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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철 총살’ 동영상을 계기로 본 북한과 중국의 형벌

雲靜, 仰天 2015. 6. 23. 17:40

‘현영철 총살’ 동영상을 계기로 본 북한과 중국의 형벌

 

서상문(대한민국 해군 발전자문위원)

   

얼마 전, SNS상에서 북한 군부의 제2인자 현영철(1949~2015)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기관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몸이 뒤로 거꾸로 솟구치면서 죽어가는 동영상을 봤다. 그 순간 소스라치는 놀람과 함께 내 머리속엔 세 가지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는 동영상에서 총살되는 자가 정말 현영철일까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 사진은 누가, 어떻게 찍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세 번째는 20세기 최고의 사상가이자 프랑스 사회학자인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말이었다.

 

첫 번째 생각과 관련해 모 탈북자가 자신의 정보라인을 통해 확인해본 바에 의하면, 현영철이 고사기관포로 총살당한 것이 맞다고 한다. 또 설령 총살된 자가 현영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체포된 뒤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즉결처분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은 최고 통치자의 지시만 있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충분히 총살할 수 있음이 증명됐기 때문에 그가 현영철이었는지 사실여부를 따지는 것은 별반 의미가 없다. 두 번째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다만 그 동영상은 중국어로 설명돼 있는 것이라는 사실 뿐이다. 세 번째 푸코의 말은 본고에서 내가 문제시 하는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푸코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는, 비록 여기저기에서 가끔은 잔혹한 형벌은 볼 수도 있었으나 그 암흑의 잔치는 대체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신체형의 소멸은 따라서 구경거리로서의 형벌이 그 모습을 감춘 것을 뜻했으나, 그것은 또한 신체에의 구속력이 이완됐음을 의미했다.”〘미셸 푸코,『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춘천 : 강원대학교출판부, 1993년), 25쪽, 28쪽.〙

 

푸코가 말한 것은 프랑스 혹은 적어도 유럽의 상황에 해당된 얘기이긴 하다. 하지만 21세기인 오늘날은 비유럽 지역에서도 ‘잔혹한 형벌’, ‘구경거리로서의 형벌’은 거의 다 자취를 감춘 상황이다. 그런데 아직도 ‘구경거리’로서의 잔혹한 형벌로 ‘암흑의 잔치’를 벌이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북한과 중국이다. 곧 소개할 것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북한과 중국은 대체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국가란 말인가? 푸코의 말처럼 “신체에의 구속력이 이완돼” 북한은 지금 범법자의 신체에 대한 구속력 대신 벌금 등의 비신체적 권리의 제한이 일반화 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인가?

 

유사 이래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인간이 국가권력의 행사라는 명분 하에 자행해온 각종 형벌의 변천사는 인류 이성 발전의 정도와 거의 궤를 같이 한다. 인간사회에 생산력 증강에 의한 불평등이 생겨나 계급의 발생과 함께 정치 권력화되고 구조화 되면서 국가의 지배력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이래 형벌은 사라지지 않은 오래된 사회적 제도였다. 그것은 국가권력이 인간을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선악의 성격 중 악의 얼굴인 야만성의 표출이기도 했다.

 

인간의 야만성은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십 세기 동안 존치돼 왔다. 그러다가 인류의 집단 이성이 발달함에 따라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됨과 동시에 그것의 방지에 대한 법제화와 제도의 개선 및 개인의 존엄과 권리의 보장으로 발전됐다. 그 결과 오늘날은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과거 전통시대에 일반화 된 잔혹한 신체형 형벌은 자취를 감추고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을 형틀에 묶어 놓고선 생살을 한 점씩 각종 도구로 찢어내거나 뜯어내는 형벌이다. 중국에선 이러한 잔인한 형벌은 공식적으로는 1905년에 모두 사라졌다. 물론 그 뒤로도 간간이 권력기관 따위의 음지에서는 관행적 구습이 그대로 실행되던 곳도 없지 않았다. 아뭏든 청조에서 공식적으로 잔인한 형벌이 사라지게 된 것은 그 동안 서방 열강들이 청나라 조정에다 줄기차게 폐지하라고 한 압력에 청조가 굴복한 결과였다. 서양열강들은 자국에도 그러한 잔인한 형벌이 행해지고 있었음에도 중국에 대한 각종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압박카드의 하나로 활용한 것이었다.

 

푸코는 구미에서 신체형 형벌이 없어지게 된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가 예시한 설명에 의하면, 프랑스에서는 잔인한 방법을 사용한 사형, 혹독한 고문 등의 신체형은 늦어도 19세기에는 종적을 감췄다.

 

그 이전에는 중세 이래 범법자의 신체에 가해져 오던 초법적이고 잔혹한 형벌이 존재했었다. 일례로 “국왕 살해 미수범과 같은 사형수에 대해 가슴, 팔, 허벅지와 종아리의 살점들을 벌겋게 달군 집게로 떼어내고, 그의 왼손은 국왕을 살해하고자 했을 때의 단도를 잡은 모습 그대로 유황불에 태우고, 살점들이 떨어져 나간 곳에다 용해된 납과 끓는 기름, 불타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부으며, 몸은 네 필의 말이 끌게 해 네 조각을 내어 팔다리와 몸뚱이는 불에 태워서 재로 만든 뒤에 바람 속에 날려 보낼 것”이 지시되고 실제로 이 지시대로 집행되기도 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미국 등 여타 구미의 다른 나라에서도 구시대의 법령 폐기와 새로운 형사재판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잔혹한 전근대적인 신체형의 형벌은 법률로 거의 다 폐기했다고 한다. 국가별로 명확하게 서술된 보편적인 법전, 정리 통합된 소송절차 규칙을 포함한 제도상의 대변혁과 신체형의 폐기를 포함한 여러 가지 법적 개혁이 이뤄져 채찍질 정도만이 몇 개 국가들의 형벌제도 속에 잔존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법률에는 규정돼 있지 않아서 고문과 가혹행위 같은 비인권적 관행이 여전히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는 나라들도 없지 않지만, 이 또한 사라지고 있는 게 대세다. 이것은 구미와 비구미 지역과의 시간차를 드러낸 이른바 ‘근대성’(modernity)의 구현을 말해주는 하나의 표증이다. 형벌제도에서의 근대성이란 정치제도, 계급의식, 국민과 국가의 인권의식, 사상적 측면에서 진전된 결과임은 두말 할 나위 없다. 한 국가의 주권재민의 성숙도는 형벌의 민주성과 적법성의 정도와 비례한다고 봐도 좋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구미에서 19세기 이후엔 형벌이 사라졌다는 푸코의 주장은 20세기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북한의 자의적인 자국민 처형의 예로 동일한 유럽지역에 속해 있지만 독일과는 1세기, 북한과는 근 2세기의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다. 오늘날 북한을 비롯한 소수의 지역을 제외한 곳에서는 분명 푸코의 당위론적 언명대로 신체형이 다른 제도로 대체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지구상에 아직도 재판도 거치지 않고 권력자의 기분 또는 재량에 따라, 또 형 집행자들의 자의적 권한에 따라 양형과 수형방법이 정해지는 그런 전근대적인 형벌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3대째 국가권력을 사유화 하면서 세습하고 있는 현대판 전제 왕조국가 북한이다.

 

여타 현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치안 유지와 체제유지를 위해선 범죄를 규정하고, 기 발생한 범죄에 대한 제제를 위한 법률이 필요한 국가다. 그래서 근대 ‘형법’의 기본 원리인 이른바 ‘죄형법정주의’를 도입해 형법으로 모든 범죄와 형벌을 규정하고 범죄에 대해 법으로 제재하도록 규정하고 있기는 하다.

 

구체적으로 북한은 기존 유추해석의 근거가 돼온 구 형법의 제10조를 없애고 “국가는 형법에서 범죄로 규정한 행위에 대해서만 형사책임을 지우도록 한다”고 명시했다.(신형법 제6조). 2004년에 개정된 북한형법에 의하면, 범죄는 행위의 해독성과 위험성 정도에 따라 크게 반혁명적 범죄와 일반범죄로 나눠져 있다.

 

통상 전자는 정치범죄, 후자는 정치범죄 이외 생활상의 일반범죄로 분류된다. 일반범죄는 사상 교양과 준법 교양을 통한 개조의 대상이 되지만, 정치범죄는 철저한 진압 대상이며, 주체의 혁명 위업을 달성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적대적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반해 반국가 및 반민족범죄 중 국가전복 음모죄, 테러죄, 조국반역죄, 민족반역죄, 반사회주의 범죄다. 이 중에는 범죄가 무거울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제3장 제1~3절).

 

그러나 북한이 어디 법대로 통치되는 곳인가? 법은 김씨 왕조만이 운용할 수 있는, 최고 통치자가 언제든지 자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현령 비현령’적 통치도구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마음대로 무시할 수 있는 법 밖의 법일 뿐이다. 김정은(1984~)이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 이상 북한의 형법은 요식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 군부의 제2인자 현영철로 보이는 사람이 기관총으로 총살을 당해 죽임을 당하는 동영상이 그 전형적인 예다.

 

이 동영상은 중국 측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동영상을 설명한 소개글을 보면 북한이 무자비하게 총살을 하는 걸 두고 대단히 야만적인 국가라고 비난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동영상에 나온 인물이 정말 현영철이 맞다면 재판을 거치지 않는 즉결 처분은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선 그런 시대착오적이고 반문명적인 일이 보란 듯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게 또 한 번 사실로 판명된 셈이다. 비단 현영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북한 동포들이 그런 방식으로 죽어갔다. 또 앞으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갈 것이다.

 

재판이라는, 법적으로 반드시 공정하게 거쳐야 할 필수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형자를 죽이는 즉결처분은 김일성(1912~1994), 김정일(1942~2011) 부자의 통치 시대에도 있어 온 것이다. 하지만 세습 통치 3대째인 김정은 시대에는 그 불법성과 잔악성, 야만성의 정도가 선대 보다 훨씬 더 악랄하고 비인권적이다. 인권 말살의 정도가 가히 광기가 넘친다고 할 수 있을 수준이다.

 

그런 폭정과 폭거는 오늘날 북한 전역에서 다반사로 자행되는 암울한 ‘죽음의 잔치’다.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만적, 반문명적, 초법적 신체형은 북한이 전제 왕조시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하는 증좌임에 틀림없다.

 

북한에서도 일반 범죄자들에게 대해서는 의법 처리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정치적인 동기 외의 다른 이유로 탈북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단순 탈북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6개월 이하의 노역에 처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가와 북한체제의 ‘신성성’에 저촉되는 사상적, 정치적 ‘범죄자’들은 반드시 일반 범죄자와 달리 17세 이상의 북한주민들 전체를 대상으로 자료 카드를 만들어 일일이 감시하고 있는 국가안전보위부가 직접 수사를 담당한다. 우리의 경찰에 해당되는 인민보안성에서 반국가 사범을 적발, 체포하면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국가안전보위부에 넘긴다.

 

국가안전보위부에서는 수사를 한 후 비공개 재판을 통해 사형 등의 중형을 언도하거나 악명 높은 요덕 혹은 회령의 정치범수용소에 집단적으로 수용시킨다. 정치범수용소로 즉각 보내지는 경우는 반체제 및 반국가, 반김정은 행위, 한국행을 시도했거나 기독교를 접한 행위, 한국사회 및 자본주의 찬양, 북한체제와 김정일, 김정은 유일영도에 대한 비난과 비판들인데,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죄질 나쁜 사상적, 정치적 ‘범죄자’에 속한다.

 

한편, 정치범수용소에서는 공개처형이 일상사가 된지 오래지만 그 이외에도 다양한 형벌이 저질러지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아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 증기 롤러에 깔려 죽게 만드는 형벌, 영하 20도에서 얼려 죽이는 형벌, 돌로 처 죽이는 형벌, 총으로 뇌수를 때려죽이는 형벌, 쇠줄로 코를 꿰고 발뒤축에 대못을 박는 형벌이 있는가 하면, 목 부위의 동맥을 잘라 생매장 하는 형벌도 있다. 이는 신체형이 극성으로 행해지던 18세기 프랑스의 형벌 보다 더 잔혹하다.

  

또 옥수수 한 그릇과 소금 한 숟갈로 하루 15시간 중노동을 시키면서 채찍을 가하는 방법도 북한 당국이 일상화 시킨 형벌의 일종이다. 또 오줌으로 전신을 목욕시키는 형벌도 있는데, 이건 다른 형벌에 비하면 살만한 것에 속한다. 이외에도 온갖 종류의 고문들이 자행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 고문 과정에서 임신 중인 여성의 태중 아이를 강제 낙태시키거나 영아살해도 서슴지 않는다. 도주하다가 잡혀 공개 처형된 친구의 주검에 돌을 던져야 살아남는 곳이 바로 북한의 정치수용소다.

 

일본 에도(江戶) 시대 예수회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기독교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그림을 밟고 가라고 다그쳐서 밟고 가면 살려두고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린 일본 막부의 인간성 말살 행위에 비견된다. 잔혹하기로는 악명 높은 중국의 과거 신체형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 잔악스러움은 나치의 유태인수용소 아우슈비츠 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1960년대 이래 북한에선 지금까지 100만 명 이상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이런 식의 온갖 잔악한 형벌로 처형됐을 거라는 설이 있다.

  

이처럼 사법제도와 형벌제도의 초법적, 비인권적 잔악성의 정도에서 북한을 따라갈 나라는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실정법을 어긴, 특히 반체제 정치범들에게는 인권을 무시하는 형벌이 자행되는 일이 적지 않지만 북한에 비하면 그들은 ‘신사’(?) 수준이다. 중국도 중범에 대해선 사형이 빈번하게, 그것도 TV로 사형 집행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전국에 방영까지 하는 공개적인 형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개선돼야 할 게 많은 나라이긴 하다.

  

현재 중국에서는 범죄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민주주의 제도에 위해를 가하고, 사회질서를 파괴하며, 사회에 대한 위험성이 있는 일체의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문제는 범죄가 사회적 위험성의 유무로 판단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행위에 대한 해석이 지나치게 자의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일반 범죄가 아닌 반공산당, 반체제, 반국가 범죄에 대해서는 교수형을 취하지 않고 총살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법률로 “사형은 총살 혹은 주사 등의 방법으로 집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중국 형사소송법 제212조) 겁에 질려 얼이 나간 듯한 피총살자의 모습이나 총에 맞아 피가 사방으로 튀는 섬뜩한 총살 장면을 여과 없이 생중계하거나 신문에 보도하기도 한다. 이것은 실정법 위반임과 동시에 심각한 인권유린이기도 하다. 통상 현대사회는 범죄자에 대한 치죄시 형을 부가하는 권능은 국가가 독점하고 있지만 그 형은 반드시 법률로 정하는 죄형법정주의를 준수하는 게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총살형으로 얻고자 하는 범죄예방효과를 제대로 거두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총살이나 교수형 제도를 받아들일 때 그 제도의 도입 이유를 두고 ‘응보형주의’와 ‘목적형주의’가 대립하고 있지만 형집행 과정에서 수형자의 교화와 개선에 대한 기대가 내재돼 있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본보기로 전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형을 엄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범죄발생률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이는 1979년에 최초로 제정된 형법에서 사형으로 규정한 범죄는 28종이었지만 1997년에 개정된 형법에서는 68종류로 크게 증가했으며, 흉악범도 1982년에 13.2%였던 것이 불과 5년이 지난 1987년에는 29.4%로 2배 이상 증가한데서 알 수 있다. 1990년대 초기에 범죄발생률이 최고점을 찍었다가 1990년대 후반에 다시 급속한 증가률을 보였다. 개혁개방의 부작용 가운데 하나인 빈부격차, 계층격차, 도시인과 농민 즉, 도농(都農)격차, 민족간 소득 및 정치적 대우의 격차의 심화에 따라 급격한 사회 변동과 맞물린 현상이다. 지금은 여기에다 마약사범, 경제사범, 정치범, 흉악범이 더해져 범죄행위들로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가 아직도 총살제도를 고수하는 이유는 과다한 인구를 가진 중국에선 대중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식으로 통제하지 않으면 범죄가 끊이지 않고 사회적 혼란이 극심해질 거라는 심리적 압박감과 민주주의의 미정착에서 비롯된 인권의식의 결여가 겹쳐지는 지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다분히 과거 전통시대에 온갖 잔인한 형벌이 존재했었고,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전통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서방국가들의 압력으로 법적으로는 잔악한 신체형이 모두 폐기가 명문화 됐고, 또한 오늘날에는 완전히 근절된 상태다.

 

하지만 194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국민당 치세시에는 잔악한 신체형의 연장선상인 고문이 이뤄져 왔었다. 고문은 사실 과거 전통시대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국가와 지배자의 이름으로 무시로 행해졌던, 말만 들어도 소름이 돋는 무시무시한 신체형 형벌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중국에서 형벌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대략 4,000년 전의 일이었다. 목적은 국가권력자의 입장에서 기존 체제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국의 통치자들도 여느 절대왕조 국가의 통치자처럼 정말 기상천외하고 엽기적인 형벌들을 다양하게 고안해 왔었다. 참고로 대표적인 형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먼저 박피형(剝皮刑)을 보자. 박피형은 사람의 피부 맨 바깥쪽, 즉 가죽을 벗겨 죽이는 형벌인데, 관방의 사형 형벌규정에는 없던 형벌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실제로 많이 시행했던 것으로 여러 사적들에 적혀 있다. 이 형벌은 처음엔 죽은 자의 가죽을 벗기다가 나중엔 산 자의 가죽을 벗기는 쪽으로 바뀌었다. 방법은 먼저 척추에다 칼을 대 등짝을 절반으로 가른 뒤 예리한 칼로 천천히 피부와 근육을 분리하는 식으로 살가죽을 도려낸다. 이 형벌은 피하지방이 많은 뚱뚱한 사람의 복부 부위를 벗겨내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도려낸 살가죽은 북을 만드는데 쓰였다.

  

살가죽을 벗기는 형벌에는 이와 유사한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이는 소세형(梳洗刑)도 있었다. 소세란 말 그대로 빗으로 씻긴다는 것인데,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명나라를 개창한 태조 朱元璋(1328~1398)이 돼지털을 벗기는 것을 보고 착안한 형벌이라고 한다. 건달 조폭두목 출신다운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수형자를 발가벗겨 뜨거운 물을 몸에다 여러 번 부은 후 철로 만든 빗으로 쓰는 방식으로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이다. 처음엔 피부를 벗기는 것으로 시작해 나중엔 뼈까지 드러날 때까지 진행한다.

  

신체의 일부를 도려내거나 잘라내는 형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외에도 수 많은 종류가 있었다. 지면 관계상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고 대표적으로 구오형(俱五刑), 빈형(臏刑), 능지형(凌遲刑), 궁형(宮刑), 거열형(車裂刑), 요참형(腰斬刑)을 살펴보겠다.

  

구오형(俱五刑)은 통상 죽은 사체에다 머리, 양팔, 양다리와 양귀를 자르고 두 눈알을 파내고(‘大卸八塊’라고 함)난 뒤 이를 다시 세 토막으로 잘게 자르는 細切式 형벌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가한 경우가 있었다. 실제 그에 해당되는 예로 자주 회자되는 것으로는 한나라를 세운 한 고조 유방(B.C. 247 추정~B.C. 195)이 죽자 그의 부인 呂后가 고조의 총애를 받았던 如意부인을 잡아 들여 팔 다리를 자르고 혀와 귀를 베고 눈알까지 파내 돼지우리에 던져 넣은 일을 들 수 있다.

  

빈형(臏刑)은 문자 그대로 무릎을 잘라내는 형벌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는데, 대표적으로 무릎 이하를 잘라냈다거나 무릎 연골을 제거하는 것이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무릎 연골이 잘려나가면 걷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서 있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 형벌도 받는 사람에게 고통이 보통 아니었을 것이다. 전국시대 제나라의 손자(孫武, 孫賓, ?~?)이 이 형을 받은 후 자신의 이름이 손님 ‘빈’이 아니라 정강이 빈(臏)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능지형(凌遲刑)은 관방의 명칭으로는 촌책형(寸磔刑)이라고 불렸다. 이는 산 자의 살을 포를 뜨듯 떠서 죽이는 것을 말하는데, 반드시 두 사람이 집행해야 가능한 형벌이었다. 즉 두 사람의 형집행자가 수형자의 다리부터 포를 뜨기 시작해 3,600번을 뜨게 해 죽였다고 하는데, 만약 1,000번을 뜨기 전에 수형자가 죽으면 형집행자가 대신 벌을 받아야 했다. 명말 숭정(崇禎)제 시대 유력한 장군이었던 袁崇煥(1584~1630)은 능지를 1,000번 이상 당하고 죽은 예였다.

  

궁형(宮刑)은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이다. 궁형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漢 武帝 시기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B.C. 145?~B.C. 86?)이 받았던 형벌로서, 고통도 고통이지만 인간으로서 참기 어려운 모욕을 감내해야 하는 사악한 형벌이었다. 그 방법은 첫 단계에서는 환관을 만들 때 쓰던 것으로서 먼저 음경과 음낭을 가는 명주실로 묶어 피가 통하지 않게 만든다. 그러면 음경과 음낭은 자연히 고유한 기능을 못하게 되는데,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음 단계로 예리한 칼로 기능을 상실한 두 부분을 잘라낸 후 지혈을 한다. 지혈을 할 때 요도 부분에 새의 깃털을 하나 꽂아 놓는데, 이 깃털을 뽑아낼 때 오줌이 나오면 살고, 나오지 않으면 오줌 중독으로 죽게 된다.

  

거열형(車裂刑)은 ‘五馬分尸’라고도 하는데, 중국의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형벌로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머리와 팔 다리를 밧줄로 묶고 이를 다섯 필의 말에 매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하면 수형자의 몸이 묶인 부분이 목, 양팔, 양 다리, 몸체 등의 여섯 부분으로 떨어져 나가도록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푸코의 저작(『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 19~22쪽)에서도 자세히 묘사돼 있듯이 프랑스에서도 사용되던 형벌이었다. 진시황(B.C. 259~B.C. 210)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힌 로애(嫪毐, ?~238)을 이 방법으로 죽였으며, 법가 사상가로 유명한 상앙(?~ B.C. 338)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형벌로 죽었다.

  

요참형(腰斬刑)은 산 채로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벌이다. 산채로 허리를 자르다니 말만 들어도 모골이 송연하지 않는가? 이 방법은 수형자가 형 집행으로 머리가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라고 한다. 머리가 잘리지 않는 대신 허리가 잘려 육신이 두 동강 난다. 이 형벌을 받으면 장기가 대부분 상반신에 있기 때문에 보통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숨이 끊어진다. 명나라의 대신이자 학자로 유명한 方孝儒(1357~1402)는 이 형으로 허리가 끊어지고도 바로 죽지 않고 팔로 기어 자신의 피로 저주하는 내용을 12자나 쓰고 나서야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나라 시대 景帝는 자신의 스승을 이 형벌로 죽였다.

  

신체의 일부를 자르거나 신체의 일부를 도려내는 형만 있었던 게 아니다. 한 가지로 유형화 할 수 없는 다양한 형벌이 이뤄졌다. 예컨대 여기에는 팽자형(烹煮刑), 활매형(活埋刑), 거할형(鋸割刑), 곤형(棍刑), 액수형(縊首刑)이 있었다.

  

팽자형(烹煮刑)은 팔팔 끊는 물에 집어넣어 삶아 죽이는 형벌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이 형벌로 죽은 사람은 대부분 끊는 물에 던져 넣어 삶는다는 의미의 한자 烹의 의미에 맞게 죽임을 당했다. 간혹 끊는 기름 솥에 던져 넣어 튀겨 죽인 경우도 있었다. 이를 ‘油烹’이라고 불렀다. 남북조 시대 梁나라의 권신 高澄(521~549)이 난을 일으켰다가 東魏로 망명한 侯景(503~552)의 처자식들을 잡아다 살가죽을 벗겨 커다란 가마솥에 넣어 기름에 튀겨 죽인 경우가 이에 속한다.

  

활매형(活埋刑)은 문자 그대로 산 채로 땅에 묻는 생매장이다. 이는 고대 페르시아나 서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형벌이었다. 특히 전시에 잡은 포로들을 데려가기 어려운 경우 칼과 활을 쓰는 시간과 노력을 아끼기 위해 자주 사용된 형벌이었다. 주로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한꺼번에 집단으로 생매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중에는 목만 내놓은 채 몸만 땅 속에 묻은 뒤 고문을 가하고 모욕하거나 혹은 그 위로 말을 달리게 하는 방식으로 변화되기도 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대표적이고, 현대에는 일본군이 자행한 ‘남경대학살’도 이에 속한다.

  

거할형(鋸割刑)은 톱으로 몸을 잘라 죽이는 형벌을 말한다. 마치 두 사람이 수형자를 틀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놀부가 호박을 썰듯이 큰 톱으로 위에서 아래로 설겅설겅 잘라 내린 유럽의 형벌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유럽과 달리 주로 머리를 잘라냈다.

  

곤형(棍刑)은 작은 막대기로 수형자의 입이나 항문에다 밀어 넣어 죽이는 형벌이다. 긴 막대기가 몸속 끝까지 다 들어가기도 전에 막대기에 찍혀 몸 안의 장기들이 터져 죽게 된다. 상상해보라. 뾰족한 도구가 몸 안으로 들어와 그 속의 살아 있는 장기들을 찢고 터지게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목을 조르거나 잘라 단시간에 상대적으로 고통이 덜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여럿 존재했었다. 목을 잘라 잘린 머리를 저자거리에 높이 매달아 놓는 효수, 단두대 같은 특정 도구를 사용해 목을 치거나 자르는 교수형, 활줄처럼 질긴 줄로 목을 졸라 죽이는 액수형(縊首刑)이 있다.

 

 

청대에 산 채로 묵어 예리한 칼로 목을 자르는 장면이다. 칼을 얼마나 갈았길래 검면 전체가 은색으로 반짝인다. 사실 한 번에 목이 베어지지 않으면 망나니가 벌을 받게 돼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 망나니들은 자나깨나 터럭을 불어 바로 끊어지도록 칼을 예리하게 갈고 닦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뒤편의 관중들 가운데는 청나라 민초들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도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중국 청나라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던 참수형을 시행하는 장면.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서방 선교사나 외교관들이 이를 보고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들은 이를 서구사회에 소개하면서 중국을 야만국가라고 욕했다. 자국에도 유사한 형벌이 버젓이 집행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이 가운데 효수형과 교수형을 제외하고 우리에게 생소한 액수형을 소개하면 이렇다. 두 사람의 형 집행자가 각기 막대기 중간에 묶은 활줄을 수형자의 목에다 묶고 동시에 양쪽에서 그 막대기의 양쪽을 잡고 돌리면 줄이 꼬이면서 목이 졸려 죽는 독특한 방법이다. 액수형을 받으면 단박에 숨이 끊어져 죽기 때문에 수형자가 고통을 느끼는 시간이 길지 않아서 다른 형벌에 비해 ‘행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송대의 걸출한 군사전략가이자 의인으로 추앙 받고 있는 岳飛(1103~1142)부자가 이 형벌을 당해 죽었다. 사형에 처해야 할 사람이 국가 공신인 경우에는 목을 자르지 않고 몸은 보전할 수 있도록 이른바 "皇恩"이 베풀어졌는데, 岳飛는 그런 케이스로 목은 잘리지 않고 목만 졸려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다양한 형벌들은 중국에만 존재했던 특허품이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인도사회, 중동의 이슬람국가들과 서양에서도 이와 유사한 잔혹한 형벌이 많았다.(인도는 내가 수년 전에 여행을 하면서 여러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형구들을 보고 이곳도 과거에는 형벌이 보통 잔혹하지 않았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자세히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150㎏나 되는 석판들을 꿇어앉힌 수형자의 무릎 위에 장시간 올려놓거나 예리한 칼로 스스로 자신의 배를 갈라 죽게 하는 등의 각종 형벌들이 존재했다. 자신의 배를 갈라 죽게 만드는 할복자살은 일본에서 일반화 된 형벌은 아니었으며, 특별히 사무라이들에게만 허용된 은전과도 같은 것이었다. 할복은 '셋뿌쿠'(切腹)라고도 하고 혹은 ‘하라키리’(腹切り)라고도 일컫는다. 배를 가를 때의 고통은 조선에서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는 형벌 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극심했다.(할복하는 이유, 방법, 사회적 인식 등 일본의 할복문화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에 별도의 독립된 논의의 장에서 할 생각이다.)

  

이에 비하면 귀양, 유배, 곤장, 태형을 중심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의 과거 형벌들은 잔혹함의 정도에서는 비교적 온건했다고 볼 수 있다. 정말 "양반"수준이다. 물론 중국의 영향을 받아 능지처참, 부관참시 등의 극악한 형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사약 한 사발로 깨끗이 자진하게 만든 것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의 그것과 비교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북한에선 잔악성에서 중국이나 조선시대의 형벌을 능가하는 다양한 신체형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걸 보면 북한은 분명 전근대적인 전제 '왕조국가'임에 틀림없다. 중국도 반체제 범죄자에게는 법적 절차를 정상적으로 거치기보다는 정치적 고려에 따라 신축성 있게 처리한다. 이는 북한과 일정 부분 겹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왜 그럴까? 동일한 사회주의 국가체제라서 그런 것일까? 이에 대해선 좀 더 미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논의를 이어가면 그러지 않아도 지루한 이 글이 더욱 그렇게 될 것이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선 북한에서 아직도 적법하지 않은 총살, 고문, 구타 등의 각종 잔혹한 형벌이 자행되고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함으로써 약간의 간접적인 답을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첫째는 법이 국가에 예속돼 있지 않고 국가 최고 통치자의 손에 사유화 돼 있어 그 적용과 운용이 너무나 자의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북한주민들 사이엔 국가권력을 정당하게 감시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시민의식이 부재한데다 그에 따른 시민사회가 전혀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언론이 모두 국가에 종속돼 있어 권력의 비판, 감시라는 언론 고유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가 유념해야 할 교훈은 북한을 이 세 가지 원인들이 제한되거나 극복되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일에는 유엔의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mmission of Inquiry, COI)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관심의 고양과 개입도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이 같은 법의 자의적 적용과 시행 그리고 악랄한 형벌의 자행은 북한이 안으로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져 결국 내부 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잠재적 인화물질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도 된다.

 

현영철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해 북한군의 엘리트 교육과정을 밟은 후 소대장부터 시작해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등 50여 년간 야전 지휘관을 차례로 모두 거쳐 인민무력부장이 된 인물이다. 북한군 내부에 많은 후배 장군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온 군부의 수장이다. 그런 그를 일거에 총살한다는 것은 그만큼 군부가 과거 김정일 시대와 달리 무조건적으로 김정은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군부의 제1인자로서 김정은의 핵심 측근마저도 비합법적으로 하루아침에 추풍낙엽처럼 즉결 죽임을 당하는 현실은 북한정권이 내부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한 조짐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또 설령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최소한 현영철을 따르는 많은 군 간부들이 김정은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거나 군부의 충성심 이완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과거 1990년대부터 국내 보수언론과 보수진영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가 일방적 바람 혹은 설로 끝나고 말았던 이른바 북한붕괴론과는 달리 근년에 대두되고 있는 북한내부 질적 변화론은 장마당, 錢主처럼 제한적이긴 하지만 사유제 성격이 있는 시장의 작동 등 상당한 사회경제적 징후들이 근거로 포착되고 있기 때문에 정책적 차원에서 급작스런 붕괴를 도모할 게 아니라 북한의 내부 변화를 확장, 촉진시키는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겠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채 초법적인 잔혹한 형벌로 상상하기조차 힘든 극도의 고통 속에 죽어간 무수히 많은 영혼들의 넋을 애도하면서 긴 글을 맺는다.

 

2015. 5. 14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