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삶의 美醜와 균형감각 : 인간행위의 사회성 측면에서 생각해보기

雲靜, 仰天 2016. 4. 26. 15:22
삶의 美醜와 균형감각 : 인간행위의 사회성 측면에서 생각해보기

서상문(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아름다움과 추함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어떤 양태로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까? 한글과 한자에는 물론, 외국어에도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그에 해당하는 내용을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나타내는 한자 美醜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처럼 한자를 사용하는 곳에는 모두 통용된다. 단지 문화적으로 나라와 민족 마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약간씩 다르게 인식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언어가 다르면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작지 않은 차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통적인 인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꽃이나 노을 등 풍광이 수려한 경치에 대해서는 국적, 성별, 연령, 시대 구분 없이 사람들 거의 모두가 아름답게 느낀다. 반면, 쓰레기가 가득한 공원이나 오물이 넘쳐흐르는 강이나 호수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상대적이다. 진, 선, 정의, 사랑 등과 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이며,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인식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을 기호로 나타내는 수학의 세계에서는 1+1=2가 참이지만, 자연계에서는 진리가 아니듯이 유태인에 대한 정당한 인권적 대우도 극도의 인종적 편견을 지닌 히틀러에게는 전혀 정의가 아니었다.

 

또한 여인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만 봐도 한국, 중국과 일본이 서로 달랐으며, 같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나 당나라 시대에는 얼굴이 조금 통통한 여인이 미인으로 인식됐지만, 그 이전 시대에는 선화공주나 중국의 西施처럼 날씬한 몸매에 호리호리한 여성이 미인으로 취급됐다. 또 옛날 일본에서는 흑발의 긴 머리와 검은 치아의 여인이 미인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가마 안에서도 자신이 미인이라는 것을 과시하듯이 긴 머리를 가마 바깥으로 내놓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 자연과 인위적인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양태나 행위와 관련해서는 어떤 것이 아름답고 추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갈래로 나올 수 있지만, 필자에게는 자신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생각의 유무가 삶의 美醜를 결정짓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생태학자들 중에는 동물도 생각을 한다는 주장이 없지 않지만, 논리적이고 의지적인 사고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사고는 의식이 선행돼 있으며, 그것이 가능하기에 여타 동물과 달리 인간을 고귀한 자태로 존재하게 만든다.

 

인생을 살면서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임을 표증하는 것이며, 대단히 가치로운 일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자주 목도하게 된다. 우리는 매순간 생각을 하되 어떻게 생각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생각하며 살기 중에 균형감각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어쩌면 이것은 초월자가 인간에게 부여한 보석 같은 달란트가 아닐까 싶다. 이것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있어도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으면 생각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오락가락하거나 갈팡질팡 하기도 한다. 이는 생각과 마음의 중심이 상실된 것이라고 봐도 된다.

 

 

인생에서, 특히 나이가 들어 삶이 추해지지 않기 위해선 몸과 마음의 균형을 감지하는 센스의 작동을 점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생각의 중심을 상실한다는 것은 천박한 언행이 시작되는 첫걸음이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은 설익은듯이 어설프게 보이거나 아니면 넘쳐흘러 추해 보인다. 젊어서 균형감각을 잃어버려 나오는 극단적인 언행들은 미친 짓, 즉 광기라고 하고, 나이 들어 나오는 언행은 과욕 혹은 노망이라고 한다. 나이가 적든 많든, 균형감각의 상실이 더 심해지면 정신질환으로 전이될 수도 있다.

 

젊은이들이나 청장년들이 추해보인 경우는 평양을 방문해 민족주의적 감상에 젖어 북한이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더군다나 김일성이 우리민족에 대해 천추에 씻지 못할 역사적 대죄를 지은 사실을 망각하고 그를 “위대하신 수령”으로 받들어 예찬한 경우다. 나이든 이들이 추해보이는 경우는 그저께 느닷없이 보도가 되자 비판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어버이연합의 노인네들이 전국경제인연합회에게서 사전에 일당 2만원씩을 받고 조직적으로 노동법개악에 찬성하는 시위를 벌인 경우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이들의 모임인 '전국경제인연합'이 이런 추잡스런 일을 한다면 대기업을 운영하는 경제인들이 존경을 받기는커녕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진 출처 : JTBC)
점입가경, 목불인견! (사진 출처 : JTBC)

 

재벌 대기업들이 자유롭게 근로자들의 임시직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고 파견형식으로 채용하는 쪽으로 개정하겠다는 것임에도 이를 찬성하는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하루 일당이 2만 원 정도라면 자신들도 젊었을 때 넉넉지 않은 살림을 산 노동자나 근로자였을 것임에도 같은 처지에 있는 후배 근로자들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악법에 손을 들어준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이 없는 추한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는 부인했지만, 어버이연합 측에서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폭로했다. 어버이연합 측의 폭로가 사실이라면 청와대는 애초부터 정당성이 결여된 상태라 계속 무리수가 무리수를 낳게 되는 구조에 놓여 있으니 논외로 치자. 하지만 이 나라의 부와 ‘금수저’들이 집중되어 있으며, 돈으로 최고의 두뇌(도덕성은 별개임)들을 고용하고 있는 전경련이 이런 식으로 천박하게 꼼수를 피우면 떳떳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반드시 후폭풍이 일어날 것임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돈으로 동원한 관제 시위가 들통 날 경우 후폭풍 같은 부작용을 생각해보지 않았을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경련이 생각은 해봤지만 그래도 강행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만족할 줄 모르는 게걸스런 탐욕이 균형감각의 증발을 불러일으킨 게 아닐까? 결국 과욕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인 균형감각의 상실 혹은 작동중지가 빚어낸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노인네들은 관제 어용 데모에 스스로 참여하면서 “애국”도 하고 생계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자위하거나 합리화 할 수 있겠다 싶지만,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직업처럼 빈번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늘그막에 용돈이 궁해지니 유혹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아무리 용돈이 궁해도, 또 설령 생계비가 필요하다고 해도 돈 몇 푼(일당 2만원이면 “몇 푼”이라고 해도 될 것임)에 관제데모에 동원된 것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는가?”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 즉 이성력, 균형감각, 자존감, 부끄러움의 수치와 염치를 상실한 나머지 생각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성의 힘이 욕망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전부 돈 때문이다. 일당이든, 점심값이든 하루 동원돼 시위한 대가로 받는 2만원, 이 돈이 없으면 못 살 정도인가? 이 돈을 주는 전경련 사람들은 이 돈을 모르게 뿌리면서도 이 돈을 받기 위해 자원해서 오는 노인들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애국심에 불타는 노인들"? 아니면 "추한 노인네들"? 시위한 대가로 이 돈을 받는 노인들은 전경련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생각이라도 해볼까? 사진은 어버이연합 시위에 참여한 노인 한 분이 전경련으로부터 2만을 받았다고 화를 내는 모습이다.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이러한 예들에서 직관할 수 있듯이 생각의 힘 혹은 생각의 습관은 균형감각과 밀접하게 연동돼 있다. 그것은 곧 이성의 힘이자 자존감, 수오지심 같은 도덕성과도 연결돼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정의감과도 포개져 있는 정신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이 개인 차원에서는 자신은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는 단체나 조직과 나라를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마치 배의 중심을 잡아주는 키(rudder)와 평형수 역할처럼 생각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균형 감각이 가지런한 생각에 바탕을 둔 언행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균형감각을 상실한 언행은 추하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노인네가 되는 건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곱고 품위 있게 늙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추하게는 늙지 않았으면 한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어디든 달라붙기 보다는 남이 보든, 보지 않든 자존과 분수를 지키는 삶이 아름답다. 말없이 고고한 자태를 지닌 꽃이 되기 어렵다면 최소한 진드기가 득실거리는 잡초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려면 자신에게 내장돼 있는 균형감각을 유지시키거나 그것이 부족하다 싶은 사람은 출항 때마다 배에 평형수를 채우듯이 균형감각이라는 神水를 채워나갈 필요가 있겠다.

 

2016. 4. 21. 11:53

삼각지 일터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