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말하려면 남과 북에 같은 잣대를 대라 : 김광수 강사의 대북 인식과 ‘선택적 평화론’에 대하여
서상문(역사학자)
최근 김광수 부경대 강사가 이재명의 8·15 경축사를 비판한 글을 읽었다. 글의 요지는 비교적 분명하다. 이재명이 ‘체제 존중’, ‘흡수통일 불추구’, ‘적대행위 금지’라는 대북정책의 원칙과 평화공존을 이야기하지만, 한미연합군사훈련을 계속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평화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9·19 군사합의의 무조건 복원, 한미연합훈련 중단, 국가보안법 폐지, 헌법 제3조와 제4조 폐지, 군사주권 환수, 유엔사 해체 등을 요구한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대화를 복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를 나무랄 이유는 없다. 나 역시 남과 북이 언제까지나 군사적 대결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미연합훈련이 북한에 어떤 위협으로 인식되는지,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이 한반도의 긴장을 증폭시키는 측면은 없는지 역시 따져봐야 한다.
그러나 김광수 강사의 글에는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 하나가 빠져 있다. 한미연합훈련은 북한에 대한 위협이라면,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은 대한민국에 대한 위협이 아닌가?
김 강사는 “UFS 훈련을 하면서 어떻게 싸울 필요가 없는 안정적 평화 공존이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똑같이 북한에도 물어야 하지 않는가? 핵무기를 개발하고, 남한을 사정권에 둔 탄도미사일을 개발·발사하고, 핵무력의 질적·양적 강화를 공언하면서 어떻게 평화공존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위 질문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접한 김광수 강사의 북한 관련 글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반복해서 느꼈다. 실제 그의 과거 기고문들을 다시 확인해보아도 한미연합훈련과 미국의 대북정책에는 매우 엄격한 책임을 묻는 반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하는 군사적 위협이라는 관점에서 동일한 강도로 비판하기보다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응하는 억지력 또는 북한의 전략적 선택이라는 맥락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김광수, 「북이 밝힌 ‘조선의 주적=전쟁 그 자체를 억제하는 힘’이 갖는 정치적 함의」, 『현장언론 민플러스』, 2022. 1. 18 ; 「북의 핵보유 법제화와 담론적 인식변환 지점」, 『통일뉴스』, 2022. 9. 13 ; 「북의 핵보유 법제화가 갖는 몇 가지 정치적 함의에 대한 이해」, 『통일뉴스』, 2022. 9. 17. 등)
나는 여기에서 김광수 강사의 대북 인식에 적어도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위협 개념의 비대칭성이다. 한미연합훈련은 북한이 위협이라고 느끼는 순간 실제적인 ‘위협’으로 인정하면서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이 느끼는 위협은 같은 무게로 다루지 않는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군사력은 상대적이다. 어느 나라가 자기 군사력을 방어용이라고 주장해도 상대방에게는 공격 가능성이 있는 힘으로 인식될 수 있다. 북한이 한미연합훈련을 위협이라고 느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한국 국민이 위협으로 느끼는 것 역시 똑같이 인정해야 한다.
둘째는 북한이 주장하는 핵 억지력 논리를 지나치게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북한의 핵무기를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억지력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국제정치 연구에서는 상대국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왜 만들었는가’를 설명하는 것과 ‘그것이 정당한가’를 판단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북한이 자기 핵무기를 ‘억지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대한민국에 위협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핵무기는 보유하는 순간 억지수단인 동시에 상대를 강압할 수 있는 위협수단이다. 미국의 핵무력이 북한에 위협이라면 북한 핵 역시 한국에는 위협이다.
셋째는 더욱 근본적이다. 한미의 행동에는 행위의 책임을 묻으면서 북한의 행동에는 구조적 원인을 찾아주는 이중적 설명방식이다. 한미연합훈련이 실시되면 그것은 한국과 미국이 선택한 ‘적대행위’이므로 한미가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이 핵을 개발하거나 미사일을 발사하면 미국의 적대정책과 한미군사훈련에 대한 반응이라는 구조적 원인을 앞세운다.
이렇게 되면 한국과 미국은 언제나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행위자가 되고, 북한은 외부의 압력 때문에 움직이는 반응자로 남는다. 이 논리대로라면 결과적으로 긴장의 궁극적 책임은 언제나 남한과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북한 역시 자신의 판단과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국가 행위자이다. 핵개발도 선택이고, 미사일 개발도 선택이며, 군사적 긴장을 높일 것인지 낮출 것인지도 선택이다. 따라서 그 선택에는 당연히 책임이 따른다.
김광수 강사의 이번 주장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러한 비대칭성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우선 9·19 군사합의를 ‘무조건 복원’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9·19 군사합의가 무너진 과정을 그렇게 단순화할 수는 없다. 2023년 11월 북한이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하자 한국 정부는 11월 22일 군사분계선 일대 비행금지구역을 규정한 합의 제1조 제3항의 효력을 정지했고, 북한은 다음 날 합의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겠다며 합의에 따라 중지했던 군사조치를 전면적으로 회복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전 2022년에도 북한의 포사격 등과 관련해 9·19 합의 위반 논란이 이미 제기돼 있었다. 따라서 한국이 일부 효력을 먼저 정지했다는 절차적 사실과, 그에 앞서 누적된 북한의 군사합의 위반 논란 및 군사정찰위성 발사라는 직접적 계기를 함께 보아야 한다. 군사합의는 한쪽만 지켜서는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은 기왕의 역사가 증명한다. 그래서 이건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
중단된 합의의 복원을 주장하는 것 자체는 좋다. 다만 왜 한국 정부에만 ‘무조건 복원’을 요구하는가? 북한에도 “9·19 합의를 다시 준수하라. 중단했던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원상회복하라”고 동시에 요구해야 하지 않는가?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국가보안법의 존폐나 개정 문제는 대한민국 내부에서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남북 화해와 평화공존을 가로막는 ‘대북 적대의 제도적 근거’라고 규정하여 폐지를 요구하려면, 북한의 법체계에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필요한지 함께 물어야 한다. 북한 형법에도 국가전복음모, 반국가선전·선동, 조국반역, 간첩행위 등을 처벌하는 광범위한 반국가범죄 규정이 존재해 왔다
대한민국의 국가안보 관련 법률만 평화에 장애가 된다고 규정하면서 북한의 체제수호 법제와 그 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남북의 진정한 평화공존을 말한다면 법률의 명칭이나 존폐 자체보다 서로의 체제를 적대하거나 주민의 사상과 표현을 과도하게 통제하는 법과 제도를 양쪽 모두에서 줄여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헌법 제3조와 제4조 폐지 주장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조항을 폐지하자는 것은 단순히 대북정책을 조금 유연하게 바꾸자는 수준의 주장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영토관과 통일의 헌법적 원칙을 근본적으로 변경하자는 주장이다. 특히 제4조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라는 원칙을 폐지한다면 그 자리에 어떤 국가적·헌법적 통일원리를 세우겠다는 것인지 김광수 강사는 설명해야 한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왜 대한민국의 헌법만 바꾸라고 하는가? 대한민국에 헌법적 양보와 체제적 변화를 요구한다면 북한에도 그에 상응하는 법적·제도적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과거 조선로동당 규약에는 당면목적으로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한다는 대남혁명론적 표현이 들어 있었지만, 2021년 제8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규약에서는 이 문구가 삭제됐다. 따라서 나는 현재 노동당 규약에 “남한을 무력으로 적화통일한다”는 조항이 문자 그대로 존재한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대남혁명 노선과 무력에 의한 체제변경 문제까지 완전히 해소됐다고 볼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고 상호주의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북한 역시 과거부터 유지해온 대남혁명론의 유산과 현재의 대남 적대정책, 핵·미사일을 통한 군사적 강압수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김광수 강사가 대한민국에 헌법 제3조와 제4조의 폐지라는 중대한 체제적 변화를 요구한다면 북한에도 과거의 대남혁명·적화통일 노선과 연결되는 당 규약·정책·교육·선전의 잔재를 완전히 폐기하고, 대한민국 체제를 무력으로 공격해서 변경하거나 적화시키려는 의도가 없음을 명문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옳다.
남한에는 “흡수통일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면서 북한에는 “대남혁명이나 무력에 의한 체제변경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왜 똑같이 요구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상호주의의 올바른 실천이다.
유엔사 해체 주장 역시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김광수 강사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유엔사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엔사의 법적 지위와 기능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의 군사적 안전장치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북한의 외부 군사동맹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의식을 적용해야 한다.
북한과 중국 사이에는 1961년 체결된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조약」이 존재한다. 이 조약 제2조는 일방이 무력공격을 받아 전쟁상태에 놓일 경우 다른 일방이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도록 규정한다.
더구나 북한은 2024년 러시아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 제4조는 어느 한쪽이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면 상대방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즉시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실질적인 상호군사지원 조항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는 유엔사를 해체하고 한미군사관계를 약화시키라고 하면서 북한에는 왜 북중 군사동맹의 상호원조 조항을 폐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왜 북러 간 상호군사지원 조항을 없애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물론 유엔사와 북중·북러 조약은 법적 성격과 역사적 기원이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서로를 단순히 1대 1로 등치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한반도의 외부 군사적 개입구조를 줄여 평화를 만들겠다는 원칙이라면 그 원칙은 남과 북 양쪽에 적용되어야 한다. 남쪽의 군사적 안전장치만 제거하면서 북쪽의 군사적 안전장치는 그대로 두자는 것은 군축이 아니다. 북한의 핵무력과 북중·북러 군사협력은 그대로 둔 채 유엔사 해체와 한미 군사관계의 약화만 요구한다면, 그것은 상호군축이 아니라 비대칭적 군축이며, 북한의 군사적 안전장치는 온존시킨 채 남한의 안보수단만 약화시킨다는 점에서는 사실상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9·19 군사합의는 한국에만 복원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북한에도 합의 준수와 군사적 신뢰조치의 복원을 요구해야 한다.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하라 한다. 그렇다면 북한에도 핵과 탄도미사일의 증강과 대남 군사위협을 중단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한다면 북한에도 국가전복·반국가선전선동·조국반역 등 광범위한 반국가범죄 규정을 개혁하고 주민의 사상·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와 제4조를 폐지하라 한다. 그렇다면 북한에도 대한민국을 상대로 한 대남혁명·체제변경 노선의 잔재를 완전히 폐기하고, 그러한 노선의 폐기를 당 규약과 국가정책 차원에서 명확히 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유엔사를 해체하라 한다. 그렇다면 북한에도 북중·북러 간 상호군사지원 조항을 폐기하거나 적어도 동일한 수준으로 완화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운 요구인가? 왜 이러한 요구는 북한을 향해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가? 오히려 이것이 평화론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균형이다.
그런데 김광수 강사의 요구에는 이상하리만큼 한 방향만 보인다. 남한에는 군사적·법률적·헌법적 안전장치를 하나씩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면서, 북한에는 그에 상응하는 군사적·법률적·제도적 양보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평화공존’인가, 아니면 한쪽에만 부담을 지우는 비대칭적 평화론인가?
나는 김광수 강사의 개인적 사상이나 과거 경력을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비대칭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주장을 김광수 강사 한 사람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 일부 운동권과 내가 ‘합북파(合北派)’라고 부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북한이 내놓는 주장과 논리를 충분한 비판적 검증 없이 받아들이면서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을 거의 일방적으로 한국과 미국에 돌리는 흐름이 존재한다.
내가 ‘합북파’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한 것도 바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고방식을 지칭하는 데 있다. 북한이 주장하면 우선 이해하고, 한국과 미국이 주장하면 우선 의심하며, 남쪽에는 변화와 양보를 요구하면서 북쪽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 태도를 나는 문제 삼는 것이다.
https://suhbeing.tistory.com/m/2509
이러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남북대화의 분위기 조성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평화정책은 대한민국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는 침묵하면서 한미연합훈련만 비판하고, 대한민국 헌법 조항에는 폐지를 요구하면서 북한 체제의 상응하는 변화는 요구하지 않으며, 유엔사에는 해체를 요구하면서 북중·북러 군사협력에는 침묵한다면 많은 국민들은 그런 평화론을 공정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대북 대화 자체에 대한 불신이 커진다.


그리고 강경한 반북세력은 “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북한의 주장만 따른다”는 논거를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합리적인 대화론자들의 입지까지 좁아진다.
이 점에서 무비판적인 친북적 평화론과 극단적인 반북 대결론은 표면적으로는 서로 적대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강화시키는 기묘한 공생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한쪽이 북한의 잘못까지 감싸면 다른 한쪽은 남북대화 자체를 거부한다. 그러면 다시 전자는 “남한의 반북세력 때문에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정당화하면서 정작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화의 공간은 좁아진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남북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우리 내부의 보이지 않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북한 편에 서는 것도 아니고 남한 편에 서는 것도 아니다. 평화 그 자체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과 북에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잘못하면 비판해야 한다. 미국이 잘못하면 비판해야 한다. 한미연합훈련이 필요 이상의 긴장을 초래한다면 그 규모와 방식도 조정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대한민국을 위협한다면 그것 역시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 북한의 제도와 군사정책에도 같은 변화와 양보를 요구해야 한다.
학자에게는 더욱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 학문이란 자신이 보고 싶은 사실만 골라내는 작업이 아니다. 자신의 주장에 불리한 사실까지 인정하고 설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학문적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상대편의 오류에는 현미경을 들이대면서 자신이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쪽의 오류에는 눈을 감는다면 그것은 객관적 분석이라기보다 진영논리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김광수 강사에게 다시 묻고 싶다.
한미연합훈련만 위협이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위협이 아닌가?
남한에 9·19 군사합의를 복원하라고 요구한다면 북한에도 복귀를 요구해야 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한다면 북한의 광범위한 반국가범죄 법제와 체제수호적 운용에도 상응하는 개혁을 요구해야 하지 않는가?
대한민국 헌법의 통일조항을 폐지하라고 요구한다면 북한에도 대남혁명과 무력에 의한 체제변경의 모든 잔재를 폐기하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는가?
유엔사를 해체하라고 요구한다면 북중·북러 군사동맹의 상호군사지원 구조도 함께 해소하라고 요구해야 하지 않는가?
평화를 말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방의 잘못을 말하는 용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이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쪽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이다.
김광수 강사뿐만 아니라 그의 주장을 비판적 검토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의 일부 운동권 인사들과, 내가 ‘합북파(合北派)’라고 명명해온 일정한 대북인식의 소유자들 가운데에는 바로 그 용기가 필요하다.
남북대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북한의 말에 무조건 박수를 보내는 것이 북한을 돕는 길도 아니고 평화를 돕는 길도 아니다. 남과 북의 잘못을 동시에 직시하고 양쪽 모두에게 자제와 변화와 책임을 요구할 때 비로소 대화의 토대가 만들어진다.
평화에는 남쪽의 평화와 북쪽의 평화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평화를 말하려면 남과 북에 같은 잣대를 대야 한다. 공정한 잣대의 운용, 그것은 어떤 분야이든 학문함의 기본이 아닌가?
2026. 8. 16. 10:0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더불어 사는 삶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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