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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매춘업자가 된 일본의 또 다른 과거사

雲靜, 仰天 2014. 3. 24. 17:16

국가가 매춘업자가 된 일본의 또 다른 과거사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국가가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에 개입한 사실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무력화 하려는 아베 신조 수상의 사투가 실로 애처로울 정도다. 그런데 군 경험이 있는 80대 이상의 일본남성은 그의 언행이 모두 ‘오리발’임을 잘 알고 있다. ‘군위안부’를 접촉했거나 혹은 그의 전우였기 때문이다.

  

구 일본방위청 도서관에서 발견된 ‘군위안부’ 강제동원 기록 자료들이 언론에 알려지게 된 1992년 1월 이전까지 일본 권력자들에게 군과 국가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여성을 성 도구로 인권을 유린한 범죄에 대해 죄책감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무사계급이 최상층에서 칼로 지배한 남성 위주 사회구조 하에서 성산업이 번성했던 문화적 풍토가 그들을 일상사처럼 무덤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매춘은 수세기 동안 무사의 칼에 눌려 몸에 밴 체념적 삶의 태도를 가진 일본인에게 억눌림의 보상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일탈영역이었다. 군국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한 러일전쟁 뒤로는 대외침략의 선봉에 선 군의 사기진작을 위한 수단으로 용인됐다. 제1차 세계대전 시 소위 ‘카라유끼’(からゆき)라고 불린 매춘부들이 대거 시베리아로 출병한 군부대를 따라 매춘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이다.

 

 

"카라유기상"들은 근대 일본이 쇄국을 풀자 많은 일본인 남성들이 해외로 나가게 됨에 따라 동남아, 중국, 시베리아 등지로 일본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나가 매춘으로 돈을 벌었다.

  

패전 뒤에도 일본권력자들은 과오를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 사과와 보상은커녕 과거사를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는 역사의식조차 꿈틀거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예 국가가 직접 매춘정책을 입안하고 매춘사업에 뛰어들기까지 했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의 항복 선언이 있자 일본전역은 삽시간에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다.

 

연합군이 일본 본토로 진주하면 여자는 모두 노상에서 발가벗겨져 미군에 끌려가 미군위안부로 일하게 될 거라는 풍문이 떠돌았다. 자신들이 과거 외국에서 행한 경험에서 나온 지레짐작의 소산이었다. 자신들이 그랬으니 미군도 당연히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한 발칙한 상상! 일본동맹통신사를 필두로 언론도 연합군이 상륙하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연일 보도하면서 공포심을 조장했다.

  

항복선언 6일 뒤 ‘전후처리 내각회의’에서 점령군이 “성 기갈”상태일 거라고 단정한 수상을 비롯한 각료들은 미군에게 부녀자들을 제공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중지를 모았다. 국가매춘조직인 ‘특수위안시설협회’를 만들기로 했다. 일국의 각료들이 내린 대응책 치고는 너무나 부도덕한 것이었다. 연합군에게 제공할 위안소를 설치하라는 내무성 경찰국장의 지시하에 기민하게 8월 26일 특수위안시설협회가 결성됐다.

 

공창, 사창 매춘업자, 요정, 카페, 산업전사위안소 업자 등으로 조직된 이 단체가 앞장서 점령군을 “철저하게” 위안하기 위해 “새로운 여성”을 모집했다. 일본정부도 이 협회에 1억 엔의 예산을 투입하고 관계성청을 동원했다. 국고가 텅 빈 상황이었음에도 내무성과 대장성은 상업은행에게 위안조직에 5,000만 엔을 대출해주도록 지시했다. 이 돈은 미군이 요코하마 혹은 요코스카로 상륙해 도쿄로 들어갈 경우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인 국도변(大森역의 작은 촌)에 세운 첫 번째 위안소 설립에 쓰였다.

  

매춘은 “국가긴급사항의 일환으로 진주군의 위안을 위한” “큰 사업이니 일본여성은 솔선해서 참가하기 바란다”고 하면서 “18세에서 25세의 여성이 일하면 누구든지 간에 모두 숙사와 피복과 양식을 제공한다”고 선전했다. 낯익은 데쟈뷰다. 엊그제만 해도 국민에게 “鬼畜英美”로 부르도록 주입하면서 영국과 미국을 귀신과 축생으로 비하했던 군국주의자들이었다.

 

 

일제 패전 이후 일본 본토로 진주한 미군이 나이 어린 매춘부 여성과 화대를 흥정하고 있는 장면
유곽을 찾은 미군에게 맥주를 입에 넣어주고 있는 게이샤

 

그런 오만한 태도가 불과 며칠 사이에 180도 바뀌었다. 국가존엄은 간 데 없었다. 전국민이 기아에 허덕이는 상황이어서 손에 먹을 것만 쥐여져 있으면 여성들이 따라오던 시절,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의식주를 미끼로 헐벗은 젊은 여성들을 매춘부로 만든 것이다. 점령군의 비위에 맞추기 위해 연합국 측이 시키지도 않은 악업을 자행한 것이다.

   

삽시간에 토쿄-요코하마 지구, 마루노우찌, 긴자 일대에 38곳의 위안소가 생겨났다. 이곳에서 매춘에 종사한 위안부는 전성기 땐 7만1,000명으로 집계됐지만 실제는 이보다 더 많았다. 여성을 유인한 매춘업에 뛰어들어 벌어들인 달러가 200억 엔이었다.

  

국가가 조직적으로 성범죄에 관여했음에도 일본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까닭은 이런 과거사와 무관치 않다. 그들에게 범인권적 요구를 관철시키려면 당시의 미국처럼 그들을 단박에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최고다. ‘강한 자에게 붙어야 산다’는 일본속담이 말해주듯이!

 

위 글은 2014년 3월 24일자영남일보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