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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역사인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

雲靜, 仰天 2015. 6. 23. 10:23

문창극 총리후보자의 역사인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문창극 총리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 위한 대통령의 결재가 세 번째로 연기된 가운데 야권 내에서 그를 자진 사퇴시키는 걸로 가닥을 잡았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반면, 문창극 후보자는 친일파로 몰린 것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해 청문회장에 서겠다고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귀추가 어떻게 결말이 날지 바로 감지된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번 사안의 본질을 찬찬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향후에도 유사한 일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고,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의 권한을 이어 받는 국무총리 정도의 막중한 국가지도자급 인물의 역사인식은 국가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질 중에 최상위의 요건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문창극 후보자의 과거 발언의 진실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또 그의 발언을 둘러싸고 각기 공방전을 펼치는 여야, 좌우, 진보와 보수 중 어느 쪽의 주장이 맞는가? 문창극 후보자 본인은 사과거부→언론사에 대한 고소 의사표명→해명→대국민 사과→청문회 준비 지속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그의 해명과 사과가 과연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의심 받게 된 상황이 돼버렸다. 그의 언행에 대한 진심을 하느님께서 판명을 해주시면 좋으련만 하느님께선 좋은 일일 때나 나쁜 일일 때나 늘 말씀이 없었듯이 이번에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결국 판단은 성서적 기독교리, 역사학과 문창극 후보자의 발화 당시의 상황적 맥락을 종합해 판단해 보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권력 쟁탈의 동기와 논리가 개입된 정치적 판단은 제외돼야 한다. 또 기독교 교리와 역사학에 대한 일정 수준의 전문지식이 갖춰져 있지 않는 시민들의 부화뇌동도 멈춰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역사학에서 중시되는 ‘사료비판’을 거치지 않는 섣부른 판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에서 벗어나 있는 일반인들이 내리는 판단이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른 변호와 비난은 모두 정치권의 편 가르기에 일조할 뿐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소모적이고 정쟁적인 20세기형의 낡은 틀을 넘어 서 있는 사람이다. 역사의 우연성과 인간사의 복잡성은 인간의 협량한 그물로는 잡히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이 점을 누구 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나로선 그 틀 속에 가치 판단력과 인식기능을 가둬놓기에는 나의 영혼이 너무 순수하고 자유롭다.
 
나는 사안에 따라 좌파의 입장을 지지할 때도 있고, 우파의 주장을 지지할 때도 있다. 그 기준은 상식, 다수의 선, 공공의 이익, 진리, 진실, 정의 등이다. 이런 류의 사람은 우리사회에서 곧잘 회색분자 혹은 기회주의자로 매도 돼 양쪽 모두로부터 비난 받기 십상인 존재다.
  
하지만 나는 내 입장을 견지할 것이며, 앞으로도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다. 오직 개인의 사익을 넘어 공익적 측면에서 어떤 게 더 적실하고 효율성이 있는가 하는 점만을 따질 뿐이다. 그런 눈으로 나는 문창극 후보자의 과거 언설들을 평심하게 보고 들었다. 교회에서 행한 강연내용은 두 번씩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경청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 쟁점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된다.
  
첫째, 그의 역사인식이 반민족주의적 식민사관인가? 그 의도가 친일적이었는가? 둘째, 우리민족을 폄훼한 표현이 진심이며, 일제의 식민지배, 남북분단 그리고 북한의 무력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 등의 민족적 시련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가? 셋째,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는가? 이 세 가지 문제제기는 내용이 서로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이 가운데 첫째 사안이 나머지 쟁점들을 포괄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판단은 나머지 두 가지를 분별하면 드러나게 돼 있는 구도다.
  
먼저 지적해두고 싶은 건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인식은 기본적으로 성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 민족을 동등시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민족과 조국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세우려 하신다고 주장했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통치와 섭리가 우리민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의 압제로 그들을 연단시키신 것처럼 우리 민족을 일제의 지배를 통해 연단시킨 것이라고 했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문창극 후보자가 말하고자 한 동기가 우리 민족의 희망과 하느님의 선택을 강조하고자 한 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종교적 희망일 뿐이지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받아들여져야 할 세속적, 탈종교적 희망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와 현실이 하나님의 의지대로 움직여진다는 예정조화설에 토대를 둔 기독교적 희망은 세속적, 탈종교적 희망과 다르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문창극 후보자는 윤치호가 한 말이라고 하면서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 지는 게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있었던 거”라고 주장했다. 또 하느님은 우리민족에게 시련을 딛고 일어나 더 나은 미래를 갖게 하기 위해 남북분단과 6·25전쟁을 주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의 우리 체질로 봤을 때 (하나님이) 한국한테 온전한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라고 하면서 6·25전쟁은 우리가 미국을 붙잡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했다.
 
 

일국의 총리가 되겠다는 사람의 역사 인식이 이처럼 천박하니 정치도 천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2005년의 한 신문칼럼에서는 위안부 배상문제에 대해 이미 끝난 문제이고, 우리는 일본의 배상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국력을 갖췄으니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해방된 지 60년 동안 사과를 요구해 온 것이 부끄럽다”고도 했다.
  
이 발언이 보도되자 이에 대한 비판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자 문창극 후보자는 언론이 전체 맥락을 다 보지 않고 단지 문제가 될 만한 일부 내용만 발췌 보도하는 통에 당초 자신이 의도한 내용이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일제 강점, 분단과 6·25전쟁은 하느님이 주신 거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시련을 딛고 일어선 우리민족의 저력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해명했다. 게다가 이것은 교회에서 기독교인끼리 통하는 종교적 강연이었으니 세상적, 속세적 관점에서 볼 게 아니라 성경적 관점에서 봐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당초 자신이 의도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문창극 후보자가 행한 원래의 언설과 해명을 종합하면, 그의 발언은 세 가지 가능성 중 하나다. 첫째, 기독교리, 즉 좁게는 하느님의 ‘절대 주권사상’에 대해 무지했든가, 둘째, 그게 아니면 교리를 알고도 의도적으로 왜곡했던 것이거나, 셋째, 의도와 달리 표현을 잘못 하는 등 논지전달의 미숙으로 오해를 일으킨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문창극 후보자의 언설은 첫째에 속하는 걸로 보이고, 셋째의 우를 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두 번째에는 해당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무총리로서의 결격사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 자체로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개연성이 크기 때문에 문제가 작지 않다. 이하는 이에 대한 장문의 부연설명이다.
  
문창극 총리후보자의 강연내용을 관통하고 있는 건 기독교 신학에서 거론되면서 전통적으로 교회가 신봉해 온 이른바 “하느님의 절대 주권사상” 그리고 인간사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의지대로 움직여진다는 근본주의적인 숙명론이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며, 신의 주관과 영광으로 돌리는 ‘하느님의 절대 주권사상’이란, 하느님은 당신의 의로운 뜻을 끊임없이 거역하고 방해하며 좌절시키려는 모든 악과 불의의 세력을 주권적인 섭리로 제압하고 승화시켜 궁극적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신다는 게 핵심이다. 즉 쉽게 말해 신이 인간사에 관여하고 세상의 악에 대한 응징개념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과 불의를 발생케 한 게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창극 총리후보자가 하느님이 우리민족을 쓰기 위해 역사적 시련을 부여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와 달리 ‘하느님의 절대 주권사상’의 핵심에서 벗어난 교리 왜곡이다. 문 후보자가 교회장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왜곡한 까닭은 아마도 그가 기독교 신학 전공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 교리를 왜곡하면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한국교회의 목사들의 목회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느님의 절대 주권사상’을 그런 식으로 얘기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발언이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근본주의적인 숙명론에 서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작위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두 의미가 없는 허무한 일이 되고 만다. 역사의 소명의식, 인간의 자유의지, 인류와 민족과 국가를 위한 헌신, 희생, 노력은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그의 역사인식대로라면 경제적 수탈, 기본권 및 인권유린, 생체실험, 반인도적 전쟁범죄, 식민사관을 통한 민족말살 및 모독 등 인류사에 전무후무할 정도로 가혹하게 고통을 강요한 일제의 식민지배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우리민족이 “이조 500년을 허송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시련과 고난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악도 하느님의 뜻과 의지가 돼버리는 것이다.
 
반대로 독립을 찾기 위해 몸을 바친 독립운동 지사들은 되려 하느님의 의지에 반기를 든 꼴이 된다. 그들은 처자식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놔둬도 하느님이 알아서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주셨거나 혹은 식민지배를 더 연장시켰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독립을 주셨다면 독립을 위해 희생한 독립지사들과 미국의 노력은 뭐란 말인가? 또 하느님이 우리가 미국을 붙잡도록 하기 위해 6·25전쟁을 주신 거라면 미국의 이해와 양보 그리고 전쟁 막바지에 한미동맹을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 압박용으로 전국의 반공포로까지 전격적으로 석방한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과 공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더욱 가관인 것은 상기 논리에 따르면, 스탈린, 모택동과 사전에 남침을 공모한 침략자인 김일성을 단죄할 수가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김일성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우리에게 살육과 파괴가 수반된 민족상잔의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련"을 선사한 고마운 사람으로 찬양해야 한다. 유대민족 처럼 시련과 고난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을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시련을 딛고 이겨내기 위해 동족상잔을 주셨다고 해석하는 건 사랑의 하느님을 너무 잔혹한 존재로 만든 셈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현재 도피 중에 있는 세월호 참사의 배후 주범인 유병언도 하느님의 시험을 받아 시련을 받는 거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유병언도 알뜰히 잡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이 잡으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구태여 애를 쓰지 않아도 잡힐 것이고, 뜻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잡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이 같은 논지의 모순이 적지 않지만 여기선 이를 일일이 거론할 지면이 부족하다. 예를 한 가지만 들면 그는 강연에서 중국의 자유화, 민주화, 기독교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기독교화가 되면 중국의 자유화, 민주화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통일도 자연히 이뤄진다고 했다. 이 말은 우리민족이 살기 위해선 중국이 공산국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또 주한 미군이 없으면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 된다고도 했다. 인간의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이러한 발언들은 주변국의 시비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로서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는 그가 총리신분이었다면 분명히 외교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발언인데, 중국에 대한 이런 인식이 총리가 된다고 바뀌겠는가? 바뀐다면 그건 하나님을 신봉하는 신념을 바꾸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독교화 되면 남북통일은 저절로 이뤄진다고 자신 있게 말한 데에 대해서도 그는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 종교적 비전과 세속 역사와의 접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니 만일 우리가 굳이 대북정책과 북한핵문제에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으며, 통일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물으면 문창극 후보자는 뭐라고 답할지 궁금해질 수 있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현실정치 영역에서도 일본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고, 또 우리로서는 반드시 사과를 받아야 될 양보할 수 없는 과제다.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문제를 해결할 진정한 사과와 배상이야말로 한일 두 나라가 화해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문창극 후보자는 과거 칼럼에서 “반성은 일본인 자신의 문제요, 책임이다. 그만한 그릇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겠나”라고 하면서 “당했던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나가면 그들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겠는가”라고 했지만 이는 아베 총리를 수장으로 한 일본우익의 의도와 실상을 너무나도 모르는 안이한 판단이다.
 
현 일본 정부와 우익은 우리가 신사적이고 대국적으로 통 크게 나간다고 해서 감동해 자국의 국가적 목표와 원칙을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외교란 상대가 있는 법인데 우리가 나이브하게 그릇이 큰 대국인인 체 해봤자 과거 우리 선조들이 뒷짐 지고 일본을 야만시하고 있다가 그들에게 당한 뼈아픈 역사만 상기돼 속이 쓰릴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러 번 정상회담을 희망한 아베 총리의 요청을 거부한 이유도 이런 현실적 맥락에서였지 종교적 맥락은 아니지 않는가? 청구권 협정으로는 (위안부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이 안됐다고 보기 때문에 위안부 배상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우리정부의 공식 입장이다. 대통령이 문창극 후보자를 총리로 기용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일제 식민지배의 정당화”에 동의하는 셈이 된다.
 
이런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국무총리로 세우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공식 사과를 요구해 온 정부의 정책을 포기하는 의미가 된다. 지금 일본 열도 전체가 일제식민지 통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창극 후보의 발언을 반색하면서 환영하는가하면, 그것이 조롱하는 의미도 담겨져 있는데 이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한편, 문창극 후보자를 지지하는 쪽에선 그의 발언이 교회 내 종교인들 간에 통용되는 내용이라고 비호하고 나섰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 통할 게 따로 있다. 교회에서 교인끼리 통용되는 목회나 간증, 강연이라 할지라도 현실정치의 장에선 발언의 수위가 초국가적이어선 곤란하다. 하느님도 현실의 이 세상을 긍정하신다. 신국이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현실의 질서가 정당하게 지켜지는 것을 원하신다. 그렇지 않고 무법, 무정부상태의 혼돈을 보고 싶어 하는 건 아닐 거다. ("아들들아 내 도를 들어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잠언 : 제8장 32절)
  
문창극 후보 지지자들은 또한 “우리 민족이 게으르고 자립성이 부족하다”는 내용은 문 후보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 구한말 윤치호의 발언을 인용한 것인데, 이걸 문제 삼는다는 건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문제가 된 이 민족폄훼 발언은 윤치호가 말한 내용을 인용한 것일뿐 자신이 직접 언급한 게 아니라고 해서 면피되는 게 아니다. 인용은 대체로 인용 내용에 대해 긍정 아니면 부정이다.
 
특히 긍정인 경우는 인용자가 하고자 하는 주장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 타인의 주장을 내세우는 방법이다. 실제로 문 후보자도 강연 중 과거 구한말 조선을 찾아온 벽안의 외국인 선교사나 윤치호의 기록을 인용할 때마다 그 내용에 동감하는 의미로 다시 부연하는 형식을 취했다. 즉 그는 윤치호의 기록에 동감했기 때문에 그 말을 인용하고 부연한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 내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었다는 주장, 즉 발화시 환경적 특수성의 논리도 쉽게 면피되는 사안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선 거두절미 하고, 한 마디로 교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내용이라면 왜 기독교인들 중 반대자들이 속출하는가? 교계 안의 반응은 크게 두 부류다.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 인식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 그리고 그런 적대적인 반응이 지나치다고 보는 교인들 및 목사들이다.
 
이 가운데 후자인 지지자들은 “문창극 후보자는 친일파가 아니며 훌륭한 애국자”로 평가하면서 “일제강점, 분단, 6·25전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백한” 그의 “기독교 신앙적 역사관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기독교인 105인).
  
반면, 전자인 반대자들은 “문창극 후보자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식민사관이 더해진 위험한 역사인식을 가졌다”고 지적하면서 “하나님은 한일 합방과 남북분단을 주도한 분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김성복 기독교 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또 “아무 데나 하나님의 뜻을 갖다 붙이는 문 후보자를 신앙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만약 총리가 된다면 기독교계에 부끄러운 일”이라는 견해도 나왔다.(박승렬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상임의장).
 
기독교계 일각에서 나오는 이러한 비판들처럼 인간의 역사에 내포돼 있는 복잡다기한 의미에 대한 보편사적, 심층적인 고찰은 전부 생략하고 모든 게 하느님의 뜻이라는 걸 들먹이며 역사를 단순 무지하게 해석해 버리는 것은 일부 정치권력화 된 대형 한국교회와 목사들이 자주 범하는 과오, 즉 신앙의 이름으로 신앙의 본질을 배반하는 행위다.
  
문창극 후보자 지지 진영에서는 “위안부 문제로 우리가 일본에게 사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한 말은 원래 “우리가 지금은 선진국 수준까지 왔기 때문에 이렇게 사과에 연연하지 말자”는 뜻이었고, “조선사람이 게으르다”는 것도 “나라가 백성들을 수탈해서 게을러진 것이다, 결국 백성을 잘 돌보지 못한 나라의 책임이 크다”는 데에 강조점을 둔 것이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그들의 이 주장은 사안의 한 측면만 본 개인적 수준의 희망일 뿐이다. 아무리 교회내 일부 교인들을 상대로 한 강연이지만 위안부 문제는 굉장히 신중히 발언해야 할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문제를 표현함에 미숙한 부분이 많았다. 이러한 표현미숙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그냥 넘어가겠다.
 
허나, 옹호자들 말대로 문창극의 문맥적 의도가 “우리가 지금은 선진국 수준까지 왔기 때문에 이렇게 사과에 연연하지 말자”는 의미였다면 그 의도는 그의 역사인식 혹은 대일관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한 부분을 이루기 때문에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반론을 펴면 이렇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이 못 살고 약한 나라라서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사과를 요청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야스쿠니신사 내 역사 게재 내용 중 미국이 일본을 태평양전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식으로 기술함으로써 일본의 전쟁도발을 합리화하는 꼼수를 부렸는데, 미국은 이에 대해 즉각 시정을 요구하면서 일본정부의 사과를 받아냈다. 중국과 러시아도 각기 일본과 쟁점이 되고 있는 영토(띠아위따오와 북방4도)와 관련해 일이 불거질 때마다 일본 측에 사과를 요구해오고 있다. 일본도 우리가 독도에 관한 주권행사를 행할 때 마다 한국정부에 항의를 해오고 있는 저의를 생각하면 그렇게 경솔하게 발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이 위안부문제는 한일 간 현재진형형의 외교적 문제다. 외교적 문제는 국가차원에서 풀어야 할 문제이지 개인의 과도한 자신감(나는 한국이 아직은 정신문명 측면에선 선진국 수준에까지 오지 못했다고 보는데 그는 우리나라를 선진국 문턱에 도달한 나라라고 본다)에 따른 선심성 발언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런 취지는 대단히 신중하지 못한 발언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위안부문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배상, 정신대를 비롯한 노무자의 강제징용, 사할린동포 동원, 독도에 대한 불법 편입, 식민지배에서 파생된 역사교과서 왜곡, 일본 내 재일동포의 참정권 제한 등 여타 미해결된 수많은 문제들과 연동돼 있는 사안이다. 따라서 문후보자의 말대로 일방적으로 사과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할 경우 일제가 남긴 이 같은 역사적인 과제해결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이 모든 것을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문창극 후보자가 정말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다면 최소한 국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는 게 사회지도층 인사로서 갖춰야 할 자세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한국인의 성정에 대한 표현에 대해서도 문제가 작지 않았다는 걸 지적하고자 한다. 문창극 후보가 말한대로 만약 게으름이 우리민족의 DNA라면 구한말 조선인들은 러시아 연해주에 가서도 바뀌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곳의 한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나서부터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며, 깨끗하며 잘 살더라는 서양선교사가 남긴 기록을 인용했다. 앞서 말했듯이 문창극 후보자의 인용 형식은 피인용된 내용을 긍정하는 맥락임을 볼 때 그는 서양선교사의 기록을 역사학의 기본인 사료비판을 가하지 않고도 온전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감안해서 용어를 신중하게 구사했어야 한다. 즉, 우리 민족의 성정을 당시 조선이 처한 정치적, 경제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그것이 마치 어쩔 수 없는 유전인자인 것처럼 단정했다면 그것은 부분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 셈이다. 만약 당시 연해주의 한인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면 과연 끝까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며, 깨끗하며 잘 살 수” 없었다는 말인가? DNA는 시공을 초월한다. 표현을 달리 하면, 지금도 한국인들 가운데는 기독교를 믿지 않고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며, 깨끗하며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한 마디로 그는 용어를 부적절 하게 사용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심각한 역사해석상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나는 문창극 총리후보의 옹호자들 가운데 선두에 서있는 듯한 두 사람의 방어논리를 거론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결론으로 유도하고자 한다. 먼저 초들 사람은 한국경제신문의 논설실장 정규재다. 그는 KBS 등의 언론과 문창극 후보 반대자들이 그의 강연 내용 중 문제가 되는 부분의 앞뒤 내용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해버리면서 그를 비판했다고 주장했다. 즉 단장취의(斷章取意)의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어쩌다가 우연히 정규재가 얘기하는 걸 들을 때마다 진영논리에 갖혀 보수진영의 그 어떤 것이든 모두 두둔하거나 보호해야 할 입장이어서 그런지 논리 비약이 심하고 억지를 부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왔다. 더 가관인 것은 이 분의 그런 주장에 환호하고 찬양하는 적지 않은 팬들의 반응이다.

 
정규재는 문창극 후보자가 조선인이 게을렀던 것은 “나라가 백성들을 수탈”했기 때문이라며 이 문제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즉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세련된 면을 보였다고 칭찬했다. 정규재의 옹호대로 문창극 후보자가 “백성을 잘 돌보지 못한 나라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그는 정규재가 말한 대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렇게만 얘기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민족의 DNA를 운운했다. 너무 나간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되고 난 뒤에서야 사후 해명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발화 되고 나면 주워 담기 어려운 게 말이다.
  
문창극 후보자는 전문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수십 년 동안 언론에 종사한, 특히 대기자로서 전문적으로 칼럼을 집필해온 언론인 출신이다. 칼럼을 쓸 때는 글을 쓰는 동기 내지 목적, 주장과 문맥적 맥락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고, 용어 하나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평기자로 시작해 논설위원까지 지낸 이상 이러한 훈련이 돼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정규재는 이러한 표현은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는 내용임에도 그런 표현의 미숙이 불러일으킬 부정적인 반응, 즉 논란을 불러일으킨 원인제공은 덮어두고, 더군다나 문창극의 강연 내용 중 앞뒤가 모순되는 부분은 전혀 언급도 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면서 그를 두둔했다.
  
정규재는 또한 헤겔을 동원해 문창극 장로의 발언을 변호하기도 했다. 즉 헤겔은 역사를 절대자인 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라고 했다고 하면서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도 절대자인 하나님의 뜻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헤겔은 역사에서 절대정신을 얘기하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헤겔이 “역사를 절대자인 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라고 한 것은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종말이 오지 않는 한 인간세상에선 검증이 되지 않는 선험적이고 관념론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헤겔 류의 역사철학자들 가운데는 역사과정의 일반성(generality) 또는 사건 전개의 전과정에 내재하는 의미(meaning) 혹은 의의(significance)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해온 학자들도 있다.
 
그러한 학자들은 이러한 일반성, 의미, 의의 등은 통상 역사 연구작업을 통해서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며, 선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선 적지 않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생략하겠다. 그 대신 나는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가 신이 역사 속에 나타나며, 신의 목적이 역사의 의미라고 하는 사람은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일갈한 사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한 반박을 대신하겠다. 또 정규재가 예로 든 함석헌 선생은 우리민족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했지만 그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하지는 않았다. 과문해서 그럴 수 있겠지만 이러한 단장취의(斷章取意)는 정규재의 논리 전개 방식의 특징 중 한 요소로 보인다.
  
정규재는 위 사실들을 보도한 KBS의 불량한 의도를 의심하면서 그 조직의 집단적 지력을 탓했다. 이는 비판자 자신이 정말 뭘 몰라서 문창극의 강연내용을 맹목적으로 두둔했든가, 아니면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알고도 악의적인 혹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문창극을 변호했든가 둘 중에 하나다. 그야말로 단장취의의 우를 범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두 번째 거론 대상자는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다. 나는 요사이 며칠 간 해외에 체류하느라 어제 밤에서야 지난 6월 19일의 한 시사토크 프로그램에서 이 교수가 문창극 후보를 옹호하는 옹호자의 대열에 가세한 사실을 알게 됐다.
 
이 교수는 문창극 후보자가 잘못이 없고 훌륭한 애국자라고 발언했다. 또 이 교수는 “문 후보자의 교회 강연 동영상 모든 분량을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난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문 후보자의 강연을 보고 감동받았다. 태도, 눈빛, 강연을 준비한 정도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면서 “비기독교인이 보면 오해할 소지가 약간 있지만 강연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문 후보자를 반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역사학을 전공한 것인지,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무얼 배웠는지 의심이 든다. 평생을 공부하고 종사한 역사학자의 사료비판력과 인식력이 이 정도라면 그가 전공했다는 러시아지성사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을지 대략 감이 잡힌다.

 
이 주장에 대해 프로그램 진행자가 “주로 야당 의원들이 동영상을 본 후 친일인사라고 말하지 않느냐”고 답을 유도하자 이 교수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완전히 비이성적이고 양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했다. 또 이 교수는 “문 후보자가 청문회에 오르기도 전에 반민족주의자, (일본 총리) 아베와 같은 사람이라고 마녀사냥하고 있다. 한탄스럽고 경위 자체가 오싹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이유로 문 후보자가 낙마해야 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할 때”라는 표현도 했다.
  
이인호 교수는 논란이 된 문 후보자의 위안부 발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강연을 하는 문 후보자 표정 등을 보면 우리 민족 수난의 역사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며 “문 후보자는 (일본이) 사과할 필요 없다고 말한 적 없다. 사과 받으려고 애걸복걸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지식인들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고 하면서 “의도를 일부러 왜곡하는 세력이 있다. 읽어보지도 않고 남의 얘기만 듣고 판단하고 몰아붙이는 건 마녀사냥”이라는 식으로 그에 대한 비판여론이 어떤 불경스런 세력의 악의적인 왜곡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이인호 교수의 위 발언을 듣고선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평소 그가 시사문제나 역사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들을 때 가끔 그가 과연 사학을 한 역사학자일까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비논리적이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행하는 편향적인 발언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면역이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아주 많이 놀랐다.
 
이번에 많이 놀란 이유는 이렇다. 우선 나는 “문 후보자의 교회 강연 동영상 모든 분량을” 다 봤다는 점을 밝히고 얘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접했다. “문 후보자의 교회 강연 동영상 모든 분량을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고 했듯이 그는 다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문 후보자를 비판하는 자들이 대부분 논란이 된 글과 강연들을 읽어 보지 않았거나 보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 혹은 전제하고 자신의 반박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런 논리전개 방식은 상당히 비이성적, 비논리적이다. 그리고 이 교수는 “기독교인이 아님에도 문 후보자의 강연을 보고 감동받았다. 태도, 눈빛, 강연을 준비한 정도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의 발언은 사실과 논리로 사안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대상자의 표정과 그에 대한 감성에 의지해 사안을 평가하는 태도인데, 역사학에서는 이러한 태도는 사료나 사실을 대할 때 반드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가 봤다는 동일한 강연 동영상들을 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지만 나는 전혀 감동을 받지 못했다. 즉 나는 강연 시 문창극의 “태도, 눈빛, 강연을 준비한 정도”만 가지고선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그가 저렇게 기본 사실도 제대로 모르면서 마구 얘기한다거나 대중 강연에서 자신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와 별개로 청중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표현이 미숙해서야 되겠나 하는 우려가 앞섰다. 한 마디로 감동 보다는 우려와 의구심이 더 컸었다.
  
이인호 교수가 “비기독교인이 보면 오해할 소지가 약간 있지만 강연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문 후보자를 반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며, “주로 야당 의원들이 동영상을 본 후 친일인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그 사람들은 완전히 비이성적이고 양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며, “문 후보자가 청문회에 오르기도 전에 반민족주의자, (일본 총리) 아베와 같은 사람이라고 마녀사냥하고 있다”고 주장한 점에 대해선 백번 양보해 설령 실상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표현은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비기독교인이 보면 오해의 소지가 약간” 있는 게 아니라 비기독교인 내가 봤을 때 오해의 소지가 아주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만약 나의 이 주장에 동의한다면, 이 교수의 이런 말을 듣는 당사자들 가운데는 내가 그렇게 느끼듯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 “완전히 비이성적이고 양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는 그의 말을 이인호 교수에게 그대로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어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교수가 “이 같은 이유로 문 후보자가 낙마해야 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할 때”라고 한 표현은 문창극이 낙마하게 되면 이 나라를 떠나야 할지 말지 그의 개인적 선택이니 왈가왈부 할 게 아니다.(사실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 등의 이런 표현도 듣는 이에 따라선 비이성적인 선동으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발언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인호 교수는 논란이 된 문 후보자의 위안부 관련 발언에 대해서 “강연을 하는 문 후보자 표정 등을 보면 우리 민족 수난의 역사에 마음 아파하고 있다”며 “문 후보자는 (일본이) 사과할 필요 없다고 말한 적 없다. 사과 받으려고 애걸복걸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라는 옹호에 대해선 동의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이 교수의 논리 역시 상당히 비논리적, 비이성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지식인들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것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고 한 이 교수의 말대로 자신은 과연 문 후보가 행한 강연 내용을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할 정도로 문맥, 표현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하는 주장인지 되묻고 싶다.
  
이인호 교수는 또 문창극 후보자가 언론사에서 기자로 인정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잘못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과연 그가 역사학에서 중요시 되고 있는 사료비판이란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나 하는 발언인지 정말 의심스럽다. 한 마디로 특정 인물의 명성 혹은 권위의 무오류성으로 평가의 대상자를 두둔한 점도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가 말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발언이다. 그는 오랫동안 대학에서 서양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는 “문 지명자의 칼럼을 읽어봤다. 중앙일보 주필이면 언론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이게 역사학자의 생명이랄 수 있는 논리를 갖추고 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는가? 같은 역사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너무 어이없는 주장이라 이에 대해 반론을 길게 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 그 조직에서 인정받았다는 것이라면 반 정도만 맞고 반은 그른 말이다. 어느 언론사 자체가 사회발전을 가로 막는 사실왜곡 기사와 보도를 해대는 회사의 주필이라면 그 주필은 더 나쁜 언론인이라는 걸 왜 모를까?
 
한국에는 그런 언론사들이 많다. 아주 많다. 한 마디로 이인호 교수의 주장은 대전제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인호 교수의 이 주장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제시한 바 있는, 인간의 올바른 인식을 가로 막는 네 가지 우상 가운데 하나에 속하는 전형적인 사례이기에 뒤늦게라도 그가 이 점을 상기하기를 바랄 뿐이다. 기존의 선입견과 편견을 벗어 던지고 대상과 사안을 바라봐야 한다는 자세는 역사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모든 학문에 종사하는 학자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다.
 
이 점에서 나는 이인호 교수에게 베이컨을 비롯해 천재적인 철학자인 칸트, 헤겔, 마르크스나 레닌 등도 오류가 없을 수 없었으며, 인류의 스승이랄 수 있는 공자, 예수는 물론이고 심지어 역사상 최고 현자로 인식되는 석가모니 마저도 현대사회에서 이해하지 못할 발언을 했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그만큼 세계는 부단히 변화하고 있어 기존의 권위 등에 대해 긍정적으로 단정하고 말하는 자세는 오류를 범할 소지가 크다는 소리다. 같은 논리로 이인호 교수가 “서울대 교수면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것” 아닌가라고 해서 그의 러시아사에 대한 이해나 연구 성과에서 전혀 오류가 없는 완벽한 수준일까?
 
한 마디로 논리의 비약이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오만이 지나친, 다분히 진보진영을 정조준한 진영논리가 개입된 의도적 옹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인호 교수의 옹호논리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고 비이성적이며 편협하고 옹색하다. 나는 이러한 그의 주장들에 대해 좀 더 심층적인 비판을 가할 수 있지만 지면 관계상 이 정도에서 넘어가고자 한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정규재 기자와 이인호 교수에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종교적 “의도를 일부러 왜곡하는 세력”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또 나는 그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고 남의 얘기만 듣고 판단하고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따라서 지금까지 문 후보자의 강연과 글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평가는 “마녀사냥”이 아니니 나를 도매금으로 무슨 “세력”의 일원으로 매도하지 말기를 바라며, 또한 사학을 전공한 한 사람의 평범한 역사학자의 상식적인 한글 독해력에 근거한 판단임을 강조해두고자 한다.
  
6월 24일 오늘 아침 조간신문에는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 문남규가 독립유공자 문남규와 동일 인물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에 대한 진위가 정확하게 가려져야 되겠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창극 후보자가 국무총리로서 자격을 가졌는가 하는 문제는 조부가 독립유공자였는가 하는 것과 별개의 사안이다. 부친이 대통령이었다고 해서 그의 자식도 대통령이 될 자질이 있다고 단정해선 안 되듯이 말이다. 그런데도 문창극 후보자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그의 조부가 독립유공자였다는 게 사실이라면 문 후보는 친일인물이 될 수가 없고, 애국자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논리 비약이 심한, 억지나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가 종종 중대차한 사안을 평가할 때 비이성적이고 감성에 치우치는 문제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 보도도 이에 해당된다.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자세하게 설명할 여유가 없다. 다만 부친이 국가모반을 꾀한 반역도나 이른바 ‘빨갱이’였다고 하더라도 그 자식은 정치,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될 것이며, 동일한 논리로 부모가 훌륭한 애국자라고 해서 그 자식도 자동적으로 애국자일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해두고자 한다. 부모가 독립유공자였다면 그 자식에게는 국가가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쳐 상응하는 대우를 해주면 된다. 부모의 공과를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식에게 물려받게 해선 안 된다는 게 민주국가의 윤리요, 우리의 헌법정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말로 반론을 대신한다.
  
여기까지 긴 글을 읽어온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제 우리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단계에 왔다. 문창극 후보자가 친일적 발언을 한 게 사실이고, 그 발언은 일제가 내세운 식민사관과 식민지근대화론을 연상시킬 수 있는 발언이라고 보는 판단과 평가는 타당하지 않는가? 설령 자신의 해명대로 자신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강연과 글들은 그렇게 단정 짓게 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이 점에서 문창극 후보자는 일국의 총리를 맡기기엔 역사인식이 치밀하지 못하고, 능력이 모자라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교회 단위의 강연에서도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한 나라의 국사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문창극은 역사학자가 아닐지라도 강연에서 기본적 사실관계마저 틀리게 말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는데, 나는 이 글에서 이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 마저 잘못 말한 곳이 적지 않다면 업무능력을 의심 받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그는 처음엔 교회에서 행한 신앙적인 발언을 속세적 시각에서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온당치 않다고 하면서 자신의 말에 대해 특별히 사과할 것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또 일부 언론이 강연의 전체 맥락과 상관없이 자신의 본의를 왜곡했다며 그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강경하게 맞서기도 했다. 이러한 반응 자체가 국무총리로서 갖춰야 할 상황판단이 미숙하거나 자질이 의심스러움을 말해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과연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대통령이 신임 총리에게 맡기려고 한 것으로 판단되는 사회통합과 관피아 척결 등의 ‘국가개조’라는 대임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을까? 그가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종교적 이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자신이 뱉어낸 언설들은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될 소지가 적지 않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대통령의 현명한 결정이 기다려진다.
 
2014. 6. 24 아침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