥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교 역시 남부일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죽계사(竹溪寺)를 비롯하여 미타사(彌陀寺), 용호암(龍湖岩) 등이 오늘날의 대남시와 대남현(臺南縣)일대에 건립된 것이다. 중국전통의 불교사원과 승려가 최초로 건립되고 출현한 곳은 1662년 대남의 소서천사(小西天寺)라고 하나 불교는 이미 이시기에 민중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보급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대남 일대의 남부를 중심으로 전파되었던 불교는 청대 전기에 들어와 1720년을 기점으로 그전까지 여섯 개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찰이 대남뿐만 아니라 점차 북부의 대북(臺北)지역으로까지 확산, 건립되고 신도수도 증가하는 등 불교가 대만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청조의 건륭(乾隆, 1736~1795)조에 들어와 대만으로의 이민이 증가되고 남부의 주민들이 북부로 이동하게 됨에 따라 대북이 1887년 성도(省都)로 지정되면서 그간의 성도였던 대남의 기능을 대신하게 된 후 대만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사회가 안정을 이루었던 배경 때문이었다. 청조는 기본적으로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보호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인 배경에서 오늘날 대만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사찰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는 대북시내의 용산사(龍山寺)가 이 시기에 건립되었듯이 사찰건립과 신도수가 증가되면서 대만불교가 섬 전체로 파급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 기간동안 불교의 주류는 정통불교의 출가승인 사문과 상이한 이른바 운재교(云齌敎)였다. 운재교는 청대에 비밀조직의 형태로 민간에서 상당히 성행했으며 법률적으로는 ‘사교’로 단정되어 단속의 대상이었다.
거시적인 획기로는 대만불교의 흥륭기를 과거 백년으로 잡고 일제시대 일본불교와 습합된 ‘전통 대만불교’와 해방후 이러한 전근대적인 불교를 극복하고 중국 전통불교로의 회귀, 즉 대륙화를 지향한 후기 불교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대륙불교에서 다시 계엄후부터 시작된 불교의 ‘본토화(대만화)', 즉 현대화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세 시기에 대한 고찰은 과거 왜색불교 및 대만 전래불교의 적폐를 털어 버리고 새롭게 중국 전통불교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대만이 처해 있는 갖가지 현대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현재의 대만불교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과제라고 해도 지나친 단순화는 아닐 것이다.
2. 일본불교 및 대만전래불교의 청산에서 대륙불교로의 회귀
일본제국은 주지하다시피 갑오 청일전쟁의 승리로 1895년부터 대만을 점령, 통치하기 시작한 이래 패전으로 물러간 1945년까지 50년간 ‘포르모사(Formasa)’―대만에 처음 발을 디딘 포르투칼상인들이 대만을 “아름다운 섬”이라는 의미로 일컬었던 말로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대만의 미칭―를 식민지로 편입하여 지배했다.
이 시기 대만불교의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일본불교의 츰입과 그 영향이다. 일본제국은 대만총독부를 통해 대만민중에 대한 수탈을 자행함과 함께 수탈과 착취를 극대화하기 위해 근대화 건설을 동시에 진행하는 양면정책을 펴나갔다. 그 가운데 대만과 대만인을 일본에 동화시키기 위해 황민화정책을 강제했으며 일본의 문화 및 종교의 이식에도 역점을 두고 효율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불교라고 해서 이 조류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진종(眞宗), 일련종, 천태종, 법화종, 화엄종, 조동종과 임제종 그리고 정토신종(淨土新宗)이 대만총독부 식민통치 권력의 비호속에 대만 전래의 운재교를 흡수하여 완전히 일본화해 버렸다. 그 중 임제와 조동 양종이 가장 영향력이 강했는데, 종국에는 불교의 출가승려마저 모두 이 양종에 편입케 되고 일반 불교신도들은 진종과 정토종에 통합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른바 왜색불교의 존재양태, 즉 승려들의 결혼, 육식 등 기존의 중국불교와 상이한 습속들이 뿌리내린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사찰의 가람배치, 설비, 복장 및 불교의례까지도 일본화되었다. 출가자들은 승복을 입지 않아 승속이 구분되지 않았으며 처자식을 거느리면서 사찰을 운영했다. 승려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계율도 지켜지지 않았다. 고기 먹고 술까지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도 대만의 일부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른바 ‘비구, 비구니 공주(共住)’, 즉 한 사찰에 처소는 다르지만 비구와 비구니가 같이 기거하는 점과 신도(神道)와 습합된 신불(神佛)이 불분명한 형태는 이 시기 일본불교가 남긴 부정적 영향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둘째의 특징은 운재교가 성행했다는 점이다. 운재교란 원래 임제종의 한 지류로서 유, 불, 도가 혼합된 형태인데, 명말에 대만으로 유입된 이래 전전까지 대만불교의 주류를 차지했다. 운재교는 재교(齌敎)로 줄여 부르기도 했으며 용화(龍華), 금당(金幢), 선천(先天) 세 파로 정립되어 존속해왔다. 1919년을 예로 들면 당시 정통불교 사찰이 전국에 77곳이었던 것에 비해 재교의 제당은 172곳이나 되었다고 한다.
운재교를 믿는 신도끼리는 공통적으로 재우(齌友)라고 호칭하고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여래, 혹은 관음불을 신앙했다. 그들은 출가하지 않은 재가자들로서 승복도 착용하지 않고 삭발수행도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재가불교’였던 셈이었다. 이 점이 운재교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들은 그저 흰옷을 입고 금강경, 아미타경을 염송했을 뿐이다.
당시의 한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운재교의 제당은 천여 곳에 달했으며 신도는 정식 불교승려의 숫자를 압도했다고 한다. 또 일제시대에 지어진 대북시 소재의 25개소의 사찰 가운데 대다수가 운재교 계통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까지 운재교가 여전히 성행했던 까닭은 아마도 석가모니재세시에 형성된 정통계율을 다소 변형시킨 일본불교와 공통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운재교는 해방 후에도 한 동안 성행했다.
대만불교는 1945년 해방 이후 구태를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하는 면모의 일신기를 맞게 된다. 일본식민통치자들이 물러가고 새 시대, 새로운 국가권력이 수립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호응하여 과거의 사찰이 중수되거나 헐리고 새로운 사찰이 건립되는 등 불교도나 사찰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1946년 2월 대만전역의 불교도들이 결성한 ‘대만성불교회(臺灣省佛敎會)’와 같은 대만인의 자주적인 불교단체도 발족되었다. 그러나 일본불교가 본격적으로 극복되는 시기는 아무래도 1953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시기, 즉 1950년대 이후 대만불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일본불교의 구습 극복이다. 둘째는 불교교단의 현실참여와 신행이 교학과 계율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혁신을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은 장개석(蔣介石)의 국민정부를 따라 중국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민국(民國)시대의 적지 않은 대륙출신 고승들과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고도경제성장이었다.
대만은 일본불교의 잔재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먼저 해방 후 대만불교의 현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광복 후 대만에는 신파라고 불리워졌던 일본파, 구파인 고산파(鼓山派) 그리고 속파(俗派)로 지칭됐던 용화파 세 파가 존속되었다. 재교의 세 지파까지 치면 도합 다섯개 파가 존재했던 셈이다. 그중 마지막 용화파는 운재교의 세 지파 가운데 교세가 넓었던 가장 영향력 있는 한 파였다. 이 세 파를 승려의 결혼 및 음주, 육식유무를 기준으로 구분해보면【표 1】과 같은 상황이었다.
【표 1】대만 내 주요 불교종파의 지계 상황
구분 |
결혼 |
음주육식 |
|
고산파 |
불가 |
불가 |
|
재교 |
선천파 |
불가 |
불가 |
용화파 |
가 |
불가 |
|
금당파 |
가 |
불가 |
|
일본불교 |
가 |
가 |
용화, 금당, 두 파는 모두 남녀혼인―이들은 ‘不淫’의 구족계를 지키는 게 아니라 오계중의 ‘不邪淫’계를 지켰다―을 인정했던 반면 선천파에게는 혼인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지계가 요구되었다. 육식과 음주 그리고 도박은 재교의 세 파가 모두 금지했다. 따라서 재교의 선천파와 고산파만이 결혼과 음주육식을 금한 셈이 된다. 하지만 선천파는 출가하지 않은 비승려였기 때문에 사실상 고산파만이 유일하게 지계를 중시한 중국전통불교의 본연의 맥을 잇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고산파는 문자 그대로 복건성의 복주(福州)에 소재한 고산(鼓山)의 용천사(湧泉寺)에서 전래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당시에도 양식 있는 대만인들은 지계가 청정하고 수준 높은 스님들을 선호했는데, 직접 고산까지 가서 수계를 받고 승려자격을 취한 승려를 받들었다. 따라서 엄격한 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중국 대륙불교의 영향으로 고산파 승려들은 최소한 축첩과 육식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산파는 나머지 다른 종파에 눌려 교세와 영향력이 미미했다.
일제를 거치면서 황폐화된 대만불교는 대만으로 건너온 중국국민당정치권력의 지지를 득하면서 중국대륙 출신 고승 및 젊은 학승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장개석, 엄가감(嚴家淦) 등 역대 총통들도 자신의 종교와 관계없이 불교를 지원했다. 장개석 자신은 기독교를 믿었지만 국가통치와 사회통합차원에서 불교세력을 이용한 측면이 강했다.
1947년 5월 중국불교회가 남경의 비로사(毘盧寺)에서 항전 ‘승리후 제1계전국회원대표대회(勝利後第1屆全國會員代表大會)’를 개최하여 그 전해에 결성된 대만성불교회를 정식으로 중국불교회로 편입시키면서 이 기구는 ‘대만성불교분회’로 개편되었다. 이후 이 조직의 지회가 동부의 화련(花蓮), 북부의 기륭(基隆), 신죽(新竹), 중남부의 대중(臺中), 가의(嘉義) 등지와 같이 대만 각지에 설립됨으로써 대만불교는 점차 종단운영면에서나, 조직 및 법률적으로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초기 재교 및 일본불교의 적폐를 일소하는데 최초의 계기를 제공한 이는 釋白聖스님이었다. 그는 1953년 봄 대선사(大仙寺)에서 수계식을 거행하면서 승속이 불분명한 폐단을 척결하기 위한 일곱 가지 규정, 즉 이른바 ‘칠조규정(七條規定)’을 제정하여 이를 지키지 못한 자는 제거하고 도태시켰다. 이 규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반드시 집과 속세를 떠나 승려의 위의를 갖추지 않으면 비구계를 수여하지 않는다.
둘째, 출가자는 속인복장을 해선 안 된다. 만약 승복이 없으면 3일 안으로 승복을 갖추고 그렇지 않으면 거사계를 반납한다.
셋째, 출가자나 재가자나 모두 일률적으로 승보를 스승으로 삼는 자라야만 수계를 받을 수 있다. 만일 재가인을 스승으로 모시는 자는 하루 빨리 고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계를 내리지 않는다.
넷째, 거사계를 받은 모든 자는 신도나 무리를 거느려서는 안 된다.
다섯째, 계를 타인에게 위탁하는 것을 금한다. 위탁한 계는 모두 무효로 한다.
여섯째, 과거 다른 종파의 계를 수지한 자는 반드시 삿됨을 개정하고 바른 도리로 돌아 올 것을 선서한다.
일곱째, 수계를 받은 날로부터 음주, 흡연, 육식을 절대 금한다.
백성스님이 중점을 둔 것은 엄격한 승속구분과 지계였는데, 달리 말하면 재교와 일본불교의 척결이었다. 이와 동시에 대륙으로부터 청장년의 승려들이 대만으로 건너와 불교교학을 중시하는 풍조가 새로이 진작됨에 따라 일제시대 계율을 무시했던 대만불교계에 일대 혁신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 후 엄격한 수계관리로 일본식, 재교식 불교형태는 중국대륙식 불교로 치유되고 회귀되었다. 대만 전래의 재교식 불교예법과 교리는 혁신되었고 불교도들에게는 사회복지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 권장되었다. 또한 각 지방마다 성행했던 모든 잡신신앙과 일본불교가 남긴 구습이 혁파되었다. 승려들의 결혼금지, 정토종신도의 소멸, 산문에 사천왕상을 두지 않던 일본불교의 사찰배치에서 산문 양측에 사천왕상을 두는 등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새로운 면모로 일신되어 갔다. 대만불교계와 불교학계에서 1953년을 대만불교의 전환점이라고 하는데 부정하는 이가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3. 대만불교의 현황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친 대만불교는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발전되어 있는지 그 외형적 지표를 알아보자. 1989년 현재 수계를 받은 대만의 불교도수는 전체 인구의 40%에 육박하는 448만 5,600명이나 되었다. 출가하지 않고 재가자들이 산사에 입사해서 수행을 한다거나 팔관재계의 참여, 혹은 일정한 기간만 승려와 같은 수행을 하게 되는 단기 출가자들을 포함하면 불교인들의 숫자는 이 통계수치를 훨씬 웃돌 것이다. 신자들을 수용하는 전국의 사찰은 도합 4,011개소, 승려 수는 8,905명이었다.
대만은 한국처럼 ‘조계종’이니 ‘천태종’이니 하는 ‘종’이라는 명칭 대신 불교재단법인과 사단법인이라는 단체위주로 움직여지고 있는데, 1993년의 통계에 따르면 그 때까지 21개 법인체가 정부에 등록되어 있었다. 이 수치들은 10여년 전의 통계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사찰이나 신도수가 이보다 훨씬 증가했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199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대만의 4대 불교단체 가운데 하나인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의 회원수만 해도 250만 명에 달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정확한 통계자료를 입수하지 못해 추정할 수밖에 없는 수치지만 2002년 현재 2,300만 전체 대만 인구 중 불교도수는 줄잡아 최소한 75% 이상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승려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년령 20세 이상만 되면 누구나 가능하다. 기타 특별히 요구되는 자격은 없다. 학력도 따지지 않는다. 출가자의 첫 단계는 한국과 같이 사미와 사미니이고, 비구(니)계를 얻고 나면 비구와 비구니가 된다. 고급과정은 각종 불학원에 개설되어 있다.
그리고 비구와 비구니의 관계는 한국보다는 탄력적인 것 같다. 탄력적이라는 말은 무슨 소린가? 대만의 사찰이나 저잣거리에서는 비구보다는 비구니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눈에 띈다. 또 우바새보다는 우바이가 훨씬 많은 것도 사실이다. 여자신도가 많다보니 자연히 여자신도는 비구보다도 비구니로부터 지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비구니에게는 여성신도를 지도할 임무가 부여되고 하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에 관한 연원은 불확실하지만 앞부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백성스님은 “정법을 수호하는 책임은 비구, 비구니를 가리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여성신도는 비구니가 지도한다”는 비구니역할론을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하고 추측될 따름이다.
승려나 재가신도를 막론하고 대만불교도들의 신행의 특징은 비교적 계율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계율에만 매달리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연속 7일간을 아미타불을 염호함과 동시에 좌선을 행하는 불칠(佛七), 또 7일 연속으로 좌선만 하는 선칠(禪七), 팔관재계 등과 같이 개인적으로 용맹정진하는 새로운 선 수행형태도 생겨났다. 사찰은 크게 선종과 정토종 계통으로 나누어지지만 선종계통의 사찰에서도 정토종의 의례를 따르는 곳이 많으며 모두 불상을 경배한다. 많은 선종사찰들이 ‘선정쌍수(禪淨雙修)’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각 종파간의 의식은 하나로 융섭되어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양태는 중국대륙의 선종사찰과 유사하고, 또 한국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단지 불교예법만 조금 다를 뿐이다. 경배를 예로 들면 우리와 다르게 긴 향에 불을 붙여 두 손에 맞잡고 상하로 흔들면서 선 채로 상체를 앞으로 숙이는 형식이다. 절을 할 경우 우리처럼 엎드려 절을 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상체를 세운 채 고개를 앞으로 숙인다. 한 번에 사르는 향은 양이 몇 묶음 단위다. 그리고 평상시에도 대만인들은 각 가정의 거실에 작은 불단을 안치해놓고 수시로 향을 피워 놓는다. 그리고 가정의 평온과 번성, 자녀의 건강 및 학업 원만을 기원한다.
대만의 가정에는 불상이 아니면 우리로 치면 지신(地神)에 해당하는 ‘투띠꿍(土地公)’ 혹은 관운장 및 옥황상제와 같은 도교 계통의 제신상들을 안치해 놓는 경우가 많다. 도교와 혼합된 신앙습속을 접하기가 어렵지 않다. 도교 사원에 불교의 법당, 각종 신상들을 모셔놓은 곳이 적지 않다. 불교신도들은 정월 초하루면 어김 없이 절을 찾고, 매달 1일과 15일에도 정기적으로 불공을 드리러 간다. 보시의 형태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대만불교는 규모가 큰 4대 불교단체가 위주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4대 불교단체에는 성운(星雲)법사가 이끄는 불광사, 증엄(證嚴)법사의 자제공덕회, 성엄(聖嚴)법사의 법고산(法鼓山), 유각(惟覺)법사의 중대선사(中臺禪寺)가 포함된다. 각 단체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자.
대만 남부의 고웅(高雄)현 대수향(大樹鄕)에 있는 불광사(佛光寺)는 신도와 승려의 수 그리고 사찰의 규모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단이다. 대만사찰 가운데는 한국의 불교인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이기 때문에 이미 우리 불교도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지하다시피 불교행사가 거행될 때는 신도들이 100만 명까지 운집하는 대만 내 최대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외형만 봐도 그 규모의 방대함을 알 수 있는데, 사내의 관음전, 조산회관(朝山會館) 및 불교대학은 대만 내 최대규모이다.
이뿐만 아니라 불광산 본사를 제외하고 대만 전역과 홍콩, 하와이, 미국, 말레이시아 등지에 30여 개의 분원이 있고, 또 분원보다 규모가 비교적 큰 별원이 대만과 해외에 최소 3곳 이상 세워져 있다. 미국의 서래사(西來寺), 대북시의 보문사(普門寺), 고웅의 보현사 등은 모두 이 별원에 속한다. 이 밖에도 대만 전국에 400개에 가까운 불광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해외에도 100개 정도가 설립되어 있다.
불광사를 방문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로 경내에 들어가면 그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하기 쉽상이다. 나는 유학 시절 불광사를 방문하여 며칠을 머문 적이 있는데, 불교시설 뿐만 아니라 외래인사들을 접대하는 숙사 같은 편의시설에다 탁아소, 초, 중등학교, 오락시설, 문물관, 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좌선시설, 백화점을 방불케 하는―실제 대만의 어떤 불교학자는 불광산의 조직운영을 “백화점식 운영수법”이라고 비유한 경우도 있다―불교용품매장 등의 시설들을 대하니 그 자체만으로 생존이 가능한 ‘독립왕국’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녁 무렵 경내의 어느 한켠에 서면 마치 청대 황제의 궁 자금성안의 어느 후미진 구석에 내쳐진 느낌이었다. 자금성에 밤이 찾아들면 어느 궐 안에서, 어느 처소에서 밀모가 진행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황제는 태평스런 밤을 보낼 수 있었듯이.
이 같은 방대한 규모의 불사를 일으킨 성운법사는 어떤 인물일까? 그는 대만불교계에서 신화적 존재다. 젊은 시절 대륙에서 단신으로 대만으로 건너와 대만말을 못하는 그에게 물질적 지원뿐만 아니라 언어장벽까지 극복케 해준 최대의 후원자였던 이쾌화(李快和)를 운명적으로 만난 일이라든가, 일본불교 시찰시 받았던 일본불교에 대한 벤치마킹, 혹은 불광사를 고웅에서 일으킨 정치적 배경 그리고 훗날 국민당과의 밀월이 파탄나고 국민당의 대항세력으로 정치적 말을 갈아탄 일, 또 1990년대 중반 돌연 불광산을 폐쇄조치한 노림수라든가 성운법사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한정 없다.
여기서는 다만 그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는 캐치프레이즈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즉 “부유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불교”가 성운법사가 불광사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제창한 모토였는데, 이러한 입세불교(入世佛敎)사상은 전통불교에 젖어 있었던 당시의 대만인들에게 신선하게 부각되었을 것이다.
대만인들, 특히 남부 민초들의 성원에 힘입어 불광사는 1967년 5월 16일 건립되었는데, 당시 하와이, 동남아, 브라질 등지의 해외화교 및 일반대중과 국내 정치인, 기업인, 부호들이 거출한 상당한 금액의 기부금으로 지워졌다. 예를 들어 불광산 제1차 5개년계획(1967~1972년)기간동안 걷힌 금액은 미화 100만 달러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기간에 건립된 경내의 주요 시설물인 관음전, 숙사, 도서관 및 교당 등도 모두 일반신도의 시주로 지워졌다.
이처럼 그가 오늘날의 불광사가 있게끔 불사를 일으키면서 소요된 모든 경비를 한 두 사람에 국한된 대부호의 시주와 기부금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점은 ‘종단운영’에 관한 성운법사의 치밀성을 엿볼 수 있는 점이다. 거액 기부자들에게 사찰운영권이 침식당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불광산의 성장배경을 말할 때 성운법사의 각고의 노력과 대만 집권세력인 국민당과의 상호 공생관계를 빼놓을 수 없지만, 국민당이 통치한 권위주의시대의 정치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권위주의 시대의 국민당독재권력이 물러가고 다원화시대에 접어들자 불광산의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불광산의 권위에 도전하는 여타 불교집단들이 생겨났다. 지금부터 논급하게 될 자제공덕회, 법고산, 중대선사가 이에 해당한다.
자제공덕회는 대만 굴지의 불교자선단체로 알려져 있다. 이 단체는 1966년과 67년에 걸쳐 대만 남동부의 소도시인 대동(臺東)을 중심으로 웅지를 틀었지만, 실질적으로 흥성하게 된 시기는 1970년대 말 이후의 일이다. 자제공덕회의 번성에는 대략 세 가지 정도의 내외적 배경이 작용한 듯하다.
우선 첫째, 19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중반까지 대만 내에서 황금시대를 맞이한 기독교와 천주교가 쇠퇴한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1971년 대만이 유엔에서 탈퇴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연이어 중일복교, 중미수교 등 내외의 정치적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기왕에 기독교와 천주교를 지원했던 국제단체들의 지원이 단절된 것, 셋째, 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고도성장에 힘입어 대만인들의 사회성금 및 기부금이 증가된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요컨대 기독교와 천주교가 쇠퇴한 후의 공백을 메꾸고 들어선 것이 자제공덕회의 자선사업이었다. 여기에다 동부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는 소수민족인 원주민에 대해 대만사회가 품고 있었던 도덕적인 원죄의식도 보이지 않게 한 몫 했다. 즉 이들에 대한 속죄의식 때문에 다수의 대만인들이 이 지역 원주민들에게 수술보증금 없이 진료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증엄법사의 호소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자제의원(慈濟醫院)이 동부의 소도시 대동에 설립된 것은 그 결과였다.
자제의원은 현재까지 운영되어오고 있는데, 증엄법사는 병원건립에서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투명한 회계를 유지했고 또 초지일관 병원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분리했다. 현재까지도 병원의 운영은 국립 대만대학 의과대학의 의료진에게 맡겨져 오고 있다. 이 점이 승려들의 재산시비로 불교계에 적잖이 문제가 되어 왔던 당시의 대만사회에서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고 대승적 불사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노벨평화상 후보자격이 있다고 운위될 정도로 증엄법사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을 높인 까닭이었다.
증엄법사는 병원의 존속차원에서 성원하는 각계 신도들의 지원폭을 넓히기 위해 대만 전역의 신도회를 조직하여 교세를 확장해왔지만 유동성이 강한 대만불교도들의 특성상 지금은 답지하는 성금이 예전 같아 보이진 않는다.
불광산과 자제공덕회가 선을 가미한 교학풍에다 입세간적인 불교를 지향했다면 성엄법사가 일으킨 법고산과 유각법사의 중대선사는 선을 종지로 내세운 대표적인 도량이다. 그러나 대만의 그 어떤 불교단체가 예외 없이 그렇듯이 법고산과 중대선사도 순전히 선풍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성엄법사의 3년여의 준비 끝에 1996년 대북시 교외의 북투(北投)에 자태를 드러낸 법고산 도량 역시 기업과 손잡아 교단을 일으킨 또 다른 경우이다. 이 역사를 일으킨 성엄법사는 일본의 릿쇼(立正)대학에서 불교학으로 박사학위를 획득한 인텔리로서 두 차례에 걸쳐 출가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 역시 법고산을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대만의 정치정세, 즉 국제정치적 고립과 장개석 사망후의 정치적 변동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또 실제로 정치권의 조력도 받았다.
성엄법사가 일본유학에서 돌아왔을 시기는 마침 1975년 4월 장경국(蔣經國)이 대만총통으로 취임한 후 민심수습 차원에서 해외에 나가 있는 대만학자 및 지식인들을 국내로 초치했는데, 성엄법사도 정부가 발기한 국건회(國建會)에 불교계 대표로 위촉된 것이다. 이렇듯 법고산이 흥성하게 된 배경으로는 성엄법사 자신의 고학력 및 이를 평가한 정치권의 지지, 그리고 그가 ‘심령환경보호’, ‘인간세상의 정토화’등의 이념으로 ‘선과 기업경영’을 주창한 사실들이 시사하듯이 기업들과의 제휴가 제 기능을 발휘한 덕택이다.
중대선사는 그 수장인 유각법사가 4명의 제자를 데리고 대북현(臺北縣)의 만리향(萬里鄕)에 영천사(靈泉寺)를 세운 후 일부 언론 및 정치인들의 지원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대만의 언론매체들은 종종 그를 원만 구득하고 지혜가 충만한 ‘고승’으로 추켜세웠다. 중대선사는 중고등학생 가운데 문제학생에 대한 교화를 사찰에 맡기겠다는 대만정부의 교육방침에 기민하게 부응해서 조직의 발전과 교세확장을 도모하기도 했다.
한편 교세확장에 너무 급급한 나머지 지원자를 신중하게 관찰하지 않고 성급하게 수계를 내린다거나 계율을 가볍게 여겨 불교계내외로부터 빈축을 싼 경우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이 조직도 현재 전국에 백 곳이 넘는 도량을 가진 대형 불교단체로 성장했다.
이 밖의 군소 불교단체 및 사찰의 성장을 포함하면 대만불교는 최근의 불과 30여년 사이에 양적, 질적으로 괄목하게 성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배경은 무엇보다 급속한 경제성장이 밑거름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계엄해제에 따라 대만사회가 다원화 된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대만경제의 고도성장은 불교단체들이 사회복지사업을 일으키고 불사를 사업화, 기업화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된 토양이었다.
불교단체의 기업화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엇갈린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백장(百丈)선사의 자립적인 사찰경제사상이라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반면에 부작용도 적지 않다. 문제는 정당한 목적과 동기 그리고 투명한 운영이 전제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불법의 홍양과 함께 우리가 도외시 할 수 없는 물질적 보시와 이타의 토대가 될 것이다. 급변하는 현대사회는 법음으로만 치유되지 않는 복합적인 제 문제가 천 가지 모습으로 나툰 불보살들의 천수(千手)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복지사업은 부처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육바라밀의 보시와 이타행의 실천이다. 불교사찰은 중국역사에서 전통적으로 불교고유의 종교적 역할 이외에 교육, 민간사회사업, 문화 및 경제적인 기능까지도 담당했다. 예컨대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문자교육, 좌선, 번역, 각종 문화행사를 지원하고 주관했을 뿐만 아니라 대민구휼기능까지 갖고 있었다. 또한 지역주민간의 상거래도 각종 행사를 매개로 한 사원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져 왔다.
현대 대만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서는 대체로 불법전파와 사회복지사업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 규모가 크다 싶은 대부분의 사원들은 모두 불경, 선지식인들의 전기 및 어록 등 불교관련 서적을 대량으로 출판한다. 따라서 전국 어느 사찰이나 불교 관련 기관, 서점 심지어 채식음식점에까지 각종 불교관련 출판물을 비치해두고 일반인이 무료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이러한 무상보시를 통해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자연스레 누항에 스며드는 것이다. 출판사업 가운데는 해외화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불경과 중국불교 관련 저서들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해외로 내보내는 해외포교 사업도 포함된다. 사회복지사업은 지면 관계상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자제공덕회의 병원개설을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것으로 그치겠다.
방송은 현재 불광사, 법고산 등과 같은 거대 종단이 운영하는 2개의 불교방송국이 있다. 과거 한 때 불광사는 중국대륙과 정치적으로 소통되지 않았던 시기에 대륙의 중국인들에게 매월 정기적으로 불법을 전하는 전파를 발했는데, 기능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두 세력간의 소통에 이바지 한 바 컸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 밖에도 대만정부가 1971년 유엔에서 탈퇴한 후 일본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대륙과 수교했고, 이어서 미국도 같은 수순을 밟았던 국제적 고립상황에서 정부가 할 수 없었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 역할이란 게 지극히 제한적이긴 했지만 ‘국제불광회(國際佛光會)’가 유엔산하의 NGO기구에 가입한 것이나 ‘세계불교승가회’, ‘세계불교도대회’ 등과 같은 국제대회를 대만에 유치한 경우는 정부정책에 호응하고자 한 불교계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예들이다.
4. 대만의 불교예술 및 문화
대만의 불교예술은 크게 사찰건축, 불상, 불교회화, 공예 등 네 장르로 세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일일이 거론할 수 없고 주요한 특징과 추세에 대해서만 요점적으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사원건축은 일제시기 전까지는 주로 중국대륙의 사찰을 모방했다. 이런 연유로 대륙출신 이민자들은 대만의 초기 사찰들을 창건했을 때 대륙의 사찰명을 그대로 붙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대북시내의 용산사는 1738년 대륙의 복건성 천주(泉州)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이 세웠는데, 천주 안해(安海)의 용산사를 본딴 것이다. 또 대남의 개원사는 당대(唐代) 장안(長安)의 개원사를 의식해서 붙인 명칭이다. 그 밖에도 영명사(永明寺), 개선사(開善寺), 영은사(靈隱寺) 등도 모두 대륙사찰의 이름을 딴 것들이다.
일제시대 이후는 대표적으로 금용사(金龍寺), 금강사(金剛寺), 원통사(圓通寺)처럼 서방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했다. 서양건축의 영향은 주로 사찰의 기둥양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런 영향은 민국시기를 거치면서 서양양식과 중국전통양식의 복합적인 양식을 유행하게 만들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런 특징은 지속되고 있으며 거기에다 건물의 규모가 대형화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사찰건물의 대형화는 왕왕 그 지역의 자연경관을 해치는 부조화스런 경우를 목도하게 만드는데 ‘세속 속의 불교’를 지향하는 대만불교인들이 신경을 써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인 듯하다.
불상은 대북시 내의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중국고대의 갖가지 양식의 불상을 제외하고 나면 현대의 불상조각은 대개가 복건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또 이런 양식을 최고로 쳐준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상이 가장 많이 조상된다. 대만인들이 가장 많이 받드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불상조상도 경제성장을 반영하듯 1970년대 이후로는 대형화되기 시작했고 거대한 불상이 건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불상, 만존관음상 등의 군상제작도 유행했다.
불교회화에서 특이한 점은 불화에 등장하는 원 인도 및 서역인들의 복장을 모두 중국식으로 처리한다는 점일 게다. 또한 중국화의 영향을 받아 인물, 화조를 배합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발묵은 지양하고 선으로 형사하는 것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대만의 불교공예품은 굉장히 발달해 있다. 공예품의 우선 소재와 재료가 너무나 다양하다. 여기에다 질 또한 중국 전래의 우수성이 전해져 섬세하기도 하고, 규모도 거대한 것들도 많다. 이를 표증하는 단적인 예로는 대북시에 소재한, 세계 4대 박물관 중의 하나인 고궁박물관에 진열된 놀랄 만치 아름다운 불교 공예품들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또한 서울 인사동에서 거래되고 있는 공예품의 태반이 대만에서 수입해온 것들이라는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티베트, 네팔, 태국, 미얀마 등지의 만다라, 불상, 불교공예품들이 대량으로 전시되고 유통되기도 했지만 기복성향이 강한 대만인들의 관심을 크게 잡아끌지는 못한 듯 하고, 불교예술이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있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다. 또 불상이든, 불화든 모든 불교예술장르의 기술은 도제식으로 전수되고 있다.
불교미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미술대학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불교명절은 석가탄신일인 4월 초팔일을 가장 성대하게 치른다. 대북시의 명소인 용산사에서는 매년 정월보름이 되면 연등전람회를 개최하여 대북 시민뿐만 아니라 외지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신문, 텔레비젼 등 대중매체들은 이 행사를 매일 같이 보도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이처럼 매스컴이 불교계의 동정에 민첩하게 반응하는 점이 두드러진 현상이다.
5. 당대 대만불교의 특징 : 탈근대에서 현대로
필자가 보기에 대만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무엇보다 사찰불교중심에서 재가불교로의 이행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탈전통, 탈근대에서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이 짧은 지면에 대만불교의 ‘전통'과 ‘근대성(modernity)'을 일일이 논구할 순 없고, 대만불교가 시간을 축으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 추세를 변별할 수 있는 전형(transference)을 도표화한 것을 제시했다.
다음의【표 2】가 현시하듯이 대만불교는 고적한 산중에서 나와 번잡한 인간세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과거 출가승려를 중심으로 산중사찰에 머물렀던 전통적인 불교가 현대사회 변화의 요구에 부응하여 정사(精舍), 염불회, 선센터, 불교문화센터, 강당(講堂) 등의 각종 형태로 인간세의 저잣거리로 나오고 있다. 도시화, 현대화가 진행 중에 있으며 신성성이 세속성으로 전화되고, 종교성이 사회성과 서로 교호 융섭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표 2】대만 불교의 탈근대에서 현대로의 이행 예증들
구 분 |
전통 및 근대 |
현 대 |
권력과의 관계 |
밀착 |
일정한 거리유지 |
사원의 입지형태 |
산중불교 |
산중불교, 도시불교 |
사원경제 |
經懺, 불사 |
經懺, 불사, 禪七, 관광, 학교설립운영 등 자력다원화, 승려의 자급자족의식 겸비 |
교단조직형태 |
단일권위조직 |
다원화된 불교조직 |
외계와의 교류 |
지역성 |
국제성 |
교단운용형태 |
승단불교 위주 |
승단불교와 재가불교 병행 |
승가교육형태 |
총림에 상주(승가교육) |
불학원, 불학연구소, 불교대학(교리의 사회화) |
봉사기능 |
보충적 |
통합적, 종합적 |
교리전파수단 |
선행을 권면하는 서적을 통해(소극적) |
전파매체와 기타 다양한 언론매체활용(능동적) |
종단조직운영형태 |
불교총림화 |
불교사업화(세속화) |
불교문학형식 |
원문경전 |
평이한 어투의 어록식 |
불교윤리 |
염송, 수행을 통한 참회불교(스스로 수행) |
세속불교(대중과 함께 수행) |
동기지향 |
내세지향 |
현세중시 |
여기서 불교의 도시화, 현대화란 출가자 위주가 아니라 일반신도인 대중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불교를 말하는데, 대만에서는 이를 ‘거사불교(居士佛敎)’라고도 일컫는다. 대만 전역에 산재해 있는 각 불학원(佛學院) 및 재가신도단체가 중심이 된 단체 수행 및 독경, 경론공부가 성행하고 있다. 이를 예증하는 한 통계를 살펴보자. 1953년부터 1986년까지 도합 30차례의 삼단대계(三壇大戒)의식을 가졌는데, 이를 거친 수계승려는 8,600명이었고 1991년까지 수계승려는 1만1,000명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해 오계, 보살계를 받은 재가 신자수는 대만 전체 인구의 몇 분의 일의 수준까지 될 정도다.
대만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계율수행을 중시하고 종단, 문중, 문도의 색채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무파벌주의, 그리고 불교사찰 재산이 국가에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닌 교단 소유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불교재산이 국가소유가 아니라는 점은 불필요한 국가권력과의 마찰 혹은 긴장을 초래할 여지가 적다는 얘기가 된다. 한편 계율수행을 중시하는데는 물론 마음자리를 닦는 참선수행을 경시하고 불학, 이른바 지식위주의 교학만 중시하는 등 지나치게 한 방면으로 흐를 경우 단점으로 작용될 소지도 존재한다. 여기선 한국과 비교하여 장점이 현현한 지계만을 살펴보기로 하자.
계율은 승려를 승려답게, 불교인을 불교인답게 만들어 부처님 제자임을 표증하는 지표이다. 계율을 잘 지키지 않고 불심의 경계로 넘어서겠다면 그것은 유치원도 마치지 않고 박사과정을 이수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그 자체로 그것은 탐진치의 탐심의 산물이다. 20세기 후반기 한국불교가 보여준 종단의 극한 대립은 모두 기본적으로 승려의 본분을 망각한 기본자질이 결여된 결과가 아니겠는가?
나는 짧지 않은 세월동안 대만에서 생활했지만 과문의 소치인지 몰라도 불교종단 혹은 문중간의 대립에 관한 그 어떤 불미스런 뉴스를 접한 적이 없다. 출가자들은 상대적으로 한국보다는 계율을 잘 지킨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환경은 승려 개개인의 발심이 주된 이유가 되겠지만 바람직한 승려상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도 승려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사회적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스님들에 대한 존경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출가자들에 대한 기대치의 반영이자 감시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일반인들은 출가자들로 하여금 이런 자세를 흐트리지 않도록 사회적 환경조성에 일조한다. 예컨대 스님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존경심도 대단하지만 스님들이 계를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일반 음식점이나 유흥술집은 스님들의 출입을 거의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예 일반식당과 유흥업소를 드나들려는 스님들도 거의 없지만 순수한 채식만을 공양할 수 있는 이른바 소식(素食)식당이 일반화되어 있기에 이곳을 이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차제에 종단, 문중개념이 한국처럼 병적이지 않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당대 율종의 종사로 이름난 참운(懺雲)법사는 늘상 천태종의 효운(曉雲)법사의 불학원으로 가서 경을 설한 것이나 또 중화(中和)현에 위치해 있는 자운사(慈雲寺)는 조동종에 속했지만 주지는 제자들을 천태종의 강원에 보내 수학케 한 경우가 그렇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게 아니다. 밀종의 경우가 그런 예외에 속하는 대표적인 경우로써 타 종단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경향을 드러내는데 그들은 단지 소수의 종파들일 뿐이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와 4대 종파간에 경쟁의식이 표출되고 있지만 같은 문도들끼리는 패를 갈라 피 흘리는 일은 없다.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특징은 개방과 다원성이다. 대만은 대승불교뿐만 아니라, 소승불교와 티베트불교까지도 전도가 가능하고 그들은 서로 상보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또 이를 바탕으로 한 해외전도와 교류가 왕성한 점이 불교의 세계화시대에서 대만불교가 타국과 비교하여 경쟁력을 가지게 되는 비교우위적 장점이다. 현재 그들은 중국대륙을 포함하여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 등지의 전도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불교라고해서 병폐가 전무한 게 아니다. 어떤 불교계 사찰은 사찰건립과 불상조성위주의 불사를 지나치게 일삼는다. 여기서 파생되는 불교의 기업화, 귀족화에 대한 비난이 없지 않다. 과거보다는 확연히 희석되었지만 정치권력과의 상호 이용도 여전히 문제가 된다. 또 신도는 많지만 신앙행태는 우리와 비슷하게 기복의 형태를 띤다.
대만불교가 취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승을 표방하면서 전통에 안주하고 있는 한국불교와 비교해 볼 때 전반적으로는 분명 저 만치 앞서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한국불교는 선을 내세우지만 정작 선과 교학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고 있으며 지계는 실종된 느낌이다.
또 대승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보살과 이타를 말하지만 실상은 소승의 성문연각의 층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리(自利)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야 어찌됐든, 남이야 어찌됐든 나만 깨달으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저자거리로 들어가지 못할 경우 한국불교의 미래는 어둡고 시대에 뒤쳐질 수밖에 없다.
위 글은『불교평론』, 2002년 봄호(통권 제10호)에 실린 것입니다. 위 글에서는 각주가 빠져 있지만 『불교평론』에는 각주가 모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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