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호위무사의 충성과 대중적 인기 : 의리와 충성은 무엇이 다른가?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얼마 전, 체포된 유대균의 ‘호위무사’ 로 보도된 박모씨가 잠깐 화제가 된 바 있다. 그의 팬클럽까지 생겼다니 뉴스거리 이상의 관심을 넘어 인기인이 돼가던 중이었다. 그는 유대균을 위해 헌신적으로 호위했다. 체포됐을 때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나도 저런 호위무사가 있었으면 좋겠네!”라고 하면서 부러워한다.
이는 아마도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다반사고,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사회의 갈증의 한 표현일 수 있다. 또 반사회적, 반민주적 악행을 저질러도 돈만 있고, 자신에게만 잘 대해주면 그만이라는 이기적 금전지상주의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가 미모에다 영어 구사능력을 갖춘 촉망 받는 태권도 국제심판인 점도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 한 요인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박모씨에게서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일본 사무라이의 조건부적 충성의 한국적 잔재를 보고, 그를 칭송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선 묘한 환각적 이중성을 본다. 그것이 환각적 이중성이 아니라면 최소한 의리와 충성을 분간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자아도취적인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과연 의리와 충성은 무엇일까? 양자의 바람직한 존재양태는 어떠해야 할까?
역사에서 주군에 대한 가신의 충성심이 뛰어난 인물의 사례는 서양에도, 중국에도 부지기수로 많다.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다. 먼저, 서양 역사 인물들 중엔 기원 전 초대 로마황제로서 공화정의 동반자 겸 친구이자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에게 묵묵히 충성한 아그리빠(Agrippa Marcus Vipsanius, B.C. 62~A.D. 12)가 떠오른다. 아그리빠는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44) 사망 후 젊은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아우구스투스를 정계에 진출하도록 적극 도왔을 뿐만 아니라 그가 군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성공하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중국의 역사 인물로는 주나라 武王(B.C.?~B.C. 1043)이 신하임에도 천자인 은나라 紂王(B.C.?~B.C. 1046)을 멸하고 주왕조를 세우자 이에 반대해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首陽山에서 굶어 죽은 백이 숙제(伯夷와 叔齊, B.C.?~B.C.?) 형제가 맨 먼저 떠오른다. 또 명나라를 혁하고 새로 들어선 청나라를 거부하고 평생을 초야에 묻혀 생을 마친 명나라 유신 후앙종시(黃宗羲, 1610~1695)와 꾸옌우(顧炎武, 1613~1682)도 충성심이 돋보이는 역사인물의 반열에 넣을 수 있다.
우리 역사에도 충성심이 뛰어난 역사적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고려말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끝까지 고려조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절로 일관한 포은 정몽주(1337~1392)가 고려를 대표하는 충성스런 신하였다면, 여진족이었지만 태조 이성계(1335~1408)를 도와 조선건국에 앞장선 이지란(본명 퉁두란, 1331~1402)은 조선을 대표하는 충성스런 신하였다.
이 밖에도 임진왜란시 풍전등화, 경각지추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1545~1598), 동양평화를 교란한 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처단한 구한말의 안중근(1879~1910)도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다. 현대 인물로는 이 반열에는 들지는 않지만(들어서도 안 될 것이지만) 지난 세기 8~90년대 항간에 자주 우스갯소리로 거론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한 장세동(1936~)도 있다. 이렇듯 동서양의 충절지사를 거론하자면 수십 권의 열전을 쓰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까지 일본 에도(江戶) 시대 아꼬우번(赤穗藩) 소속의 ‘47인의 사무라이’들의 충성을 능가한 걸 보지 못했다. 예컨대 1703년 1월 그들은 자신들의 주군 아사노 타꾸미노까미(浅野内匠頭, 본명은 長矩, 1667~1701)를 모욕해 할복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다른 번의 영주 키라 코우즈께노스께(吉良上野介, 이름은 '요시나까'라고도 불림, 1641~1703)를 무참히 살해한 후 1명을 제외한 46명이 모두 차례차례 배를 가르는 할복으로 자살했다.
지금도 일본에선 이 겐로꾸 아꼬우(元祿 赤穗) 사건을 ‘츄우신구라’(忠臣蔵)라는 장르의 한 명칭을 가지고 인형극, ‘가부키’(歌舞伎)나 영화로 각색돼 매년 연중 상연되고 있을 정도로 의리의 화신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 47명의 일본 사무라이들의 복수는 주군에 대한 은혜를 갚으려고 한 행위로서 조폭식 의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거둬들여 살 수 있게끔 경제적 처우를 해준 주군에 대한 은혜인 ‘온’(恩)을 갚겠다는 것이었을 뿐,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은혜를 갚는 것을 과거 전통시대 일본에서는 ‘온가에시’(恩返し)라고 불리며, 시혜자와 피시혜자 둘 사이에는 ‘기리’(義理)로 얽혀 있었다. 겐로꾸 아꼬우사건의 경우 모욕을 당한 아사노 타꾸미노까미는 쇼군으로부터 당일 할복자결을 명령 받아 죽게 되고, 그의 領地는 막부에게 몰수당함으로써 소속 사무라이들은 영지에서 추방돼 실직 무사인 ‘로우닝’(浪人)이 된 배경이 복수극을 일으킨 주요 동기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사무라이란 모름지기 자신을 거둬준 주군에게 충성하고 그에 대한 의리를 배반해선 안 되는 것으로 가치화 돼 왔었다. 따라서 의리란 자신을 알아주고 대우해준 주군에 대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의식 혹은 행위를 가리킨다. 사무라이는 현재의 주군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언제든 자신을 알아주고 합당한 몸값을 쳐주는 새로운 주군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직업무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주는 주군을 만나면 그 주군이 비이성적, 반민중적, 몰역사적인 폭군이라도 충성을 바쳤다. 허나, 자신을 거둬주는 그런 주군을 만나지 못하면 떠돌이 낭인, 즉 로우닝으로 사는 것이다. 로우닝이란 곧 여러 가지 이유(폐번 당했을 경우엔 떠돌이 무사가 되고, 범죄를 저질러 주군에게 내쫓기는 경우도 있었음)로 실직자가 되면서 새로운 주군을 못 만나 소속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무라이를 가리켰다. 소속이 없다는 의미의 로우닝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요즘은 대학에 못 들어간 재수생을 가리키기도 한다.
과거, 최소한 12세기 말부터 명치유신에 이르는 수세기에 걸쳐 오랫동안 이름뿐인 虛君에 불과했던 ‘천황’과 별개로 정치권력의 최상위에 군림했던 바쿠후(幕府)의 쇼군(將軍)과 대소 271개의 각 번(藩) 영주들간의 주종관계 그리고 영주와 그 아래의 가신(관리계급인 家老와 무사계급인 사무라이를 포함)들 사이의 주종관계는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에 근거한 계약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마치 서양 중세시대 계약에 의해 주종관계가 형성된 영주(lord)와 기사(knight)의 관계와 같았다. 즉 주군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충성은 개인적 동기와 이익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 않았던 것이다.
의리는 무사를 무사답게 하는 무사도 정신의 정수였다. 무사계급에게 그것은 至高無上의 도덕적 원칙이었다. 이는 수치를 치욕으로 생각하는 일본인의 對人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사무라이에게는 이름을 위해서 죽기보다 의리를 위해 죽는 게 최고의 명예였다. 주군에 대한 의리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 바로 할복이었다. 통상 사무라이들은 주군에게 빚진 ‘온’(恩)을 갚으려고 해도 여러 가지 이유로 갚지 못하게 될 때 최후에 이 방법으로 '은혜갚음'을 표시했던 것이다. 할복으로 자살할 수 있는 건 무사에게만 주어진 주군의 은전이었다. 어쨌듯 의리는 무사도정신을 구성하는 가치의 일부에서 점차 일본사회 전체로 퍼져 나가 일본인 모두에게 행위의 준칙 혹은 도덕규범이 됐다.
현대로 들어선 이후엔 일본사회에서 할복자살은 거의 다 사라졌다. 일본에서 의식을 갖춘 전통적인 모습의 할복자살은 1970년 11월 유미적이고 탐미적인 극우 일본주의자로서 일본 육상자위대 총감실에서 자위대의 반성을 촉구하고 ‘천황’의 신격화와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 자살한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 1925~1970)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 사건 외에는 할복자살은 없었지만, 야꾸자세계나 직장에서 혹은 개인적 관계에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자살하는 일은 빈발했다. 그러나 이것도 과거 무사계급이 지향한 무사도의 영향을 받은 잔재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의리는 원래 일본 고유의 관념이 아니라 중국의 ‘義理之學’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과거 중국사회에서 의리지학은 원래 광의의 의미로 하늘의 도(天道), 하늘의 이치(天理), 인간의 심성 등 우주의 원리와 인간본질을 규명하는 학문을 가리켰다. 유학의 理學과 德性論 등으로 표현된 게 이를 말한다.
협의의 의미로는 忠義와 같은 正義의 도리나 도덕적 감정을 의미했다. 따라서 중국에서 의리란 공평한 사회정의를 지향한 것이었다. 나중에 이 중국의 忠義 관념 내지 정신적 가치가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의 정치, 사회에 맞게 변형돼 앞서 말한 대로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축소됐다.
우리도 과거 조선조 이래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의리를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혹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 정의해왔다. 개인에게든, 사회에서든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공정하고 올바른 도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의리라는 관념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사회에선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식으로 협소하게 인식되고 통용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 사무라이의 의리 관념, 그리고 일본 야쿠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략 일제시대인 1930년대부터 낭만적 주먹들 사이에 통용된 가치 혹은 관념이 나중에 사회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의리란 은혜를 매개로 한 개인들간의 정분을 뜻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최고 정점, 즉 정치적으로 주군에 대한 충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의리는 반드시 정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충성도 반드시 정의가 요구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의리는 공적 개념과 정의가 포함돼 있어야 한다. 충도 정의가 내포돼 있어야 한다. 또 의리와 충성 중 특히 충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공적인 가치로 승화돼야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얻게 된다. 맹자(B.C.372?~289?)가 왕조의 정통성을 백성의 지지에 두었듯이 충성도 궁극적으로는 백성을 향해야 한다. 이처럼 의리와 충의는 분명 다른 차원의 것이다. 이 관계를 드러내는 사례를 우리 역사에서 찾는다면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를 들 수 있다.
이순신과 안중근 같은 인물들의 죽음은 사적인 차원의 편협한 의리의 수준을 넘어 침략자에 저항한 인류 보편의 정의나 공분, 공도를 대변하고, 이를 위해 희생한 살신성인적 행위였다. 이순신의 희생은 국가에게는 충으로 표시됐고, 국왕 선조에게는 충이자 의리로 나타난 것이었다.
외우내환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몸을 던진 도마 안중근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도마는 조선 왕조의 국운이 다해가던 시기 외척의 농단과 열강의 침략에 방향성을 잃고 갈지자걸음을 했던 고종에 대한 의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조선을 구하기 위한 충이 더 큰 행동동기였을 것이다. 두 임금을 섬겨선 안 되고 오로지 하나의 왕조, 한 사람의 임금만 섬겨야 하는 것이 이상시 된 ‘不事二君’의 왕조시대엔 의리와 충이 포개져 있어 언뜻 구분이 가지 않을 뿐이다.
이처럼 의리와 충의 대상이 동일한 경우도 있으며, 두 사람 이상의 복수가 돼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순신에게 조선과 선조에 대한 관계가 전자에 해당된다면, 구원파 신도들에게 유병언과 국가는 후자에 속한다. 대상이 동일할 경우는 의리와 충을 어렵지 않게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이 동일하지 않을 경우엔 사적 의리의 대상보다는 공적 충의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또 자신을 챙겨준 주군에 대한 개인적인 의리와 국가라는 역사공동체에 대한 충이 서로 부딛칠 때는 당연히 후자를 우선시해야 한다. 특히 일반인이 아닌 공인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모든 경우에 지켜야 할 내용인 절대적 윤리와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될 상대적 윤리가 있는데, 이 중 절대적 윤리는 반드시 지켜야 사회와 국가가 유지되는 것처럼 충 또한 절대적 윤리처럼 정의롭게 실행돼야 국가와 사회가 존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이 의리의 범위를 넘어서는 좀 더 높은 차원의 가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맹자 계통의 정치사상에 잘 나타나 있듯이 전통시대에도 임금이 임금답지 않으면 신하가 그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새로운 왕조개창이 가능한 역성혁명이 용납되고 정당화 됐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의리와 충이 충돌할 때 충을 우선시 하는 것은 말처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하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로마 공화정 말기 왕위를 찬탈하려는 독재자인 줄리어스 카이사르를 척살한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B.C.85~B.C.42)가 이에 해당되는 좋은 예다.
브루투스가 자신을 신임하고 총애해준 카이사르를 살해한 이유는 자신이 받드는 주군 보다 로마제국이라는 국가와 역사공동체를 더 사랑했고, 더 가치로운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카이사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로마를 더 사랑한다”(Not that I loved Caesar less, but that I loved Rome more)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충복으로 소문난 장세동의 충성은 국가가 아니라 대통령 전두환 개인에 초점을 맞춘 의리다. 국가와 대통령은 등식이 성립되는 게 아니고 국가가 대통령보다 더 상위에 있는 우선적 개념이다. 요즘 우리 상황을 두고 말하면 5년이라는 짧은 정권을 국가와 동일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국가는 영속적인 무한 존재다. 국가와 정권의 최고 지도자를 동일시하고 그에게 무한 충성을 받치는 행위는 한 마디로 국가나 사회 및 역사발전, 자유, 민주, 인권, 정의, 평등 같은 보편 가치를 외면한 그야말로 조폭식의 의리일 뿐이다.
앞서 언급한 호위무사 박모씨도 의리와 충성을 혼동했거나 금전적 대우가 좋아서 행한 조건부적인 충성이거나, 혹은 종교적인 맹신에서 비롯된 외골수의 맹목적 충성이 아니었던가 싶다. 박씨의 반사회적인 행적에는 눈을 감고 그를 좋게 평가하거나 호감을 표시하고 심지어 그런 호위무사를 가진 유대균이 부럽다는 사람들은 이 참에 의리와 충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호위무사 박모씨에 대해 반농담조로 “그가 멋지다”라거나 필요 이상의 호감을 표시하는 건 우선 인류보편적 가치인 정의, 公道와 사적 유대 및 대우에 근거한 조폭식 의리를 구분하지 못한 결과다. 물론 양자의 차이를 알고도 무신경하게 호감을 표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도 국가나 사회, 진리, 정의와 같은 가치나 이념을 신경 쓰고 싶지 않은 골치 아프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면서 코웃음 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유형의 호위무사에 대한 기형적 인기와 호감은 인기인들의 하고 많은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 일시적인 것으로 가볍게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사회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풍향계이자 바로미터다. 하긴 1987년 115명의 탑승객 전원을 사망케 한 KAL기 폭파범 김현희(1962~)도 그가 저지른 희대의 남침 공작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살인행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단지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인기가 있는 나라이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위 글은 2014년 8월 11일자『미디어포항방송』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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