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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도에서 만난 “쟈가따라 오하루”(じゃがたらお春) : 그녀의 삶 그리고 서한의 위작 여부와 의미

雲靜, 仰天 2025. 1. 1. 23:38

히라도에서 만난 “쟈가따라 오하루”(じゃがたら お春) : 그녀의 삶 그리고 서한의 위작 여부와 의미


일본 큐우슈우(九州) 서북쪽의 작은 항구 도시(인구 약 2만 7천 명) 히라도(平戶)에서 뜻밖에 슬픈 사연이 전해지는 한 소녀를 만났다. 나가사끼(長崎)에서나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쟈가따라 오하루(じゃがたら お春, 1625?~1697)라는 여성이다. 그 옛날 16세기 일본 주재 네덜란드인들이 동인도회사의 일본 무역사무소로 운영한 '오란다상관'(オランダ商館)을 찾아가기 위해 인형처럼 예쁜 아기자기한 히라도 부두를 무심히 걷고 있는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란다”는 일본인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네덜란드를 칭하는 국명이다.

히라도시에선 영어로는 단모음의 “자가타라 소녀”, 즉 “Jagatara-girl”로 번역해놓았다.
히라도시는 항구 맞은 편 산위에 히라도성이 있는 구조다. 멀리 산 위에 히라도성의 천수각이 보인다.


짧은 겨울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아름다운 황혼빛에 반사된 부둣가에 바다를 바라보면서 작은 석상이 돼 서 있었다. 3년 전 내가 나의 블로그에 소개한 바 있어 낯선 이곳에서 뜻밖에 다시 만나니 옛 연인을 만난 듯 무척 반가웠다. 히라도를 떠나 다음 행선지인 나가사끼에 가면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는데 벌써부터 그녀에 대한 의문 부호들이 물새떼처럼 날아 든다.

https://suhbeing.tistory.com/m/1303

오하루가 “쟈가따라 오하루”라고 불린 까닭은 네덜란드령 자카르타는 당시 바타비아로 불렸고 일본에서는 쟈가타라로 칭했지만 이곳에 사는 봄(일본어로 봄은 “하루”라고 하고 春자 앞에 붙은 오=お는 미화어임)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이다. 일본어에서 쟈가타라는 자카르타를 가리키지만 그녀의 이름은 고유명사여서 자카르타오하루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붙여준 이름 그대로 “쟈가따라 오하루”여야 한다.

오하루는 에도(江戶) 시대 초기 나가사끼에 거주하다가 후에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로 추방된 이탈리아인과 일본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 여성이었다. 아버지는 포르투갈 상선의 항해사 이탈리아인 니콜라스 마린이었고, 어머니는 나가사키 무역상의 딸 마리아(세례명이고 일본명은 불명)였다. 지금까지 수세기 동안 많은 일본인들에게 회자되고 마치 전설처럼 유명한 것은 그녀가 자카르타에서 일본으로 부쳤다는 편지 '쟈가따라후미'(じゃがたら文), 즉 쟈가따라의 글(혹은 쟈가따라의 편지라고 해도 됨) 때문이었다. 이 편지에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럴까? 이 편지에 대해선 뒤에 가서 다시 상술할 것이다.

오하루는 나가사끼 치꾸고쬬(筑後町)의 친척 집에 살았다고 하는데 용모가 단아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를 읽고 쓰는 데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막부의 천주교 탄압이 점차 심해진 1637년 시마바라(島原)의 난 이후 1639년 6월 에도 막부가 공표한 제5차 쇄국령에 따라 동년 10월, 히라도와 나가사끼에 거주하고 있던 “홍모인(紅毛人)”들과 관계 있는 부녀자 32명이 모두 바타비아로 추방됐다. 이때 혼혈아들도 모두 추방하라는 영도 내려졌다. 그들을 태운 배가 출항되고나서부터는 그들에게는 두 번 다시 일본에 돌아갈 수 없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멀리 바타비아에까지 간 것은 당시 그곳이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아시아 무역의 거점도시였기 때문인데, 여타 동남아 일대와 마찬가지로 이미 바타비아에도 상당 수의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나가사키시 세이후쿠지(聖福寺)에 있는 '쟈가따라 오하루의 비'(じゃがたらお春の碑)

그 이전 막부는 쇄국 이전 초기 한 동안 해외 상인들과의 교역을 위해 히라도와 나가사끼에 한해서 이방인들의 거주를 허락했다. 대체로 무역 이외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중국인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막부가 경계한 천주교를 전파하러 온 서양인들이 문제였다. 1636년 6월, 막부는 나가사끼 도처에 흩어져 거주하던 서양인들을 모두 부채꼴 모양의 작은 섬(15000m²) 데지마(出島) 한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했다. 천주교 선교를 단속하기 위해 취한 조취였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 데지마는 서양인과 중국인 등 외국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인공섬이었다. 이때부터 데지마는 막부가 쇄국정책을 버리고 정식으로 개항(일본사에선 “개국”이라고도 함)하게 되는 1854년까지 218년 간 일본이 중국과 서구 등의 해외와 교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창구 역할을 했다. 여기를 통해 일본은 많은 중국 및 서양의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히라도의 오란다 상관. 옛터에 개축을 여러번 한 뒤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상관 안에는 1~2층에 걸쳐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물건들과 자료들이 적지 않게 진열돼 있다.
17세기 중반 당시의 데지마와 나가사끼 전경. 하단의 마름모 모양의 섬이 데지마다. 좌측 하단 흰색의 둥근 모양은 내가 사진을 찍을 때 빛이 반사된 것이다.
2024년 12월 27일 내가 찾아가본 데지마는 섬이라는 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주변 바다를 매립해서 도시의 일부가 돼 있었고, 내부 네덜란드 상관(和蘭商館跡)의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국가지정 사적지(國指定史跡)로 선정된 것은 1922년부터였다.
데지마 주변 모습. 인근에 규모가 제법 큰 차이나타운이 들어서 있다.
사진 속 강(?) 건너 오른쪽 일대가 데지마다.

인간의 기본 욕구라는 측면에선 사람 사는 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도 크게 다를 게 없다. 당시에도 인도, 말래카, 필리핀, 중국 등지의 서양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 거주 서양인들도 현지의 일본여자들을 데리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당연히 그들 사이엔 혼혈아가 태어나기도 했다. 막부의 서양인 거주 허가가 오래 지속되지 못한 배경 가운데 하나다. 3년 뒤인 1639년 6월의 제5차 쇄국령으로 서양인이 추방되자 데지마는 한동안 무인도가 됐다.

이처럼 에도 막부가 모든 일본 거주 서양인들을 추방하고 쇄국령을 단행한 것 역시 천주교 금압과 관련된 정치적 동기가 숨어 있었다. 그 배경은 서양 무역상들과 거래해서 큰 돈을 번 일부 영주들이 그 부로 조총(화승총의 일본 유입과 그것이 일본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선 자세히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임)을 마련해 막부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 중엔 임진왜란의 선봉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1558~1600)처럼 서양 선교사들과 교류해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거나 교역으로 부를 축척한 영주도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641년에 가서 막부는 이윽고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 영국상관과 서양인들까지 모두 데지마로 이주케 했다. 양인들에 대한 통제를 일원화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16세기 이래 중국이나 일본 모두 서양인들이 무역을 하거나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동양으로 건너온지 얼마 되지 않고 숫자도 많지 않아서 일본인들에게 서양인들은 사람과 동물 사이의 이상한 존재로 보였던 시기였다. 그래서 서양인들의 노랑 머리를 빗대서 “홍모인”, 남쪽 오랑캐 즉 “남만(南蠻)” 등등 다양한 멸칭으로 불렀다. 그들과 일본여성 사이에 난 혼혈은 더럽거나 부정 탄다고 믿어진 존재로 취급됐다.

여담으로 소개하는 것이지만 “홍모인” 따위의 이 명칭들은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일본, 중국의 푸졘(福建), 대만과 동남아시아 화교(중국 국적)나 화인(혈통은 중국인이지만 국적은 현지 국가의 국적자)사회 등지에서 서양의 백인(혹은 그 일부나 특정의 국민)에 대한 호칭이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도 이런 식의 중국측 기록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불렀다. 중국에서는 상대를 모멸하는 의미를 지닌 紅毛屎, 紅毛鬼, 紅毛猴, 紅氣鬼子라는 단어들도 사용됐다. 노랑머리똥, 노랑머리귀신, 노랑머리원숭이, 붉은 귀신이라는 식이었다. 그만큼 동서양의 차별과 상호이해가 부족한 경원과 오만의 시대에 나타난 동아시아의 일반화된 현상이었다.

오하루도 노랑머리 인간이 낳은 혼혈 소녀여서 추방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바타비아로 추방됐을 때 오하루는 14세나 또는 15세였고,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언니 오만(お万)도 함께 일본을 떠나게 됐다고 한다. 오하루가 1625년이나 26년 출생이라 하니 추방 당한 게 1639년이었으니 14세였거나 또는 13세였을 수도 있겠다. 다른 기록엔 오하루는 이름이 코르넬리아라는 여성이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나가사끼에 남았다는 설도 있다. 한편, 네덜란드 측 기록으로는 오하루는 제로니마로, 오만은 마달레나로 기명돼 있다고 한다. 이때 같은 배편으로 일본을 떠난 사람들 중에는 1600년에 윌리엄 아담스(Willian Adams, 일본명 미우라 안진 三浦按針) 등과 함께 일본에 표착한 메르키리얼 후안 산드폴드(Merqurial Huan Sandpold)도 있었다.

오하루는 나가사끼에서 막부로부터 원하지 않은 추방을 당한 후 일본에는 더 이상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돌아 갈래야 갈 수가 없었다. 에도 막부가 1635년부터 일본인의 해외 도항과 귀국을 모두 엄금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남아 일대 일본인 집단촌의 일본인 추방자나 도항자들은 중국선이나 네덜란드선에 맡겨 고국과의 교신이나 거래를 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1640년 경부터 금지되고 말았다.

큐우슈우가 홋까이도우(北海道) 같은 북방 지역 보다야 따뜻한 곳이지만 적도 근처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는 말과 습속도 다르고 기후, 자연, 음식이나 인심 등 모든 면에서 일본과 달랐다. 감성기 소녀 나이의 오하루가 일본을 떠난 뒤 고향을 그리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쇄국체제가 정비되고 천주교 선교사들의 일본 잠입도 끊어짐에 따라 막부는 1655년 경부터 바타비아 거주 일본인들이 고국과 해오던 교신을 완화시켰다. 그때부터 그들은 고국의 친척이나 지인들과 소식을 주고받으며 금품을 보낼 용도의 물품을 주문하기도 했다. 현재 이곳의 히라도시의 관광자료관에는 오하루 등 이곳의 일본계 유민들이 고국에 보낸 서한 5통이 “쟈가따라문”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당시 네덜란드인 사회에서 일본계 유민들의 삶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오하루도 일본에 남겨진 친지들과 지인들을 그리워하면서 짙어져간 망향의 심사를 적은 편지를 일본의 지인들에게 부쳤다. 일설에는 오하루의 엄마는 일본을 떠나지 않았고 오하루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뭏든 편지는 내용이 읽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린다. 우리 한민족의 恨개념으로 해설하면 퍼뜩 마음에 와닿게 되는 애닯고 가슴 아픈 사연이 내재돼 있다.

“千早振る、神無月とよ”로 시작하는 편지가 어떤 뉘앙스를 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도록 원문과 함께 주요 내용을 발췌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초두의 원문은 이렇게 돼 있다.

千早振る、神無月とよ、うらめしの嵐や、まだ宵月の、空も心もうちくもり、時雨とともにふる里を、出でしその日をかぎりとなし、又、ふみも見じ、あし原の、浦路はるかに、へだゝれど、かよふ心のおくれねば、おもひやるやまとの道のはるけきもゆめにまちかくこえぬ夜ぞなき(後略)

이 문장을 현대 일본어로 이해해서 한글로 번역하면 대략 아래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10월의 일이었습니다. 원망스럽게 부는 바람 속에 해질녘인데도 하늘도, 마음도 흐리고 오락가락 내리는 비와 함께 고향을 떠난 그날이 마지막이었네요. 다시 편지조차 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게 돼버려 마음을 전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일본은 매우 멀어져도 꿈속에서는 밤 마다 이 거리를 뛰어넘어 마음을 통하게 하고 있습니다.(후략)

그리고 마지막 매듭말로는 아래처럼 끝난다.

“あら日本恋しや、ゆかしや、見たや、見たや。春より(“엄마야 일본이 그리워, 가고 싶구나, 보았네, 보았네. 하루로부터”

위의 “보았네, 보았네”는 아마도 그 앞에 “꿈속에서”라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이해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이 편지는 에도시대 중기의 천문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 최초로 “百姓”이라는 말에 대해 해설한 니시카와 키나미(西川如見, 1648~1724)가 1714년에 저술한 나가사키 야화초(『長崎夜話草』) 제1권(제5권은 1720년에 출간)에서 조금 편집돼 '紅毛人子孫遠流之事付ジャガタラ文(フミ)'로 처음 소개됐다고 한다. 이로부터 위에서 말했듯이 추방된 후 자카르타에서 고향 친지나 혹은 모친에게 보냈다고 하는 '쟈가따라 후미'로 알려졌다. 대략 오하루가 소녀 시절 젊은 날의 어느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 서한은 3000여 자나 되는 장문이라고 한다.

이 편지는 코르넬리아라는 여성이 히라도의 어머니에게 보낸 것이다. 실물은 현재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에 소장돼 있다.
코쇼로의 쟈가따라 편지(コショロのジャガタラ文) 사진제공: 나가사키현 관광연맹 '여행넷'(長崎県観光連盟“旅ネット”)

그런데 편지의 문체가 20세도 채 안 된 소녀가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고문 투의 유려한 것이어서 명문으로 높이 평가되고, 오하루는 에도 막부의 강압에 따라 고향을 잃은 비극적인 소녀로 알려져 이국의 슬픈 소녀라는 비극적 이미지가 형성됐다. 예컨대 메이지 시대 역사학자, 사상사, 식민학자이자 정치가로서 귀족원 의원이었던 타케꼬시 요사부로우(竹越与三郎, 1865~1950)가 쟈가따라 편지의 이 글을 평해 “'쟈가따라 아가씨(姬)의 글'을 읽고 울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じゃがたら姫'の'じゃがたら文'を読みて泣かざるは人に非ずと申すべし”)라고 쓴 바 있다. 또 수백년이 흐르면서도 오하루의 편지는 서세동점 시대에 일본에 내항한 서양인 남성과 일본 현지의 여성 사이에 이룰 수 없는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의 상징인 '나비부인'(John Luther Long의 실화소설 Madama Butterfly)처럼 지금도 구전되면서 일본인들의 감성을 자극해오고 있다.

심지어 쇼와(昭和)시대인 1939년에 가서는 쟈가따라의 편지를 주제로 '나가사끼 이야기'(長崎物語)라는 가요도 만들어졌다. 바로 내가 위에서 소개한 그 노래다. 지금 일본의 젊은층 사람들은 잘 들어보지 못한 일제시기의 오래된 곡이지만 한 번 들어보라. 곡도, 가사도 애닯은 내용이어서 가슴 아픈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쟈가따라의 편지는 그 후 위작 시비에 휘말린 바 있다. 즉 이 서한이 알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에도 후기의 난학자(蘭学者, 蘭學은 일본 근대화의 밑거름이 된 네덜란드학을 가리킴) 오오쯔키 켄자와(大槻玄沢, 1757~1827)는 의심할 바 없는 니시까와의 위문(僞文)이라고 단정했다. 오오쯔끼의 문하생이었던 야마무라 사이스께(山村才助, 1870~1907)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위작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것이다”(人多くこれを偽作ならんかと疑うべし)라고 평한 바 있다. 야마무라는 지리학자로 활약했지만 芝蘭堂이라는 난학의 교육기관에서 네덜란드어를 공부한 난학자였기 때문에 당시 접할 수 있는 이에 관한 네덜란드어 자료도 참고하고 내린 결론일 것이다.

문제의 편지에는 대부분 일본어 고어나 고시(古詩)의 문구가 섞여 있다. 과연 일본 고어체의 문구들을 오하루가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을까? 오래 전부터 일본어 고문 사료를 번역하거나 틈 날 때마다 일본의 단가시인 하이꾸(俳句)를 써오면서 고문체의 어려움을 경험, 실감하고 있는 내가 봐도 10대 여자 아이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편지 서두의 “千早振る、神無月とよ”로 시작되는 단락은 모두 분명히 일본 고어체다. 서두의 “千早振る、神無月とよ는 일본 古今集 躬恒의 長歌에 나오는 것이다. “찌하야부루”라고 읽는 千早振る는 雅語로서 고어에서 통상 神’, ‘社(=신사)’, ‘人’, ‘氏’ 따위를 수식하는 “마꾸라꼬또바 ”(枕詞, 습관적으로 일정한 말 앞에 놓는 4음절의 일정한 수식어)인데 여기선 특별히 번역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振る'는 '내리다'와 '古'의 懸詞(“가께꼬또바”라고 하는데, 한 단어에 둘 이상의 뜻을 엇걸어 표현하는 수사법)를 말한다. 神無月은 일어 고문이나 하이꾸 등 문언문에서 사용되는 雅語로서 10월을 뜻하는데 이것을 그냥 일반명사인 十月로 바꾸면 일본어 고어가 지닌 맛이 반감된다.

과연 10대 소녀가 이러한 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까? 답은 사뭇 회의적이다. 게다가 학문을 접한 적도 없는, 어문지식이 얕은 10대 소녀가 쓴 것이라 하기엔 문장이 너무 유려하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오하루가 직집 쓴 게 아니라는 주장에 무게를 둘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두 가지 더 있는데 이들도 지나쳐선 안 될 것이다. 먼저, 문제의 이 글은 그 몇 년 뒤 오하루에 의해 쓰여졌다고 하는 또 다른 편지와 차이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자카르타 소재 고문서관에 보관돼 있는 오하루의 유언서에는 쟈가따라의 편지에서 연유된 비극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이 서한에는 유산의 분배법 등이 기재돼 있으며, 그녀가 부유층의 상징인 노예들까지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여행 중에 길게 소개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쟈가따라의 편지는 위조였다는 주장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자 근년 일본에서는 오하루의 편지는 위작인 것으로 거의 결론이 난 상태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오하루는 실존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점, 그리고 오하루의 서한이 위작이거나 편지의 스토리가 사실이 아닌 허구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문학적, 예술적 소재나 역사문화의 기억이나 양태로 존재하는 게 여전히 가치가 낮지 않다는 점이다.

먼저 오하루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증명하는 몇 가지 사실은 확실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일본에서 추방된 후 대략 21세 때인 1646년 11월 29일 네덜란드인과의 혼혈 남성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사무원보였던, 히라도 태생의 시몬 시몬센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시몬센은 동인도회사에서 요직을 역임한 뒤 무역업에 종사한 인물이다. 오하루는 시몬센과의 사이에서 3남 4녀(또는 4남 3녀)를 얻었다는 설이 있고, 1697년 4월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다음으로 오하루의 편지가 위작이라고 하더라도 그녀가 살았던 인생에는 강제 추방과 망향의 아픔이라는 비극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문학적 서사와 음악이나 무대예술의 장르가 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원래 모든 작품에선 비극적 요소나 반전이야말로 심리적으로 예술적인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는 법이다. 물론, 누구든지 실화라고 믿은 것이 사실이 아닌 허구로 드러나면 그 감흥은 식게 마련이다. 그 사실을 알고나면 그간의 관심과 흥취가 반감될 것이다. 그러나 오하루의 편지와 그녀의 실제 삶은 구분해야 한다. 편지는 위작이라 할지라도 애상감을 자아내게 하는 오하루의 삶 자체가 극적 요소가 없는 게 아니다. 편지는 문체가 위작이거나 과장됐다고 하더라도 실제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대와 달리 그 시절에 강제 추방당하고 머나먼 타국땅에서 살다가 고국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다시는 가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는 사실이 문학적, 예술적 파토스(pathos)를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구력이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지금도 연극, 소설, 드라마, 가요 등의 다양한 예술 장르로 전국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히라도시는 이곳 히라도에 과거 네덜란드 상관이 존재했다는 이유, 그리고 오하루가 결혼한 시몬센이라는 이가 이곳 히라도 태생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관광자원화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오하루 이야기를 한국독자들에게 그냥 오다가다 지나치고 말 정도가 아니라 역사적 배경과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자 이렇듯 장광설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2024. 12. 26. 22:13
히라도 민박집에서
雲靜 초고
2025. 1. 2. 15:58,
귀국 비행기 안에서 일부 가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