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남겨 놓은 귀속재산만 보고 식민지배를 평가할 수 있는가?
서상문(역사학자,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상에 아래와 같은 글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 글에 제시된 사실과 주장에 동조하거나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글의 요지는 대체로 이렇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일본 정부와 기업,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남겨놓은 귀속재산을 접수해 대한민국에 넘겨주었으니 미국에 감사해야 하고, 일제 역시 철도·도로·발전소·공장 등 많은 근대적 시설과 산업기반을 남겨 한국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므로 일본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연히 이 글을 접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주장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서, 역사학을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역사란 어느 한 부분만 떼어내 전체인 것처럼 평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귀속재산이 해방 후 한국경제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는 그것대로 사실에 입각해 평가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일제의 식민지배 전체를 평가하거나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래서 먼저 문제가 된 글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고, 이어서 그 사실과 주장에 대해 역사적 사실과 식민지 경제의 전체 구조라는 관점에서 나의 견해를 밝혀보고자 한다.═필자
📚 미국은 일본인들을 어느 정도로 빨가 벗겨 보냈는가!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이 정도는 알아야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귀속재산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그 진실을 들여다보자. 귀속재산(Vested Property)이란 명칭은 미군정이 지은 것이다. 일제가 조선에 쌓아놓은 재산을 미국이 모두 빼앗아 대한민국 정부에 그 소유권을 넘겨준 재산이라는 뜻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금전적, 비금전적 손익계산서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 바로 《귀속재산》 이다. (Vested Property) 이 명칭은 미군정이 지은 것이다.
2015년 10월, 성균관대 이대근 명예교수는
<<귀속재산연구 : 식민지 유산과 한국경제의 진로>> 이숲, 682쪽의 저서를 냈다. 아래에서 그 내용 일부를 요약한다.
↪️ 일본인들이 놓고 간 국내 기업들
두산그룹, OB맥주, 하이트맥주, 한화그룹, 해태제과, SK그룹, 동양시멘트, 삼호방직, 신세계백화점, 미도파백화점, LG화학, 쌍용그룹, 동국제강, 삼성화재, 제일제당, 대성그룹, 동양제과, 대한조선공사, 동양방직, 한국생사, 한국주택공사, 벽산그룹, 한국전력, 일신방직, 한진중공업, 대한통운, 한진그룹, 대한해운, 동양화재해상보험, 메리츠화재해상보험, 중외제약 등. 국민 중에서 이 금전적 항목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귀속재산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사람들은 재산을 만든 일본인과 이를 빼앗아 우리에게 넘겨준 미국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1945년 해방직후, 일본은 그들이 36년 동안 선택의 여지가 없이 조선에서 태어난 조선인들을 고용하여 조선 땅에 건설해놓은 수풍댐, 철도, 도로, 항만, 전기, 광공업, 제조업 등 여러 분야의 사회간접자본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강제로 추방당했다.
아울러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운영하던 기업재산과 개인재산 모두를 그대로 두고 <몸> 만 빠져나갔다. 북한에는 29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 남한에는 23억 달러어치의 공공재산, 이 한순간 횡재로 조선에 굴러 들어왔다. 남한에 쌓인 23억 달러어치의 일본재산은 미군정이 이승만 정부에 이양했다.
이는 당시 이 돈은 남한경제 규모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한마디로 이 귀속자산이 없었다면 당시 한국경제에는 그 실체가 없었다.
이로부터 만 20년 후인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무상으로 공여 받은 액수는 3억 달러, 위의 23억 달러는 이 3억 달러의 약 8배였다. 이 엄청난 자산을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빼앗아 한국에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씨 조선 518년을 대대로 통치해온 27명의 조선시대 왕들이 이룩해 놓은 자산이 무엇이었는가를~
도로를 닦아놓았는가? 철로를 건설해 놓았는가? 기업이 생겨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았는가? 한글 단어장 하나 마련해 놓았는가?
그 27명의 조선왕들은 길을 넓게 닦으면 오랑캐가 침입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있던 길도 없앴다. 선조는 임진왜란 내내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만 했다. 이 27명의 왕들은 조선의 백성, 노예들의 골만 빼먹었다.
조선왕들이 518년 동안 쌓아 올린 재산은 초가집, 도로 없는 서울, 똥오줌으로 수놓은 소로, 민둥산, 미신, 거짓과 음모를 일삼는 미개인들이 공존하는 가두리 땅에 불과했다.
급기야 고종과 민비 일족은 부정부패로 나라를 거덜냈고, 이권이 되는 것은 외국에 마주잡이로 팔았으며, 결국 왕과 왕족, 고관대작, 지방유지들은 일제로부터 한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거금의 경제적 혜택과 높은 작위를 받고 묵묵부답으로 묵종하며, <총 한 방 못 쏘고> 나라를 넘겼다.
하지만 일본은 불과 36년 동안에 조선 땅에 52억 달러어치의 재산을 쌓아올렸다. 이 엄청난 재산 중 남한지역의 23억달러를 미국이 빼앗아 보관했다가 대한민국 건국자 이승만에게 선물처럼 주었다.
미국은 스스로 지키지 못했던 땅도 빼앗아 주었고, 조선인들로서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도 빼앗아 주었다.
이 두 가지 구체적 선물에 대해 우리는 빼앗아 준 미국과 돈을 만들어 준 일본 모두에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했다.
이 중요한 사실이 묻혀왔기 때문에 우리는 배은망덕한 국민이 되었고, 좌파정권은 북중러의 지령에 따라 걸핏하면 반일 반미 감정에 불을 지피고 있고, 그 배은망덕의 소치는 순전히 빨갱이들의 역사왜곡에 있었다.
이런 자료들은 국사편찬위 전자사료관에 보관돼 있다.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길 두려워하며 긴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미군정은 처음 사유재산을 압류대상에서 제외했다가 매우 다행하게도 곧 이어 사유재산까지도 압류했다.(군정법령 제8호, 1947.10.6.제정).
공적-사적 재산 목록이 170,605건, 이승만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3년 동안 미군정은 고생을 했다. 엄청난 관리 인력과 재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에 인수되지 않고 농림부 등에 등록되어 있던 또 다른 일본인 재산이 121,304건에 이른다. 이 모두를 합한 총 재산은 291,909건이었다.
↪️ 미국은 어느 정도로 일본인을 발가벗겨 보냈는가?
미군은 퇴각하는 일본인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폐까지도 압수했다. 귀국하는 일본인이 소지할 수 있는 돈의 액수를 극도로 제한했다.
민간인은 1,000엔, 군장교는 500엔, 사병은 250엔 이상 소지할 수 없었다. 000미군은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는 일본인의 주머니를 검열했다. 1945년 말까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민간인은 47만여 명이었다.
하지만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5년 11월 3일에 작성한 (G-2 Periodic Report) 54호에 의하면 일부의 일본인들이 150엔을 주고 밀항선을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밀항선을 타고 탈출한 일본인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되었겠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핵심은 미국이 일본인들을 무산계급으로 만들어 겨우 몸만 돌려보냈다는 사실이다.
조선반도에서 이렇게 빈손으로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전후 일본의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그 많은 주식회사 급 기업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대부분 그 회사 직원이거나 관련이 있던 친일 조선인들에게 헐값으로 불하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기업들로 성장했다.
오늘의 우리 대기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기업들이었다. 조선인들이 세운 업체는 작은 ‘상회’라는 이름을 단 개인 가게들이었다.
아래의 사례들은 현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해방 이후 맨땅에 헤딩해서 창조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할 것이다.
• 쇼와 기린맥주 =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 삿포로 맥주 =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 변경)
• 조선유지 인천공장 조선화약공판 = 당시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 = 해방 후 ‘삼화제철’로 상호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 조선제련 =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 =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 조선연료, 삼국석탄, 문경탄광 =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 의 모태가 되었다.
•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 =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일제가 남긴 귀속재산만으로 식민지배를 평가할 수 있는가?
역사를 평가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전체에서 일부를 떼어내어 그것을 전체인 것처럼 설명하는 오류다. 인물에 대한 평가도 그렇고, 국가의 정책이나 특정 정치체제의 통치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 전체를 긍정해서도 안 된다. 반대로 부정적인 측면만을 보고 다른 사실을 지워버리는 것 역시 올바른 역사 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
최근 일제가 패망하면서 한반도에 남겨두고 간 이른바 귀속재산(歸屬財産, vested property)을 근거로 일본의 식민통치와 미국의 한국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심지어 한국인은 일본과 미국에 감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귀속재산이 해방 이후 한국경제의 재건에 중요한 물적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귀속재산의 존재와 식민통치의 정당성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전자를 인정한다고 해서 후자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사실관계부터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해방 직후 일본 정부·기업·개인이 남한에 보유하고 있던 재산은 미군정에 의해 접수되었다. 핵심 법적 근거는 흔히 소개되는 것처럼 “1947년 10월 6일 군정법령 제8호”가 아니라, 1945년 9월 25일 재산 이전을 동결한 군정법령 제2호와 특히 1945년 12월 6일 군정법령 제33호 「조선 내 소재 일본인 재산권 취득의 건」이었다. 법령 제33호는 일본 정부와 그 기관, 일본 국민·기업·단체 등이 보유 또는 관리하고 있던 재산을 미군정이 취득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인 1948년 9월 11일 체결된 「대한민국 정부 및 미국 정부 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미군정이 보유하던 재산권과 미처 불하하지 않은 귀속재산 등이 대한민국 정부로 넘어왔다. 이 협정 제5조는 미군정 법령 제33호에 따라 귀속된 일본인 공·사유재산의 처리와 잔여재산의 한국정부 이전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단순히 “미국이 일본인의 재산을 빼앗아서 대한민국에 선물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법적·역사적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미국은 남한을 군사점령한 점령권력으로서 일본 패전 뒤 적국 일본의 재산을 접수·관리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 재산을 새 정부에 이전한 것이다. 물론 그 결과가 신생 대한민국 경제에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는 사실은 평가해야 한다.
귀속재산의 규모가 매우 컸다는 것도 사실이다. 일제시대 형성된 공장·광산·철도·항만·전력시설과 일본인 소유의 토지·건물·기업 등이 해방 이후 한국경제의 중요한 물적 토대가 되었다. 귀속재산 연구에서 확인되는 재산 건수도 29만여 건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서 곧바로 “그러므로 한국인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인과관계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식민지의 철도는 누구를 위해 놓였는가?
일제는 35년여의 식민통치 기간 동안 조선에 철도·도로·항만·발전소·공장·광산·은행·통신시설 등 상당한 근대적 시설을 건설했다. 이것 역시 부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근대화의 이기를 일제가 왜 만들었느냐하는 점이다. 식민지에서 만들어진 시설은 식민지 주민의 복지를 제1목적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의 식민지 통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조선의 노동력과 농수산물·광물·원료를 효율적으로 동원하며, 일본 자본의 활동범위를 확대하고, 나아가 대륙침략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대표적인 것이 철도다. 철도는 조선인의 교통에도 이용되었지만 동시에 병력과 군수물자의 수송, 농산물·광산물의 항구 운송, 일본 자본의 시장 확대라는 기능을 수행했다. 따라서 철도라는 시설이 남았다는 사실만을 보고 식민지배를 평가하면 안 된다. 누가 건설했고, 누가 비용을 부담했으며, 누가 주로 사용했고, 그 시설을 통해 창출된 이익이 어디로 이동했는가까지 함께 봐야 한다.

농업도 마찬가지다. 1920년대부터 추진된 산미증식계획은 조선 농업생산력을 일정 부분 향상시켰다. 관개시설이 확대되고 품종과 비료 사용도 변화했다. 그러나 그 정책의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가 1918년 일본의 쌀소동 이후 발생한 일본 본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자료 역시 산미증식계획이 일본의 쌀 부족 문제와 일본 자본의 조선 진출, 식민통치 안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또한 이 정책을 조선을 일본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된 식민지 경제정책으로 설명한다.
즉 쌀 생산이 늘어났다는 사실과 조선 농민의 생활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것은 동일한 명제가 아니다.
호남평야를 비롯한 조선 각지에서 생산된 상당량의 쌀이 일본으로 이동했다. 조선인은 쌀을 생산했지만 식민지 경제구조 속에서 생산·유통의 이익을 일본인 지주와 회사, 상업자본 등이 더 유리하게 점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식민지 농업의 평가 역시 ‘생산량 증가’ 하나가 아니라 생산·분배·소비·소유관계 전체를 보아야 한다.
발전소가 남았다는 것과 그 전기가 누구를 위해 사용됐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수풍댐을 비롯한 북부 조선의 대규모 수력발전 시설과 광공업 시설도 마찬가지다. 일제가 조선 북부에 전력·화학·금속·광업 시설을 집중적으로 건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이후의 이러한 공업화는 일본의 전시경제체제와 만주·중국 침략을 떼어놓고 이해할 수 없다. 조선의 전력과 광공업 생산시설은 일본 제국의 전쟁수행 능력과 연결된 하나의 광역 산업체계에 편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해방 후 한국이 발전소와 공장을 물려받았다는 사실과, 일제가 그러한 시설을 조선 민족의 장기적 경제발전을 위해 건설했다는 주장은 구분해야 한다.
식민지배가 끝난 뒤 도로와 철도와 발전소가 사라지지 않고 현지에 남는 것은 당연하다. 공장을 뜯어 한꺼번에 일본으로 옮길 수도 없고 댐을 일본으로 운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남겨놓고 갔다”는 결과만으로 그 건설 동기까지 선의였다고 역산할 수는 없다.

귀속재산의 가치만 계산하려면 식민지에서 반출된 가치도 계산해야 한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만일 식민지배를 정말 경제적인 손익계산서로 평가하겠다면 수입 항목만 계산해서는 안 된다.
해방 당시 일본인이 남긴 공장과 토지, 철도와 발전소의 자산가치를 계산한다면, 반대편에는 식민지 기간 동안 일본으로 이동한 농산물·수산물·임산물·광산물·기업이윤·배당·이자·토지소득 등을 함께 계산해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이 문제와 관련된 여러 사료들과 연구를 접해왔다. 그러나 식민지배 약 36년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일본이 조선에 투입한 자본과 조선으로부터 이전해간 재화와 소득, 노동력의 가치, 인적 손실과 기회비용까지 동일한 기준으로 환산한 완전한 형태의 대차대조표는 사실상 작성하기가 극히 어렵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해방 당시 23억 달러가 남았다. 그러므로 일본이 한국에 23억 달러를 주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 자산은 진공상태에서 일본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조선의 토지 위에 세워졌고, 상당 부분 조선인의 노동이 투입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얻은 수익이 다시 투자되기도 했다. 일본 본토 자본도 투입됐지만 그 결과 발생한 생산물과 이윤 역시 식민경제 전체 속에서 일본 제국으로 귀속되거나 재투자되었다.
그러므로 귀속재산의 총액만 떼어놓고 일본이 한국에 베푼 경제적 혜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재산의 형성과정과 이익의 귀속구조를 삭제한 계산법이다.
더구나 1945년 무렵의 귀속재산을 특정 달러액으로 평가한 수치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당시의 무상 3억 달러를 단순히 “몇 배”라고 비교하는 것도 주의가 필요하다. 자산의 평가기준, 가격시점, 환율, 자산가치와 현금흐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공장·철도·설비의 평가액과 20년 뒤 제공된 달러 표시 자금을 명목액만으로 직접 비교하는 것은 경제사적으로 엄밀한 방법이 아니다.
대만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대만의 사례를 보더라도 식민지 근대화가 얼마나 이중적인지를 알 수 있다. 일제는 대만에서 반세기나 통치하면서 철도·항만·수리시설·학교·공중위생체계 등을 건설했다. 이것만 떼어내면 근대화의 성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만은 동시에 일본의 중요한 쌀과 설탕 공급지였다. 대만의 정부기관 연구에서도 일제시기 대만이 식민 본국 일본의 농산물 공급기지 역할을 했고 쌀과 설탕이 대량으로 일본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한다.
1930년대 이후에는 대만의 공업화 역시 일본의 전시체제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대만의 전력·화학·금속산업 확대는 일본 중심의 제국경제와 군수생산체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관련 대만사 연구 역시 당시 대만의 공업화를 일본 중심의 경제질서 및 전쟁경제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대만에 근대적 시설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일본의 50년 식민지배 전체를 “대만에 대한 선물”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더욱이 식민통치를 단순한 자산의 가감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 이후 일제는 조선인들을 일본 본토와 사할린, 남양군도, 중국·동남아시아의 전쟁터와 광산·공장·군사시설 등으로 광범하게 동원했다. 강제동원은 국가권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노무자·군인·군무원과 일본군 ‘위안부’ 등이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위안부를 제외한 조선인 강제동원의 전체 규모를 연인원 약 780만 명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 밖으로 동원된 사람 가운데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인원을 약 27만 명으로 추산하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확한 규모를 둘러싼 연구상의 논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몇몇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전쟁 수행을 위해 식민지 주민을 국가권력으로 동원한 구조적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에 물적 공출, 강제저축, 군수동원, 징병과 징용, 가족의 해체, 전쟁터에서의 사망과 부상 등을 합친다면 이러한 손실을 어느 공장 몇 채, 철도 몇 킬로미터와 어떻게 금전적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공장은 다시 지을 수 있다. 철도도 다시 놓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올 수 없다.
임금과 사회적 지위의 차별 역시 경제적 손실이었다
식민지 경제를 평가할 때 평균 생산량이나 시설규모뿐 아니라 분배구조와 차별을 보아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기업과 같은 생산현장에서 일하더라도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는 임금·직급·승진·교육기회·주거와 복지에서 구조적인 격차가 존재했다. 따라서 식민지기에 조선에서 근대적 공업이 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조선인이 그 성장의 이익을 동등하게 향유했다고 볼 수 없다.
이 문제는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동일노동 또는 유사한 노동을 수행하면서 특정 민족집단이 장기간 더 낮은 임금과 낮은 직급에 머물렀다면 그 차액 역시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주민이 부담한 비용이었다. 30여 년에 걸친 교육·고용·승진기회의 제한에서 발생한 기회손실(opportunity loss) 역시 경제사의 관점에서는 중요한 비용이다.
따라서 식민통치의 손익계산서를 만들겠다면 일본인이 남기고 간 공장의 감정가격만 계산할 것이 아니라 조선인이 받지 못한 임금과 기회비용까지 함께 계산해야 논리적으로 일관된다.
돈으로 더욱 계산하기 어려운 것이 민족적·정신적 손실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식민지배에는 장부에 숫자로 기록하기 어려운 손실이 있다. 조선인은 일제하에서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편입되었고, 특히 전시체제기에 들어서면서 황민화 정책과 창씨개명, 신사참배, 일본어 사용의 강요 등 강력한 동화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차별적으로 호명하고 식민지 주민으로 내려다보면서 가한 일상적인 모욕과 차별도 존재했다.
개인에게도 자존심이 있듯이 민족과 공동체에도 역사적 기억과 존엄이 있다. 식민지배가 사람들에게 남긴 열등감·굴욕감·정체성 훼손은 발전소의 발전량이나 공장 장부의 자산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손실이다.
그것을 모두 무시하고 “철도와 공장을 남겼으므로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식민통치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 정치적 자유와 자기결정권의 상실을 계산에서 지우는 셈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손실은 나라 자체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조선인은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권리도, 자신의 외교정책을 결정할 권리도, 자신의 군대를 가질 권리도 상실했다. 한 민족의 정치적 운명을 다른 나라가 결정한 상태에서 건설된 철도와 공장을 단순히 ‘은혜’로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왕조의 낙후성과 일본 식민통치의 정당성은 별개의 문제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긍정하기 위해 조선왕조를 극단적으로 폄하하는 주장도 역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조선 후기 국가체제가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했고, 19세기 말 정치적 혼란과 부패가 심각했으며, 산업화와 군제·재정·행정의 근대적 개혁에서 일본보다 뒤처졌다는 것은 충분히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낙후했다는 사실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권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국가가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경제적으로 낙후했다고 해서 이웃 강대국이 그것을 점령하고 주권을 빼앗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조선의 왕 27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초가집과 똥오줌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식의 표현은 학술적 역사평가가 아니라 감정적인 수사에 가깝다. 조선에는 농업·수리·도로·역참·교육·출판·상업·수공업·화폐경제가 존재했으며, 문자와 문헌문화 역시 매우 발달해 있었다. 그 한계와 후진성을 논하는 것과 조선문명 전체를 무(無)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역사학에서 비교사가 유용하게 인정되듯이 역사는 비교해야 하지만 모욕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귀속재산이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귀속재산의 의미 자체를 축소할 필요도 없다. 일제가 남긴 철도·공장·발전시설·광산·토지와 기업체가 해방 이후 한국경제의 초기 자본축적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많은 귀속기업이 한국인에게 불하되면서 이후 기업성장의 토대가 되었고, 귀속재산의 처리와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초기 경제구조를 결정한 중요한 변수였다. 대한민국의 제헌헌법 경제조항을 이해하는 데도 귀속재산의 막대한 비중이 중요한 배경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이 부분을 부정하는 것 역시 역사왜곡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 식민통치에 감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본이 식민지에 투자했다는 사실, 조선의 일부 산업생산력이 성장했다는 사실, 철도와 항만과 발전시설이 확대됐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
동시에 그 투자의 목적과 수익구조가 식민통치와 일본 제국경제를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보아야 한다.
상기 두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의 양면성이다.
미국에 대한 평가 역시 전체를 보아야 한다
미국의 역할도 같은 방법으로 평가해야 한다. 미군정이 일본인 재산을 접수해 관리했고 대한민국 정부에 넘긴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그것이 대한민국 경제에 중요한 자산이 된 것도 사실이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존속하기 어려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역사적 기여를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 역시 미국의 대한정책 전체를 평가하는 하나의 항목이지 전부는 아니다. 1945년 일제 패망 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38선으로 나누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로 했다. 미국 국무부의 문서에서도 미국이 38선을 일본군 항복 접수선으로 제안했고 소련이 이를 받아들인 과정이 확인된다. 애초 임시적인 군사적 경계였던 38선은 미·소 냉전의 심화 속에서 사실상의 정치적 경계로 고착되었다. 당시 미국 측 문서조차 38선이 한국의 정치·경제생활을 심각하게 교란하는 폐쇄적 경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의 구조적 형성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책임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여기에서 한 단계 더 구별해야 한다. 분단의 형성과 한국전쟁의 발발은 동일한 사건이 아니다. 미·소의 분할점령과 냉전체제는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조건을 형성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직접 개시한 것은 북한군을 앞세워서 전면 남침한 김일성과 북한 정권이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자료 역시 북한군이 38선 여러 지점에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서울 방향으로 진격했다고 명시한다.
그러므로 미국의 역할과 관련해서 학술적으로는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즉 한반도 분단체제의 형성에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냉전 강대국의 책임이 있었고, 1950년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개전 책임은 남침을 결정하고 실행한 북한 지도부와 이를 지원·승인한 공산권에 있었다.
이처럼 역사에서는 공과 과, 구조적 원인과 직접적 원인, 장기적 결과와 단기적 결과를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감사와 비판은 동시에 가능하다
역사는 어느 나라를 영원한 은인이나 영원한 악인으로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일본이 조선에 철도를 놓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식민지배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미국이 귀속재산을 대한민국에 이전하고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준 사실에 감사한다고 해서 미국의 모든 대한정책을 무비판적으로 긍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일제의 식민지배를 비판한다고 해서 일본인이 만든 모든 철도·공장·기술·제도를 부정할 필요도 없으며, 미국의 한반도 분단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한국전쟁에서 흘린 미군과 유엔군 병사들의 피와 희생을 부정할 이유도 없다. 역사는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는 오히려 이런 태도가 역사에 대한 진정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공(功)은 공대로 인정하고 과(過)는 과대로 책임을 묻는 것! 그리고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 것!
일제가 남긴 귀속재산 역시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해방 후 일본인이 남긴 공장과 철도와 발전소를 한국인이 이용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하나의 물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 시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구의 토지와 노동과 자원이 투입됐으며, 그 시설을 이용해 생산된 부가 어디로 흘러갔고, 그 기간 동안 조선인이 어떤 정치적·경제적·인적 희생을 치렀는가를 함께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반의 역사다. 더구나 그 절반의 역사를 근거로 “일본과 미국에 감사하지 않으면 배은망덕한 국민”이라고 규정한다면 역사연구는 정치적 선동으로 변한다.
역사의 목적은 누군가에게 감사하라고 강요하거나 누군가를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지 않다. 역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 누가 무엇을 얻었고 누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가능한 한 전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보면 귀속재산은 분명 대한민국이 물려받은 중요한 경제적 자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이 한국에 베푼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와 노동과 자원 위에서, 일본 제국의 필요에 따라 형성된 식민지 경제의 물적 유산이 패전과 해방이라는 역사적 단절을 거쳐 한국인의 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귀속재산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귀속재산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보다 온전한 역사 인식일 것이다.
2026. 8. 15. 15:24.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더불어 사는 삶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다섯 가지 지평 (0) | 2026.08.05 |
|---|---|
| 아직도 맹신하는 ‘合北派’의 두 가지 대북 신화 (0) | 2026.04.23 |
| 독도 탈취 수위 한 단계 높이는 타까이찌, 한국 정부는 왜 한 마디도 못하는가? (0) | 2026.03.14 |
| 있을 때 좀 잘하지! 권력을 잡았을 때 좀 잘하지! (0) | 2026.02.12 |
| AI와 나눈 표절문제 및 우리사회의 도덕성 문제 대화 (1) | 2026.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