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떠나보내지 못하는 친구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30여 년 전 가랑비 추적추적 내리는 늦가을의 어느 날 오후, 젊은 두 사내가 포항 남빈동 선창가 뒷골목의 한적한 선술집에서 대폿잔을 기울였다. 한 친구가 앞에 앉은 다른 친구에게 그윽한 눈빛으로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둘은 서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한 친구는 술을 잘 마셨지만, 다른 한 친구는 술을 즐기지 않았기에 잔만 받아 보조를 맞췄다.
주기가 거하게 돌면 “인생이 어떻고, 저떻고”가 ‘싯가’ 요리 보다 더 맛있는 안주였다. 고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비오는 양산도’ 가락으로 실내는 벌써 사람들 보다 더 취했다. 그 시절,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 그냥 만나기만 해도 좋았다. 이것이 스무 살 ‘머스마’들의 우정이었다.
그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다니던 학교에서 같은 도시의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서 만난 친구였다. 그는 마음이 천심이었다. 키도 훤칠했다. 우리는 둘 다 학교를 대표하는 육상선수였다. 그는 100미터를 11초대에 달렸던 발 빠른 친구였다. 같은 100미터지만 12초 초반 대에 머물렀던 나의 주 종목은 중장거리였다.
우리는 시민체전 육상시합에 나가 고등부 부문을 휩쓸다시피 했다. 계주종목에서는 고등부에서 우승한 뒤 일반부에 〇〇동 대표로 출전해서도 3등으로 입상했을 정도였다. 둘은 방과 후 늘 운동을 같이 했기 때문에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빨리 가까워진 사이였다.
내가 취기가 돌아 잠깐 측간에 간 사이 한 통의 편지를 탁자 위에 놓고 가을 어스름이 내리는 적막한 선창가를 기약 없이 훠이훠이 떠났다. 이것이 첫 번째 이별이었다. 측간을 다녀온 내가 편지를 열어보고는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가 친구를 찾으려 했지만 그가 종적을 감춘 뒤였다. 전화가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프리카 북안의 나라 리비아에 노무자로 일하러 갔다가 몇 년 뒤엔 돌아오리라는 건 알았지만 직접 “무사히 잘 갔다 오라”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보낸 게 평생 가슴에 남았다. 결국 그 친구는 아프리카 사막에서 열사의 풍토병을 얻어 조기 귀국했지만 그 뒤론 돌연사로 세상을 뜰 때까지 간질병을 안고 살았다. 이것이 그가 떠오를 때마다 되살아나는 회한이다.
이러구러 세월이 흘렀다. 풍토병을 안고 살던 친구가 서른이 넘어 단돈 50만 원을 달랑 들고 해외로 늦깎기 유학을 떠나는 내게 헌걸찬 웃음으로 말했다. “니가 고생하고 있을 동안 난도 고생해서 돈 쫌 벌어 놓을테니 공부 마이 하고 건강하게 살아만 돌아 오나라.” “사람 사는 맛 나게로 같이 뭐 쫌 해보자.” 이것이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새벽이슬만큼 정갈한 친구의 배려였다.
세월이 또 지나 서른 하고도 아홉 살, 남자 인생에서 절정의 나이에 그 친구는 뇌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 현대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유학중인 외국에서 한 걸음에 달려왔다. 그러나 입원한 그 친구를 위해 실제로 내가 딱히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오로지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용기를 북돋우고 그에게 위안의 말을 건네는 게 전부였다.
나는 위로의 말을 남기고 병상의 친구를 뒤로 한 채 내키진 않았지만 가야 했던 알바여행에 나섰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 숨 자고나면 수술이 잘 돼 있을 꺼야!” 알바를 하지 않으면 유학중의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던 탓에 병상에 친구를 두고도 무정하게 중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평소에 손목시계 같은 건 차는 습관이 돼 있지 않았다. 여러 개가 있어도 집에 두고 차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무슨 연유였는지 친구 병문안을 가기 위해 포항에서 올라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좌판에 널브러진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만 원짜리 하나를 골라잡아 샀는데 그걸 깜박 잊고 친구의 병상 머리맡에 두고 온 게 아닌가?
그리고 수술실로 들어간 친구는 그길로 먼 길을 떠났다. 그 길은 중국 보다 더 먼,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아득히 먼 황천길이었다. 사망원인은 뇌출혈이었다. 간질병 약을 장기간 복용한 탓에 약해진 뇌신경이 수술 도중에 끊어졌다고 한다. 결국 그의 병상 머리맡에 놓고 온 그 시계는 친구가 먼 길 갈 때 차고 가라고 준 이정표였던 셈이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비보를 접한 나는 곧장 고향으로 내려갔지만 장례가 끝난 뒤였다. 한 마디 육성도 듣지 못하고 그를 보내게 되니 통한은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미어 왔다. 여행을 떠나면서 나는 온 마음으로 수술이 잘 되기를 간구했지만, 그의 운명은 그 지점에서 딱 멈춰 섰던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이별이었다. 두 번째 이별은 이승에선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49재 마지막 날, 그의 체취가 배어있는 옷가지와 물건들이 불길 속에서 재로 사라지고 있었다. 사찰 경내 뒤편 공터에 마련된 친구와의 마지막 고별식에서였다. 목탁소리와 함께 퍼지는 스님의 낭랑한 독경소리는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였다. 친구의 모든 것이 덧없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가운데 이승에 남겨진 그 친구의 약혼녀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한 없이 오열했다. 그녀는 간호사였다. 두 사람은 늦게 만나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친구는 심성이 고와서 자신이 앓고 있는 간질병 때문에 배우자에게 부담을 줄 것을 염려해 그때까지 맞선도 사양하고 혼자 살아오던 터였다. “요즘은 의술이 많이 발달해 간질병은 수술만 하면 바로 완치 된답니다”라고 하면서 친구에게 수술을 권한 건 그녀였다. 친구가 수술대에 올랐던 건 이 말에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간간이 나오는 나지막한 신음 소리와 함께 어깨가 들썩이는 그녀의 울음은 떠난 이에 대한 미련이 아니라 숫제 한스런 절규였다. 내게는 그녀의 울음이 수술을 권한 자기 때문에 수술 후면 낭군이 될 그 친구가 죽었다고 자책하는 울음으로 들렸다. 그 울음은 기구하게 두 사람을 이승에서 맺지 못하도록 운명을 결정지은 신에 대한 저주로 들렸다. 짜작~짜작~ 타오르는 불길만 따가운 초가을 햇볕과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친구가 비명에 떠난 후 이러구러 꼭 10년이 흘러 나는 먼저 간 그 친구가 못한 결혼을 했다. 혼례에 즈음해 웃음 짓는 그의 얼굴이 자주 떠올랐다. 그 약혼녀는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하는 생각도 설핏 스쳐갔다. 친구의 살아생전 체취와 흔적이 깡그리 재로 사그라지던 그 가을날 오후 오열하던 그녀의 모습이 잊어지지 않았다.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고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결혼해서 사람 사는 맛이라도 봤어야 했던 게 아닌가?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떠난 친구를 생각하면 지금도 애석한 마음이 든다. “친구야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 보다 이승이 낫다잖아!” 미안함과 함께 찾아드는 그리움이었다. 남모르게 우는, 사나이 가슴을 적시는 피울음 섞인 그리움이었다.
결혼 후 세월은 또 무심하게 흘렀다. 어느덧 이순(耳順)을 앞둔 나이지만 지금도 먼저 간 친구의 잔잔하지만 애잔한 미소가 하늘 저편에 뭉게구름처럼 떠오른다.
옛적 젊은 시절 그 친구와 영일만에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을 보고 “우리 나중에 이 영일만을 벗어나 더 넓은 태평양으로 나가보자”며 호연지기를 쓰다듬던 일들을 포함해 온갖 장면들이 빛바랜 흑백 영화처럼 되살아난다. 이는 내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보석처럼 빛나는 영롱한 추억이다. 추억이자 동시에 인간으로 태어나 하고 많은 인연 중에 1959년에, 영일만에서 태어나 또 다른 동갑나기 친구를 만나 짧지만 멋지게,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다간 내 친구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이다.
이승에 남은 나는 지금도 바로 옆에 그 친구가 있는 듯이 묻는다. “친구야 잘 있지를? 홀아비 둘이서 자주 한 방에서 뒹굴며 웃고 떠들고 지냈던 너그 아파트 화단에 니카 내카 좋아 했던 접시꽃이 활짝 피었더라! 8월 하늘이 새파랗구나 친구야!”
오늘도 나는 먼저 간 친구의 고혼(孤魂)을 어루만지며 폐부를 도려내는 이미자의 ‘비오는 양산도’를 듣는다. 한 나절을 그렇게 반복해서 듣는다.
2014. 8
雲靜
https://m.youtube.com/watch?v=KV1xiAseNk8
https://www.soundhound.com/?t=10013655174337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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