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형 리더십의 20세기 顯現 : 孫元一제독의 생애와 사상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목 차
머리말
Ⅰ. 생애
1. 생장과 시대배경
2. 군인, 국방행정가, 외교관
3. 해군 및 해병대 창설
4. 장보고-이순신 정신의 계승과 발전적 삶
Ⅱ. 사상과 정신
1. 지덕체의 조화와 기독교 사상의 실천
2. 부국강병과 애국애족을 위한 선공후사 정신
3. ‘참군인’정신의 실천
4. 인본주의와 상통한 ‘21세기형 리더십’
맺음말
머리말
역사 인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그 연구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면 심지어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우선, 관련 자료의 수집이나 그 자료에 대한 분석, 확인, 검증작업의 즉시성이 뛰어난 현존 인물보다 사료확보가 충분치 않을 수 있고, 그 충분치 못한 사료로는 연구대상 인물을 평가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남겨진 사료에 근거할 뿐인 역사학에서 무릇 사료란 게 언어 자체의 한계성으로 인해 과거 역사인물이 보여준 특정 행위에 대한 의도나 의사, 동기와 목적 등을 제대로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언어를 뛰어넘는 아니,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내면의 사유세계 혹은 연구대상인 특정인물이 특정 상황과 이유로 인해 말할 수 없었던 동기나 목적 등은 물론이고, 그의 감정과 정서, 감각과 느낌을 끄집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우리는 애오라지 그의 주요 동선만 가시화할 수 있을 뿐이다. 마치 뼈대만 잡힐 뿐, 정신은 고사하고 혈액, 세포, 근육이 모두 無化돼 나오는 X-레이 사진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자들은 왜 역사 인물을 연구하고, 평가하려 드는가? 그것은 역사가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비록 연구대상 인물에 대해 결례를 저지르는 일이 될지라도 역사가의 사관에 의해 검증되고,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역사적” 인물로 태어나는데, 이 작업은 온전히 역사가의 몫이다. 물론 과거 인물이라고 해서 누구나 “역사적”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님은 불문가지다.
손원일 제독(이하 직함 생략)은 역사가의 엄혹한 검증대에 올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함량초과의 대형“호재”다. 그가 보여준 삶의 지향과 행적이 범상함을 넘어 현재 우리의 삶에까지 침전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왜 여태껏 발굴, 평가되지 않고 역사가들의 가시권 밖에서 잠들고 있었는지는 쉬이 납득되지 않는 의문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으로 손원일을 비춘다면 그가 70여 성상의 인생역정에서 치열하게 고뇌하고, 꿈꾸고, 분노하고, 좌절하면서 이루려고 했던, 그리고 이루었던 역사의 구조물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 가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손원일이 살았던 삶의 궤적을 전체적으로 조감하면 그의 생애는 삶의 전환점을 중심으로 크게 세 단계의 변화가 굴곡지게 포착된다.
첫째 단계는 출생에서 유년, 청소년,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해방 이전 시대다. 이 시기는 부모의 훈육, 중국망명 생활에서의 학업과 취업, 일경에 체포돼 고문당한 일, 그리고 그가 벌인 사업 등으로 요약되는 “私人”, 즉 한 사람의 자연인의 삶이었다.
둘째 단계와 셋째 단계는 모두 私人에서 공인으로 급작스러웠지만 운명적인 신분변환이 일어난 시기다. 그 첫 번째는 해방 직전 귀국 후 군문에 몸담고 있다가 예편한 시기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해군 및 해병대 창설, 6․25전쟁시 북한의 남침 저지, 군 발전을 위한 헌신으로 채워져 있다. 그 두 번째는 군문을 나와 외교관으로 봉직한 후,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직 등을 수행한 시기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지막 봉사로 삶의 후반기에 해당된다.
역동적인 손원일의 삶에 비해 그의 내면적 사상의 변화와 굴절은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청소년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국가관, 생사관 등이 수미일관하고 있다. 이 점은 실제로도 그 자신이 사상적 변화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든가 아니면 생전에 열정적이고 다양했던 활동에 비해 그가 남긴 한정적인 자료로는 변화를 포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손원일은 오랫동안 군 수뇌부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육성이나 문자로 남긴 삶의 흔적”은 여타 인물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다. 20여 편의 짧은 연설문과 한 권의 회고록이 전부다. 게다가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러한 자료들마저 개략적인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본고에서 나는 충분치 못한 이 사료들로 손원일을 오늘 우리시대 의미의 장으로 불러내 보겠다. 그의 비범한 구국혼과 미래개척의 사상적 도량의 무게를 일면적인 언어의 그릇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이 그릇이 그 무게를 온전하게 지탱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기도 하다.
두려움의 무게를 다소나마 감량시킬 요량으로 그가 남긴 1차 사료 외에, 그를 둘러싼 시대와 환경, 삶의 조건,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기록들을 활용할 것이다. 한 인간의 특정 정치행위나 사상은 그것이 포박돼 있는 국가 및 사회의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 어떤 정치행위자나 사상가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국가, 사회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는 이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현실과 괴리되거나 혹은 시대를 앞서간 정치행위나 사상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역사적 산물인 이상 그 행위와 사상 형성의 조건 내지 배경으로서 해당 사회와의 상호 맥락을 추적해볼 때 비로소 대상인물의 삶과 사상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입체적으로 묘술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로부터 환희의 해방공간을 거쳐 타력적인 남북의 분단, 동족상잔의 6.25전쟁, 4.19의거, 5.16군사정변 등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손원일이 고뇌하고, 성취하고 이룬 것들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의 역사적 의미와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검증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가 창설한 해군이 오늘날 장보고-이순신정신의 맥을 이어 받은 역사의 연속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과거를 능가한 발전의 진폭을 형량해보고자 한다.
Ⅰ. 생애
1. 생장과 시대배경
손원일은 1909년 음력 5월 초닷새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서 손정도와 박신일 슬하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의 한국강점 1년여 전이었다. 그는 탄생부터 운명적인 요소가 짙었던 셈이다.
그의 집안은 강서 일대에서 몇대로 살아 왔었고, 조부가 유학자에다 부농이었던 관계로 꽤 알려진 양반가문이었다. 그가 조부에 대해선 대단히 완고한 분이었고, 벼슬을 지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었을 뿐이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부는 유년시절 그에게 이렇다 할 뚜렷한 훈도가 작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비해 그의 유년기 삶의 형태를 결정하고, 나아가 일생을 관통하는 가치관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목사의 신분으로 민족의 선각자적 삶을 살다간 부친이었다.
손원일의 부친 손정도 목사는 일생 중 4분의 3을 민족의 독립운동에 바쳤고, 4분의 1을 목회사업에 바친 숙명적인 민족계몽운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이타적인 기독교정신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늘 음지에서 민족의 독립과 안녕을 자신의 안일과 가족의 안녕보다 우선시한 자세로 삶을 영위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동시에 식민지 약소국의 지식인으로서 초지일관 민족에 대한 애국애족의 자세와 정직과 헌신, 그리고 자신의 반일 지조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손정도 목사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초드는 까닭은 그의 삶과 사상이 손원일의 삶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무릇 인간은 태어나서 성인이 되고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부모, 학교와 사회로부터 평생 동안 유형, 무형의 형태로 배우며 살아가게 된다. 학교 및 사회교육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자신의 인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교육이거나 그에 비견되는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자 자식의 육체만이 아니라 삶의 DNA까지 결정해주는 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원일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도 부모로부터 받은 훈도와 교육이 평생 자신의 삶의 방향과 폭을 결정짓게 만들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크게 세 갈래의 교훈을, 모친으로부터는 얼추 대여섯 가지 이상의 감성 혹은 삶의 자세를 물려받았다.
손원일이 부친으로부터 받은 생애 첫 번째 가르침은 항상 근면하게 일하고, 안일하거나 나태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손정도 목사는 아들이 소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사람은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이가 어리다고 방학이라는 이유로 빈둥빈둥 놀아서는 안 된다”고 훈계했다. 부친이 그렇게 강조한 것은 “우리민족이 나라를 잃은 것은 오로지 게으르기 때문”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손원일은 이러한 부친의 가르침을 가슴속에 깊이 새겼다. 두 번째 교훈은 지방색 근절과 파벌을 형성해선 안 된다는 점이었다. 세 번째 가르침은 독립을 쟁취하고, 나아가 독립 후 미래 과학사회와 산업사회를 예비하기 위해서는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일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었던 셈이다.
첫 번째 가르침에서 일제에게 침략당한 망국의 원인이 노동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손원일은 근면하고, 열심히 면학, 노력하는 자세로 평생을 살게 된 요인이 됐다. 또한 그는 독립된 주권국가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됐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부국강병을 통한 주권국가의 실현에 두게 됐다.
요컨대 그는 부친 손정도 목사로부터 민족을 위한 애국애족정신과 독립운동정신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부친의 훈도, 그리고 초등학생의 어린 나이에 직접 1919년 3.1만세시위에 참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는 어린 몸이었지만 이미 조국이 일제의 압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독립운동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체득하게 됐다고 한다.
두 번째 가르침은 그에게 정치가가 아닌 군인의 길을 택하게 만든 자기장이 됐다. 그는 이 가르침으로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추구하는 참군인의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교훈을 얻었다. 이 가르침은 손원일이 일찍부터 국가독립에 눈뜸과 동시에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내면화하게 된 계기가 된 만큼, 그 계기의 전후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맥락은 다음과 같았다.
1919년 1월 중국으로 망명한 손정도 목사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의정원 의장에 취임해 초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등과 함께 정치에 참여한 바 있다. 의정원은 오늘날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고, 손정도 목사가 3년간 맡은 의장직은 국회의장과 같은 직위였다. 부의장은 김규식 박사였다.
그런데 이 시절 상해임시정부는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실천보다 노선이나 지연과 인맥에 따라 편을 갈라 상대의 활동을 저해한 탁상공론과 계파싸움이 빈발했다. 이 시기 손정도 목사는 1922년 4월 북경에서 거행될 예정이던 제11회 세계기독교학생동맹대회를 일제의 침략만행을 규탄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이 대회에 참가한 바 있다. 그는 대회참가에 필요한 경비를 개인적 친분이 있는 국내의 애국지사로부터 지원받았다. 그러나 상해 임시정부 내에는 이 경비를 두고 그가 독립운동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도산 안창호 선생이 직접 이에 대한 진상조사에 나서게 됐고, 공정하고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 “손 의장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결론이 났다. 하지만 이 일로 손정도 목사는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고 결국 3년간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상해를 떠나 길림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동포사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민족계몽운동에 힘을 쏟게 됐다.
이 일은 어린 손원일에게 평생 붙들고 가게 된 인생의 반면교사가 됐다. 손정도 목사는 아들에게 자신이 당한 근거 없는 비난과 모함, 그리고 이를 둘러싼 임시정부 내의 극심한 파당성을 들려줬다.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지방색을 가르는 파당싸움을 말아야 한다. 좁은 나라에서 네 갈래 열 갈래로 갈려 싸우다 나라를 잃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는 한숨 섞인 얘기였다. 선친의 이러한 가슴 아픈 지적은 손원일 스스로 밝히듯이 그가 부친으로부터 “새겨들은 두 번째 교훈”이었으며, “평생의 좌우명”이 됐다.
세 번째 가르침은 손원일에게 앎의 가치와 효용, 지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가 훗날 군문에 몸담아 지식본위의 지성적인 자세로 후학을 양성하거나 혹은 전쟁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하고, 국방정책을 문민적 발상으로 풀어나가게 된 바탕이 이때 길러진 듯하다.
이와 관련해 손정도 목사는 자신의 아들에게 식민지민족으로 조국이 독립이 될 때까지는 떠돌아다닐지라도 남이나 타민족에게 천대받지 않기 위해서는 각 분야에서 실력자가 돼야 하고, 그것이 곧 조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은 비단 손원일의 형제들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한민족 전체를 향한 통렬한 외침일 수도 있다. 손원일 스스로 이 “전례 없는 엄한 훈계”는 자신에게 “하나의 전기”가 됐다고 회고한 바 있다. 만주 文光중학 졸업반이던 17세 때의 일이었다.
“하나의 전기”란 이때부터 그가 식민지상태의 조국의 현실, 이로 인해 타국 땅에서 자신의 가족이 고생스런 망명생활을 하는 이유 등을 깨닫고 공부보다 운동에 더 관심을 보였던 예전과 달리 북경유학을 목표로 맹렬히 학업에 매진하기 시작한 사실을 가리킨다. 자신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 시기 그가 조국의 독립을 갈구한 비감어린 감정을 담은 노래를 작곡, 작사한 가사내용이나 또 그 노래를 직접 만주의 동포 어린이들에게 가르친 사실로 보아 그는 이미 망국의 설움을 깊이 맛보았으며, 이로 인해 조국의 독립과 주권회복에 대한 의식이 내면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국의 철없는 아해들아 웃지 마라. 마른 풀도 봄이 오면 꽃 필 때 있으리. 낙심하지 말라. 부모형제 자매여, 우리 커서 나라를 찾으면 기쁨에 겨운 마음으로 고향 찾아갈 날 있으리. 고향 찾아갈 날 있으리.” 즉 그는 스스로 회고한 바 있듯이 나라를 걱정하고 행동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던 셈인데, 신채호가 논급한, ‘我’와 ‘非我’를 모순적으로 인식함으로써 능동적으로 ‘我’를 확립한 자아의식 혹은 주체의식이 이미 청소년기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손원일이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통한 선험적 통찰력, 국가, 독립, 주권, 앎의 가치 등과 같은 “지성”이었다면, 그의 모친으로부터 훈습된 것은 어떤 경우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의연함, 삶의 슬기로움과 지혜,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의지, 약자 편에 설 수 있는 어짊(仁), 그리고 이 모든 기질들을 묶는 호연지기 같은 감성들이었다.
“嚴父慈母”라고 했다. 손원일의 자당 박신일 여사는 지아비의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일경에 체포당할 뻔한 수많은 위기를 당할 때마다 모두 슬기롭고 의연하게 모면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갖은 고생을 마다 않고 독립운동가인 남편을 헌신적으로 내조하면서 5남매를 길러냈다. 그는 두 살 연하의 손정도에게 출가한 이래 불철주야 남편 뒷바라지, 독립지사들의 家母 역할에다 자식들의 양육과 교육까지 도맡는 등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면서 가정을 꾸려온 외유내강형이었다.
그는 남편 손정도 목사가 독립운동으로 인한 병고로 5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뒤로는 홀로 자식들을 모두 대학교육을 받게 하거나, 외국유학까지 보내는 고생을 하면서도 언제나 절도 있고 품위 있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일과 사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균형 감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손원일이 바다와 해군에 최초로 생각이 미친 것은 우여곡절 끝에 의대와 북경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중국 상해에서 진로를 고심하던 때였다. 상해의 黃埔江 부두에 정박된 수많은 상선, 군함과 제복을 입은 해군병사의 모습을 보며 불현듯 머리와 가슴에 번쩍하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 바다에는 미래가 있다. 지금은 남에게 빼앗긴 나라지만 언젠가는 독립의 그날이 오면 우리도 해양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그의 운명적 해양지향성은 생전에 자신이 가장 좋아했고 즐겨 불렀던 군가 행진곡 “바다로 가자”의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석양에 아름다운 저 바다, 신비론 지상에 낙원일세, 사나이 한평생 바쳐 후회 없는 영원한 맘에 고향,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그것은 훗날 손원일이 하느님의 소명으로 이해한 전광석화와 같은 영감이었다.
마침내 손원일은 해군이 돼야겠다는 결심하에 주먹을 불끈 쥐고 해군이 되는 길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복건성 출신이기는커녕―당시 중화민국정부의 해군은 복건성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중국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중국해군 입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해군이 아니더라도 바다와 항해술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끝에 상해 소재 4년제 中央대학 항해과 제3기생으로 입학했다.
이 시기 해양분야를 미개척분야로 판단한 그는 “해양을 공부하면 언젠가는 조국에 기여할 날이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 믿음이 중국인도 쉽지 않은 해양 학습교육을 모국어도 아닌 중국어로 진행된 어려운 교육과정을 끝까지 견뎌내게 한 원동력이었다.
손원일은 대학졸업 후 중국의 국영기업인 招商局에 들어가 상해와 광동을 오가는 3,000톤급 화객선에서 일했다. 생애 첫 직장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바다를 항해한 이 경험을 통해 항해술은 물론, 바다의 생태를 몸으로 체득하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바다에 미래가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됐다. 세계를 주름잡는 민족은 바다의 험난함을 극복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중국이 나라는 크지만 대국이 되지 못한 곡절이 바다를 정복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이해했다.
손원일은 중국 招商局에서 퇴사한 뒤 독일계 선박회사로 옮겨 함부르크-지중해-수에즈운하-인도양-싱가포르-요코하마-블라디보스톡을 1회 왕복하는 데 반년이 소요된 항로를 오고갔다. 그러나 그는 지루한 항해를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틈틈이 독일어를 배웠고, 유럽인들을 직접 접하면서 유럽의 합리주의 정신을 경험했다. 또한 항해를 통해 대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원생활 중에 손원일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전환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부친 손정도 목사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유소년 시절부터 금과옥조 같은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에게 부친의 사망은 사실상 처음으로 부친의 위대함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재삼 내면화하는 계기가 된 듯하다.
부친의 가르침을 통한 조국의 독립, 주권 등의 가치들에 대한 또 한 번의 재인식은 부친의 사망과 그리고 수년 뒤 자신이 일제의 경찰에 체포돼 직접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됨으로써 구체화된다. 그가 부친의 사망을 알리는 부음을 받았던 것은 1931년 2월 19일 일과처럼 오가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여객선 선상에서였다.
부음을 받고도 달려갈 수 없었던 손원일은 장남이면서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죄스러움과 함께 부친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되면서 자식을 위해 헌신하였고, 목사로서 민족을 위해 선각자적인 삶을 살았던 부친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는 자신도 부친을 본받아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각오하면서 부친의 사망에 대한 슬픔과 죄스러움을 이겨냈다.
그 후 3년 뒤 손원일 자신이 일경에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되자 이번에는 가장이자 목사와 선각자로서의 부친보다는 독립운동가로서의 부친의 가르침이 자신에게 더 오롯하게 내면화 됐던 것으로 보인다.
손원일이 일제에 피체돼 극한 고문을 당하게 된 혐의는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의 요시찰인물이었던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에서 그도 부친의 뒤를 이어 상해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원으로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때는 1932년 4월 29일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지휘를 받은 윤봉길 의사가 상해주둔 일본군 시라카와(白川) 대장 등 일제의 요인들을 대거 폭살시킨 사건의 여파로 일본이 한국독립투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던 시기였다.
이 사건의 배후 주모자로 지목된 김구의 목에는 중국 은화 60만 원이라는 현상금이 붙어 있었다. 1934년 여름 중국에서 들어온 어떤 한국인 청년이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귀국한 것이라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됐다. 그는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이미 3년 전에 고인이 된 손정도 목사를 배후인물인 것처럼 거명하고 말았다. 일경은 손원일을 체포했지만 그의 귀국은 16년 만에 일시 귀국한 것이었을 뿐 독립운동과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손원일은 1년여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평양의 강서경찰서로 끌려 다니면서 받은 심한 고문으로 인해 협심증과 신경통을 앓았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한동안 술로 세월을 보냈다.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몸도 불편했지만 그의 옥고는 이보다 더 큰 심적 통한을 절감케 만들었다. 그러한 옥고와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망국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출감은 했지만 손원일은 출국금지령이 떨어져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서 자신의 큰 자형 윤치창과 함께 南桂洋行이라는 수입상을 차려 1940년 초까지 5년간 운영했다. 그는 이 사업으로 큰 돈을 벌어 북경에 계신 모친을 서울로 모셨다. 이 사이 그는 민족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임종을 지근에서 지켜봤는가 하면, 1939년 3월 11일 이화여대 음악과 출신의 재원인 홍은혜 여사와 결혼도 해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결혼 이듬해인 1940년 봄 손원일은 동화양행 중국 지사장으로 발령받아 생애 두 번째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동화양행 천진 지사장에서 일약 당시 무역과 물류의 중심지인 상해 지사장으로 전보됐다. 그때부터 1945년 8월 해방이 되기까지 5년 가까이 그의 사업은 지속됐다. 그는 “상해의 무역업자들 사이에서 ‘훌륭한 사업수완을 가진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지금 돈으로 수십억대의 재산”을 벌어 “눈 깜짝할 사이”에 “백만장자”가 됐다고 한다.
이 시기 일제의 발악이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손원일은 머지않아 조국의 해방을 예감한 듯했다. 그래서 그는 곧 사업을 정리해서 동업자와 균등하게 수익금을 나눈 후 서울로 잠시 들어가 아내의 생계문제를 해결해준 뒤 다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의 重慶으로 갈 계획을 세웠었다.
일제가 전쟁 막바지에 들어서자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집집마다 놋그릇은 물론 숟가락까지 뒤져 철저하게 수탈해가는 시절, 쌀은커녕 고구마 하나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기에 重慶으로 가기 전에 가족의 부양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이 계획을 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고 표현돼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重慶으로 가기로 작정한 것은 임시정부에 합류해 독립운동에 참여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판단이 든다.
이 추측이 맞는다면 그는 독립운동가가 될 수 있었던 길을 해방으로 상실하게 된 셈이다. 또 그는 중국을 떠날 때 “수십억대의 재산”을 상해에 그대로 두고 왔다는데, 왜 그 후 이 재산을 가지러 가지 않았던가 하는 의문도 重慶행을 감행하려고 한 “결심 때문”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해소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손원일은 일시 귀국하기 위해 北京역에서 奉天행 기차를 탔다. 경성행 열차로 환승하기 위해서는 먼저 奉天역으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그가 ‘해방’사실을 알게 된 것은 奉天역에 도착했을 때였다. 해방은 일제치하 한국인들의 숙원이었지만, 그것이 도둑처럼 찾아왔을 때는 국가를 세워 명실상부한 주권국가로 거듭나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수반했다.
새로운 국가건설(state building)에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산업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지만 특히 군사분야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중요하였고, 그래서 이 분야의 인재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였다.
2. 군인, 국방행정가, 외교관
조국으로 돌아온 손원일은 해방의 감격을 뒤로 하고 바로 해군창설에 착수했다. 해군, 즉 군문에 투신한 것이다. 혼란기 군문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동기는 대개 구국의 신념(manifest destiny)에서, 아니면 국가에 충성함으로써 국가이익(national interest) 추구에 일조하고자 하거나 혹은 특정 소속의 집단이나 개인의 입신양명을 도모하고자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가운데 개인에 따라서 동기가 한 가지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한두 가지가 중첩된 동기를 가진다.
손원일이 군에 투신한 동기는 구국의 신념과 국가이익의 추구가 혼합된 경우였다고 확신해도 좋다. 근거는 두 가지다. 그가 집단이익을 추구하고자 했었다면 정치를 했을 수도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중국에서 귀국한 손원일이 상해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선친의 후광으로 정치에 손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의 길을 택했다. 조국의 바다를 지키겠다는 열정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또한 군인이 되고 난 뒤에도 군내에 “정치얘기”, “파벌싸움”을 금지하기보다 어떤 식이든 자신에게 득이 되는 파벌을 형성하고자 했거나 어떤 파벌에 편승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익이나 발전을 도모하려고 했다면 당장 상해에 두고 온 “수십억대의 재산”을 가지러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방의 감격으로 환희에 가슴 벅찼던 그는 “상해에 두고 온 재산 따위는 아예 생각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국가발전의 초석이 되고자 한 일념에서 청년시절부터 생각해온 해군이 되는 꿈과 해군창설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을 뿐이다. 해양을 조국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름길로 인식한 그였기에 해양입국의 실현을 위해 한시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해군을 창설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간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겸 귀환동포구제위원장직을 맡고 있던 유억겸에게 손원일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배를 타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동안 조국이 광복을 맞으면 내 손으로 해군을 창설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이제 광복이 됐으니 해군을 창설하는 일에 이 한 몸 바칠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기적인 꿈이었다. 그가 장기적으로 실현시키려고 한 궁극적인 목표는 대양에서 민족의 미래를 건지는 것이었다. 대양으로 진출하려면 해군이 필요하고, 아무도 해양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이 몸소 해군이 돼 해군을 창설해야 했다. 마침내 손원일은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했고, 이 해군으로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풍전등화에 처한 조국을 구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해군창건의 역사적 의미는 너무나 크기에 다음 절에서 자세하게 논급하겠다.
후술하겠지만, 손원일이 북한의 불법남침에 맞서 조국수호의 일선에 선 점은 군인의 본분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훌륭한 군인이라고 평가할 순 없다. 군복무라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지식이 어떠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군인이라면, 특히 고급 지휘관이라면 갖춰야 할 전쟁전술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다.
그는 해군의 책임자, 전군의 책임자와 같은 직무를 수행했던 관계로 전술보다는 전략이나 전쟁지도에 치중한 관심을 보인 듯 했다. 그가 남긴 얼마 되지 않는 병법 관련 언급만을 보고 그의 군인으로서의 ‘전문지식’을 평가하기엔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손원일은 손자병법을 읽었지만 주관적으로 이해한 듯 하고, 전투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전술보다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전략을 중요시한 면모가 엿보인다.
그는 손자병법의 저자인 孫子를 물욕이 없고, 삿됨이 없는 인물로 평가하고, 물욕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전략은 있되 奸함이 없고 늘 陽만 있는 전략가였다고 해석했다. 손원일은 이 陽을 정정당당한 대의명분이라고 해석하면서 “병가는 術이나 모략보다 먼저 陽氣를 잃지 말라”는 식으로 전쟁의 대의명분을 중시했다. 즉 정정당당한 명분은 이것의 유무에 따라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군의 원기”라고 했다.
그는 또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전략과 전술을 잘 운용하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전쟁의 승패는 “시간과 세”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시간의 활용은 기상, 지리와 함께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대한 요소이며, 여러 줄기의 물이 합해지면 물살이 빨라져 큰 돌도 떠내려가게 만들 듯이 군도 합심하여 전투력을 굵고 빠르게 모으면 대적도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그는 해군 총지휘관 자격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연이은 서울탈환작전에 참여해 유창한 영어구사 능력으로 한미 양군의 협력, 협조를 원활하게 만들어 서울탈환에 크게 기여했다. 이 점에서 손원일은 창군, 개척, 자주국방, 자조를 중요시한 군사 전략가이자 국방경영자로서도 능력을 발휘했으며, “병사를 지휘하는 장군이 아니라 장군을 지휘하는 장군이었다”는 평가도 합당한 듯하다.
손원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약 3주 전인 1953년 7월 1일 44세의 나이로 제5대 국방부장관에 취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1956년 5월 말 장관직을 사퇴하기까지 근 3년 동안 해군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 국군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국방부장관 재직 기간 중 손원일이 거둔 업적으로는 각 군 책임하에 군 지휘권의 자율적 확립과 국방행정의 기틀을 마련했고, 미국의 군사지원을 받아내 국군을 오늘날의 규모로 만드는 데 정초를 놓은 점을 들 수 있다. 군사지원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2년간에 걸친 오랜 협상을 벌인 끝에 미국이 72만 명 규모의 병력실링에 따라 군사원조 4억 2,000만 달러, 민간원조 2억 8,000만 달러를 합쳐 총 7억 달러를 지원해주기로 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외에도 미국으로부터 부산에 병기창을 지어줄 것과 C46수송기 18대를 추가로 제공받기로 약정을 받아 냈다. 또 미국으로 하여금 피지원국에게 물자를 구매하지 않는다는 그간의 원칙을 깨고 미국의 군사지원 피지원국으로서는 최초로 “군원불”을 유치하도록 만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지원은 당시 한국군의 군비강화 및 전투력 강화에 지대한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었거니와 우리의 경제부흥에도 밑거름이 됐다.
손원일은 전쟁 후 남아도는 병력자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복무기간을 2년 반으로 줄였다. 군 간부양성을 위해 장교들의 해외유학도 장려했다. 군 인재에 국한하지 않고, 전쟁 중이었지만 일반 민간인이라도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는 사람 가운데 자비유학이 가능하거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자라면 5,000명 한도 내에 외국으로 유학할 수 있도록 국방부장관의 권한으로 보장했다.
게다가 그는 미래 국방의 간성이 될 육해공군 3군 사관생도 간의 화합과 우의를 다지고, 체력증강을 목적으로 3군 사관학교 체전을 개최했다. 1955년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현충일을 제정했고, 이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국립묘지의 토대가 된 국군묘지를 서울 동작동에 세운 장본인이기도 했다. 국가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에 대해 개인차원에서 이루어진 추모를 국가차원으로 격상시켜 추모할 수 있게 한 것은 국가가 희생자들과 영원히 함께 한다는 의지를 심어준, 시대를 앞선 혜안이었다.
이외에도 국방부장관 재직시 그가 이루어낸 업적 가운데는 자칫 간과하기 쉬운 것이 더 있다. 6.25전쟁 시 휴전을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해 휴전회담과 휴전 후의 제네바회담에 정부대표를 내보내게 함으로써 결국 회의참석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는 데 기여한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5월 초 개최예정이었던 제네바회담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전쟁으로 해결하지 못한 남북통일을 회담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해봐야 소용없는 입씨름을 무엇 하러 돈 없애며 하느냐”며 회담 참여문제는 아예 거론조차 못하게 했다.
그런데 국방부장관 손원일이 대통령을 설득해 대표를 보내게 함으로써 미국으로 하여금 그에 상응해 육군 20개 사단의 근대화, 10개 예비사단의 설치, 해군 DE(1950년대에 사용된 구축함) 2척을 포함한 29척의 전함과 공군 1개 제트비행단 창설 등을 골자로 한 군사지원을 약속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이 불참하면 공산측이 전쟁책임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뒤집어씌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대표를 파견함으로써 제네바회담 참석을 요구한 미국의 입장을 살려주고, 제네바회담이 성공하면 한국의 자주적 국방력이 필요한데, 그럴 경우 미국의 군사원조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설득이 주효한 결과였다.
1956년 5월 말 47세로 손원일은 약 11년간 봉직했던 군문을 떠나 예비역이 됐다. 그가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터는 국방에서 외교계로 넘어갔다. 그는 1957년 6월 말 초대 서독 공사로 부임해 이듬해 8월 1일부로 대사로 승진하면서 3년 남짓 외교관직을 수행하면서 정부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는데 디딤돌을 놓았다.
이를 두고 정일권 전 국무총리는 당시 한국정부 외교의 50% 이상이 손원일이 맡아 성사시킨 것이었으며, 대한민국 국군이 이룬 괄목할 만한 현대화도 손원일의 외교가 초석이 됐다고 평가한 바 있다.
1960년 4.19의거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 무너지자 손원일은 공식적으로 서독대사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곧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임명된 민주당의 허정에 이어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유럽에 체류하다가 귀국했다. 이 사이 그는 1958년 국제원자력 기구 정기총회 한국대표와 1960년 제2차 유엔해양법회의 한국수석대표를 맡기도 했다.
귀국 후 손원일은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중구 지역구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고, 1966년 제12차 아시아반공연맹 한국대표, 1972년부터 1974년까지 국제문화협회 회장직과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직(제7대와 제8대)을 맡아 활동을 했다. 1973년 8월 대만의 중화학술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지만 그 이듬해부터 병환이 찾아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1976년 4월 제4차 세계반공연맹 총회 한국수석대표를 맡기도 하는 등 국가를 위해 마지막 봉사를 다했다. 그러던 중 신장병으로 6년 5개월 동안 치료해오다가 1980년 2월 15일 72세로 영면, 서울 동작동의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3. 해군 및 해병대 창설
손원일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가치 있는 역사적 업적은 자신이 직접 해군과 해병대를 창설하여 6.25전쟁을 도발한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분쇄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점이다. 특히 해군창설은 오늘날 21세기의 새로운 안보환경에 대응해 대양해군으로 발전하고 있는 대한민국 해군을 있게 만든 시원이었다. 이 점은 한민족의 군사사, 해군사, 해양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공적이다.
미국과 일본의 해군건설은 모두 평화시가 아니라 전쟁시에 시작됐다. 이에 비해 한국의 해군건설은 평화시에 시작돼 주권국가의 수립, 즉 건국의 일환으로 국민에게 다가선 것이다. 미국해군은 1899년 스페인전쟁을 기점으로 해군문제가 국민적 과제의 성격을 띠면서 본격적으로 건설됐다. 일본해군이 국민적 성격을 띠면서 본격적으로 건설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이 기점이 됐다. 이처럼 양국은 전쟁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해양문제와 해군역할의 중요성을 재인식시킨 공통점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세계 각국이 주목한지가 오래다. 국가경제, 자원, 군사, 에너지 등 다방면에서 그 중요성을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그 필요성도 이미 전 세기부터 대두돼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지구 면적의 70%나 되는 해양은 지구상에서 육지보다 더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의 주요한 통로로서 세계경제의 생명선이며, 군사력의 물질적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양자원은 엄청난 종류와 수많은 생물자원, 광물자원, 화학자원, 에너지자원을 함장하고 있고, 세계무역 물동 총량의 3분의 2 이상이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국제간의 전쟁수행과 군사동원 및 군사력투사도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왕 해양대국이 바로 군사대국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반세기 전 갓 해방된 한국은 해양에 관심을 돌릴 필요성도, 그것을 아는 전문가들도 전무했다. 지정적 요인(geopolitical fctor)에서 보면 분명 한국은 대륙국가이자 해양국가다. 또한 장보고 대사와 이순신 제독이 각기 다른 시대에 동북아 해상을 장악한 역사를 상기하면 분명 우리에게는 주변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수승한 해양 및 해군의 역사와 전통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전통이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단절되고 말았다. 해양으로 뻗어나갈 지정적 동기(geopolitical motive)도 상실하고 살아왔다. 친일파로 변절하기 전 1910년대 말의 최남선처럼 극소수만이 바다와 해양의 중요성을 갈파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광복 후 이 시기는 정부의 해양정책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인재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한 마디로 해양분야는 불모지 혹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손원일만이 바다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찾으려고 했다. 역사적으로 대륙강국이 해양강국에 대항하여 대체로 승리하지 못한 이유는 대륙국가들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해양력의 전략적 이용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했었고, 그런 만큼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지 못했으며 해군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2세기 몽골이 일본을 침공해서 실패했던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앞에서 손원일도 중국이 강대국이 못 된 이유를 언급했는데, 중국 명조의 鄭和(1371~1433)가 아프리카해안까지 진출해 해양강국의 면모를 보인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러한 전통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바다를 멀리하고 해군력을 육성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중국에서 제해권 전략사상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20세기 초엽 이후부터였다.
한국도 만시지탄이 있었지만 찬란한 해양역사와 그 전통을 이어받아야 했다. 손원일이 해군건설에 착수했을 때는 어선이나 화물선 위주의 일반상선의 수도 충분치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해군창설에 기반이 될 물리적 조건(material condition)은 제로였다.
손원일은 사재를 털어 민병증, 김영철, 정긍모, 한갑수 등과 1945년 8월 23일 서울 안국동의 안동예배당에서 해군건설을 위한 과도기조직으로서 ‘해사대’를 결성했다. 해방된 지 불과 1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자 손원일이 37세였던 때다. 그들은 5일 만에 30여 명의 대원을 모집해 8월 28일 조선시대 상훈업무를 관장했던 표훈원(表勳院) 건물을 임시연락처로 삼아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초기 한동안 이 30여 명 대원들의 식사, 선전활동 등에 소요된 경비는 모두 손원일이 상해에서 귀국시 지참하고 온 돈으로 충당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사대는 ‘조선해사보국단’과 통합해 ‘해사협회’로 거듭났다. 그리고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그해 11월 11일 해사대 본부에서 미 군정청 고문 이동근과 해사국장 칼스텐 소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 창단식을 거행했다. 최초 단원은 총 62명이었다고 한다.
해방병단의 창설은 단절된 조선수군의 맥을 잇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894년 7월 15일 조선수군이 폐지된 지 약 51년 4개월만의 일이었다. 손원일은 해방병단 창설 직전 경찰임무를 띤 경비대를 조직해서 미군을 돕는 ‘해안경비대’ 지원임무를 맡아주라는 미 군정청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처음부터 ‘대한민국 해군’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그는 해군건설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모여든 해방병단 70여 명의 단원들에게 모든 희생을 아끼지 않고 “대한민국 해군”을 건설해줄 것을 독려했다. 그들은 모두 이 조직이 장차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될 것이라는 신념을 공유했다.
해방병단은 1946년 6월 15일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됐다. 병력은 200여 명에 불과했지만 당시 국방경비대와 함께 오늘날의 국방부 격인 통위부에 소속됐으며, 조선해안경비대의 사령부도 진해에서 서울로 옮겨왔다. 해군으로서 제 모습을 갖춘 것이 이때부터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국군조직법과 국방부조직법에 의거해 동년 12월 15일 통위부가 국방부로 개편됨과 동시에 조선해안경비대는 대한민국 해군으로 개편되게 된다.
조선해안경비대가 발전하게 된 배경 가운데 미 해안경비대 고문단(USCG)의 지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미 해안경비대 고문단은 한국해안경비대의 고문단 자격으로 조선해안경비대에게 부족한 보급 지원은 물론 미 해군의 교육교재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해군함정까지 증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급에서부터 교육, 함정 등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각종 지원을 이끌어 낸 역할을 맡은 것은 한국정부가 아니라 그들과 교섭을 벌인 손원일이었다. 이처럼 손원일의 노력으로 체계화된 조선해안경비대는 국군이 정식으로 창설되기 전 먼저 해군이 조직을 갖춰 초기 대한민국 국군의 출범을 예고한 선봉적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해군이 정식으로 발족됨과 동시에 손원일은 준장으로 진급돼 한국 최초의 제독이 됐고, 자연히 해군참모총장직을 맡게 됐다. 그는 이 시기 해군조직이 형태를 갖추자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들을 이루어냈다. 제일 먼저 해군창군이념과 해군조직을 운영할 원칙을 정하고, 장차 해군을 이끌어 갈 간부양성에 착수한 것이다. 그리고 해군정신을 표상하는 해군행진곡, 해군사관학교 교가 등을 만들었으며, 해군의 생명인 전투함을 구입하기 위해 범해군적으로 자체 모금을 실시했다.
먼저 해군창군이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몸을 바치나이다”로 정했다. 해군운영의 원칙으로는 군내 출신이 다른 파벌간의 갈등과 반목에 대한 발본색원과 공정한 인사, 민주군대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정신 확립이었다. 그 실천지침은 모두 6개항으로 정했는데, 내용은 본고 제2장 제3절 “참군인 정신의 실천” 부분에서 소개될 것이다. 간부양성과 관련해 항해학과 기관학은 하루아침에 터득하는 게 아닌 만큼 장기적인 계획아래 추진됐다.
해군교육은 이미 그 이전 1946년 1월 해방병단 시절 진해에서 첫 해군사관후보생을 모집해 동년 2월 13일부터 사관후보 1기생 113명이 입교한 이래 계속돼오고 있었다. 사관후보생은 처음부터 간부의 질을 고려해서 고졸 이상의 학력자만 받아들였다. 공군이나 육군보다 앞서 사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해군행진곡, 해군사관학교 교가는 이은상이 작사하고 손원일의 부인인 홍은혜 여사가 손수 작곡했다.
이 시기 손원일은 해군의 총사령관이자 국방행정가, 교육자라는 1인 3역을 너끈히 해냈다. 교육자로서 그가 한 역할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해군병학교 초대 교장에 부임해 직접 사관후보생들에게 병과(항해과), 기관과, 통신과 등 3개 학과별로 이수과목을 달리해 각과의 특성에 맞도록 학습시켰다.
또한 국어, 영어, 국사, 대수, 물리 같은 교양과목에 군사, 통신, 항해, 기관, 군법, 지정학, 해병학 등의 전문 과목도 공통 필수과목으로 개설했다. 영어와 항해술은 교장인 자신이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여기에다 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신사도의 덕목은 물론 각종 스포츠를 장려해 체력단련과 협동정신을 기르도록 했으며, 연극반, 문학반, 악기반까지 운영해 사관생도들의 정서함양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손원일이 보여준 국방행정가로서의 탁월한 면모는 국가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해군 주도로 함정을 마련한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군함은 해군의 생명과 같은 것이다. 당연하지만 손원일도 전투함을 보유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해군 관련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전투함 구입을 거론했다. 하지만 적수공권으로 출발한 건군 당시 군함이 있을 리가 없었고, 군함을 건조할 기술도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군비는 달러가 필요하지만 정부는 건국초기 해군함정을 구입할 예산도 확보돼 있지 않았다.
손원일은 해군 자체의 힘으로 함정을 구입하기로 하고 먼저 1949년 6월 1일 자신을 위원장으로 한 ‘함정건조기금 갹출위원회’를 설립했다. 그의 의지를 받들어 해군 전 장병은 “사랑하는 조국이여! 우리에게 배를 주시오, 바다에서 일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절박한 구호를 외치면서 모금운동을 벌였다.
군장병은 물론 해군부인회까지 참여한 범해군 차원의 모금운동에서 모금된 6만 달러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지출된 정부보조금 6만 달러를 합친 12만 달러로 그는 1949년 10월 미국으로 건너가 600톤급 포함 ‘백두산호’(PC-701함)을 구입했다. 백두산호는 3인치 포가 장착된 한국 최초의 해군전투함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추가로 3척의 전투함(PC-702, 703, 704함)을 구입했다. 당시 “배를 가지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요, 유일한 희망”이었던 해군의 꿈을 이뤄낸 것이다.
이때 구입한 총 4척의 해군함정은 6․25전쟁 발발 당시 300명의 해병대를 포함해 총 7,000명에 불과한 병력에다 함정도 항만경비용의 미국 및 구일본 소해정 몇 척과 수송선 몇 척 밖에 없었던 우리 해군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왜냐하면 바로 1년 뒤 유엔해군의 일원으로 6.25전쟁에 투입돼 인천상륙전, 원산상륙전과 같은 동서해안의 해상작전을 수행했고, 해상수송, 정찰, 봉쇄, 경비 및 도서방어, 기뢰제거, 항만봉쇄, 지상작전 지원을 위한 근접포사격과 상륙전을 벌여 북한군의 격퇴에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전사적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발발 직후 후방교란 임무를 띠고 북한지상군 및 해군 600명을 싣고 남해안으로 상륙하려 했던 1,000톤급의 북한군 무장수송선을 백두산호가 부산 앞바다에서 격추한 것은 후방침투를 통해 남한을 조기에 점령하여 전쟁을 종결지으려고 했던 김일성의 기도를 저지, 무산시킨 의미를 지녔다. 즉 해군함정의 구입은 결과적으로 낙동강선까지 후퇴한 지상군의 열세상황과 달리 동서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초기 전세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 결국 승기를 잡게 만든 셈이 됐는데, 우리에게 새삼 “유비면 무환”이라는 교훈을 일깨워 준다.
손원일이 건설하고자 한 해군은 단순한 해군이 아니라 과학적 해군, 자주적 해군, 민주적 해군이었다. 이 세 가지 가치가 독립적으로 병렬돼 있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음으로써 쉼 없이 발전하는 전투력 최상의 해군이었다.
첫째, 과학적 해군이라는 개념은 해군의 특성을 120분 감안한 것이었다. 손원일은 지상군과 달리 “현대 과학의 정수와 진수가 종합”된 무기와 장비 자체뿐만 아니라 그 운용 면에서도 한 치의 오차가 있어서는 안 되는 해군의 특성을 감안해 해군은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이러한 해군을 운용하는 주체인 해군 장병들도 “항상 과학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이를 위해 늘 “과학적 탐구와 연찬에 노력”하기를 희망했다. “과학적 탐구와 연찬”은 하고자 하는 의지와 희망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 학습의 장이 마련되고 동기유발이 부여돼야 한다. 손원일은 국방부장관 시절 해군에 국한하지 않고 전군 차원의 교육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원래 교육의 힘을 믿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다.
전시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 복무 중의 장병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대학교수들을 초빙하였고, 위탁교육제도를 마련해 3군 사관학교 졸업자 중 성적우수자들에게 국내외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55년 그가 ‘전시연합대학’과 국방대학원을 창설한 것도 같은 취지에서였다.
둘째, 자주적 해군이란 미래의 한국해군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영해를 지킬 수 있는 해군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시 손원일은 한반도가 지정적으로 외세의 침입을 자주 받게 되는 위치에 있어 16세기 말 임진왜란시에는 남쪽에서 왜구의 침략을 받더니 360여년이 지난 지금은 북쪽에서 동족이 일으킨 침략을 받게 됐다는 사실에 비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민족은 외세의 힘을 빌지 않고 자력으로 국토를 방위할 수 있는 힘을 기르지 않고서는 민족의 독립과 발전이 요원하다는 그의 소신을 실제화한 것이다.
셋째, 민주적 해군은 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기독교정신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와 관련해 우선 그가 민주주의 이념의 신봉자였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서 직접 손원일의 수업을 받은 바 있는 김영관 제독(제4대 해군참모총장 역임)의 회고에 따르면, 손원일이 해군 창설기 때부터 훗날 해군의 동량이 된 후배들의 존경과 신망의 대상이 된 까닭은 “세련된 풍모와 인격”, 원서로 항해술을 가르칠 정도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함께 해외에서 교육받은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민주적 해군을 육성하고자 한 목적의 이면에는 오늘날과 다른 시대적 배경이 존재했다. 때는 공산혁명이 동아시아로 파급됨에 따라 남북한 사회에도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져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들과의 헤게모니 정쟁을 촉발시킴으로써 사상적 혼란이 극심했던 해방공간이었다. 해방 직후 지식인은 자유민주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압도적으로 선호한 분위기였다. 1946년 8월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어떤 정치형태를 선호하느냐는 질문에 전체 국민들 가운데 70%가 사회주의를 찬성했다.
미 군정청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좌익의 활동을 단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 적화를 노린 공산주의 좌파들이 군인으로 가장하고 군내로까지 침투하던 시절이었다. 좌익계열 조직 세포들의 군 침투는 해군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았다. 공산당 세포들은 은밀하게 내무반에서 공산당 이론을 토론하거나 선동 및 세뇌 활동을 하고 있었고, 해사 2기 생도들 가운데도 좌익 “프락치”들이 잠입해 들어와 파괴공작을 기도한 바 있다. 그래서 해사 2기생들 가운데는 유달리 좌익사상에 물든 후보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손원일은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조국의 미래를 맡길 수 없으며, 독립한 조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여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에 따라 우선 해군 내부부터라도 민주주의의 이념적 우월성을 전 장병들에게 교육했고,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물든 자들을 모두 제거하여 해군을 굳은 반공정신으로 단결시켰다.
그 영향으로 처음에 86명이 입학한 해사 2기생들 중 사상적으로 문제가 된 자들은 모두 엄격한 처벌을 받게 됐다. 이러한 사유로 퇴학처분을 받는 등 중도에 도태되고 86명의 사관후보생들 가운데 최종적으로 졸업한 사람은 겨우 48명에 불과했다. 이것은 훗날 좌익분자들이 잠입해 반란을 일으킨 육군과 대조적으로 좌익사건이 해군 내에 발생하지 못하게 만든 예방 효과를 가져왔다. 요컨대 손원일의 ‘반공’사상은 잠복한 미래의 적에 대한 대비였던 셈이다.
민주적 해군육성은 손원일 자신이 지녔던 군대관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의 군대관의 요체는 한마디로 군권의 올바른 운용과 배분에 있었다. 그는 국방부장관이 되자 평소 소신대로 모든 행정권을 정리, 간소화하고, 장관의 결재권을 분산시켜 사안에 따라 차관, 국장, 과장, 계장에게 결재할 수 있는 직위에 합당한 전결권을 부여했다.
헌병사령부가 개헌을 반대하는 야당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연행하는 등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파문을 일으키기 직전 헌병사령부를 대통령 직속으로 두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손원일은 헌병대를 천황 직속으로 뒀다가 오류를 범한 일본군을 예로 들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즉 민주국가의 군대는 각 군 지휘관에게 지휘권을 전담시켜야 하는데, 만일 헌병사령부가 대통령 아래에 직속되면 각 군 지휘관의 지휘권을 침범할 수 있고, 그것은 곧 각 군의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에 각 군은 자체적인 지휘관의 지휘하에 민주적으로 발전해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각 군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각 군 참모총장에게 일임하고 인사위원회를 두어 독자적인 지휘권을 행사하게 했고, 자신은 미국의 군사지원과 같은 군 바깥의 대외문제와 국군 증강 및 확장에만 전념했다.
추상적, 정신적 능력 외에 물리적 전투력 증강을 위해 손원일은 해군의 역할 가운데서도 군사력 투사를 위한 한국형 상륙전문 부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해병대를 창설했는데, 이 사실은 다시 한번 분명히 기억돼야 했다. 그는 원래 해군 창설 직후부터 해병대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신생정부의 예산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말을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손원일은 1948년 10월 하순 해군이 출동한 ‘여수ㆍ순천 사건’ 진압을 계기로 해병대의 필요성을 주장한 참모들의 건의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여 해병대 창설(1949년 4월 15일)을 이루어냈다. 해병대의 창설은 “그 누구보다 해군의 역할에 고심하던 해군총참모장 손원일”의 수용과 강력한 건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거나 지체됐을지도 모른다.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성은 장군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이럴 때 상륙부대가 있었다면 폭동을 조기 진압하여 많은 피해를 줄이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손원일은 그 후로도 확고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해병대가 타군에 의해 잠식돼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작고 강한 해병대 육성이라는 방침으로 해병대를 존속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가 해군총참모장직을 물러나면서 해병대와 해군은 “형제적 관계”라고 강조하고 상호 의사소통이 막히는 일 없이 “더욱 일심일체가 되어 육군, 공군과 협조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3군이 친목하여 서로 침해하지 않고 도와주고 서로 양보하여 주기”를 희망한 소이연이 여기에 있다.
손원일이 ‘무’에서 해군창군과 해병대 창설이라는 역사적인 ‘유’를 만들어낸 것은 몇 가지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손원일 제독의 비전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켜 줄 자신의 능력과 각고의 노력을 꼽을 수 있다. 그의 비전은 사실상 신생한국의 국가안보와 미래를 걱정한 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전이 훌륭하다고 해서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위로 국정 최고 결정권자의 정책적 이해와 지지 및 지원이 따라야 하고, 여기에 그 비전을 공유하고 비전 달성을 위해 뛰어줄 동지들도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 및 지원과 창군에 헌신했던 유능한 부하들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이 자연히 모든 해군 관계자뿐만 아니라 국민전체의 공감대를 얻게 된 배경이었다. 또한 군축을 결정한 미국이 한국해군에게 자국의 낡은 함정들을 매각하고, 기술지원과 교육을 아끼지 않았던 것에 힘입은 바도 컸다.
황무지에서 해군과 해병대를 건설한 손원일은 전후 미 해군의 독립성을 보호하고 미국해군의 전략을 재정비한 포레스털(James Forrestal) 제독에 비견된다. 국방부장관이 되기 전 포레스털은 해군장관직도 수행했지만 그것은 국가정책에 영향을 줄 정도의 중요한 직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미 해군의 세계 전략적 비전과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갖고 해군력의 사용 그리고 국가정책에 대한 해군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미 해군이 세계 어떤 해역에서도 항해할 수 있는 강대한 함대를 가지도록 노력했던 인물이다.
4. 장보고-이순신 정신의 계승과 발전적 삶
손원일은 장보고 대사와 이순신 제독의 정신을 계승한 해군의 거성이자 민족의 선각자적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그는 장보고 대사와 이순신 제독의 빼어난 정신을 한 몸에 구현했다. 역사적 위인들이 으레 복수의 다양한 덕목과 자질을 구비하고 있듯이 장보고 대사 역시 ‘해양개척 정신’, ‘무역입국 정신’, ‘보국위민 정신’, ‘선린우호 정신’, ‘시대선도 정신’이라는 다섯 가지 정신을 구현했다고 평가된다. 이 가운데서도 장보고를 특징짓는 대표정신은 ‘해양개척 정신’으로 볼 수 있다.
장보고 대사는 8세기 청해진을 건설하고 신라의 협애한 근해를 넘어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해역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랍권의 대양까지도 활동무대로 삼아 한민족의 해양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의 해양개척활동이 후대에 남겨준 메시지는 해양활동이 국가번영의 주요 원천으로서 국가의 보호와 지지를 받을 때는 흥성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위축돼 국력의 쇠퇴에 직결된다는 점이다.
장보고의 ‘해양개척 정신’은 수출입 물동량의 99.8%가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21세기 우리 해군이 연안해군에 머물지 말고 오대양으로 뻗어나가야 하는 미래지향적 정신이기도 하다.
손원일 역시 해방 후 해양을 통해 세계로 뻗어나가야 우리민족의 미래가 있다고 보고, 그 첫 번째 단계로 군함 한 척 없던 황무지 상황에서 해군을 건설한 개척자였다. 이런 점에서 손원일은 장보고 대사의 대표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해양개척 정신’을 같이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일국의 국가안전은 예전처럼 주권이 미치는 범위 내의 영토, 영공, 영해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보장되는 게 아니다. 반드시 주권범위의 영해를 넘어 자국의 수출입 물자, 에너지수송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원양해상로의 안전까지도 확보해야 된다. 중요한 해협의 안전은 이미 그 해협 당사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련국가들의 공동이익과 깊이 결부돼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해양개척은 곧 ‘대양해군’(Ocean Going Navy, Blue Water Navy) 건설을 전제한다. ‘대양해군’ 건설은 제18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안병태 제독이 참모총장 시절(1995.4~1997.4)인 1990년대 중반 최초로 주창한 슬로건이다. 그 개념은 국가이익 수호와 국가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상, 해중 및 항공 등 입체적 전력을 구비하고 적정수준의 해양통제, 해상교통로 보호 및 전력투사능력을 갖추어 대양에서 상당 기간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군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손원일의 “바다에 미래가 있다”는 슬로건은 한국 해군이 궁극적으로 연안해군에 머물지 않고 오대양 육대주로 뻗어가자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바다에 미래가 있다”는 말은 비단 해군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다.
손원일은 장보고대사의 해양개척정신뿐만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투철한 호국정신을 해군이 본받아야 할 사표로 삼았다. 임진왜란의 국난을 당해 자신에 대한 모함에도 개의치 않고 백의종군까지 마다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이순신 제독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민족의 성웅이다.
“이순신 정신”을 최초로 정립한 이은상에 의하면, 장군의 정신은 제 힘으로 사는 ‘자조정신’, 정의를 목표로 삼는 ‘정의정신’, 국토를 사랑하는 ‘애국토정신’, 국민과 같이 가는 ‘애민정신’, 새 길을 뚫고 가는 ‘개척정신’ 등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여기에 빠트린 것이 있다면 바로 충효사상에 바탕을 둔 호국정신이다. 충효사상은 조선시대의 儒者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실천덕목이었기 때문에 이순신 제독만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하지만 평생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한 자세로 위로는 국가에 충성하고, 아래로 백성을 사랑하면서 국난을 맞아 최후의 일각까지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다 장렬히 순국한 이순신 제독의 삶은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충효정신과 호국정신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손원일도 이순신 제독처럼 충효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정의로운 군대의 건설, 애국애족, 해군의 자조적 건설, 미래개척 등의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제로 추구한 인물이었다. 그는 해군창군 시 이순신 제독의 충무정신을 해군정신에 포함시킴으로써 해군의 지휘철학으로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을 해군 후학들에게 전승시켰다.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회고에 의하면, 손원일은 3면이 바다인 우리의 해양주권, 해양권익의 중요성 및 해군의 중요한 역할을 확고부동하게 주장했고, 병력이나 장비면에서 타군에 비해 부족했지만 3군의 발언권이 동등해야 한다는 생각을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 해군제독 니미츠(Chester Nimitz)가 언급한 바 있듯이 해군은 해군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즉 전쟁은 육군, 해군, 공군, 외교, 경제가 연합된 행동에 의해 수행되고 결말이 나지만, 전략지점을 포위하고 점령하여 엄호하는 능력, 적절한 전략지점을 만드는 능력, 성공적인 결말을 위해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인원과 장비, 그리고 군수물자와 연료를 전략지점으로 수송하는 능력은 해군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손원일이 그렇게 한 언행도 해군만이 지닌 고유성과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Ⅱ. 사상과 정신
1. 지덕체의 조화와 기독교 사상의 실천
흔히 역사적 위인들 가운데 지덕체를 고루 겸비한 인물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교육적 모델로 삼거나 닮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손원일도 지덕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적으로 자극을 받고, 그 자극에 따라 노력하여 뭔가 결실을 맺고 마는 천부적 성격을 타고 났다. 또한 그는 돋보이는 덕성도 갖추었다. 손원일이 서울수복 시 적에게 베푼 선한 의지는 그것을 증명한다. 이에 대해선 본장 제4절에서 소개할 것이다.
이른바 ‘德이란 중국철학에서는 수양으로 “몸에 얻어 갖춘 것”을 의미하고, 카톨릭적 견해로는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로 나타나는 특별한 경향과 숙련을 갖는 것”을 뜻한다. 두 가지 철학적 해석을 종합하면 덕은 몸에 베인 선한 의지나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선한 의지나 행위는 본질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덕은 ‘忍’과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대함에서 배태된다고 할 수 있다.
손원일의 덕성은 그가 부모의 가르침을 즉각 실천에 옮기는 자세로 살아왔다고 평가되는 만큼 모친의 덕성이 그에게 훈습된 결과로 보인다. 앞에서도 이미 살펴봤듯이 그의 모친 박신일 여사는 온갖 풍상을 인내하면서도 남편, 자식들,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했고, 심지어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는 남들에게도 배려를 아끼지 않은 분이었다.
손원일은 ‘지’와 ‘덕’ 외에 건강한 ‘체’의 소유자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유년시절부터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했고, 날랜 몸을 타고났다고 한다. 유년시절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을 때도 여러 종류의 운동을 한 손원일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운동이란 운동은 안 해본 것이 없었는데다 동년배에 비해 몸집도 컸고 힘이 셌다”고 했다.
손원일의 강인한 체력은 양친의 유전자에서 기인했음은 물론이다. 통상 스포츠에서는 상대보다 먼저 움직이거나 반응함으로써 자신보다 기술이 부족한 상대를 압도하는 체력과 기술이 요구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적보다 나은 전투장비와 전술로 적을 제압해야 하는 전쟁과도 맥이 통한다. 따라서 전쟁수행에 필요한 강인한 체력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전황 분석 및 종합,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는 지적 능력, 지휘자로서의 덕성과 함께 군인이 갖춰야 할 기본요건이다.
손원일이 조화로운 지덕체를 갖춘 인물로 성장한 배경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훈도와 건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교육을 통해 자신의 지덕체를 사회에 환원했다. 부친 손정도 목사의 영향을 받아 그 역시 교육을 대단히 중요시했다. 손정도 목사는 목회활동에다 독립운동과 계몽운동까지 하는 어려웠던 망명생활 중에도 자식들을 모두 대학과 해외유학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부친의 교육중시의지는 손원일이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손수 설립하고, 그것을 다시 해군사관학교로 확대 개편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발화됐다.
우리는 지덕체가 조화돼 있는 사람을 신사라고 부르고, 또 그런 사람을 신사로 대우한다. 손원일의 신념에 따르면, 해군은 신사여야 하고, 해군이라는 거대한 조직도 신사도로 운영돼야 한다. 그것은 곧 기품 있는 해군상, 해군관이자 군인상이었다. 그가 본 신사도 정신이란 세 가지가 갖춰져야 했다. 첫째, 예의를 알고, 둘째, 정직하고 셋째,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손원일에게 신사란 이 세 가지를 항상 습관적으로 잘 지켜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무예, 용맹, 명예, 예의, 신의, 약자보호, 정중함 등을 덕목으로 한 서양의 신사도, 즉 ‘gentlemanship’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해군은 신사가 돼야 한다는 것은 군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건강한 인격체를 갖춘 건전한 시민이 돼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부분은 건전한 시민정신을 함양하고, 이러한 시민정신을 곧 군인, 특히 장교가 갖춰야 할 정신적 덕목으로 삼는 미국의 군인정신과 일치한다.
신사가 될 것을 요구하는 미국장교의 지침은 그 구체적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몸에 익혀야 한다. 첫째, 강렬한 인권의식을 가질 것, 둘째, 인간에 대해 존엄성을 가질 것, 셋째, 일상생활에서 황금률(golden rule)을 지킬 것, 넷째, 인류의 복지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 다섯째, 모든 사람을 자신의 부모나 형제처럼 따뜻하게 대할 것 등이다. 먼저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신사가 되고 난 후에 특수한 직업으로서의 군사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신사가 된 후에 군인이 되라’는 것은 곧 “먼저 인간이 되라”는 얘기와 같다. 이는 仁, 義, 禮, 智, 信, 誠, 겸손 등의 도덕률로 스스로 끊임없이 수양하고 이를 통해 선비나 군자됨을 지향하는 동양의 선비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동양의 선비정신은 仁, 禮, 中庸을 실천하기를 강조한 공자의 사상에 직결되는데, 결국 인간이 되라는 윤리학적 가르침인 것이다. 또 “먼저 인간이 되라”는 명제는 어떤 사회에서든 통하는 인류의 보편가치인 세계시민정신이기도 하다.
손원일이 보여준 여러 가지 신사적, 인본주의적 행적을 보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내면화된 선비, 군자정신이 밖으로 드러난 외화로 보인다. 손원일이 말하는 선비는 士, 儒者로서의 전통적 문인만을 의미하지 않고 문무겸전의 전인적 소양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그가 많은 날들 중에 일부러 해군창설일을 11월 11일에 맞춘 까닭도 해군은 선비가 돼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한자의 선비 ‘士’를 풀어쓰면 ‘十+一’로 곧 11이 되는데, 이 선비 ‘士’자를 두 개 겹치는 날이 11월 11일이라는 것이다.
손원일에게 육화된 지덕체의 조화는 부모의 교육, 훈도, 교훈과 기독교정신이 그 연원이었다. 그가 선친 손정도 목사로부터 물려받은 갖가지 정신적 유산은 스스로 밝혔듯이 모두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정신의 실천”으로 귀결될 수 있다. 유년시절부터의 가풍의 영향 때문에 그가 다닌 학교도 주로 기독교 계통이었다. 가족들도 모두 신독한 기독교 신자가 됐다. 지아비의 뜻에 따라 오랫동안 기독교에 등을 돌렸던, 평양에 홀로 남아 살던 조모(吳信道)도 오랜 고집을 꺾고 마침내 기독교 신자가 됐다.
이처럼 그는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기독교 사상의 자장 속에서 “하늘의 뜻을 헤아려 나를 버린다”(測天去私)는 자세로 살았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곧 사사로움이 없으며, 무욕을 의미한다. 그에게 하늘은 곧 그리스도였고,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맡겼다(則天去私)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민족수난기에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선친의 교화 속에 자란 나는 어떻게 보면 그 가르침을 실천해 왔다고도 볼 수 있다.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유, 민주정신의 실천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손원일은 자신의 운명을 모두 하느님의 안내와 은혜로 돌렸고,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의 부르심, 즉 소명의식(calling)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남긴 유언 중에 “사랑하는 내 조국을 위해 나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먼저 감사한다”는 말은 이를 표징한다.
손원일은 과거 자신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이 자신에게 맡기기 위한 운명의 과정이었던 것처럼, 해군을 창설한 사실에 대해서도 묵시론적으로 해석해 하느님이 자기를 이끈 결과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북경유학을 목표로 학업에 정진하던 중 눈병을 앓아 북경유학을 포기하고, 상해의 中央대학교로 진로를 바꿈으로써 결국 해양을 공부하게 됐고, 해군까지 창설하게 된 것을 두고 그는 “그때 눈병이 나서 북경유학을 포기하고 상해의 중앙대학교로 간 것은 전화위복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자신을 쓰고자 한 하느님의 부르심이 자신의 사명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험적 예지였다. 그는 실제로 해양 관련 기반이 전혀 없었던 불모지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지 않고 “시작은 미약하나 네 나중에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처럼 선험적 믿음으로 해군창설에 손을 대 결국 ‘시작은 미약했지만 창대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손원일이 창설한 해군의 쓰임새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부터 잠재적인 적으로 존재해온 공산주의에 대비하자는 데 있었다. 기독교 사상이 공산주의는 멀리 쫓아버려야 할 불의이자 사탄이라는 입장에 있는 한 기독교도인 손원일에게 북한공산주의자들은 신국에 가기 전 인간세상에서 심판해야 할 사탄의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 의롭지 못한 민족을 쫓아낼 것이며, “너희 하느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해 큰 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이시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손원일이 북한공산주의자를 염두에 두고 강력한 국방력을 건설하고자 했을 때 그의 뇌리에는 의롭지 못한 이들을 쫒아내려고 할 때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면 그것을 이루게 해준다는 성격의 말씀이 떠올랐으리라. 하느님의 적이자 민주주의의 적인 공산주의에 대항할 강력한 정의의 군대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우수한 무기 장비를 갖춘 강력한 군대는 민주주의이념에 토대를 둔 기독교정신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생각해온 그였다. 그리하여 그는 군에 복음을 전하고, 이를 통해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주해군을 건설하기 위해선 전군에 기독교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우선 해군부터 ‘군목’제도를 실행했다. 당시 국방부장관의 반대로 인해 명칭은 군목이라고 하지 않고 ‘정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실제는 군목이었다.
이 제도는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육해공 전군으로 확대 시행됐고, 해군의 ‘정훈’이라는 명칭은 그 후 손원일이 국방부장관이 되고난 뒤 정식으로 ‘군목’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 부국강병과 애국애족을 위한 선공후사 정신
영토, 국민, 주권은 국가를 이루는 3대 요소다. 온전한 나라라면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어야 한다. 전후 해방공간은 온전한 ‘대한민국’을 축조하기 위한 시행착오의 과정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돼 영토를 되찾은 데 이어 국민이 새로운 국가의 주인이 되어가는 단계였다. 해방은 우리의 주체적 힘으로 되찾은 게 아니라 미국, 소련 등 강대국이라는 타의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주권을 만들어가야 했던 시대였다.
국가의 주권은 그것을 쟁취하거나 지켜나갈 만큼의 충분한 경제력, 군사력과 외교력에 좌우된다. 그래서 왕조가 바뀌거나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는 역사의 전환기에는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정치엘리트들에게 부국강병이 국가의 비전으로 제시되는 공통성이 나타난다. 부국강병이라는 비전은 말 그대로 새로운 권력주체들이 먼저 국방을 견고히 하고, 경제발전, 국민통합,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등을 거쳐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국가안보에 직결되는 강력한 군대건설은 국가과제 중 최우선 과업으로 떠오른다.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 정도전(1337~1398)이 그랬고, 중국 명대의 창건자인 朱元璋(1328~1398)과 청의 태조 누루하치(1559~1628)가 그랬다. 일본의 明治維新을 성공시킨 일군의 지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손원일 역시 되찾은 조국의 독립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부국강병과 강력한 군대건설을 希願했다. 그에게 국가는 하느님의 의지를 실현하는 장이었다. 따라서 그의 국가관은 한마디로 국가가 존립해야 개인이 존재한다는 ‘국가 선행존재론자’ 혹은 ‘국가-개인 동시 발전론자’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국가 선행존재론자’란 국민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국민으로서의 의무 혹은 임무를 다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태도 혹은 정신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 선행존재론자’라고 해서 국가라는 이름하에 개인의 자유와 발전, 이익까지 가로막거나 모든 가치를 국가에 종속시키는 국가주의자, 국가지상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국민을 강제하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개인적 영역에서 국가라는 ‘公’을 위해 개인의 ‘私’를 희생했을 따름이다.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국가사상사적 측면에서 보면 손원일의 ‘국가선행존재론’은 유럽근대 사회계약론자들의 국가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근대 시민국가론의 형성에 물꼬를 튼 사회계약론자들의 국가사상이란 게 국가의 통일성 혹은 존립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일정 수준 인정하면서 동시에 가능한 한도 내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실현, 확보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만큼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손원일의 사상이 유럽근대 시민국가론자의 국가론의 범주 속에 들어갈지, 아니면 국가 보다 기독교정신과 인본주의에 뿌리를 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더 우위에 놓는 자유주의자의 범주에 속할런지는 관련 자료를 통해 더 세밀하게 추적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현존 자료들만으로 판단할 때 그의 언행은 확실히 국가의 존속을 우선시하는 의지와 면모가 주된 이미지라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군인 신분으로서 강력한 주권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감과 함께 북한공산주의의 위협을 극복해야 했던 시대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시대적, 신분적 제약이었다.
사무엘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이 지적했듯이 국가와 사회일반에 대한 봉사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인은 개인보다 집단의 중요성을 더 우선하고, 군사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개인의 의지를 집단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손원일 역시 사상적으로는 군인의 영역을 초월하지 않았었다.
“국가와 사회일반에 대한 봉사”란 애국애족이 전제돼야 한다. 그런데 애국애족정신은 손원일의 일생을 관통한 사상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표증하는 것은 그가 “내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고, 내 자신보다 국가가 위에 있다”는 생각이었다. 또 “국민이 있고서 국가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있음으로써 국민이 있다”라고 한 언급도 동일한 맥락이다. 개인의 영달보다 국가의 존립을 우선시한 그의 멸사봉공 정신은 자신이 청장년 시절 뼈저리게 당한 망국의 치욕, 울분, 고통, 한에서 비롯된 것임은 물론이다.
‘국가 선행존재론자’는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이 몸은 흩어지고 사라질지라도 이 나라가 흩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 징기스칸(1167~1227)처럼 왕왕 피침시나 새로운 왕조 혹은 국가의 건국시에 자주 나타나는 인물형이다. 이러한 인간형은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더 빛을 발한다.
이들에게는 대체로 ‘선 부국, 후 강병’의 사상적 지향성이 존재하고, 애국애족은 그 모토였다. 바깥의 ‘국’과 안의 ‘족’이 표리를 이루면서 일체를 이루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개인의 안녕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 중국 송나라의 정치가 范仲淹(989~1052)이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중국해군 건설에 관여한 蕭勁光(1903~1989), 가깝게는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인물들이 그 예다.
范仲淹은 송대 주자학의 창시자 朱子(1130~1200)로부터 “유사 이래 하늘과 땅 사이에 제일류 인물”(有史以來天地間第一流人物)이라는 찬사를 받은 경세가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북송 초기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군왕(仁宗)을 도와 인재육성과 학술수준을 제고했을 뿐만 아니라 어지러웠던 정치난맥상을 바로 잡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한 인물이었다. 그는 “먼저 천하의 근심을 걱정하고, 후에 천하의 즐거움을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자세로 매사에 ‘公’을 앞세웠다.
范仲淹은 “사회가 안정돼야만 안정된 국가가 있을 수 있다”(唯有社會安定了, 才有安定的國家)는 생각을 가지고 위로 임금에게 충성했고, 아래로 목민에 성실했다. 그에게는 오로지 나랏일을 우선시하는 ‘公’을 앞세웠고, 사사로운 정은 뒤로 했다. 안중근 의사가 임종시에 남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爲國獻身, 軍人之本分)이라는 어구도 동일한 사상적 좌표에 있는 금언이다. 손원일은 이들의 사상과 일치되는 부분이 있는데, 특히 范仲淹과 안중근의 사상과 유사하다.
손원일은 청소년 시절부터 자신의 가족과도 인연이 깊었던 안중근 의사처럼 국가주권의 완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군인의 본분을 늘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았다. 그래서 그는 조국광복을 희구한 간절한 마음으로 청년시절을 보냈다. 광복 후 그가 강한 군대를 육성하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것도 되찾은 조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나라 잃은 서러움을 직접 겪어 본 체험이 가져다준 뼈저린 교훈에서 비롯된, 식민지 시대 암울한 망국의 한을 겪은 청년시절의 아픔과 반성이 만든 결과였다.
부친 손정도 목사가 항상 국가의 독립과 개인의 자립을 강조했던 것처럼 그도 자식들에게 동일하게 강조했다. “나라가 없는 사람은 집이 없는 사람과 같다. 그래서 나라도 독립을 해야 하고, 개인도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을 하지 못하면 항상 남한테 구속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손원일이 해군을 창설한 후 직접 병사들과 함께 6.25전쟁에 나가 죽을 고비를 수차례나 넘긴 것도 오로지 나라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충정의 일념 때문이었다. 그의 국가방위, 애국애족정신은 죽어서도 지켜야 할 최고의 과업이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유언으로 처자식들에게 “나라 없는 서러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시는 조국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또 “내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귀한 생명을 바친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한과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다 산화한 장병들의 넋과 한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3. ‘참군인’정신의 실천
‘애국애족’하는 길은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이 있을 수 있다. 군인은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고, 사회정의를 추구함으로써 그 목적에 부합하고 동참할 수 있다. 그 ‘군인정신’(military mind)이란 사무엘 헌팅턴의 정의에 따르면, 군대라는 조직을 일반 조직과 다른 특수한 것으로 비교되게 만들어 “군인적” 제 면모를 제대로 규정하고 드러나게 만드는, 군 조직구성원들만이 가지는 특수한 태도, 가치와 견해를 말한다.
즉 군인은 영토를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한 국가를 지탱하는 정치이념과 체제까지 수호해야 하는 사회봉사의무도 가지고 있다. 국가가 군대에 무력사용권을 위임하여 합법화하는 까닭도 주권수호와 함께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라는 책임과 의무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군인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이 같은 의무를 수행하고 책임을 진다는 사실에 대해 긍지를 가진다. 사회와 국민이 이러한 긍지를 인정할 때 군인에 대한 명예가 형성된다. 환언하면, 명예란 군인 스스로가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군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로 국가를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명예와 충성심, 멸사봉공, 국가안보의 선봉에 서있고, 정의를 실천한다는 명예심으로 사는 것이다. 따라서 군인은 명예를 최고로 존중한다. 그리하여 군인, 특히 군의 리더는 국가적 명예를 위해 조국과 민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 전문적 업무능력, 국가발전을 모색하는 끝없는 열정을, 심지어는 귀중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충성하고 헌신한다.
손원일의 군인관은 자신이 초대 해군총참모장(당시 직함임)으로 취임한 뒤에 해군이 나아갈 지표로 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삼가 이 몸을 바치나이다”라는 해군창군이념과 그 실천지침에 응축돼 있기도 하다. 군인은 모름지기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정신은 손원일이 제시한 해군의 실천지침에 고스란히 함장돼 있다. 군인정신은 해군의 창설 목적 또는 해군의 존재 가치를 나타내는 다음과 같은 실천지침을 지킴으로써 실현된다.
첫째, 군인은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경애하자. 둘째, 군인은 명령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자. 셋째, 군인은 명랑 활발하고 신의를 지키자. 넷째, 군인은 정치담을 말고, 도별담을 폐지하자. 다섯째, 군인은 충무공의 정신에 살고, 충무공의 정신에 죽자. 여섯째, 군인은 관품을 애호하고 물자를 절약하자.
이 가운데 손원일은 특히 군인은 정치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몸소 실천하면서 생의 마지막까지 원칙으로 삼았다. “군인은 정치담을 말고 도별담을 폐지하자”는 지침은 앞에서도 확인한 바 있듯이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가 고질적인 병폐인 지역간, 노선상의 파벌싸움 때문에 단결이 되지 않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망국의 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한 선친의 교훈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손원일이 ‘정치담과 도별담 금지’를 해군의 실천 강목으로 넣은 까닭은 일차적으로 군의 정치관여 금지 및 정치적 중립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군이 국가발전과 근대화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가운데 군이 정치에 개입해 초래할 수 있는 역기능을 미리 규범적 차원에서 방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군이 정치에 개입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현대는 물론이거니와 근대로 올라갈수록, 또 신생국가일수록 더 빈번하게 발생했던 현상이다. 특히 갓 독립한 신생국가에서는 군이 자의적으로, 혹은 정부권력자에게 이용당하거나 하여 군 본연의 국가안보임무를 넘어 국가건설에까지 관여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국가운영의 중추역할을 맡게 되면 군의 조직이 비대해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력화되는 패턴이 반복된다.
군의 정치관여를 다룬 한 연구에 따르면, 1862년에서 1874년 사이 세계에서 발생한 군사쿠데타가 101회나 됐고, 그 결과 군사정권이 수립된 국가는 38개국에 이른다고 한다. 이 수치는 20세기 중반이라면 세계 150여 개 독립국가 중 25%에 해당된다. 갓 해방된 한국도 이러한 사례의 하나로 기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때였다.
‘도별담’을 금지한 것은 정의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인사의 공평성을 통한 파벌제거, 군의 사당화를 방지하기 위한 동기가 내재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지역갈등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현대판 ‘탕평책’이었던 셈이다. 손원일은 정치에 초연해야 하고 일치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한 군의 발전을 위해서는 군의 정치관여와 지방색에 따른 편 가르기 작폐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지역감정을 뿌리 뽑기 위해서 해군 창설 초기 장병들의 신상카드에 현주소 이외에 원적, 본적지를 쓰지 못하게 하고 출신지를 가리게 했다.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손원일의 신념과 정치철학은 분명했다. 하지만 권력의 전횡이 극심했던 구시대의 벽을 넘지 못한 아쉬움이 드는 사례도 없지 않다. 이승만 정권 시절, 집권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을 재선시키려고 당 조직부장 김용우를 국방부 차관으로 앉혔다. 국방부 차관이란 장관을 보좌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국군을 당군화하다시피 하여 정치도구로 이용하던 시절이었다. 정치에 초연해야 할 국방부 차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용우는 자신의 직책을 악용해 지구의 부대장에게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자가 당선되도록 간접적으로 지원하게 “내명을 시달한다든가, 대통령 선거에서 군 통수계통을 통해 이승만 박사를 지지하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는 사전계획에 따라 군 지휘부에게 군부대 투표에서 여당지지표가 확보되도록 지시가 하달되던 시절이었다. 국방부장관이던 손원일도 군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표가 많이 나오도록 눈에 띄게 동분서주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차관의 정치참여를 제지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방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야 간의 선거전이 치열해짐에 따라 선거에 동원된 다른 각료들처럼 어쩔 수 없이 자주 국방부장관자리를 비우는 등 선거운동에 동원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정치에 초연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손원일이 선거운동에 동원돼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한 것은 짧은 기간 동안이었으며, 결정적인 문제를 일으킨 게 없어서 그런지 역사는 이 부분을 잘 비추지 못하고 있다. 이 숨은 사실은 손원일의 삶에서 지적받을 수 있는 옥의 티로서 하나의 흠결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성웅”으로 받들어지는 이순신 제독도 우리가 잘 몰랐던 인간적인 결함이 있었듯이 인간이 완전무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피동적이지만 정치에 끌려 들어간 그는 당시 적지 않게 고뇌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손원일은 권력의 전횡이 극심했던 구시대의 벽 앞에서 자신의 신념과 상반된 상황이 도래하자 미련 없이 현직에서 물러났다.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1963년 10월 15일 군인은 정치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평소 소신을 다시 한 번 표출했다. “군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충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직접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청년시절부터 품어온 신념은 이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군인은 정치에 참여해선 안 된다는 그의 신념은 명예보다 위국을 앞세우는 멸사정신, 공사 구분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참으로 입신출세, 명예와 진급에 욕심이 없던 참군인의 삶을 살다간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대통령으로부터 정부의 각료직 보임 요청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흔쾌히 수락하기는커녕 군인의 본분과 자신이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1952년 3월 손원일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실각한 이기붕의 후임으로 국방부장관으로 입각하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고사한 경우가 그 예다. 계속해서 그는 1953년 1월 타군 총참모장의 계급이 대장이었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타군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해군총참모장 계급을 중장에서 대장으로 상향조정해 자신을 대장으로 진급시키겠다고 의향을 물었을 때도 이 제의마저 사양했다.
국방부장관직을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전쟁수행에 충실해야 한다는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라는 겸손이었다. 그는 이렇게 완곡하게 사양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군인은 우선 싸움에만 열중해야 하는데, 국방부장관직은 행정을 하는 자리이니 다른 행정가에게 맡기시고 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우게 해주십시오.” 군인은 개인의 명예보다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귀감을 보여준 예다.
다른 하나는 일의 선후를 알고 당시 상황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은 장관직보다 국가발전을 위한 해군건설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3년 들어 해군건설이 본격으로 시작됐다고 판단한 그는 “이제 막 해군이 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는 시점이라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졌고, 사실 해군을 위해 더 일하고 싶다”고 했다. 당시 여건으로는 국내의 발전은 한도가 있지만, “무진장한 바다를 개척하고 바다에서 발전한다면 국내는 자연적으로 따라 온다”는 것이었다.
해군대장으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것을 명쾌하게 거절한 것도 군인이기 전에 인간은 직분과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렇게 고사 이유를 밝혔다.
“제가 대장으로 진급하려면 우리 해군에 적어도 구축함이나 순양함이 몇 척 있어야 하고 병력도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미 해군과의 지휘권 관계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지금 한국해군을 지휘하고 있는 미 극동해군사령관의 계급이 중장이고, 그 밑에 있는 제95기동부대 사령관은 소장입니다. 미 해군과의 원활한 작전 협조를 위해선 지금의 중장 계급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에게는 더없는 영광이지만 지금 대장으로 진급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화들이 만들어낸 결과이지만, 지금도 그는 해군의 후배들로부터 입신출세, 명예, 진급에 욕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이 만든 표어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치고자 한 일념으로 살다간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손원일이 국방부장관직에 취임한 것은 1년여 뒤인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두 번째 입각 제의를 받고난 뒤였다. 그는 이번에도 3일간 두문불출하면서 심사숙고했고, 장고 끝에 장관직을 수락했다. 수락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상황이 해군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전군 차원의 국방건설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자신이 장관직을 맡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여론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그가 장관직을 수락한 뒤 해군총참모장직을 물러나면서 행한 이임사에서 해군을 뛰어 넘어 육해공 3군이라는 전군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각오와 일치하고 있다.
본분과 분수를 중요시한 그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은 1953년 7월 1일 그가 행한 장관취임사다. “중대한 시기에 있어서 천학비재하고 무경험한 자로서 국방의 중책을 맡은 데 대하여 위로는 대통령 각하께 공송함을 금치 못하오며 국군 장병과 더불어 일반 국민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을까 대단히 송구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하간 위로는 국가 최고원수인 이 대통령 각하를 받들어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동시에 우리 국군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세계 최강의 명예스러운 군대로 건설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소신이 서지 않고, 또는 소신을 펴지 못할 자리에 대해서는 결코 연연해하는 법이 없었다.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직을 맡아달라는 제의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과거에 장관직을 맡아본 적이 있어서 별로 명예는 원치 않으나 나라를 위해 일할 마음은 있소.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일할 마음이 없으니 모든 것을 영으로 돌리고 내 소신대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준다면 맡아보겠으니 그대로 가서 내 입장을 전해주시오.” 그러나 정부에서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전갈에 그는 외무부 장관직을 거절했다.
4. 인본주의와 상통한 ‘21세기형 리더십’
손원일이 해군창설, 6.25전쟁 수행, 전군 지휘통솔 등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과정에서도 흔히 말하는 “출세”와 “권력”에 초연했던 것은 모두 그가 지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인본주의, 휴머니즘에서 나왔다. 기독교의 사랑, 긍휼 등은 곧 공자의 ‘仁’사상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동양정치사상에서 가장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 仁政인데, 이 인정은 본질적으로 民本에 있고, 民本의 요의는 바로 “親民”에 있다. “親民”은 백성을 으뜸으로 치고, 그들과 같이 하는 것이다. “親民을 극한으로 하면 반드시 지선에 이를 수 있다”(親民極限則必須至於至善)고 한다. 이 경지에 도달하려면 목민관이 필히 백성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펴야 하고, 자식을 대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대하라는 것이다.
손원일에게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과 공자의 仁사상은 양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박애적인 성품과 청년시절 극심하게 굶주려본 경험이 한데 어우러진 특성으로 보인다. 손정도 목사는 상해 임시정부의정원 의장 시절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한반도 강점의 주역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사건으로 사형된 뒤 남겨진 유족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돌봐준 바 있다.
손원일 자신도 과거 상해시절 나흘을 굶어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이었음에도 체면상 배고프지 않다고 해서 식사를 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식사 때 찾아온 손님에게는 먹든 먹지 않든 밥을 반드시 차려주었다고 한다. 부친의 기독교사상에서 비롯된 긍휼과 애민정신을 본받은 손원일은 처지가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그들을 늘 같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인정을 베푼 휴머니스트였던 것이다.
휴머니스트로서의 손원일의 특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삶의 전반 곳곳에 배어있다. 그러한 면모는 그가 남긴 여러 일화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해방병단에 가입했다가 열악한 환경에 불만을 품고 탈퇴하는 단원들에게 “당신들의 불평은 타당하다”며 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줬다. 심지어 그는 창군이 지난한 고통의 연속이니만큼 같이 견뎌보자며 만류했지만 “정 견딜 수 없어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노자까지 보태줬다.
손원일의 휴머니즘은 인천상륙 후 전개된 서울탈환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우선 그는 서울 탈환작전을 최대한 빠른 시일 안으로 종결지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이유는 공방전이 오래 지속되면 북한의 만행으로 양민들의 피해가 늘어나고, 우리의 재산인 서울시가지가 미군의 폭격을 당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한시바삐 서울을 점령하여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과 함께 총도 휴대하지 않고 서울시내를 돌면서 정보수집에 나서기도 했다. 미군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불필요한 폭격을 막아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그는 서울에 입성한 국군 가운데 최고위급 지휘관이었다.
서울을 탈환한 직후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한 국군 최고지휘관으로서 무고한 시민들은 물론 북한정권에 협조한 선량한 부역자까지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한 대목은 그의 평화사상과 피아를 넘어선 인간생명 존중사상의 절정을 이룬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내용은 1950년 9월 28일 서울시민들에게 서울탈환을 알린 포고문 중에 잘 나타나 있다.
“자유와 인격을 존중하는 우리 대한민국에 불법 침입해온 적은 정의를 사랑하는 유엔군 16개국 용사들이 우리 국군과 함께 그네들을 驅逐하고 있으므로 멀지 않아서 남한은 평화를 회복할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은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공산 치하 82일간 체험하였을 줄 아는데, 이 자유의 대가로서 성스러운 우방국 용사들과 함께 우리 국군의 귀중한 생명과 막대한 물자가 소비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유엔군과 아군은 서울시내 건물은 되도록 파괴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잔악무도한 북한군의 초토전술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그네들의 거점이 된 건물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군의 고충을 양찰하시고 거족적 정신을 발휘하여 우리 조국 재건에 매진하여 주기를 본관은 거듭 바라 마지 않습니다.”
이 포고문에서 우리는 그가 먼저 남한과 북한을 각각 자유, 인격, 정의, 평화 대 불법, 무도, 파괴라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세력으로 대비함으로써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또한 서울 탈환작전에서 우방국과 국군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된 점, 그리고 서울의 건물을 파괴하게 된 것은 적을 퇴치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다는 점을 이해해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그는 점령군의 고압적인 자세가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진 군인으로서 시민에게 용서와 이해를 구하는 낮은 자세로 임한 것이다.
그는 전시 중이었지만 적에 대한 적개심이나 집단적인 분노에 맡기지 않고 민사, 포로처리 등의 모든 문제를 법에 의거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처럼 대단히 절제된 이성을 보여준 것은 휴머니즘의 극치였다. 전쟁은 정치적,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된다고 하지만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왕왕 방어본능과 생명에 대한 두려움과 적의 만행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다. 북한군은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무고한 일반 양민들을 수없이 죽였다.
이로 인해 당시 서울은 시민의 분노와 막 입성한 아군의 적개심이 어우러져 극도의 긴장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적개심과 분노는 다반사로 표출됐는데, 특히 북한군 포로들과 적에게 협조한 통적의 부역자들이 주요 표적이 됐다. 이 상황에서도 손원일은 군인이 법을 어겼을 시에는 군법에 회부하고, 일반인 범법자는 즉결처리를 하지 말고 경찰에 인계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총검에 찔려 죽어 나뒹구는 시체를 목도하고서는 즉각 “공산군에 협력한 사람이라도 이북으로 도망가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고, 거리에 붙인 포고문에 “誰何(누구-필자)를 막론하고 살상 혹은 사형을 금한다”는 내용을 추가시켰다.
손원일은 자신이 내린 이 명령을 대통령에게까지 건의해 ‘대통령령’으로 시행될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졌다. 서울 탈환 직후 부산으로 내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그는 전쟁 후 북한군 점령지에 남아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 처벌에 신중을 기할 것을 건의했다. “비록 적에 협조를 했다 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말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손원일의 건의를 전폭 수용해 조병옥 내무장관과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해당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손원일은 부역자 400명을 인수받아 배를 수리하는 해군 공창에 합숙시키면서 노동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군 일각에서는 여러 차례 이들을 총살하자는 요구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단호하게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본 결과 6개월이 지날 즈음 근무성적이 좋고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고 뉘우치는 개전의 정이 뚜렷한 사람부터 순차적으로 석방시켜 최종적으로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모두 살려 보냈다.
6.25전쟁 당시를 회고한 김성은 전 국방부장관이 지적했듯이 손원일의 이러한 조치는 전쟁이 끝나고 지금까지 양민학살과 관련된 민사소송에 해군과 해병대가 연루된 사건이 한 건도 없게 된 배경이었다. 자유민주주의체제가 공산주의체제보다 우위를 보인다면 그것은 정치제도적 측면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하는 윤리적 가치에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손원일의 언행은 민본주의, 애민정신에 바탕을 둔 결단력 있는 용기요, 투철한 책임의식의 발로였다.
한 마디로 그는 인간존엄 사상을 몸소 실천한 휴머니스트였다. 그것은 곧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을 모든 가치보다 우위에 놓는 민본주의의 발로였고, 그에게 그러한 사상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손원일의 휴머니즘과 인본주의는 사생관과 대인관에도 연결돼 있다. 사생관이란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 생각과 태도를 가리킨다. 그는 국가를 수호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에 앞장 서야하는 직업 군인으로서 생명을 초개같이 버릴 각오로 전쟁에 임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기 직전 자신의 모친께 올린 작별인사와 자신의 처에게 남긴 의도적인 거짓말 등에서 우리는 그의 사생관을 엿볼 수 있다. “어머님, 오랫동안 못 뵈올 것 같습니다. 영영 못 뵐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자는 지금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가려고 합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만수무강하십시오!”
그의 모친은 “나라를 위해 죽으러 간다는데 내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꼭 네 아버지 같구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그는 자기 부인에게는 전투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단지 “보통 때보다 좀더 다정하게 웃으며 조그마한 예물”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면서 잠깐 어디를 다녀 올 터이니 아이들을 데리고 잘 있으라”고 하며 출정했다고 한다. 참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부인이 놀라게 돼 혹여 있을 수 있는 자신의 심적 동요를 아예 일으키지 않으려는 의도였음은 물론이다.
손원일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말 육해공 각 군 총참모장인 정일권, 김정렬과 의형제를 맺어 평생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감동적인 우정을 이어간 일화는 그의 대인관을 나타내주는 좋은 사례다. 손원일이 그들에게 의형제를 제안한 동기도 각 군 간의 경쟁을 지양하고 화합과 협동을 도모하여 당시 누란지계의 국가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3군이 협조하여야 한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손원일의 이 같은 휴머니즘은 그 자체가 해군창설과 군을 성공적으로 이끈 힘이자 능력으로 작용했다. 그의 리더십은 어떤 유형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21세기형 리더십의 소유자였고, 반세기나 앞선 것이었다.
최근 21세기에 들어와 현대의 바람직한 리더십으로 리더와 부하가 상호간 더 높은 도덕적, 동기적 수준을 가지도록 만들어 조직을 이끌어가는 ‘변환적(transformational) 리더십’이 주목 받고 있다. 변환적 리더십을 처음으로 정치학계에 제시한 번스(Berns)에 따르면, 변환적 리더십은 공포, 탐욕, 질투, 미움 등과 같은 저차원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정의, 평화, 인본주의 등과 같은 고차원의 이상과 도덕적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부하의 의식을 고양하여 집단의 목표 달성을 추진하는 데에 유용하다.
그러나 변환적 리더십은 지난 세기부터 변화해온 각종 리더십 가운데 조직 및 집단의 운용상 효율성이 가장 높은 최상의 리더십이긴 하지만 여전히 리더 중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근년에는 조직의 리더와 그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리더이면서 동시에 집단의 구성원이 되도록 만들어서 효과적으로 집단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리더십이 대두되고 있는데, 이를 “유비쿼터스(ubiquitous) 리더십”이라고 부르고 있다.
손원일의 리더십은 변환적 리더십과 유비쿼터스 리더십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그의 리더십이 ‘21세기형’이었다는데 있다. 그 역시 부하들과 함께 “자유, 정의, 평화, 인본주의 등과 같은 고등수준의 이상과 도덕적 가치”를 공유하고 해군 및 해병대 창설이라는 공동목표를 이루어냈다.
또한 모든 해군이 지휘관이면서 모든 지휘관이 해군 구성원이 되어 효과적으로 해군을 이끌어 가고,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고 해군창설의 역사적 공을 부하들에게 돌림으로써 변환적 리더십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는 구성원들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들의 자발성을 촉발하게 마련이다.
지휘관이나 상관이 자신의 부하들을 믿고 신뢰하면 부하들의 자발적인 존경과 헌신은 저절로 우러나오게 마련이다. 손원일 역시 부하를 믿고, 신뢰하고 지지하는 지휘 스타일이었다. 손원일은 국방부장관 시절 강영훈(전 국무총리) 장군을 대통령에게 국방부 차관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강영훈 장군은 대통령 앞에서 차관직 수행이 어렵다고 고사하고 사단장으로 가게 해달라고 해 사단장으로 보임돼 국방부장관인 자신의 추천을 무화시켰음에도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오히려 그를 지지한 일화가 있다.
손원일은 해군과 군의 최고 책임자 지위에 있었지만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게 하는 지휘 스타일이었다. 예컨대 그는 부하에게 맡긴 임무에 대해서는 부하 스스로 연구하고 솔선하여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고, 언제나 지시도 간결하면서 성급히 독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당사자인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부하를 믿는 성품이 그대로 국정운영 일상에 반영되고 있었다”고 회고하면서, 스스로 “이런 분을 위해서는 생명을 바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해병대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면서 “가장 정예하고 우수한 부대”며 “오직 해군만의 자랑이 아니라 나라와 겨레의 자랑”이니 “자부와 긍지를 잃지 말라”고 하면서 스스로 자만하지 말고 언제나 겸손하고 부족함을 알고 크고 굳센 군인이 되도록 유도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과학분야에서 뒤처진 군의 후진성을 직시한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1세기에 걸쳐 이룬 선진국 군대의 과학적 성과를 따라잡는데 우리는 “12년 혹은 10년에 성취할 수 있다”고 했으며, 한국군의 잠재능력을 믿는다고 독려하면서 부하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생사의 갈림길이 무수히 교차하는 전쟁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부하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할 때 지휘자의 리더십이 배가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무릇 전쟁의 승패 요인 가운데 하나인 전투원의 사기유지는 다른 무엇보다 지휘관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감을 얼마나 충족시켜주었는가 하는 점과 승전 후 논공행상을 얼마나 공평무사하게 했는가에 달려있다. 지휘관이 직접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진두지휘로 승리했을 때 부하들이 믿고 따른다. 이 점은 임진왜란 시 옥포해전에서 부하들에게 자신을 믿고 따르도록 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제독이 산 증거다.
6.25전쟁에서 맥아더 원수가 공격의 최전선에 섰던 것처럼 손원일도 인천상륙작전에 몸소 최선봉에 섰다. 그는 한국 해병대가 서울을 탈환하기까지 직접 작전을 지휘했고, 시종 병사들과 같이 진격했다. 한국 해병대와 함께 미 해군수송선에 동승해 직접 상륙작전에 가담한 그는 인천에 상륙한 첫날 병사들과 같이 부두의 참호 속에서 보낸 후, 인천을 거쳐 부평평야, 김포공항, 한강, 연희동 104고지를 거쳐 서울을 탈환하는 전투에 앞장서 부하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함으로써 부하들이 믿고 따르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죽을 고비를 네 차례나 겪었다. 이로 인해 배가된 부하들의 사기를 바탕으로 서울탈환작전을 승리로 이끌어 지휘관의 귀감이 되고 표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리더십이 발휘된 관계로 실제 손원일과 그의 제자이자 후배들은 “부자의 정으로 맺어진 사이”였다고 한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해군총참모장 시절 애함 PC-704와 운명을 함께 한 그의 제자이자 부하들의 유품을 바라보면서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꼈던 모습은 지금까지도 해군 지휘관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존경스런 인물은 존경받을 만한 공통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존경받게 된다. 손원일도 한국군 내에서뿐만 아니라 미군의 고위 장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육군대장 출신으로 나중에 국회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일권은 자신이 만나 본 “많은 나라의 국왕, 대통령, 총리 그리고 고관대작들” 가운데 아무도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손원일을 위대한 인물로 평가했다.
물론 그것은 출중한 인품과 애국심 때문이었다. 그와 교분을 가진 미군장성들은 모두 평소 친근하게 지내면서도 국익을 위한 일이라면 날카롭게 따지고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강력한 존재감을 느끼게 됨으로써 외유내강의 면모를 보여준 그를 존경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예컨대 덜레스(John Dulles) 미 국무장관과 미 군부와 유엔군을 움직인 윌슨(L. Alex Wilson) 국방장관, 레드포드(Arthur W. Radford) 해군 참모총장, 헐(John E. Hull) 육군대장, 밴프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 렘니츠(Lyman L. Lemnitzer) 장군, 리지웨이(Matthew B. Ridgeway) 장군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원일 장관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려고 애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의 평가는 의례적인 찬사가 아니었다. 그들이 한국군과 손원일을 도와주었던 것은 진정 그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손원일과 의형제를 맺어 오랫동안 함께 동고동락했던 김정렬 전 공군참모총장의 회고가 이를 실증한다. 두 사람은 1954년 7월 하순 이승만 대통령의 방미를 같이 수행해 미국과 최초로 ‘군사원조협약서’(Agreed Minutes와 Appendix B)를 체결했다.
이 협정은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8일 미국이 한국정부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한 형태로 군사원조를 계속 받기로 약속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을 우려해 대형의 고성능 무기를 지원하기를 꺼려하여 구체적인 군사원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한국군의 감축이 거론되는 등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있던 상태에서 타결된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컸다. 그런데 김정렬의 회고에 따르면 이 협정이 성사된 배경에는 손원일의 수완과 능력이 크게 발휘된 탓도 있었지만 그를 존경한 윌슨 미 국방장관의 우호적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맺음말
손원일은 일제지배하의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양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인본주의적인 덕성, 부모의 헌신어린 가르침, 그리고 본인의 쉼 없는 노력으로 위인의 본원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지덕체를 조화시킬 수 있었다. 그는 부모님이 선사한 기독교적 삶의 가치와 국가독립, 주권의식, 그리고 부국강병과 애국애족 등의 ‘시대정신’을 화두로 몇 가지 망국의 원인들을 천착하고, 이를 다시는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교훈으로, 그리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승화시켰다.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중국에서 보낸 그는 삶의 전반부에서 한민족의 미래를 바다에서 찾게 만든 영감어린 교육, 일경에 피체되어 당한 극악한 고문, 자신을 벼락부자로 만든 사업 등 약간의 굴곡을 보인 私人의 영역 속에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일찍부터 해양에 눈을 떴고, 대학의 해양교육과정과 실제 외항선원 생활을 통해 해양을 경험한,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해양전문가로서 한민족의 미래를 바다에서 찾고자 한 비전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 후 그는 일제의 패망과 광복으로 말미암아 독립운동가가 될 기회를 상실한 뒤 환국과 동시에 즉각 국가건설의 대오에 뛰어들어 공인의 길을 걸었다. 그가 선택한 애국애족의 실천수단 내지 정신은 부국강병이었으며, 이로부터 해군을 창설하게 되는 군인, 국방행정가, 외교관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후반부 인생이 시작됐다.
손원일은 해군창설과 조국수호, 국가발전을 위해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헌신했던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정신으로 미흡하고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런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간략하게 평가했다. 그는 타계한 후에도 한국 해군의 모든 후배들로부터 “해군의 아버지”, 해군의 “정신적 지주”로 널리 회자되고 있듯이 동시대 역시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주관적, 객관적 평가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삶을 살다간 “역사적”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손원일의 삶은 해방된 조국의 주권 수호와 국가안보를 위해 해군을 창설했고, 나아가 인재양성, 부국강병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무력 불법남침을 격퇴함으로써 국가안보의 선봉에 섰으며, 한국정부와 외교관계가 없던 외교 처녀지인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구축에 디딤돌을 놓은 의미 있는 생애였다. 격동의 시대, 치열했던 삶 속에서 그가 이루어 놓은 공적은 청사에 길이 빛나고,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발전과 나아가 국가발전에 초석이 됐다. 그가 남긴 행적의 역사적 의미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손원일은 되찾은 조국의 독립을 지키고, 주권국가로서의 조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애족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다간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오로지 “해군창설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었다. 그가 전후 황무지 같은 여건 속에서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군 및 해병대를 창설한 것은 부국강병과 애국애족의 일환이었다.
그가 건설하려고 한 해군은 “과학적 해군”, “자주적 해군”, “민주적 해군”이었다. 세 가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음으로써 쉼 없이 발전하는 전투력 최상의 해군이었다. 그가 없었으면 해군창설이 불가능했거나 혹은 한참 늦었을 수 있고, 창설됐다고 하더라도 피동적으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 해군창설이 불가능하지도 않았고, 피동적으로 창설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곧 해군이 자주적으로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의미다.
둘째, 손원일은 해군 및 해병대를 창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걸음마 상태의 해군과 해병대를 본궤도에 오르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선 창설 초기 해군사관후보생들 가운데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물든 자들을 발본색원하고,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교육함으로써 미래 국방의 간성들을 반공정신으로 굳게 단결시켜 좌익세력이 내부에서 획책한 분열공작에 해군이 침윤될 소지를 없앴다. 여기에다 그는 정부로부터의 충분한 예산을 지원받는 것도 없이 해군 자체의 모금으로 미국으로부터 전투함들을 구입함으로써 함정 한 척 없던 한국 해군이 전투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러한 그의 선견지명이 발휘되지 않았거나 모든 희생을 감내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6.25전쟁 때 해군은 해군 고유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이 북한군에게 완전 점령당했을지도 모를 중대한 결과가 초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한국군이 북한의 불법침략을 격퇴하여 전황반전에 성공한 것은 초기 해군의 남파침투선 격침과 연이은 각종 동서해안에서의 해상작전이 아군의 반격시까지 낙동강선 방어의 버팀목이 됐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강조돼야 한다.
손원일은 3면이 바다인 우리의 해양주권, 해양권익의 중요성 및 해군의 중요한 역할을 확고부동하게 주장했고, 병력이나 장비면에서 타군에 비해 부족했지만 3군의 동등한 발언권을 양보하지 않았다. 손원일의 이러한 노력은 해군만이 할 수 있는 기능과 해군만이 지닌 고유성 및 독자성 확보에 커다란 힘이 돼줬다. 따라서 그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한국 해군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 “해군출신들의 공통된 의견”은 실상에 부합한 “역사적 평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셋째, 손원일은 해군의 범위를 뛰어 넘어 전체 한국군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으며, 전쟁으로 수호한 민주헌정의 체제수호를 위해서도 분투했다. 그는 자의든 타의든 결코 정치에 개입하거나 휩쓸리지 않았던 참군인의 길을 걸었다. 군이 정치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군을 탈정치화하고, 군 본연의 자세를 견지하게 하면서 군이 고유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 공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넷째, 손원일은 장보고 대사의 “해양개척정신”과 이순신 제독의 충효사상에 바탕을 둔 “호국정신,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는 장보고 대사와 이순신 제독의 빼어난 정신과 덕성을 계승함으로써 한민족의 해양사를 일체화하고 있다. 즉 20세기 중반 손원일이 창설한 대한민국 해군은 8세기 장보고 대사의 해양개척정신과 16세기 이순신 제독의 충효사상에 토대를 둔 호국정신,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일시 단절됐던 통일신라시대의 해군과 조선시대의 해군전통의 맥이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3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가지인 ‘同根異葉’의 관계이며, 해양민족으로서 선조들의 유산과 기질을 오늘에 되살린 대한민국 해군은 바로 그 역사의 연속성을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사적 기운이 해군창군 이념인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삼가 이 몸을 바치나이다”에 응집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손원일은 장보고 대사와 이순신 제독의 “해양 호국”정신을 한 몸에 구현한 인물로 평가해도 결코 손색이 없다.
손원일이 현재 해군으로부터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는 그가 시대를 앞서간 출중한 리더십을 발휘한 결과다. 그것이 가능했던 요체는 인본주의와 상통한 “21세기형 리더십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리더십은 ‘변환적 리더십’과 ‘유비쿼터스 리더십’이 결합된 형태로서 반세기나 앞선 것이었다. 또한 손원일은 사랑, 긍휼, 인간생명을 존중하는 기독교정신과 인본주의에 뿌리를 둔, 자유, 평등을 강조한 시민국가론자의 혼합형 인물이었다.
손원일의 국가관은 한마디로 국가가 존립해야 개인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국가라는 이름하에 개인의 자유와 발전, 이익까지 가로막거나 모든 가치를 국가에 종속시키는 국가주의자, 국가지상주의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국민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국민으로서의 의무 혹은 임무를 다함으로써 국가의 존립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태도 혹은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를 ‘국가 선행존재론자’ 혹은 ‘국가-개인 동시 발전론자’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손원일의 “해군창군이념”, “미래개척정신”과 “위국헌신정신”은 시대가 바뀌어도 해군은 물론 우리 군과 국민 전체에 길이 선양되고 면연이 이어져야 할 가치다. 이 정신들은 대한민국에 해군이 존재하는 한 장보고 대사와 이순신 제독의 정신과 함께 계승 발전시켜야 할 우리 민족의 고귀한 유산이자 미래의 에너지원이다. 그것은 안보환경이 변화하고, 해군의 전투양상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선현들이 이룩해놓은 위업으로서 우리들이 늘 되새겨야 할 광영의 역사다.
우리민족이 과거 세계적인 해양국가로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은 스스로 대륙국가로 자칭하고, 대륙진출에만 관심을 쏟은 나머지 그것이 곧 역사발전의 온전한 방향으로 인식해왔던 데 문제가 있었다. 대륙에만 관심을 보였지 해양에는 소홀했었으며, 장보고의 해양개척사상과 해양을 통한 이순신의 호국위업이 있었음에도 그 전통을 살리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대륙국가이자 해양국가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뒤따라야 할 합당한 실천은 장보고-이순신-손원일로 이어지는 한국 해군의 호국정신의 연속성과 그 발전의 발자취를 학습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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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말
손원일 제독, 해군창설, 해병대창설, 참군인정신. 21세기형 리더십
(Abstract)
Admiral Sohn Won-il, A Leader with a Magnanimous Insight before His time, His life and Philosophy
Suh, Sang-mun(Leading Research Fellow, Institute Military History and Compilation the Ministry of Defense ROK)
Admiral Sohn Won-il inherited Christian values from his parents. From his early life Admiral Sohn Won-il grasped the importance of the need to work and not to lose the independence of the homeland and to build the sense of sovereignty, patriotism and a wealthy country with sufficient might to defend itself. He also decided not to repeat the folly of the foregoing generations, particularly factional wrangling, which he thought had caused enormous harm to the country.
Having spent his youth in China, he understood the importance of marine affairs having studied the subject at university. He spent some time on ocean-going ships as a sailor, which was an extraordinary experience for an average young Korean of his time. He was fostering a vision of his future as a marine expert working for a greater future of the homeland.
What he learned from his parents, his school education and his experience as a sailor became the solid foundation for his future life. He was also determined to contribute to the country as a marine expert. His life as a navy officer, defense administrator and a diplomat was full of meaningful events.
He did his best to put patriotism into practice to maintain the country's independence, one that was won through painstaking efforts, and to enhance the country's status as a sovereign country. He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launch of the country's Navy and the Marine Corps and their development into a into a mighty force. He also led the country in defending itself from North Korea's attacks during the Korean War.
He strove for the overall development of the Korean Armed Forces beyond the range of the Navy. He, trained talented human resources and sought to help build a wealthy country with sufficient might to defend itself. He took it upon himself to defend the country's democracy and constitution. He went a long way in setting a naval tradition that respected Jang Bo-go's spirit of the development of maritime affairs and Admiral Yi Sun-sin's self-sacrificial patriotism. After retirements a naval officer, he joined the country's diplomatic corps and played a crucial role in helping the country establish diplomatic relations with European countries.
Admiral Sohn Won-il is respected as the father of the ROK Navy as due to his exemplary leadership and keen insight that was well ahead of his time. As for his political ideology, he upheld the spirit of Christianity, stressing love and sympathy to others and a respect for human life. As a humanist, he thought that people's freedom and equality was more important than anything else. He believed that the development of the state of its people should progress side by side.
The ideology that Sohn Won-il upheld at the time of launching the ROK Navy, along with his spirit of frontiership and self-sacrifice for his country, must be passed on to succeeding generations. They, along with the examples set by Jang Bo-go and Admiral Yi Sun-sin, are a precious part of Korean heritage that should be valued by the country's Navy, as well as the civilians. They are part of the country's glorious history that all Koreans should remember forever despite the changes to national security and naval operations.
Key-word
Admiral Sohn Won-il, the establishment of the ROK Navy, the establishment of the ROK Marine Corps, military mind, leadership that befits the 21st century
위 논문은『군사논단』, 통권 제61호(2010년 봄호, 3월 25일)에 게재된 것입니다. 블로그에서 보이지 않는 원문의 각주는『군사논단』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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