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불감증 공화국이 빚은 ‘세월호’ 참사, 총체적 부정합이 공범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내내 가슴이 먹먹하다. 아이들이 한 줄기 빛처럼 기적 같이 우리 앞에 나타나길 간절히 기원했지만 신은 외면했다. 슬프고 참담하다! 온 나라, 온 국민이 슬픔에 빠져 초상집을 방불케 한다. 세계가 슬퍼하고 분노하고 있다.
차디 찬 바다 속 선실 안에 갇혀 산소가 떨어져 가는 상황,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가운데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는 어린 생명들. 그 아이들이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친구를 부르짖으며 죽어가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뭍에서 분초를 다투며 조난자들이 구조되기를 기다리며 절규하는 부모와 가족들, 그러나 결국엔 버젓이 눈 뜨고 그들을 사지로 떠나보내고 말았다.
국민들에게도 애통하기 그지없는 일인데 당사자인 부모와 가족들은 오죽하겠는가? 가슴이 시커먼 숯이 된 유가족들은 지금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일 거다. 얘들아 잘 가라. 탐욕 없는 곳에 다시 태어나 너희들이 꿈꾼 세상을 만들어 이 한을 풀어라!
슬픔과 분노가 교직된 상황에서 유가족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일 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냉정하게 사고의 본질을 들춰보는 일이다. 광복 이래 한국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는 대부분 천재가 아니고 인재다. 매번 온 나라가 뒤집어지고 관계기관이 나서서 구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국민 다짐을 한다. 때로 대통령까지 사고현장을 찾아 신속한 구조, 철저한 진상조사, 관련자 엄벌을 약속한다.
허나 시간이 지나 여론이 가라앉고 사람들이 살기에 바빠 잊을만하면 흐지부지된다. 그걸로 끝이다. 재발방지, 안전대책 약속은 사후약방문일 뿐 본질적인 원인분석과 대책이 아니다. 지금껏 겪은 숱한 대형 참사에서 늘 반복되는 익숙한 광경이자 패턴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잦고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원인은 여러 요소들이 중층적으로 구조화 돼있다는 게 본질이다. 현대사회가 고위험 사회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안전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무감각이 일차적 문제다. 도처에 위험요소가 득실거려도 감지하지 못하고 무덤덤하게 산다.
사회를 계도 감시해야 할 사회지도층이 자신의 직분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전도된 가치의 되돌림과 제도개선은 물론, 부정과 비리를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으면서도 노력은커녕 오히려 기존체제를 영속화시키는 일부 권력자들의 탐욕, 직무태만 그리고 그들과의 협력을 통해 공생하는 탈법자의 부정이 난마처럼 얽혀 있다. 안전불감증과 인재는 비리를 알고도 눈감는 부정에 대한 도덕적 마비와 눈앞의 금전 몇 푼으로 영속된다.
우리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전통시대에는 자기운명은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있었다. 전쟁, 천재지변, 역병이 아니면 문명의 이기가 인간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건 별반 없었다. 주된 이동 수단인 도보 외에 기껏해야 마차와 수레가 전부였던 그 시대에는 사고가 나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 규모도 크지 않았다.
인력거와 자전거를 거쳐 오늘날은 자동차, 철도, 선박, 비행기가 그것을 대체했다. 기능상의 효율은 놀랄 정도지만 사고가 발생할 확률은 대단히 높아졌으며 위험성도 커졌다. 대량생산, 산업화, 도시화 시대에 접어 든 근대 이래 문명의 이기에서 초래되는 사회적 위험수위는 무작위 대중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현대를 ‘위험사회’(risk society)라고 진단하는 이유다. 그의 주장처럼 전쟁, 테러,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 철도, 선박, 비행기 사고는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그런 상황이 위험하고, 피해는 지역적 공간을 넘어 지구적 규모이며, 시간적으로도 후대에까지 미친다.
절제 없이 팽창하는 자본처럼 끝없이 물욕을 채우려는 탐욕도 문제의 근원 중 하나다. 한국은 자본주의적 가치와 시스템을 이식하고 산업화를 지향한 결과 유럽문명이 약 300년에 걸쳐 이룩한 물질적 성취를 반세기에 달성했다.
하지만 그런 ‘압축성장’에 정신은 상응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발상지 구미사회를 움직이는 작동원리는 인간의 욕구 외에도 공정성, 정의, 공사 구분, 계약의 적법성, 이성에 토대를 둔 합리성과 합법성, 기독교적 평등사상도 있다. 자본과 물질 자체는 위험한 게 아니며, 길흉화복은 그걸 누리려는 인간의 정신에 달려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민주주의사상과 자본주의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우리에게 남아 있던 민본위민의 전통 사상과 가치,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 지향성과 종교적 이타심으로 스스로를 자정하는 뒷심이 부족했다. 절름발이 성장이요, 몸과 얼이 조화되지 못한 조숙아다.
그렇다고 원인을 시대에 돌려버릴 순 없다. 그건 지나친 논리의 단순화요, 우리자신의 생존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안일한 처사다. 시대를 맞이하고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건 사회구성원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국가지도자, 정치인, 공무원, 교육자 등 사회지도층의 제기능이 중요하다. 정치 사회제도의 제정과 개선을 통해 사회를 이끌어가는 게 이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법의 제정과 집행, 감시, 계도 역시 정치와 정부의 영역이다. 위기(crisis)는 위협(threat), 불확실성(uncertainty), 긴급성(urgency)을 수반한 혼란스런 상황을 말한다. 거버넌스에 대한 각종 도전에 직면해 정부기관 혹은 거버넌스를 행하는 조직의 정치적, 행정적 행위뿐만 아니라 이들이 공표하고 실행하는 공공정책들의 대응력 정도가 곧 위기의 예방, 처치, 재건을 수단으로 한 위기관리를 의미한다면, 위기대응은 일반인들이 조직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전쟁, 테러와 지진, 해일 등의 천재지변, 홍수, 가뭄, 산불 등의 자연재해 등 현대적 위험에 즉응할 수 있는 대책을 법령화하고, 위난 시 준수해야 할 계통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일이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공인들이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사회는 이완되고 그만큼 긴장감이 떨어져 허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탈법운영이 가능한 것은 감독기관이 불법을 봐주기 때문이다.
이번 사고 역시 그 이면에 세금 포탈, 감독기관과의 유착, 안전성을 무시하고 비정규직원의 선장 대용 같은 탈법운영을 하지 않으면 경영이 어려운 경제문제, 선장의 무책임과 인간성 상실 등의 정신 문제들이 서로 얽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 또한 최근 20여 년 이래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약탈적 경쟁, 승자독식, 패자부활제의 거세, 구조조정, 비정규직의 양산과 궤를 같이 한다. 세월호 선장도 1년짜리 계약직이었다. 본분을 잊고 조난승객을 팽개치고 먼저 이선한 조타수 3명도 모두 비정규적이었다. 계약직 선장에게는 퇴선 명령 권한이 없었다. 이들을 두둔할 뜻은 추호도 없지만 이래선 사명의식이 생겨날 리 없다.
일반인은 어떤가? 인정과 의리라는 명분에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부정에 협조하거나 비리를 알고도 눈감고 묵인하지는 않았는가? 어쩌면 우리 모두는 고위험 사회를 만드는 공범자이거나 조력자다. 스스로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번에도 시늉이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점검과 지엽적인 대책마련에 그쳐선 안 된다. 선주를 단죄하고, 선장을 처벌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을 찾아내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할 사회시스템의 총체적인 구조조정과 가치관의 개혁에 전면 착수해야 한다.
더 곪기 전에 우리사회를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비정한 경쟁 보다 다소 모자라더라도 다 같이 더불어 사는 상생으로, 비정상적인 성장 보다 공정한 분배를 통한 선순환적인 복지사회로, 단기적 성과를 치중하기보다 더디더라도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소수에게 부를 몰아주기보다 중산층과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복원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민족사적 명운이 걸린 대의다. 착수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요 죄악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될 수 있다.
위 글은 2014년 4월 22일자『경상매일신문』에 "안전불감증 공화국이 빚은 '세월'호 참사"라는 제목으로 실린 칼럼의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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