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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가 포항으로 온 까닭을 아는가?

雲靜, 仰天 2014. 11. 4. 18:57

해병대가 포항으로 온 까닭을 아는가?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아는가? 달마가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그 까닭은 몰라도 흠이 되지 않는다. 허나 포항사람들이 해병대가 포항으로 온 까닭을 모르면 흠이 된다. 어쩌면 그건 애향심이 증발된 사람으로 보일 지도 모른다. 해병대는 포스코, 영일만과 함께 포항을 상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과거사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유에서다. 전국민이 알고 있는 존재이니 포항시민이라면 “귀신 잡는 해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다. 해병대 출신이거나 박람강기(博覽强記)한 사람이라면 해병대가 1949년 4월 15일에 창설된 것이라는 사실쯤은 안다.

 

 

해병대의 마크. 리본, 독수리, 닻, 별로 형상화돼 있다.

 

그런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아는 이가 드물듯이 해병대가 포항에 주둔하게 된 까닭을 아는 이도 드물 것이다. 정말 해병대는 그 많은 지역 중에 왜 하필이면 포항에 주둔하게 됐을까? 일부 소수의 향토사학자나 해병대 간부를 제외하면 선뜻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안보적 배경과 이를 현실화 시킨 숨은 일화들이 있다.

  

한국전쟁 시 북한군에 빼앗긴 수도 서울을 수복한 해병대는 휴전 후에도 경기도 파주군 금촌에 본부를 두고 서부전선의 최고 요충지인 임진강 하구일대와 판문점 지역에 배치돼 서울 방어임무를 수행해오고 있었다. 즉 서울을 수복한 것도 해병대요, 서울을 지킨 것도 해병대였다. 그런데 돌연 1959년 2월 해병대는 육군 제1사단에게 임무를 넘겨주고 포항으로 이동하라는 대통령의 특명을 받는다. 그 내막으로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포항이 지닌 교통의 편리성 때문이다. 포항은 당시 국내 여타 다른 항구들에 비해 천혜의 항구가 있었고, 공항과 철도도 갖춰져 있었다. 지금도 해병대가 전략기동타격대로서 항만과 공항을 다 갖추고 동해, 서해, 남해든 어디로든지 쉽게 기동할 수 있는 곳은 포항이 유일하다. 수륙공 교통 시설을 다 갖추고 있음으로써 해병대 본연의 임무인 유사시 적지 상륙작전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된 곳이다.

   그래서 한국전쟁 이전부터 포항에는 중령이 사령관인 해군 포항경비부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또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 해병 제3비행사단이 포항에 주둔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금도 포항에 미 해병대 1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둘째, 한국군과 미군 측 두 장교의 숨은 노력이 계기가 됐다. 1958년 경에 귀국하기로 된 미 해병 제3비행사단은 캘리포니아로 이동하기 위해 포항을 떠날 예정이었다. 이들이 떠나고 나면 비게 될 포항을 두고 미 제5공군과 제8군이 각기 예하 항공대를 주둔시키기 위한 열띤 물밑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미 제8군에는 전략기동대가 없었다. 그래서 미 해병대의 편제와 동일한 1만8,000명 규모의 한국해병대를 미군의 전략기동대로 삼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을 미 제8군 작전부장이자 한국군 해병대 수석고문관 포니(E. Forney) 대령이 한국 해병대사령부 작전부장 공정식 대령(훗날 해병대 사령관 역임)에게 귀띔했다. 공 대령이 즉각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군사대외비가 한국측에 입수됐다. 그 결과 해병대가 미군에 배속되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포항이 주둔지로 결정돼 1959년 3월 12일부로 영일군 오천에 터를 잡게 된 것이다.

  

셋째, 독도가 일본에 침공당할 만일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포항항이 독도에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사실도 고려됐다. 당시 일본은 독도를 점탈하려고 갖은 시도를 해댔는데, 한국전쟁이 한창인 때도 우익 청년들을 보내 독도 상륙을 시도한 시절이었다.

 

 

해병대는 유사시 적지에 투입돼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중요한 국가전략기동부대다.

  

해병대의 포항 주둔은 한산한 항구도시에 불과한 포항이 상전벽해로 가는 첫걸음으로서 지역사회에 작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줬다. 당장 인구가 증폭했다. 해병대가 포항에 주둔함에 따라 1만8,000명에 육박한 대규모 병력이 유입됐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도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다. 포스코가 건설되기 전 포항시의 인구가 대폭 늘어나기 시작한 최초의 계기였다. 전근대화 시대에 노동력은 산업화의 핵심 동력이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포항이 행정구역상 포항시와 영일군으로 나눠져 있었다. 포항인구는 4만9,032명이었고, 영일군의 인구는 17만5485명이었다. 해병대가 들어온 이듬해인 1960년부터 영일군의 인구는 갑자기 약 4,000명이 늘어났고, 61년에는 약 1만5,000명이 더 늘어 19만4,041명으로 집계됐다. 이 해 포항시도 인구가 증가해 6만51명이 됐다.

  

해병대가 포항에 둥지를 틀게 되자 정부가 항만시설을 증설 지원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작전과 훈련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도시발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포철이 포항으로 오게 된 것도 해병대 덕을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포항에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어 국가 기간 산업시설인 종합제철소를 북한군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당시는 북한 공비들이 삼척 지구에 그치지 않고 경북 울진지역에까지 내려와 양민을 학살하고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던 때였다.

 

1970년대 포스코가 포항에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한 후로는 해병대가 국가 기간산업인 포스코의 안전을 책임지는 불침번이었다. ‘포항지역특전경비사령부’가 설립된 것도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공비들의 출몰이 잦아 동해안 지역의 안전이 불안한 시기 해병대 주둔 자체만으로 포항과 포철은 물론, 감포, 경주 지역에 이르기까지 공비출현이 억제됐다.

  

2만 명이 넘는 해병대와 그 가족의 소비는 지역경제에 활력소가 돼 왔다. 해병대가 포항시에 제공한 대민 지원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지금의 포스코 쪽 형산강 다리와 경주 쪽의 다리가 해병대공병들의 땀이 베인 것이다. 포항시 관내 여러 학교의 운동장 시설 공사도 지원했으며, 각종 문화행사도 벌였다. 필자의 모교인 포항중학교 운동부까지도 해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해병대에 얽힌 일화가 어디 이뿐이겠는가? 하지만 오늘은 ‘해병대가 동쪽으로 온 까닭’ 정도는 알게 돼 ‘뿌리를 아는’ 포항시민이 된 것으로 만족하자.

  

나는 아직까지 해병대를 종합제철소가 포항에 들어설 수 있는 토대를 닦은 포항발전의 숨은 공로자라는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데 주저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누구나 될 수 있다면 해병이 되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먹고 사는 해병대다. 내가 그들을 보는 눈이 남다른 이유다.

 

위 글은 2014년 11월 4일자『경상매일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