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일반론, 통일은 줄탁동기(啐啄同期)여야 한다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지난 주 독일을 방문한 박 대통령의 통일행보로 통일담론이 한 차원 격상됐다. 수단과 방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 화두로 던진 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 하든 말든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고 사위어 가는 통일논의에 새롭게 불을 지폈기 때문이다. 산을 자주 오르면 미답지라도 길이 만들어지고, 물이 흐르면 도랑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이것이 통일의 힘이 된다. 양은 질적 전화로 이어진다. 상시로 대화하고 고심, 몰두하면 다양한 견해와 방안들이 화학작용을 이뤄 하나의 길로 가닥이 잡힌다.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의 역사적 노도가 되는 것이다.
불교의 깨침과 득도 수단의 하나인 공안(公案) 가운데 줄탁동기(啐啄同期=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알의 안과 밖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왜, 언제 서로 알을 쪼아야 하는지는 새끼와 어미닭이 직감으로 안다. 밖에서 쪼는 역할은 가늠 없이 하는 게 아니다. 쪼는 부리의 힘이 너무 세면 병아리의 부화시간이 모자랄 수 있다. 너무 약하면 안에서 헤쳐 나오기가 힘에 부친다. 안에서 나오려고 자신을 가두고 있는 막을 쪼아야 하고 밖에서 두드려줘야 한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 일이 되려면 안팎이 서로 호응을 해야 한다.
통일의 과정도 줄탁동기여야 한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듯 안팎에서 호응해야 가능해진다. 남북이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공감대 형성은 되물을 필요가 없다. 한민족임을 증명하고 하나가 되는 데는 꼭 엄밀한 의미의 사회과학적 개념을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구성원들의 공감과 통일의지만으로 충분하다.
흔히 하나의 민족임을 규정하는 요소로는 같은 민족, 같은 언어, 일정 영토 안 공동의 역사, 동일 민족으로 인식하는 정체성의 공유를 든다. 남과 북은 같은 핏줄, 동일한 DNA를 가진 형제다. 한글과 한국어로 한반도 일대에서 반만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함께 살았다. 원래 한 몸인 인간을 힘이 너무 세다고 해서 제우스신이 남녀 둘로 갈라놓기 전엔 한 몸이었듯이 우리민족도 한 몸이었다. 해방 후 한반도의 허리를 두 동강이 낸 외세가 제우스였다. 또 외세의 힘을 빌어 남북을 하나로 무력통일 하려던 김일성이 문제의 화근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때 피터지게 싸워 원수처럼 지내도 언젠가는 합쳐야 할 형제라고 생각한다.
이제 하나가 돼 세계로 웅비해야 할 때다. 남북이 힘을 합쳐 몸집은 작지만 힘세고 정의로운 삼손이 돼야 한다. 갈 길이 멀다. 둘이 힘을 모아도 살아남기 버거운 세계다. 여기서 지체하면 한민족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는 쉽지 않다. 반세기 이상 떨어져 살면서도 다시 보기를 오매불망 그리고 있는 세대가 사라지면 동족 의식은 옅어질 수밖에 없다. 방향 없이 밀도가 떨어진 통일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가 이 사회의 다수가 될 때는 필요성은 반감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하나가 돼야 한다거나 평화적 수단이 아닌 무력으로 합쳐선 안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천부적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인류역사발전의 보편적 진화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이념적 실험은 이미 실패로 끝나 용도 폐기된 지 오래다. 공산권의 몰락을 두고 역사가 종말을 고했다는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선언은 그걸 의미한다. 아직도 빛바랜 그런 역사의 골동유물을 신주 모시듯 매만지고 있다면 그건 시대착오다. 그것에 환상을 품거나 동경하면 감상적 통일론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북은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휘감아 온 이념의 막을 깨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우리가 밖에서 두드릴 준비는 충분히 돼 있다. 하지만 3대 세습으로 권력을 잡은 최고 ‘존엄’은 이에 호응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헤이그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과 악수한 날 그들은 보란듯이 노동미사일 2발을 동해로 발사했다. 대통령의 통일행보에 대해서도 “국제무대에 나가 ‘통일의 사도’인양 가소로운 놀음을 한다”고 비난했다. 이날은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 4주년이었다. 상호 비방을 금지하자고 약속한 게 엊그제였으니 실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시험하고 있다.
정의개념이 거세된 무기력한 북의 기성세대에게도 기대할 수 없다. 북한청년들의 정의감을 일깨울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묘안을 강구할 일이다. 독일통일 과정에서 서독이 동독의 청소년들을 통일의 견인차로 유도했듯이 말이다.
더 늦기 전에 통일교육을 정비해야 한다. 계획 없이 그냥 덤벼들지는 안을 거다. 목표, 비전, 실현수단, 일정표가 치밀하게 짜여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창구는 일원화 해야지만 논의는 정부가 독점해선 안 된다.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 통합을 거치는 건 필수과정이다. 대업을 임기 중에 끝내려고 해서도 안 된다. 혼자서는 힘이 들고 한계가 있다.
동서독통일에는 분단의 주역인 소련, 미국 등 외세의 결자해지적 결단과 협조가 촉진제가 됐다. 우리에게도 주변 4강의 이해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게 긴요하다. 통일은 어느 날 밤도둑처럼 느닷없이 오거나 수고로움 없이 오는 게 아니다. 확고한 목적 의지를 가지고 인내하면서 성실하게 땀 흘리고 준비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과학자의 발명품 같은 것이다. 새시대, 새생명을 잉태시킬 줄탁동기의 환희는 언제 쯤 맛볼 수 있을까?
위 글은 2014년 4월 4일자『경상매일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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