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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판도를 바꾼 淸日전쟁 : 사실과 영향

雲靜, 仰天 2014. 4. 5. 15:31

동아시아의 역사판도를 바꾼 淸日전쟁 : 사실과 영향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21세기 초엽, 동아시아가 굉음을 내면서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다. 공전과 자전의 두 축은 중미관계와 중일관계다. 중국과 미국은 갈등과 경쟁의 반복이라는 싸이클을 타고 있지만 오랜 숙적 중국과 일본 사이에 붙은 패권경쟁의 불은 사그라지지 않는 상황이다. 중국, 일본의 패권경쟁과 충돌의 접점은 역사, 영토문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원인이 내재돼 있다. 중일 간의 현안들은 대부분 120년 전 청일전쟁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답이 명료해진다. 이 전쟁을 알면 오늘날 현안들의 근원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난 달 15일 황해를 건너 120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간 역사 여행을 떠난 이유였다. 목적지는 청일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던 산둥성 웨이하이(威海) 앞바다의 류공다오(劉公島)였다. 최후의 상륙전이 벌어진 곳이자 일본군의 상륙을 막지 못해 음독 자진한 북양함대 딩루창(丁汝昌)제독의 고혼(孤魂)이 누워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여창(딩루창) 제독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25일 황해의 풍도해전을 시발로 개시돼 이듬해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下關)에서 청일 양국 대표가 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종결됐다.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패권경쟁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
 

청국의 북양함대와 일본 해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 이 해전에서 중국의 북양함대 이외 남양함대 등 세 함대는 모두 참전하지 않았다. 청국 해군이 패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시모노세끼 회담이 개최된 당시의 春帆樓의 입구
시모노세끼에서 진행된 청일간의 회담 광경. 양복을 입은 이들은 일본대표들이고, 만주족의 전통복장을 한 이들은 청나라 대표들이다.
시모노세끼 회담에서 조인된 시모노세키조약(중국명은 馬關條約)
시모노세끼 조약을 만들어낸 두 주역, 리훙장과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전진 방어하기 위해 한반도를 수중에 넣는데 최대의 걸림돌인 중국을 제압하기 위해 1885년부터 10년간 전쟁준비를 했다. 그리고 개전을 결정한 뒤에 전쟁의 구실과 명분을 찾았다. 여러 가지 복합적 목적 가운데 중국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조선의 내정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의 보호국화, 궁극적으로는 식민지화를 달성하는 것이 우선적인 전쟁목적이었다. 중국을 패배시켜 전리품으로 배상금과 영토를 획득하는 것도 포함됐다.
  
전쟁을 준비하면서 기회를 노려온 일본은 마침내 1894년 2월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대를 보냈다. 함경북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된 제2차 봉기에서 폐정개혁을 주창한 동학농민군을 조선관군이 진압하지 못하자 조선조정은 청국군대를 불러 진압하려고 했다.
 

조선은 청일전쟁의 발단이 된 만큼 초기의 주요 전투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동학봉기가 남의 나라들끼리 싸운 전쟁의 원인이 되고 조선이 전장터까지 된 것은 결국 임진왜란 이후 단 한 번도 반성 없이 끊임 없이 당파싸움만 벌여온 망국적인 내분과 그로 인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한 국력과 형편 없던 군사력의 문제였다.

일본은 청군의 진입을 빌미로 즉각 개입했다. 일본군은 선전포고 없이 풍도의 청국 해군함대를 기습 공격한 이래 한반도의 남북한 각지에서 동학농민군과 청군을 물리치고 급기야 압록강을 넘어 요동반도, 산동반도, 대만에까지 상륙해 청국 해군의 주력인 북양(北洋)함대를 격파했다.
  
육전과 해전에서 모두 처참하게 참패하자 청조의 실권자 서태후는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강화조약을 맺도록 지시했다. 이듬해 3월 20일 일본측 전권대표로 수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중국측 전권대표로 리훙장이 만나 시모노세끼의 슌판로(春帆樓)에서 시작된 강화회담에서 7차례의 회의 끝에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중국명 ‘馬關조약’)이 조인됐다.
 
조약내용은 중국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었다. 청국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일본에게 배상금으로 은 2만 냥을 지불하며, 요동반도의 할양과 함께 대만 본도 및 부속도서와 펑후(澎湖)열도를 “영원히 일본에게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가 주도한 ‘3국 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중국에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청군 전사자는 3만 5,000명으로 추산되고 포로는 1,790명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군 전사자는 1만 3,488명으로 청국의 반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청은 조선에 대한 기존의 종주국 지위를 지키지 못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영토할양, 주요 도시를 통상개항장으로 증설해주고, 일본인이 내지에서 공장을 지을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는 등 국가주권이 크게 손상당했다.
 
당시는 서구가 중국이나 일본과 맞은 조약은 모두 최혜국조약이었기 때문에 열강들이 중국을 분할 점령하게 된 계기가 됐다. 대만을 빼앗겨 반세기나 식민지로 지내게 만든 치욕을 겪게 됨으로써 중국인의 자존심도 크게 상했을 뿐만 아니라 안으로 여러 가지 반성과 반정부 운동이 복잡한 양상을 띠면서 발발하게 됐다.
  
전쟁승패는 단순히 양국군의 무기, 장비, 전술, 전략에서 결정된 게 아니었다. 한 마디로 국가의 총체적인 전쟁능력, 즉 군사력뿐만 아니라 정치체제, 지도자의 이념, 국정운영, 경제력, 전쟁 동원능력 그리고 전쟁을 지지하는 국민의 지지 및 민도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국력의 우열에서 결정됐다.
 
더군다나 청은 네 함대사령부(수사水師) 가운데 북양수사만 참전했고 나머지 세 수사(남양南洋, 푸졘福建, 광둥廣東)들은 자신의 세력 온존을 위해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이것도 주된 패인 가운데 하나였다.
  
청국은 일본에 비해 군사적으로 수적 우위에 있었지만 무기 장비의 질을 따지면 열세였다. 육군의 병력 수는 청군이 일본군 보다 훨씬 많았지만 전투의지가 박약했고, 군기가 잡혀져 있지 못한 반면 일본군은 사기가 충만했다.
 
당시 청군은 육군 962개 대대 총 40여 만 명이 전국 각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전쟁기간 중 새로 60여만 명을 징병했기 때문에 청조가 동원 가능했던 병력은 100만 명에 육박했다. 이 수는 같은 시기 24만여 명의 일본군 보다 최소 4배가 넘는 대군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육군 정규군 대대 병력 정식 편제수인 505명 보다 훨씬 적은 350명으로 편제돼 있어 실제 투입된 병력 수는 24여만 명에 불과했다.
 

육전에 투입된 일본군의 전투장면

해군은 외관상 전력이 엇비슷했다. 예컨대 청의 북양수사는 정원(定遠), 진원(鎭遠) 등 총 13척의 군함을 보유했는데, 이는 마쯔시마(松島), 요시노(吉野) 등 12척을 지닌 일본해군과 대등했다. 함정의 크기와 톤수에서도 청이 약간 앞섰지만 항속, 선회반경, 장착된 함포의 정확도, 탄약과 부속품의 호환성 등은 일본연합함대에 뒤떨어졌다.
 
중국은 군사준비에서도 앞서지 못했다. 일본군은 전쟁에 필요한 정보수집에서 이미 중국을 제압한 거나 다름없었을 정도로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전장터가 될 한반도와 중국 등의 동북아 지역은 물론, 멀리 동남아시아 지역에까지 간첩을 밀파해 현지 사정을 염탐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청조가 리훙장에게 내린 강화회담에서 강력하게 개진할 주장을 담은 특급 비밀까지 일본에 해독 당했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역사발전을 크게 저해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내각 추밀원 고문 카쯔 카이슈우(勝海舟)는 전쟁도발에 대해 명분없는 군대동원이라고 일본정부를 비난했다. 육군상 오오야마 이와오(大山巖)도 유럽 열강만 어부지리를 얻게 만든 전쟁이라고 했다. 그들의 말마따나 일본이 승전했지만 러시아가 주도한 독일, 프랑스의 ‘3국간섭’ 때문에 중국의 영토분할이 본격화되고 아시아의 위기를 가져왔을 뿐이다.
 

카츠 카이슈우
오오야마 이와오

이처럼 일본이 군사적으로는 청국을 제압했지만 정치 외교적으로는 실패한 전쟁이었다. ‘3국간섭’의 초래로 전쟁도발의 목적이었던 조선의 내정개혁과 식민지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러시아를 조선정국에 개입하게 만들어 최초 전쟁의 목적을 대부분 잃었다.
  
청일전쟁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아시아 패권국인 대국 청이 소국 일본에게 패하게 됨으로써 그동안 지속돼 온 동아시아 평화가 깨졌다. 중국적 질서, 즉 팍스 시니카(Pax Sinica)라는 중화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제국주의의 후보국으로서 제국주의의 반열에 오르고자 한 두 나라가 한반도를 둘러싼 패권경쟁 끝에 일본이 패권을 거머쥐게 됐다.
 
1880년대에 들어와 베트남을 둘러싸고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 한반도를 둘러싸고 발발한 일본과의 전쟁은 그러한 패권다툼의 일환이었다. 만약 청이 이 경쟁에서 승리했었더라면 분명 역사의 흐름은 달라졌을 것이다.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됐겠지만 적어도 일본처럼 타국을 군사적으로 침략해서 식민지를 만들어 식민지배하는 상황은 오지 않았으리라. 이 전쟁은 일본에게 서구 제국주의의 대오에 합류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줬다.
  
한편, 15년 뒤 한국 강제 병합 결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본으로선 거둔 수확이 의미가 지대한 것이었다. 예컨대 일본은 전쟁승리로 청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조선의 보호화에 성공한 점이다. 또 러시아 세력의 조선 확장을 저지함과 동시에 일본에 대한 위협까지 제거했다는 점에서 일거양득이었다.
 
나아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러시아에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 즉 러일전쟁도 일으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3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에 복수하기 위해 러시아를 다음 타깃으로 삼은 일본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10개년 군비증강계획을 마련하는 등 러일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토대가 됐던 것이다.
  
청일전쟁은 일본인의 정신세계와 세계관도 변화시켰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일본 내 지식사회는 균형감이 떨어지고 과도한 자신감이 붙었다.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승리를 맛보게 되자 오만해지기 시작하면서 간이 붓기 시작했다. 승전분위기에 편승해 내셔널리즘이 형성됐다.
 
중국인을 멸시하고 비하하는 중국혐오증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일본인의 뇌리에 각인되는 시발점이었다. 흔히 중국인은 ‘지나인’(支那人)
이라거나 중국인을 비하하는 용어인 ‘짱꼴라’(원래는 일본어의 ‘짱꼬로’라는 말에서 기원)라고 불리기 시작됐다. ‘지나인(支那人)’이라는 명칭도 중국인을 비하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또한 일본은 전쟁배상금으로 금본위제를 시행할 수 있는 기반도 구축했다.
 

청일전쟁 시기 무고한 중국의 일반인들까지 칼로 목을 베어 처참하게 살해한 일본군들. 전쟁 후 일본사회에는 이런 일본군 병사들이 귀국해서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무용담이 영웅시 되는 분위기였고, 여기에 편승해 조선인과 중국인을 멸시하는 풍조가 형성하기 시작했다.

청조의 패전이 중국에 미친 영향은 시공을 초월해 광범위 했다. 그때까지 추진돼왔던 근대화 정책의 실효성이 의문시 되는 가운데 개혁파와 개명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런 움직임은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청조타도의 기치를 내건 새로운 정치세력인 興中會의 결성으로 나타났고, 이것이 나중에 중국국민당으로 확대발전해 결국 15년 뒤 신해혁명을 성공시킨 원류가 된 것이다.
  
청일전쟁은 중일관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양국 간 충돌의 시원인 셈이다. 일본은 승전의 전리품으로 남방진출을 시야에 넣은 대만과 펑후열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尖閣島’)까지 수중에 넣었는데, 훗날 패전 후에도 일본은 이 섬을 중국에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양국 사이의 충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은 우리에게 약자는 언제든 외세에 침략을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조선은 전쟁의 도화선이자 전쟁발발지이며 주요 전쟁터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고, 인명 손실, 정치적 피보호화 등 다대한 피해만 입었다.
  
현재 중국정부는 북양함대의 주요 기지이자 주요 전장이었던 류공다오에 ‘중국갑오전쟁박물관’을 지어 청일전쟁 패배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 20년간 약 180억 원을 들여 이곳을 관리해오고 있으며, 2008년에는 청일전쟁진열관도 신축했다.
 

류공다오 박물관 앞에서 후배 오동훈(한중페리 중국지사장)과 함께한 필자(2014년 3월 16일)
산동성 류공다오에 소재한 중국갑오전쟁박물관에 설치된 정여창 제독의 부조상

중국은 “원래의 모습을 보호하고 옛날 그대로 수리한다”는 역사유적 보호의 원칙하에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변경하지 않는다. 또 “치욕을 당한 후에야 교훈을 깨달아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다”라는 인식에서 굴욕적인 역사유적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원형대로 보존한다. 이 말은 류공다오를 떠난 지금도 필자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위 글은 청일전쟁 발발 120주년을 기념해『전쟁기념관 사보』, 2014년 4월호(4월 4일)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