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학술여행(조사 답사 자료수집)

임진왜란 시 왜군 출정의 시발점 나고야성터에서

雲靜, 仰天 2024. 12. 28. 17:02

임진왜란 시 왜군 출정의 시발점 나고야성터에서


사가(佐賀) 출신 역사인물들 중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오꾸마 시게노부(大隅重信, 총리 2회 역임, 와세다대학 창설자)와 사가성터 등지를 보고 바로 큐우슈우(九州) 서북쪽의 까라쯔(唐津)로 이동했다.

그리고 가라쯔에서 1박 한 후 이튿날 새벽 일찍 첫 버스를 타고 임진왜란 시 왜군이 출정을 개시한 큐우슈우 최북단의 나고야성터(名護屋城跡)로 와서 1차로 기초적인 답사를 마쳤다. 얻은 게 적지 않다. 두 눈 버젓이 뜬 사람에게 코 베어 가듯이 바가지 씌운 까라쯔의 불한당들과 한 바탕 신경전을 벌이긴 했지만(추후 소개할 것임), “까라쯔”라는 지명의 어원과 역사의 면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불안정했지만 어쨌든 천하를 통일한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출정 한 해 전인 1591년부터 이곳에다 20만 명이 넘는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거대한 성을 만들어 조선정벌을 진중에서 진두 지휘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곳에다 나고야성을 막부의 본거지인 오사까(大阪)성에 버금갈 정도로 크게 건설했다. 거대한 전시수도 기능을 한 도시였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성하촌에 해당되는 죠우까마찌(城下町)도 형성됨에 따라 다양한 문화가 꽃 피기도 했다.

이곳에 소개된 지도를 보니 히데요시의 휘하에 일본 전역에서 작게는 수 백명에서 많게는 2만 명이 넘는 대병력을 동원해서 이곳으로 모여든 내로다하는 다이묘오(大名)들의 군사진영과 병사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서 있었던 보였다. 훗날 적이 돼 건곤일척 한 판 승부를 벌인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가또우 기요마사(加藤淸正), 토꾸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등 무장들만 수 십명이 됐다.

이번 답사로 토요또미 히데요시가 왜 이곳을 출정의 배후 전진기지로 택했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원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수집한 문헌 자료의 구체적인 수치에 의하면,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가 이 지역이 일본 전역에서 해로로 츠시마(対馬島)로 건너갈 수 있는 가장 짧은 최단거리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이곳 성터 북단에서 보면 멀리 대마도가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둘째, 이곳 앞바다의 수심이 깊어 대형 군선들을 정박시켜 놓고 출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곳 나고야성 박물관의 학예관에게 당시 토요또미는 그 많은 군선들을 어떻게 준비했느냐, 그에 관한 연구나 사료가 있느냐라고 물어봤지만 아직 연구가 짧아서 그런지 없는 듯하다며 정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상기 두 가지 외에 토요또미의 심중엔 혹시 조선 침공의 전열에서 벗어나 이반할 가능성이 없지 않던 서부 일본(큐우슈우) 제번의 영주들을 통제하기에 유리한 곳이었다는 점도 고려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임란 관계 전문서를 보면서 지금까지는 부산포에 당도하기 전 왜군 적장들 간의 관계라든가 군수, 병참, 함선 준비 등등 그동안 왜란 전 당시 일본 내 상황 등 몇 가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답사로 일본의 정치 및 군사 상황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어서 이제 퍼즐의 일부를 맞출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됐다. 이곳 까라쯔 서북쪽의 나고야성터는 임진왜란 전문가들 만이 아니라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일반인들에게도 여행을 권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원인과 성격은 다르긴 하지만 국내상황이 임진난 당시 만큼이나 혼란스럽고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 나고야성터에 서서 한국쪽을 바라보니 암담한 심정을 누를 길 없었다. 꼭 저런 과정을 거쳐야 하나, 우국충정이 있다해도 이미 일개 개인으로는 어찌 할 수 상황이어서 마음이 무겁다.

屈原謂邑犬群吠
傾國喧嘩聲如聽
秀吉意志非妄想
習笑而我無李公

굴원이 말했지 개 한 마리가 짖으면 동네 개들이 모두 덩달아 짖어댄다고
나라가 무너질 듯 온갖 굉음들이 이곳까지 들리는 듯하다
히데요시가 품은 침략의지는 망상이 아니었네
지금은 시진핑이 웃고 있는데 우리에겐 충무공이 없구나.

https://suhbeing.tistory.com/m/611


점차 초인이 기다려지는 마음이 절실해지는 쪽으로 움직여진다. 난세가 되면 태양을 가리던 먹구름들이 일거에 걷히면서 인물들이 서광처럼 나타나건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충무공 같은 인물이 출현하기란 요원해 보인다. 자고로 국가의 운명과 관련해서 혼돈과 망국적 비극의 근원은 군주가 될 이가 아닌 자가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군주가 된 데에 있고, 더우기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고선 나라를 위해 간언을 아끼지 않는 끝까지 믿을 수 있는 신하를 곁에 두지 않고 내치는 데에 있다. 용약한 혼군 선조 임금이 그랬지 않았는가? 임진전쟁 이후 급격한 세력판도의 소용돌이 속에 끝까지 인내하면서 최후의 승자가 돼 새로운 막부를 연 토꾸가와 이에야스의 말을 되새겨볼만 하다.

“저는 시골 출신이라 아무 것도 진귀한 것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가 500기 정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에야스의 제일 가는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私は片田舎の生まれで何も珍しいものは持っていません。しかし、私のためなら命を惜しまない者が五百騎ほどおります。これこそ家康の第一の宝だと思っています) 모든 다이묘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각자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이 뭔지 말해보라는 쇼군 히데요시에게 한 답변이었다.

또 이에야스는 이런 말도 한 바 있다. “주군을 향한 諌言은 가장 먼저 창보다 낫다.”(主君への諌言は一番槍より勝るん)『名将言行録』중에서

과연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자신에게 허심탄회하게 충언, 고언, 직언할 수 있는 부하들을 둘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도 토꾸까와 이에야스에게 있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다. 천하는 천하의 천하인 것이다.” (天下は一人の天下ではない。天下は天下の天下なのだ)『徳川実紀』중에서

고대 중국 전래의 大同사상을 받아 들여 자신의 정치철학으로 삼은 신해혁명의 창도자 孫文(孫中山)의 “天下爲公” 사상 보다 거의 400년 넘게 앞선 것이다. (물론 손문은 이 사상의 실천에는 철저하지 못했지만!)

이에야스는 천하위공 사상을 정치적 모토로 부하들보다 더 근신하고, 더 절약하고, 더 많이 듣고 이해하고, 더 많이 베푸는 덕장이자 지장은 물론, 거의 수도승의 수행과 같은 삶을 살면서 가신들과 무장들을 대했다. 그러니 부하들이 간언한다고 보복을 당하겠다는 의식을 가지지 않고 모두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仁의 실천이었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윗사람의 결점이나 과실을 지적하고 충언해주는 가신을 적을 벨 수 있는 예리한 검과 창 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보고 그들에게 입과 마음을 열도록 유도했다. 그는 평소 가신들의 여러 의견들을 진지하게 경청한 후에 결정하거나 결단을 내렸기 때문에 휘하의 무사들은 누구든지 주군에게 거리낌 없이 의견을 밝힐 수 있었다.

이는 하나 밖에 모르는 고집불통 그리고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착각한 자만에 찬 대통령들이 어디 한 둘이 아니었던 것과 대비가 된다. 특히 사법고시 출신 판검사와 정치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제일 잘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자신을 망칠 뿐만 아니라 곧 나라까지 망치는 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어 보인다. “사법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치르지 않아도 될 사회적, 국가적 비용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혼란의 출발이다.

암튼, 정국이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 이제 가닥이 잡힌 것처럼 보여지니 이런 잠꼬대 같이 하나마나한 소린 집어치우고 일정대로 가던 길이나 서둘러 가자. 가고시마(鹿児島), 다네가시마(鍾子島, 일본땅에 최초로 화승총이 들어온 곳) 등지들이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이 해의 마지막날은 일본이 근대화의 세례를 받게된 곳에서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 대한민국도 기존의 국가 및 사회의 작동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새날을 맞이할 수 있으면...

2024. 12. 25. 11:15
나고야성터(名護屋城跡)에서
雲靜 초고

지도에 푸른 색으로 표시돼 있는 곳이 모두 왜군 적장들이 각기 병력을 인솔해와서 주둔한 진영이다.
나고야성의 본영 건물인 셈인 천수각과 혼마루(本丸)로 들어가는 입구
성이 석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인데 이는 임진란 이후에 생겨난 일본식 성의 성벽과 다르다. 이때까지는 오히려 조선의 석성과 유사한 형태를 보였다.
성 내 저지대에 차려놓은 찻집. 가는 닐이 장날이라고 정기 휴일이어서 차도를 가까이 했다는 토요또미 히데요시의 음다 모습의 흔적을 볼 수 없었다.
성내에 있는 호수. 아마도 당시 주둔군의 식수 해결을 위해 파놓은 것이지 않을까 싶다.
천수각과 혼마루가 있던 곳인데, 나고야성터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곳이다.
혼마루터에서 북쪽 바다를 끼고 형성된 어촌 마을
혼마루터에서 북쪽으로 보면 츠시마가 보이는 곳이다. 수평선 우측에 보이는 섬이 잇끼섬(壱岐島)이고 그 좌측에 가물가물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츠시마다.
성터의 서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