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이여, 한시 野雪을 필사해보라!
나라에 존경 받는 어른이 없어진지 오래된 듯합니다. 아니 광복 후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어쩌면 존경 받을 만한 어른은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제 명대로만 살았더라면 존경 받는 원로가 됐을 장준하, 전태일, 임종국 선생 같은 분들이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면서 사회정의를 실천하다가 안타깝게도 일찍 타계한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사회에서 나라의 정신적 어른이나 국가원로로 대접받으려면 그래도 전직 대통령, 퇴임한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 혹은 석학이어야 할진대(사실 이건 바람직한 게 아님), 어느 분야에서든 올곧고 바른 정도를 걷다가는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가는 거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올곧게 바른 소리, 쓰지만 옳은 소리를 하다간 높이 올라가지 못하거나 정치인으로 당선이 되지 못하는 사회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상황과 아래 한시는 정말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파열음처럼 들립니다. 이 시를 읊는 이가 있어 정말 숙연하게 들리면서 국민들이 그를 존경하게 되는, 고관대작이 아니라도 숨어 사는 올곧은 원로들이 세상에 많이 드러나 소금과 빛이 되면 좋겠다는 뜻에서 아래 시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野雪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
눈 덮인 들판을 뚫고 지나갈 때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함부로 하지 말라
오늘 아침 내가 밟고 간 이 발자욱이
뒷사람이 밟고 갈 이정표가 될 터이니
위 漢詩 野雪은 백범 김구 선생이 애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삶을 함부로 살지말라는 경책을 할 때 자주 인용되는 시다. 하지만 원 저자는 김구 선생이 아니다. 과연 野雪은 누구의 작품일까? 저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애송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지 못한 듯해서 한 마디 사족을 단다.
한시 野雪은 흔히 서산대사가 지은 선시인데 김구가 애송해서 유명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에도 그런 식으로 많이 떠다니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시는 서산대사의 작품이 아니다. 서산대사의 문집인『淸虛集』에는 이 시가 실려 있지 않다.
野雪의 지은이는 1771 조선 영조(영조47)대에 태어나 정조, 순조, 헌종, 철종 대(1853년 철종4)까지 살다 간 시인 臨淵堂 李亮淵이다. 野雪은 手記本으로 전해져 오는 이양연의 시집『臨淵堂別集』에 실려 있고, 1900년 초 張志淵이 편한 우리의 역대 한시선집인『大東詩選』에도 이양연의 작품으로 수록돼 있어 그의 시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詩風도 이양연의 것이다. 그의 시는 짧은 五言節句에 촌철살인의 詩想을 간결하게 펼쳐 보이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나아가 인간의 삶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野雪은 김구 선생이 애송한 뒤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분명하다. 다만 김구가 이 시를 옮겨 썼을 때 첫행 穿雪野中去를 踏雪野中去로, 제3행의 今朝를 今日로 바꾼 듯하다. 사실상 한문의 어법상 "눈을 뚫고 들판을 간다"는 의미의 "穿雪野中去" 보다 "눈덮인 들판을 걸어간다"는 의미의 "踏雪野中去"가 더 적절해 보인다. 또 한문이나 현대 중국어에서 "胡"자의 어법은 정상의 궤를 벗어난 양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말로는 "마음대로", "함부로"라고 옮길 수 있는데, 이양연이나 김구나 모두 정확히 이 어법을 이해하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 어두운 밤 반디벌레들이 어지러이 날듯이 온갖 정치세력들이 나라와 국민의 안위는 뒷전에 두고 제각기 조직이 아니면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이리도 날뛰면서 혼용무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김구 선생이 그랬듯이 정치인들이여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한시 野雪을 써보라. 그러면 자연히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의 정치인들이 그럴 수 있다고? 쉽지 않을 거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요사이 정국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 하도 답답해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2016. 12. 20. 08:27
雲靜 注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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