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가 ‘정신대’, ‘종군위안부’, ‘군위안부’라고 부르는가?
: '난징대학살'과 ‘일본군 성 노예’
서상문(역사연구가)
일본 극우세력들의 과거사 진실 지우기는 한국인들의 분노 지수를 툭하면 터질 임계점으로까지 치솟게 한다. 그들의 동기나 고약한 심보를 알고 나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정말 우리의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김대중 정권 때 새로운 한일 관계를 모색하자고 다짐했던, 의문투성이였던 ‘21세기 새로운 동반자’니 하는 관계설정도 새삼 회의를 자아내게 한다. 요즘은 이 말만 들어도 속이 역겨울 지경이다.
그러나 우리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더라도 흥분지수를 가라앉혀야 한다. 그리고 한-일의 새 세대들에게 선린평화를 남겨주기 위해서 과거사에 관한 한 먹통들인 일본인들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있었던 대로만 가르쳐달라고 끝까지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일본에 역사왜곡 시정을 요구하면서도 혹 우리 자신은 스스로 이와 관련된 역사를 곡해하고 있는 일은 없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건 엄청난 자기모순, 자가당착이 아닌가?
“7월 11일, 황옥임 ‘(종)군 위안부’ 할머니가 일본정부로부터 응분의 배상은커녕 정부차원의 사과 한 번 받지 못한 채 84세의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황 할머니와 같은 ‘정신대 출신’자는 그간 61명이 유명을 달리 하였고, 이제 139명만이 생존해 있다. 황 할머니, 내세에는 그토록 소중했던 소녀의 꿈을 이루소서.”
이것은 황옥임 할머니뿐만 아니라 같은 처지의 할머니들이 사망했을 때 죽음을 알리는 한국 언론매체들의 전형적인 보도패턴이다. 한국의 유수 일간지, 중앙 방송사는 거의 예외 없고, 극일 민족주의적 성향의 단체가 발행하는 기관지뿐만 아니라 관련 시민단체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정신대’, ‘종군위안부’, 혹은 ‘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그대로 쓴다. 심지어 ‘정신대’문제를 다루는 관련 시민단체마저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신대’ 출신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종군 위안부’, ‘군 위안부’, 이 가운데 어느 용어가 본질을 들춰주는 개념일까? 잘라 말하면 그 어느 것도 합당하지 않다. ‘일본군 성 노예’(Military sexual slavery)가 맞는 말이다. 유엔인권위원회에서도 일본군의 ‘조직적 강간, 성 노예, 노예적 취급’을 인정하였는데(쿠마라스와니 및 맥두걸보고서), 왜 피해당사자인 우리가 일본이 자행한 부녀자 성 유린 범죄를 ‘나라 위해 몸 바쳤으며’, 황군을 ‘위안했다’고 하는 그들의 억지 강변을 인정하고 있는가?
전후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일본군이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여성의 ‘성’을 강제 동원한 사실이 존재했었다는 과거의 치부가 온 천하에 까발리게 된 계기를 만들었던 배봉기 여사나 김학순 여사가 자신의 ‘과거’를 용기 있게 폭로했을 때 모두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 ‘군 위안부’라는 용어가 정착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자료상에 기록된 ‘군 위안소’, ‘군 위안부’라는 말이 근거가 되었고, 또한 당사자들이 증언할 때에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 용어들은 그 어느 것도 그들 피해자들이 처해 있었던 기구하고도 참담한 삶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전달해주기엔 부실한 개념이다. 더우기 우리가 이 용어들을 아무런 정제노력도 없이 그대로 쓰고 있다는 건 스스로 일본의 역사왜곡에 동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이 자행한 역사왜곡을 규탄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왜곡을 돌아보지 않는 불감증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선, 정신대(挺身隊)라는 말부터 정체를 해부해보자. ‘挺’은 ‘몸(이나 몸의 일부)을 내밀다’ 혹은 ‘곧게 펴다’라는 뜻을 일차적 의미체로 가진다. 이 뜻이 나중에는 ‘헌신하다’, ‘희생하다’ 따위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따라서 ‘挺’자라는 한자의 어의가 시사하듯 ‘정신대'란 곧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기로 작정한 구국대'라는 의미를 표상한다. 여기엔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행위의 자발성, 혹은 능동성만 강조되어 있을 뿐, 강제성, 피동성의 개념을 떠올릴 여백은 전혀 없다.
과거를 돌아볼 때 현재의 기록들을 역사 생성의 시공과 그 맥락을 배제한 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이른바 문자주의(literalism)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재단된 허구적 실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우리는 전전 동원체제하의 일본 국가권력이 지향했던 의향(intention)과 힘의 작동을 포착해내기 위해 문자주의로부터의 탈피가 요구된다. 그래야만 실상이 우리 앞에 오롯이 드러난다.
전전 일본 파시스트 국가주의자들은 ‘만세일계'의 ‘황국의 은혜'를 갚아야만 신민의 존재의의가 드러난다는 허구 아래 민중을 죽음의 늪으로 밀어 넣었는데, 이른바 ‘카미카제(神風) 특공대'가 바로 자발적 희생(실지로는 타율적 개죽음이긴 하지만)을 유도한 대표적인 예이다.
정신대란 일제의 침략전쟁이 1940년대에 들어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자 전쟁수행에 필요한 일본 및 식민지, 점령지의 탄광, 군수공장, 철로, 비행장, 병원 등에서 ‘근로할’ 인력을 일본과 그 밖의 점령지에서 남녀구별 없이 차출, 징용한 조직을 통칭한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후 식민지 청장년 남자에게는 전장의 출진을, 여성에게는 의료, 보도, 군수공장의 근로사역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강제동원에 응하도록 사회 분위기를 몰고 갔다.
일제의 남녀 강제징발은 이미 태평양전쟁 이전부터 행해졌으나 전황이 점차 불리해져간 1942년에 들어와서부터는 한층 본격화되었는데, 전쟁기간 동안 총 60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 중 여성동원의 경우 일제가 ‘여자근로정신대’라는 허울을 씌워 징발했지만 이것은 ‘군 위안부’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한 술책이었으며, 대부분 각 전선의 일본군 성 노예로 압송되었다. 피해자들의 일치된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예외 없이 거의 모두 처음에는 근로정신대에 동원되어 갔지만 최종적인 근로처는 ‘군 위안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강제 납치되어 인생을 일본 ‘황군’의 배설 받이로 소진당했던 우리의 여염집 부녀자들 가운데 그 누가 ‘자신의 몸을 던져 제국천황에 희생’하려고 했단 말인가? ‘일본군 위안부’라고? 이 말도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좋다. 먼저 이 말의 기원부터 따져보자. 일본의 언론 지상에 이 말과 함께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72년, 함경남도 함흥출신의 배봉기 여사가 오끼나와에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폭로한 것이었다.
그 후 이들에 대해 한-일 양국의 언론과 일반인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1991년 8월 14일, 당시 김학순 여사가 “내가 바로 일본군에 매음을 강제 당했던 위안부”라고 폭로하면서 일본까지 건너가 일본정부에 그 죄행 인정과 함께 모든 ‘종군 위안부’에게 적법한 배상을 요구하고 나선 장거 때문이었다.
배봉기나 김학순 두 사람이 모두 스스로를 ‘성 노예’라고 말하지 않고 ‘위안부’라고 자칭한 그 자체가 그들이 일본군에 기만당했음을 시사한다. 무슨 말인가? ‘위안부’라는 단어에 대해 일본의 권위있는 사전 가운데 하나인 고지엔(廣辭苑)은 “일제 때 군을 따라서(종군하여) 전장에서 군인들을 ‘위문’해준 여자”라고 뜻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 ‘위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또한 ‘종군’이 자원한 것인지, 강제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요컨대 사전도 피해자들이 당했던 강제와 형언불가의 잔학한 성 학대라는 실상전달을 외면하고 있듯이, 당시 군 내부에서도 이들을 ‘위안부’라고 미칭했다. 그러기에 당사자들은 그저 습관적으로 자신을 그렇게 일컫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종군 위안부’ 혹은 ‘군 위안부’ 따위의 용어는 모두 자원해서 종군한 종군기자, 종군 간호사와 같이 그들도 마치 “참전군대 병사들에 대한 ‘위안’을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처럼 분식한다. 그런데 실상은 어디 그런가? 배, 김 두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함경남도 함흥출신의 배봉기 할머니의 경우, 일제의 최후발악이 한창이었던 1944년 말 오끼나와로 끌려와 하루에 최고 100명의 일본군을 상대해야만 했다고 증언했다. 김학순 할머니는 숫제 일본군에 강제로 납치당한 채 끌려가 ‘일본군 성 노예’로 전락한 신세였다. 그는 1939년 베이징의 어느 날, 자신의 중국인 양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던 중에 느닷없이 식당으로 들이닥친 한 무리의 일본병사들에게 납치되어 동북의 하얼빈(哈爾濱) 북쪽 교외에 위치한 일본군 기지로 끌려갔다.
두려움에 떨면서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온 그는 일본군의 협박과 강제에 배겨날 길 없었고, 결국 하루에 적을 땐 10여명, 많을 땐 30명도 넘는 일본군의 더러운 배설물을 받아야만 했다. 그 때 그는 16세를 갓 넘긴 소녀에 불과했다. 꽃다운 16세 소녀의 순결과 꿈은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듯 짓밟혔고, 그 날로부터 그녀는 자신이 왜 납치되어야 했는지, 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 왜 불가항력적 타자의 폭력과 부조리에 의해 결정되어야 했는지 알 수 없는 기구한 운명 앞에 던져졌다.
배봉기, 김학순 두 사람은 죽지 못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게오르규의 소설 ‘25시’의 주인공 모리츠와 같은 삶을 산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이런 실존을 두고 왜 우리가 ‘종군위안부’라고 부르는가! 일본군을 ‘종군’하면서 일본 군바리들을 ‘위안’했다고? 천만에! 그들은 애시당초 일본군에 ‘종군’할 의사도, ‘위안’할 그 어떤 이유도, 의무도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인권이 철저하게 유린당한, 그리고 이로 인해 파탄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일본군 성 노예’였다.
일제가 한국의 여염집 아녀자를 조직적으로 강제 납치, 징발하여 성 노예로 ‘공출’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후 일본군 내 성 노예제도를 실행하고 나서부터였다. 이때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군이 정책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운영해온 군 위안소는 전화의 확대에 따라 각지로 독버섯처럼 번져갔다.
일본군이 한 지역을 점령하면 제일 먼저 조치하는 것이 군 위안소 설치였다. 그 범위는 중국의 최북단 헤이룽장(黑龍江)유역에서부터 윈난(雲南), 하이난다오(海南島), 그리고 홍콩, 마카오 등지까지 일본군 점령지라면 예외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동남아일대로 확전되자 군 위안소는 중국을 넘어 필리핀, 싱가폴, 말래이 반도, 인도네시아, 영국점령지인 미얀마, 베트남, 태국, 오가사와라(小笠原), 남태평양의 여러 군도, 심지어 북쪽으로 러시아령의 치시마(千島)군도, 사할린, 홋까이도까지 확대 설치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 도발부터 제2차 대전에서 항복하기까지 15년 간 이들 지역의 군 위안소에 성 노예로 강제 동원되어온 부녀자는 최소한 40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의 국적 또한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 싱가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네덜란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등, 수 십 개국이었는데, 말하자면 일제는 국적을 불문하고, 인종을 가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납치하여 성 노예로 삼은 셈이다.
일본군대의 성 노예는 일본군국주의의 산물이자 그들의 퇴영적 성 문화인 근대 섹스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 노예 여성들에 대한 학대가 일본군의 한 제도로서 정착되기까지 대체로 세 단계를 거쳤는데, 그 첫 단계 이전의 배경부터 거슬러 올라 가보자.
메이지 초기 1868년에서 1882년 사이 동양의 베니스 중국 상하이에는 많을 때 600명이 넘는 일본인 거류민이 몰려들었다. 그 중 3분의 2가 여성이었고, 이들 가운데 6~7할이 중국주재 서양인을 상대로 하는 접대부 겸 매춘부(소위 ‘게이샤’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이 모두 몸을 판 것은 아니었기에 ‘접대’와 ‘매춘’의 상호 경계가 모호하다. 따라서 이후 경우에 따라 게이샤를 단순 접대부와 매춘 행위자로 나누어 후자를 ‘위안부’로 칭하겠음)였다.
1877년 최초로 일본 접대부 유곽 東洋茶館이 상하이 수저우루(蘇州路)에 생겨났다. 일본인 유곽은 날로 번창했고, 호황은 일본국내 ‘게이샤’들의 해외진출을 자극했다. 일본학자 모리자키(森崎和江)의 주장에 따르면, 이 기간 중 최고 800명에 달하는 일본인 직업여성이 상하이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근대 일본의 섹스산업의 번성을 반영함과 동시에 근대적 산업에 내쳐진 일본농촌의 피폐 및 도시빈민의 창궐을 투영하는 기형적 사회현상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후진’의 아시아를 벗어나 근대를 지향하겠다고 한 일본이었다. 서양열강에 대한 국가 이미지 실추를 염려한 일본제국정부는 한때 게이샤들의 중국 ‘진출’ 단속과 함께 현지의 접대위안부 5~600명을 강제 귀국시켰다. 그러나 부실한 단속은 노도 같은 접대위안부들의 연명에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이때부터 일본제국정부는 단속보다 그들을 적절히 관리하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1905년, 상하이 일본영사관은 ‘게이샤(藝者)영업단속규칙’을 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모든 현지 접대위안부들이 영업허가증을 발부 받도록 했다. 근대 일본형 공창제도의 해외판 남상이었다.
상하이 일본 거류민들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여성들의 매춘은 갈수록 성행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 게이샤를 사들여와 매음을 강요하는 ‘貸款敷(일명 游女屋으로도 불렸음)’와 같은 전업유곽이 적지 않게 여럿 생겨날 정도였다. 당시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은 이들 유곽에 세금을 징수했는데, 1908년 상하이 전체 접대위안부들이 낸 세금액은 미화 4,750달러나 되었다. 거류민단 총 세수의 22.3%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또 1928년 상하이 거주 일본인 직장인은 모두 1만3.458명인데, 그중 접대부 및 위안부가 628명으로 전체 거류민의 5%나 차지했다고 하니 그 실태가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만하다. 이런 물 좋은(?) 환경이 바로 1930년대에 들어서 현지 주둔 일본군과의 결탁을 용이하게 만든 요소였다.
주지하다시피 일제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방어를 구실로 대외팽창을 끊임없이 시도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1910년대의 시베리아 출병 등은 사실상 방어전이 아니라 모두 군국주의적 해외파병이었다. 그런데 산둥(山東)의 지난(濟南), 칭다오(靑島) 및 만저우(滿州), 시베리아 등 일본군이 지나간 지역과 대만과 같은 식민지에는 유곽설립이 장려되었고, 이를 현지주둔 일본군이 부분적으로 관리하였다.
이 때 관리란 성병의 군 내부 전염을 우려한 일본군 지휘부가 경찰 감독 하에 군의관으로 하여금 주1회 일본인, 유태인, 중국인이 경영하는 유곽의 위안부들을 정기적으로 검진한 것을 말한다. 일본인 포주는 물론 현지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영업허가를 득해야 했다.
특히 1918년부터 1922년 10월까지 일본이 감행한 시베리아 출병의 경우, 시베리아를 포함하여 중국 만저우 지역에 출격, 주둔한 일본군은 도합 11개 사단병력이었다. 최장기간 주둔한 사단이라야 만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 군 지도부와 계약을 맺은 일본인 포주는 위안부들을 데리고 시베리아 등지까지 ‘종군’하는 ‘특혜’까지 누렸다. ‘성’ 군납업자들인 셈이다.
그러나 일본군 사병의 저급한 급료(당시 이등병의 매월 급료는 3원 81전)로 말미암아 종군위안부들은 왕왕 일본군보다 급료가 열 배가 넘는, 같이 참전한 미군을 선호하고 상대하였다. 이 때문에 일군 사병들은 애꿎게도 정액을 백계 러시아여성에 뿌리고 다녔다. 결과는 성병의 만연으로 나타났고, 매독, 임질 등 각종 성병 발병자는 전체 병력의 2할에 가까운 1개 사단 병력의 1만 2천명에 육박했다. 이 숫자는 당시 전투로 인한 사망자수를 능가하는 것이었고, 또한 군 기강해이와 심각한 전투력 상실마저 초래하였다.
사정이 이쯤 되면 군으로선 위안부들을 ‘관리’할만도 했다. 일본군 지도부는 앞으로 더 빈번해질 해외출병에서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저하와 군의 사기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군 내부의 성욕해소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기존의 사설 접대위안부를 활용하는 과도기적 형태를 생각해냈다.
앞에서도 언급한바 있지만, 우리가 문제시하는 소위 ‘군 위안부’는 군 본령의 전투기능을 유지시켜주는 군의 살붙이로서, 하나의 제도로 정착되기까지 세 단계를 거친다. 첫째 단계는 민간업자를 군 지정위안소로 지정한 일종의 위탁 형식이었다. 이러한 위탁 위안소가 생겨난 계기를 제공한 것은 ‘1.28 상하이사변’이었다. 상하이사변은 일본육군이 1920년대부터 동북지역에서 끊임없이 일으킨 군사도발의 연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일본이 만저우국(滿州國)수립을 획책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서방열강의 의심에 찬 눈초리를 남방으로 돌리게 하려는 의도를 반영하는 국지적 도발이었다.
이런 목적에서 1932년 1월 28일, 일본은 화중지역의 경제, 정치, 군사 요충지이자 반일 움직임이 고조되고 있었던 상하이를 공격했으나 중국군의 예상 밖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자 일본은 긴급히 본토에서 육군과 해군육전대 병력을 대거 증파시켰다. 상하이 일대에는 증파된 군 병력까지 3만 명의 일본군 장정들이 득실거렸고, 그들은 하나 같이 부녀자 겁탈에 혈안이 되어 전쟁통에 수많은 부녀 강간 및 폭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중국뿐 아니라 서방열강으로부터도 심한 빈축을 살 정도로 여론이 악화되었고, 일본군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지 육, 해군 지휘부는 각기 해결책을 강구했다.
먼저 일본해군은 홍커우(虹口)에 소재한 일본 민간인이 드나드는 한 유곽을 해군의 지정위안소로 정했다. 요컨대 민간 및 군 혼용 위락소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위안소라는 간판도 내걸지 않았고, 또 위안소라는 이름도 없었다. 이 같은 위탁 형식의 위안소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이것이 상하이에 출현한 데는 이곳이 일본군의 집결지였다는 배경이 작용했다. 상하이사변이 끝나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내 위안소도 대거 철수한 것이 이 점을 말해준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 해말 상하이 전역의 해군 전용 위안소는 총 17개소에 달했고, 접대부 279명, 위안부 163명이 이에 종사했다.
한편, 일본 육군은 성욕해소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전쟁과 성은 어떤 상관 계수를 지닐까? 일본육군의 최정예로 평가받았던 관동군은 1931년 9.18 만저우 사변을 일으키면서 극도의 성 기갈 사태에 직면했다. 이 때문에 장교, 사병들이 영외에서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관동군지휘부도 이를 묵인해왔다. 이들의 성욕 해소처는 따리엔(大連), 뤼순(旅順), 창춘(長春), 차하얼(察哈爾), 지금의 선양(瀋陽)인 펑티엔(奉天), 하얼빈, 무단장(牧丹江) 등 모든 관동군 주둔지의 요정(주로 고급 장교들이 이용), 구락부, 각종 술집 등 민간 위락소였다.
이들 업소 가운데는 군 지휘부와 계약을 맺어 위안부를 데리고 관동군의 출동 전투지까지 쫓아가는 포주도 있었다. 이듬해 3월, 만저우괴뢰국이 수립될 즈음에는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이주자의 대량 이입으로 인한 특수와 맞물려 관동군의 주요 거점 도시에는 위락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 업소가 군 위안소의 기능을 대신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고, 매춘뿐만 아니라 아편흡식, 도박, 인신매매, 살인청부도 획책되고 자행되는 곳이기도 했다.
한 가지 특기할 일은 관동군 지휘부가 사병들의 중국인 위안소 출입을 엄금시킨 점이다. 일본군 장병들은 게이샤보다 상대적으로 화대가 싼 중국인 위안부를 찾아다니곤 했는데, 중국인 위안부는 위생상 성병감염을 빈발시켰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본으로부터 한꺼번에 몇만 개의 콘돔을 공급해 오기도 하고, 한국에서 기녀를 공출하도록 한국주둔 일본군부에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반도출신’기녀는 일본 게이샤의 대타로서, 중국인 위안부보다 더 선호되었음을 보여준다.
아사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 관동군 지배지역에서는 이미 1933년부터 군이 관리하는 위안소가 생겨났다는데, 한국인 위안부가 다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후와 달리 이때는 주로 민간포주 업자와의 계약에 의존하였고, 군의 관여도 군의 정책으로서 전군을 대상으로 하는 계획, 모집, 배치, 관리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다른 한편, 여성의 동원에 일본 국가권력이 개입했다는 최초의 물증은 1932년 1.28 상하이 사변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일본군의 야만적인 성범죄 확산을 막기 위해 휘하의 부참모장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의 건의를 받아들여 홍커우, 우송(吳淞), 바오산(寶山), 전루(眞如)등 일본군 점령지에 위안소를 설치하고자 했을 때 일본의 지방정부가 일조했다는 사실이다. 상하이 파견군 참모 오까베 나오사부로(岡部直三郞)가 전반적인 기획을 맡았고, 오까무라가 이번에는 나가사끼현 지사에 연락하여 게이샤를 불러 모아 위안부 단체를 조직해 중국으로 송출하도록 요청하였다.
나가사끼현 지사는 협조요청을 받고 나가사끼 관내 경찰과 합동으로 게이샤 및 민간부녀자 공출에 협력하였다. 군부가 지방정부로부터 일본 국내의 직업여성을 위안부단체로 공급받은 것은 중국 현지의 접대위안부를 모집하여 군위안부로 활용한 해군보다 진일보한 형태로서, 군대 성 노예 제도로 나아가는 제2단계 형태였다. 지방정부와 경찰이 지원한 것은 분명 일본중앙 정부 내무성의 적극적인 지지, 혹은 적어도 묵인이 없었다면 성사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30년대 초기는 이처럼 군인전용 위안소가 민간인 포주업자에 위탁, 지정되면서 군, 민혼용 위안소와 사창이 혼재해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일반 민간 위안소 소속 위안부와 달리 군전용 위안소의 위안부는 사병들의 성병예방 차원에서 주 2회의 엄격한 성병검사를 받도록 하면서 군이 부분적으로 관여했다.
그러나 그래도 이때의 위안부들은 거취가 ‘비교적’ 자유로웠고, 나중에 거주가 제한당하고, 인신이 구속당하는 성 노예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으로 넘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세 번째 최종 단계인 군대 성 노예의 제도화는 난징대학살 이후에 전격적으로 실행되었다. 양자는 어떤 인과관계에 있었는가? 그 배경부터 살펴보자.
1937년 7월, ‘천황’의 직속기관이었던 대본영이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 획책으로 포연을 화북으로 치솟게 하자 중국국민정부는 장기전 전략을 세우면서 8월초 군의 주력을 화동의 상하이지역으로 후퇴시켰다. 이 때 일본군도 이 지역으로 진격했지만 국민당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일본 대본영은 즉각 육군을 주력으로 한 상하이 파견군을 편성하고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중국군의 예상 밖의 선전에 쌍방의 전투는 한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9월 10일 기존의 제3사단, 제11사단에 이어 제9・ 제13・ 제101사단 및 제10군(제6・ 제18・ 제114사단과 기타 5개 단위 병력)을 증강시킴으로써 전황은 일변하였다. 결국 치열한 공방 끝에 11월 12일 상하이는 일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이때 상하이 점령작전에 투입된 일본군의 총 병력은 1.28사변 때 보다 열 배가 넘는 30여만 명이었다. 상하이 공략 후 일본 대본영은 연이어 바로 당시 중국의 수도인 난징공격을 명령하였다. 제10군의 경우 수도 진격 전에 이미 발 빠르게 큐슈 등 본토의 게이샤들을 뒤따르게 했고, 또 저장(浙江)일대의 현지 중국인 부녀자들을 강제로 납치하여 위안부로 충당하는 민첩함을 보여 주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수도 난징점령은 중국군의 사기와 전투의지 저하라는 심리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심장부 난징과 경제중심지 상하이 선을 잇는 화중, 화동지역의 확보는 이후의 전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 대본영은, 항복요구에 거부하면서 장기 항전의 의지를 보이는 중국국민당군에 본때를 보여줄 참으로 난징공략에 전력을 다하도록 현지 군 수뇌부를 독려했다. 1937년 12월 초, 일본군의 남경입성에 즈음하여 화중방면군 제10군 사령관 야나가와 헤이스케(柳川平助)는 휘하 장병들에게 “산천초목이 모두 적이다”라고 적개심을 고취시켰고, 상하이 파견군도 “남김없이 보이는 대로 모두 죽여라”는 명령을 발포했다.
마츠이 사령관은 난징점령 직후 다시 한 번 학살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은 곧 일본 최고군부의 의향을 받든 것이었고, 그것은 곧 ‘천황’의 성지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히로타 코우끼(廣田弘毅) 외무대신도 난징으로부터 각종 천인공노할 일본군의 만행에 관해 즉각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음에도 이를 전혀 저지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바로 ‘천황’의 성지를 받든 군부의 독주에 동조하였기 때문이다.
적개심에 불탄 야수들의 만행이 시작되었다. 일주일간의 집중적인 약탈, 방화, 겁탈, 윤간, 폭행, 고문, 살해, 매장이 진행되는 가운데 난징은 형언 불가능한 참극이 벌어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그 후로도 약 2개월에 걸쳐 패잔병, 포로, 일반 시민에 대한 학살 등 잔학행위는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사망한 자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30만 명 이상은 되었다.(중국 측 주장은 43만 명, 일본인 가운데는 秦郁彦 같이 중국 측 주장을 받아들이는 학자도 있고, 또 1938년 1월 7일 외무대신 히로타는 주미일본대사에게 보낸 전보에서 피살자가 최소 30만 명 이상이었다고 했다. 또 일부에서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의 판결서가 명시한 20만 명 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현 일본의 극우파는 피살자의 숫자는커녕 사건자체에 대해 완전 오리발을 내민다.)
당시 중국 현지를 취재한 영국기자 팀플레이(H. J. Timperley)가 묘사한바 있듯이 “인류가 생겨난 이래 처음으로 보게 된 살아있는 지옥”, “그 야만의 정도는 유럽 중세암흑시대의 야만행위를 능가”했고, “현대사상 가장 어두웠던” 사건이었다.
부녀자 겁탈은 8세 유아부터 70세 된 노인에 이르기까지, 학생에서 비구니에 이르기까지 연령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겁탈당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부녀를 겁탈한 후는 총이나 군도로 죽이지 않고 반드시 “때려” 죽였다. 독자들 가운데는 당시 일본군이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모두 누가 아녀자를 더 많이 겁탈하느냐, 누가 더 많이 목을 치느냐하는 겁탈경쟁, 살인경쟁을 저지르는 사진을 본 사람이 있을 줄 안다.
난징입성 전 11월 21일 수저우에서 1,320여명(이 중 230명은 한 장소에 가둬놓고 모든 장교들이 윤간했음), 12월 19일 양저우(揚州)에서 350명, 난징입성 3일 후 ‘자유행동’이 허락된 날 또 1,000여 명이 강간당하는 등 난징학살의 전 기간 동안 도합 8만 명의 부녀자가 겁탈 당했다.
인류역사상 미증유의 강간 및 집단 윤간은 일본군내에 각종 성병을 급속히 전파시키는 자업자득을 초래했다. 또한 이로 인한 군기해이, 질서문란은 극에 달했다. 사령관 마츠이 대장의 명령 하에 실시된 검사 결과 제3・ 제9・ 제11・ 제13・ 제18・ 제114사단은 물론이고, 각종 예하 독립부대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부대에 성병이 심각하게 퍼져가고 있음이 드러났다.
마츠이의 뇌리에 일순 시베리아의 악몽이 스쳐갔다. 그는 ‘1.28상하이 사변’시의 해군, 육군을 모방하여 즉각 화중방면군 참모장 쯔까다(塚田攻)에게 군 위안소 설립을 명령했고, 일본 간사이(關西)지역 각 현의 지사에게 협조가 요청되었다. 현지 부녀자 모집은 예하 제11병참사령부가 담당했다. 병참부대에 맡겨지다니, 부녀자들이 군의 보급품쯤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병참사령부는 나가사키, 후쿠오까(福岡) 등 지방정부의 지원 아래 12월 하순 이시바시(石橋德太郞)등 군속 모집관을 당지로 파견하여 ‘위안부 모집처’를 설치하였다.
이시바시 등 모집관들은 간사이 일대의 35세 이하, 성병 없는 여성을 감언이설로 속여 일차로 104명을 중국으로 끌고 갔다. 즉 한 사람당 1,00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거금의 선수금을 일시불로 쥐어주면서 전선에 나가 매일 5명 정도의 군인을 ‘위안’하여 3~4개월만 일하면 원금은 상환할 수 있는데, 이 돈만 청산하면 언제든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속인 것이다. 모집에 소요된 모든 비용은 모두 일본대장성이 직접 파견군에 지급한 ‘임시군비’였다. 이 임시군비는 바로 일본정부의 ‘임시국채’에서 충당되었다. 모집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고 패색이 짙어 갈수록 더해갔다.
한편, 일본여성의 경우, 모집에 응한 자들 가운데는 직업 게이샤들이 상당수였지만 빈궁한 농촌여성들이 거금에 현혹되어 난징까지 잡혀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은 이 시기 이미 이러한 초국가적 탈법행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시스템이 중단된 상태였다. 중-일전쟁 도발 후 ‘치안유지법’을 필두로 각종 민중탄압법이 맹위를 떨쳤고, 불충분했던 사상, 언론자유 마저도 철저히 통제되어 국민은 완전한 무권리 상태에 놓여졌다. 헌법이 보장한 국가기관은 이미 파시스트 군부 독재정치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의 연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전 국민을 전쟁으로 내모는 국가 총동원체제로 연결되고, 민중은 국가주의를 떠받치는 한 세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부녀자들은 거의 다가 여염집 아녀자였다. 직업여성으로서 한국인 위안부가 상하이 주재 일본조계 경찰에 최초로 조사된 것은 1936년 12월이었는데, 당시 29명이 7개소의 해군 전용 위안소와 7곳의 군, 민혼용 위안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처럼 극소수의 직업위안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 내각의 지시를 받은 조선총독부 및 경찰에게 협박당하거나 속아서 ‘징발’당한 경우였다. 중국인 성 노예는 현지 군인에게 강제로 납치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난징의 위안소까지 끌려온 여성들은 1942년 말에서 이듬해 43년 2월을 기준으로 일본인이 2,704명(58.79%), 중국인이 1,682명(36.56%), 한국인이 214명(4.65%), 도합 약 5,000명에 이르는 방대한 인원이었다. 화중방면군의 위안소 개설에 이어 각지의 주둔군도 잇달아 위안소를 개설하였는데, 이들 각 군 소속의 성 노예들과 일반인이 경영하는 민간 위안소의 위안부를 모두 합하면 숫자 세기는 더욱 아득해진다.
일본 군부는 난징에 집결시킨 여성들을 각 군으로 분배하는 것을 포함하여 전반적인 관리통제를 가할 필요성에서 1938년 4월 난징의 일본영사관과 연석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관리지침까지 마련하였다.
첫째, 육, 해군전속 군대 위안소와 영사관은 무관하다.
둘째, 일반인, 군인 혼용 위안소의 포주는 영사관의 경찰이 관리하고, 이 위안소에 출입하는 군인, 군속은 헌병대가 책임을 맡는다.
셋째, 필요할 경우, 헌병대는 어떤 위안소도 검사, 단속을 가할 수 있다.
넷째, 향후 민간인 위안소도 군대 위안소로 편입시킨다.
다섯째, 군대가 위안소를 개설할 때는 반드시 위안부의 원적, 주소, 성명, 연령, 출생 및 사망 등 신상 변동 사항을 영사관에 통보해 줄 것.
위 지침에서 드러나듯이 성 노예는 완전히 군, 관 합동으로 ‘관리’된 것이다. 여기서 군대 성 노예 동원에 국가권력이 개입, 종용한 사실이 또 한 번 여실히 드러났으며, 이 여성들의 개인적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성 노예를 통제했던 각종 수칙, 이를테면 성 노예 여성의 군 영내거주 및 성 ‘복무’규칙을 명기한 규정 등이 많이 있지만, 이에 관해선 지금까지 언론보도나 관련저술에서 여러 번 거론된 바 있으므로 여기선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러면 일본장병들은 악행을 거부할 이성력은 없었는가? 그들은 모두 타고날 때부터 악마의 화신들이었는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모두 생득적인 악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보편 일본인들은 대체로 후천적으로 쉬이 상황논리를 수용하고, 언제라도 악과 타협할 심성과 정신성이 인자화 되게끔 만드는 문화 속에 살아간다.
일본속담에 “(익명성이 보장된)낯선 타지에서는 무슨 짓을 하든 개의치 말고 부끄러워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시사하듯이 일본인들은 타지에서 행하는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한 짓에 대해선 죄의식이 보송보송해진다. 더욱이 그들은 당시 국가, 군대라는 조직에 수직적으로 귀속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니 개인행위의 책임을 모두 조직과 집단에 미루어버리기에도 좋았다. 병사들 가운데는 물론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타율적 규율에서 오는 강박감, 혹은 일본사회 특유의 계급적 모순 즉, 장교, 하사관 및 사병들 간에 입대 전 출신계층의 위화에서 기인한 불만을 엽기적 범죄로 해소하려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또 당시 일본군에 주입된 군인칙유, 戰陣訓 따위는 “살아서 포로의 수치를 당하지 말라”라는둥,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고 각오하라”, 혹은 “상관의 명령은 곧 짐(朕)의 명령이라고 명심하라”고 얼러댔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들의 죄과가 조금도 면죄될 순 없겠지만, 오랜 세월 자아의 존재감을 집단귀속에서 찾고, 그 행위를 집단화하면서 개인을 매몰시켜버리는 몰개인적, 몰개성적으로 살아온 일본민족이 이같이 집단의 최고 형태인 군대의 군인신분이 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 행동했을지 상상해 보라. 가히 그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 떼가 아니었겠는가?
일본군의 제도적, 조직적인 부녀 강간, 윤간, 폭행, 살해, 매장, 성 노예동원 등의 반인륜적 폭거는 전후 연합군의 동경재판 및 난징, 상하이, 마닐라, 사이공, 랭군, 괌 군사재판에서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A급 전범을 심리한 동경재판이나 또 B, C급 전범을 다루었던 난징 등지의 군사재판도 모두 제대로 된 응징에는 실패했다.
전자가 전후 미국의 대일정책의 변경으로 일왕을 위시하여 전쟁을 획책한 국가 차원의 A급 전범들을 단호하게 처단하지 못했다면(체포, 구금된 용의자 100명중 28명만 피소되어 전원 유죄 판결 받았지만 그 중 일부는 나중에 이런저런 이유로 석방되어 정, 관계 등에 복귀), 후자 역시 일본군부, 나아가 국가가 조직적으로 개입하여 자행한, 성 학대와 관련된 범죄를 정죄하기엔 마찬가지로 불충분한 재판으로 끝났다.
중국정부는 전후 1946년 10월부터 전쟁범죄처리위원회(주임위원은 秦德純 국방차장)를 구성하여 난징사건에 개입한 일본의 죄과 및 기타 전범 심리에 착수했으나 일본군이 형언 불가능한 범죄에 국가가 개입되었음을 표증하는 대량의 자료들을 ‘군사기밀’로 취급하여 모두 소멸시켜 버린 관계로 목적달성이 여의치 않았다. 일본의 증거인멸, 그리고 재판이 창졸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사가 불충분했고, 자료도 미비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미국이 당초와 달리 일본을 장제스(蔣介石)의 중국 국민당 대신 공산세력의 확산을 막을 “극동에서의 반공의 벽”으로 키우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꿈으로써 타협적, 편의적 태도로 재판을 이끌었던 것이 본질적 원인이었다.
따라서 일본정부와 일왕이 개입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책임추궁은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일본의 국가적 범죄를 개인의 행위로 축소하여 치죄하는데 그치고 만 것이다. 이것이 현금 일본정부가 다시 군대 성 노예에 관해 ‘국가적 오리발’을 내밀고, 과거사를 왜곡하는 또 다른 범죄를 낳고 있는 것이다.
현재 극우파 정신병자들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과거를 지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은 1993년과 1996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과 하시모토(橋本龍太郞) 수상이 국가의 개입 및 법적 책임에 관해 딱 부러지게 밝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각각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이른바 ‘군 위안부’의 존재는 인정했다. 또 사과도 했다. 일본정부의 사과에 분개한 그들이기에 누구보다 군대 성 노예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시종일관 모르쇠로 딱 잡아떼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학생인 어린 자기 딸들에게는 “그런 비교육적인 것”을 보여줄 수 없다는 모순된 정신상태를 드러낸다.
그들이 사과는커녕 "일본군 성 노예"의 존재마저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과거 일제의 근린제국유린이 명백한 침략행위, 침략전쟁이었음에도 아시아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한 해방전쟁이었다고 호도, 정당화하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자아도취적 공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전쟁에 대한 그 어떤 책임론도 그들에게는 수긍할 수 없는 일이다.
반면, 그들은 자신의 선배들이 저지른 난징대학살과 성 노예는 아는바 없다고 잡아떼면서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에 대해선 자기들이 지은 죄보다 더 크게 치죄되었다고 항변한다. 미국의 원폭투하를 상징하는 히로시마의 철골만 앙상한 돔 양식의 피폭 건물은 보란듯이 남겨놓고, 전후 연합군이 A급 전범을 심리한 일본육군사관학교, 그리고 7명의 전범을 처형한 스가모(巢鴨) 감옥은 모두 흔적도 없이 깡그리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각기 東京市政廳과 마천루로 탈바꿈시켜놓은 것은 무슨 의도에서였겠는가? 미국이 가해자이고 자신들은 피해자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이들의 ‘골통’에 고이게 되는 것은 과거 ‘대일본제국의 광영’에의 향수, 그리고 八宏一宇의 꿈을 산통 낸 ‘미 제국주의’의 ‘가해’에 대한 ‘복수심’ 말고 또 무엇이 더 있겠는가? 그러니 극우파들은 동경재판을 힘의 논리에 의한 전승국의 ‘징벌적 재판’이었다고 강변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것도 부족한지 그들은 자신들이 남긴 기록들을 현재 시점에서 환원하여 재구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듯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도 지배할 것이라는 전근대적 ‘미신’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가 갈파했듯이 과거는 변경시킬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타니 히사오(谷壽夫-당시 화중방면군 제10군 휘하의 제6사단장) 등이 난징을 점령한 후 자행한 난징(南京)대학살은 잔학의 극치를 보여줬고, 또 이를 부인할 수 없는 자료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학살의 만행은 일본군부가 전대미문의 군대 성 노예제도를 전격적으로 실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는 우리자신을 이성적인 자세로 스스로 점검하는 일이다. 일본 극우세력을 대상으로 성 노예에 관한 부정과 왜곡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면서 말과 실제가 서로 부합되지 않는 명분을 내건다면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목적 성취 또한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도 올바른 명분 세우기를 강조하지 않았던가? 정의와 이상의 구현, 바른 사회의 실현은 먼저 명과 실의 계합이 전제되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아는가? 같은 한자라도 경우에 따라 한-중-일 세 나라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예컨대 하다못해 ‘愛人’이라는 단어만 해도 그렇다. 이 말이 중국인들에게 부부사이의 상대를 남에게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한국인들에겐 결혼 전의 특별한 남녀사이를 일컫고 있는데 반해 일본인에게 “이 여자는 제 애인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분명 그 일본인은 낯빛은 바꾸진 않겠지만 내심 이 한국인 남녀를 불경스럽게 여길 것이다. “부인 몰래 내연의 처와 일본까지 애정행각을 벌이러” 온 것으로 여길테니까 말이다.
8.15광복절이 수 없이 반복되어도 소갈머리 없이 일본군국주의의 찌꺼기인 ‘정신대’, ‘군 위안부’ 따위의 부적절한 용어들을 무신경하게 그대로 쓰고 있을 때 일본극우파들은 ‘어쩔 수 없는’ ‘조센징’을 비웃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근절되지 않는 집단 망각 행위는 일본 ‘황군’의 군화 발에 짓밟혀 한 많은 삶을 살다간, 또 나머지여생을 살고 있는 이 땅의 ‘성 노예’ 할머니들이 품고 있는 영원 속의 ‘순결’을 또 한 번 더럽히는 꼴임을 명심해야 한다.
위 글은『월간중앙』2001년 9월호에 게재된 원고입니다.『월간중앙』에는「왜 우리가 ‘종군위안부’라고 부르는가? 그들은 ‘일본군 성노예’였다」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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