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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관점에서 본 毛澤東의 6.25전쟁 개입동기

雲靜, 仰天 2014. 2. 10. 09:34

지정학적 관점에서 본 毛澤東의 6.25전쟁 개입동기

 

徐相文(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Ⅰ. 머리말

Ⅱ. 한반도에 대한 ‘脣亡齒寒’ 개념의 전승과 재인식

Ⅲ. 지정학적 위기의식의 고조에 따른 선제발동

Ⅳ. 국내외 정치적 목적을 고려한 국외전장화 조성

Ⅴ. 맺는 말

 

 

한글초록

 

마오쩌둥(毛澤東)이 6.25전쟁개입을 결정한 복합적인 제 동기 가운데 지정학적 측면을 추출하면 크게 북한정권의 붕괴 방지와 국내 전장화를 막기 위한 국외 전장화 조성 동기 등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동기와 관련해서 마오쩌둥에게 미군의 북중 국경 접근은 곧 자국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국경너머 완충지대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심각한 안보위협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전략적 중핵지역을 방어하려면 그 주변을 방어해야한다는 脣亡齒寒의 관점에서 먼저 둥베이(東北)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둥베이지역의 주변지역인 북한의 공산정권을 유지시켜야 했다. 북한은 중국의 국방을 담보해주는 전초기지(outpost) 혹은 전진기지(advanced base)였다. 마오쩌둥의 군사개입은 김일성정권이 무너질 경우 예상되는 북한정권 지도부의 망명, 북한군과 주민들의 대량 유입 등 중국 지도부에 가져다 줄 정치적 부담을 미연에 막아보겠다는 사전 예방 조치였다.

  

두 번째 동기와 관련해서 마오쩌둥은 중소의 동맹조약 체결에 따른 소련의 참전에 대비해 소련군을 중국이 아니라 북한으로 진주하도록 유도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 동시에 미군이 한중국경을 넘어 중국둥베이지역으로 진격해올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 이를테면 장졔스(蔣介石) 군대의 전쟁개입과 중국대륙공격, 그리고 이에 촉발되고 연계될 대륙 각지의 국민당 저항세력들의 각종 반공활동이 힘을 받게 될 상황과 또한 반혁명세력의 반정부 투쟁이 정치 세력화될 계기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신 중국의 경제복구에 기반이 될 둥베이지역의 공업시설을 보호하고, 또 그것의 지속적 가동에 필수적인 전력공급원인 압록강의 수풍댐과 발전소를 보호하려는 전략적 목적도 내재돼 있었다. 나아가 반미 제국주의전쟁이라는 ‘위기상황’을 명분으로 중국사회를 동원체제로 유도하면서 신 중국의 정치적 과제들을 적극 추진해가고자 한 복안도 깔려 있었다.

  

한중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의 조우가 불가피하고, 국가안보와 국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군사개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마오쩌둥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군사 개입함으로써 승기를 잡겠다는 전략을 취했다. 즉 미군이 북진해오고 있는 행로의 목진지에 대규모 병력을 매복시켜 적에게 중대한 타격을 가하겠다는, 현지방어가 아닌 전진방어를 위한 선제공격전략을, 나아가 자국영토를 이중으로 보호할 수 있는 국외 전장화 전략을 선택했다.

 

주제어 : 마오쩌둥, 6.25전쟁, 지정학, 순망치한, 중한관계

 

중공군의 전쟁 개입을 결정한 마어쩌둥

 

Ⅰ. 머리말

 

마오쩌둥(毛澤東)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북중 국경선에 배치해둔 중국인민해방군(이하 ‘중국군’으로 약함) 6개 군단 18개 사단과 4개 포병사단을 세 차례에 걸쳐 북한의 평안도 서북지역에 투입했다. 그 해 연말까지 북한지역으로 파병된 중국군 병력은 도합 9개 군단 30개 보병사단으로 대략 29만 명 규모였다.

 

북한 진입 후 기습공격을 개시한 중국군은 “사실상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신만만해 하던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원수를 “완전히 새로운 전쟁”(an entirely new war)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북한전역의 공략 완수를 눈앞에 둔 한국군과 미군은 급거 남쪽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중국이 6.25전쟁에 개입한 후 한국군과 미군에 대해 감행한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공세는 초기 6.25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으면서 중국과 미국이 주요 전쟁 당사자가 된 국제전 성격으로 탈바꿈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1953년 7월 휴전이 성사될 때까지 북한정권을 지탱해준 버팀목 역할을 했다. 요컨대 미국이 남한을 구했듯이 중국은 붕괴 직전의 북한정권을 기사회생시켰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6.25전쟁에 왜 개입했을까? 마오쩌둥의 6.25전쟁 개입동기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관련학계에서 여러 가지 관점에서 해석돼 왔다. 중국의 국가안보 및 전략적 관점,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이념적 관점, 한반도상의 전쟁을 자국의 국내정치적 목적달성에 이용하려고 했다는 관점, 북한정권을 구원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도의적 이상주의, 미국에 대항함으로써 강대국의 반열에 서려고 한 중화주의적 부흥 및 패권주의의 발로라는 관점과 그리고 마오쩌둥의 전쟁관 혹은 개인성격에서 원인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제 요인들은 마오쩌둥이 전쟁개입시 무엇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는지 그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제각기 개입동기로서 타당한 면이 존재한다. 바꿔 말하면 종횡으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이 요인들은 서로 분리해서 단독 요인으로 추출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상기 요인들 가운데 그 어떤 요인이든 그것은 본질적으로 마오쩌둥이 한반도문제를 지정학(geopolitics, geopolitik)적으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6.25전쟁 개입, 미 제7함대의 타이완(臺灣)해협 급파, 미군의 38도선 북진공격 등 국면전환에 대한 사태판단과 그 대응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지정학적 요인을 제1차적 동인으로 고려했다.

  

본고의 목적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먼저 역사적으로 형성된 보편 중국인의 대한반도관을 찾아 형상화할 것이고, 다음으로 마오쩌둥이 그것을 계승했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한반도에 대해 지정학적으로 어떻게 인식했는지 밝혀본 후 그 인식이 궁극적으로 중국군을 한반도전쟁에 파병 개입시킨 결정과 어떤 상관관계가 존재했는지 규명하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정학은 지리학과 다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일국의 정치지도자들이 국가 외교전략 혹은 국방전략을 수립할 때 국내의 정치이념 및 목적과 그것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경제력, 군사력 그리고 자국이 처해있는 군사 지리적 환경과 국제관계 등 제요인에 대한 고려사항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지정학은 2개 이상의 복수국가들 사이의 정치, 군사, 외교 관계를 다룰 때 지리적 관계에서 파생되는 요인을 고려하거나, 혹은 그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일국의 통치자가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사안들, 예컨대 외국과의 동맹체결과 개전, 국가개혁 수행, 사회구조 변혁, 정치, 경제정책 등에 관해 내린 결정은 기본적으로 자국이 차지하는 세계상의 위치, 영토의 크기, 자원과 기타 국가의 영토와 국력 등의 지정학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검토, 고려한 결과다.

  

따라서 본고에서 말하는 ‘지정학적 관점’이란 마오쩌둥이 6.25전쟁 개입을 결정했을 때 무엇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는지 지정학적 요인을 중심으로 분석해보겠다는 의도를 가리킨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서구의 지정학 개념을 활용하겠지만 지정학이 서양의 전유물이 아닌 이상 주로 중국 자체의 전통적 지정학 개념인 ‘순망치한’(脣亡齒寒, “Chunwangchihan”―When the lips are gone, the teeth feel cold) 관점을 원용하기로 하겠다.

  

“동기”란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일을 발동시키는 계기,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정하거나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과 그 목적을 가리킨다. 즉 특정한 행위나 행동으로 유인하거나 혹은 그 행위나 행동을 유발시키는 자극(an incentive or inducement especially for an act)으로서, 말하자면 인간의 행위와 경험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적인 의미에서는 코탐(Richard W. Cottam)이 정의한대로 “대외문제에 있어 정부와 국민을 어떠한 결정의 방향으로 몰고 가는 요인의 총체”로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상기 의미들을 종합해 “동기”를 “대외문제에 있어 중공 당원들, 중국정부와 국민을 어떠한 결정의 방향으로 몰고 가려는 자극과 그 목적의 총체” 또는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무력 개입하기로 마음을 정하게 만든 직접적인 요인”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지정학적 요인과 관련된 정부나 정치지도자의 정책결정 동기는 통상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오쩌둥 역시 참전결정에 즈음해 검토한 여러 요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지정학적 요인 이외에 여타 이념적 요인, 국내 정치적 목적 등의 요인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크게 보면 모두 지정학적 요인에 내포돼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 자체로도 또 다른 지면을 필요로 하는 주제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깊이 다루지 않고 본고의 주제와 관련돼 있다는 문제의 소재만 소개하는데 그치기로 하겠다.

 

Ⅱ. 한반도에 대한 ‘脣亡齒寒’ 개념의 전승과 재인식

 

순망치한 개념은 以夷制夷 개념과 함께 중국 역대 왕조의 국가안보관을 읽을 수 있는 키 워드(key word)다. 후자가 정권의 존속과 국가안위에 위협이 되는 반란세력 혹은 외적을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 하는 공세적 의미에 무게가 실린 것이라면, 전자는 국가방어에 안전판으로 기능해온 주변국가와의 역학관계를 고려한 다분히 방어적 개념이 강한 사고이다. 그러나 중국이 주변국들을 모두 ‘夷’로 貶視하는 광의의 의미로 보면 양자는 서로 상보관계에 있는 안보개념이다.

  

‘이이제이’는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정치적 공간개념으로서 문명과 야만을 각기 ‘華’와 ‘夷’로 등식화하고, 문명과 야만의 기준을 왕도의 수용여부에 둔 華夷思想에 바탕을 둔다. 夷가 王土 혹은 王都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주로 그들의 정주지 및 자연환경과 정치적 운용방식 면에서 설명했는데, 여기에서 공간적인 개념, 즉 ‘중국’과 ‘四方’ 혹은 ‘內外’구분과 더불어 ‘人’과 ‘非人’의 가치판단이 생성됐다. ‘夷’가 거주하는 위치는 天子의 처소, 즉 王幾에서 너무 멀어 王化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문명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자질을 구비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천하=왕화=문명세계〔華=中(國)=內=人〕〉〔夷=外(四方)=邊=尸(死人)또는 금수〕라는 등식을 만들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중국인과 비중국인의 구분이 화이사상의 요체다. 화이사상은 나아가 바깥의 도전을 불허하는 ‘華’, 즉 ‘夷’에 대한 중국의 절대적 우월성과 그 지배의 정당성을 용인하는 관념으로서의 중화사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고대 중국의 국방개념의 틀이 생성된 것은 바로 이 같은 화이의 차등적 구별에서 비롯됐다. 역대 중국왕조는 평시 국방력을 京畿지역에 집중시키고, 전시에는 변방의 군사력을 증강시켰는데, 여기서 ‘중심―바깥 울타리’(中心―外圍)라는 2원 구조의 방어 틀이 정착됐다. 이러한 국가안보 인식과 실질적인 방어구조는 청대 초․중기를 거치면서 계승 발전됐고, 오늘날도 여전히 중국은 수도와 변경지역에 국방군사력을 적당히 배치하면서 상호 교류하고 운용하는 중심―바깥 울타리 개념을 국가안보에 극히 중요한 ‘안전체계’로 인식하고 있다.

  

청대 초․중기를 거치면서 통치자들은 周나라 시대에 제기된, “국가를 사방의 오랑캐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내기 위해 번속을 사방의 울타리로 삼는다”는 이른바 “以藩屛周, 守在四夷” 정책을 계승, 발전시켜 변방의 소수민족 경략에 박차를 가했다. 여기에서 번속국가들의 힘을 국가안보에 이용하는 국가안보전략이 확립됐다. 청대 후반 한림학사 저우더룬(周德潤)은 중국 주변의 ‘四夷’를 보호해주지 못하면 변경방어가 불리해지고, 변경을 지켜주지 못하면 수도와 경기지역의 ‘腹地’ 방어는 더욱 지키기 어렵다고 하면서 “류큐로 동남을 지키고, 고려로 동북을 지키고, 몽골로 서북을 지키고, 베트남으로 서남을 지켜야 한다”(以琉球守東南, 以高麗守東北, 以蒙古守西北, 以越南守衛西南)는 지정학적 전략을 제시한 바 있다.

  

또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해 이른바 “郅治保邦”, “保藩固圉”와 같은 개념들이 더해졌다. 질치보방은 부국강병의 힘으로 인접국을 보호한다는 개념이고, 보번고어는 번속국 보호와 중국의 안전을 연계한 국방전략으로서 번속국에 군대를 파병해 외침을 막아줌으로써 중국 주변부의 안전을 지킨다는 의미다.

  

이러한 안보전략은 모두 순망치한 개념으로 수렴되고, 이 개념은 근․현대를 막론하고 웨이위앤(魏源), 리우쿤이(劉坤一), 리훙장(李鴻章) 같은 지식인 및 관료들과 국공 양당의 정치인, 혁명가들에게 전승됐다. 순망치한 개념이 중국의 안보에 본격적으로 적용돼 필수 불가결하게 된 것은 중국이 근대 서구열강들의 문호개방 요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서세동점의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청조 후기 대외문제를 주관했던 리훙장은 1867년 중국 조야에 일본이 곧 조선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일본의 조선 침공설이 나돌 때 “일본은 조선을 삼키려고 욕심낸 지 오래”(日本欲呑朝鮮已久)고, “조선을 넘보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覬覦朝鮮匪伊朝夕)라고 일본의 야심을 간파했다.

 

그러면서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조선침략으로 중국의 랴오둥(遼東)과 옌징(燕京)이 위협을 받게 되자 明나라가 조선에 파병한 역사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조선은 우리의 동쪽 땅의 울타리”(朝鮮爲我東土屛蔽)로서 과거의 왜구는 “연해에 출몰하는 팔다리에 생긴 우환”(沿海肢體之患)에 불과하지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요동과 수도(연경)의 안위를 위협하는 근본적 근심거리”〔遼(東燕)京根本之憂〕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1880년 양강총독(兩江總督) 리우쿤이는 淸朝 황제에게 올린 상주서에서 한반도는 베트남, 미얀마 등 중국의 번속국 중 가장 중요한 울타리라고 지적하면서 한반도와 중국의 脣齒관계를 강조했다.

  

이처럼 중국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연계성을 순망치한 관계로 파악한 근대 중국의 전통적 인식은 중국국민당의 지도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났다. 1942년 3월 쑨원(孫文)의 아들로서 중국국민정부의 지도적 인물인 쑨커(孫科)는 한국독립운동을 지지하는 한 연설에서 “한국의 존망과 세계의 안위는 매우 큰 관계가 있다”(韓國存亡與世界安危有很大關係)고 역설했다.

  

또한 장졔스(蔣介石)의 侍從室 비서 겸 중화민국 외교부 情報司 책임자였던 샤오위린(邵毓麟)은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학자 출신답게 지정학적 관점에서 한반도는 대륙침략의 발판이고, 과거 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전쟁은 모두 한국의 식민지 상태가 遠因이 돼 발생한 전쟁들이었기 때문에 한반도가 독립하고 건국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했다.

 

그는 또 중국 소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에게 독립된 한국의 존재는 일본과 러시아의 분규를 떼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해서도 둥베이지역의 국방 울타리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한국이 독립을 이루도록 돕는 것은 바로 중국 자신을 돕는 것과 같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샤오위린은 몇 년 뒤 초대 중화민국 한국대사로 부임한 후 6.25전쟁을 맞게 됐다. 당시 샤오위린이 지켜본 바에 따르면, 장졔스도 한중관계를 “수족”(誼屬手足)과 같이 비유했으며, 한중 양국이 脣齒輔車의 특수한 역사관계에 있어 왔기 때문에 북한의 남침에 직면한 한국을 도와 전쟁을 치르는 것은 일종의 “신성한 의무”(神聖義務)로 여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국민당과 정치이념을 달리한 신중국의 정치엘리트들, 특히 마오쩌둥은 한반도에 대해 지정학적으로 어떻게 인식했을까? 그도 순망치한 개념으로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었는가? 또한 마오쩌둥은 사해 평등주의의 신념에 입각해 중국 주변의 약소국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한 이상주의자, 보편주의자였는가? 아니면 주변국의 독립과 정치체제에 대한 독자성과 자율성을 존중하기보다는 주변국을 자국의 국가이익 도모에 방편적으로 이용한 현실주의자, 중화주의자였는가?

 

방대한 그의 행적 가운데는 두 모습이 혼재해 있다. 그가 혁명가, 정치가로서 평생 동안 쏟아낸 수많은 언설 중 이 두 가지 야누스적 행태를 변별하려면 언급 당시의 정치환경과 상황조건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대체로 그의 반정부 혁명가, 반제 항일투사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자의 모습이 두드러지고, 정권을 장악한 후부터는 후자의 모습으로 전변하는 궤적을 읽어낼 수 있다.

  

이상주의자, 보편주의자로서의 마오쩌둥의 언설은 그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전략적 몸짓이자 합목적적으로 고안된 修辭였다. 그는 청년시절 자신의 고향 후난(湖南)성이 중앙정부로부터 자립해야 한다는 자치운동을 벌였다. 신해혁명의 부정적 유산인 부패하고 무능한 군벌정부와 그 수하들을 타도하기 위해서였다.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제국주의가 침략의 마수를 중국 본토내로 깊숙이 뻗쳐오자 마오쩌둥은 한 때 1930~40년대에 걸쳐 타이완 내 독립운동세력의 타이완독립운동을 지지한 적도 없지 않다. 그것은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일제의 구심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에서 취한 전술적 임기응변이었다.

  

당시 그는 중국의 보편 지식인들처럼 타이완과 같은 자국 영토뿐만 아니라 주변의 식민지 약소민족인 인도, 베트남, 식민지 한국 등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놓여 있는 민족들까지도 모두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 약소국들이 독립해야 제국주의의 패망을 앞당기고, 연쇄적으로 중국의 해방과 독립도 앞당길 수 있다는 신념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또 마오쩌둥은 일제 패망 후에는 중국국민정부가 1946년 1월 5일 독립을 승인해줌으로써 사실상 중국의 판도로부터 떨어져 나간 몽골의 독립까지 인정했는데, 이것도 정적 장졔스 정권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반정부 투쟁을 벌이던 비합법적 야당 지도자의 신분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한 최고 통치자가 된 후 전체 중국의 국가이익을 우선시하는 현실주의자로 입장이 바뀌게 되자 과거와 달리 타이완독립을 반대했다. 즉 일본패망과 동시에 중화민국에 일시적으로 통치가 위임됨으로써 국제법상 귀속이 불분명한 상태에 있던 타이완과 타이완해협에 대한 미국의 분리의도가 감지되자 이 지역을 중국의 부정할 수 없는 고유한 영토라고 주장한 것인데, 타이완이 중국영토에서 떨어져 나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이 같은 현실주의적 입장변화는 근대 역사에서 일국의 정권교체기 야당이나 반정부세력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흔히 목도되는 현상이다. 마오쩌둥의 입장변화는 흡사 러시아 혁명 직후 레닌(Vladimir Ilyich Lenin)이 보여준 행적과 유사했다. 즉 중국의 항일전쟁 시기 중국국민당과의 국가권력 쟁탈과정에서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옅었던 1930년대 중반이래 그는 항일투쟁의 전략적 차원에서 타이완 내 독립운동을 지지했고, 反蔣투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몽골에 대해서도 과거의 종주국 지위에 연연해하지 않고 독립을 인정해주었다. 그것은 과거입장을 번복한 새로운 변신이었다.

  

주변지역의 정치적 운명에 대한 그의 중화주의적 변신은 새삼스런 일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면연히 내려온 중국정치문화에 薰習된 결과였다. 달리 말하면 마오쩌둥 자신의 심상에 내면화된 이른바 ‘순망치한’의 인식이 정치안보환경의 변화에 따라 방편적 전술의 차원에서 벗어나 본래의 마음자리로 되돌아 간 것이다.

  

1938년 5~6월 항일전쟁의 성격과 대응을 논하는 강연에서 마오쩌둥은 중국의 항일전쟁이 지구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중국군이 일본군을 공격해 “압록강변에 이르러야만 전체 전쟁이 끝나게 되는 셈”인데, “만약 조선 등지에서 혁명전쟁이 발생해 중국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하나의 전쟁에 속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발언은 당시 만주에 주력을 둔 일본군을 염두에 둔 것으로서 중국둥베이 주둔 일본군들을 중국의 영토 바깥, 즉 마오쩌둥의 전술개념으로는 外線인 한반도로 몰아내야만 비로소 항일전쟁이 끝나겠지만, 만약 그로 인해 한반도에 혁명전쟁이 일어나 자신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정치세력이 있다면 기꺼이 응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이 발언은 그 때까지 전승돼온 보편 중국인의 지정학적 관념이 은연중에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사회 일각에는 과거 역사적으로 조선, 류큐,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태국 등과 같이 중국과 ‘朝貢冊封’ 관계를 맺어온 중국의 속방국들이 근대 들어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속방에서 떨어져 나간 것에 대해 기회가 된다면 그 국가들을 다시 중국의 영향권 안으로 흡수돼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해 왔었다.

  

지각이란 어떤 대상(환경)을 바라보고 느끼는 바를 근거로 그 대상을 인식하고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각은 대상에 대한 반응의 향배를 결정짓는 구체적 결정자 구실을 한다. 어떻게 지각하느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해 지각한 자의 행동이 정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행해지는 행동을 지각(인지)적 행동(cognitive behavior, perceptional behavior)이라고 일컫는다.

 

지정학에서는 정치지도자가 자신을 둘러싼 정치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에 근거해서 그 환경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주목한다. 즉 ‘지각(인지)적 행동론’(cognition, behaviorism)이란 한마디로 인간은 환경에 대해 지각한대로 그 환경에 대해 반응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바꿔 말해서 인간은 환경을 그의 과거 경험에 비춰 지각하는 가운데 바로 그 환경에 대해 행동(반응)을 취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도 당시 주변국에 대해 국가안보라는 지정 전략적 측면을 고려했다면 군사전략 및 책략의 고안과 개발에 역사와 중국고전의 다양한 사례를 참고하고 교훈을 얻었던 그가 그 점을 지각하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즉 자국의 정치환경을 지각했다면 그는 한반도에 대한 그러한 脣亡齒寒的 인식, 혹은 관념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내면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오쩌둥이 왕조체제를 부정하는 새로운 혁명사상과 정치이념을 내세웠다고 해도 그것은 자국의 정치문화에서 완전히 유리된 것일 수가 없고, 단지 변증법적 발전의 한 과정에 있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마오쩌둥에게는 이미 6.25전쟁 개입을 결정한 1950년 10월 보다 10여년이나 앞선 시기에 한반도에 반중국적 전쟁이 발생할 경우 적극 개입할 가능성이 내재돼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대한 마오쩌둥의 인식변화는 근본적 전변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미발현의 잠재된 상태에서 정치환경의 변화에 조응해 ‘순망치한’인식이 되살아 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마오쩌둥의 한반도 관련 언급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안보환경, 그 중에서도 지정학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만약 한반도에 친중국적 정권이 들어서고, 또 그 정권을 붕괴시키려는 외부세력이 없다면 굳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으로 약함) 지도자로서는 한반도에 수립된 중국에 우호적인 정치체제 및 정치권력이 존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해방 후 중국내 한국독립운동 인사들이 독립운동을 끝내고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 그들에게 새로운 정부수립이 순조로워지기를 바란다는 격려를 보낸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국가에 반대하는 정부가 들어서길 기대한 희망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 때 ‘반제국주의 정부’란 바로 친중국적 정권의 동의어다.

  

하지만 미국과 상호교류를 통한 새로운 관계정립을 원했던 마오쩌둥의 의사가 미국정부에 수용되지 않게 됨으로써 194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중공의 관계가 이념적 적대관계로 바뀌자 중공과 남한 내 우파성향의 정치세력들과의 관계도 단절됐다. 남․북한 관계 역시 세계적 수준에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두 국가권의 블록화가 형성됨으로써 쌍방의 대화가 단절됨과 동시에 군사적 대치상태로 나아갔다.

 

이 시기 자국의 이념적 입장에 따라 마오쩌둥은 동일한 공산주의이념을 지향한 북한정권을 지지했다. 그 배경 역시 공산주의라는 정치 이념적 동일성 이외에 국가안위를 고려한 지정학적 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은 전후 소련이 북한을 지지했던 동기와 유사하다.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인도요청에 응해 1947년부터 6.25전쟁 발발 직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북한의 군사력 증강을 지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韓籍 사병 최소 5만 명 이상을 북한으로 보내준 것도 큰 틀에서 보면 한반도에 대한 순망치한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이송된 한적 사병들은 주로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해방 후 중국에 체류하면서 국공내전에 중공군으로 참전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출신지는 한반도 남북 각지의 다양한 지역이었으나 중공측은 그들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괄적으로 전원 북한으로 보냈다. 한적 사병들 중에는 북한행을 원하지 않은 남한 출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중국의 일방적 조치는 기본적으로 그들의 인권을 유린한 강권적 처사였다. 한적 사병들은 단지 인간의 귀향조차 국가의 전략적 목적을 실현시킬 도구로 수단화한 중공지도부에 자국의 대한반도 안전망을 형성시킬 방패막이로 동원됐을 뿐이다.

 

중공지도부는 해방 후 한적 사병들과 같이 북한으로 들어간 자들 가운데 중공계 출신 한인 그룹인 이른바 옌안(延安)파가 정권을 장악하기를 바라면서 그들이 북한권력 내에 주류가 돼주기를 기대했다. 그게 여의치 않다면 중공지도부의 입장에서는 최소한 연안파들이 포함된 반미적이면서 친중국적인 정권의 존재가 필요했다.

  

1950년 5월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남침전쟁 구상에 동의하고, 지지의사를 표한 것도 남침을 ‘민족해방혁명 전쟁’으로 이해한 그가 순망치한의 관점에서 한반도가 북한정권에 장악돼야 한다는 원론적, 혹은 당위론적인 기대에서 나온 의사표시였다. 그리고 그것은 노회한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의 참전압력을 받은 마오쩌둥이 중소동맹조약의 체결로 약정된 국가이익의 원활한 환수를 보장받기 위해 자신이 원치 않은 부적절한 시기에 전쟁을 지지하게 되는, “내키지 않는 개입”을 결정한 결과였고, 마침내 원론적 지지 차원을 넘어 같은 해 10월 중국군의 한반도 군사개입이라는 실제 행위로 이어졌다.

 

Ⅲ. 지정학적 위기의식의 고조에 따른 선제발동  

 

마오쩌둥의 무력개입은 김일성이 속전속결로 미군의 한반도 상륙전에 남한 전 지역을 점령해주기를 원했던 자신의 기대와 달리 전쟁 발발과 거의 동시에 전개된 미군의 즉각 개입과 연이은 북진에 따른 김일성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한 구원조치였다. 되풀이되는 문제제기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마오쩌둥은 왜 와해 직전의 김일성정권을 살려내려고 했을까?

 

마오쩌둥이 미군의 한반도 석권 방지를 통해 북한정권의 붕괴를 막으려고 한 동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자국안보를 고려한 것으로서 대한반도 순망치한 개념을 인지한 결과였다. 우리가 곧 확인하게 되겠지만 중국의 전략적 중핵지역(core)을 방어하려면 먼저 그 주변(periphery)을 방어해야 하고, 주변지역인 둥베이지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둥베이지역의 주변지역인 북한정권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것의 구체적 전개에 관해선 당시 중국의 안보환경이라는 큰 틀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신 중국은 공산주의의 실현을 표방한 국가로서 이념적으로 서방 국가들과 다른 노선을 추구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적 수준의 미소냉전이 아시아로 확산됨으로써 동북아에서 진행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의 블록화는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자국의 안보환경을 개선시킬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했다. 전후 중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국가로는 인접국인 소련과 일본, 그리고 미국 정도였다.

 

이 가운데 잠재적 위협세력인 소련은 마오쩌둥이 1950년 2월 중순 스탈린과의 중소동맹조약 체결을 통해 동맹의 일원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신 중국의 양성적 적대국은 아니었다. 즉 중소동맹의 체결로 중국으로선 적어도 후방으로부터 뒷덜미를 잡힐 일은 없게 된 안보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정학적 개념으로 볼 때 동맹은 어떤 나라가 자국의 지정학적 제약을 극복하거나 지정학적 가능성을 활용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채택하는 국가간의 관계 맺음이다. 중소동맹조약은 일본과 미국을 공동의 적으로 한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각기 자국의 대일, 대미 전략적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한 의지의 산물이었다.

  

이 조약은 내용상 군사안보, 경제교류, 이념적 결속 등 다목적 용도로 맺어진 것이었지만, 그 가운데 대외 안보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미국, 일본을 비롯한 서방 ‘제국주의’국가군에 대한 군사동맹의 성격을 띄었다. 요컨대 소련은 미국을 적대시한 신 중국의 든든한 후방 지원세력이 된 것이다.

 

스탈린과 중소동맹조약을 체결한 직후 마오쩌둥은 소련과 맺은 동맹의 의의를 언급하면서 “중소조약과 협정은 우리에게 믿을만한 동맹국이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하게 국내건설과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소련과) 공동으로 대처하기에 손쉬워졌다”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는 제국주의란 곧 미국임을 암시하면서 “만약 제국주의자가 우리를 치려고 준비하면 원조자(소련)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됐다”고 경제적 이익추구와 함께 국가 안보적 목적의식이 혼재된 의미를 부여했다.

  

따라서 일본과 미국은 실제적인 중국침략 가능국가로 간주됐다. 1945년 8월 중순과 1950년 2월 중순에 각기 체결된 두 차례의 중소조약은 모두 일본에 대항하거나 그 견제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이미 6.25전쟁 발발 전부터 일본의 재기를 우려해 왔었는데, 두 사람은 중소동맹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본이 장차 틀림없이 고개를 들 것이라고 인식을 같이 한 바 있다. 그들은 일본이 미국의 사주를 받거나 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중국으로 재진출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중국과 연접된 국경선이 형성돼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중국은 미국을 지정학적 관점에서 주변국으로 간주해 왔다. 더욱이 미국은 공산중국과 정치이념이 상이한데다 소련에 대해서도 봉쇄전략을 실행하고 있는 상태이고, 또 가상 적대국의 공격력을 해외에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중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주된 세력으로 간주됐다. 즉 미국은 어떤 형태로든 중국 재진출을 기도할 가능성과 능력이 없지 않았고, 이 점을 늘 우려해온 마오쩌둥은 이에 관해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실제 미국은 군사력의 해외파병 기동 능력을 보여주듯 6.25전쟁발발 직후 즉각 군대를 한반도에 투입시킴과 동시에 미 제7함대를 타이완해협으로 급파시켰다. 이러한 사태발생은 그간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미국을 바라본 마오쩌둥에게 미국의 한반도전쟁 개입의 저의를 의심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즉 미국이 취한 이 같은 군사적 조치의 목적은 한반도의 정치 군사적 통일에 국한된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중국진출에 있다고 보고 이 조치를 한반도와 타이완의 대안인 화둥(華東)연해지역을 통해 재진출하려는 기도로 간주한 것이다.

 

1950년 8월 4일 마오쩌둥은 중공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 석상에서 이 같은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는 “만약 미 제국주의가 승리하면, 득의양양해 할 것이며 우리를 위협할 수 있을 것”(如美帝得勝, 就會得意, 就會威脅我)이라고 단정지으면서 미국의 최종 목적을 의심했다. 마오쩌둥의 의구심은 당시 중공기관지『人民日報』에 게재돼 ‘미국위협’을 부풀리는 선동의 형태로 형질변경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오쩌둥의 우려는 약 2개월 후인 9월말을 전후해 현실로 나타났다. 한국군의 단독 북진은 수용하겠지만 미군이 38도선 월경 북진을 감행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중국정부의 대미 경고에 대해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유엔에 대해 노골적으로 공갈치려는 시도”(a bald attempt to blackmail the UN), 혹은 “허세”(bluff)로 일축하고 예정대로 북진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행정부는 모스크바의 개입을 우려했지 베이징의 경고에 대해서는 그다지 괘념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중국지도부에 김일성의 구원요청이 전해진 것에 이어 한국군과 미군이 주가 된 유엔군의 계속적인 공격에 따라 10월 중순 평양이 점령되고, 압록강지역 뿐만 아니라 북한전역이 석권될 상황이 전개됐다. 마오쩌둥에게 있어 미군의 압록강 진격은 곧 김일성정권의 붕괴를 의미했고, 그것은 바로 중국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협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마오쩌둥의 대한반도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전통 중국의 순망치한 개념의 발전적 형태인 현대 중국의 지정학적 안보개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자국영토를 지정학적으로 핵심(혹은 중핵)지대, 변경(邊疆)지대, 완충지대(buffer zone), 전략적 영토경계지대 등 4개 지역으로 구분해왔다. 핵심지대는 長江, 黃河江 중하류 유역과 남방의 珠江 유역을 포함하는 지역으로서 중화문명의 발상지이자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腹地)다. 변경지대는 핵심지대를 보호하는 바깥 외연지역으로서 핵심지대와는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핵심지대를 에워싼 내몽골, 위구르(新疆), 칭하이(靑海), 광시(廣西), 둥베이(東北)지역 등이 여기에 속한다. 완충지대는 변경지대 바깥 지역의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 5개 지역으로 구분한다. 이 지역들은 러시아를 제외하고 대체로 과거 중국과 ‘조공 책봉’의 宗藩관계에 있던 지역이다. 전략적 영토경계지대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인도차이나 반도, 동남아의 말라카 해협 연안 국가들과 같이 중국의 국력과 영향력이 실제로 미치는 지역이다.

  

이처럼 수도와 중핵지대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변경으로 외연이 확대되면서 4겹으로 둘러싸는 방어개념은 변경지역의 위치가 중핵지역으로부터 원거리일수록 효과가 크다. 이와 관련된 실증적 예는 구 짜르시대 러시아가 모스크바 중심의 중핵지역의 안전을 증대시키기 위해 수도와 변경지역간의 거리를 가능한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변경지역으로 개척의 손길을 멈추지 않은 방어적 팽창정책을 들 수 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문명의 정도와 관련된 가치들이 최대로 집중돼 있는 곳이 중핵지역이고, 반대로 그 값이 아주 작거나 제로에 가까운 곳이 주변이기 때문이다. 중핵지역은 주도지역이고, 주변지역은 의존, 종속지역이다. 지정학적 관계에서 중핵부가 되게 하는 요소들은 높은 경제력, 군사력, 고도의 문명 정도 등이고, 반대로 주변부가 되게 하는 요인은 아주 낮은 경제력과 문명의 정도가 낮은 것이다. 수도는 중핵 가운데 일국의 최고 통치자가 상주하고, 그 통치기관들의 소재지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치이념과 국가를 상징하는 곳으로서 신체의 두뇌와 중추신경과 같은 곳이다.

  

중핵지역이 외침에 점령당하면 마치 인간에게 심장이 멎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수도가 점령당하면 국가전체를 통제, 통치하는 통어기능(head function)이나 국민의 감정과 충성심을 모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하는 국민결속기능(keystone function) 등, 수도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바로 국가전체의 마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핵지역을 중심으로 방어전략을 수립하는 형태는 신 중국 수립 직전 마오쩌둥이 중공군을 배치한 형식에 그대로 나타난 사실을 보면 마오쩌둥의 안보개념이 전통 중국의 연장선에서 전승됐다는 점이 실증된 셈이다.

  

어떤 나라보다 국경선이 길고 인접국이 많은 중국의 광활한 변경지역은 주변국가들과의 接壤地로서 대외개방과 우호관계의 발전을 담보하는 ‘창구’이자 ‘통로’이기도 하고, 동시에 중국이 세계를 향해 직접적으로 국가주권의 현양, 국방력의 현시를 행사하는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앞에서 열거한 내몽골, 위구르, 칭하이, 광시, 둥베이 등의 변경지역은 핵심지대를 보호하는 바깥 외연지역으로서 핵심지역과 순망치한 관계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각기 외몽골, 러시아, 인도, 파키스탄, 베트남, 한반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이들 바깥지역과도 순망치한 관계에 있다.

  

특히 중국안보의 주변부지역으로서 수도를 포함한 중핵지역의 동북방 안전을 보장해주고 있는 둥베이지역은 중국의 중핵지대인 수도와 중국관내로 직입할 수 있는 군사요충지로서 국가안위에 직결되는 극히 중요한 지역이다. 군사적으로는 소련, 미국, 일본세력과 근거리에서 맞대면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따라서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정치세력들이 중앙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각축전에서도 누가, 어떻게 둥베이지역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판세가 달라지고, 전략적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실제 중국의 역사도 그런 식으로 전개된 바 있다. 예컨대 과거 遼, 金, 淸 3개 왕조가 모두 이 지역에서 발흥해 관내의 중원지역으로 들어와 중국 동북부 혹은 전체 중국강역을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동안 통치한 바 있다. 중국인을 구성하는 56개 민족 중 95%를 차지하는 다수자인 漢族을 공포와 민족적 굴종상태로 몰아넣으며 전 중국을 약 1세기 동안 통치했던 몽골족의 元朝도 같은 북방지역인 몽골지역에서 중원으로 들어왔었다. 그들이 중국관내 정복과정에서 둥베이지역 女眞族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大淸帝國을 세운 만주족이 중원으로 들어가 전 중국을 장악한 시발지도 둥베이지역이었다. 또 20세기 벽두 러일전쟁 전후부터 러일 양국이 동북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샅바싸움을 벌인 것도 둥베이지역과 한반도를 놓고서였다. 미국 역시 경제적 동기에 따른 중국진출, 혹은 러시아의 견제를 목적으로 이 지역을 극동에서의 자국이익을 보장해줄 전진 전략지로 삼으려고 “중국 둥베이를 움켜쥐는 자는 곧 세계를 움켜쥐게 된다”(把握中國東北者卽把握世界)고 인식해왔다.

  

중공 지도부 역시 둥베이지역을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시했다. 일찍이 1945년 6월 한때 마오쩌둥은 당시 중공이 장악하고 있던 모든 혁명근거지를 잃는다 해도 둥베이지역만 수중에 넣고 있으면 중국혁명의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취지의 연설을 한 바 있다.

 

그 후 그는 실제로 해방이 되자 가장 먼저 둥베이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중공 각 구에서 11만 명의 병력과 2만 명의 간부를 차출하고, 총 77명의 중공 중앙위원과 후보 중앙위원 중 20명을 이 지역으로 북상시켰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중공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 국민당의 포위를 벗어날 수 있지만, 반대로 만약 이 지역이 국민당 손에 넘어가게 되면 국민당군이 둥베이지역의 공업설비를 이용해 화둥, 화중과 둥베이에서 남북 양 방면에서 중공을 포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국민당의 장졔스도 여기에 뒤질세라 급거 대군을 이 지역으로 이동시켰음은 물론이다.

  

둥베이지역에 대한 이 같은 인식과 실제 상응행위들은 전체 중국 지식인계층의 일반적 기류였던 듯 하다. 통치계급 수준의 국공 양당 이외에 6.25전쟁 발발 3년 전 중국의 한 지식인이 평술한 내용은 이 지역에 대한 보편 중국인들의 전략적 인식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즉 “둥베이지역을 손에 넣으면 바로 시베리아와 한반도가 한 지역으로 연결되는데, 이것은 곧 동북아의 장악을 의미한다. 그러면 미국이 위협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이 지니는 전략적 가치도 감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역대왕조를 비롯해 현대 국공 양당의 지도층과 전략가들이 예외 없이 모두 4개 동심원 중 변경지대와 중국국경 너머 완충지대의 연접선에 국방력을 집중시킨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특히 외국과의 접촉이 빈번해진 근대 이후로는 동북아 지역과 동남아 지역이 가장 중시됐다. 동북아 지역은 러시아, 한반도와 연접한 중국둥베이지역과 한반도, 일본과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 일대를 지칭한다.

 

그 중 한반도는 러시아의 남하와 미국, 일본과 같은 해양세력의 북진이 교차하는 지역이며 중국둥베이지역과 직결돼 있어 둥베이지역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핵심지대인 수도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화베이지역 등의 전략적 요충지의 안전에도 직접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한반도는 베이징 및 화베이지역과 최단거리에 위치해 있다. 또 완충지역으로서 강대국간의 세력다툼에서 대륙국가에 설 수도 있고, 해양국가에 설 수도 있으며, 양쪽 모두에도 설 수 있다. 현재 중국군부도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군사 지리적으로 볼 때, 적이 한반도를 이용해 다른 방향에서 우리(중국)를 위협하고, 공격해올 수 있다. 한반도는 우리나라(중국) 둥베이지구 안전의 득실에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화베이지구의 안정과 수도 베이징의 안전 및 전체 북부 연해 지구의 방위에도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간파한 듯 일찍이 저우언라이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는 “중국의 머리를 강타할 수 있는 쇠망치”와 같은 위치에 놓여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반도가 중국인들에게 중요시됐던 까닭은 이처럼 한반도가 어떤 세력에게, 어떻게 이용되는가에 따라 중국의 심장부를 위협할 수도 있고, 반대로 둥베이지역의 울타리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내용을 토대로 중국인의 국가안보 개념에 따라 중핵지대, 둥베이지역, 한반도 등 세 지역간의 지정학적 관계를 총괄적으로 조감하면 북한은 중국안보의 전초기지(outpost)이고, 둥베이지역은 전진기지(advanced base)이며 관내의 중핵지역은 둥베이를 지원하는 후방 지원기지(supporting base)인 셈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상호관계는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할 경우 북한이 중국둥베이의 전진기지가 되고, 둥베이지역은 후방 지원기지에 속하게 된다. 사실상 6.25전쟁은 그런 구도로 진행됐다. 현 중국의 한반도정책인 ‘3非3不願’정책이 시사하듯이 중국이 군사 지정학적 관점에서 늘 ‘누가’ 한반도를 ‘어떤 상태’로 관리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촉수를 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념적인 문제와도 얽혀 있다. 즉 한반도에 어떠한 정치체제가 정통성을 갖춘 통치권력으로 들어선다 해도 그것이 중국의 국가통치이념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반 중국적 공세의 형태를 띈 위협을 가져다주는 경우라면 자국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과 함께 적절한 대응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전후 북한 김일성정권은 공산주의를 국가이념으로 내건 반미, 친소적인 정치세력으로 출발했다. 또 6.25전쟁 직전 1950년 5월 중순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중소동맹을 모델로 한반도 통일 후 ‘중조우호동맹호조조약’(中朝友好同盟相互協助條約)을 맺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의 방어적 입장에서 볼 때 북한정권의 한반도통일 혹은 적어도 북한정권의 존속은 중국의 안보에 불가결한 완충국가(buffer state)인 셈이고, 이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런데 미군의 압록강과 두만강 접근은 국경너머 자국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완충지대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심각한 안보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이 설령 중국에 재진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친미세력이 한반도북단을 수중에 넣고 정권을 수립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중국의 둥베이변경이 미국의 영향권 내로 들어오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오쩌둥으로선 그러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사실에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이 행한 1950년 10월 2일 발언은 그러한 심사를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조선전역을 미국에 점거되도록 내버려두면 조선혁명의 역량은 근본적인 실패를 당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침략자들은 더 날뛰게 될 터이고, 그렇게 되면 아시아지역 전체에 불리한 것이 된다.”

  

이러한 우려 섞인 인식은 비단 마오쩌둥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당시 중국사회의 보편적 분위기였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 한반도는 ‘一依帶水’, ‘一水相隔’, ‘唇齒相依’ 등과 같은 개념으로 각인돼 있었다. 또 신 중국의 정치엘리트들과 친정부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조선의 존망과 중국의 안위는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면서 양국의 관계는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고, 바깥문이 망가지면 집 안채가 위태롭다”(脣亡則齒寒, 戶破則堂危)는 식으로 비유되곤 했다.

 

중국조야는 여기에서 자국의 한반도 군사개입의 정당성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즉 “중국인민들이 조선인민들의 항미전쟁을 지지하고자 하는 것은 도의적인 책임만이 아니라 우리 전체인민들의 생존에 직결되는 이해(切身利害)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며, 자위의 필요성이 결정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합리화됐다.

  

중국사회의 이러한 광범위한 대한반도 인식과 개입의 명분은 중공 지도부의 ‘抗美援朝戰爭’ 개전 결정에 그대로 반영됐다. 1950년 8월 26일 저우언라이는 ‘중국인민해방군 둥베이변방군’ 준비공작 관련 회의를 주재하면서 중국은 북한의 전쟁수행을 형제국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둥베이지역과 서로 불가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는 취지를 밝힌 바 있다.

 

또 중국군이 한반도로 잠입한 직후인 10월 24일 그는 “중국과 조선은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으며, 만일 북한이 “미 제국주의에 무너진다면 우리나라 둥베이가 안정될 수 없다”고 평가하면서 미국이 “중국을 삼키려면 먼저 반드시 둥베이를 점령해야 하고, 둥베이를 점령하려면 먼저 필히 조선(북한)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저우언라이의 언급은 보편 중국인의 대한반도 순망치한 관계의 지정학적 인식과 상황판단이 국가정책에 반영됐음을 시사한다. 중공 당내에서 반대파를 설득하고 군사개입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마오쩌둥 역시 북한정권에 대한 “脣亡則齒寒, 戶破則堂危” 관계를 군사파병의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저우언라이 등 개입 찬성론자들과 순망치한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1년 10월 23일 마오쩌둥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계(屆) 전국위원회 제3차 회의 개막사에서 “미국이 타이완을 점령하고, 북한까지 침략해 중국 둥베이변경지역까지 쳐들어 왔기 때문에 중국이 ‘抗美援朝 保家衛國’의 기치를 내건 것은 완전히 정당한 전쟁”이라는 식으로 언급한 바 있다. 즉 한반도 무력개입은 자위를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는 인식이었는데, 미국이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진을 감행한 것은 실제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국가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케 만들었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언급했듯이 마오쩌둥은 만약 북한에서 미국을 저지하지 못하면 중국영토 내에서 미국과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국 안보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지정학적 위기의식은 마오쩌둥이 6.25전쟁에 개입하게 된 주요 동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정의 단독 요인은 아니었고, 여타 요인들과 서로 얽혀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논구하도록 하겠다.

 

Ⅳ. 국내외 정치적 목적을 고려한 국외전장화 조성

 

신 중국은 정권출범 초기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즉 1) 스탈린으로부터 약속받은 이권환수와 외국과의 평등한 외교관계 수립을 통한 국가의 명실상부한 독립쟁취, 2) 대륙 도처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국민당 잔류군대, 특무와 토비들의 섬멸을 통한 국내정치의 안정, 3) 타이완과 티벳(西藏) 공략을 통한 국가 정치적 통일의 완성, 4) 피폐된 경제를 戰前 수준으로 회복시켜 국가재정 및 민생 안정의 도모, 5) 토지개혁을 추진해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것 등이었다.

  

중국은 6.25전쟁 발발 전까지 소련을 필두로 한 동구권 공산국가들 및 북한, 베트남 등과 같은 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해 도합 17개국과 수교했으며, 영국 등 7개국으로부터 정권에 대한 승인을 얻어내는 외교적 개가를 올렸다. 특히 스탈린과 중소동맹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부 소련의 재중국 이권을 조건부로 돌려받는 개가를 올렸다. 도처에서 저항중인 중국국민당군에 대해서도 막바지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또 지방간의 편차가 존재하긴 했지만 중국정부는 6.25전쟁 발발 전부터 이미 공업설비의 재가동과 경제회복을 위한 일련의 정책을 시행해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경제회복에 투입될 자본은 마오쩌둥이 중소동맹조약 체결을 통해 소련으로부터 제공받기로 돼 있었다. 토지개혁 역시 중공 각 지방국 별로 착수토록 해 부분적으로 성과가 드러나고 있는 상태였다.

  

마오쩌둥에게 상기 과제들은 당시 중국정부가 전력을 투구하고 있던 최우선적 현안들이었지만, 그러한 국가과제들을 실행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국내의 정치적 안정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국경의 안전이 필수적이었다. 더욱이 내전을 조기에 마무리 지으려는 판국에 국내전쟁이든 국외전쟁이든 전쟁에는 개입할 처지가 아니었다. 국가대사의 추진에 차질을 빚을 곤란한 상황에 부딪히게 될 것과 그리고 오랜 내전으로 인한 피폐된 경제상황을 호전시킬 기술과 자본도입의 길이 막히게 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 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은 피해야 했다.

  

그런데 곤차로프가 지적한 바 있듯이 한반도와 타이완해협에 군사력을 투사시킨 미국의 궁극적 목표가 중국재진출이라고 예단한 마오쩌둥은 미국과의 한판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와해직전에 놓여있는 북한정권을 구해야만 둥베이지역이 안정될 것이고, 그래야만 궁극적으로 중국이 전장화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의 와해방지의 필요성에 관해선 이미 선행 논의에서 충분히 검토됐다.

 

그 결과 둥베이지역이 미국의 공격을 받게 될 경우 중국의 중핵지역이 위험해지게 되는 지정학적 관계와 그에 대한 마오쩌둥의 우려가 그 이면에 내재돼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설사 미군이 중국으로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북한정권이 한국군과 미군에 접수되면 대량의 북한난민과 북한군의 중국 둥베이지역 유입(flow-in)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가정은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상황이다. 그럴 경우 중국이 입게 될 각종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를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요컨대 북한의 구원은 김일성 정권이 붕괴된 후 맞닥뜨리게 될 상황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중국 둥베이지역을 국가안보에 긴요한 지역으로 중시한 까닭은 이 지역이 베이징과 화베이 등 중국 내 중핵지역의 안전에 필수적이라는 안보적 측면 외에 또 다른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둥베이지역이 중핵지역의 입술에 위치해 있다는 단순한 지리적 위치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이 지역에는 대량의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는데다 각종 근대적 공업시설이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당시 둥베이지역은 행정적으로 랴오시(遼西)성, 랴오둥(遼東)성, 지린(吉林)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등 4개 성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전국 총면적 960만㎢의 1할도 채 되지 않은 약 79만㎢에 인구수는 2,942만 명으로서 중국 전체 총인구 5억 5,196만 명의 5.3%를 점하고 있었다. 1949년 10월 신 중국이 수립될 즈음 전국 전체 70%이상의 공업과 교통망이 전 국토의 11.3%에 불과한 동부 연해지역에 집중돼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둥베이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사실상 당시 낙후된 농업국가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은 각종 근대적 공업설비가 집중적으로 갖춰져 있는 지역이라고는 둥베이지역과 상하이, 광저우(廣州) 지역 정도뿐이었다. 상하이와 광저우지역은 경공업 위주였고, 둥베이지역은 중공업이 발달했다. 둥베이지역의 공업중심지는 다롄(大連), 안산(鞍山), 랴오양(遼陽), 우쑨(撫順), 번시(本溪), 선양(瀋陽), 창춘(長春), 하얼빈(哈爾濱), 다칭(大慶) 등지의 남만철도와 中東鐵路 연변으로 발달된 도시들과 지린성의 퉁화(通化) 등지였다.

 

둥베이지역의 중공업 설비는 대부분 일본제국주의가 남겨놓은 것이었고, 둥베이 3성 가운데 주로 랴오닝성에 집중돼 있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공업제품들은 경공업 제품이 대종을 이루는 상하이와 광저우 지역과 달리 방직제품, 석탄, 시멘트, 화학제품, 자동차, 비행기와 각종 군수품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일반적 의미의 중공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비행기 등 군사무기까지 생산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 중국의 경제복구에 기반이 될 정도로 경제적 비중이 높았음은 물론 군사적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했다.

  

둥베이지역은 중국 중앙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입안한 ‘1949년 工業生産修建計劃’에 따라 경제회복을 위한 각종 조치를 포함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중공업 생산력이 거의 파괴된 상태의 전전에 비해 많이 호전돼 회복단계에 접어든 상태였다. 둥베이지역의 지하자원과 주요 공업생산량은 1952년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았다.

 

석탄(原煤)은 2,200만 톤으로 전국 총생산량 6,600만 톤 대비 3분의 1을 점했다. 원유는 23만 4,000톤을 생산해 전국 총 생산량 43만 6,000톤의 절반을 상회했고,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생산은 94만 5,000톤으로 전국 총생산량 134만 9,000만 톤의 70.5%에 육박했다. 시멘트는 131만 4,000톤을 생산해 전국 총생산량 286만 1,000톤의 45.9%, 화학비료는 10만 1,400톤을 생산해 전국 총생산량 15만 400톤의 67.4%를 차지했다.

  

요컨대 다른 지역보다 자본이 우선적으로 투자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둥베이지역의 주요 중공업 생산량은 전국 총생산 대비 평균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둥베이지역 공업 생산량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 다롄을 예로 들면 1949년 10월 현재 전기기계 생산은 1947년 보다 2배 이상 증가했고, 금속기계생산은 1948년의 3배로 늘었다. 비약적으로 증가한 철강은 매월 생산량이 일제시대보다 64%가 증가했다.

 

당해 년도 상반기의 특수강 생산량은 원 계획의 195%, 탄소강은 165%, 기타 각종 강은 그 해 안으로 120%이상을 달성하게 될 것으로 예상됐는데, 그럴 경우 그것은 1946년도 생산량의 12배를 초과한 수치였다. 당해년도의 자동차 수리량은 1946년의 5배를 초과했으며, 새로운 화물차 생산량은 2배 반을 넘어섰다.

  

3년 여 이상의 국공내전으로 피폐된 경제상황을 호전시켜 각종 생산력을 전쟁 전의 예년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일은 중국정부에게 지체할 수 없는 화급한 과제였다. 그러자면 자본과 기술도입이 선행돼야 했는데, 이 문제는 중소동맹 체결시 스탈린이 약속한 소련의 차관으로 어느 정도 숨통을 트게 됐다. 하지만 그것을 일궈낼 공업설비는 여전히 불충분했다. 그나마 둥베이지역의 공업이 당시 중국전체 경제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터였다. 따라서 중국지도부는 경제건설을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둥베이지역의 공업시설을 보호해야 했다.

  

앞 절에서 확인한 바 있지만 저우언라이는 북한을 순망치한 관계로 파악하고, 만약 북한정권이 미군에 무너지면 중국의 둥베이지역이 안정될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 구체적인 이유의 한 가지가 바로 이 지역에 밀집돼 있는 공업시설이 미 공군기의 폭격 위협에 노출돼 있다는 점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공업의 반 이상이 둥베이지역에 있고, 둥베이지역 공업설비의 반 이상이 남쪽지역―즉 이른바 南滿洲지역에 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1950년 8월 27일부터 10월 23일까지 약 두 달 사이 미군기가 12차례나 중국영공을 침범했었고, 최근에는 압록강뿐만 아니라 그 대안인 관디엔(寬甸)까지 날아와 시위, 정찰, 기총소사와 폭격을 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저우언라이는 이 같은 대중 선동적인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면서 미 지상군이 압록강변에 도달하면 어떻게 안전하게 생산에 종사할 수 있겠는가라고 강하게 반문했다.

  

그런데 미군의 북진을 저지해서 설령 둥베이의 공업지대를 보호한다 하더라도 전력공급원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공장 가동률이 떨어질 수 있었다. 1949년 당시 중국전체 발전량은 43억 1,000만kwh로 1941년도 생산량 59억 5,000만kwh의 72.3%에 불과했다. 둥베이지역에는 과거 일제가 2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 시설한 송화(松花)강 상류의 지린성 지린시 동남쪽의 小豊滿수력발전소, 압록강 중류의 水豊수력발전소와 우쑨, 번시, 취신(阜新) 등의 화력발전소가 있었다. 1944년에 완공된 후 1950년 중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소련전문가들로부터 한 차례 대대적 보수를 받은 바 있는 小豊滿 수력발전소는 연 56만kwh의 전력을 생산해 둥베이의 북방지역 전역에 전력을 공급했다.

  

상기 발전소들의 전체 용량은 180만kwh였으며, 연 발전량은 50억kwh였다. 여기서 생산된 전력은 둥베이 각지의 총 1만여㎞에 달하는 22만 볼트의 고압선을 통해 주요 공업지대에 공급됐다. 본고에서 필요로 하는 1950년도의 둥베이지역 발전량에 관한 통계는 자세하지 않다. 중국정부의 한 통계에 따르면, 1952년도 둥베이지역 발전량은 전국 전체 발전량 72억 6,000만kwh 중 29억 5,000만kwh로서 3분의 1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 전력량으로는 전체 둥베이 3성의 수요량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상기 발전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수풍댐은 압록강 하구의 신의주에서 북동쪽으로 대략 50㎞떨어진 압록강 중류에 자리 잡고 있다. 수풍발전소는 일본이 1937년 시공에 착수한 후 1943년부터 발전을 시작한 것으로서 당시 “동양에서 두 번째로 큰 대형” 발전소였지만 누수가 심했고, 전력의 질도 형편없었다. 또 1948년에 발생한 대홍수로 심하게 손상당한 바도 있었다.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수풍발전소는 1948년 3월 중국이 접수해 소련 기술자들의 지원을 받아 전력생산 뿐만 아니라 홍수에 대비한 다목적용 발전소로 건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댐의 소유권은 북한에 있었다.

 

한때 댐 재건공사 과정에서 댐이 생산한 전력의 배분문제로 중국과 북한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지만 1949년 소련의 중재로 해결됐는데, 북한이 둥베이지역의 공업시설에 잉여전력을 공급하는 대신 중국은 댐 건설 공사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1950년 6.25전쟁 초기 수풍발전소의 발전량에 관한 정확한 통계자료를 입수하지 못한 관계로 수풍발전소의 발전량과 그로부터 공급받는 지역의 전력 총량을 정확하게 산출해낼 수 없다. 이 발전소는 원래 총용량 63만kwh로 설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최대 발전량도 이 이상은 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북한이 일정한 혹은 잉여전력을 공급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중국의 선양-다롄 간 철도 이동의 좡허(庄河), 안둥(安東)〔현 단둥(丹東)〕, 린장(臨江), 칭위앤(淸原)과 선양 서남쪽의 랴오중(遼中) 등지의 남만주 지역 일대 공업시설의 동력은 수풍발전소에서 공급받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둥베이 3성 중 주요 공업설비는 주로 랴오닝성에 집중돼 있는 가운데 상기 남만주 지역은 랴오닝성의 절반 이상에 해당됐기 때문에 수풍발전소는 상당한 전력을 생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풍발전소가 남만주 지역의 전체 전기수요량 중 상당부분 혹은 전부를 만족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은 둥베이지역 공업시설의 주요 기반이자 그것의 지속적 가동에 필수적인 전력공급원임과 동시에 중요한 전략 목표물로 상정됐을 수 있고, 중국으로선 그것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려면 압록강의 수풍댐과 발전소를 수중에 넣고 있어야 한다. 이 점은 실제로 마오쩌둥이 파병출동 직전 시점인 1950년 10월 13일 중국이 개입하지 않을 경우 “둥베이지방이 더욱 불리해져 둥베이변방군 전부가 발이 묶이고, 남만주 지역의 電力이 통제돼 버릴 것”이라고 우려한 사실에서 증명된다.

 

마오쩌둥은 수풍댐과 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해 당연히 참전해야 하며, 반드시 참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참전하면 이익은 대단히 크지만,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지극히 클 것”이라는 판단 하에 군대를 파병했던 것이다. 이것은 전쟁 당시 남한사회 내에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던 중공의 참전이유들에 대한 추측성 풍문을 사실로 입증한 셈이다. 당시 항간에는 자국 영토에 대한 미국의 위협을 느낀 중국이 막연히 북한침략자를 도우기 위해 막대한 인명희생과 물자를 소모했을 리가 없다면서 압록강의 수풍댐을 북한과 공동으로 방어하기 위해 개입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설이 나돌았었다.

  

마오쩌둥이 중국군 주력을 두만강 방향으로 진입시키지 않고 압록강 중하류로 진입시켜 평안북도지역을 주 전장으로 삼은 배경도 수풍댐 보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이 점을 포함한 여타 이유를 종합하면 대략 다음 네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미군 주력이 이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상황에서 그들이 압록강변에서 진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 중국으로 진입한다면 이 지역의 북중 간 교량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점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북중간에는 수로를 통한 도진이 몇 개소 있었지만 군사적으로 활용하기에는 모두 규모가 작았다. 1950년 당시 북한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다리로서 대량의 군대가 이동할 수 있을 만큼 비교적 규모가 큰 것으로는 함경북도의 穩城-투먼(圖門), 穩城-훈춘(琿春), 鐘城-룽징춘(龍井村) 간의 다리와 평안북도의 신의주-안둥, 만포진-지안(輯安) 간의 교량을 합쳐 다섯 개 정도가 있었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의 핵심지로 들어갈 경우 두만강 쪽 다리들 보다 바로 압록강변의 다리를 건너는 편이 더 빨랐다. 요컨대 한반도와 베이징간의 첩경이었던 셈이다. 중국 지도부가 참전하기 전 둥베이변방군의 전진 지휘소를 압록강 대안의 단둥에 설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둘째, 중국인민해방군 둥베이군구의 후방 근거지가 선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인데다, 선양에서 두만강 쪽으로 통하는 철도도 북쪽으로 우회해야 하기 때문에 이 루트로는 대규모 군 병력의 신속한 전개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셋째, 마오쩌둥은 중국군을 평안북도 일대 북중간의 주요 교통로에 매복시켜 미군을 격파하고, 이 지역 북단의 전략적 목표물인 수풍댐을 보호하려고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미군의 주력이 이 지역으로 진격해올 것을 상정했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즉 1950년 8월 9일 저우언라이와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대리 니에룽쩐(聶榮臻)이 연명으로 둥베이군구 사령관 가오강(高崗)과 허진녠(賀晉年)에게 전보로 중공 중앙이 옌지(延吉), 투먼 지역에는 큰 敵情이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하고 있으니 이 지역에 대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없고, 단지 둥베이군구가 예하 병력을 파견해 이 지역의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들은 또 차이청원(柴成文), 니에웨이팅(倪蔚庭)에게 이 사실을 김일성에게도 전하도록 지시했다.

  

넷째, 중소 양국이 동맹을 맺은 이상 소련이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소련군이 개입해올 경우 중국둥베이지역이 그들의 후방 주둔지가 되지 않도록 소련군을 두만강 지역으로 들어오게끔 유도하기 위해서 두만강 지역을 비워뒀을 수 있다.

 

지금까지 제3장과 제4장에 걸쳐 논구한 사항을 종합 정리하면, 중국의 참전 동기 혹은 목표는 첫째, 생사기로에 선 북한정권의 구원, 둘째, 향후 부딪히게 될 국내의 몇 가지 국가재건에 불리한 국면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점, 셋째, 둥베이지역과 수풍댐의 동시 보호 등 세 가지로 큰 가닥을 잡을 수 있다.

 

미국의 중국둥베이지역 공격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상태에서 국가안보와 근대적 공업시설 및 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라는 국가중대사를 책임져야할 마오쩌둥의 입장에선 이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참전개입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또 참전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그는 지도급 당원들에게 파병의 불가피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파병 쪽으로 당 내외 여론을 몰고 갔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당원들에게 파병의 불가피성과 필요성을 강조하고 역설한다 해도 그것만으로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전쟁을 벌일 순 없었다. 개입 후 예상되는 상황전개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미군을 물리치고 승리할 가능성을 미리 치밀하게 따져봐야 했다. 그리고 승산이 높다고 판단됐다면 그 다음으로 참전에 미온적인 지도급 당 간부들을 납득시켜야 할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따라서 중국수뇌부는 먼저 참전을 목적으로 자국군대를 한반도에 진입시키면 다음과 같은 상황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예상하고 검토한 후 대책을 마련했다.

  

첫째, 미국의 핵무기 사용을 포함해 전면전 또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가능성에 관해서였다. 이 점은 당시 중국 전역의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던 화제였다.

 

둘째,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미국이 중국 화둥지역의 연해 지역과 둥베이지역의 중공업 및 군사시설에 대해서 폭격을 가할 것인가라는 점이었다.

 

셋째, 대륙반격의 기회를 노려온 장졔스의 중국국민당군이 화중, 화둥지역으로 상륙해 반격하거나 혹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한반도 북단으로 공격해올 가능성이다. 이 보다 이른 1950년 8월 25일 시점에 마오쩌둥은 이미 타이완의 중국국민당군이 대륙해안을 습격해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넷째, 중국국민당과 연계돼 각지에 잔존하고 있는 ‘반혁명분자’들의 준동이 격심해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다섯째, 전쟁이 한반도에 제한된다 하더라도 미국과 장기전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렇게 되면 막대한 인력희생이 뒤따를 뿐만 아니라 다대한 물자도 소요될 것이기 때문에 경제재건은 요원해질 수 있다.

 

여섯째, 소련이 중소동맹조약에 근거해 참전할 경우 소련군은 중국둥베이지역에 주둔할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전쟁이 장기화되면 중국의 대소의존도가 심화돼 중국에 대한 소련의 간섭이 예상된다는 점이었다.

  

당내 다수를 차지한 참전 반대자들이 제기한 반대논리의 핵심도 이러한 점들에 대한 우려에 다름 아니었다. 즉 정권이 수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경제건설이 더 시급한 시점에 대외 전쟁, 특히 강대국인 미국과의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또 장기간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휴식을 취해 원기를 기를 필요가 있고, 건국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게 좋다는 주장도 있었다. 미군이 둥베이지역으로 공격해들어 올 경우 상기 국가과제 수행에 차질을 초래할 예상 가능한 사태를 미연에 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곤차로프는 마오쩌둥의 몇 가지 참전동기 가운데 소련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포함돼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곤차로프의 주장대로 마오쩌둥의 유도에 따른 결과가 되든, 아니면 소련이 자체적 판단에 따라 참전하게 되든, 어쨌든 마오쩌둥은 소련군의 개입을 예상해봤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소련군이 개입하더라도 중국으로 들어오게 해선 안 될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는 소련이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 중국이 아니라 북한으로 진주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요인들을 종합해 봤을 때 마오쩌둥은 미군이 압록강까지 도달하기 전에 먼저 전진방어 지역을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의 북진행로의 목진지 매복을 통해 적에게 중대한 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 전술은 지정학에서 자국영토를 이중으로 보호할 수 있는 개념을 가리키는 글라시스(glacis)에 해당된다.

 

글라시스는 원래 국경으로 쓰이는 산이나 산맥의 정상 바로 너머에 자국 방어를 위해 확보해놓은 땅을 가리킨다. 한 국가가 외침에 직면했을 때 국경 안쪽에서 방어전을 치를 경우 자칫하면 쉽게 국경돌파를 당할 수 있으므로 국경너머 어느 정도의 폭을 지닌 땅을 확보하여 그곳에서 방어전을 치르면 자국영토를 이중으로 보호(double projection)할 수 있는데, 이 지역을 글라시스라고 칭하고, 또 이 같은 방어전술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오쩌둥은 전략적인 견지에서 이 같은 선제공격의 감행을 통한 “적극적 방어”(active defence)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군사적 고려 외에 마오쩌둥은 상기 국가과제들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전쟁을 통해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즉 전쟁에 무력 개입함으로써 중국사회를 지속적인 긴장상태로 있게 하는 한편, ‘미국위협론’을 이용해 군중동원체제로 몰아가 군중들을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투입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쑨즈(孫子)의 “以兵嘗敵” 개념을 원용하듯 외부의 위협을 이용해 국민들의 중화주의적 의식을 일깨워 그들을 사회주의 국가체제로의 변혁을 위한 기반구축에 동원하고,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에 걸맞는 국민으로 통합해 나가겠다는 구상이었다.

  

말하자면 마오쩌둥은 자신이 구상한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외부에 적을 만들어 위협을 조장함으로써 내부의 단결을 도모하거나 혹은 민중동원을 용이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전쟁에 개입한 후부터 즉시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각종 군중대회를 전국적으로 끊임없이 개최해 비행기 등 무기구입 비용뿐만 아니라 군량미 등의 군수품 구입비용까지 거출하도록 유도해 방대한 양의 “헌납”을 거둬들였다.  

 

Ⅴ. 맺는 말

 

신 중국의 국가대권을 장악한 후 국익을 우선시하는 현실주의자로 입장을 바꾼 마오쩌둥은 주변국의 존재기능에 대해서 과거 역대 중국왕조들이 중시해온 중국인 특유의 지정학적 안보관, 즉 이른바 ‘순망치한’관계로 인식했다. 그것은 청대에 본격화된 보편 중국인들의 대한반도 인식과 중국 정치문화가 반영된 결과였다. 즉 현대의 중국국민당과 중공 지도자들에게까지 계승된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그러한 순망치한의 관점에서 북한에 반미적이면서 친중국적 정권을 존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중국지도부가 6.25전쟁 전부터 여러 차례 한적사병들과 친중공적 간부들을 북한으로 들여보낸 것은 김일성의 요청에 편승해 그들로 하여금 북한정권내에 친중국적 정치세력을 형성시키려는 의지의 표출이었고, 동시에 그것은 전통중국의 대한반도 순망치한 관계의 현대적 변용이었다.

  

전후 미국의 중국 재진출을 늘 우려해온 마오쩌둥은 실제 6.25전쟁 발발 직후 미국이 즉각 군대를 한반도에 투입시킴과 동시에 미 제7함대를 타이완해협으로 급파시키자 미국의 한반도전쟁개입을 한반도의 정치 군사적 통일에 그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중국공격에 있고, 이 조치를 통해 한반도와 타이완 대안의 화둥연해 지역으로 재진출하려는 의도로 파악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수 개 군단 기십만 명의 병력을 수차례에 걸쳐 북한의 서북지역에 투입시켰다. 중국군의 개입은 6.25전쟁의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고, 중국과 미국이 주요 전쟁 당사자가 된 국제전 성격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마오쩌둥이 6.25전쟁 개입을 결정하게 된 복합적인 제 동기 가운데 지정학적 측면을 추출하면 크게 두 가지로 가닥을 잡을 수 있다. 첫째, 풍전등화에 처한 북한정권의 붕괴를 막기 위한 목적이다. 둘째는 자국내 전장화를 막기 위한 국외 전장화 조성 동기다.

 

전자에는 국가 안보적 측면에서 자국안보의 확실성을 높여줄 완충지역으로서 북한정권을 유지시키고, 둥베이지역 및 압록강의 수풍댐과 발전소를 보호하려는 국가이익상의 전략적 목표가 설정돼 있었다. 후자에는 예상되는 소련군의 중국 둥베이지역 진주 및 주둔 가능성의 사전 차단, 그리고 전쟁이 자국내로 확대됐을 경우 맞닥뜨릴 몇 가지 위험한 국면을 피하기 위한 의도가 내재돼 있었다.

  

상기 첫 번째 동기와 관련해서 마오쩌둥에게 미군의 북중 국경 접근은 곧 자국의 안보를 보장해주는 국경너머 완충지대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심각한 안보위협이었다. 중국둥베이지역은 수도 베이징과 화베이지역의 안전에 직결되는 전략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에 남겨진 근대 공업시설 가운데 태반이 집중된 지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중국의 전략적 중핵지역을 방어하려면 그 주변을 방어해야한다는 순망치한의 관점에서 먼저 둥베이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둥베이지역의 주변지역인 북한의 공산정권을 유지시켜야 했다. 북한은 중국의 국방을 담보해주는 전초기지 혹은 전진기지였다. 마오쩌둥의 군사개입은 김일성정권이 무너질 경우 예상되는 북한정권 지도부의 망명, 북한군과 주민들의 대량 유입 등 중국정부에 가져다 줄 정치적 부담을 미연에 막아보겠다는 사전 예방차원의 조치였다. 동시에 신 중국의 경제복구에 기반이 될 둥베이지역의 공업시설을 보호하고, 또 그것의 지속적 가동에 필수적인 전력공급원인 압록강의 수풍댐과 발전소를 보호하려고 개입한 것이다.

  

두 번째 동기와 관련해서 마오쩌둥은 소련이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 소련군을 중국이 아니라 북한으로 진주하도록 유도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러일전쟁, 대일항전 말기 군대를 중국내로 진주시킨 소련이 약정을 어기고 철군을 지연시킴으로써 양국관계의 갈등원인이 됐던 역사적 전례에 비추어 볼 때,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중소동맹에 따라 전쟁에 개입할 경우, 그것은 독립주권 국가를 건설하려는 자신의 국가정책 목표와 존엄에 흠집을 낼뿐만 아니라 또 다시 소련의 압력을 받게 돼 국가의 주권이 침식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미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변경을 넘어 중국둥베이지역으로 진격해올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 예컨대 대륙 반격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던 장졔스 군대의 개입과 대륙공격, 그리고 이에 촉발되고 연계될 대륙 각지의 국민당 저항세력들의 각종 반공활동이 힘을 받게 될 상황과 또한 토비들을 포함해 각지에서 토지개혁에 반대하면서 이념적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던 반혁명세력의 반정부 투쟁이 정치 세력화될 계기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나아가 반미 제국주의전쟁이라는 ‘위기상황’을 명분으로 동원체제로 유도하면서 신 중국의 정치적 과제들을 적극 추진해가고자 한 복안도 깔려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가 전제돼 있었다.

 

첫째, 미국의 한반도 개입의 최종 목적이 한반도 의 정치 군사적 통일에 있는 게 아니라 중국의 재진출에 있다고 저의를 의심한 상태에서 최소한 기정사실화된 미군의 북진은 한중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의 조우를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판단이었다.

 

둘째, 미국이 중소동맹조약에 근거한 소련의 전면 개입을 우려해 전쟁을 더 이상 전 중국으로 확대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믿음이었다. 그가 미군이 중국둥베이지역을 진격할 것이라고 강조한 사실과 모순된 이 믿음은 국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염두에 두고 정치 선전화 하고자 한 동기와 관련이 있었다. 국내정치적 목적이란 경제복구, 토지개혁, 국민당 잔당 소탕, 토비토벌, 타이완 해방점령 등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정치적, 영토적 통일이 시급한 과제를 눈앞에 두고 오랜 기간의 내전에서 막 벗어나려는 찰나에 또 다른 전쟁, 그것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의 승산없는 전쟁은 피해야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중국의 안전과 상기 국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북한이라는 ‘입술’을 존치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쟁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 더 실효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국가안보를 위해 군사개입이 불가피하다면 전장은 중국 영토내가 아니라 국외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군의 둥베이 진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차라리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군사 개입함으로써 승기를 잡겠다는 전략을 취했다.

 

이를 위해서 미군이 압록강에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전진방어 지역을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의 북진 행로의 목진지 매복을 통해 적에게 중대한 타격을 가하겠다는 의도에서 현지방어가 아닌 전진방어를 위한 선제공격전략을, 나아가 자국영토를 이중으로 보호할 수 있는 국외 전장화 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위 논문은「지정학적 관점에서 본 毛澤東의 6·25전쟁 개입동기」, 한국해양전략연구소,『STRATEGY 21』, Summer 2007, Vol.10 No.1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