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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티베트 간 ‘17개조 협정’체결과정과 협정내용 분석

雲靜, 仰天 2014. 2. 10. 18:56

중국-티베트 간 ‘17개조 협정’체결과정과 협정내용 분석

 

서상문(중앙대 강사)

29 Itaewonro Yongsan-Gu Seoul, Korea

Institute for Military History and Compilation the Ministry of National Defence

 

 

Ⅰ. 머리말

Ⅱ. 두 당위론의 충돌 : 티베트의 ‘독립’의지와 중공의 ‘해방’의지

Ⅲ. 티베트 ‘해방’의 실현수단

Ⅳ. 중국-티베트간의 협상전개 과정과 쟁점

Ⅴ. 달라이 라마는 협정을 비준했는가?

Ⅵ. ‘17개조 협정’의 정치적 함의

Ⅶ. ‘17개조 협정’의 문제점 및 평가

Ⅷ. 맺음말

 

 

Ⅰ. 머리말

 

1951년 5월 23일, 중화인민공화국정부 대표와 티베트정부 대표는 北京 中南海의 勤政殿에서 중국과 티베트의 관계를 규정한 중국‘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지방정부의 평화적인 티베트해방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이른바 “17개조 협정”(Seventeen Points Agreement)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이하 본고에서도 “17개조 협정”으로 간칭하겠다.)

 

 

'17개조 협정' 조인식 광경

  

중국은 지금까지 이 협정을 티베트가 자국의 불가분의 영토임을 재확인하고, 티베트에 대한 주권행사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근거의 하나로 삼아 왔다. 중국은 언필칭 중국인민해방군(이하 ‘중국군’으로 약함)의 티베트본토 진격 및 점령을 가리키는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도 바로 이 협정에 근거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티베트망명정부의 달라이 라마 측은 이 협정을 부정하고, 당시 티베트는 독립된 하나의 국가였다고 주장한다. 협정이 중국의 강압에 의해 체결됐으며, 더욱이 티베트정부의 수장으로서 협정에 대한 최종 비준권자인 달라이 라마가 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협상 자체가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형식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효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같은 상반된 두 입장은 오늘날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통치 및 대외적인 주권행사가 정당한가 하는 합법성 여부를 판단함에 주요한 쟁점이자 근거가 되고 있다. 따라서 학계에서도 이 같은 사정이 반영돼 지금까지 “17개조 협정”에 관한 적지 않은 검토가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선행 검토와 논의는 주로 언급한 회담의 적법성이나 협정의 합법성, 중국군의 티베트 진주행위에 대한 정당성 등을 둘러싸고 제기된 다양한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에 치중돼 있다.

  

본고에서는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재검토해보고자 한다. 즉 “17개조 협정”은 중국과 티베트 양측이 어떤 배경과 상황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체결됐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상반된 주장이 나오는가? 중국정부와 티베트망명정부가 각기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본고는 이 물음들에 답하면서 궁극적으로 비중 있게 고찰하고자 하는 부분은 본 협정의 내용분석을 통해 내재된 쌍방의 정치적 함의를 밝혀 내는데에 있다.

 

 

Ⅱ. 두 당위론의 충돌 : 티베트의 ‘독립’의지와 중공의 ‘해방’의지

 

티베트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상호인식(mutual image)은 어땠을까? 우호적이든―그래서 선린관계가 형성되든가, 아니면 적대적이든―그래서 전쟁이나 침략을 감행하는 등의 상대국에 대한 어떤 행위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고, 그러한 민족적 인식 내지 분위기(ethos)가 상호 관계의 성격을 결정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바꿔 말하면, 한 국가가 특정 상대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라고 하는 문제는 쌍방간의 외교관계의 성격, 전쟁 혹은 침략과 병합 등의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심리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

  

1949년 10월 중국대륙에 새로운 국가가 들어서기 전까지 티베트인들은 스스로 민족, 언어, 종교, 문화, 습속 등에서 중국과 완전히 다른 공동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한 인식은 과거로부터의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었지만, 단지 그것을 현실화 할 국력과 군사력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티베트인들은 중국의 정치정세를 항시 주시해오면서 그의 변화에 따라 대응해온 패턴이 존재했다.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중국 내 각 성의 반청 정치세력들이 제각기 독립을 선언하고, 결국 청조가 무너지자 티베트정부는 이 틈을 타 1912년과 1913년 두 번 연거푸 독립을 선언했다. 제13대 달라이 라마인 툽텐 갸초(1875~1933)가 짧은 인도 망명을 마치고 티베트 라사(Lhasa)로 돌아와 국민당군대와 관료들을 모두 축출하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 독립선언은 1914년 7월 인도북부 도시 심라(Simla)에서 개최된 협상에서 티베트, 영국, 중화민국정부의 대표들에 의해 승인되었지만 중화민국정부가 최종 비준을 거부해버리는 통에 종주권을 주장하는 중국이 제외된 일방적인 행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 회담은 평화적으로 진행됐고, 협상 결과 체결된 이른바 이 ‘심라조약’은 티베트를 내외 두 부분으로 나누고, 명의상 중화민국이 티베트에 대한 권리(즉 종주권)를 가진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승인을 거부하자 하는 수 없이 영국정부와 티베트정부만이 비준한 것이었다.(Yang. 2003, pp.47-49). 중화민국정부는 심라조약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 티베트에 속해 있던 캄지역 전체에 대한 군사통제권까지 획득했다.

  

캄지역이 중화민국의 수중에 떨어지자 티베트정부 소재지인 내지가 공격권에 노출됐다. 이로 인해 ‘국가’존립에 위협을 느낀 제13대 달라이 라마는 중국군이 점령한 지대에 군대를 증파해 실지 회복을 위한 반격에 나섰다. 그리하여 티베트군은 1917년에서 1918년에 걸친 교전으로 국민당군을 디추강(Dichu, 중국명 金沙江) 이동 지역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에 힘입어 1918년 중반 티베트정부는 중국과의 협상을 통해 휴전을 이끌어내고, 디추강을 중심으로 중국-티베트 경계선을 새로 확정했다.

  

그러나 이 휴전은 국민당군을 디추강 이서로 더 이상 침입하지 못하도록 한 일시적인 성과 밖에 없는 것이었다. 원래 달라이 라마가 지배하던 이른바 대티베트 지역의 일부였던 디추강 이동 지역의 일부를 국민당군에 내주게 됐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디추강 이동 지역의 바탕(Bathang, 중국명 巴塘), 바이율(Bhahyul, 중국명 白玉州=白玉), 데르게(Derge, 중국명 德化州=德格), 뎅코(Tongkhor, 중국명 登科府=登柯) 등의 주요 읍성들이 모두 중화민국정부의 통제를 받게 됐다. 당시 디추강을 중심으로 한 이동지역과 이서지역은【지도 1】과 같았다. 또한 1940년 4월 1일에 중화민국이 설립한 國民政府蒙藏委員會 주 티베트 판사처(國民政府蒙藏委員會駐藏辦事處)는 여전히 라사에 주재하게 됨으로써 티베트는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Wang, Lixiong, 1998, pp.89-101).

 

【지도1】

 

그 후 1940년대에 들어와 중국대륙의 패권을 두고 폭발한 국공내전이 가열되자 티베트정부는 다시 한 번 독립을 시도했다. 1942년 7월 8일, 의회(Tsong-du)의 형태로 내각 구실을 해온 카샥(Kashag)은 영국의 지지 하에 국공내전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구실로 중화민국 國民政府蒙藏委員會 주 티베트 판사처 관리들을 추방하고, 티베트정부 산하에 ‘外交局’을 설치하겠다고 공언했다. 달라이 라마의 자문기구 역할을 하면서 실권을 행사한 카샥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목적은 이 판사처와 동등한 기구를 설립하여 독립국가로서의 의지를 현시하겠다는 것이었다.(Huang, Yuseng et al., 1995, p.322 ; Xie, Jian, 1999, p.98.) 명분과 달리 실제는 중국군의 티베트 진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중화민국 國民政府蒙藏委員會 주 티베트 판사처 처장 孔慶宗은 이를 본국정부에 보고했다. 이 보고문에 의하면, 티베트인들은 중화민국정부를 외국으로 여기고, “티베트를 독립국”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이 外交局은 1942년 8월 초순 중화민국 행정원의 훈령으로 폐지됐다.(Fu, Juhui, 1993, pp.1-2).

  

이러한 중국과의 대등의식, 중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독립의식은 바로 티베트가 중국과 별개의 국가라는 인식이 전제돼 있다. 별개의 의식은 1948년 5월 중화민국정부의 초청을 받아 南京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의 총통선거에 참석한 티베트 대표가 돌연 자신은 “손님”자격으로 “참관”하러 온 것이지 중화민국의 티베트대표 자격으로 온 게 아니기 때문에 투표를 할 수 없다고 하면서 투표를 거부한 행위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이 보편 티베트인들 사이에 내면화된 대중국 인식이자 정서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을 두고 당시 티베트인들이 의식면에서는 거의 중국을 떠나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도 같은 맥락이다.(Ya, Hanzhang. 1986, p.441.) 이러한 티베트인의 대중국 인식은 중국의 대티베트인 인식과 첨예하게 엇갈린다.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한 마디로 외국 제국주의 세력의 압박과 정교일치의 봉건제도로 인해 이중으로 시달리고 있는 티베트인들을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방’이라는 메시야적 사명의식은 중공이 중국내 국민당의 ‘폭정’으로부터 해방된 지역들을 군정으로 관리하고 있듯이 티베트에 대해서도 군정으로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티베트의 봉건제를 떠받치고 있는 정교일치 사회를 사회주의화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티베트에 대한 점령과 통치는 비단 중공만이 아니라 蔣介石의 국민당도 추구해왔다는 점에서 국민당의 정책을 상속받은 셈이었다.

  

1949년에 접어들어 중공이 蔣介石의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원의 새로운 패자가 될 가능성이 커지자 라사의 분위기는 극도의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이 곧 중국전토를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짙어짐에 따라 티베트정부도 초조해 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행운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종교의식까지 거행하기도 했다.(Goldstein & Sherap & Siebenschuh, 2009, p.208)

  

티베트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중공수뇌부는 내전 막바지에 국민당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여 중국의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 티베트‘해방’에 착수했다. 毛澤東은 1949년 8월 6일 중공西北局 제1서기인 彭德懷에게 판첸 라마와 甘肅, 靑海의 티베트인들을 보호하고, 무력으로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해방”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Yu, ren, Dangshi wenhui. 2, 1997. p.8.) 중국이 티베트를 공략하고자 한 이유는 티베트정부가 국공내전의 혼란을 틈타 辛亥革命발생 때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선포한데다 미국, 인도 등이 배후에서 티베트정부의 독립을 부추기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Yang, Kaihuang. Ed. 2003, p.156.)

  

중공이 내세운 修辭的 명분은 티베트에 대한 역사적 주권이 중국에 있다는 점, 그리고 티베트를 제국주의의 침략에서 구한다는 것이었다. 티베트인민이 “중국인민과 불가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어떠한 외국의 분할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중국인민,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의 바뀔 수 없는 굳은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Xinhuashe shelun. Jue burongxu waiguo qinluezhe tunbing Zhongguo de lingtu Xizang. Sep. 3. 1949,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 Zhoggong Xizang zizhiqu weiyuanhui. Eds. 2005, p.2.) 중공의 주장은 사실상 蔣介石의 국민당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받고 있는 내전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毛澤東은 약 2개월 뒤 10월 1일 北京의 天安門 누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중국의 영토로서 티베트를 해방할 것임을 대외적으로 공식화 했다.

  

이에 대해 티베트의 카샥은 성명을 발표하여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는 승려와 시주자의 관계이며, 중국의 일부분이 아니라고 단호히 반박했다. 또 티베트는 외국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이 있지도 않는 제국주의에서 해방 당해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Tsepon W. D. Shakabpa, 1967, p.299.)

  

그러나 중국은 라사정부가 독자적으로 행사해온 국가를 상징하는 통치 및 외교행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했다. 그럼으로써 당시 유엔에서 티베트정부가 제기한 제소가 심의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외적으로 티베트가 국제분쟁지라는 인상을 불식시키고, 티베트문제를 철저히 국내문제화 하고자 했다. 중국이 말하는 라사정부의 독자적인 통치 및 외교행위란 1948년 티베트무역대표단이 티베트정부의 여권을 가지고 홍콩을 거쳐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을 방문한 사실, 그리고 그 후 계속해서 영국, 미국, 인도와 네팔 등 4개국에 지원을 요청한 것 외에도 1950년 1월 17일 달라이 라마가 유엔에 티베트문제 해결을 위한 논의를 제청한 활동들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1950년 1월 20일 중국은 외교부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여 티베트는 중국의 영토이며, 라사당국은 마음대로 외국에 “사절단”을 보낼 권리가 없으며, “독립”을 표명할 권리는 더더욱 없다고 경고한 바 있다.(Renmin ribao, Jan. 21. 1950.)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려고 한 데는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주권회복”이나 티베트의 ‘해방’ 및 사회주의개혁과 같은 명분 외에 실제적으로 티베트가 중국의 국익에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大中華主義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중국인의 전통적 관념 가운데 하나는 가정의 식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국가의 판도는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것이 있다. 중국역사상 ‘大一統사상’이 자주 출현했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대국주의가 드러나는 이유다. 원래의 티베트는 중국 전역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광활한 지역이었던 만큼 중국이 생각하는 대국을 형성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다.

  

둘째는 소수민족에 대한 구심력 이완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티베트가 독립하도록 방치하면 곧 북쪽 新疆자치구의 위구르족들과 내몽골자치구의 몽골족의 분리운동으로 번져갈 우려가 있다.

  

셋째, 티베트의 각종 부존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티베트는 우라늄을 비롯해 보크사이트, 구리, 리튬, 금광, 라듐, 철광석, 철, 석유, 석탄, 연, 망간석탄, 크롬, 다이아몬드, 마그네슘 등 70여종의 다양한 광물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그 뿐만 아니라 수자원도 보유량이 2억㎾로, 중국 전체의 30%를 차지하는 보고다. 또한 삼림 축적량도 14억㎥으로 중국 내 5위다.

  

넷째, 안보, 군사 전략적 요충지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Suh, Sang-mun, 2009 Summer, pp.102-104)

  

상기 네 번째 이유를 좀더 부연하면 다음과 같은 사정이 존재했다. 중국의 국가 전략적 관점에서 티베트는 중국 서남부지역의 중요한 울타리다. 현재 중국측의 행정지리 개념으로만 봐도 북쪽으로 新疆, 靑海와 맞닿아 있고, 동쪽으로 四川, 雲南, 貴州과 연접해 있다. 또 서남쪽으로는 인도, 부탄, 네팔, 시킴, 미얀마와 국경을 형성하고, 서쪽으로는 카시미르 지역과 타지키스탄의 일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동서남북의 국경선과 변경선은 장장 3,900㎞에 이른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티베트는 국방의 요새일뿐만 아니라 과거 소련이 서남아시아로 남하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발판으로서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Shen, Weilie & Lujunyuan Eds. 2001, p.447.) 20세기 영국의 저명한 지리학자인 할포드 맥킨더(Halford J. MackKinder)도 1942년에 이미 티베트지역을 세계를 장악할 수 있는 세계 3대 전략지대의 하나로 평가한 바 있다. 그는 세계를 미주, 아프리카-유럽, 유라시아 등의 3대 전략지대로 나누고, 세 번째의 유라시아 가운데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위구르(新疆), 티베트의 고원지대를 점령하면 바로 유라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장악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Halford J. MackKinder, 1942, pp.100-101.)

  

1949년과 50년 당시 김일성의 한국전쟁 도발에 동의하는 과정에서 영국, 미국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포위당할 것을 극히 우려한 毛澤東 역시 티베트를 자국의 남서부 방면의 안보에 매우 중요한 전략지역으로 여기고 있었다. 인도가 갓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여전히 영국의 영향하에 중국포위에 이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인도와의 관계에서 완충역할을 해온 티베트가 인도와 가까워지거나 독립국이 되도록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티베트 점령 임무를 지시한 鄧小平, 劉伯承, 賀龍 등에게 티베트가 인구는 많지 않지만 “국제지위”, 즉 국가 전략적으로는 극히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반드시 수중에 넣어야 한다고 강조한 배경이었다.(Mao, Zedong. Guanyu you xinanju chouhua jinjun ji jingying Xizang wenti de dianbao. Jan. 2. 1950.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Ed. 1987. Vol.1. p.208.)

 

 

Ⅲ. 티베트 ‘해방’의 실현수단

 

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티베트를 ‘해방’시킬 것인가? 그 방법은 티베트정부에게 중국의 주권과 기타 ‘해방’과 통치의 조건을 인정한다는 점을 문서화하도록 하기 위해 먼저 티베트 현지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것이었다. 티베트 내지에 대한 군사공격은 중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협상을 거부하는 카샥에 대한 압박이었다. 티베트정부를 협상장으로 불러내기 위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로 하고, 중국은 1950년 들어 본격적으로 티베트 점령준비를 개시했다. 毛澤東은 雲南, 貴州, 四川, 西康省을 관할하는 중공 西南局의 鄧小平에게 1월부터 착수하여 4월 중순 이전까지 모든 군사준비를 마치게 한 뒤 먼저 西康과 티베트 접경지역까지 밀고 들어갔다가 다시 자동차 등의 장비를 정비하고 4월 중순에 티베트로 들어가기로 계획을 잡았다.(Mao, Zedong. Guanyu you xinanju chouhua jinjun ji jingying Xizang wenti de dianbao. Jan. 2. 1950.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Ed. 1987. Vol.1. pp.208~209.) 그러나 중간에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 계획은 실행이 더뎌졌었다.

  

동년 8월 23일, 毛澤東은 중국군이 만약 계획한 시간 안에 참도(Cham-do, 중국명 昌都)를 수중에 넣게 된다면 그 다음해에 티베트본토의 라사 점령까지 용이해질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카샥에게 협상대표단을 北京으로 보내도록 압박하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Mao, Zedong, Guanyu jinnian zhanling Changdu wenti gei xinanju de dianbao. Aug. 23. 1950,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Ed. 1987. Vol.1. p.475.) 이를 위해 그는 중공군에게 10월중에 디추강 너머 자추강(메콩강) 이서 지역의 참도를 점령할 것을 독촉했다. 자추강 상류의 북서쪽에 위치한 참도는 티베트본토에 속해 있지만 본토 중의 핵심내지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라사로 통하는 군사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티베트정부는 영국과 인도의 조언에 따라 독립을 선포하고, 4개 친선사절단을 각기 미국, 영국, 인도와 네팔에 보내 독립선포 사실을 알리면서, 이 국가들에게 유엔과 함께 티베트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Shi, Zhexiong. In Wer, E. Eds. 1986, pp.65-66.)

  

그러나 친선사절단의 방문을 받은 4개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거나 아니면 지원할 능력이 없어 모두 지원을 거부했다. 영국정부는 티베트인들의 처지를 깊이 동정하지만 영국 본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더군다나 인도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지원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되는 것이 유감이라고 했다. 미국정부도 대략 같은 취지의 답변을 보내면서 티베트 대표단의 미국방문을 거부했다. 인도정부는 군사 지원을 해줄 수 없다고 하면서 티베트정부에게 무력으로 중국군에 대항하지 말고 1914년의 ‘심라조약’처럼 평화적으로 北京측과 협상할 것을 권유했다. 네팔은 지원해줄 능력이 없는 경우였다.(Lin, Zhaozhen. 1999, pp.56~60.) 외국의 군사지원 요청이 무위로 돌아감에 따라 티베트정부는 고립무원에 빠지게 됐다.

  

티베트정부는 상기 4개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병력을 징집하고, 중국군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티베트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5,000명의 병력에다 훈련시킨 지방민병 3,000명과 함께 약 8,000명을 참도와 디추강 차안 일대에 배치했다.

  

중공당국은 毛澤東의 명령에 따라 1950년 여름부터 참도 공격을 준비해오면서 한편으로 티베트 측과 협상을 벌였다. 9월 중국은 인도주재 중국대사 袁仲賢을 통해 협상차 인도에 온 티베트대표단에게 티베트가 중국영토의 일부라는 사실과 티베트에 대한 국가방위 책임은 중국에 있으니 평화적으로 ‘해방’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즉 저항하지 말고 ‘해방’과 중국군의 진주를 합법적으로 받아들이라는 요구였다. 티베트측은 중국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제의도 거부했다.(Tsepon W. D. Shakabpa, 1967, p.301.)

  

이에 毛澤東은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 7일 극비리에 티베트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진격을 개시한 중국군은 모두 4개조로 나눠 4개 방향에서 티베트를 공격해 들어갔다. 중국군의 전략 목표는 티베트군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新疆에서 아리(중국명 阿里)를 목표로 공격해 들어간 제3로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노선은 모두 캄區의 성도인 참도를 공략하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과 같았지만, 참도와 디추강 서안 일대에 배치된 티베트군 주력은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대항했다. 하지만 티베트는 애초부터 병력이나 무기면에서 중국의 정규군을 대적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참도는 약 2주 만인 10월 19일에 함락됐다. 참도의 티베트군 전체 병력의 반에 해당하는 5,000여명이 중국군에 섬멸됐고, 나머지는 거의 다 포로가 되거나 투항했다. 포로 혹은 투항자 가운데는 티베트정부의 大臣인 카론(噶倫) 겸 참도 지사 가보 아왕 직메(Ngabou Ngawang Jingme, 중국명 阿沛 阿旺晋美) 등 고급관료들과 장교 30여명이 포함됐다. 티베트군의 주력을 격파한 중국군은 이제 전투가 가능한 계절이라면, 또 후속 병참보급만 확보되면 언제라도 티베트본토의 라사로 진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 셈이었다.

  

중국은 티베트정부에 군사행동의 목적을 통고했을 뿐만 아니라 혹 있을 지도 모를 영미 등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국제사회를 향해서도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즉 “티베트는 중국영토의 분할할 수 없는 일부분이고, 티베트문제는 완전히 중국의 내부문제”이며, 중국군이 티베트에 진격한 사명은 “티베트인민을 해방하고 중국의 변강을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Mei. Gedesitan. 1994, p.750.)

  

중국군이 언제 라사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티베트 카샥의 섭정 타탁 린포체(중국명 達紮活佛)는 또 다시 1950년 11월 7일 긴급히 유엔에 중국의 티베트 영토“침입”을 알렸다. 동시에 그는 여론에 밀려 그 동안 10년간 맡아오던 섭정직에서 물러나면서 당시 제13대 달라이 라마 툽텐 갸초의 환생으로 검증된 이래 법왕 수업 중에 있던 15세의 텐진 갸초(1935~)에게 예정보다 앞당겨 친정하도록 했다. 1950년 11월 17일 달라이 라마는 15세의 나이로 티베트 전통의식을 거쳐 정교일치국가인 티베트의 교권과 세속권력을 통어하는 보좌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제5대 달라이 라마 나왕 롭상 갸초(1617~1682)이래 내려온 전통에 따라 롭쌍 따시와 루캉와 두 사람을 각기 승단계열과 평민계열을 대표하는 총리로 임명했다.

  

법왕의 지위에 등극하자마자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동부전선으로 병력이 증강된 중국군이 인도로 망명하는 퇴로를 차단할 것을 염려해 두 총리에게 라사에 남아 자신을 대리해 정무를 보게 하고, 카샥의 구성원들과 12월 19일 라사를 벗어나 티베트와 시킴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트로모(중국명 亞東)로 도피했다. 트로모는 라사로부터 322㎞ 떨어진, 히말라야 산맥의 산록 가운데 비교적 해발이 낮은 곳이다. 1951년 1월 2일 트로모에 도착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정부의 관인인 국새를 가지고 이곳의 지방관청 관사를 거쳐 둥카르라는 작은 사원(東噶寺)에 은거했다. 달라이 라마가 트로모로 도피한 까닭은 이곳이 중국측과의 담판을 지켜보면서 만일의 경우, 즉 협상이 잘못 돼 중국군이 티베트본토로 진주해올 경우 신속히 인도로 망명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도국경까지는 불과 몇 ㎞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Wang, Lixiong, 1998, p.149).

  

트로모 도착 즉시 달라이 라마는 다시 한 번 인도, 영국과 미국정부에 티베트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지원을 받지 못했다. 티베트정부가 지원을 요청한 미국, 영국, 인도와 네팔 등이 모두 외면하거나 방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티베트가 중국의 침략을 제지해줄 것을 요청한 유엔총회에서도 1950년 11월 15일 엘살바도르가 티베트문제를 상임위원회에 의제로 채택해 논의할 것을 제의했지만 영국의 반대에 부딪혀 논의가 무기한 연기됐다.(Ochiai, Kiyotaka. 1994, p.89.) 당시 자국의 식민지인 홍콩이 불이익을 받을 것을 염려한 영국의 주장을 받아들인 유엔이 티베트는 “중국의 소관”이라는 이유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중국은 티베트 민족의 일부가 거주하고 있는 靑海省의 암도지역 점령 직후 달라이 라마의 큰형인 툽텐 직메 노르부(탁최 링포체)를 달라이 라마의 대관식이 거행되기 약 2주 전쯤에 그에게 보내 중국의 티베트 ‘해방’을 “평화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 툽텐 직메 노르부는 자신이 주석하고 있던 암도지역의 쿰붐 사원에서 중공에 연금 당한 상태에서 공산당원으로 전향시키고자 한 중공의 사상교육을 받은 후 강제로 달라이 라마를 설득하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Tenzin Gyatso. 2003, pp.98-99.)

  

또한 중공은 티베트와의 협상에서 소기의 목적, 즉 중국의 의사가 최대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할 목적에서 티베트 대표단원들을 회유했다. 특히 가보 아왕 직메를 공산주의 사상전향 교육을 집중적으로 가할 대상으로 삼았다. 방법은 각종 수단을 동원한 사상전향이었다. 그들을 연금시키거나 아니면 인간적 예우, 선물공세, 그리고 소련과 중공의 공산주의 및 중공의 소수민족정책과 민족간의 평등, 종교의 자유에 대한 정책들을 이해시키는 수단이 동원됐다.(Goldstein & Sherap & Siebenschuh. 2009, pp.239~241.) 이 결과 티베트 대표들 가운데는 가보 아왕 직메를 비롯해 일부가 중국 편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Ⅳ. 중국-티베트간의 협상전개 과정과 쟁점

 

중국은 달라이 라마에게 전쟁을 피하고 양측의 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대표단을 北京으로 보내 중국측과 협상을 할 것을 요청한 서한을 보냈다. 서한에는 그렇지 않으면 중국군이 즉각 달라이 라마의 거처지로 쳐들어 갈 것이라는 내용도 덧붙여 있었다.(Tenzin Gyatso. 2003, p.109.) 이 제안은 중국측의 요구를 받아들인 가보 아왕 직메가 중국의 의사를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거는 당시 가보 아왕 직메가 중공군 포로신분으로 점령지 참도에서 수용돼 있던 반년 동안 중공당국이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펼친 회유공작에 넘어가 심정적으로 어느 정도 친중적 입장으로 돌아선 인물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는 사실이었다.(Goldstein & Sherap & Siebenschuh. 2009, p.248.)

  

협상요청 서한을 접한 달라이 라마는 중국측의 협상요구에 응하기로 결심했다. 1951년 1월 17일, 그는 인도 주재 중국대사 袁仲賢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이 티베트민중의 열렬한 요청으로 친정하게 됐고, 또한 티베트정부의 최고 정책결정자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대표단을 北京에 파견해 중국측과 협상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Dan, Zeng & Zhang, Xiangming. 1996, p.71.) 달라이 라마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중국과의 협상에 나서기로 마음먹게 된 배경은 중국군이 진격해올 경우 발생할 대량의 인명 살상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Tenzin Gyatso. 2003, p.109.)

  

이외에 현실적으로도 강대국의 외교적, 군사적 지원을 보장받지도 못하였고, 자체적으로 중국의 대군을 저지할 만큼의 강력한 군사력도 없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중국측과의 협상은 참도가 함락된 이후의 고립무원, 불가항력의 상태에서 중국군의 티베트본토 침입을 막아볼 심산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부득이한 타협이었던 셈이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의 협상에서 견지할 다섯 가지 방침을 정했다. 첫째, 중국측에 티베트에는 자본주의 침략세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시킨다. 영국과 약간의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관계는 청조의 침입을 피해 제13세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한 1910년 이후부터 지속된 것이었다. 또 미국과는 통상관계만 있을 뿐이다. 둘째, 역대 중국정부가 점령한 지역과 중국군이 ‘해방’한 지역인 암도와 참도지역을 돌려받는다. 셋째, 만약 외국세력이 침입을 하면 그 때가서 중국정부에게 협조를 요청한다. 넷째, 캄과 티베트 북쪽 암도지역에 들어온 중국군의 철수를 요청한다. 다섯째, 금후 판첸 라마 측이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정부에 대해 도발을 할 경우 중국정부에게 이를 용인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Dan, Zeng & Zhang, Xiangming. 1996, p.71.)

  

이 중 두 번째 방침은 제국주의 세력을 쫒아내기 위해 진주한다는 중국의 명분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여 중국의 침입을 막고자 한 의도였다. 다섯째 방침은 판첸 라마가 정치 권력화 돼 있는 비정상적인 현상을 원래의 전통으로 되돌려 보려는 의지의 표현으로서, 달라이 라마 자신만이 티베트정부의 유일한 합법적 정통 권력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원래 판첸 라마는 종교적 권위 이외에 세속 권력을 갖지 못하게 돼 있는 것이 전통이었지만 제9대 판첸 라마 최키 니마(1883~1937)때부터 상황이 달랐다. 후술하겠지만 이때부터 판첸 라마는 휘하의 추종자들과 세속권력을 휘둘러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침탈하는 상황이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상기 달라이 라마 측의 이 의도는 판첸 라마를 달라이 라마 견제에 이용하려는 중국의 티베트분열 책략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동기도 섞여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毛澤東에게 보고된 달라이 라마의 “다섯 가지 방침”은 이와 약간 다른 내용이다. 예컨대 중국정부는 “티베트에 영미의 제국주의 강권이 존재하는지 관원을 파견해 직접 확인해도 좋다.” 또 중국정부는 “금후 군대를 티베트에 파견하지 말 것”과 “티베트는 과거에 외국세력과 결탁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탁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티베트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으면” “한족과 티베트족의 고유한 관계에 의거해 중국정부에게 원조를 요청할 것인데, 그 때 지원해줄 것”과 “캄과 아리에 들어온 군대는 중국내지로 철수시킬 것”, 그리고 중국과 티베트 간의 “화목한 관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중국정부가 “헛소문을 퍼뜨리지 말 것”을 요청한다는 것 등이다.(Liu, Shaoqi & Zhou, Enlai. Guanyu Xizang wenti jinqi chuli qingkuang gei MaoZedongde dianbao. Mar. 27. 1951.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 Zhoggong Xizang zizhiqu weiyuanhui. Eds. 2005, p.41.) 상기 두 가지 방침을 종합하면 당시 티베트정부가 중요시 했던 것은 중국군의 침략중지와 중국군의 철수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는 협상의 구체안을 협의하기 위한 티베트측 대표로 티베트정부의 카론인 가보 아왕 직메, 티베트군 총사령관 케메(Khemey Sonam Wangdi, 중국명 凱墨索安旺堆), 종교계 대표 툽텐 텐타(Thupten Tenthar, 중국명 土丹旦達), 툽텐 렝묀(Thumpte Lekunuun, 중국명 土登列門), 삼포 세이(Sampsey Tenzin Thundup, 중국명 桑頗登增頓珠) 등 5명을 선정했다. 수석대표에는 참도전투에서 중국군에 포로가 된 바 있는 가보 아왕 직메의 자원의사를 받아들여 그를 임명했다.

  

1951년 3월 티베트 대표단은 1진과 2진으로 나누어 각기 다른 경로를 거쳐 北京으로 들어갔다. 중국측은 티베트 대표단이 도착하는 곳마다 그들을 극진히 환대했다. 그들이 重慶에 도착했을 때 당시 중공 西南局 제1서기인 鄧小平과 제2서기인 劉伯承이 모두 친히 重慶의 비행장까지 나와 그들을 영접했다. 4월 22일, 근 1개월에 걸친 여정 끝에 도착한 北京에서는 중국정부의 정무원 총리 周恩來, 중국군 총사령관 朱德과 각 소수민족 대표 300여명이 北京역까지 나와 그들을 환영했다. 티베트 대표단은 유서 깊은 ‘北京飯店’에 여장을 풀었다.

  

4월 29일부터 ‘北京市軍事管理委員會’의 交際廳에서 시작된 양측의 협상은 5월 2일, 5월 7일, 5월 16일, 5월 19일, 5월 20일, 5월 21일 총 7차에 걸친 마라톤 회의 끝에 3주 후인 5월 22일에 종결됐다. 중국측에는 정무원 부총리이자 통일전선공작부 부장 겸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주임인 李維漢이 수석대표, 중앙군사위원회 辦公廳 주임 겸 중공 티베트공작위원회 서기 張經武, 티베트 점령 임무가 주어진 중국군 제18군의 사령관 張國華, 西南軍政委員會 비서장인 孫志遠이 대표로 나왔다.

  

회의는 벽두부터 서로 견해가 다른 네 가지 문제로 쌍방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그것은 국가호칭문제, 중국군의 티베트본토 진주문제,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간의 서열 내지 위상문제, ‘17개조 협정’의 이행을 감시할 기구로서 티베트에 군사 및 행정위원회를 설립하려는 중국정부의 계획에 관한 것들이었다.

 

회의에서 티베트 대표단은 티베트와 중국에 대해 각기 “티베트정부” 및 “중국정부”로 호칭했고, 중국대표단은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로 호칭했다. 전자의 경우 각기 독립된 정치적 실체인 두 국가가 대등한 입장에서 회담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대해 후자는 티베트를 중국이라는 더 큰 실체 안의 하부단위로 간주한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용어문제는 다른 쟁점에 비해 그다지 심각한 대립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이 보다 더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안은 중국군의 티베트본토 진입문제, 그리고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관계문제였다.(Wang, Gui & Xiraonima & Tang, Jiawei. 2003, p.435.) 중국군의 티베트본토 진입문제와 관련해서 중국대표단은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국경을 방어하려면 중국군을 들여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티베트 대표단은 티베트에는 제국주의 외세가 없으니 군대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제국주의가 티베트를 위협하게 되면 그 때 가서 즉시 중국정부에 지원을 요청할 테니 현재는 중국군을 티베트에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군대를 티베트본토로 진주시키기로 방침을 정한 상태였었고, 이 방침을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티베트 대표단은 오랜 시간동안 격렬하게 반론을 폈지만 종국에는 협상이 깨지면 중국군을 공격시키겠다는 중국측의 위협에 양보하고 말았다.(Goldstein & Sherap & Siebenschuh. (2009, pp.248-249.) 그 대신 대외비 부칙에 가급적 소수의 병력만 투입한다는 조항을 넣기로 합의했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관계 내지 지위 문제는 티베트 내부 권력의 적통 문제와 직결돼 있음과 동시에 향후 중국의 티베트 통치구도와 닿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달라이 라마”라는 호칭은 큰 바다(大海)라는 뜻의 몽골어 ‘달라이’와 고승을 가리키는 ‘라마’라는 티베트어의 합성어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란 곧 학식이 큰 바다와 같은 고승, 큰 바다와 같은 영적 지도자를 의미한다. 티베트사회와 라마불교에서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서 부처의 환생이라고 믿어지는 살아 있는 부처, 즉 활불의 존재이자 티베트인의 정신적 지주임은 물론 세속의 정치권력까지 갖춘 법왕이다.

  

“판첸 라마”는 산스크리트어로 학자를 의미하는 ‘판디토’와 ‘위대한’의 의미를 지니는 ‘첸’의 합성어로서 “대학자”를 뜻한다. 티베트불교에서 달라이 라마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나툰 존재라면,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두 라마는 각기 두 문중의 환생과 법맥을 이어온 공생공존의 관계로서 일종의 “師兄지간”에 있었다. 원래 티베트 불교 내 4대 종파 중의 하나인 겔룩파 문중의 제5대 달라이 라마였던 나왕 롭상 갸초(1617~1682)가 자신의 달라이 라마 즉위에 중요한 역할을 해준 제4대 판첸 라마였던 롭상 최키 걀첸(1570~1662)에 대해 그를 자신의 후견인으로 여기며, 최초로 판첸 라마의 지위를 부여하고, 그 이전의 세 환생자들까지 모두 판첸 라마의 지위를 주게 된 역사가 있었다.

  

그런 연유로 약 1600년경부터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어느 한 쪽이 입적하면 각각 상대의 새로운 환생을 확인해주는 전통을 유지해왔다. 서로가 환생의 합법성을 확인해줘야 비로소 각각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로서의 지위가 인정됐던 것이다. 그러다가 제6대 달라이 라마 릭진 창양 갸초(1683~1706) 때부터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에 대한 합법적 최종 검증 및 확인권은 판첸 라마가 아니라 중앙왕조나 중앙 정부의 최고 책임자 밖에 없었다. (Duojiecaidan. 1988, p.9.)

  

그런데 라사측에서는 새로운 판첸 라마(제10대)인 최키 걀첸(1938~1989)을 선대 제9대 판첸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얼마간의 ‘과거’가 존재한다. 1910년 청조 군대의 티베트 공격을 피해 제13대 달라이 라마인 툽텐 갸초가 인도로 망명하자 제9대 판첸라마의 측근들은 티베트정부에 있던 징세권과 여타 정부권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했다. 제9대 판첸 라마는 이 문제가 발단이 돼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정부와 장기간 다툼을 벌인 끝에 1924년 중국으로 달아난 뒤 靑海省에서 국민당정부와 유대를 맺어오면서 티베트가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했던 인물이다. 티베트 귀국이 허락되자 그는 1937년 귀국하는 도중 티베트와 靑海의 접경지역인 제쿤도(Jyekundo, 중국명 玉樹)에서 사망했다.

  

판첸 라마가 죽자 그 휘하의 관리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판첸 라마의 다음 환생을 찾기 시작―티베트정부도 따로 찾아 나섰다―한 결과 한 아동을 찾아내어 제9대 판첸 라마의 환생을 중국 내 티베트인 거주지에서 찾아냈다고 공표했다. 그런데 라사의 티베트정부는 그 아동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판첸 라마의 추종자들에게 자기들이 찾은 후보를 라사로 보내 라사 정부가 찾은 여러 명의 후보들과 함께 이 가운데 누가 정확한 환생자인지 검증해서 결정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판첸 라마 쪽은 이 제의를 거부함으로써 라사가 내세운 후보들과 경합을 회피하고 일방적으로 자신들이 찾은 아동을 새로운 제10대 판첸 라마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는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선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인지를 판별하는 과정에서 엄격한 시험을 거쳤고, 환생자로 검증된 후 4살 때에 라사로 보내져 티베트의 전통적 교육을 받은 것과 대조된다. 그 아동은 라사에서는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국민정부가 臺灣으로 쫓겨 가기 직전에 판첸 라마로서의 정통성을 인정했다.

  

그 후 국민정부가 臺灣으로 패주할 즈음 당시 겨우 12세에 불과했던 제10대 판첸 라마는 靑海省에서 머물면서 새로운 패자인 중공과 협력하기로 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중국 수립일에 毛澤東과 朱德에게 티베트가 빨리 해방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Mao, Zedong & Zhu, De. Gei BanChan Eerdeni de dianbao. Nov. 23. 1949,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 Zhoggong Xizang zihiqu weiyuanhui. Ed. 2005, p.4.) 毛澤東과 朱德도 그 답례로 중국정부는 제국주의와 “국민당 반동통치”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티베트인의 희망을 만족시켜 줄 것이니 중국의 노력에 협조할 것을 당부한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Mao, Zedong & Zhu, De. Gei BanChan Eerdeni de dianbao. Nov. 23. 1949.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 Zhoggong Xizang zihiqu weiyuanhui. Ed. 2005, p.4.) 그 후 ‘17개조 협정’을 협상할 시점에는 이미 판첸 라마는 중국정부로부터 제9대 판첸 라마의 적법한 환생자로 인정받았고, 전적으로 공산당 편에 선 상태였다. 그는 중국측의 배려로 ‘17개조 협정’ 조인식에도 참석했고, 동 협정체결에 대해서도 “제국주의자의 패배, 인민민주주의정부의 민족정책의 승리”라고 환영의사를 표시했다.(Ochiai, Kiyotaka. 1994, p.125).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민족의 입장에서는 매국적 행위이며, 중국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이다.

  

중공수뇌부는 이처럼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간에 갈등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양측이 대단히 격앙돼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회담에서 중국대표단이 상부의 의중을 받들어 티베트대표단에게 12세의 이 소년을 판첸 라마로 인정하라고 강요하자 티베트대표들은 크게 반발했다. 티베트대표단은 판첸 라마에 대한 인정권이 전혀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수석대표 가보 아왕 직메가 판첸 라마에 대한 인정여부를 결정하는 고유한 권한을 움켜쥐고 있는 트로모의 달라이 라마에게 전보로 인정여부를 물었고, 달라이 라마가 그를 판첸 라마 10세로 인정한다는 답신을 보내옴으로써 해결됐다.(Goldstein & Sherap & Siebenschuh. 2009. pp.250-252.)

  

마지막으로 회담 중 가장 큰 문제가 된 의제는 중국이 티베트본토에 세우려는 군정위원회의 성격과 그 기능에 관한 것이었다. 이 문제는 회담 결렬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해결됐다. 중국대표단은 회담 개시 초기에는 군정위원회에 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티베트대표단은 중국이 티베트본토에 대해서는 통치하지 않을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티베트 대표단은 전통적인 달라이 라마정부의 존속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회담에 임했고, 또 회담에서 중국대표단측이 이 기구에 대한 의제 제안이 없자 협정내용에 만족했다. 그러나 회담 막판에 다른 의제들이 모두 타결된 뒤에 중국대표단이 갑자기 티베트본토에 군정위원회를 세우자고 제안하자 티베트대표들이 강력하게 반발했고, 중국측의 저의를 의심했다.

  

이 문제 역시 중국 측의 해명과 설득으로 티베트대표단의 오해가 해소됨으로써 가까스로 타결됐다. 중국대표단이 티베트대표단을 설득한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군정위원회는 중국의 표준적인 정책으로서 이미 중국의 4대 소수민족 지역에 모두 이 기구를 설치했고, 특별히 티베트에만 설립하는 게 아니다. 둘째, 군정위원회는 좀 더 대표성 있는 영구조직이 설립될 때까지 중앙정부를 대신하는 일시적인 행정조직일 뿐이지 티베트정부 위에 있는 게 아니다. 셋째, 달라이 라마가 이 위원회의 대표이며 책임자라는 점이었다.(Goldstein & Sherap & Siebenschuh. 2009. pp.254-256.) 티베트 대표단이 회담을 타결로 마무리 지은 것은 그들이 셋째 사항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회담 결과 5월 21일 쌍방은 간칭 “17개조 협정”으로 알려진 ‘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지방정부의 평화적인 티베트해방에 관한 협정’의 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5월 23일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해 중앙정부 부주석 朱德, 부주석 李濟琛과 정무원 부총리 陳雲의 주재하에 쌍방은 ‘17개조 협정’에 서명하는 조인식을 가졌다. 중국측에서는 이외에 董必武, 黃炎培, 郭沫若, 陳叔通, 聶榮臻 등의 중공 고위 지도자들이, 티베트정부측에서는 티베트 대표단원들과 판첸 라마가 참석했다.(Zhoggong Xizang zizhiqu weiyuanhui dangshi yanjiushi. Ed. 2005, p.40.)

 

 

Ⅴ. 달라이 라마는 협정을 비준했는가?

 

‘17개조 협정’은 타결됐지만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정부를 대표해 이 협정을 최종 비준했는가? 이 장의 논제는 그 여부를 밝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먼저 그 과정을 훑어보기로 하자.

 

중국은 협정의 최종 비준자인 달라이 라마가 협정을 인준하지 않고 국외로 망명할 것을 크게 우려했다. 티베트 대표단도 그가 인도로 떠나 버릴 것을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중국측은 대외비의 부칙에다 달라이 라마가 외국에 다녀오는 것을 원칙적으로 허용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Goldstein & Sherap & Siebenschuh. (2009, p.260.)

  

협정이 조인된 사실을 안 달라이 라마는 즉각 北京에 체류하고 있던 티베트대표단을 통해 중국정부에 이 협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런가 하면 훗날 달라이 라마는 서명에 필요한 티베트정부의 국새도 대표단에게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가보 아왕 직메는 티베트정부에게 협상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또한 그가 협상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자신을 대신해 담판을 벌일 새로운 대표단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티베트 주재 중공대표로 임명된 張經武가 인도를 거쳐 트로모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줬다. 바꿔 말하면, 이는 달라이 라마에게 기왕에 타결된 협상안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당시 라사의 티베트정부 내에는 중국에 대한 대응과 이에 따른 달라이 라마의 거취와 관련해 두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파는 모두 공통적으로 중국과 군사적으로 끝까지 전쟁을 벌여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Wang, Lixiong, 1998, p.155) 하나는 중국과 타협해선 안 되며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해야 된다는 저항파의 주장이었다. 달라이 라마의 큰형인 툽텐 직메 노르부(탁최 링포체)가 이 주장을 펴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캘커타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이 티베트를 도울 의사가 있다고 하면서 인도로 망명할 것을 권했다. 다른 하나는 중국과 협력해야 하며, ‘17개조 협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온건파의 주장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임명한 두 사람의 총리 루캉와와 롭쌍 따시,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주요 사원(간덴, 데뽕, 쎄라)의 주지들과 링 린포체가 이 그룹의 주요 인물이었다. 루캉와와 롭쌍 따시는 트로모를 방문한 간덴사원, 데뽕사원과 쎄라사원의 세 주지 편에 티베트 국민들이 달라이 라마의 귀환을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라사로 돌아 올 것을 청했다.(Tenzin Gyatso. (2003, pp.114~115.)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트로모에 체류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귀경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달라이 라마는 국외로 망명했을 경우와 귀경했을 경우를 두고, 각기 전개될 수 있는 발생 가능한 상황에 대해 깊이 숙고했다. 자신의 큰형은 미국이 티베트를 도와주겠다고 알려왔지만, 미국이 과연 향후 중국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까지 책임져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신이 망명하여 미국이나 다른 강대국과 조약을 체결한다고 해도 중국이 티베트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들이 티베트를 침공할 공산이 크기 때문에 중국과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짙다. 게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은 강대국이라고 해도 멀리 떨어져 있고, 중국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병력면에서 미국 보다 유리할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또한 쌍방관계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면 수년이 걸리게 마련이며, 미국이 과연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끝까지 티베트를 지원할런지는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결국 티베트는 또 다시 자력으로 중국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판단 끝에 달라이 라마는 전쟁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또한 망명을 하더라도 어차피 티베트가 홀로 서야 될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라사 귀환을 결심했다.(Tenzin Gyatso. 2003, pp.115-116.)

  

한편, 중국으로서는 티베트대표단과 타결한 이 협정이 정상적인 효력을 발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달라이 라마의 해외망명을 막는 게 급선무였다. 달라이 라마에게 이 협정을 비준하도록 압박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달라이 라마가 라사로 돌아가도록 한시바삐 그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티베트에 대한 주권행사,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미국, 영국 등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과 인도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한 원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과 정치적 수단을 적절히 활용했고, ‘17개조 협정’이 지니고 있는 ‘일면적 합법성’을 백분 활용했다.

  

먼저 군사적 측면에서 1951년 5월 25일 毛澤東은 중공중앙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명의로 티베트본토 점령과 ‘17개조 협정’을 실행하기 위한 중국군의 진격을 명령했다. 동시에 정치적 측면에서는 이 협정의 실행을 통해 티베트“지방정부”에 대한 중국“중앙정부”의 주권을 행사할 책임자로 張經武를 티베트본토의 현지로 보냈다.

  

달라이 라마의 라사 귀환을 권유하라는 毛澤東의 지시를 받은 張經武 일행은 6월 北京을 떠나 인도로 들어가 7월 14일 트로모에 도착한 후 일주일 간 머물면서 달라이 라마와 면담했다. 張經武는 달라이 라마에게 毛澤東의 친서, ‘17개조 협정’의 사본과 티베트육군 관련 내용 및 달라이 라마가 망명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한 두 건의 첨부문서를 건네 줬다. 毛澤東은 친서에서 협정의 조인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이 협정타결로 티베트정부와 인민들이 “위대한 대조국, 대가정”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시에 그는 이 서한을 통해 티베트를 “제국주의와 이민족의 질곡과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취지에서 티베트 ‘해방’사업을 하기 위해 張經武를 파견하니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정부는 그에게 협조할 것을 당부했다.(Mao, Zedong. gei Dalai Lama de xin. May 24. 1951.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Ed. 1988, Vol.2. p.329.)

  

毛澤東의 지시대로 張經武는 달라이 라마에게 라사로 돌아갈 것을 권유한 후 7월 21일 라사로 떠났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張經武가 달라이 라마에게 티베트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기 전에 이미 달라이 라마는 망명 대신 귀환을 택한 상태였었다. 그러나 張經武의 또 다른 임무인 “제17조 협정”승인 요청에 대해선 달라이 라마는 협정을 수용하겠다는 명시적인 언급은 회피한 채 티베트 대표단의 수석대표인 가보 아왕 직메를 만나 자신의 눈으로 직접 협정의 원본을 검토하기 전에는 공식 입장을 밝힐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달라이 라마는 그때까지 공산주의자들을 두려워했었다. 그러나 그는 張經武를 만나보고 난 후 공산주의자들도 인간이고, 그들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8월 초순경 트로모를 떠나 8월 17일 다시 라사로 돌아왔다. 라사를 비운 지 9개월 만의 귀경이었다.

  

그런데 라사로 돌아온 달라이 라마가 그 후 ‘17개조 협정’을 비준했는지 아니면 거부했는지에 관해서는 실상을 알 수 있는 공식 문서가 없다. 달라이 라마의 자서전에서도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분명하게 언급된 부분이 없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달라이 라마는 비준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달라이 라마가 트로모에서 라사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보 아왕 직메 등의 협상대표들도 참도를 거쳐 라사로 돌아왔다. 가보 아왕 직메는 ‘17개조 협정’이 티베트정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僧俗官員會議’를 개최하여 이에 관한 찬반여부를 토론하자면서 대회를 개최했다. 1951년 9월 28일 소집된 티베트의 ‘僧俗官員會議’에서 그는 ‘17개조 협정’이 체결된 전 과정과 그 내용을 보고했다. 이 회의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보고할 보고문이 채택됐다. “서명된 17개조 협정은 달라이 라마의 위대한 업적이며, 티베트의 佛法, 정치, 경제 등 제분야에 비할 바 없이 크게 유익한 것이며, 내용대로 집행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Wang, Gui & Xiraonima & Tang, Jiawei. 2003, pp.441-442.) 이 보고내용은 달라이 라마에게 전달됐지만 ‘17개조 협정’내용 중 “티베트 외교권의 회수”와 중국의 “티베트 내정간섭”에 극도로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달라이 라마는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다.

  

요컨대 달라이 라마는 라사로 돌아온 뒤 자신은 張經武와 회담을 가졌으며, 초기 약 두 달 반 가까이는 중공측과 특별한 갈등이 표출되지 않았으며, 자서전에 언급된 표현대로 “중국인들과의 밀월기”를 보냈다는 점으로 보아 협정을 정식으로 비준하지는 않고 단지 묵과했던 것으로 사료된다.(Tenzin Gyatso. 2003, p.124.)

 

 

Ⅵ. ‘17개조 협정’의 정치적 함의

 

‘17개조 협정’은 전문과 17개 조항의 본문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전문에서는 ‘17개조 협정’내용을 개괄하면서 협정을 체결하게 된 경위, 목적, 협정체결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19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앙정부로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통과된 공동강령에 따라 중국내 모든 민족이 평등하고 일치단결, 상호 협력해 제국주의와 각 민족 내부에 존재하는 인민의 공적을 반대하고, 모든 소수민족을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대가정으로 돌아오게 한다. 또한 각 소수민족에게 해당 지역내 자치권을 부여하고, 고유한 언어, 문자사용을 유지케 하며, 풍습 및 습속과 종교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할 것이다. 그래서 각 소수민족의 정치, 경제와 문화교육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려는 목적에서 “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지방정부”의 “전권대표”가 “우호적 기초 위”에서 담판을 진행한 결과 본 협정을 통과, 실행하게 됐다는 것이다.(Zhongyang renmin zhengfu he Xizang difang zhengfu guanyu heping jiefang Xizang banfa de xieyi. May 23. 1951.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 Zhoggong Xizang zizhiqu weiyuanhui. Ed. 2005, pp.42-43.)

  

다음으로 본문 내용 중 골자를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1. 티베트인민은 단결해 제국주의침략세력을 티베트에서 몰아내고, 조국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가정으로 돌아온다.(제1조)

2. 티베트 지방정부는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들어와 국방을 공고히 하는데 적극 협조한다.(제2조)

3.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의 민족정책에 의거해 중앙인민정부의 영도하에 티베트인민은 민족구역 자치를 실행할 권리를 가진다.(제3조)

4. 티베트의 현행 정치제도에 대해 중앙은 변경을 가하지 않으며, 달라이 라마의 고유한 지위와 직권에 대해서도 변경하지 않고, 각급 관원들도 예전대로 유지된다.(제4조)

5.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의 고유한 지위와 직권을 제13대 달라이 라마와 제9대 판첸 라마가 서로 관계가 좋았던 재세시 때처럼 유지케 한다.(제5조와 제6조)

6.중앙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이 규정한 종교신앙 자유의 정책을 실행하고, 티베트인들의 종교신앙 및 풍속습관을 존중할 것이며, 라마교사원을 보호하고, 사원의 수입에 대해서는 중앙정부가 건드리지 않는다.(제7조)

7. 티베트군은 점차 “중국인민해방군”으로 개편돼 중국 국방무력의 일부분이 된다.(제8조)

8. 티베트의 현실상황을 인정해 점차 티베트민족의 언어, 문자와 학교교육을 발전시킨다.(제9조)

9. 티베트의 실정을 감안해 점진적으로 티베트의 농업, 목축업과 공상업을 발전시킨다.(제10조)

10. 티베트의 각종 개혁에 대해서 중앙은 강요하지 않고, 티베트지방정부가 스스로 개혁을 진행하되, 인민들이 개혁을 요구할 때는 티베트 지도자와 협의하여 해결한다.(제11조) 11. 과거 제국주의와 친국민당 관리들도 제국주의와 국민당과의 관계를 끊고, 파괴나 반항하지 않는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그들의 직위를 그대로 인정해준다.(제12조)

12. 티베트에 들어오는 인민해방군은 상기 각 조의 정책을 준수하고, 매매를 공정하게 할 것이며, 인민들의 바늘 하나 금전 한 푼도 함부로 취하지 않는다.(제13조)

13. 중앙정부는 티베트의 모든 외교업무를 처리한다.(제14조)

14. 본 협정의 실행을 보장하기 위해 중앙정부는 티베트에 군정위원회와 군구사령부를 설립하고, 중앙정부가 파견하는 인원 외에 될 수 있는 한 티베트지방 관원들을 업무에 참가시키도록 한다. 그리고 군정위원회에 참가하는 티베트지방 관원은 티베트지방정부 및 각 지구, 각 주요 사원의 애국인사를 포함해야 하고, 중앙정부가 지정한 대표가 관련된 각계와 상의하여 중앙에 명단을 제출하면 중앙정부가 임명한다.(제15조)

15. 군정위원회, 군정사령부 및 티베트 진입 인민해방군이 필요로 하는 경비는 중앙정부가 제공한다. 티베트지방정부는 “인민해방군”이 양식과 기타 일용품을 구매 및 수송하는 일에 협조한다.(제16조)

16. 본 협정은 서명, 날인 후 바로 발효된다.(제17조)〔Caituanfaren liyangan jiaoliu yuanjing jijinhui, http : //www. Future-China. org. tw ; Zhongyang renmin zhengfu he Xizang difang zhengfu guanyu heping jiefang Xizang banfa de xieyi. May 23. 1951.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 Zhoggong Xizang zizhiqu weiyuanhui. Ed. 2005, pp.43-45.〕

  

상기 협정조항은 내용상 크게 중국측과 티베트측이 각기 상대측에 요구한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중국측이 티베트측에 요구한 것은 제1조, 제2조, 제5조, 제6조, 제8조, 제14조, 제15조, 제16조, 제17조 등 9개조다. 티베트측이 중국에 요구한 것은 제3조, 제4조, 제7조, 제9조, 제12조, 제13조 등 6개조다. 나머지 제10조, 제11조 등 2개 조는 양측이 다 같이 필요로 했거나 상호 절충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각 조항에 내재돼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는데, 먼저 중국이 거둔 성과를 보자.

  

첫째, 중국은 가장 중요시 했던 티베트에 대한 주권 획득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은 전문에다 티베트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대가정으로 돌아왔음”을 명기함으로써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주권이 현재 내지 그 시점부터 소유하게 된 게 아니라 과거에 이미 티베트가 중국에 속해 있었다는 점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돼버린 점이다.

  

둘째, 중국은 협상에서 중국군의 티베트 주둔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 이유는 중국군을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주둔시켜 미국, 영국, 인도 등 외국세력의 개입을 차단하는 예방효과를 노림과 동시에 이를 통한 티베트에 대한 대외 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Yang, Kaihuang. 1985, Gongdang wenti yanjiu. Vol.11(6). p.52.〕또 제16조에서 보듯이 중국은 티베트를 통치할 기구로 라사에 군정위원회와 군구사령부를 설립할 수 있게 됐고, 이를 통해 중국의 티베트통치를 정당화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여기에다 군정위원회와 군구사령부의 경비를 중앙정부가 제공하는 것을 인정받음으로써 곧 대외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실효적 지배’(effective control)를 현시할 수 있는 성과를 획득했다. 주지하다시피 ‘실효적 지배’란 국제법적으로 일국이 타국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 및 주권소유 여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관건적 요소다. 그것은 어떤 국가가 특정 영토를 점유하고 통치하는 행위에 대해 당사국이나 타국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 국가가 문제의 영토에 대해 “평화적”(peaceful), “실제적”(actual)으로, “계속적”(continuous)으로 “충분”(sufficient)하게 주권을 행사하거나 표시(display)할 경우 그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개념이다.(Malcom N. Shaw, 1991, pp.291-294) 게다가 중국은 티베트정부에 중국군의 라사주둔에 필요한 곡물 등의 각종 물자 제공의 의무를 부여할 수 있게 됨으로써 향후 기후, 도로, 교통 등의 불편으로 인한 물자보급과 수송의 어려움을 해결하게 된 일거양득을 거뒀다.

  

셋째,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은 외교와 국방을 책임진다는 명분하에 티베트정부의 외교권과 무력자위권을 박탈할 수 있게 됐다. 즉 중국은 티베트정부로 하여금 티베트국방의 공고화에 협조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중국군의 티베트주둔을 합법화하였고, 동시에 티베트군대를 중국군에 편입시킬 수 있게 됨으로써 향후 티베트정부의 반란 가능성이나 지방군벌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던 셈이다.(제2조와 제14조)

  

넷째, 중국은 판첸 라마의 “고유한 지위와 직권”을 유지하도록 명문화함으로써(제4조) 과거 청조나 국민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판첸 라마의 직권을 회복시킬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으로써 중국은 티베트의 해방을 찬성하는 판첸 라마를 티베트해방공작의 하수인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었고, 동시에 달라이 라마를 견제할 수 있는 대항마를 확보하게 됐다. 당시 판첸 라마는 티베트본토에 거주하지 않고, 靑海省에서 기거하면서 중공이 자신을 라사로 귀환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중국은 ‘17개조 협정’을 위한 협상 첫 날인 1951년 4월 29일 판첸 라마를 중요한 정치회의에 참석시켜 향후 그를 달라이 라마와 대립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 바 있다.(Gilles Van Grasdorff, 2005, p.225.) 또한 그 후 1956년 ‘티베트 자치구주비위원회’ 설립 시에도 판첸 라마를 부주석에 앉히는 등 달라이 라마에 버금가는 종교적 위상을 가진 그를 티베트 통치의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다섯째, 군정위원회에 참여하는 관원은 반드시 중앙정부가 임명하도록 규정하여 티베트 통치 기구내에 티베트인 관리의 수가 한족요원들의 수를 능가하지 못하도록 막아 티베트인의 다수화를 방지하고자 했다.(제15조)

  

다음으로 티베트정부의 입장에서 본 이해득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티베트정부는 중국내 하나의 지방정부임을 인정한 상태에서 중국측과 협상함으로써 티베트가 중화인민공화국영토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대신 티베트정부는 중국측으로부터 자치권을 약속 받았다. 하지만 외교와 국방에 관한 권한을 중국에 허여한 상태에서 대내적인 정치, 행정에 대해서만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돼 온전한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둘째, 티베트정부는 티베트 전래의 기존 정치체제를 그대로 존속시킬 수 있게 됐을 뿐만 아니라 달라이 라마의 지위와 권한도 인정받게 됐다. 또한 티베트정부의 각급 관원들도 예전 직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으며, 라마교사원을 보호하고, 사원의 수입에 대해서도 중앙정부가 건드리지 못하게 명문화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층적 의미를 획득했다.(제4조와 제6조) 즉 달라이 라마의 정통성 확보, 사원재산을 손대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를 추앙하는 정부의 관리들과 승려들의 기득권을 인정받게 돼 달라이 라마의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 티베트정부는 자민족의 정체성 유지를 보장 받기 위해 중국측에게 티베트민족의 언어, 문자와 고유한 종교 및 습속을 존중하고 학교교육을 발전시켜 줄 것을 요청했고, 이를 인정받았다.(제7조와 제9조) 이것은 티베트에게는 민족적 정체성과 문화 및 풍속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동시에 중국에게도 통치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기도 했다.

  

중국이 티베트의 언어, 종교 및 습속이 존속되도록 하겠다고 명문화 한 것은 민족평등과 민족단결이라는 명분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소수민족의 구심력을 제고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정부는 민족평등과 민족단결을 민족문제의 시행과 처리에 견지해야 하는 “총 원칙이자 총 정책”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은 신중국의 민족정책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전 건국의 방향과 대강에 명문화 돼 있다.(Zhongguo renmin zhengchi xieshang huiyi gongtong gangling. (Sep. 29. 1949.) Zhengxie di yijie quanti huiyi mishuchu. Eds. 1999, p.338.) 특히 민족평등은 중국 내 모든 민족이 인구의 다소, 사회경제 발전의 수준, 풍속습관과 종교의 異同에 관계없이 중화민족의 일부분이라는 점에서 동등한 지위와 동등한 권리 및 의무를 지닌다는 것을 말한다. 중국지도부는 민족단결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변경이 공고해지지 않고, 변경이 안정되지 못하면 곧 국가가 위태로워진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즉 다민족국가인 중국에서 민족문제란 국가의 통일, 사회안정과 변방의 공고화 및 현대화 건설과 직결되는 중대한 정치문제인 것이다.(Wang, Hongman, 2000, p.29, p.33).

  

周恩來는 중국 내 모든 소수민족의 고유한 종교신앙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중국정부의 정책이기 때문에 티베트의 종교 역시 정치적으로 보장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Zhou, Enlai. Guanyu minzu wenti. Apr. 27. 1950, p.17.) 따라서 중국정부는 자국 내 소수민족의 고유한 언어문자, 종교 및 풍속은 티베트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소수민족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Wang, Hongman, 2000, p.10.) 그러나 이것은 그 후 근본적으로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간주하고 경시하는 중국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넷째, 티베트정부는 점진적으로 티베트의 농업, 목축업과 공상업을 발전시켜 줄 것을 약속 받았다.(제10조) 이것은 당시 여타 省들에 비교해 개발과 경제성장, 정부재정 등 모든 면에서 낙후돼 있던 티베트 지역 민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던 티베트정부의 요구였다. 동시에 이 조항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루어야 할 중국정부에게도 요구됐던 문제였다. 당시 티베트정부의 재정상황은 1952년부터 적자가 계속되었고, 대표적인 3대 소수민족 자치구인 내몽골자치구, 新疆자치구와 비교하면 다른 자치구들 보다 크게 악화돼 있던 상태였다.

  

티베트의 경제성장은 달라이 라마도 바라던 바였다. 달라이 라마는 3년 뒤인 1954년 毛澤東의 초청을 받아 北京을 방문했을 때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중국인과 티베트인의 생활양식의 비교를 통해 티베트의 후진성과 낡은 티베트사회를 개혁하고 민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필요성을 절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는 毛澤東에게 “티베트가 후진적이며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개혁을 하지 않으면 티베트는 진보할 희망이 없다”는 얘기도 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여러 도시를 여행한 소감을 묻는 毛澤東에게 “티베트가 발전을 하려면 개혁이 필요하며, 그럴 결심을 굳혔다고 강조했다”고 한다.(Goldstein & Sherap & Siebenschuh. 2009, p.319, pp.321-322, p.325.)

  

다섯째, 티베트에 주둔하는 중국군은 상기 각 조의 정책을 준수하고, 매매를 공정하게 할 것이며, 인민들의 바늘 하나, 금전 한 푼도 함부로 취하지 않도록 했다.(제13조)

  

여섯째, 티베트정부는 중앙정부가 개혁을 강요하지 못하게 하고, 티베트정부가 스스로 개혁을 진행하되, 인민들이 개혁을 요구할 때는 티베트 지도자와 협의하여 해결하기로 약정했다. 또한 중국정부가 티베트를 개혁하고자 할 경우 반드시 티베트 상층 지도자들의 의견을 들은 후 실시하도록 규정함으로써,(제11조) 중국이 실시하려고 한 사회주의개혁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 뒤 중국은 티베트의 기존 정치체제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원래 중국이 실시하려고 한 사회주의개혁을 최소한 중공 당의 공식 정책으로서 보류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분명 중공의 커다란 양보였었다. 그러나 실제는 중국이 티베트 현지의 중공 간부들이 개혁을 장기간 보류하겠다는 중공 지도부의 공언과 달리 1952년부터 즉각 사회주의개혁을 시행함으로써 거시적으로 보면 달라이 라마의 해외 망명을 초래한 요인이 됐다.

  

당시 중국은 티베트사회를 농노제가 존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수의 노예가 존재하는 전근대적인 봉건사회로 규정, ‘선전’했다. 중국측은 티베트 상층의 극소수 종교지도자 및 귀족들이 부를 독점하는 전근대적 봉건사회였으며, 농노와 농노주 간의 계약관계 등을 나타내는 각종 문서를 예시하면서 당시까지 농노와 노예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측 주장에 따르면, 농노주는 사원의 상층 승려, 관원과 귀족 및 그 대리인으로 구성되는데, 역대 귀족으로 봉해진 수자는 약 400호 정도였다고 한다. 1959년 이전 귀족은 카샤 계통의 197호가 존재했고, 그 중 대귀족이 25호, 중등귀족이 26호, 소귀족이 146호였으며, 경제실권을 쥐고 있는 상층 라마는 약 4,000여 명이 됐다고 한다.(Jin, Hui et al., 1994, p.56.)또 티베트 법전에 명시된 것을 근거로 티베트인은 신분이 9등급으로 계서화 돼 있었다고 한다. 9등급 중 최고 정점에 있는 티베트 법왕이 1등급, 그 아래에 善知識, 사원과 정부의 고급 관료들이 2등급, 중급 관료와 승려가 3등급이며, 그 아래로 6등급이 더 있는데, 최하층의 9등급은 천민에 속한다.

  

그런데 서방측은 ‘농노’ 혹은 ‘농노제’ 라든가 ‘노예’와 ‘노예제’ 등의 용어들은 1949년 이후 중국이 개시한 티베트 무장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중국이 고안해낸 날조에 가깝다고 반박한다. 서방측은 티베트 여의사의 글을 인용해 티베트가 “생계를 잇는데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고”, 거지도 없는 “다소간 자족적이고 느슨한 사회”였다고 주장한다.(Pual Ingram. 2008, p.7.)

  

극과 극을 달리는 상반된 두 입장을 떠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티베트가 佛法을 정치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국교화 되어 있는 국가, 곧 불교가 국가권력화 돼 있는 정교일치사회였으며, 경제발전이 극히 침체된 사회였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중국과 티베트 양측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이념적 문제와 결부된 문명적 관점에서 중공이 공산주의 국가건설이라는 이상향으로서 추구하고자 하는 평등사회의 실현이라는 목표와 의지는 더 나은 내세를 기원할 뿐, 현재 물질적 빈곤상태에 있는 현세의 처지와 신분까지도 숙업으로 받아들이는, 그래서 발전의 개념이 결여된 티베트민중들의 불교적 윤회(즉 “業=Karma")관과 그 종교적 염원을 정치적으로 보장해주는 사회체제와는 서로 상치되는 부분인 것도 사실이다.

 

 

Ⅶ. ‘17개조 협정’의 문제점 및 평가

 

그렇다면 ‘17개조 협정’은 국제법적으로 효력이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결론은 본 협정의 체결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존재했다는 이유에서 긍정적이지 못하다. 회담에서 대표들의 의견개진시 자유롭지 못한 강압성과 협정 체결의 강제성이 존재했다는 점, 그리고 달라이 라마가 비준하지 않았다는 사실, 대리인이 서명하고 국가 최고 통치자의 국새가 날조 도용된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사항을 축으로 논의를 좀 더 진전시켜 보도록 하자.

  

첫째, 국내법에서도 그렇듯이 어떤 약정이 상대 당사자에게 공포심을 느끼거나 신변상의 안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립된 것이라면 그것은 무효가 된다. 이 점은 국제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무엇보다 중국군을 출동시켜 놓은 것이 티베트인들에 대한 최대 위협이었다. 훗날 인도로 도피해 다람살라(Dharamshala)에 티베트망명정부를 수립한 달라이 라마는 이 “17개조 협정”의 성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 협정이 군사력을 앞세운 중국측의 위협과 강권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었고, 더군다나 중국측이 티베트정부의 국새를 위조해 날인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Tenzin Gyatso. 2003, p.114.) 1959년 6월 20일 그는 인도 무쏘리(Mussoorie)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北京에서 담판에 임한 티베트대표는 그 어떤 수정의견을 제기하지도 못하게 한 囚人의 상태에서, 티베트대표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사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사실상 중국측의 최후통첩(ultimatum)을 강제한 것이었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대표단장인 가보 아왕 직메가 참도전투에서 포로가 된 이래 오랫동안 중국군의 囚人이 된 사실을 가리킨다. 덧붙여 그는 이 협정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나의 국민과 국가를 완전한 파탄의 위협에서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묵인하고, 그 조항을 준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해명했다.(Xizang liuwang zhengfu, Xizang liuwang zhengfu, In Xizang liuwang zhengfu waijiao ji xinwenbu. Ed. ,2001. p.64. ; Sen, Chanakya, 1960, pp.154-158.)

  

그러나 중국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됐다. 즉 그들은 당시 티베트 대표단의 수석대표인 가보 아왕 직메와 다른 대표였던 톱텐 텐타가 남긴 회고에 근거해 협상은 강압적인 상태가 아니라 시종 우호적이었고, 의제에 대해 진지하며, 충분히 자유로운 논의가 가능했던 분위기에서 평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Wang, Gui & Xiraonima & Tang, Jiawei. 2003, pp.432-433.) 또한 중국측은 강압적인 최후의 통첩을 보내지 않았다고 하면서 달라이 라마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 근거로 4월 29일부터 개시된 쌍방간의 담판이 약 1개월 간 지속된 사실을 내세운다. 이 기간 동안 쌍방은 협상내용을 충분히 논의하고 서로 밀고 당겼다는 것이다.(Wang, Gui & Xiraonima & Tang, Jiawei. 2003, p.433.) 그러나 상기 반론은 제4장에서 확인했듯이 중국측으로부터 협상 전후에 회유, 압박당하고 나중에는 이미 친중공적인 인사가 된 상태에서 내린 티베트 대표들이 남긴 회고라는 점에서 객관성을 획득하기가 어렵다. ‘17개조 협정’안이 도출된 것도 다분히 중공의 회유와 압력을 받은 티베트 대표단의 일부 단원들과 수석대표인 가보 아왕 직메의 태도가 강력하게 거부하지 않았던 데에 힘입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둘째, 달라이 라마가 ‘17개조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앞 장의 선행논의에서 충분히 입증됐다. 여기서는 이와 관련돼 있는 대표권을 짚어보도록 하겠다. 툽텐 텐타에 의하면, 티베트 대표들은 北京으로 떠나기 전에 전원이 카샥으로부터 대표 5인의 성명과 직위가 적혀 있고 인장이 찍혀 있는 “전권증서”를 수여받았다고 한다.(Wang, Gui & Xiraonima & Tang, Jiawei. 2003, pp.437-438.)

  

그런데 달라이 라마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은 가보 아왕 직메에게 결코 “전권대표”(Representatives of Delegates with Full Power), 즉 자신을 대리하여 “문서에 서명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가보 아왕 직메는 단지 “협상의 대표였을 뿐”이었다는 것이다.(Tenzin Gyatso. 2003, p.112. ; Michael C. van Walt van Praag, 1987, pp.153-157). 그래서 가보 아왕 직메도 협상 기간 중 중국측에 자신은 협정에 서명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협정서에 티베트정부의 “전권대표”로 서명할 수 있다고 동의했고, 실제로 협정문에는 그가 티베트정부의 “전권대표”로 서명돼 있다.(Zhongyang renmin zhengfu he Xizang difang zhengfu guanyu heping jiefang Xizang banfa de xieyi. . May 23. 1951. In Zhoggong zhongyang wenxian yanjiushi & Zhoggong Xizang zizhiqu weiyuanhui. Ed. 2005, p.45.)

 

설령 가보 아왕 직메가 전권대표였다고 하더라도 최종 결정권은 그에게 있지 않고 티베트정부의 최고 수장인 달라이 라마에게 있었다. 또한 전권대표는 단지 협상에서 서명권이 있을 뿐 최종 비준권은 없었다. 최종 비준권은 티베트정부의 수장에게 있었다. 이 점은 중국입장에 동조하는 학자도 인정하는 사실이다.(Wang, Gui & Xiraonima & Tang, Jiawei. 2003, p.439.)

  

또한 가보 아왕 직메는 협상결과를 먼저 티베트정부에 보고해 비준을 받은 뒤에 대외적으로 공표하자는 요청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달라이 라마와 그의 정부는 쌍방 대표 간에 논의된 세부사항이나 협정의 정확한 조건을 모른 상태에서 1951년 5월 26일 北京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서야 협상내용을 알게 됐다고 한다.(Gilles Van Grasdorff, 2005, p.260.)

  

셋째, 당시 티베트 대표가 최고 통수권자인 달라이 라마를 대리하여 협정에 서명했기 때문에 그 행위는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돼야 한다. 통상 국제법에서는 대리인의 행위가 대리권의 범위를 넘어설 경우, 그 행위의 효력은 생겨나지 않는다.(Ochiai, Kiyotaka. 1994, p.112). 가보 아왕 직메는 어디까지나 협상대표로서 최종 합의안에 서명할 수 있었을 뿐, 조약을 최종적으로 비준하는 위치에는 있지 않았다. 또한 달라이 라마도 가보 아왕 직메에게 비준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중국은 국새를 날조하였고, 가보 아왕 직메도 이에 서명했다.

  

넷째, 협정의 형식은 국내법으로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중국과 티베트의 관계가 국제관계로 적용됐다는 점이 거론돼야 한다. 본 협정은 전권대표가 서명한 것으로 돼 있는데, “전권대표”란 국내 지역 정부간의 협정을 체결할 때는 필요 없고,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협상에 임할 때 임명하는 국가통수권자를 대표하는 직위인 것이다. ‘협정’ 제8조에서 중국은 티베트군을 점차적으로 중국군으로 개편하기로 약정돼 있고, 제14조에서는 중국이 티베트의 외교업무를 담당한다고 돼 있다. 이 규정은 관점을 뒤집어 보면, 그 동안 중국이 티베트에 대해 국방권과 외교권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그런 이유로 티베트는 그동안 독립국으로 존재했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증거의 하나다.

  

다섯째, 중국이 자국군의 티베트본토 진주의 명분으로 내세운 “제국주의 축출”과 그로부터의 티베트“민족의 해방”은 모두 毛澤東이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해 내부적으로 국민통합과 민족단결로 정권을 잡은 경험을 살린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당시 티베트본토에는 서양인이라 해봤자 도합 6명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도 중국군이 티베트에 진입했을 때는 모두 티베트를 떠나고 없었다.(Ochiai, Kiyotaka. 1994, p.119). 달라이 라마는 “그 당시엔 유럽의 어떤 군대도 있지 않았다”고 했다.(Tenzin Gyatso. 2003, p.112.) 제2장에서 거론됐듯이 티베트의 카샥이 성명을 발표하여 티베트는 외국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일부분이 아니며, 티베트인들을 제국주의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없다”고 반박한 소이연이 여기에 있었다.

  

여섯째, 중국은 수백 년 동안 정교일치사회로 존속해온 티베트의 전통적 정치 및 종교체제를 파괴하거나, 혹은 적어도 무시하면서 판첸 라마를 정치적 도구로 삼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협정은 중국이 말하는 것처럼 공정한 상태에서 체결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그러한 시도는 달라이 라마의 입장에서 보면 원래 달라이 라마를 승계할 아무런 권한도 없는데다 티베트의 주권과 관련된 어떤 서류에도 서명할 권한이 없는, 그래서 세속 권력이 전혀 없는 판첸 라마를 권력화 하고자 한 시도이자 동시에 판첸 라마는 세속권력을 가질 수 없는 티베트 전래의 정치적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였다.(Gilles Van Grasdorff, 2005, p.255) 그것은 곧 중국이 티베트를 지배하는데 필요한 거점역할이 된 “트로이의 목마”였지만, 티베트인들에게는 티베트판 “漢奸”이었다.

  

일곱째, ‘17개조 협정’에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애매한 부분이 존재하는데, “티베트”의 지리적, 영토적, 행정적 범위를 쌍방간에 축차적으로 확정하지 않고 모호하게 방치해두었다는 점이다. 즉 동 협정 제4조 “티베트의 현행 정치제도에 대해 중앙은 변경을 가하지 않는다”는 조항의 “티베트”란 역대 티베트 왕조의 권역을 모두 포괄하는 대티베트와 당시 티베트정부가 실제 관할하고 있던 티베트본토 중 어느 티베트를 가리키는지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장 중국정부가 사회주의개혁을 티베트의 어느 지역까지 적용하겠다는 것인지 상당히 자의적이었다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달라이 라마가 주장하는 티베트의 강역은 중국정부가 1965년에 획정, 선포한 “中國西藏自治區”, 즉 현행 중국 국가행정상의 티베트지역 뿐만 아니라 雲南, 四川, 甘肅, 靑海省의 일부까지를 포함한다. (구체적인 지역은 본론 마지막의 지도2를 참고하라.)

  

제각기 아전인수격으로 중국은 ‘17개조 협정’상의 “티베트”란 달라이 라마 통치하의 티베트를 상정했는데 반해, 티베트정부는 대티베트라고 하는 등 각기 영역범위를 달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패전한 약자의 입장에 있던 티베트정부 당국이 기존의 자기 관할 지역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 일인데, 중공이 이미 통치하고 있는 모든 티베트지역까지 양도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캄과 암도지역은 중공의 통제하에 있었고, 이 지역에서 진행하는 중공의 제반 행위는 ‘17개조 협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Wang, Lixiong, 1998, p.172.)

  

마지막으로 ‘17개조 협정’의 성립요건과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인의 자치권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17개조 협정’내용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이에 대해서는 달라이 라마가 1959년 4월 1일 인도의 테즈푸르(Tezpur)에서 발표한 성명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 즉 17개조 “협정에는 티베트가 자치를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공군이 티베트를 점령하고 나서 티베트는 아무런 자치도 누리지 못했다. (티베트의) 내부적인 문제마저도 그러했다. 중공정부는 티베트의 일에 대해 전권을 행사했다. 1956년, 티베트를 위해 하나의 주비위원회가 수립되었고, 달라이 라마가 주석, 판첸 라마가 부주석, 張國華장군이 중공정부의 대표로 임명됐다. 실제로는 이 기구도 아무런 권한을 가지지 못했으며, 모든 중요문제에 관한 결정은 전부 중공당국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략) 중공당국은 늘 간섭을 일삼았다.”(Sen, Chanakya, 1960, p.144.)

 

【지도2】

 

 

Ⅷ. 맺음말

 

중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티베트민족의 독립의지는 티베트를 불가분의 자국영토로 인식한 중공의 티베트‘해방’의지에 다시 한 번 좌절됐다. 중공의 티베트 점령은 과거 중국-티베트 간에 존재한 특수한 관계를 “역사적 주권”으로 변질시키고, 그것을 명분으로 취한 것이었다. 그 배면에는 중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 티베트에 내재된 안보전략적 가치와 함께 각종 부존자원의 확보 등과 같은 복합적인 동기가 숨어 있었다.

  

중국은 티베트를 자국의 영토로 확보하기 위해 애초부터 티베트정부와의 대등한 국가 대 국가의 협상을 배제하고, 무력공격과 군사적 점령을 수단으로 한 비균등성의 협상을 강제했다. 협상의 의제는 티베트에 대한 “평화적 해방”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상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 규정과 관계설정이 목적이었다.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정부가 중공이 표방한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논의하기 위한 실무협상을 줄곧 반대해오던 입장을 바꿔 결국 北京으로 협상단을 파견한 것은 중국이 참도 전투에서 티베트군의 주력을 괴멸시킴으로써 라사정부를 北京의 협상 테이블로 나오도록 압박한 결과였다.

  

중국은 군대를 티베트에 진주시키면서 제국주의 축출을 티베트 해방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그것은 허구적 수사에 불과했다. 당시 티베트에는 이렇다할 제국주의세력도 없었거니와 미국, 영국 등의 열강과도 외교적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티베트문제를 철저하게 국내문제라고 주장함으로써 열강의 간섭이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는데 주력하였고, 티베트에 대한 점령 및 주권에 대한 정당성 여부에 관한 논쟁의 소지를 없앴다. 국제법에서는 육지, 섬, 해양경계와 관련된 분쟁에서 어떤 국가가 다른 어떤 특정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을 때 당사국이나 제3국이 그것을 거부하면 분쟁이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이 점을 모를 리 없는 중국수뇌부였었기에 그들이 티베트본토까지 점령하려고 한 것은 처음부터 주권을 행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중공이 티베트에 대한 주권행사의 표시로 국민당의 蒙藏委員會를 모방해 설립한 ‘티베트자치구(Tibet Autonomous Region)주비위원회’를 통해 국가권력의 행사와 티베트민족에 대한 관리에 착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정부가 비대칭적인 중국측의 협상요구에 응한 것은 중국군의 티베트본토 진주를 우려한 달라이 라마가 외국의 지원과 국제사회의 관심이 모두 끊어진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51년 5월 ‘17개조 협정’이 체결된 것 또한 중국측의 압박에 따른 결과였다. 이 점과 관련해 본문 제7장의 “‘17개조 협정’의 문제점” 부분에서 고찰해본 대로 ‘17개조 협정’은 출발부터 협정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무효화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를 안고 있는 조약이었다. 이유는 한 마디로 협정이 중국측의 압박에 따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티베트정부의 최고 결정권자인 달라이 라마가 정식으로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의 ‘협정’비준 여부를 두고 중국의 주장을 인정하는 쪽과 티베트의 입장을 옹호하는 쪽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지만 본고에서는 달라이 라마와 그의 티베트정부는 정식으로 이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다는 쪽에 무게를 뒀다. 그렇지만 달라이 라마가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협정을 “끝까지”,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본문 제5장에서 검토한 바 있듯이 그는 트로모에서 라사로 귀경한 후 중국당국과의 “밀월기”를 보내는 과정에서 협정비준을 지연시켰거나 아니면 미필적 고의로 협정을 묵인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은 티베트가 이 협정에 따라 중국군의 티베트 진주를 허여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검토해본 결과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즉 중공은 애초 건국 전부터 “티베트 해방”이라는 명분하에 티베트본토 점령을 중국과 중국인민의 신성한 임무로 설정했고,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티베트본토 점령을 위한 군사준비와 실제 진주를 개시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北京은 군사공격을 라사 정부를 협상에 나오도록 압박하는 수단으로 삼았을 뿐이다. 바꿔 말하면, 이 사실은 ‘17개조 협정’이 타결되지 않았더라도 중국이 티베트 점령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컸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한편, ‘17개조 협정’이 무효라는 주장과 별개로 중국은 이 협정을 근거로 가장 중요시 했던 목적, 즉 티베트에 대한 주권 획득문제를 해결했다. 따라서 이 협정은 중국에게는 “합법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행사하게 된 근거가 되고 말았다. 또한 중국은 이 협정으로 티베트에 대한 정치, 외교, 군사권을 직접 장악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티베트군대를 중국군에 편입시킬 수 있는 근거도 확보했다.

  

반대로 티베트정부는 중국내 하나의 지방정부임을 자인함으로써 티베트인에 의한 자치권을 약속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외교권과 무력자위권이 박탈된 상태에서의 대내적인 정치, 행정에 국한된 자치권이었다. 이로 인해 티베트는 시간이 경과되면 중국인에게 자치권마저 내주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피해가기 어렵게 됐다. 게다가 달라이 라마가 ‘17개조 협정’을 끝까지 거부하지 못함으로써, 혹은 적어도 중국의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묵인함으로써 중국측에게 “辛亥革命의 혼란을 틈타 티베트가 독립을 선언한 1912년부터 1951년까지 장기간 행사하지 못한 해방을 이뤘다”고 주장하는 빌미를 제공했다.(Xie, Jian, In Lishi Yuekan, Oct. 1999, p.103.)

  

‘17개조 협정’을 계기로 티베트는 더 이상 독립국가로 존재하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이 조약은 협정 체결 당시 중국이 사회주의개혁을 보류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에서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정부가 이른바 “티베트 문제”의 해법으로 달라이 라마 측에 제시한 그 어떤 제안 보다 수위가 낮은 것이었다. ‘17개조 협정’은 티베트가 만약 완전독립을 추구하지 않고, 어떤 수준이든 중국과의 관계를 지속하려고 할 경우엔 중국정부에게 명실상부한 티베트인에 의한 티베트자치, 달라이 라마의 지위보장, 티베트민족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티베트 고유의 언어, 문자, 종교 및 습속을 파괴하지 말 것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현재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측과 달라이 라마가 요구하고 있는 티베트인에 의한 자치는 역사적으로 바로 이 ‘17개조 협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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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

 

People's Republic of China

Tibet

Dalai Lama the Government of Tibet in Exile

Seventeen Points Agreement

The Agreement Between the Central People's Government and the Local Government of Tibet on Measures for the Peaceful Liberation of Tibet.

 

 

초록

 

‘17개조 협정’은 중국측의 무력을 앞세운 압박에 따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티베트정부의 최고 결정권자인 달라이 라마가 정식으로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정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무효화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를 안고 있는 조약이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협정체결 뒤 한 동안 중국당국과의 “밀월기”를 보내는 과정에서 협정비준을 지연시켰거나 아니면 협정을 묵인했다.

  

이 협정은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행사하게 된 근거가 되고 말았다. 또한 티베트에 대한 정치, 외교, 군사권을 직접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으며, 티베트군대를 중국군에 편입시킬 수 있는 근거도 확보했다. 반대로 티베트정부는 외교권과 무력자위권이 박탈된 상태에서의 대내적인 정치, 행정에 국한된 자치권을 약속 받았을 뿐이다.

  

‘17개조 협정’을 계기로 티베트는 이제 더 이상 독립국가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됐다. 이 협정은 티베트가 어떤 수준이든 중국과의 관계를 지속하려고 할 경우엔 티베트 망명정부측이 중국정부에게 명실상부한 티베트인의 자치, 달라이 라마의 지위보장, 티베트의 고유한 언어, 문자, 종교 및 습속을 파괴하지 말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위 논문은 영문으로 실린 한글 원고입니다. 영문 논문은 아래에 실려 있습니다.  

 

“Conclusion Process and Analysis of ‘17 Point Agreement’ Between China and Tibet”, Journal of Northeast Asian History, Vol.6-2 Winter, 2009, Edited by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