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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실, 새로운 관점 : 毛澤東의 6.25전쟁 동의과정과 동의의 의미 재검토

雲靜, 仰天 2012. 10. 18. 18:05

 

새로운 사실, 새로운 관점 : 毛澤東의 6.25전쟁 동의과정과 동의의 의미 재검토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목차

 

Ⅰ. 문제 제기

Ⅱ. 침묵 속의 원론적 지지

Ⅲ. 소외에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권자로

Ⅳ. 원론적 지지에서 ‘동의할 바엔 실제 행위’로

Ⅴ. 毛澤東은 ‘공모’하지 않았는가?

Ⅵ. 동의의 의미 및 동기

Ⅶ. 맺는 말 

 

 

Ⅰ. 문제 제기

 

6.25전쟁 발발의 원인과 관련해 현재 학계에서는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이 김일성의 남침승인요청을 들어준 사실과 그가 동의한 동기에 관한 한 거의 실상이라고 판단될 정도로 윤곽이 잡힌 상태다. 각국의 많은 연구자들이 오랫동안 6.25전쟁 발발의 원인과 배경에 주목해온 결과다.

 

그리하여 6.25전쟁 발발요인 가운데 다음 두 가지는 뒤집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됐다. 하나는 6.25전쟁 개시 불과 3개월 전 스탈린이 그 때까지 줄곧 시기상조라고 억제해왔던 자신의 입장을 바꿔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호출해 毛澤東의 동의를 얻으면 대남 침략전쟁을 개시해도 좋다는 조건부 동의의사를 표명한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毛澤東이 스탈린의 이 조건을 충족시켜줌으로써 비로소 김일성이 전쟁을 도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毛澤東이 김일성의 남침전쟁도발에 동의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毛澤東은 아예 남침전쟁을 반대했다거나 혹은 동의한 바가 없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동시에 毛澤東이 동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동의는 스탈린의 압력을 받았었거나 혹은 소련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던 처지로 인한 부득이한 결정이었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문제는 상기 두 가지 주장들이 모두 재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전자의 주장은 실제 사실에 부합하지 않고, 후자의 주장은 毛澤東이 기왕에 체결된 중소동맹을 원만하게 작동하게 만들 심산으로 스탈린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동의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불가피성의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毛澤東은 왜 스탈린의 요청을 외면하지 못했으며, 소련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었으며, 이에 관한 毛澤東의 입장과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들이 명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차제에 학계 일각에서 6.25전쟁 발발의 원인을 구명하기 위해 고안된 이른바 “롤백전략”(rollback strategy)과 “蘇滿유인론” 등의 해석의 틀도 6.25전쟁의 발발원인을 스탈린의 의도에만 국한할 게 아니라 김일성의 남침의지는 물론 毛澤東의 동기까지 포함해서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새로이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롤백전략”과 “蘇滿유인론”은 공히 스탈린의 의지와 동기의 규명에 초점을 맞춘 해석의 틀이다.

 

‘롤백이론’을 6.25전쟁 발발의 결정요인으로 보면서 이 전쟁의 발생과 기원을 밝혀내려고 시도한 김영호의 주장에 따르면, 스탈린이 미국과의 냉전대결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기 위해 중국혁명 이후 새롭게 재편된 아시아의 전략적 상황과 북한지도부의 무력통일론을 이용하여 남한을 미국세력권에서 제거하려고 시도한 게 6.25전쟁의 발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롤백전략”으로 김일성을 앞세워 전쟁을 도발한 뒤 미군이 개입할 경우 이에 대항할 중국군을 투입시키고, 중국군 투입으로도 여의치 않을 경우 마지막으로 미군을 소련 극동지역에서부터 중국의 ‘滿洲’, 즉 동북지역을 연하는 광활한 전략적 지대로 유인해 패퇴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미국 역시 이 같은 스탈린의 롤백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38도선을 넘어 북한을 소련세력권으로부터 탈리시키기 위해 역 롤백을 추구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앞서 지적했듯이 6.25전쟁의 발발은 스탈린의 승인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毛澤東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 점에서 毛澤東의 동의는 남침의 필수 조건이었고, 오히려 스탈린의 승인 보다 더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렇다면 “롤백전략”이 6.25전쟁발발의 원인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이 되려면 스탈린의 의도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요청에 동의한 毛澤東의 동기까지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점은 곧 “롤백전략”이 과연 스탈린의 요청에 동의한 毛澤東의 동기를 해명하는 데에도 적용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롤백전략 개념은 6.25전쟁을 동의한 스탈린의 의도와 동기 및 목적을 규명하는데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6.25전쟁을 발동시킨 또 다른 한쪽 주체였던 毛澤東의 동기와 전략적 목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게 된 결과를 낳음으로써 전쟁발발의 원인을 전일적으로 규명하는 데는 한계성을 지닌다. 따라서 “롤백 전략”, “중국군 투입”, “蘇滿유인론” 등은 공히 스탈린이 구상한 단계별 전략으로 보는 것에는 수긍할 수 있지만, 毛澤東이 스탈린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것인가 하는 점은 별개의 사안으로 새로이 규명돼야 할 문제다.

  

물론 毛澤東이 구중심처와 같은 스탈린의 롤백전략의 구사, 중국군 투입, 蘇滿유인론이라는 3단계 전략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스탈린의 말 한마디에 중대한 국가대사인 대외전쟁 개입 요청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지도자였을까 하는 점은 의심해볼 문제다. 毛澤東은 스탈린의 결정에 단순히 피동적으로 끌려들어 갔을 뿐인가? 건국 후 자국안보에 직결된 최대의 고빗사위에서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이익과 자구책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크레믈린의 요청에만 응했을까?

  

만약 毛澤東이 스탈린의 전략적 틀과 별개로 소련의 이익과 배치되는 자신의 독자적인 입장과 전략적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면 스탈린의 구상은 일방적인 혼자만의 생각으로 그치고 말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스탈린이 3단계의 중층적이자 축차적 전략의 틀 속으로 자신을 끌어 들이려고 한 상황이었음에도 毛澤東은 거부하거나 크게 반발하지 않고 동의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역사는 스탈린의 의도대로 전개됐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실현 가능해졌는가? 毛澤東은 어떤 입장이었기에 스탈린의 요청을 강력하게 거부하지 못했는가? 毛澤東이 표시한 동의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본고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믿는 바로 인해서 더 배울 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고 만다”는 클라우드 베르나르드(Claude Bernard)의 명언을 상기하면서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는 바, 즉 毛澤東이 김일성의 대남침략전쟁을 동의한 과정을 다시 한번 촘촘히 검토하면서 상기 의문들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Ⅱ. 침묵 속의 원론적 지지

 

毛澤東은 중국대륙의 석권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전인 1949년 이전까지만 해도 김일성정권이 준비해오던 대남침략전쟁에 대해 대외적으로는 지지를 표명한 바 없다. 1946년 국공내전이 본격화 된 이후부터 계속된 국민당군의 공격에 대한 대응과 활로모색에 급급한 나머지 국외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북한정권이 이념적 동질성과 안보라는 측면에서 국공내전 초기 국민당에 쫒기는 수세에 처한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으로 약칭)에게 병력과 대국민당 전투에 필요한 전쟁물자 지원, 부상병 후송에 필요한 후방기지로서의 편의를 제공하는 등 군사적으로 원조했다.

  

이 지원은 이념적 지지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경의 안전이라는 안보적 측면과 깊이 결부돼 있었다. 김일성이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의 한 연설에서 강조한 바 있듯이 중공으로 하여금 ‘중국’의 국가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김일성은 “미국반동파들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현대적 무기로 장비된 수십만의 무력”이 “바다와 육지, 공중으로부터 동시에 중국 동북지방에 들이밀 태세를 보이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그들의 작전적 기도가 실현되면 앞으로 국민당군대가 우리나라 북부국경지대와 접한 지대에까지 진출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북부국경지대에서도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제기될 수 있”으므로 국민당군이 북한국경지역 경계를 침범할 수 없도록 “국경을 튼튼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국공 양당 중 누가 ‘중국’의 주인이 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안전도 영향을 받게 되듯이 중국’과 한반도 간의 상호 脣齒관계에서 파생되는 ‘중국’의 안전도 각기 배타적 통일을 지향하고 있는 남북의 정치세력 가운데 어느 쪽이 한반도를 통일하느냐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반공을 강력하게 표방하면서 蔣介石을 동북아에서의 반공의 협력자로 삼으려고 한 이승만이 북한을 손에 넣을 경우 그것은 중공에게 동북지역이 직접 이념과 체제가 다른 국가와 맞닿을 수 있는 위협이었다.

 

북한과 중공이 ‘脣亡齒寒’의 관계에 있듯이 남한과 중화민국도 순치관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승만이 ‘중국’을 공산주의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蔣介石의 국민정부를 지지한 것도 역시 이러한 요인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에 더하여 자신이 공산혁명을 추구한 이상 구조적으로 毛澤東은 동일한 이념을 표방하면서 한반도의 공산적화를 모색하는 김일성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돼 있었다.

   

그러나 毛澤東은 국내 국공투쟁이 종결되지 않은 1949년 10월 이전까지는 원론적 지지에 머물렀다. 김일성이 특사를 통해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 의사를 전하고 그에 상응하는 지원을 요청했지만 毛澤東은 지지를 표하면서도 여전히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었다. 북한단독의 대남침략은 군사적으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毛澤東이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그가 중공군 계열의 한인부대를 북한에 넘겨준 점으로 보아 북한의 군사력이 불비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모스크바의 스탈린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나설 이유도 없었던데다 급박하게 돌아가던 자국내 정치, 군사상황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어 毛澤東은 한반도문제에 관심을 가질 상황이 아니었다.

   

毛澤東이 국내문제에 “올인” 하고 있을 즈음, 한반도 남침문제는 스탈린과 김일성 사이에 논의되고 있었다. 김일성은 대략 1949년 1월 북한노동당 차원에서 남침을 결정했지만 북한 단독으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3월 초 전격적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에게 한반도적화를 위한 무력도발을 승낙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남침불가를 분명히 했다.

 

첫째, 북한인민군의 군사력은 아직 속전속결로 남한군을 손쉽게 제압할 정도가 아니다. 둘째,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이 반드시 개입할 것이며, 셋째, 또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38도선 분할에 관한 협정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세 가지 장애가 사라지는 환경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한 무력도발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스탈린이 남침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또 김일성을 강력하게 제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북한이 먼저 선제공격을 감행할 게 아니라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한의 군사공격이 있으면 그때 가서 ‘정의의 반격전쟁’이라는 명분으로 남침해야 한다고 했다. 즉 북한이 남침을 개시해도 좋을 만큼 국제환경이 변화할 때까지 군사준비를 충실히 하면서 기다릴 것을 권유했는데, 이른바 “준비대기론”을 지시한 것이다.

 

이 시기는 1948년 하반기 남북한 단일정부 수립이 좌절됨에 따라 남북에 각기 독자적인 적대 정권이 수립된데 이어 중국에도 北平과 중화민국의 수도 南京이 각기 1949년 1월과 4월 중공군에게 점령당한데 이어 국민당군이 長江 이남으로 패퇴하기 시작하는 등 동북아 지역의 정치, 군사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자신이 毛澤東에게 패퇴중인 국민당군을 더 이상 추격하지 말고 蔣介石과 연합정부를 수립할 것을 종용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이상 이러한 동북아의 정치, 군사정세의 변화는 스탈린의 전략변화를 이끌어낼 만한 결정적인 “환경변화”가 아니었다.

   

한편 중국대륙의 적화가 코앞에 다가오자 공산화의 다음 차례는 한반도이고, 그 주역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김일성은 자신의 전쟁도발 계획이 스탈린의 “권유”에 떠밀려 기약 없게 되자 눈을 돌려 이번에는 毛澤東의 의향을 타진했다. 그는 1949년 4월 하순 자신의 복심인 김일을 北平에 보내 毛澤東에게 “아시아 정보국”, 즉 “아시아 공산당, 노동당 코민포름”을 창설할 것을 제안함과 동시에 남침전쟁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일성의 이 요청은 남침전쟁을 공산진영 대 자유민주진영의 대결구도로 몰고 가려는 저의로 판단된다.

  

이 자리에서 毛澤東은 두 가지로 응대했다. 먼저 ‘아시아 공산당, 노동당 코민포름’ 결성건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조직을 결성하게 되면 미국, 일본 등에게 군사동맹으로 오인 받게 될 것을 염려해 먼저 “아시아의 공산국가”들과 관계를 트고 충분한 정세파악과 연구를 거친 뒤에 결성하는 게 좋다고 했다.

 

毛澤東은 그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시아 국가의 공산당 가운데 아시아 정보국 창설을 거론한 서신을 보내준 곳은 북한을 포함해 미얀마, 말레이시아, 베트남의 인도차이나공산당 등 4개 공산당뿐이며, 또 중공이 아시아 12개 국가들 가운데 연락을 취하고 있는 국가는 북한, 몽골, 태국, 인도차이나, 필리핀 등 겨우 5개국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밖의 일본, 인도네시아 등과는 연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정세도 알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이란 당연히 일본공산당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남침전쟁 지지요청에 대해서는 ‘민족혁명’,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이념적 측면에서 원론적으로 동의했다. 毛澤東은 일본군과 미군의 참전을 우려하면서도 중공군이 참전 가능한 상황, 즉 현재 국민당군이 저항하고 있는 중국남부지역과 臺灣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상황이 도래하면 설령 맥아더가 발 빠르게 일본군 혹은 미군병력을 남한으로 이동시켜 참전한다고 해도 그 때에는 중공 역시 충분히 정예부대를 파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로써 毛澤東은 결국 장차 중공군을 투입시킬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된 셈이다.

  

한반도적화를 위한 군사준비 차원에서 최소한 중공군 소속 한인병력의 북한귀환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십분 이해한 毛澤東은 김일성의 요청에 응해 1949년 7월부터 순차적으로 이들이 골간을 이룬 동북군구 소속 제164사단과 제166사단을 북한으로 인계해주면서 북한군의 군사력 증강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공내전을 통해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은 자들로서 최소 총 3만 5,000명 이상이었고, 북한군 제5사단과 제6사단으로 편제된 후 대남 군사공격의 주력이 됐다.

 

이때부터 시작된 한인병력의 북한이송은 전쟁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초까지 최소 9차에 걸쳐 이루어졌고, 총병력은 적어도 5만 명 이상이었다. 바꿔 말하면 毛澤東은 한인병력을 대거 북한에 넘겨줌으로써 이 시기부터 북한의 한반도 적화통일전쟁의 주요 동력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毛澤東은 공산국가들간의 상호지원을 규정한 국제주의이념에 토대를 둔 원론적 지지와 한인병력의 북한인계 이외에는 더 이상 한반도문제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다. 1949년 10월 신중국을 수립하고 최고 지도자로 등극한 이상 그에게 시급한 국가적 현안들―국민당잔당 소탕, 臺灣해방, 경제재건, 국가통합, 소련과의 관계재정립을 통한 국가안보 확립, 제국주의 잔재 청산을 통한 주권국가로서의 위상 재정립 등과 같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어 국외 전쟁문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제들의 해결에 필수불가결한 소련의 지원을 얻고, 양국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毛澤東은 1949년 12월 중순 모스크바를 방문, 결사적으로 스탈린을 압박한 끝에 스탈린과 蔣介石이 1945년 8월 14일 체결한 ‘中蘇友好同盟調約’(이하 조약 체결 당사자인 소련을 기준으로 편의상 이를 ‘구중소동맹’으로 칭함)을 대체할 새로운 ‘中蘇友好同盟互助條約’(이하 편의상 이를 ‘신중소동맹’으로 칭함)의 체결을 이끌어 냈다.

 

 

1949년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毛澤東이 소련 측의 영접을 받고 있다.

 

이 조약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공동대항을 목적으로 의기투합된 군사동맹이었지만 군사, 외교적 차원을 넘어 경제, 이념 등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중국을 지원하거나 혹은 중국의 국격을 높여줄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毛澤東은 모스크바 체류시 스탈린과 한반도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판단을 뒷받침하는 것은 회담의 성격과 그들이 대담을 나눈 주제다. 즉 중소동맹체결을 전제로 세계적 차원의 공산주의운동이라는 관점에서 그 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제국주의”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라는 방안 모색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 회합에서 거론된 주제는 중국, 몽골, 한반도,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 등 포괄적이었지만 특히 臺灣‘해방’과 한반도와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문제가 주된 의제였다.

  

미국의 동북아(구체적으로는 중국) 재진입과 일본의 재기를 염두에 둔 그들에게 한반도는 곧 중국의 안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동시에 소련의 안보에도 직결돼 있는 지역이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정권에 군사지원을 지속해오고 있으며, 드러내 놓지는 않았지만 목하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동북아전략을 시도하고자 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실제 스탈린 스스로 毛澤東과의 회담에서 “북한의 군사력 강화와 방위력 증강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원조, 할 수 있는 원조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했다”고 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毛澤東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프랑스 ‘제국주의’를 몰아낼 목적으로 북베트남의 호치민(Ho Chi Minh)정권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와 계획까지 스탈린에게 고지했다. 이에 대해 스탈린도 세계전략 차원에서 독일을 둘러싼 유럽에서의 대미관계를 감안해 북베트남을 승인하겠다는 지지의사를 피력했다. 중국인들에게 베트남 역시 청대 이후 전통적으로 중국 중핵지역의 안전을 담보해주는 脣亡齒寒 관계의 외벽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이 지역이 공산화되거나 친중공적이 되면 유익하다. 한반도가 중국동북지역으로 들어오는 외세의 위협을 일차적으로 막아주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듯이 베트남도 중국남부로부터의 위협을 막아줄 완충국가(buffer state)인 것이다.

 

세계공산주의운동에서 각기 동서방을 대표하는 두 거물이 미국에 대항하는 군사전략적 구도와 수단을 논하고, 중소동맹체결로 미국에 공동 대항하는 이념적 결의를 다지는 자리에서 한반도를 대미 투쟁의 장으로 설정하면서 한반도문제를 논의에서 제외시키기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1949년 12월 중순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함께 세계정세, 동아시아 관계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면서 한반도도 거론했다. 사진은 두 지도자가 소련 각료들과 함께 한 장면

 

특히 스탈린이 한반도를 축으로 암중모색을 하고 있는 고빗사위 같은 중요한 시점에 내심 남침도발에 대한 김일성의 동의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자신의 동북아전략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그 성패와 직접 결부돼 있는 毛澤東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남침문제가 거론돼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한반도문제 언급시 북한의 전쟁발동문제가 간접적으로라도 언급되거나, 혹은 암시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논의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대남 무력침략 계획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고, 단지 한반도 전체가 사회주의권으로 편입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우회적 방식으로 김일성의 한반도적화 통일을 지지하는 원칙적 입장을 표명하면서 毛澤東의 반응 내지 의향을 타진해봤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점은 당시 毛澤東과 스탈린 사이에 오고간 의사전달 방식을 알고 나면 수긍이 간다.

 

毛澤東은 소련을 새로운 국가건설에 본받아야 할 모델로 삼으면서 경제, 외교, 군사, 과학기술, 사회주의 문화건설 등 여러 방면에서 스탈린의 지원을 요청하는 입장이었고, 스탈린 역시 중국혁명을 성공시킨 毛澤東에 대해 과거처럼 고압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毛澤東의 모스크바 방문 전 주고받은 서한이나 모스크바에서 나눈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그들은 상대를 거슬리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표현을 썼다.

 

중국학계의 徐焰이 밝힌 바 있듯이 상대를 배려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들은 중요한 전략적 문제를 논의할 때도 자신이 관련 사안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언급한 뒤에 상대방에게 의사를 조정케 하고 결정하도록 했다고 한다.

  

毛澤東은 스탈린의 의견에 대해 원론적으로는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략적인 우선순위에서 한반도적화 통일전쟁은 중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먼저 臺灣해방을 완수한 뒤에 한반도통일을 위한 군사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하면, 스탈린은 毛澤東의 속마음을 떠보았고, 스탈린의 의중탐색에 毛澤東은 한반도적화 통일이 공산주의혁명의 공동목표라는 인식아래 원론적인 입장에서 한반도적화나 남침 그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다. 毛澤東은 단지 혁명적화의 대상지역과 이를 실현시킬 수순상의 선후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완곡하게 입장유보로 대응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배경에서 毛澤東은 1950년 2월 중순 2개월간의 방소를 마치고 귀국한 뒤로 상기 국내의 각종 과제해결에 매달리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반도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심지어 6.25전쟁 개시를 불과 10여일을 앞두고 재정문제를 호전시키고자 한 일련의 일정에 따라 국공내전으로 비대해진 중국군의 병력을 감축함으로써 毛澤東은 후대의 일부 학자들에게 자신이 6.25전쟁을 반대했다고 주장하게 만든 주요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毛澤東의 의도적인 침묵과 달리 모스크바에서는 毛澤東과 대조되는 스탈린의 행보가 빨라졌다. 스탈린은 애초 예기치 않았었고, 또한 원치 않았던 신중소동맹체결을 毛澤東에게 허여함과 동시에 중국동북의 旅順 주둔 소련군을 2년내로 철수시키기로 毛澤東에게 약속함으로써 머지않아 소련의 동북아 전략기지를 상실하게 될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그간 구중소동맹으로 누려왔던 중국내 기득권을 대신할 새로운 전략지대를 확보할 요량으로 보류해놨던 김일성의 남침도발을 동의해주기로 결심했다. 중국내 기득권이란 長春철도의 투자 지분 및 경영권, 旅順항과 大連항의 사용권, 新疆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에서 소련이 누렸던 각종 특권 등 蔣介石정권 이래 소련이 중국에서 보장받은 각종 이권을 가리킨다. 신중소동맹체결을 계기로 스탈린은 새로운 동북아전략을 가다듬었고, 그 구상이 갖춰지자 즉각 1950년 1월 하순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승인했다.

  

소련 측으로부터 방소허락 통보를 받은 김일성은 박헌영을 포함한 사절단을 대동하고 1950년 3월 30일 평양을 떠나 소련의 보로시로프를 경유해 4월 9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4월 25일까지 2주 이상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두 차례에 걸쳐 남침전쟁 문제를 심층적으로 논의했다. 이 회합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대남침략전쟁 발동을 승인했다. 승인은 반드시 毛澤東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결정한 조건부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毛澤東과 이 문제를 상의하되 그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 전쟁발동을 보류하고 새로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이 회합에서 이른바 남침 ‘3단계 공격방안’이 잡혀졌다. 첫째 단계는 군사준비와 증강을 철저하게 하고, 두 번째 단계로 대남 위장 평화통일 제의를 한 뒤 마지막 단계로 남한이 거부하면 총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3단계 공격방안’을 요약하면 먼저 38도선 특정지역으로 병력을 집중시키면서, 다음으로 대남 위장평화공세를 취한 후 마지막으로 옹진에서 개전과 동시에 국지전을 38도선 전선에 걸친 전면 공격전으로 전화시킨다는 구상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1950년 여름 이전 북한의 동원체계를 완전하게 정비할 것이며, 동시에 북한인민군 총참모부로 하여금 소련 군사고문단의 협조를 받아 구체적인 전쟁시행 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즉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동년 “여름까지 총동원태세를 갖추고, 북한군 총참모부가 소련 고문의 지원을 받아 공격에 관한 세부계획을 수립할 것”, 그리고 “작전은 3단계로 설정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총괄하면 스탈린과 김일성은 의도적으로 毛澤東을 제외한 상태에서 남침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毛澤東은 실제 남침전쟁을 수행한 한 당사자였지만 정작 이 논의에서는 완전히 배제, 소외돼 있었던 셈이다.

 

Ⅲ. 소외에서 ‘캐스팅 보트’(casting vote)권자로

 

이제 김일성에게 남겨진 과제는 스탈린이 지시한 대로 毛澤東을 설득해 그의 동의를 구하는 일이었다. 毛澤東이 동의해주지 않는다면 전쟁발동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또 다시 유보될 상황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점의 毛澤東은 돌연 자신의 결정에 따라 전쟁이 개시되든가, 아니면 분명 연기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결정권자가 됐다. 마치 의회의 ‘캐스팅 보트’권을 거머쥔 자나 다를 바 없었다.

  

스탈린의 지시와 별도로 김일성은 이미 소련 방문 직전인 1950년 3월 하순에 北京주재 북한대사 李周淵에게 자신의 北京방문 건에 대해 毛澤東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해놓은 상태였다. 전년도 김일의 北京방문 시 毛澤東이 그에게 강조한 내용, 즉 남침개시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탐지하기 위해서였다. 3월 28일 자정 가까운 시각 李周淵을 접견한 자리에서 毛澤東은 전쟁발동에 관해 협의하고자 北京 방문을 희망하는 김일성의 의사 타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즉 그는 만약 김일성이 한반도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이미 마련한 상태라면 北京방문을 비밀리에 해야 할 것이고, 아직 계획이 구체적으로 잡혀 있지 않다면 한차례 정식회담을 갖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방문시기는 4월말에서 5월초가 가장 좋다고 했다. 이는 전년도 김일의 北京방문 시에는 구체적인 남침작전 계획이 잡혀 있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하고, 또 毛澤東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을 합의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김일성은 소련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 즉시 李周淵 대사를 평양으로 소환해 毛澤東의 상기 제안을 보고 받았고, 그에게 중국지도부와의 회담일정을 조율하라고 지시했다. 김일성은 곧 있을 중국방문에 대해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의 토론을 거치지 않고 단지 자신의 심복이자 정치국위원인 金策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을 뿐 철저하게 극비 사항에 부쳤다. 李周淵의 회신을 접한 毛澤東은 그를 통해 재차 김일성에게 비공식적으로 방문할 것을 승낙했다.

  

5월 13일 오후 5시 20분 김일성과 박헌영은 쉬티코프 측이 마련해준 비행기로 北京을 향해 평양을 출발했다. 평양-北京 간의 비행시간으로 보아 김일성 일행은 대략 13일 당일 오후 7시 전후 北京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수뇌부와의 회담을 위해 그날 밤 紫禁城에 연접해 있는 中南海의 懷仁堂에 모습을 드러냈다. 회인당은 중화민국 초대 총통 袁世凱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자 신 중국 수립전야 건국방안을 논의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계 전체회의가 열린 유서 깊은 곳이었다.

  

김일성의 北京방문은 기본적으로 스탈린의 종용에서 비롯된 빠트릴 수 없는 절차였지만, 김일성이 그 전 년 특사(김일)의 北京 밀파를 통해 남침에 관한 毛澤東의 의중을 떠본 주체적 노력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이는 스탈린의 제안이 없었다 하더라도 김일성은 중국방문을 추진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케 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北京에 머문 날은 귀국일인 16일 오전까지 3박 4일간이었지만 실제 체류시간은 이틀 반에 불과한 촉박한 일정이었다. 그들의 北京방문은 중국측 지도자들에게 불원간 한반도 무력통일전쟁을 추동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또한 이 문제에 관해 이미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충분히 논의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도 중국측의 동의획득을 전제 조건으로 전쟁발동을 승인했으니 중국측도 동의할 것을 촉구한 압박적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이외에 통일 후 중북상호조약체결의 제안,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쌍방의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의와 북중 쌍방의 공동 관심사인 수풍댐의 전력공급 문제, 그리고 중국내 한인문제 등의 현안들이 논의할 의제로 잡혀져 있었다.

  

그날 밤 쌍방간 회담에서 김일성은 먼저 毛澤東에게 지난 3~4월에 이루어진 모스크바 방문시 스탈린과 나눈 회담결과를 설명했다. 그는 “남한의 침략의도는 이미 매우 확연하며 이제 남북한의 긴장관계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현재 상황은 과거와는 다르기 때문에 한반도통일을 위한 군사행동이 가능한 시점이며, (이 점에 대해선) 스탈린도 이미 동의했다”고 강조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최종결정은 반드시 중국측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스탈린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毛澤東은 놀랍고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덧붙여 아직 전쟁을 일으킬만한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라고 여러 차례 北京주재 북한대사 李周淵에게 전했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이 같은 毛澤東의 반응은 그 전 李周淵과의 대담 시 김일성의 한반도 무력통일전쟁을 지지한다고 발언한 것과 전혀 다른 입장을 내보인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해 지난 3월말 김일성의 지시로 中南海를 방문한 李周淵과 毛澤東 사이에 오고간 대화가 문제의 실상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고 있다. 당시 쉬티코프가 김일성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을 스탈린에게 보고한 전보내용에 따르면, 毛澤東은 김일성의 방중 전 李周淵을 접견한 자리에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즉 한반도는 평화적 방법이 아닌 무력으로만 통일이 가능한데, 미국이 남한처럼 작은 국가를 위해 제3차 세계대전을 벌일 리가 없기 때문에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견 앞뒤 모순된 이 발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현재 김일성이 중국방문 동안 毛澤東과 직접 나눈 면담내용 자료를 접할 수 없기 때문에 毛澤東이 실제 그렇게 언급했는가 하는 사료 검증문제가 대두된다. 하지만 확정적 자료가 나오지 않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우선 쉬티코프가 전해 들었다는 김일성의 말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毛澤東의 이 같은 앞뒤 ‘입장변화’에 대해서는 한시적이지만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毛澤東의 한반도 무력통일 지지발언은 그가 과거에도 여러 차례 그랬었던 것처럼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려는 김일성에 대한 원칙적인 지지표명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1개월 반 전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 말라는 毛澤東의 충고 내지 격려도 신중소동맹의 체결로 자신감을 얻은 자신의 원론적인 지지의사였을 뿐이다. 그는 김일성이 한반도를 적화하겠다면 당연히 남침을 위한 군사공격계획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여겼을 수 있지만, 이렇게 빨리 “비밀리에 北京을 방문”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毛澤東의 눈앞에는 경제복구와 함께 대륙 도처에서 저항을 계속하고 있는 국민당군 잔당의 섬멸과 臺灣점령 등의 과제들이 놓여 있었다. 국가경제를 국공내전 전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일 또한 지체할 수 없는 화급한 과제였으며, 무엇보다 반혁명세력들의 제거를 통한 국내정치 정세의 안정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毛澤東은 자연히 김일성이 臺灣해방에 앞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은 중공이 1949년 10월 하순 臺灣해방의 전초전으로서 그 길목에 위치한 金門島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한데에 이어 그 뒤 소련에 지원을 요청함과 동시에 해․공군의 확충을 서두르면서 臺灣 재공격 준비를 해오던 때였다. 그 결과 중국군은 한번에 4~5개 군단을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증강된 전력을 바탕으로 1950년에 들어와서도 간헐적이고 소규모이긴 했지만 金門島에 대해 재공격을 여러 차례 시도해오고 있었다.

  

요컨대 적어도 1950년 5월 김일성의 방중 시점까지는 臺灣해방을 우선시 한 毛澤東의 전략은 변함이 없었고, 그의 입장도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었다. 단지 현존 입수 가능한 관련 자료들이 전후 사정이 생략되거나 혹은 당시의 러시아어전문이 원문 그대로 번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 이러한 상황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런 연유로 毛澤東의 발언들이 앞뒤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거나 입장이 급격히 변화돼 보였을 뿐이다.

  

그렇다면 동북아 국제정세와 관련해 스탈린과 나눈 의견교환과 그 뒤 김일성의 극비 北京방문으로 이미 김일성이 남침계획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毛澤東은 김일성의 동의요청에 대해 왜 예상 밖의 놀랍고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을까? 그 까닭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즉 毛澤東이 전쟁발동 자체를 시기상조라고 여기고 있던 차에 갑작스레 김일성으로부터 스탈린과 김일성 두 사람이 이미 전쟁발동에 대해 합의했고, 불과 한달 밖에 남지 않은 6월중에 개전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저명한 중국사학자 조나단 스펜스(Jonathan Spence)는 스탈린이 김일성과 6.25전쟁도발에 관해  사전 협의한 사실을 毛澤東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한 바 있다. 이 주장은 毛澤東이 김일성으로부터 스탈린의 남침 승인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인 점에 근거해 그렇게 해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나단 스펜스는 1949년 말에서 ’50년 초에 걸쳐 이루어진 스탈린, 毛澤東 두 사람간의 비밀 요담에서 스탈린이 한반도정세를 거론하면서 김일성이 자신에게 남침공격을 승인해주도록 요청한 사실을 毛澤東에게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했을 뿐이다.

 

더군다나 毛澤東은 스탈린이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 김일성더러 모스크바를 찾아가보라고 권유한 바 있지만, 스탈린이 전쟁도발의 최종 결정을 자신에게 미룬 사실은 毛澤東을 심히 당혹스럽고 난감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전쟁도발의 최종 결정을 자신이 내려야 한다는 사실에 중압감을 느낀 毛澤東은 이 때의 당혹스런 경험을 오랫동안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毛澤東은 그 후 몇 년이 지나서도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자신이 소외된 사실에 대한 화풀이 심사를 종종 드러낸 일화를 남겼는데, 예컨대 주중 소련대사 유딘(P. F. Yudin)과의 대담에서 이 일을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자신이 배제된 상태에서 별안간 전쟁을 결정짓는 최종책임을 떠안게 된 毛澤東이 심히 불쾌한 감정과 곤혹스러움이 뒤섞인 느낌을 받았을 것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자국의 안보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한반도전쟁 논의에 자신이 배제된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느끼게 되는 심한 당혹감과 그리고 타국의 남침전쟁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毛澤東은 즉각 회담을 중단했다. 그리고 밤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23시 30분 周恩來를 北京주재 소련대사 로신(N. V. Roshin)에게 보내 김일성의 언급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과 그 진위여부를 스탈린에게 확인해달라고 긴급히 요청했다.

 

소련 외상 비신스키(Andrei Vyshinsky)의 암호전문으로 스탈린이 보낸 ‘특별전문’이 여섯 시간 뒤인 이튿날 5월 14일 새벽 초특급으로 중국외교부에 접수됐다. 毛澤東은 이 회답전문을 통해 김일성의 계획에 대해 스탈린이 동의해준 사실을 최종 확인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毛澤東 동지!

조선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스탈린이 전보에서 사용한 몇 가지 가명 중 하나―필자)동지와 그의 동지들은 국제정세가 변화하고 있으므로 조선의 통일과업 착수제안에 동의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은 반드시 조선과 중국이 함께 내려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고, 만약 중국동지들이 찬성하지 않을 경우에는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논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연기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회담 내용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북조선 동지들이 설명할 것입니다.―필리포프”

 

스탈린의 의사를 확인한 毛澤東은 즉각 중공 중앙정치국회의를 소집했다. 동 회의는 스탈린의 의도가 무엇인지 진의를 파악하는 가운데 전쟁발동에 대한 동의유보라는 기존입장을 계속 고수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는 분위기였다. 당 수뇌부 간의 논의를 거친 결과 毛澤東은 김일성의 대남전쟁 도발에 동의하기로 했다.

  

다음날 5월 15일, 毛澤東과 김일성 쌍방은 재차 회담을 열어 무력남침에 관해 상세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 시점부터 전개된 두 사람간의 논의는 전쟁동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毛澤東은 기존의 신중한 태도를 바꾸어 비로소 기왕에 결정된 무력통일에 관한 김일성의 기본구상에 지지를 표명했다. 이것은 毛澤東이 미국을 겨냥한 스탈린의 롤백전략과 대미 대리전이라는 덫 안으로 걸려 들어가는(entrapment) 시발점이었다. 毛澤東의 찬동은 김일성과의 열띤 논쟁을 거친 결과였는데, 그 전모를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 장에서 보는 바와 같았다.

 

Ⅳ. 원론적 지지에서 ‘동의할 바엔 실제 행위’로

 

北京의 극비회담에서 毛澤東은 먼저 김일성에게 일본의 참전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김일성은 일본군 자체의 개입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미국이 2~3만 명의 일본군을 전장에 투입시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또 김일성은 만에 하나 그 같은 상황이 나타나더라도 북한군이 더욱 맹렬한 태세로 전쟁에 임할 것이기 때문에 일본군의 참전이 전세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강한 의욕과 자신감을 보였다. 이것은 毛澤東의 동의를 유도하기 위한 김일성의 허장성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실제로 그렇게 판단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사뭇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김일성은 군사적인 면에서도 그 성격의 일단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대담하게 남진공격을 밀어붙인다면 남한의 정치, 군사적 상황 자체를 변화시키고, 속전속결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일성은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기는커녕 미군개입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은 태도였다. 그는 오히려 미국은 싸우지도 않고 중국에서 물러난 전력이 있는 만큼 한반도에서도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아니면 더 이상 극동으로 진격해올 의향이 없을 거라고 판단하면서 미국의 개입가능성을 저평가했다. 이 부분은 6.25전쟁 시기 북한인민군 부총참모장을 지낸 李相朝가 김일성은 실제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었다고 한 증언과 계합되는 대목이다.

 

또한 북한정권의 고위직을 지낸 어떤 인사는 항일빨치산 시절 기껏해야 20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 밖에 통솔한 적이 없던 김일성이 해방 후 소련, 중국의 지원으로 몇 년 사이에 2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게 됐으니 일본은 물론 미군이 개입한다고 해도 남한을 ‘해방’시킬 수 있을 듯이 기고만장해 있었다고 기억한 바 있다. 그의 회고는 김일성의 허세가 부풀려 질대로 부풀려져 폭발직전의 상태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역으로 김일성은 그 만큼 미군에 대해서도 승전을 자신했을 만큼 대남적화를 대단히 낙관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김일성의 이 발언은 미국의 개입을 우려한 毛澤東을 속이려고 했거나 혹은 적어도 승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강조함으로써 그를 설득하려고 한 의도로 봐도 무방하다. 이 점은 중국정부 측에서 당시의 관련 자료들을 모두 공개하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공간 자료들 가운데는 김일성이 미국의 개입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결정했을 것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단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김일성의 남침전쟁 결정은 “미제 침략자들이 제놈의 본토에서 대병력을 끌어오기 전에 일본에 있는 4개 사단을 끌어들인다 하여도 높은 기동력과 연속적인 타격을 가한다면 능히 적들을 격멸소탕할 수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타산하신데 기초하여 세워진 것”이라는 언급이 이를 뒷받침 한다. 실제로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3일, 미국이 개입해도 석 달이면 승리할 수 있다고 한 것도 이에 따른 것으로 봐야 한다.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김일성은 2주나 길어도 2개월이면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급함에서 비롯된 김일성의 미국 개입에 대한 과소평가를 곧이들을 毛澤東이 아니었다. 흐루시초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한민족이 결정한 내전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대해 毛澤東도 완전히 동의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달리 38세에 불과한 김일성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군사경험과 갖은 고초를 겪은 거물급 군사전략가답게 毛澤東의 태도는 상당히 신중했다.

 

김―毛 정상회담 직후 周恩來가 로신 대사에게 전해준 통보에 따르면, 毛澤東은 김일성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전쟁의 전체기간이 연장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큰 위협은 역시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개입이며, 그 가능성은 일본군이 전쟁에 동원될 가능성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일깨웠다. 이것은 毛澤東이 불과 2개월 전 개입 가능성이 높지 않은 미국을 두려워 할 것까지 없다고 언급했을 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런 태도였다.

 

毛澤東의 신중한 발언은 그가 스탈린의 전쟁발동 동의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전쟁이 사전 紙上兵談의 구상단계에서 실제 개시단계가 됐다는 상황인식에서 나온 긴장된 심리상태가 반영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김일성에게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경고성 충고였을 가능성이 높다.

  

남침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불거져 나온 전략적 판단의 간극과 심리적 갈등은 주로 미국의 개입여부를 둘러싼 인식과 판단의 상이에서 기인됐다. 毛澤東으로서는 김일성이 미국의 불개입을 예단하고 전쟁을 조기에 도발하려고 한 조급함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남침전쟁의 발동에도 스탈린의 의사를 확인하는 등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동의하지 않았던가! 김일성은 김일성대로 미국의 개입을 지나치게 의식한 毛澤東의 조심스런 판단과 소극적 자세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毛澤東의 우려와 망설임을 불식시키기 위한 김일성의 수단은 스탈린의 권위를 빌려 강력히 설득하는 길 뿐이었다. 毛澤東의 반론에 대해 김일성은 “제국주의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스탈린의 언급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 했다. 이것은 그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해 “毛澤東은 항상 조선 전체를 해방하는 우리의 희망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혁명만 완성되면 우리를 돕고 필요할 경우 병력도 지원하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언급한 것과 사뭇 대조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스탈린의 권위를 등에 업은 김일성의 단언에 대해 毛澤東이 느낀 불편한 심기는 수년 뒤 이 때의 상황을 회상한 毛澤東의 발언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시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면서 “우리는 제국주의(가 벌리는) 일에 주가 될 수 없으며, 그들의 참모장도 아니다. 그들이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대세가 전쟁도발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毛澤東의 반론은 김일성에게 단지 신중할 것을 당부하는 수준의 의미였을 뿐 스탈린과 김일성이 합의한 기왕의 결정을 뒤집을만한 계제는 되지 못했다. 毛澤東의 조심스런 예측과 판단은 중대한 상황과 맞닥뜨린 모든 전략가에게 요구되는 신중함 그 자체가 몸에 밴 반사적 행위였을 뿐 전쟁 도모에 있어선 남침전쟁을 동의한 이상 그는 이전과 달리 적극적인 자세로 입장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毛澤東이 미국의 전쟁참여를 전제하는 등 가정법을 구사한 문맥으로 보아 그는 결국 스탈린이 이미 승인한 이상 한반도적화전쟁은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라는 점을 내세운 김일성에게 설득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毛澤東은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해 북한을 지원할 것”이며, 소련은 미국과 38도선을 국제적으로 체결한 당사자로서 얄타협정의 제한을 받게 돼 있어 38도선 체제를 허무는 전쟁에 참여하기가 곤란할 것이라고 하면서 중소회담시 스탈린이 언급한 소련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소련과 달리 중국은 이러한 조약의 제약이 없으므로 한반도와 관련해 하등의 국제적 의무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대북지원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毛澤東은 또 북소 쌍방이 이미 개전을 결정한 이상 전쟁은 중북 양국의 공동과제가 됐다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미국을 맹주로 한 서방 제국주의세력의 참전가능성을 전제로 毛澤東은 충분한 군사준비를 강조했다.

  

회담종료 후, 周恩來와 박헌영은 각기 北京 주재 소련대사 로신에게 중북 쌍방간의 의견일치를 간단하게 보고했다. 이는 김일성으로서는 로신을 통해 毛澤東으로부터 전쟁발동에 대한 동의를 받아낸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올지 주시하고 있던 스탈린을 안심시킨 행위였다―이 보고를 통해 스탈린은 毛澤東의 동의를 중국이 중국군을 투입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周恩來, 박헌영의 통보내용은 서로 약간의 다른 점이 없지 않았지만 다음 세 가지 내용은 완전히 일치했다.

   

첫째, 김일성은 毛澤東에게 모스크바 방문시 스탈린이 제시한 3단계 침공방안을 털어놓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둘째, 毛澤東은 원래 먼저 臺灣을 해방한 후에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스탈린이 이미 한반도 적화통일 문제의 착수를 동의한 상황이었으므로 준비중인 臺灣해방 작전을 뒤로 미루고 한반도 무력통일을 제1순위로 둘 수밖에 없었다. 셋째, 毛澤東은 김일성의 3단계 침공방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술적 충고까지 했다.

 

1) 모든 사병과 지휘관 개인에게 각각의 구체적인 임무를 별도로 부여해야 한다. 2) 작전계획은 반드시 면밀한 검토를 거쳐야 하고, 또 공격은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신속한 부대이동으로 남한의 주요도시를 포위해야 한다. 그러나 도시점령을 위해 시간을 지체하지 말아야 하며, 적의 병력 섬멸에 집중하라는 주문이었다.

  

毛澤東이 제시한 전략의 핵심은 지역을 점령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적의 군사력 파괴에 주력하라는 것이었다. 훗날 김일성이 서울을 공략한 후 그곳에서 3일 간 머문 전술적 오류로 남진을 지체한 결과 전체 전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점에 비추어볼 때 毛澤東의 이 충고는 새겨들어야 했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불과 한 달여 후에 벌어진 북한 지도부의 전술적 오류는 이미 이 때 김일성과 毛澤東 쌍방간의 심리적 갈등 혹은 상황판단의 상이와 전략적 구상에 대한 의견대립이 표출됐을 때부터 잠재돼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 毛澤東은 예비차원에서 향후 자신이 취해야 할 군사 대응전략을 다음과 같이 세 단계로 제시했다. 첫째, 먼저 “압록강변에 3개 군단을 배치해놓고, 제국주의가 간섭하지 않는다면 문제될 게 없다.” 둘째, 제국주의가 간섭을 하게 되더라도 “38도선을 넘어 오지 않으면 우리도 관여하지 않는다.” 셋째, “그러나 일단 38도선을 넘어오면 반드시 쳐들어가야 한다”는 구상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앞서 毛澤東이 미군의 개입을 예상하고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다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해 북한을 지원할 것”이라고 공언한 점인데, 그것은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를 두고 한 말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를 위해 사전 대비 차원에서 毛澤東은 북한에 필요한 협조를 제공할 것이며, 중북 국경지대에 중국군의 배치를 늘리고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후자에 대해 김일성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장비의 공급원을 확보해놓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사양은 전쟁의 조기종결을 기대한 毛澤東에게 승전을 자신하는 김일성에 대해 믿음을 가지게 만드는 역설로 들렸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미국의 개입여부에 대한 상호 견해가 달라 얼마간 설왕설래가 오고 갔지만 毛澤東은 일단 동의의사를 표명한 뒤부터 승리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으며, 북한 지도부가 설명한 남북한의 정세판단에 대해서도 동조했다. 나아가 毛澤東은 오히려 신중소동맹을 모방한 중북간의 우호동맹상호협조조약 체결을 제의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기왕에 동의한 이상 전쟁도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는 취지였고, “동의할 바엔 실제 언동”으로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毛澤東의 동의는 단지 스탈린의 조건부 동의를 최종적으로 성사시켜주는 절차상의 문제였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미 중소동맹을 맺은 이상 毛澤東이 동의를 거부하기엔 이미 구조적으로 너무 깊숙이 스탈린의 전략구도 속에 연루돼 있었기 때문이다. 곤차로프가 지적했듯이 스탈린은 미리 계획적으로 북한정권을 보호하며, 군사 무기 및 장비 등을 직접 원조해주면서 김일성의 전쟁도발의지를 확고하게 심어놓은 후 이번에는 교묘하게 상대를 겉으로 한껏 추켜세우는 중국적 방식을 이용해 毛澤東을 소련의 대북정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1950년 5월 16일 김일성 일행이 평양으로 귀환하던 날, 스탈린은 毛澤東 앞으로 중공과 북한이 한반도통일 후 ‘우호동맹상호협조조약’을 맺는 것에 동의한다고 타전했다. 이는 북한, 중국, 소련 3자간에 하나의 반서방 블록이 결성된 것을 뜻하며, 이 3각축 중 각기 한 변씩을 구성하겠다는 중북간의 상호 약정을 추인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상은 전쟁발동 전 김일성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해 毛澤東과의 협상으로 자신의 한반도 무력적화 통일전쟁 계획에 대한 北京측의 동의를 얻어낸 과정의 전말이다. 여기서 강조돼야 할 점은 毛澤東이 훗날 자신은 ‘처음부터’ 남침전쟁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 바 있듯이 초기 소극적 공감, 원론적 지지표명 차원에서 돌연 적극적 동의, 실제적 지원으로 전환한 그의 태도변화다.

 

毛澤東은 군사개입 결정의 전 과정 중 남침이 시기상조라고 여겼지만 적극적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저지 혹은 만류하지는 않았다. 스탈린의 압력이라는 매개변수로 김일성의 침공계획에 ‘부득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기왕에 동의한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던 것이다. 이로써 스탈린, 毛澤東, 김일성의 공산진영측 3자간의 전쟁발동에 대한 최종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셈이다.

 

Ⅴ. 毛澤東은 ‘공모’하지 않았는가?

 

지난 세기 후반 한때 국내외 6.25전쟁 학계에서는 중국이 북한의 전쟁계획에 대해 대략은 감지했으나 협의나 지원행위를 포함하는 전쟁준비과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대두된 바 있다. 이 견해는 한동안 학계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특히 참전 당사국인 중국학계에는 지금도 毛澤東의 사전 전쟁도발공모 사실을 부인하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毛澤東을 수뇌로 한 중국지도부는 김일성의 공격계획을 몰랐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전쟁준비와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北京-모스크바-평양 공모는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는 억측이라는 것이 중국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또 행위의 초동단계에서부터 함께 관련 사안을 논의하지 않는 한 사전 ‘공모’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毛澤東은 애초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전쟁도발 승인을 요청한 시점부터 같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毛澤東의 공모설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주장의 근거로 그들은 毛澤東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남침전쟁 계획에 관해 논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에게 臺灣해방이 이루어지기 전에 북한이 남침을 개시해선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毛澤東의 사전 전쟁모의를 부정하는 중국학자들과 여타 국가의 일부 연구자들은 毛澤東이 전쟁발발 불과 2주 전에 중국군의 병력수를 대폭 줄인 사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로 들곤 한다.

  

중국학계의 이 같은 주장은 전쟁개입의 책임을 소련에 돌리려는 중국정부의 정치적 의도를 반영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毛澤東이 참전을 결정한 것은 스탈린의 압력으로 부득이하게 전쟁에 연루된 결과였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의도가 어떻든 상기 중국 측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 있다. 먼저 毛澤東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할 생각이었다면 중국군을 감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보자. 毛澤東은 “중국인민해방전쟁이 이미 기본적으로 끝났다”고 보고, 전후 경제복구 사업에 투입시킬 목적으로 중국군의 일부 병력복원, 즉 병력감축을 결정한 것은 사실이다. 중공은 毛澤東의 의중을 받들어 6월 초순 중앙인민정부혁명군사위원회와 정무원 연명으로 ‘1950년 인민해방군의 복원’관련 결정문을 하달한 것도 사실이다.

 

또한 이에 근거해 중국지도부는 국가차원에서 총 병력 540만 명을 2차에 걸쳐 300만 명으로 줄이기로 하고, 중공 제7屆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의 논의를 거쳐 1차로 바로 년 내에 140만 명의 군인을 제대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에 관한 구체적인 방안, 즉 복원의 원칙, 복원조직과 순서 및 대상자에 대한 대우 등을 6월 30일 중앙인민정부 혁명군사위원회와 정무원 공동으로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毛澤東이 남침전쟁과 무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1950년 초 악화된 재정 및 경제상황의 곤란을 타개하고자 한 방편이었으며, 오히려 중국이 국가대사는 국가대사대로, 대외전쟁은 대외전쟁대로 동시에 모두 추진했다는 증거가 된다. 毛澤東이 전쟁발발 직전이라는 중대한 시점에 군대를 대량 감축한 것은 내심 김일성이 속전속결로 전쟁을 조기에 종결지어 주기를 기대한 상태에서 경제복구에 필요한 만큼만 감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게다가 군 복원이 결정됐어도 중국군의 주력은 그대로 존치됐을 뿐만 아니라 ‘즉각’ 병력을 감소시키지도 않았고, 하사관 이상 간부는 제대시키지 않는 가운데 단계적으로 실시했다.

  

다음으로 毛澤東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남침전쟁 계획에 관해 같이 논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에게 臺灣해방이 이루어지기 전에 북한이 남침을 개시해선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켰다는 주장을 보자. 이 역시 사실에 해당하지만 문제는 毛澤東이 스탈린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김일성-스탈린의 전쟁도발논의에 동참한 셈이 됐고, 또한 毛澤東이 김일성의 남침도발을 동의함에 따라 스스로 臺灣해방과 한반도 적화전쟁의 우선순위를 바꿔버렸지 않았는가? 동일한 사안을 두고 발생한 전후 ‘행위들’에 대해 먼저 일어난 하나의 행위만 받아들여 사실로 강조할 게 아니라 결과로서 발생한 최종적인 행위도 동시에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毛澤東이 전쟁 전 김일성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공군 소속의 한인 병력을 대거 북한으로 송환시켜 남침시 북한군의 주력으로 편제되도록 지원한 사실을 두고 비중국계 학자들은 이를 중국이 사전 전쟁에 개입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중공군 소속 한인병력의 북한 이송이란 毛澤東이 중공군 내 가장 정예군인 제4야전군 소속의 한인 병력 3개 사단 최소 5만 여명 이상을 북한으로 보내준 것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전쟁 개시 이후인 1950년 9월 중국관방은 외교부대변인 성명을 통해 자국의 입장을 밝혔는데, 그 논조를 보면 마치 그들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돌아간 것처럼 호도한다. 즉 중국혁명이 끝나자 그들은 자신의 조국방위와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는데, 이는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그들의 정당한 권리이자 신성한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중국학계 일각에서는 한인부대의 북한입국 사실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毛澤東이 한인 병력을 송환해준 의도가 남침을 하기 위한 공격용 전력증강에 있었던 게 아니라 남한의 북침에 대비한 방어용 전력증강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지도부는 한인병력의 출신지에 따라 북이 될지, 혹은 남이 될지도 모르는 귀환 희망지역과 그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모두 북한으로 들여보내 버렸다. 게다가 당시 중국지도부는 분명 소련의 무기장비로 무장한 북한군이지만 병력면에서 “인구 3,000만 명의 남한”을 상대로 한 전면전쟁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이러한 우려에서 송환을 결정하고 북한군의 무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그들을 인계해줬다. 이 사실은 자신들의 설명과 모순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제3장과 제4장에서 예증적으로 밝혔듯이 毛澤東의 동의가 자발적이었든, 아니면 피동적이었든 간에 앞 절에서 살펴본 이 모든 논의들은 毛澤東이 생각보다 훨씬 더 깊숙이 전쟁의 사전공모에 관련돼 있었다는 점을 실증한다. 이는 과거 일부학자들, 특히 중국측 학자들이 전쟁전 중공의 사전 모의참여 여부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견해와는 전혀 다르다. 부연하면 毛澤東은 전쟁도발 결정단계에서 이미 김일성에게 남침전쟁 도발에 대한 지지의사를 분명히 표명했었다. 이른바 ‘공모’란 중국측 학자들이 암시하거나 주장한 의미, 즉 양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발의하고 논의한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공모는 사전적으로 질박하게 정의하면 동일한 시간대에 어떤 사안을 함께 모의 혹은 결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자들이 동일한 목적달성을 위해 공감대를 가지고 실제 행위착수 전 협상에 참여하고 특정 사안에 대해 동의를 표시하거나, 혹은 지원하는 실질적 행위로서 이 행위가 어떤 사건의 발생을 이루는 전제조건 중의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그 행위자들이 그 사건에 ‘공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毛澤東의 사전 전쟁모의를 부정하는 논자들의 그러한 주장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은 전술한 분석에 근거해 이제 입론의 뿌리가 박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따라서 스탈린은 물론이고, 이유야 어쨌든 남침 “고!” 싸인을 내린 毛澤東 역시 전쟁도발 동의 및 지원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더욱이 毛澤東의 동의는 스탈린의 전쟁승낙 여부를 결정지은 중요한 조건이었기 때문에 결국 김일성이 남침을 일으키는데 결정적 요인이 됐던 것이다.

 

Ⅵ. 동의의 의미 및 동기

 

毛澤東의 사전개입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고 더하게 됐지만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본질적 의문이 남아있다.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동의한, 毛澤東의 사전 개입을 부인하는 주장의 허점을 논박함으로써 나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毛澤東의 의미와 동기가 밝혀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어떤 의도로 남침전쟁을 동의하게 됐었고, 그 동의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무릇 행위자의 행위동기를 이해하려면 그 행위를 유발시킨 내외적 환경 내지 처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毛澤東은 당시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고, 어떤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부터 고찰해보자.

  

우리는 앞에서 제시한 5월 14일 스탈린의 전쟁도발 조건부동의를 확인한 전문 가운데 毛澤東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남침 자체를 유보할 것이라는 대목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동의’(consent)라 함은 국제관계나 외교관계에서 흔히 거론되는 ‘승인’(recognition)과는 분명 다른 어의다. ‘동의’는 국제법에서 특별히 규정된 행위가 없고 단지 일반적으로 타인의 행위나 의견에 찬성하는 의사표시를 뜻한다. ‘승인’은 국제관계에서 “타국의 행위나 성명 등 외적 요인에 대한 긍정적인 의사표명”으로서 부정적인 의사표명 행위인 “항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즉 승인은 국제법적으로 행위나 대상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효력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동의가 됐든 승인이 됐든 스탈린이나 毛澤東의 의사표시 여부에 따라 김일성이 계획, 준비해온 전쟁이 현실화될 수도 있거나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실제 동의자 혹은 승인자는 김일성에게 일정한 구속력을 가지게 돼 있었던 것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탈린은 표면적으로 毛澤東의 동의를 구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전쟁결정에 대한 최종 승인을 내리는 역할을 毛澤東에게 맡김으로써 김일성을 毛澤東에게 구속시킴과 동시에 毛澤東으로 하여금 전쟁도발에 대한 책임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떠안게 만든 것이다.

  

과거 20여 년간 크레믈린의 막후에서 코민테른에 가입한 각국 공산당을 조종하거나 지시하면서 공산주의 동맹국들 사이에서 최고 결정권자의 위치에 군림했던 스탈린의 불가침적 권위를 감안했을 때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 않고 毛澤東에게 결정을 의뢰한 행위는 분명 전쟁발동의 책임을 김일성과 毛澤東에게 전가하려는 심사에서 나온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毛澤東으로선 그야말로 일대 딜레마였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스탈린의 요청을 거절하게 됨은 물론 김일성이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전쟁발동도 뒤로 미루어지거나 혹은 아예 성사되지 않을 터이고, 반대로 중국이 동의한다면 침략전쟁의 최종결정은 스탈린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내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毛澤東의 정치비서로서 최측근이었던 胡喬木의 증언대로 중국은 당시 국공내전이 막 끝난 상태여서 국내에 산적한 많은 문제로 인해 절대 북한의 전쟁발동을 부추기거나 혹은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毛澤東은 침략전쟁을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부담을 왜 떠안으려 했을까? 스탈린의 일방적인 사전 동의요청을 거부하지 못한 까닭은 어떤 연유에서였을까? 그는 스탈린의 말을 이의 없이 그대로 따를 정도로 주관이 없고 능동성이 결여된 인물이었을까? 또 그가 한시적 반대에서 전격적 동의로 돌아서게 된 곡절은 무엇이었을까? 게다가 毛澤東은 김일성의 남침개시에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지원까지 약속했는데, 전쟁결정에 임한 자신의 복안은 무엇이었을까?

  

제2장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스탈린과 毛澤東은 1949년 말에서 1950년 2월에 걸친 모스크바 회담시 한반도적화 문제를 논의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다 毛澤東이 소련은 미국, 영국과 체결한 얄타조약에 제약을 받아 파병이 불가능하다고 언급한 일련의 언행을 음미해보면, 毛澤東과 스탈린 사이에 모종의 교환거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毛澤東은 스탈린과의 비밀회담에서 소련측과 모종의 거래 혹은 옵션관계를 맺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만약 그렇다면 분명 毛澤東과 스탈린 사이에 서신왕래가 있었을 것이며, 그 서한은 공개되지 않고 있거나 혹은 소실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부족한 상태이고, 또 다른 결정적인 관련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현재로선 우리는 단지 정황판단에 근거한 추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심증이 간다하더라도 역사기술이란 어디까지나 사료에 근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론이 초래할 수 있는 논리비약의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毛澤東이 김일성의 남침전쟁도발 구상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이유를 내세워 동의표명을 유보해오다가 결국 그 계획에 동의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대략 현실적 필요성과 심리적 요인이 함께 맞물려서 작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 요인은 큰 차원에서 국익을 우선시한 손익계산과 그 하위 개념으로 대략 소련 및 북한과의 이념적, 전략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 그리고 여기에다 김일성이 개전 뒤 미군이 남한에 당도하기 전에 조속히 남해안까지 점령해 전쟁을 조기에 종결해주기를 바랐던 기대심리라는 세 가지 범주 내에 있다. 당시 중공수뇌부에게 국가안보, 독립주권국가 유지, 사회주의 국가건설, 소련 및 북한과의 우호적 관계유지는 자국의 국익을 실현시켜줄 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소들이다.

  

어떻게 하면 국익을 최대화하거나 혹은 최소한 현상유지를 할 것인가? 첫째, 毛澤東은 스탈린의 우회적 전쟁동의요청을 거부했을 경우 국익에 미칠 파급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체결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중소동맹조약이 제대로 이행될까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었다. 이와 관련해 스탈린이 크레믈린궁의 만찬 석상에서 축배를 들면서 중국 공산혁명의 성공을 거론하고,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추켜세우는 등 신중국에 대한 찬사 혹은 긍정적 발언들을 쏟아 낸 것과 별개로 중국수뇌부는 군사동맹관계가 없는 소련과의 관계를 미더워하지 못했다. 1949년 여름 毛澤東이 향후 취할 외교정책에서 이른바 “소련일변도”를 선언했었어도 스탈린이 그를 완전히는 믿지 못했듯이 중국수뇌부도 스탈린을 100% 신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 중공 지도부 내에는 여전히 친미반소 경향이 존재한데다 중공 이외의 민주인사들, 즉 이른바 각 민주당파 사이에는 중공의 소련일변도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의 소리와 비평이 없지 않았다. 한 권위 있는 연구가 지적했듯이 이 시기 민주당파는 1954년 이후와 달리 중공이 국가정책으로 결정한 국가중대사에 대해 정치협상회의를 통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중공은 여타 정당들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국가정책을 시행할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공 당내 고위 지도자들 사이에는 국내 중공 이외 정치세력들을 의식한 당 정책의 신뢰도 제고를 위해서도 막 회복한 중소간의 신뢰관계―구체적으로는 신중소동맹의 틀을 깨트릴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이른바 ‘신중소동맹의 틀’이란 곧 미국과 일본을 주적으로 상정한 군사동맹을 가리킨다. 이 조약은 臺灣의 국민정부에 대한 외교적, 군사적 고립을 지속시키고, 蔣介石의 국민정부 시절 소련에 넘겨준 中國長春철도를 포함해 旅順港과 大連港의 중국환수를 보장한다는 약정을 전제로 성사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 뿐만 아니라 臺灣‘해방’을 위해 군사장비를 제공하겠다는 스탈린의 지원약속까지도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국공내전 후반기부터 미국과 적대적 관계로 치달은 상황에서 북방 후위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체결한 신중소동맹이 결렬될 경우 臺灣무력점령이 차질을 빚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태평양, 인도차이나 등지의 미국, 프랑스와 같은 서방 ‘제국주의국가’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잠재적 패권국가로 간주된 소련으로부터도 포위, 고립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毛澤東으로서는 심히 곤혹스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글렌 스나이더(Glenn H. Snyder)에 따르면, 동맹의 일방이 다른 타방의 동맹국으로부터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을 ‘방기(bandonment)의 불안'이라고 하고, 동맹국으로 인해 뜻하지 않는 분쟁에 휘말려 들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을 ‘연루(involvement)의 불안'이라고 한다. 또 이 두 가지 상반된 상황을 가리켜 안보딜레마(alliance's security dilemma)라고 일컫는다.

 

일단 毛澤東은 이 둘 사이의 양자택일적 모순에 직면해 남침전쟁을 동의해줌으로써 소련이라는 동맹국으로부터 버림받을까 두려워하기보다 차라리 내키지 않지만 전쟁에 얽혀드는 쪽을 택한 후 그 연루의 폭을 최소화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毛澤東이 기 결정된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신중소동맹을 금가게 하는 요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중공지도층 인사들 대다수가 스탈린이 이미 기정사실화 한 남침결정을 毛澤東이 반대한다면 쌍방이 막 새로이 쌓아놓은 상호신뢰의 기초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한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욱이 毛澤東은 스탈린과 담판을 벌여 일정한 성과를 거뒀지만, 그것을 완전하게 보장받은 상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조약이 체결된 후 중국측에서는 비준돼 4월 11일부터 발효된 것처럼 돼 있지만 소련측에서는 비준을 기다리고 있던 관계로 미발효 중에 있던 신중소동맹조약도 제대로 지켜질지 미지수였다. 실제로 신중소동맹 조약이 중국과 소련 양정부의 비준을 거쳐 양국 간에 정식으로 비준된 것은 1950년 9월 30일이었다. 또 중소 쌍방은 조약의 협정내용을 각기 자국의 당 기관지에 게재해 대내외적으로 알렸지만 旅順, 大連항과 中國長春철도의 환수를 약정한 협정서와 그 ‘보충협정’은 공표하지 않았다. 따라서 毛澤東의 입장에서는 조약상의 약정이 제대로 지켜질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旅順 주둔 소련군의 철수와 같은 약속도 즉각 지켜지지 않았다. 6.25전쟁 중 전쟁수행상 전략적인 이유로 주둔을 연장시킬 필요성이 인정됐기 때문에 1952년 8월 17일 周恩來와 스탈린이 회담을 열어 철군을 연기하기로 약정했기 때문이다.

  

신중소동맹조약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당장 조약체결에 따라 5년에 걸쳐 연차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정한 3억 달러의 차관지원이 제대로 이행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毛澤東의 귀국 뒤 중국측의 고위 실무진들이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소련측 실무자들과 체결한 경제, 무역, 기술지원에 관한 각종 협정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소련군의 중국철수 뿐만 아니라 어렵사리 회수를 약속받은 中國長春철도, 旅順항과 大連항 관련 이권환수도 보장받기 어렵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蔣介石의 중화민국이 지니고 있던 유엔대표권을 박탈케 하고 유엔대표권과 유엔상임이사국의 지위를 획득하려는 중국에 대한 스탈린의 지지가 철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중국은 1949년 11월 15일과 익년 1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유엔에 중화민국의 유엔대표권을 취소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그 권리를 소유,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같은 달 1월 13일 자국의 유엔대사를 통해 유엔에 중화민국의 유엔대표권을 박탈하고 중국에 유엔대표권을 부여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중공의 입장에서 한시라도 급했던 소련의 차관과 같은 국가의 재정문제, 유엔대표권의 획득, 소련군 철수 등의 주권 및 안보문제뿐만 아니라 臺灣과 티베트 점령을 위한 군사무기 장비 지원, 각종 경제지원, 소련의 유엔안보리에서의 중국지지 등, 군사, 외교 분야에 이르기까지 진행 중에 있는 모든 상황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거나 전망이 불투명해질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중국이 입게 될 곤란은 불가피하게 국가정책과 전략을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었다.

  

중국수뇌부로선 그럴 경우를 내다보고 안보면에서 미국과 적대관계로 돌아선 상황에서 오랜 전쟁으로 인한 피폐된 경제상황을 호전시킬 자본과 각종 현대적 공업기술 도입의 길이 막히게 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신중국 수립 당시의 암담한 경제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농지는 홍수로 전체 면적 중 30~40%정도가 유실됐다. 공업 및 식품생산량은 각기 전쟁 전 최고 수준의 56%와 70~75% 수준으로 곤두박질 친 상황이었다. 인플레이션은 천정부지로 올라 물가지수는 1949년 5월 현재 1937년 6월에 비해 무려 3조 6,807억 배로 늘어나 통제 불능이 된 상태였다.

 

또한 국가재정 역시 1950년을 기준으로 국민정부의 구 내외채를 포함해 총수입 65억 1,900만 위안 중 총지출이 68억 800만 위안으로, 2억 8,900만 위안이 적자인 상태여서 어떤 경우든 외자도입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공은 이미 건국 전부터 소련이 파견한 각 분야의 소련 전문가들로부터 비교 우위적 각종 선진 기술을 전수받아오고 있었고, 1950년대 초기에도 여전히 소련을 통하지 않고서는 선진 산업기술을 받아들일 통로가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산업기술은 소련에서 도입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한 국가의 기술력이란 일반적으로 이론적인 학술상의 기술, 이론적인 학술상의 기술을 실제 공업에 응용한 수준, 그 공업력이 일반화된 수준을 보는 기술력의 정도 등 세 가지 측면에서 가늠한다.

 

이 중 이론적인 학술상의 기술을 실제 공업에 응용한 수준을 봤을 때 당시 소련은 철강, 제철분야에서는 수준급인데 반해 화학분야는 쳐졌다. 따라서 소련의 기술수준은 분야별로 균일하지 못했으며, 자유진영 국가에 비교해 뒤떨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중국과 동구의 공산국가 등 공산진영 국가들 가운데서는 단연 선진적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당시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정부가 파견한 각 분야의 기술자, 전문가, 고문은 1950년 1월 이전에 이미 2,2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 프랑스 등과 같은 서방 ‘제국주의국가’들에 이어 소련과도 관계가 단절된다면 경제원조가 중단되고, 각종 기술자들의 철수로 이어질 것이다. 그럴 경우 그것은 곧 경제회생을 위한 유일한 소통로가 막히게 되는 셈이다. 그 개연성을 우리는 신중소동맹 체결 이전과 이후의 양국 경제교류 상황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 경제회복과 중공업 발전에 산업의 쌀이라고 할 정도로 없어선 안 될 철강재와 의식주 위주의 경공업의 중요 재료인 면포의 수입은 1950년에 각기 83만 9,956퀸틀(quintal=100㎏을 나타내는 단위)과 974만 4,414퀸틀이었던 것이 신중소동맹조약이 체결된 다음 해인 1951년에는 각기 270만 6,180퀸틀과 3,931만 8,847퀸틀로 3배와 4배 이상 늘어났다.

 

또 무역량 면에서도 1949년 동북 한지역의 대소 무역비중만 놓고 봐도 판단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수출이 6만 7,554(동북시)억 위앤으로 전체 수출총액의 93.15%, 수입은 1만 4.720(동북시)억 위안으로 전체 수입총액의 81.13%를 차지했기 때문에 소련이 중국의 무역, 재정, 생산 등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인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중소의 상호 경제적 영향은 호혜적, 보완적이 아니라 불균형적인 관계였고, 중국경제의 소련의존도가 컸다.

  

또한 중국은 경제지원과 산업기술의 전수에 국한되지 않고, 군사, 사회주의 제도와 그 문화에 관련된 지식과 경험까지도 소련의 전문가 혹은 고문들로부터 배워야 할 형편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군사분야가 두드러졌는데, 앞에서 언급한 중국주재 소련 전문가 2,200여명 중 군사전문가는 73%나 차지했다고 한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동맹으로 이한 국익의 환수 및 보장, 중국경제회복의 성사여부, 그리고 국방건설과 臺灣해방 등의 성공여부가 모두 소련의 의지에 달려 있었던 셈이다. 달리 표현하면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그 만큼 소련과의 전략적 동맹관계의 지속이 절실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국익의 총합은 남침전쟁 도발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불이익의 총합을 훨씬 능가한다. 또한 그것은 국익 차원을 넘어 건국 초기 중국의 체제안정과도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차관제공을 약속한 스탈린의 의사에 반한다거나 그의 입장을 무시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러한 속사정에서 毛澤東은 전쟁발동을 동의해줌으로써 스탈린과의 담판 끝에 어렵사리 약속받은 국가이익을 보장받으려 한 것이다.

  

스탈린의 의중을 헤아려 毛澤東은 심지어 臺灣해방을 미루게 될 것까지 염두에 두고 이에 대비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봤을 때 臺灣해방은 신 중국의 정치통일, 독립주권국가로서의 자기 완결적 위상정립, 국민통합을 표상하는 과제로서 결코 포기(abandonment)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른 어떤 양보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臺灣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는 세기를 넘긴 현재의 중국지도부에게까지 계승돼 중국정부가 일관되게 고수해온 철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毛澤東은 스탈린이 약속한 중소공동의 대미 전략적 동맹의 실현, 경제지원 보장, 臺灣흡수를 위한 군사, 외교적 지원약속 등과 승산이 불확실한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전쟁발동에 대한 동의를 맞바꾼 것이다.

  

한편 총체적인 국력면에서 약자의 처지에 있던 毛澤東은 모순되지만 연루의 불안보다 방기의 불안을 더 크게 느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자국의 어떤 피치 못할 경우가 아니라면 가능한 한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예컨대 중국은 해방 후 북한의 지도자로 彭德懷가 육성한 중공 팔로군 포병사령관 출신 金武亭을 심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스탈린이 김일성을 의중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 김무정을 지도자로 내세우려는 복안을 깨끗이 단념했던 점이 이를 방증한다.

 

또 유고슬라비아의 티토(Josip Tito)처럼 毛澤東이 미국 쪽으로 기울지나 않을까 하는 스탈린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毛澤東은 미국의 적대적 대응을 초래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고, 이를 대미 적대의식의 표증으로서 특별히 소련 측에 통보하기도 했다. 미국의 적대적 대응을 초래한 조치란 1950년 1월 13일 중국주재 미국영사관들의 철수를 비롯해 중국 내 미군을 포함한 모든 외국군의 병영과 ‘미국경제합작총서 중국분서’소유의 물자를 무단으로 접수, 징발하기로 결정한 것을 말한다.

  

상기 毛澤東이 처한 모든 딜레마적인 난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북한의 신속한 남한점령에 의한 조기 종전뿐이었다. 이와 관련해 전쟁도발시 대미 승전 가능성과 자신의 처지에 대해 毛澤東은 세 가지로 생각해본 듯하다.

  

첫째, 毛澤東은 ‘부득이’ 일단 전쟁도발에 ‘내키지 않는’(reluctant) 동의를 하기는 했지만, 김일성이 속전속결로 전쟁에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또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도 혼재된 심리상태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毛澤東은 스탈린과 김일성 두 사람으로부터 동시에 가해져오는 압력에 직면해 전쟁을 단기간에 끝내겠다는 김일성의 호언장담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으로 이첩된 중공군 소속 한인부대들이 주로 중국인민해방군의 최정예부대인 제4야전군 출신이었다는 사실도 毛澤東이 승산을 기대한 희망의 근거가 됐을 수 있다. 그가 김일성에게 미국이 개입하게 될 경우 중국군을 파병해서 지원하겠다고 말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발발 후 유엔군이 감행한 38도선 월경북진을 확실히 예단할 수 없었던 데다, 중국군의 파병으로 닥치게 될 어려움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毛澤東은 김일성이 전달해준 제국주의세력의 군사개입은 불가능하다는 스탈린의 견해와 전쟁승리에 대한 김일성의 과신을 다 같이 의심했었지만, 그로서는 전쟁의 조기종결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毛澤東이 김일성에게 던진 충고와 그리고 필요할 경우 군사지원을 기꺼이 약속한 것도 사실상 개전에 동의한 이상 미국이 개입하기 전 조속히 승리하길 기대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둘째, 남침동의 후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지 않고 毛澤東 자신이 우려한 미국의 개입이 현실화되어 불가피하게 중국군을 파병해야 할 상황이 도래할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었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소련의 국부적 개입, 혹은 적어도 소련 무기 장비의 전폭적 지원을 기대했을 수 있다. 근거는 신중소동맹의 체결로 체결 당사국 중 일방이 적대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으면 다른 일방이 군사적으로 지원한다는 조항이었다. 동년 4월 중순 毛澤東이 “만약 제국주의자가 우리를 치려고 하면 (중소동맹조약에 근거해) 원조자(소련)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됐다”고 언급한 사실이 이를 의미한다.

  

셋째, 전쟁도발을 동의하는데에 부차적인 요인이긴 하지만 중북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김일성이 남한을 조기에 석권하면 그 자체가 중국에게는 일본의 재기를 견제하는 역할이 됨과 동시에 순망치한이라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미국에 대한 안보방벽이 두터워지게 됨을 뜻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일이다. 또 그럼으로써 북한 지도부와의 관계도 공고화될 수 있다. 따라서 毛澤東은 자신이 스탈린과 공동으로 얄타협정을 용도폐기하기로 결정한 이상 이제 한반도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한 김일성의 “인민해방전쟁”, “내전”을 저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은 얄타체제를 유지시킬 목적으로 毛澤東이 국민정부를 끝까지 추격해 소멸시킬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중공군이 중국전역을 모두 점령하지 못하도록 만류한 바 있는 스탈린의 심사와 사뭇 대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毛澤東이 우려한 대로 미군이 한반도로 진주해올 경우 그것은 그가 예상한 미국의 대중국 공격로인 한반도, 臺灣, 베트남 등의 3로 중 한 루트인 臺灣을 버리고 한반도로 군사력을 집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은 되레 臺灣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즉 이 때까지만 해도 기존의 방침대로 臺灣해방을 노리고 있던 毛澤東에게 미군의 한반도 군사개입은 한편으로 미국의 주의와 군사력이 분산됨을 뜻하기 때문에 臺灣해방작전을 유리하게 전개시키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구상이 가능했던 까닭은 毛澤東으로선 미국이 전쟁발발과 동시에 즉각 미 제7함대를 臺灣해협에 급파하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Ⅶ. 맺는 말

 

毛澤東은 1950년 5월 중순 北京을 방문한 김일성이 직접 남침전쟁에 대한 동의를 요청하기 전까지는 드러내놓고 6.25전쟁을 지지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세계공산주의운동의 모토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이념적 입장에서 한반도가 공산화되기를 바랐을 뿐이다. 즉 원론적 차원에서 한반도적화의 수단인 남침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가 수만 명에 달한 중공군 소속 한인 병력을 북한으로 이송해준 것도 이러한 당위론적 입장에서 취한, 원론적 지지를 표하는 조치였다. 바꿔 말하면 이 기간 동안 그는 일관되게 “즉각적인” 대남 전쟁도발에 대해서는 반대해왔다. 국내의 각종 시급한 현안해결이 더 급했고, 무엇보다 臺灣해방이 우선돼야 했기 때문이다. 毛澤東이 ‘아시아공산당, 노동당, 코민포름’을 결성해 공산진영 대 자유진영의 구도로 미국에 대항하자는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한 까닭도 이 같은 현안들을 먼저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毛澤東에게 ‘아시아공산당, 노동당, 코민포름’을 결성하자고 제의한 것은 그간 학계에서 주목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이다. 본문에서 주장한 것처럼 김일성이 이 기구를 매개로 삼아 공산진영 대 자유진영 간의 대결구도로 6.25전쟁을 치르려고 했는지는 앞으로 더 많은 공산 측 관련 자료들로 다시 한번 치밀하게 고증하고 규명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분명한 사실은 스탈린이 코민테른을 해체한 후 유럽 국가들로만 코민포름을 조직했고, 아시아의 공산국가들, 특히 중공과 毛澤東을 의도적으로 여기에서 배제한 점으로 보아 김일성의 이 제의가 스탈린의 지령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한 毛澤東이 ‘아시아 코민포름’결성 제의를 거부한 것도 그가 이 시점까지는 미국과의 전쟁에 연루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증거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毛澤東이 대남침략전쟁 자체를 반대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반도의 적화를 반대하지는 않았고 단지 1950년의 ‘조기’전쟁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가 애초부터 대남전쟁 자체를 반대할 생각이었다면 스탈린의 남침동의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김일성에게도 전쟁을 강력하게 만류하거나 제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毛澤東은 한동안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스탈린의 동의사실을 하나의 압력수단으로 삼고, 조기 승전을 과신한 김일성의 설득에 못 이겨 결국 기왕에 “동의할 바엔 실제 언동”으로 적극 지지하자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북소 쌍방이 이미 개전을 결정한 이상 전쟁은 중북 양국의 공통과제가 됐다고 하면서 북한에 대한 지원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다.

  

毛澤東의 남침전쟁 동의는 6.25전쟁이 ‘1950년 6월에 발발’하게 된 결정적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바꿔 말하면 그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1950년 내에는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이 해 6월에는 발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정치학적 입장에서 볼 때는 그들이 전쟁도발을 기정사실화 한 이상 전쟁발발이 1950년이 됐든 1951년이 됐든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역사학에서는 사건이 언제 발생했는가를 규명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毛澤東이 이 전쟁을 동의한 것은 세계공산주의운동에서 스탈린과의 동서 역할 분담에 대한 원론적인 의무감, 소련으로부터 자국의 국익을 보장받으려는 의도와 함께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기를 기대한 딜레마적인 상황에서 취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장차 있을 수 있는 신중소동맹의 파국을 막고, 그것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시기상조인 남침전쟁을 최종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말하자면 스탈린이 자신의 동북아전략을 실행하는 차원에서 毛澤東을 이용했다면 毛澤東도 아무런 조건 없이 연루된 게 아니라 국익보장을 위해 스탈린을 활용한 셈이다. 즉, 스탈린이 신중소동맹 체결로 말미암아 일실하게 된 중국동북지역의 군사요충지를 대신할 새로운 대미, 대일 견제용 군사전략지를 확보하기 위해 남침을 승낙했다면, 毛澤東은 신중소동맹 체결로 약속 받은 국가주권의 온전한 회수 등 총체적인 국익을 도모함과 함께 동시에 언젠가 실행해야할 한반도의 적화를 앞당기겠다는 차원에서 스탈린의 압력에 편승한 것이다. 이는 타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매개로 한 일종의 국제관계상의 거래였다.

  

스탈린은 전략구상의 첫 번째 단계로서 미군이 개입하기 전에 김일성 정권의 자력에 의해 한반도가 적화되기를 원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그 다음 단계의 전략으로 중국군을 투입시켜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는 복안을 가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스탈린은 毛澤東의 동의를 중국의 군사개입으로 인식한 듯하고, 그에게 중국군의 투입은 한반도의 적화를 성취시켜주는 동력임과 동시에 미국과 중국에 대한 동시 견제가 가능한 중층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毛澤東도 전쟁에 동의해 스탈린을 만족시킴으로써 소련으로부터 외교, 군사, 경제적 지원을 보장받을 수 있고, 한반도의 적화를 통해 안보방벽을 두텁게 쌓을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했을 수 있다.

  

그러나 毛澤東으로선 전쟁발동에 대한 동의가 반드시 중국군의 투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김일성의 남침구상에 동의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직접적인 한반도 군대파병을 염두에 두고 결정한 것이었다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毛澤東이 6.25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김일성에게 직접 동의의사를 표했을 때의 동의의 의미 및 동기와 이 보다 5개월 뒤인 10월 중순에 중국군을 직접 북한으로 들여보낼 때 그가 고려한 동기와 목적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즉 毛澤東으로서는 전쟁이 시작되면 최악의 경우 자국군의 투입도 염두에 두었겠지만, 5월 중순 전쟁도발을 동의했을 당시로서는 미국이 미 제7함대를 臺灣해협에 진주시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즉각적인 군사파병도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그는 김일성이 승리를 자신한대로 신속히 남한을 점령해 미군이 한반도에 당도하기 전에 남침전쟁을 조속히 종결해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毛澤東은 사전에 스탈린, 김일성과 전쟁도발을 공모한 결과 스탈린의 전쟁동의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김일성의 남침의사를 실현시켜준 역사적 책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는 없다. 그의 전쟁동의가 소련 및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총체적인 자국의 국익 확보라는 중층적 요인들로 인한 국가안보 행위였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결정이 아니었으며, 동시에 김일성의 무력도발을 성사시키는데 중요한 조건이 됐던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오히려 전쟁을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고자 한 면마저 있어 보인다. 침략자들 간의 공조를 의미한 그들의 사전 공모는 바로 남침전쟁이 현실화되는 조건을 형성시킨 중요한 外力 가운데 하나였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에 대한 공산권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위 논문은 학술진흥재단 등재학술지인『軍史』제71호(2009년 6월)에 실린 것입니다.『軍史』지에 실린 본문에는 각주가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