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으로 무시당하고 있는 윤봉길 의사 암장지와 순국비
서상문(고려대학교 연구교수)
1932년 4월 29일, 세계를 놀라게 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上海) 의거’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일왕 탄생일(天長節)을 기념하기 위해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에서 거행된 관병식에 참석한 일본군과 정부의 고관들에게 폭탄을 투척해 침략의 원흉들을 폭살한 그 사건 말이다. 이 의거는 이 사건의 배후 주모자가 백범 김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중국의 최고 지도자 장졔스(蔣介石)가 상하이 소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화민국정부 차원으로 격상시킨 계기가 됐다.
호쾌한 대장부 기질을 타고난 윤 의사의 평화, 애민사상과 사람 됨됨이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또 윤 의사 시신의 발굴과 귀환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하지는 않지만 언론에 보도된 바가 있어 그런 대로 아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래서 간간이 멀리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의 윤 의사 암장지까지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끊이지 않고 있고, 국내 인터넷 상에서도 이곳을 찾아오는 방법과 방문기들도 눈에 띈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예정에 없이 돌연 참배하게 된 윤 의사의 암장지와 관련해 몇 가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실들을 전하기 위해서다. 나는 학술회의 차 일본 군마(群馬) 현에 왔다가 원래 가고자 한 도호쿠 지역 센다이(仙臺)로 가지 않고 가나자와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윤 의사 암장지란 일제가 윤 의사를 총살한 후 화장을 하지 않고 시신을 가나자와시 노다(野田)산 한쪽 구석에 몰래 묻어놓은 곳을 말한다. 가나자와역에서 동남방으로 약 7.3㎞ 떨어져 있는 노다산은 에도(江戶)시대와 메이지(明治)유신을 거쳐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치른 국내외 각종 전쟁에 참전했거나 동원됐다가 사망한 이시카와 출신 전몰자들의 유골 총 3만 2,838명분을 안치해놓은 시립 공동 묘원이다.
옛날 에도시대 이곳 까가(加賀)번의 마에다(前田) 성을 가진 역대 번주들과 그 유력 가신들 그리고 근대 이래 침략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비롯한 이 많은 전몰자들의 묘소들이 높이 약 175m에 총 면적 43만㎡인 노다산 전체(도쿄돔 면적의 약 10배)를 거의 다 뒤덮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윤 의사의 시신을 왜 하필이면 이곳 가나자와에다 암장했을까?
원래 윤 의사를 홍커우 공원 폭탄투척 현장에서 체포한 뒤 오사까(大阪)로 압송해온 일제는 사형판결을 내린 뒤 지체 없이 이곳에서 형을 집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8,000명 이상의 재일 한국인들이 사는 오사까에서 처형할 경우 한국인들이 집단적으로 항거할 것을 우려해 교민이 약 100가구 500명 정도 뿐이었던 이곳 가나자와로 연행해왔다. 이를 주도한 것은 가나자와에 사령부를 두고 일왕의 명령을 받고 이른바 ‘상하이 사변’에 참전한 일본 육군 제9사단이었다. 군 수뇌부가 복수하라는 의미에서 상하이지역 위수 임무중에 윤 의사에게 일격을 당한 제9사단에게 맡긴 것이었다.
제9사단 지휘부는 12월 18일 사단사령부가 있던 가나자와성으로 윤 의사를 데려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 날 노다산 기슭의 미츠코우지산(三小牛山)이라는 곳에 데려가 그곳에서 총살했다. 전두부에 총알이 관통된 윤의사께서 절명한 시각은 아침 7시 27분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이곳 가나자와시에 살면서 ‘윤봉길 의사 암장지 보존회’ 회장을 맡아오고 있는 박현택 선생의 안내를 받아 윤 의사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하룻밤을 지내게 한 가나자와성 내 일본군 제9사단 ‘위수구금소’를 찾아갔더니 그 건물은 공중화장실로 개조돼 사용되고 있었다. 또 윤 의사께서 총살된 사형터도 찾아 갔지만, 현재 육상 자위대의 군사훈련장이어서 출입이 금지돼 있어 아쉽게도 현장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입구에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윤 의사를 일본군이나 러일전쟁 때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 전사자들과 달리 총살 후 화장도 하지 않고 시신을 목관에 넣어 유해가 한국인들에게 ‘탈취’되지 않도록 감시하기 좋은 전몰자묘지관리소 바로 뒤편의 좁은 길바닥에 묻었다. 이 길이 나중에 쓰레기를 버리고 소각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그래놓고는 시신을 장례 처리해서 안장하고 유가족에게 돌려줬다고 신문에 보도하는 등 끝까지 속이고 기만했다.
그들이 몰래 유해를 매장한 윤 의사의 암장지는 광복 후 김구 선생의 지시를 받은 독립운동가들과 재일교포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헌신 끝에 찾아냈다. 1946년 3월 6일의 일이었다. 윤 의사가 내던져진 흔적을 보니 사진으로 볼 때와 달리 흉중에 솟구치는 감회의 질량이 달랐다. 현재 전몰자 묘지, 형무소 묘지, 충혼탑 등을 이시카와 현에서 관리하고 있듯이 당시에도 전몰묘지를 관리하는 관리소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건물은 그대로 있다. 그 관리소 건물 뒷 창문으로 내다보면 비스듬하게 암장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사실로 봐서 일본군은 혹시라도 한국인들이 찾아와 윤 의사의 시신을 가져갈까봐 암장한 윤 의사의 유해를 감시하기 좋은 곳에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그 해에 조국에 귀환된 윤 의사의 유해는 현재 이봉창, 백정기 열사와 함께 서울 효창 공원에 안장돼 있다. 윤 의사의 유해 발굴에 평생을 바친 재일교포 박인조 선생을 위시한 많은 의로운 분들이 일본 당국의 허락 없이 먼저 이 터에 푯말을 세우는 등 보존조치를 취했다. 그들의 집념어린 노력 끝에 암장지는 1992년 9월 가나자와시로부터 영구 무상 임대지로 승인을 받게 됐다. 암장지가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보존되게 된 것은 순전히 이들의 헌신 덕분이다.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는 뜻 깊은 순국비도 조성돼 있다.
하지만 윤 의사에 대한 부정적인 일본의 태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과거 일제는 러일전쟁 때 붙잡은 러시아군 포로들에 대해선 대우가 달랐다. 러일전쟁 뒤 포로교환 시 중상 상태여서 귀국하지 못한 러시아 포로들에 대해서는 치료를 해줬는가 하면 사망 후에도 일일이 납골해서 비까지 세워주고 포로들이 각기 믿던 종교의 문양도 비석에다 새겨줬다.
반면, 윤 의사에 대해선 중국이나 러시아 등의 다른 국가들의 포로들과 비교했을 때 부실한 재판진행은 물론, 총살 후 화장도 하지 않고 시신을 매장하는 등 극심하게 신경질적이고 모멸적으로 악랄하게 대했다. 안중근 의사에게 당한 데에 이어 또 다시 윤 의사에게도 당했으니 욱일승천의 기세를 자랑하던 일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고 분을 삭이기 어려울 만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여전히 일본은 암장지와 순국비 등 관련 선양 활동에 대해서 모른 체 하거나 무시하고, 심지어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윤 의사에 대한 일본의 무시와 불편한 심기를 노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다산 묘원을 소개한 서적들 가운데는 그 많은 묘지에 대해 매 기 마다 자세하게 소개하면서도 윤 의사에 대해서만큼은 그 의미를 언급하지 않은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극우세력들이 중심이 돼 암장지와 순국비를 둘러싼 시비와 훼방을 끊임없이 벌여오고 있다. 그들의 집요한 방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극우세력의 시비와 방해는 그들이 과거 일본의 대외 침략전쟁을 서양세력에 대항해 아시아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식으로 역사왜곡을 자행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들은 가나자와 시내 이시카와 호국신사 안에 ‘대동아전쟁’을 찬양하는 거대한 기념탑을 세우면서 탑 건립 경비 헌납자들을 벽면에 새겼는데, 여기에 재일 한국인 및 중국인 등의 성명을 동의도 받지 않고 적어 넣었을 정도로 패륜적인 성향을 지닌 자들이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과 중국인들도 이 전쟁을 찬양한다는 걸 나타내 보임으로써 일제의 침략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호도하려는 의도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벽면에 새겨진 헌납자 명단에는 재일 중국인(타이완 출신) 학자로서 평소 친일반중적인 주장을 펴온 황원슝(黃文雄) 같은 경우는 자발적으로 헌납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재일 한국인들은 달랐다. 이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고 취소를 요구한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의 대응은 결국 우리의 대일 자세 및 의지와 함수관계에 있다. 강자에게 바싹 엎드리고 약자에게는 군림하는 근성을 지닌 일본인들은 누구든 국가적 차원에서 결연한 자세를 견지하면 상대를 무시하지 않는다. 대응의 해법이 보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지금까지 일본에 부임한 한국 외교관들 중 단 한 사람도 이곳을 참배한 이가 없었다고 하니 실로 아쉽기 짝이 없다.
박인조 선생의 조카로서 오랫동안 암장지를 지키고 관리해오고 있는 박현택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암장지에 윤 의사의 의거에 대한 소개와 함께 자신의 연락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안내 팜플렛을 비치해놓았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연락을 해온 이는 없었고, 필자가 처음이란다. 일본에 부임해온 수많은 외교관들 중 단 한 사람도 이곳을 찾아 참배한 흔적이 없었다는 증언이다.
이는 주일 러시아 대사를 비롯해 러시아 외교관들과 군 계통 인사들이 노다산에 묻혀 있는 10명의 러일전쟁 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러시아군 포로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여러 차례 참배한 것과 크게 비교된다. 묘지 옆엔 지금까지 다녀간 러시아 고위층 인물들의 기념수와 푯말이 즐비해 있다.
어쩌면 우리 외교관들은 윤 의사의 유해가 환국돼 빈터뿐인 암장지까지 굳이 찾아가 참배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또 개인적으로 참배한 외교관이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외교관들이 윤 의사의 암장지를 참배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건 성급한 일이다. 하지만 일본이 과거의 침략사를 인정하지 않는데다 독도마저 자기네 영토라고 전국민에게 교육하고 있는 상황에서 끝나지 않은 또 다른 대일 전쟁인 ‘역사전쟁’을 겪고 있는 만큼, 대한민국 정부의 존재와 민족의식이 살아 있음을 알리기 위해선 공적 차원에서 대일 저항의 상징인 이 같은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 관련 참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향을 살라 윤봉길 의사의 넋을 기리고 숭고한 정신을 되새긴 후 암장지를 뒤로 하는 나의 마음 한 구석에선 숙연함과 부끄러움이 교차됨과 동시에 슬그머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과연 우리의 민족의식이 이 정도란 말인가?”, “일본 극우파들은 또 이를 두고 내심 우리를 ‘역시 어쩔 수 없는 민족’이라고 할 게 아닐까?” 평소 우리의 자세가 이렇다면 정말로 일본 극우파가 우리를 업신 여길만하지 않는가?
2017. 9. 1. 17:12
일본 가나자와시 노다산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를 뒤로 하면서
雲靜
위 글은『백범회보』, 제57호(2018년 4월 25일)에 게재된 것입니다. 백범회보에 실린 글에는 사진의 위치가 재배열돼 있고 문장이 약간 수정된 곳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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