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아시아사

중국 읽기 1 : 지속과 변용, 모노크롬과 시네마스코프 세계의 혼재

雲靜, 仰天 2015. 7. 18. 10:41

중국 읽기 1 : 지속과 변용, 모노크롬과 시네마스코프 세계의 혼재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중국이 화두가 된지 오래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중국을 주목하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구촌은 이제 냉전 시기 처럼 서방이 마음대로 중국을 봉쇄하거나 배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중국을 잘 활용하면 득이 되고, 잘 활용하지 못하면 해가 될 수도 있는 구도가 된 것이다.
 
내가 중국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던 1990년만 해도 한국의 전체 해외수출액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0.9%에 불과했다. 물론 한중수교 전의 일이다. 그 뒤에도 경제적으로 두 자리 수의 고속성장을 지속한 결과 중국은 2001년 11월 WTO에 가입했다. 이어서 그 이듬해인 2002년에는 경제성장률이 12.1%로 급증하더니 일본을 제치고 미국 다음으로 우리에게 두 번째 큰 수출시장으로 부상했다. 
 

당시 나는 “이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향후 몇 년 안에 중국은 미국마저 추월해 우리 한국에게 첫 번째로 큰 수출시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이 글에서 그렇게 주장한 것인데, 이 글은 당시 ‘중국읽기’라는 제목으로 2003년의 어느 봄날에 써놓고 10년이 넘게 묵혀둔 것이다.

 
단언은 적중했다. 중국이 우리의 최대 무역교역국이 된 데에 이어 급기야 일본을 따돌리고 미국과 함께 G2로 자리를 잡았다. 전체 경제규모로는 이미 미국을 앞질러 올해는 GDP가 11조2,119억 달러였다. 경제대국에 걸맞게 군사적으로도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이 의구심을 가질 만큼 날로 강대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중국을 배제하고는 세계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정도가 됐다. 지역 차원의 문제든, 세계 차원의 문제든, 중국과 협력을 하지 않으면 해결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게 현실이다.
 
 

짧은 기간에 숙적으로 생각한 일본을 제치고 G2로까지 급부상한 중국 경제성장의 상징 상해의 마천루

 
이러한 성과는 1978년에 개시된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이뤄진 것이다. 가히 桑田碧海, 刮目相對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양적 변화도 변화이지만, 체질적으로도 적지 않게 변화했다. 이러한 중국은 어떤 나라인가? 또 중국인들은 어떤 사회에 살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일까?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런 중국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중국은 세계정세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정치, 외교, 군사적 측면에서도 그럴 수 있다. 중국이 아직도 유효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의 당사자(미국, 중국, 북한인데, 한국은 제외)이며, 북한과는 아직도 동맹관계(1961년 7월 11일 북중 '우호, 협조 및 상호원조에 관한 조약' 조인)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남북통일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는 그들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에 대한 이해에 그칠 게 아니라 '用中'이 필수적인 조건이 된 이상, 중국전문가라면 이 물음에 답할 학문적 의무가 있다. 그래서 중국의 특징(지속과 변용, 다양성과 복합성 등)에 대해 알아보고, 이어서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된 이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다. 하지만 이 글은 치밀하게 학문적 논의를 담은 답변은 아니고 중국을 개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볍게 터치한 중수필에 가까운 것이다.
 
중국은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중국학 학자들이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문화, 예술, 언어, 문학, 역사, 철학, 사상 등 각 분야에 걸쳐 연구해오고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국가의 존재 양태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간의 무게와 공간의 너비가 변증법적으로 빚어낸 현 중국대륙은 여러 면에서 지속과 변용의 이중주다. 그것은 마치 선행 마디의 자양분으로 다음 마디가 생성되는 한 그루의 대나무와 같다. 앞마디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마디를 만들지만 존재의 원형질을 앞마디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자신의 키를 높이면 높일수록 윗마디가 가늘어지는 실제 자연의 대나무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마디의 체적이 밑동보다 더욱 넓어지는 나선형식의 ‘변종’ 대나무다. 이런 양식으로 국가가 반 만년 이상 면연해온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속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중국만큼 연속성이 장구한 문화를 가진 나라도 세계문명사에서 찾아보기 드물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에 살아 남은 것은 인도와 중국 뿐인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중국의 수 많은 朝代 가운데 우리가 특히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현대 중국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전통시대의 자족과 자기완결형으로 장구한 세월을 보낸 연속성이 가져다 준 역사의 업보로 이뤄졌다. 그 유산은 황폐해진 국토와 가난과 '영양실조 상태의 비만'이었다. 
 
지금의 중국은 체적이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져, 작은 몸집의 정부를 지향하는 구미의 현대형 국가의 지향과 달리 운신하기에 이만 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모습은 흡사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에 나타나는 우는 소녀의 얼굴상이다. 어떤 모습이 본 얼굴인지 여간해서 포착하기 어렵다. 보는 각도에 따라 비만이 건장하게 보이지만, 다른 한편에선 부실하게 보이는 영양 상태는 허우대만 그럴싸한 지진아 같아 보이기도 한다.
 
벌어진 어깨와 건장함은 유지하되 비만과 몸무게를 줄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영양 공급은 멈추지 않되 ‘군살’은 빼야 하는 이런 아이러니는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중국인 가운데서도 누구는 웃지만, 다른 누구는 울기도 한다. 또 때로는 침울한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분노의 모습으로도 비쳐진다. 그 만큼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다양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중국은 ‘땅이 크고 인구가 많다.’ 그리고 식물이든, 동물이든, 혹은 광물이든 그 어떤 것 하나라도 나지 않는 게 없다 보니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地大物博人多'라는 단어가 그런 뜻을 나타내는 말인데,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수식한다. 이 세 가지 사실만큼 중국을 직관적으로 표상하는 테제도 없다. 여기에 중국의 모든 이미지와 의미 그리고 모순과 역설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중국의 면적은 약 960만㎢로서 한반도 땅 넓이의 43배가 넘는다. 러시아를 뺀 유럽 전역과 엇비슷하다. 러시아, 캐나다, 미국에 이어 지구에서 4번째로 큰 나라다. 남북으로는 한대에서 아열대지역에 이르기까지 뻗쳐 있고, 동서로는 극동에서 서남아 어귀까지 길게 펼쳐진다. 국토가 이렇게 넓은데도 미국과 달리 시간은 북경을 표준으로 삼은 표준시 하나만 사용된다. 서부 변방지역들이 중국에서 독립해 떨어져 나갈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정치적 장치다.
 
인구도 단일 국가로는 단연 세계 최다의 인구 대국이다. 2014년을 기준으로 약 13억5,600만 명에 이른다. 중국이 대국인 까닭은 무엇 보다 광활한 국토와 거대 인구에서 기인한다. 국가적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동시에 하루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발생하는 각종 사고와 문제들은 일단 여기서 파생된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이 살다’보니 중원 천지에는 ‘벼라 별’ 사람들이 다 있다. 우선 여러 민족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복합민족국가임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이 가운데 전체 인구의 90% 이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한족(漢族)계 중국인들이다. 한족 이외에 아랍과 유태인 계통의 중국인이 있는가 하면, 티베트족, 위구르족, 몽골족, 만주족, 조선족, 이족(彛族), 락파족(珞巴族) 등등 64개나 되는―중국당국은 대만의 9개 소수민족을 하나의 단위로 쳐서 56개라고 하나 사실은 각기 언어와 전통 및 유습이 다른 대만의 소수민족들은 9개 종족으로 분류해야 마땅하다―다양한 소수민족도 거주하고 있다. 대만의 소수민족이 9개라는 것은 1980~90년대 얘기이고 지금은 소수민족이 16개로 공식화 돼 있다.
 
단순히 인구만 많은 게 아니라 각 종족의 언어와 습속이 존중되고 문화적 다양성과 독자성이 인정되는 다민족, 다문화 국가이기도 하다. 한족은 주로 동북, 북경, 황하강, 산동, 양자강하류와 내륙, 동중국해 연안과 광동의 주강델타에 이르는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그 이외 지역에는 한족과 다양한 소수민족이 혼거하고 있다. 물론 광서성, 영하 등 국가의 보호를 받는 소수민족만의 거주지도 있다.
 
서남부 오지의 雲南省, 貴州省과 廣西省의 소수민족들의 문화적 양태는 중국(漢族)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태국이나 미얀마와 베트남 같은 남방문화에 더 가깝고, 위구르 자치주의 여러 소수민족들의 문화는 한자문화권보다 중앙아시아문화 혹은 러시아문화를 느끼게 한다.
 
중국의 유태인이라고 불리면서 복건, 대만, 광동, 사천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산거하고 있는 客家人(Hakka)도 혈통적으로는 한족―객가인은 소수민족이 아니라 한족이다―이지만 언어도 다르고, 문화와 생활양식도 주류 한족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억척스럽고 생활력이 강한 객가인은 황하강 유역 일대의 중원 지역에서 여러 난들을 피해 대략 3~4세기 때부터 집단적으로, 지속적으로 남하해온 종족이다. 중국사에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객가인은 오랜 기간 난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들어가 살다보니 기존 지역민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객가인'이라는 명칭도 그렇게 해서 붙게 된 것이다.
 

타종족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용맹스럽지 않을 수 없던 역사가 반영된 탓인지 객가인은 상무정신이 뛰어나고, 군사 계통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많이 많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鄧小平, 李登輝 전 대만 총통이 객가족임은 물론이고, 鄧小平 시대 중국군부의 실세로 군림한 바 있는 楊尙昆, 楊白氷 형제,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李光耀 전 싱가폴 총통, 중화권의 유명한 불교 지도자인 대만의 性雲 대사 등도 모두 객가인이다. 이외에도 유명 인물들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객가인이다.

 
우리 동포인 중국 내 조선족도 한국어와 한글을 그대로 사용하고, 한국인의 풍속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편이어서 중국적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약 170만 명 정도가 되는 조선족은 다른 소수 민족에 비하면 중국의 주류인 한족 문화와 가장 유사한 편이다.
 
이렇듯 같은 중국이지만 내적으로는 문화적 분포가 워낙 다양하다. 이방인의 눈으로는 그게 그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들 사이엔 문화인류학적 개념으론 상호 이질적인 경계가 확연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모두 중국이라는 동질성에 포박돼 주류인 한족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중국인'일 뿐이다.
 
세계 최고의 역사를 지닌 이 나라를 이해하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중국이 전근대적 습속과 21세기의 첨단문명이 동시에 혼재해 있을 만큼 복잡다기한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형태로 치면 구상과 추상이 동시에 존재하고, 색조로 비유하면 모노크롬과 시네마스코프의 세계가 같이 펼쳐지고 있는 곳이다. 단적인 예로 혼인제도를 보면, 서구식 혼례가 대세이긴 하지만, 소수민족 가운데는 21세기인 아직도 일부다처제가 남아 있는 곳도 있고 일처다부제가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또 형제 중 하나가 사망하면 그의 처는 나머지 살아있는 형제에게 재가하는 ‘兄死娶嫂制’(혹은 ‘兄弟逆緣婚’이라고도 함, levirate)와 같은 유습(‘轉房制’)도 남아있다.
 
 

중국의 형사취수제는 고대 부계사회 초기 주로 흉노족, 거란족 등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있던 일종의 결혼제도였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습으로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인터넷 망이 전국에 빠른 속도로 깔리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이념과 상치되는 모순의 하나로서 빈곤층이 득실대는 곳도 중국이지만,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단 한 푼도 벌지 않고 이미 벌어 놓은 돈만 써도 수 세대가 살 수 있을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의 부자가 수두룩한 게 중국이라는 나라다. 그런 부자들은 대략 8,000만 명이나 된다.
 
중국인들의 가치와 사상과 신념체계도 시대변천에 따라 다양할 것임은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불교, 도교, 기독교 등의 종교에서부터 유교를 포함한 제자백가가 공존했음은 물론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신디칼리즘, 공상적 유토피아주의 등등을 포함), 무정부주의 등의 온갖 사조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각기 사상적 패권경쟁을 벌인 적이 있다. 이는 이른바 중국사상사에서 사상적, 문화적 최고 융성기라고 일컬어지는 1910년대~20년대의 일이다. 깊이 들어가지 말고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의 당대만 살짝 들여다봐도 마찬가지다.
 
알다시피 건국 후 20여년은 毛澤東의 천하였다. 왕조시대처럼 毛澤東의 왕국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정치도, 사상도, 경제도, 국제관계도, 문화도 그리고 군대와 인민들도 모두 그의 권위 하에, 그의 이름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울고, 꽃이 피면 지듯이 권력이란 영원할 순 없다. ‘花無十日紅’이 아니든가? 기실 毛澤東의 사상과 꿈은 자기 당대에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부터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유토피아를 이루기는커녕 오히려 인민들을 질곡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프롤레탈리아 문화대혁명’은 毛澤東이 예상한 거와 달리 나라가 거덜날 지경에 이르게 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형태와 내용을 달리해 건국의 이념을 실현시키려는 도전자가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법! 건국 보다 어쩌면 치국이 더 지난한 일일 수 있다. 치국의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한 이가 바로 鄧小平이다.
 
毛澤東이 말 위에서 구름 잡듯이 나라를 통치하려고 했다면, 鄧小平은 말에서 내려와 현실의 대지 위에 굳건히 발을 딛고 實事求是的으로 통치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실현이라는 본질과 목적은 바꾸지 않되 수단과 방법을 달리해 인민들을 이른바 ‘大同세계’로 데려가려는 게 그의 구상이었다. 이름 하여 ‘중국적 사회주의’(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가 그의 수단이자 지향이었다. "중국적 사회주의"는 毛澤東이 한 번에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본 당시 중국사회 현실에 대한 반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대안의 하나로 사회주의 초급단계를 설정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 사상에 토대를 둔 개혁개방의 명분으로 관료주의를 척결하고 사람들에게 경쟁의식을 불러 일으키면서 그간 굳게 잠긴 빗장을 서방세계를 향해 열어젖혔다. 그렇게 추진된 외과적 수술 및 처방과 함께 孔子를 위시한 고전이 '부활'하고 옛날 얘기가 다시금 등장했다. 關雲將과 武訓이 ‘부활’한지 오래며, 岳飛는 여전히 岳飛다. 아니 그들은 죽지 않고 긴 세월 동안 잠복해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들은 결코 죽을 수 없다. 여전히 중화민족의 후예들로부터 인간 이상의 신적 존재로 숭앙 받고 있다.
 
자신이 희구한 공산주의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 毛澤東이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는데 발단이 된 明代의 모범적인 관료 海瑞 역시 살아 있다. 기존 가치체계와 권위의 탈각을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자본주의가 최고로 발달한 나라에서만 활동할 일이지 후진국에는 강림할 필요가 없다고 한 마르크스도 뜻밖에 당시 후진적 농업국이었던 중국에 출현했다.
 
마르크스가 공산혁명은 노동자들이 주가 돼 기존 자본가계급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국가권력을 장악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산업이 발달한 서구의 선진 공업국가들에서 일어날 것으로 보고, 보수적이고 무지몽매한 농민계급이 주가 되는 농업국가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으면서도 말이다.
 
자신의 예지와 별개로 중국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거의 업혀 오다시피 한 마르크스는 이념적 동지 毛澤東과 만나 사상의 패권을 이뤄 중국에서 사상적으로 유일무이한 패권적 이념이 됐다. 레닌도 따라 붙었다.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毛澤東사상'이다. 이 사상은 전통중국의 가부장적 권위를 업은 ‘꼰대’의 모습으로 나투었다. 그 후로 孔子 ‘할배’와 같은 사상가들은 말할 바 없고, 관운장과 張飛 ‘아재비’들도 깡그리 종적을 감춘 한 때가 있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毛澤東사상'은 모든 종류의 사상들을 먹어치운 블랙홀이었던 셈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묵시론적으로 언명한 바에 따라 운명적으로 공생이 불가능했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허깨비’들이 치열하게 이념 및 권력쟁탈을 벌였던 그 시기, 그 넓은 중국천지는 카오스를 방불케 했다. 카오스의 주역은 毛澤東의 권위를 등에 업고 권력을 농단한 '四人幇'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행동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채 영글지 못한 10대~20대 초반에 불과한 소위 ‘홍위병’들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모든 역사와 권위를 부정하고 사회를 갈아엎고 나라를 거덜냈다.
 
홍위병은 毛澤東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이라는 ‘불장난’의 불쏘시개에 불과했다. 毛澤東의 지시에 따라, 혹은 스스로 자발적인 광기를 발산한 홍위병들에게 제거해야 할 타켓트가 된 것은 사상적으로는 유교와 자본주의였다. 정치적으로는 劉少奇, 鄧小平 등의 일파들 그리고 미국과 ‘사회제국주의’의 소련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공산주의의 꿈은 실현되지 못한 채 하나의 실험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투쟁의 본질은 농민의 희생으로 공업국을 세워 생산력에서 영국과 미국을 따라잡고자 한 毛澤東과 대약진과 공업화 등 기존 毛澤東이 밀어부친 급진정책의 완급을 조절하고 숨을 고르려고 한 劉少奇, 鄧小平 사이의 노선투쟁이었다. 당시 마오가 공업화(특히 중공업의 철강생산 독려)를 채근하고 몰아 부친 이유는 영국과 미국의 생산력을 앞질러야 공산주의사회로 이행시킬 수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산업 생산력이 최고로 발달하고 그에 따라 노동자의 인구수가 사회의 주도적인 다수가 돼야만 비로소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毛澤東은 劉少奇, 鄧小平을 중국의 사회경제체제를 자본주의로 되돌리려고 한다는 이른바 ‘走資派’로 매도했지만 그것은 정적 제거를 위한 악의적인 네이밍과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동시에 봉건주의라는 구악을 청산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구악으로 지목된 유교의 가르침과 덕목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긴 하지만 공리적이며 또한 퇴행적일 만큼 너무나 수구적인 정치이념이라는 이유에서 타도돼야 할 역사의 퇴물로 규정돼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시달렸다.
 
그런데 이제 유교적 가치는 마치 중국인의 원형질이나 되는 것처럼 다시금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중국공산당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공자사상을 가장 중국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로서 국가 브랜드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중국정부는 유교문화를 배척하고 학대하다보니 남아 있는 게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학자들과 관리들을 한국에 여러 차례 보내 우리가 간직해오고 있는 공자제사 등 유교문화의 실제를 많이 배워 갔다. 과거 차문화에 관한 기록도 많고 성행했지만 공산중국에선 자취를 감췄던 다도도 마찬가지로 한국에 와서 재빠르게 벤치마킹 해가서 "중국 다예"라는 격식을 만들어냈다.
 
그런 국가적 노력을 거친 결과 장구한 역사 속에서 내면적으로 중국인의 품성과 행위를 규율해왔던 孔子의 가르침은 체제와 이념이 바뀌어도 변함없는 금과옥조가 됐다. 예의와 체면이 뭐가 중요하냐며 공자사상을 비웃는 중국인들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다. 한 때 중국공산당에게 봉건적 잔재로 배척되고 핍박당한 바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가장 중국적이자 중국다운 가치로 받들어지고 있다. 이제는 세계 주요 국가들에 공자학원을 세워 일단계로 문화적 침투를 하기 시작했다. 이는 물론 경제적 침략의 첨병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 다음 단계는 특정 국가를 친중파 인물들을 많이 만들어 친중국가로 바꾸고, 마지막 최종단계는 1950~70년대 마오이즘을 세계 각지에 수출했듯이 사회주의 이념을 수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적어도 명분상으론 널리 체세포화된 ‘마르크스주의’가 소멸된 건 아니다. 마르크스는 고향을 떠나 이국에서 ‘馬克思’로 개명한 후 새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의 고향인 유럽에선 잊혀진지 오래지만 중국에선 장수까지 하고 있다. 孔子 ‘할배’들의 잔소리를 대신하면서 시절 인연이 닿아 중국에 들어온 이상 들어올 때와 같은 온전한 제 모습으로 행세하지 못할지라도, 그래도 그는 제법 장수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毛澤東의 손을 거쳐 본래의 모습은 거의 다 사라지고 중국화 된 마르크스주의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처럼 다른 사회체제, 다른 이상을 지향하는 孔子와 마르크스라는 두 사상이 비중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상호 공존이 가능한 것이 중국의 존재방식이다. 건국 이래 줄곧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타도의 대상으로서 적대감을 드러냈지만 지금은 이것이 타도되면 중국은 무너질 정도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중국을 학문적으로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 점이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졌었다. 문명의 수용 및 거부 형태를 두고 한 동안 나는 중국이 ‘제 것’만 고수하면서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이른바 ‘젤로트’(Zelote)식 태도가 강한 나라라고 인식했었다. 이 태도에는 두말 할 나위 없이 타민족에 대한 민족적, 문화적 우월감과 이에 상응하는 ‘중화의식’ 혹은 ‘중화사상’이 지닌 견고한 배타성이 내포돼 있다.
 
하지만 중국은 ‘남의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되고 삶이 윤택해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헤로데’(Herodes)식 성격도 농후하다.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유년시절부터 기억에 남아 있는 ‘짱께집’과 ‘짱꼴라’들에게서 받은 굴절된 ‘중국인 모습’의 차원을 넘어 과거가 온축된 기록과 사료들을 통한 담론차원의 ‘중국’을 접하고 나서부터였다.

지금까지 중국에 대해 개략적으로 스케치한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처럼 귀납된다. 그 어떤 사상이나 이념, 제도도 일단 중국에 들어오면 중국의 실정에 맞게 변화된다. 인도문화권의 정신적 산물인 불교도 중국에 들어와서는 중국화 된 불교(格義불교, 禪불교)가 돼버렸다. 서양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인 마르크스사상 및 그 주의도 중국화 된 마르크스사상과 주의가 돼 버렸다. 천주교도 마찬가지다. 바티칸의 지원을 받지도 않고, 연계도 단절된 채 그와 별개로 중국정부의 지배를 받는 중국적 천주교가 됐다.

이렇게 모든 걸 중국화시키는 변용의 능력이 거대한 영토, 인구와 결합될 때 국가적 수준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근한 예로 마르크스사상이 중국의 광대한 노동력과 결합된 게 오늘날 ‘중국적 사회주의’의 본질이 아닌가? 한시적일 수 있는 것이지만 일단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비결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자신과 내부의 장점을 온존, 발전시켜가는 한편, 타인과 외부의 장점까지 받아들여 자기화 시키는 능력 말이다.
 
중국적인 것과 비중국적인 것 사이에 이율배반적으로 존재하는, 일견 모순적이고 충돌적인 두 성격을 중국학 연구에 어떤 성분비로 적용할 것인가는 작은 고심거리였던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들은 나를 중국이 오히려 단정적 실체가 없는 듯한 추상세계의 실재를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그렇다고 중국이 실체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내가 처음 중국 공부에 착수했을 때, 明淸代 같은 전통시대 보다 중국의 현대는 참으로 파지하기 힘든 모습으로 저만치 멀리 서 있었다. 서양인들이 중국을 불가사의하고 동양의 신비로움이 살아 숨 쉬는 ‘老大國’으로 묘사하는 修辭가 어떤 느낌인지 어슴프레 하게 감이 잡힌 지가 불과 십여 년 전의 일이다. 한편, 중국인들은 여타 우리와 같은 동양인들에게 서양인 뺨치는 개인주의 의식과 행동양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내가 중국을 머리뒤통수에 붙은 입 그리고 볼에 그려진 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피카소의 입체파작품에 비유하는 이유가 이러한 다양성과 복합적 혼재성 때문이다. 피카소가 즐겨 사용한 화법, 즉 모든 사물을 점, 선, 면이라는 조형요소로 해체한 뒤 하나의 공간에서 복수의 시점과 시점을 상하좌우로 이동시켜 재구성함으로써 재현되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중국 읽기’에 단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용감해 보이는 것도, 또 그런 이유로 그런 만용이 용인돼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카소의 작품 '우는 여인'(캔바스에 유채), 1937년 작

 
한 마디로, 지구상 200개 가까운 나라들 가운데 중국과 중국인처럼 그 실체와 속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국가도 드물다. 중국의 발전을 두고 상반된 시각과 평가들(‘중국낙관론’과 ‘중국비관론’, ‘중국위협론’과 ‘중국기회론’ 등―이에 관해서는 다른 지면에서 소개할 것임)이 존재하는 배경이기도 한다.
 
세계 중국학계에서는 중국이라는 동일한 하나의 현실을 보면서도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다르게 나타난다. 두 가지 평가 중에 하나는 진실이며, 다른 하나는 가공의 거짓일까?  왜 이처럼 상반된 평가와 두 모습의 ‘현실’이 상충하면서 존재한다고 주장할까?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중국이 처한 현실이다.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천의 얼굴을 가진 중국의 다양성을 전제할 수도 있다. 비유컨대 맹인 코끼리 만지기인 것이다. 맹인들이 제각기 손으로 코끼리를 더듬어 보면 만진 부위에 따라 형상이 다르게 느낀다. 다리면 다리, 코면 코, 몸통이면 몸통 등 자신이 만져본 부위 형태가 곧 코끼리라고 단정 짓는 거와 같다. 자기가 본 것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단정하는 자세다.
 
학자라면 극히 경계해야 할 일임에도 이런 현상이 각각의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현실에서는 상반된 모습이 용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차피 중국이라는 나라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으며,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외에, 아니 이와 관련이 깊은 또 다른 이유가 없지 않다. 모든 사회과학적인 통계와 자료는 물론, 심지어는 역사적인 사실까지도 조작 혹은 변질시켜버리는 중국 정부의 전횡이 문제인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사료들 가운데 최고 지도자의 권위나 국격을 훼손하거나 국익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싶은 것들에 대해선 쉽게 공개하지 않는다. 공개해야 할 경우에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만을 취사선택하거나 교묘하게 첨삭가감을 가한 뒤에 내놓는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상호 대비되는 두 가지 결론을 도출케 한 것은 일차적으로 현 중국의 국가권력에 책임이 있다. 다음으로 진면목에 대한 진위와 옥석을 가려내지 못한 관찰자의 시각적 한계에도 문제가 있다. 다양성과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중국을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관성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중국이 현란스레 보여주고 있는 수많은 다양성과 모순성에 대한 직관적인 분별력 그리고 중국 측에서 합목적적으로 변질시켜버린 자료의 내밀한 의도와 동기까지 들춰낼 수 있는 훈련된 눈을 기르는 일이다.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지속성을 파악하고, 중국현대사에서 변용성을 찾아낼 혜안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가 종합되는 지점에 오늘날 당대 중국의 근사치가 있다. 현재의 중국은 이전 시대와 단절을 선언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일궈낸 지속과 변용의 결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국가운명을 담보하고 있는 힘의 실체인 중국공산당을 뿌리부터 헤쳐 보는 게 필연적인 과제여야 하지 않겠는가? 1920년대 초 중국공산당의 창당 단계에서부터 세기를 넘긴 21세기에 이르는 근 100년간의 궤적의 온갖 면면들과 시시각각 그리고 이 시대를 살다 간 지도적 인물들을 천착하고 해부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산출된 중국 관련 정보와 지식을 흡수하는 건 개인의 문제다. 또한 그것을 정보화 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각종 정보와 지식 및 이미지를 활용하는 건 다른 차원의 과제로서, 온전히 대중국 국가경쟁력을 제고해야 할 정부의 몫이다.
 
'知彼知己면 百戰不殆'라는 말처럼 상대에 관한 정보와 지식은 어느 시대든, 어느 곳에서든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되새길 필요가 있겠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나라 보다 중국을 깊이 이해한 민족이 우리 민족이었다. 그 전통을 이어 받아 미국과 일본 등의 중국학계에 뒤진 한국의 중국학이 일취월장하길 희망한다.
 
초고 : 2003년 어느 봄날
가필 : 2015. 7. 17 서울 삼각지 일터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