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주요 언론 게재 글 내용

영유권 분쟁역사를 통해 본 독도의 현황과 대책

雲靜, 仰天 2012. 3. 30. 21:55

영유권분쟁 역사에서 본 독도의 현황과 그 대책

 

서상문(사단법인 21세기군사연구소 연구위원)

 

1. 머리말

 

독도(일본명 ‘竹島’)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한국해(동경131˚52′, 북위37˚14′)에 위치해 있는 바위섬이다. 이 섬은 동도와 서도 그리고 33개 정도의 작은 바위와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총면적은 186.173㎡이고, 한국의 울릉도로부터 직선거리 87.807㎢, 일본의 隱岐島로부터 직선거리 157.266㎢ 떨어져 있는 절해의 고도이다.

 

독도와 인근 대륙붕은 풍부한 수산자원을 지닌 황금어장이며, 또한 대량의 하이드레이트(Hydrates)와 유전이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자원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군사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현재 한국정부는 한국해양경찰 일개 소대를 주둔시켜 실효적으로 이 섬을 점유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이 같은 점유는 오랜 역사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국제법적으로도 정당하다. 요컨대 한국은 국제관계에서 한 국가의 영토 영유권 주장에 대한 정당성 여부를 판별하는 관건적 요건인 ‘歷史的 權原(historical title)’과 국제법적 해석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전후 일본정부는 해마다 독도의 일본령을 주장하는 외교서한을 한국정부에 보내면서 ‘반환’을 요구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아예 ‘일본영토인 독도를 한국정부가 강제로 점유하고 있다’는 식으로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도 ‘당당하게’ 기재할 정도로 점입가경의 상황이다. 일본정부의 ‘반환’요구의 근거는 무엇이며,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고는 독도분쟁의 연원 및 현 상황에 대한 고찰을 기본 골격으로 삼으면서 일본정부가 ‘반환’요구의 근거로 내세우는 주장에 대한 반박과 함께 동시에 한국정부의 대응책이 지니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몇 가지 대응책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여기서 ‘분쟁(dispute)’이란 무력다툼 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외교적 공방까지 포함하는 광의적 개념으로 사용했다.

 

2. 독도분쟁의 근원

 

일본이 독도를 자국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흑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은 1904년 2월 8일, 인천과 중국 뤼순(旅順) 주둔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중국동북에서의 일본의 이익과 조선의 독식을 위협, 혹은 견제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제어해야 할 필요성에서였다.

  

일본의 기습으로 기선을 제압당한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톡 함대를 대한해협까지 남하시켜 일본육군 수송선 2척을 격침시킴으로써 반격에 나섰다. 조선해가 전장화되자 그때까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대한제국의 영토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일본의 군부와 외교관료들은 러시아해군의 활동 감시와 남하를 막는다는 군사적 필요성에서 그 중요성을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일본 내 진지한 몇몇 일본인 학자가 제기하듯이,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독도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1904년 9월, 일본해군성은 먼저 울릉도에 무단으로 러시아 해군감시용 망루를 설치하고, 나아가 농상무성 및 외무성과 담합하여 일본인 어부 나까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로 하여금 독도의 일본영토편입과 독도에서의 강치잡이 독점청원서를 일본정부의 내무성, 외무성, 농상무성에 제출토록 획책, 사주하였다. 후술하겠지만 나까이 요자부로는 물론, 상기 각성들의 당국자들도 독도가 일본령이 아닌 명백한 한국영토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였다.

 

 

일본인들은 1910년 한국 강점 훨씬 이전부터 불법으로 독도에 들어와 그곳에서 강치 잡이를 해왔다. 사진은 昭和10년, 즉 1935년에 독도에서 강치를 잡고 있는 일본인들. 그물에 포획돼 올라오는 것이 강치다.
물개와 유사해 보이는 강치. 19~20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독도 인근 해역에는 강치가 엄청나게 서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남획으로 결국 독도 해역의 강치는 멸종되고 말았다.

  

일본 제국정부는 이듬해 1월 28일 내각회의를 열어 나까이 요자부로의 청원을 승인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독도가 무주지이고, 그가 1903년 이래 독도에서 어로행위를 한 것이 국제법상 점유사실이 있다는 식으로 자의적으로 간주하여, 독도를 시마네(島根)현에 편입시켜 ‘죽도’라고 명명했다.

  

전후 일본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제(국정부)는 독도를 선점한 후 내각의 독도편입 결정을 1905년 2월 시마네현에 통고하였고, 그 달 22일 ‘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이 사실을 일반에 알렸다고 한다. 이 주장은 달리 말하면, ‘영토취득을 위한 국가의 의사(the Intention of the State to Acquire the Territory)’표시가 충족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일본정부는 1954년 2월 10일 대한민국정부에 보내온 외교각서에서 “현대 국제법상 영토취득을 위한 요건에 관하여 영토를 취득하려는 국가의 의사는 일본영토에 독도를 추가하기 위하여 1905년 1월 28일의 내각회의의 결정으로 확인된바 있고, 또한 영토취득을 위한 국가의사의 공적 발표는 1905년 2월 22일에 시마네현이 공표한 고시로 성립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국제법상 통용되는 ‘선점통보’가 성립되었다는 입장인 것이다.

  

또 전후 연합국의 지시 및 관련 국제회의에서 독도의 한국귀속을 규정한 일련의 조치들, 이를테면 연합국최고사령부가 지령(SCAPIN) 제677호로 독도를 한국영토로 판정하고 한국귀속을 ‘일본정부에 지시한 것’이나, 1946년 6월 22일자 SCAPIN 제1033호, 그리고 1952년 9월의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에서 명문화한 동조약 제2조에 대해 일본정부는 다음과 같이 의의를 제기하였다. 즉 SCAPIN 제677호가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영역범위에서 제외한 것은 행정권의 정지였고 영토처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은 또 SCAPIN 제1033호에서 “일본의 선박 및 그 승무원은 타케시마와 타케시마로부터 12해리 내에 접근해서는 아니 된다”고 한 규정에 대해서도 그것을 영토문제로서가 아니라 어로활동의 수역 문제로 해석한다. 또한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제2조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를 포기한다”고 규정한 명문을 인정하면서도, 여기서 독도가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고 억지를 부린다. 과연 일본의 이 주장들은 온당한가? 관련 사실을 다음 제3장에서 다시 한 번 구체적으로 되짚어보자.

  

1905년 7월, 일본 해군은 독도에 무단으로 인부 38명을 상륙시켜 가설망루를 세웠고, 그 후 이듬해 초 시마네현이 울릉도에 간다 유타로(神田由太郞)를 파견하여 울도 군수에게 일본내각의 독도편입 사실을 알린 것은 일본 측의 주장대로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영토편입과정에서 관련국에 편입사실을 외교경로를 통해 ‘정식’으로 통고하는 것이 국제관례이며 국제법의 요건이다. 유사한 경험을 통해 이 점을 모를 리 없는 일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은 ‘정부 간의 수준’에서 그 어떤 사전 조회도 하지 않고, 단지 일개 지방관에 불과한 울도 군수에게만 독도편입 사실을 은밀히 알린 것이다. 일본의 대외영토 팽창을 경계하고 있었던 한국 그리고 일본주재 서구열강의 외교관들에 알려질 것이 염려되었으며, 동시에 한국측의 강력한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여 당분간 비밀로 해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훗날, 일본은 독도가 일본의 권원적 영토라는 주장의 한 근거로 독도의 자국영토 편입조치에 대해 당시 한국정부는 관련부처에 다시 조사하도록 지령만 내렸을 뿐, 일본정부에 아무런 항의도 제기한 바 없었다고 호도하는데, 그들은 한국정부가 항의했다고 할만한 기록이 없다는 것을 이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일본정부의 위와 같은 주장과 논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을 들어 논파할 수 있다.

  

첫째, 우선 일본의 독도 선점 주장이 타당성을 득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독도를 포기한다고 하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는지 입증되어야 한다. 물론 과거 역대 한국의 정부는 단 한 번도 그러한 포기의사를 표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조선조정은 소극적인 방임태도를 벗어나 적극적인 자세로 1696년부터 1881년 기간동안 3년에 한번씩 搜討官을 파견하여 그의 보고를 근거로 일본조정에 일본인들의 독도근해 어로행위를 항의해왔고, 또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울릉도를 鬱島로 개칭하고 독도를 관할구역 안에 넣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독도가 무주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리되어온’ 한국령이었음을 명백하게 증거해준다.

  

한편, 일본 바쿠후(幕府)정부 역시 한국강점 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조선영토로 인정해왔다. 조선조 숙종년간 바쿠후정권이 독도가 조선령임을 인정한 점을 통보해온 외교문서, 그리고 그 후 근대국가로서 꼴을 갖춘 메이지(明治)시대인 1870년대에 들어와 국가 최고기관인 太政官이 독도가 일본과 무관한 조선영토이니 지도와 지적조사에서 제외토록 시마네현에 지시한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또한 일본 메이지제국의 내무성도 약 반년에 걸쳐 17세기말 朝-日 간에 주고받은 관련문서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독도영유권 문제는 이미 1699년에 종결된 사안으로써, “일본은 관계가 없다”고 결론짓고 일본지도와 지적조사에서 제외키로 결정했다. 요컨대 근세 바쿠후정부에 이어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정관을 비롯한 외무성, 내무성, 해군성, 육군성 등 메이지정부 전체가 독도는 일본과 무관한 조선영토라고 다시 한 번 인정한 셈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독도가 한국영토라는 점은 ‘일본정부 차원’에서 인정한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까이 요자부로와 같은 어촌의 일개 어부까지도 독도는 한국령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째,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해왔던 이른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날조된 것이다. 당시의 일본 신문을 샅샅히 뒤져본 한 원로 서지학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1905년 발행된 전국 104개 신문 중 어디에도 이 사실이 고시된 바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위 1905년 2월 22일의 島根縣令이나 島根縣訓令 그 어디에도 문제의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음이 근년에 밝혀졌다.

 

요컨대 일본이 주장하는 시마네현 고시란 게 전국적 차원의 고시가 아니라 “관계자 몇몇이 돌려본 회람에 불과”했던 셈이다. 또 무주지역의 자국영토 편입을 인정받으려면 이를 위한 국가의 의사가 공표되어야 하는데, 설령 일본이 주장하는 대로 그들이 당시 시마네현 고시로 독도편입 사실을 공고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내적인 의사표시’에 불과하며, 국가대표기관이 수행한 ‘국가간의 행위(Interstate activities)’라고 보긴 어렵다.

  

셋째, 일본의 자의적인 독도편입은 강압적인 수단을 띤 것이었으므로 애시당초 원천무효였다는 점이다. 일본정부의 독도편입사실을 한국정부가 최초로 알게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인 1906년 3월 28일이었다. 울릉도에 들른 시마네현의 관리로부터 전해들은 울도군수 沈興澤의 보고를 접하고 나서였다. 이 시점은 주지하다시피 서울에 일제통감부가 설치(1906년 2월 1일)되고, 한국정부의 외교권이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내정까지 통감부의 지휘감독을 받게 된 때였다. 바꿔 말하면, 일본정부는 한국정부로 하여금 항의가 불가능하도록 외교권을 빼앗고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에 독도침탈 사실을 통고하였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정부는 의정부 참정대신 朴濟純으로 하여금 5월 20일 지령 제3호를 내게 하여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일본메이지정부의 주장이 근거무근의 억지인데,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부에 지시하는 과정에서, 독도는 명백한 한국영토임을 분명하게 밝혔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외(교)부가 폐지된 상황에서 이 같은 정부의 항의가 외교 문서화되어 일본정부에 전달될 수가 없었다. 외교행위가 원천 봉쇄되어 있었기에 항의를 한다면, 논리적으로 보아 외교권을 탈취한 일제통감부가 자기 본국정부에 항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계획적이고 암암리에 추진한 일본의 독도편취는 구미열강에 알려지지도 못했다. 뿐만 아니라 또한 한-일 양국 간에 외교적으로도 쟁점화되지 못한 채 1910년 한국이 강제 병합되어 버렸다. 게다가 일본정부는 1965년 한-일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체결한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라고 규정한 약정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한다.

  

넷째,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영토처리에 관한 연합국의 기본방침은 청-일전쟁 이전의 상태, 즉 일본이 침략전쟁으로 약탈하기 전의 영토 및 국경상태로 환원시킨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함으로써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그 해 9월 2일 ‘무조건 항복문서’로 성문화되어 일본이 받아들였다. 이것은 곧 일본정부가 연합국의 위와 같은 기본방침을 ‘무조건’ 받아들이겠다는 의사표시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동시에 이것은 한국으로부터 획득한 모든 영토, 재산, 그리고 주권과 권리는 한국인이 ‘일본의 노예상태’에 처한 상황에서 “일본의 폭력 및 탐욕에 의해 약취”했다는 것을 시인한 셈이었다.

  

따라서 이에 근거하여 일본정부는 자신이 독도가 일본과 무관하다고 스스로 인정한 바 있듯이 독도영유권을 청일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마땅하다. 연합국이 SCAPIN 제677호로 일본영토를 “4개의 主島(北海島, 本州, 九州, 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약 1.000개의 인접 소도를 포함”한다고 규정하면서, 그 주권을 이들 섬들에 국한시켰고,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를 명백히 일본영토에서 제외시켰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일본이 한국정부에 송부한 1962년 7월 13일자 일본측 각서에서 반론의 근거로 주장하는 바대로 이 연합국 지령 제677호에는 울릉도만 제시되어 있고 독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 까닭은 3.000여 개의 모든 한국 섬들이 열거될 필요가 없었고, 제주도 남단에 위치한 馬羅島가 동 조문에 명기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국령으로 인정되었듯이, 연합국이 대표적인 섬들만 열거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또 일본이 독도를 일본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1952년 9월의 ‘대일강화조약’ 제2조는 그들의 주장대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규정하면서 독도에 대한 언급은 명시하지 않은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독도를 일본이 소유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전후 한국이 이미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기정사실을 사후에 국제법적으로 인정하는 형식을 취한 동 ‘대일강화조약’은 마찬가지로 “독도만은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고 명백하게 규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 ‘대일강화조약’은 선행된 연합국 지령 제677호를 승인한 형식을 취했던 조약이었다. 일본도 이 점은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런 법적 배경에서 연합군이 영토권에서 생성되는 한․일간의 어업권을 획정하면서 독도를 일본 어로수역의 범위에서 제외시킨 조치가 연합국의 군정 전기간 동안 끝까지 유효하게 지켜졌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국제법상 인정되고 있는 ‘속도이론’에 근거하면 독도는 당연히 지질학적으로 그 모도인 울릉도에 소속되어야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총괄하면, 결론은 일제내각이 자의적으로 결정한 독도의 ‘일본영토편입결정’은 결정당일인 1905년 1월 28일전까지 한국이 독도를 지속적이고 실효적으로 관리해왔기 때문에 원인무효가 된다. 35여 년간 일본의 한국강점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훗날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우겨대는’ 역사적 비극의 씨앗이 된 셈이고, 일본으로선 제국주의적 대외 침략이 가져다 준 뜻하지 않은 ‘횡재’였다.

 

3. 전후 독도영유권분쟁의 새로운 국면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영유권시비가 본격적으로 표면화되면서 한-일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된 것은 해방후 한국전쟁의 와중인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정부가 발표한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통칭 이승만의 ‘평화선’)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선언’에서 한국정부는 독도와 그 영해가 한국령임을 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는 의문의 여지없이 일본영토인 이 섬에 대한 대한민국의 그 같은 가정이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항의해 왔다. 일제의 한국강점으로 인해 그간 잠복되어 있었던 독도영유권분쟁이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한국정부는 일본의 이 같은 항의를 일축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고유한 영토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 1월 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가 지령(SCAPIN) 제677호로 독도를 한국영토로 판정내려 한국에 반환한 조치는 정당했다고 공박했다. 동시에 연합국최고사령부는 훈령 제1033호에서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거듭 재확인했음을 상기하라고 지적했다. 이로부터 한-일간의 외교문서와 매체를 통한 반박과 재반박을 거듭하는 가열찬 공방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1953년 6월 시마네현으로 하여금 어민들에게 독도어업 허가권을 발부해주게 하는가하면,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2척에 30여명의 관리를 태워 독도불법상륙을 시도케 한 후 ‘島根縣隱岐郡五箇村竹島’라고 쓴 경계표를 설치했다. 이와 같이 일본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일본극우파들은 1950년대에 수 차례에 걸쳐 독도인근 해역까지 침범해오기도 하고, 직접 독도에까지 상륙해서 탈취를 시도한 바 있지만 그 때마다 울릉군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독도의용수비대’가 발포한 총격에 격퇴되었다.

  

당시 한국정부는 일본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처함으로써 민초들의 독도수호의지를 북돋우었다. 평화선을 침범해오는 일본어선들을 나포하여 재판에 회부하는가 하면, 해양경찰대를 파견하여 전쟁까지 불사할 기세로 나포에 불응하는 일본선박들에 총격까지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국가최고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정부의 단호한 대응에 부딪힌 일본정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였다. 독도의 최종적 귀속결정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임하여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만들든가, 아니면 일단 꼬리를 내리고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든가 이다. 1954년 9월 25일, 일본정부는 독도영유권시비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가리자고 한국정부에 제의해왔다. 이 제의는 한국정부로부터 당연히 거부되었다. 명명백백한 고유영토를 힘의 논리에 내맡긴다는 건 상상불가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독도문제의 국제화 기도, 즉 이 섬을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에 내맡기자는 일본의 제의가 한국정부로부터 일축되자 일본은 일단 공세의 수위를 낮추고, 자국민을 대상으로 독도영유권에 대해 사실을 호도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장기전략을 취하였다. 그러면서 해마다 연례적으로 한국정부에 독도의 ‘불법점령’을 항의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물론 국제사법재판소로 갈 경우를 대비한 명분축척용이었다. 독도탈취의 다음 제3라운드를 위해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점부터 일본은 국력을 바탕으로 한 대외홍보 전략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후술하겠지만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국제사회에 부단히 홍보한 결과 서구사회에서는 물론이고, 가까운 아시아인들에게도 독도는 한국과 무관한 일본의 섬으로 인지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4. 일본의 독도침탈의 전기―일본사회의 극우화 및 ‘신한-일어업협정’

 

일본의 독도 강탈기도의 제3라운드는 1990년대 중반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일본이 시도한 강탈기도의 주요 특징은 과거 독도영유권에 관한 주장이 국내여론을 의식한 불특정 정치인 및 어떤 극우파 내각각료의 개인적 신념이나 정치적 동기에서 행해졌던 것과 달리 이제는 정부정책차원에서 치밀성과 조직성을 띠면서 직접 한국정부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먼저 일본국내의 독도관련 동향은 어떠하였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독도탈환’은 1995년 일본집권당의 총선 공약이었고, 1997년부터는 ‘독도탈환외교’가 일본외교의 주요 지침으로 설정되었다. 이런 상황변화는 1990년대에 들어와 급속히 시작된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와 그리고 이를 자양분으로 한 대외 팽창적 국수주의로의 회귀에 연원하며 이웃의 불행, 즉 한국의 경제대란, 이로 인한 파당적 정쟁 및 사회불안이 그 외적 계기 및 조건이 되었다.

  

마침내 기회를 노려 왔던 일본은 IMF급습 전후부터 정부, 의회, 극우단체가 삼위일체가 되어 독도갈취에 총력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본정부는 먼저 단계적 수순을 밟는다는 차원에서 한국의 정세변화를 십분 이용하는 우회적 전술을 구사했다. 다시 말해 한국이 1997년 12월 들이닥친 IMF 경제대란으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자 이것을 기회로 바로 다음 달인 1998년 1월, 1965년 이래 양국 간에 적용해온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파기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면서 새로운 한일어업협정 체결을 촉구하였다. 물론 이 시점은 세계 각 국이 유엔해양법 협약을 시행하기 시작한 시대적 추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때였다.

 

따라서 여전히 자유방임적 해양자원 개발 체제로 남아 있던 동북아 지역에서도 한・중・일 삼국이 각각 자원의 개발과 보존을 위한 효과적인 경제수역제도, 즉 200해리 관할 수역제도를 도입함에 따라 각국간에 잠재되어 있었던 불분명한 경계 획정문제로 인한 영유권분쟁문제를 야기시키게 될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긴 했다.

  

그러나 이 호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본정부는 사전에 이미 한국정부에 외환구제 융자대금의 일부를 변통해주는 대신 독도문제를 일본에 유리하도록 끌고 가겠다는 전략을 수립해놓은 상태였다. 당시 오로지 환란극복에만 급급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정부의 협조융자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한국정부의 외교 협상력을 급격히 저하시킨 원인이 되면서 일본측의 협상페이스에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초 한-일어업 협상에서 한국정부는 한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즉 EEZ (Exclusive Economy Zone)구획의 한계선을 독도와 일본의 隱岐島 사이에 두자고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99년 1월 22일 최종 발효된 ‘신 한일어업협정’은 일본측 안이 대폭 반영되었는데, 울릉도 기점 동쪽 35해리 지점을 한국 EEZ의 한계선, 그리고 隱岐島 기점 서쪽 35해리 지점을 일본의 한계선으로 획정하고, 양선을 좌우로 하는 중간 바다를 ‘한일공동관리수역’으로 설정한다는 것이었다. 그 안에 위치한 독도가 이 수역 안에 포함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국정부는 독도가 우리의 고유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포기하고 울릉도를 EEZ의 기점으로 삼는 이해할 수 없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리하여 독도를 한-일의 배타적 공동수역이 겹치는 중간수역에 들어가게 만들었고 독도의 영해, 즉 독도의 배타적 수역내에서 일본도 이 해역의 해양생산물자원을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이른바 ‘해양생물자원 보존 및 관리권고권’과 ‘해양생물자원 보존 및 관리조치권’ 조항을 협정에 포함시켰다. 즉 지금까지 독도영해에 대해 한국이 단독으로 ‘배타적’인 관할권을 행사해오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공동수역 안의 독도 및 그 바다에 대한 배타적 영유권은 이제 일본과 공유하게 만든 것이다.

 

요컨대 일본은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국영해 안에 위치한 독도를 모도인 울릉도로부터 분리시켜 ‘한일공동관리수역’ 안에 집어넣었다. 19세기말, 일본제국이 조선을 탈취하려고 했을 때, 조선을 우선 그 종주국인 중국으로부터 탈리시켰던 수법과 같이 일본은 일차적으로 우선 독도를 한국영해로부터 떼어 내어 공동수역 안에 집어넣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신 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탈취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본은 후속조치로써 대외홍보와 외교적 명분 쌓기를 동시에 진행시켜 나가고 있다. 신 한-일어업협정 논의 전부터 일찌감치 독도를 일본 EEZ의 기점으로 삼는다고 선언한 일본정부는 현재 독도와 인근 12해리 수역을 자국영토라고 국제사회에 강력하게 홍보해오고 있는데, 그 홍보 실태에 관해선 본문 제5장을 참조하길 바란다.

  

만약 대외홍보와 외교적 명분 쌓기가 그들이 적당하다고 판단되는 수준이 되고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조성되면 이제 다음으로 예상되는 일본의 제2단계 조치는 독도를 ‘쌍방적’인 충돌지역으로 만들어 유엔의 개입을 유도한 후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는 것이다. 동북아 국제정세가 변화될 경우 미국의 묵시적 지원 하에 독도를 공동 관리하자거나 일본 내 극우단체들을 대거 독도에 상륙시켜 한국과 충돌을 유발시켜 직접 강탈하든가, 아니면 절대적인 경제, 군사력우위에 바탕한 힘의 외교로 한국정부로 하여금 독도해역의 지하자원을 일본과 함께 공동개발토록 유도해 나간다든가,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2000년 9월,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직전에 당시 모리 요시로(森喜郞) 일본총리가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일본영토”라고 작심한듯한 비장한 도전장을 던진 것은 위와 같은 일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모리총리의 이 발언이 나온 게 어쩌다보니 우연히 김대중의 방일전야였다고 본다면 지나치게 무신경한 인식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일본정부가 독도탈취를 10대 외교지침으로 상정한 점이나, 1998년 일본이 육해공자위대를 동원하여 실시한, “어떤 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동해의 어느 섬”에 대한 모의 ‘탈환’작전(분명히 독도를 겨냥한 것임이 틀림없다)을 고려해보면, 일본총리의 이 발언은 사전에 국가정책 차원에서 치밀하게 형량 되고 계획된 행보였다고 보는 게 옳다. 따라서 김대중 대통령은 그때 방일을 취소했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일본 방문기간 중에라도 독도가 한국의 고유한 영토임을 천명하여 일본의 기도에 쐐기를 박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그렇게 대응하지 못했다.

 

한국정부와 김대중 대통령의 미온적 대응은 그가 방일에서 귀국하자 곧바로 주한일본대사인 데라타 데루스케(寺田輝介)가 주재국인 대한민국 수도에서 모리의 망언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내용을 되풀이 언급하는 망발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외교관례를 무시한 모리 요시로의 발언과 데라타 데루스케의 敵中망언은 한국의 반응정도를 試探한 후 한국에 대한 독도영유권주장의 수위를 국가대표 및 외교 차원으로까지 높임으로써 향후 분쟁에서 명분의 객관성 및 주도권을 노린 각본의 일환이었다. 정해진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모리 요시로와 같은 극우정치인들이 다수 포진해있는 일본정부의 대독도정책을 강경 일변도로 나아가도록 채찍질하거나, 힘을 실어주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일본국내의 중의원, 참의원, 그리고 시마네현 의회의 의원들과 같은 극우세력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극우 정객들은 일본을 국수적인 대외팽창노선으로 끌고 가려는 견인차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이들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1993년부터 2000년 상반기까지 이들 세 기관의원들이 각기 소속의회에서 독도영유권주장 및 일본정부의 독도 탈취책의 미흡함을 지적하거나, 혹은 그 대책을 논의한 횟수는 무려 150건이 넘는데, 그 주된 논점은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현재 한국의 독도영유를 ‘불법점거’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해마다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외교적 항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주장하는 ‘실효적 점유’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둘째, ‘미군에 원조를 요구해’ ‘불법점거상태’를 종식시키자는 것. 셋째, 독도를 한-일 두 나라 또는 국제 공동관리하에 두자는 것이다.

  

나는 위와 같은 류의 발언을 행한 일본의 극우정치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독도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볼 때 앞으로 독도의 온전한 주권찾기가 오히려 남북통일보다 더 어려우리라고 예단한다. 이들 국수적, 대외팽창 지향적 정치인들을 떠받치면서 망발의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는 극우단체들, 이를테면 ‘島根縣竹島問題解決促進協義會’, ‘竹島・北方領土返還要求運動島根縣民會議’등은 이미 1970, 1980년대에 결성되어 현민대회 및 연수회개최, 보급개발자료인쇄, 연구도서를 간행하는 등, 정부의 독도탈취의지를 고무시키고 있다.

 

이들은 ‘國粹國防聯合’, ‘일본민족청년동맹’, ‘國粹保政會’, ‘大日本國粹保政議會’ 등 이름만 들어도 일본제국주의 냄새가 나는 골수극우단체들에게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외곽조직들이다. 독도의 완전한 주권 되찾기운동에 있어 소수의 개인, 단체들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는 한국의 상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5. 한국정부의 대응

    

그러면 한국정부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한국정부의 대응은 크게 이승만정권과 그 이후의 역대 정권이 보여 주었던 상호 대비되는 태도로 획분이 가능하다. 즉 본문 제3장에서 약간 언급한 바 있듯이, 이승만 정권은 일본의 독도침탈시도를 포함한 그 어떤 침략기도도 용납치 않겠다고 단호하게 맞섰던 반면, 그 후의 역대 정권은 모두 소극적 저자세로, 혹은 현상유지 정책으로 일관했다. 현 김대중 정권도 후자의 연장선에 서 있는데, 지면관계상 소략하지만 현 김대중 정권이 보여주고 있는 독도정책과 대일태도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 측면이 있기에 이를 중심으로 논급하는 것이 효율적이겠다.

  

대중 정부의 대독도 정책과 대응 태도는 대략 세 가지로 개념화할 수 있다.

  

첫째, 무대응 방침이다. 무대응 방침이란 말 그대로 일본정부의 독도관련 그 어떤 주장이나 언동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대응을 자제하겠다는 정책이다. 이것은 현 한국정부의 모든 독도관련 정책을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부문율'이며, 또한 정부 관련부처의 관료들의 독도관련 정책에 대한 제안이나 시행을 주저하게 만드는 타율적 기제라고 봐도 별반 무리가 없다. 

   따라서 이 같은 인식이 한국정부의 관련부처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상 한국정부는 오로지 독도가 국제적으로 ‘분쟁지역’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한다는 ‘방침'을 고수하는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예증의 하나로서 한국정부와 김대중 대통령이 독도영유권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 한-일어업협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 태도를 살펴보면 잘 드러난다.

   예컨대, 한국정부는 ‘신 한일어업협정’이 어업문제만을 다루었고 영토문제인 독도는 우리가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니 문제될 게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공식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즉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국제법상 우리고유의 영토이며, 우리가 실효적으로 점유하면서 독도와 그 영해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독도문제는 한-일간의 영유권분쟁이 아니며 한-일간 외교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독도 ‘분쟁지역화 기도’에 말려들지 않겠다며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그 어떤 공식적인 대응도 회피해오고 있다.

   그런데 신 한일어업협정은 양국이 영유권문제와 어업문제를 서로 분리한다는 합의조항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영토문제와 어업문제는 별개라고 강변하는 주장은 재고될 여지가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한 국제해양법 전문가의 주장에 의하면, 설사 한-일양국이 합의하여 분리의사를 명기해놓았다 하더라도 공동관리 수역에서의 어업문제는 환경보존이나 해운문제 등과는 분리될 수 있어도 어업권이 결국 주권적 영역권에서 연유되기 때문에 두 사안은 분리될 수 없다고 한다.

   그의 학리적 주장에 따르면, 문제의 협정이 영유권문제를 분리한 게 아니라 양국의 영유권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독도영유권분쟁을 공인해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요컨대 한국정부의 안일한 아전인수격 해석과는 달리 독도의 주권이 크게 훼손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관련전문가 상당수가 본 협정이 일본에게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로 원용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고 크게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전문가들의 일치된 우려가 기우가 아니라 장차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고 예견되는 사태가 벌어진 바 있다. 즉 2001년 여름 한국어선들이 남 쿠릴열도에서 꽁치조업을 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일본외무성은 한국정부에 항의해온 성명에서 “북방 4개 섬은 일본의 고유한 영토로 배타적 경제수역에서는 일본이 주권적 권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어선이 러시아로부터 허가를 받고 조업하는 것은 어업문제 차원을 넘어 영토문제와 직결된 사안”이라고 지적했는데, 우리는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이 이 논리를 뒤집어서, 즉 일본이 한국정부로부터 인정받은 독도수역에 대한 공동관리권은 영토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어업문제 차원을 넘어 영토문제와 직결된”, 일본도 독도에 대한 “주권적 권리를 갖고 있다”고 역공을 취해올 가능성이 존재하며 장차 일본이 그런 식으로 주장할 가능성은 매우 짙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도를 온전한 우리영토에서 졸지에 일본과 공동관리하는 수역 안으로 들어가게 방치함으로써 일본이 독도에 관해 실제로 주권을 행사할 개연성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해양수산부는 “독도문제는 영토에 관한 문제로, 경제문제인 한일어업협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강변하면서 안일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둘째, 현상유지다. 이것은 무대응 정책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의 귀속권을 확실히 인정하게 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현 점유상태를 깨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환언하면, 한국정부는 한-일간에는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분쟁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한국정부 혼자만 분쟁이 아니라고 하는 사이에 국제사회에서는 대만해협, 新疆 및 티벳자치구, 그리고 釣魚島에 이어 독도는 다섯 번째로 군사충돌 가능성이 높은 영토분쟁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일본 역시 한국의 실효적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96년 5월, 이케타 아끼히꼬(池田行彦) 국무대신이 중의원외무위 등 연합심사회에서 한 발언은 이를 대변한다. “국제법상 실효적인 지배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국가활동이 평온하고 계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타국으로부터 예를 들어 항의 등이 있을 경우에는 평온하고 계속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는 것으로, 아시다시피 타케시마문제에 관해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측이 우리의 입장을 말해 두고 있으므로 한국이 말하는 소위 실효적인 지배가 이미 확립됐다든가, 확립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셋째, 앞의 첫째, 둘째 방침에서 파생된 필연적 결과이겠지만, 대외 홍보부족으로 인한 국제여론의 불리함이다. 이 점은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최종 귀속판결을 내맡길 경우, 한국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배경 및 요인들이다. 먼저 일본이 획득한 홍보차원의 사전정지작업의 성과를 보자. 영국의 타임지를 비롯한 유럽의 영향력 있는 간행물과 대백과사전 뿐만 아니라 미국 CIA, 미국태평양사령부의 전략배치도 등에서도 독도는 일본의 영토로 표기되어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말레이시아기업인의 66.7%, 호주 58.6%, 필리핀기업인들의 54.5%가 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여기고 있다.

  

또 독도의 앞마당으로 비유될 수 있는 ‘동해’라는 명칭도 그렇다. 이 바다는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서양 각 국에서는 ‘Mer de Coree’ 즉, ‘조선해’로 자연스레 통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일제를 거치면서 일본의 적극적인 홍보와 로비로 전세계 대부분의 지도는 ‘Sea of Japan’ 일색으로 바뀌었다. 다음으로 국제사법재판소를 움직이는 일본정부의 힘과 영향력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점이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 재판관 15명의 급료를 포함한 재판소 운영경비 대부분을 제공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 기구의 역대재판관 가운데는 일본인이 수두룩했고, 현재도 현역 재판관으로 활동하는 자 가운데는 일본인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생각하는 ‘유사시’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 그들이 독도문제를 이 기구로 가져가 ‘합법적’으로 차지하기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이다. 독도는 바야흐로 국제사회에서 ‘일본해에 위치한 타케시마’로 굳어져 가고 있다.

  

실상이 이럼에도 왜 해양수산부를 포함한 한국정부는 그렇게 실상을 호도하면서 좌시만 하고 있는가?

 

그것은 해양수산부 및 외교통상부가 모두 관련 주무기관이지만, 대통령에 무소부위의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한국의 정치구조하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의중에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의 의중이란 다름 아니다. ‘21세기 일본과의 새로운 파트너십’ 構築을 대일외교의 기조정책으로 설정한 그이기에 일본과의 화해분위기에 역행하는 행위와 정책은 가급적 자제하면서 취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일신시대개막’을 위해 스스로 과거의 심리적 앙금을 털고 일본대중문화개방, ‘천황’의 한국방문들을 실현시키겠다는 김대중의 구상은 거시적으로 보아 바람직한 방향 설정이긴 하다.

  

그러나 현재 또 다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증명해주듯이, 그것은 시기상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제국주의적 침략과 야만으로 얼룩진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은커녕, 가해행위를 시혜행위였다고 날조, 호도하는 일본의 극우세력들과 진정한 화해를 논하기란 緣木求魚일뿐이다. 그럼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사상누각 같은 화해분위기의 유지만을 고집해왔던 게 사실이다.

  

신 한-일어업협정의 결과는 따지고 보면 김대중 정권의 이와 같은 대일외교 저자세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그것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다. 이 협정으로 말미암아 한국어민들의 어로수역은 참담할 정도로 줄어들었고, 어획량도 대폭으로 감소되었다. 대한민국 전체영토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크기의 영해가 일본으로 영원히 넘어갈 위험에 처해있다. 신 어업협정 전 년 수십 건에 불과했던 어민들 간의 어로분쟁이 지금은 년 수 백 여건으로 증폭되었고, 어민들의 생계는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6. 몇 가지 제안-결론에 대신하여

  

지금까지 한국정부의 대응태도를 살펴본데서도 드러나듯이 독도의 완전한 주권 되찾기에 대한 정부와 대통령의 전향적이고 당당한 자세 전환은 그리 기대할 바가 못되는 듯하다. 이하 몇 가지 제언으로 본고의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보편 일본인의 집단적 극우화에 저항할 이성적이고 양심적인 시민들을 일본사회의 다수 주류로 착근시키기 위해 한-일 민간 교류확대를 통한 침략의 과거사 알리기에 지속적, 국가적 차원의 대응이 시급하다. 한편 대일 콤플렉스 노정과 냄비뚜껑식 감정만 발산하는데 그치고 마는 감성적인 대일 자세를 극복해야하고, 작금의 일본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이해의 앵글 역시 임기응변적이고 단선적인 대응차원을 넘어 일본정치의 동향과 국제정세와의 상호 교호작용의 이음새를 파악코자 하는 거시적 시각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사왜곡에 대한 제지와 그 시정의 실패를 독도의 미래와 관련 지워 교훈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정부의 국방부, 외교통상부, 해양수산부 등 독도관련 부서와 국회가 함께 참여하는 합동 전담기구를 발족시켜 일본의 정치동향을 주도면밀하게 주시하면서 관련 법리에 대한 연구개발뿐만 아니라 여론수렴, 관련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이를 통해 독도에 관한 국가 정책적 원칙이 한시바삐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의 일관성과 근간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말한 대로 진정 “어업협정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일본이 독도에 관한 영유권을 요구할 빌미로 작용될 소지를 안고 있는 1999년의 ‘신한-일 어업협정’ 파기를 전제로 독도기점을 관철시킬 새로운 어업협정을 치밀하게 준비해야한다. 파기선언은 만 3년이 지나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동 ‘협정’이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한국정부가 새로운 어업협정체결을 요구할 시점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정부의 일방적 홍보와 강변과는 달리 이 어업협정은 어업권과 영토권의 분리를 명기하지 않은 치명적 오류를 범한 상태에 있으므로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이 협정의 폐기는 동시에 현재 독도와 울릉도사이를 순시하고 있는 일본 해상자위대소속 군함의 초계활동을 근절하고 그 근거를 없애는 조치이기도 하다.

 

넷째, ‘신 한일 어업협정’을 파기하기 전, 먼저 현재 주둔중인 경찰을 해군, 혹은 해병대와 같은 정규군으로 교체한다. ‘신 한-일 어업협정’의 파기는 일정 수준 분명히 일본의 여론과 극우파들을 자극할 터이므로 그 후의 군대교체는 바로 분쟁으로 변전될 소지가 높기 때문이다.

 

다섯째, 대통령과 정부의 관련 부처 장관은 지금까지 일본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이 독도의 일본 영유권을 주장할 때 침묵해온 ‘무대응 정책’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라도 독도관련 망언에 즉각 반박을 가하는 적극적인 자세 전환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반박성명을 낸다해서 바로 극단적 외교적 마찰이나 분쟁으로 비화되지는 않는다. 국가 통수권자는 언제든지 영토와 주권수호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내외에 천명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이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여섯째, 독도의 한국령을 인정하는 일본 내 양심적인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포함하여 일본정부의 주장을 논박할 수 있는 이론들을 중심으로 유엔 및 산하 국제기구, 그리고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 홍보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벌여나간다.

  

일곱째, 현재 일반국민들의 독도 입도를 제한하고 있는 정책을 바꾸어 헌법이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듯이 원하는 이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방문이 가능하도록 조치해야한다. 즉 입도 제한법인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관리지침’ 규정을 폐기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국민들의 독도에 대한 관심과 수호의지를 높이고 ‘실효적 점유’의 객관성을 드러낸다. 정부가 입도제한의 이유로 내세우고 있는 자연보호 및 생태계파괴에 대한 우려는 이에 합당한 조치를 가하면 된다.

  

여덟째, 독도와 그 영해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자연과학적인 조사연구 및 탐사를 총체적이고 또한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한국정부의 ‘실효적 지배’를 국제사회에 현시할 수 있는 근거를 축적해간다. 이러한 조사연구 및 탐사에 기초한 독도와 울릉도의 동시개발을 추진할 종합개발안을 수립, 시행토록 한다. 이와 관련하여 ‘국회독도사랑모임’이 주축이 되어 1999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발의한 바 있는 ‘독도개발특별법안’에 대해 정부는 “우리가 먼저 일본과 공공연한 마찰을 야기하는 조치를 하는 것은” 독도영유권 공고화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구태의연한 ‘변명’을 더 이상 법안통과 반대의 이유로 대지 말고, 이 법안을 조속히 가결하여 내외에 독도영유권에 대한 확고한 의지유무를 의심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홉째, 위 독도 및 울릉도 종합개발안이 어떤 형태로 수정되든 간에 독도는 유인도화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최소한 독도의 접안시설 확장 및 부대시설 추가설비를 확충해줌으로써 독도를 어업전진기지로 개발해나가야 한다.

  

마지막 열번째,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방문 시 내비친바 있는 일본왕의 방한을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겸허한 자기성찰에 바탕을 둔 청산작업을 끝내지 않는 한 자의적으로 허용해선 안 되고, 일본극우세력들의 준동이 약화될 때까지 국민적 합의에 따라 무기한 연기해야한다.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지도자는 일본이 주변상황을 이용, 혹은 편승할 틈을 최소화하도록 한반도 긴장완화를 포함한 한반도문제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독자적 목소리와 공간을 넓혀 가면서, 동시에 주변 강대국과의 긴밀한 ‘협조유지’라는 모순된 정치 외교적 과제를 풀어 나갈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독도는 말이 없다.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도 영원히 말이 없을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방안들을 전향적으로 검토, 실행하는데 정부가 나서지 못한다면, 이제 그것은 국민들 스스로가 쟁취해야 할 몫이다. 한나라의 주권수호는 말로만 외친다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 땅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와 실천이 뒤따르는 민족에게만 許與된 것임을 명심해야 할 때다.

 

위 글은『군사세계』, 2001년 9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