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사우회 제16회 문화탐방(경주) 동행
경향신문 사우회(회장 황우연, 사무국장 김홍운)에서 주관한 제16차 문화탐방 행사인 경주여행에 참여했다. 경향사우회의 문화탐방은 이번이 열 여섯 번째였지만, 나는 몇 년 전 춘천 문화탐방을 간 이후 이번이 두 번째였다. 경주는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거대한 불교 유적지이자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이다. 실제로 경주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 도시다. 게다가 내겐 나의 고향 포항과 자동차 거리로 30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이웃 마을 같은 곳으로 소싯적 때부터 자주갔던, 고향이나 진배 없는 곳이어서 반갑기도 했다.
함께 떠난 도반은 사우회원과 가족을 포함해서 28명이었다. 잘 아는 선배들도 계셨고 동기도 있었다. 석가모니가 얘기한 바 있지만 길을 떠날 때는 항상 믿고 따를 수 있는 길 안내자가 필요하다. 공자도 세 사람 이상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리더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일행의 안내자는 이번 여행을 기획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준 사우회장과 사무국장 두 분!
오전 7시 50분, 교대역에서 출발한 전세 버스는 약 4시간 반을 달려 우리 일행을 경주시 감포면에 위치한 문무왕 수중왕릉(일명 대왕암)에 데려다줬다. 알베르토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와 그 아라비아 해변을 연상시킨 햇볕이 따가운 12시 반 경이었다. 감포해변은 올초에 왔을 때처럼 그대로였다.
문무왕 수중릉의 진위 여부를 두고 기존의 이곳은 수중릉이 아니고 지금의 수중릉에서 아래 쪽 약 500m 지점 해안의 ‘가미새바위’가 문무대왕릉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 것이 진짜이든 간에 문무왕 수중왕릉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이 왜구의 침략을 받아 노락질을 당한 것에 대해 천추의 한이 되었던지 죽어서 동해 바다 용이 돼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대원을 세운 자신의 분골이 뿌려져 조성된 곳이다. 사실 삼국시대 이래 고려와 조선시대의 왜구란 한반도 뿐만 아니라 멀리 중국의 산둥(山東)성, 푸졘(福建)성 연안에까지 노략질하러 다녔으니까 가까운 신라 해안이야 밤낮으로 침입해온 건 두 말할 나위 없다. 신라의 동해안 지역에 무시로 출몰한 왜구들은 주로 대마도 출신들이었다. 당시 일본 내 왜구들의 지역에 따라 몇 개의 세력권이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과연 문무대왕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이 용이 돼 왜구의 침범을 막아 냈을까? 부정적으로 보면 임진왜란이 상징하듯이 왜구의 침략을 막지 못했다고 볼 수 있고, 긍정적으로 보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왜구의 침략이 있었는데 많이 막아내어서 그 정도였던 게 임진왜란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판단은 각자가 할 일이다. 내세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또 있다 하더라도 죽어서 자신의 원력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염원과 의지는 사회적 결집의 효과가 있거나 호국의 정신적 각오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아뭏든, 해변에 내리자 불과 얼마 전까지도 가열차게 달궈진 대지가 완전히 식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도 조금 덥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내 맑은 공기의 바닷바람과 푸른 파도가 이를 상쇄시켜줬다. 어릴 때부터 나고 자란 곳이 바닷가인데다 게다가 자주 왔던 곳이라 외형은 변함이 없고 익숙했지만 누구와 같이 오는가에 따라 기분이 정해지게 된다.
단체 기념사전 촬영 후 짧은 개인 시간을 가진 뒤 일행은 식당으로 이동했다. 점심 식사는 이곳의 돌고래횟집에서 물회를 먹었다. 이 식당은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해서 유명인들이 많이 다녀간 곳이었다. 이 지역의 물회는 물회의 원고장인 포항, 영덕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감포와 울산 쪽으로 내려가면 대부분 얼음을 넣은 육수물을 쓰지만 포항은 대체로 고추장을 그대로 넣어 비벼 먹는다. 여행 와서 이것저것 따질 거 없다. 음식이 나오면 맛있게 잘 먹는 게 최고다.
회우들 간에 정겨운 술잔도 몇 잔 오간 점심 후, 일행은 인근 함월산의 골굴사(骨窟寺)로 향했다. 문무대왕 수중왕릉을 보면 반드시 그와 짝이 되는 감은사 터와 그곳의 삼층석탑을 보는 게 문화재와 역사를 아는 이들에게 일반화 된 여행 코스이지만 불과 짧은 반나절 만에 이 모든 것을 다 볼 수가 없다. 그래서 감은사보다는 골굴사가 특이하고 더 인상적이다 싶어서 이곳을 탐방의 대상지로 정하지 않았나 싶다. 그 대신 2018년 8월 내가 원장으로 있는 환동해미래연구원이 주최한 한일 국제학술 세미나에 초청한 일본 학자들을 데리고 감은사에 갔다가 쓴 졸시 한편을 덧붙이는 것으로 갈음한다.
https://suhbeing.tistory.com/m/1432
인도에서 온 광유 선인 일행이 인도의 아잔타 석굴 사원을 본떠서 석굴사찰로 조성했다는 유래가 있는 골굴사는 원효대사(617~686)의 해골물의 구법 및 득도 관련 설화가 떠오르는 신라 중기의 고찰로서 내겐 두 번째 방문이었다. 실제로 원효는 구도와 포법 중에 다녀갔다고 알려져 있다. 또 산 정상의 암벽에 새겨져 있다는 마애불상도 친견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라의 체취를 음미하고 자시고 하기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왜 하필 절 이름을 뼈 骨자가 들어간 “골굴”로 지었는지 유래를 밝힌 안내문이 없어 궁금하기도 했다.
여타 사찰과 다른 골굴사의 특징은 뭐니뭐니 해도 가람배치의 특이성과 선무도 총본산이 있다는 사실! 방형의 터에 좌우 대칭으로 건물들을 배치한 한국의 일반적인 사찰들과는 달리 이 절은 골짜기를 따라 암굴이 있는 산상으로 건물과 석굴이 조영돼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혹자는 골굴사를 중국의 뚠황(敦煌)석굴이나 윈깡(雲岡)석굴과 비교하지만 암굴에 불상을 부조로 새기거나 안치한 것만 제외하고 사찰의 성격이나 불상의 규모 등에선 판이하게 다르다. “한국의 소림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이곳 골굴사에는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승려들도 많이 와서 무예를 연마하는 모양이다.
골굴사에 도착했지만 산 정상엔 올라가선 안 된다고 해서 나는 마애불상이 암벽에 부조돼 있는 정상까지는 다 올라가지 못하고 이번에도 중도의 지장암까지만 갔다가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미래불인 미륵신앙의 한 형태로 전개된 마애불상의 조성은 한국에선 대략 서력 7세기 전반부터 백제에서 시작됐다. 이곳 골굴사에도 마애불이 상호도 원만구족하고 상반신 가사의 옷자락이 매끄러운 선으로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실물 친견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우리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신라 천년의 고찰을 상징하는 불국사, 석굴암, 포석정, 대릉원(황룡사지, 천마총) 순으로 돌아봤다. 원래 예정에 있었던 첨성대는 시간 관계상 가지 못하고 건너뛰었다. 대부분 내가 옛날에 자주 들렀던 곳들이어서 눈에 익은 익숙한 것이었지만 과거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 마디로, 정돈이 많이 돼 있었고 편의시설도 꽤 갖춰져 있었지만 문화재 자체는 노후화가 꽤 진행된 유물들도 보였다.
먼저, 불국사에선 일주문 역할을 하는 천왕문(사천왕문이라고도 함)으로 들어서니 험상 궂은 얼굴에다 근육질 신체의 불법 수호신상들이지만 대학시절 불교미술을 공부할 때부터 내게는 험상 궂은 상호가 오히려 친숙하고 익살스런 느낌을 주었던 사천왕상(수미산의 제석천을 호위하는 4명의 호법신인데 동서남북 각 방위에서 불법을 수호한다는 네 신상, 즉 비파를 들고 있는 持國天王, 검을 들고 있는 增長天王,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는 廣目天王, 왼손에 우산, 오른손에 보탑을 들고 있는 多聞天王)이 나를 보고 윙크하길래 나도 넌지시 미소로 답했다. 염화시중의 경계였다.
천왕문을 지나자 오른 편으로 산 기슭에 조성돼 있는 불국사박물관이 보였다. 내가 과거 10여 년 전에 왔을 땐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안내문을 보니 박물관엔 사리함과 사리장엄구들을 전시한 것으로 돼 있었는데 이것들 뿐만 아니라 필시 1966년 석가탑 보수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대승불교 경전의 하나로 국보 제126-6호) 같은 국보급 유물들이 많이 전시돼 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간 관계상 박물관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게 조금 아쉬웠다.
서방정토라는 불국토의 이상향이 표현된 불국사(751년, 경덕왕 10년에 창건)는 가람 배치가 아주 독특한 형태여서 조금 소개하고 가는 게 유익할 것이다. 통상 사찰엔 대웅전 앞에 탑이 둘이 있는 쌍탑식(산지 사찰에는 탑을 하나만 두고, 평지 사찰에는 둘을 둠)이고, 평지 가람은 두 탑의 형태가 서로 같은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불국사의 경우는 두 탑의 형태가 아주 다른 점이 특징이다. 석가탑(정식 명칭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다보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의 준말)이 공히 재질로는 동일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석가탑은 고래 한국 탑(Stupa)의 전형적 양식을 따르고 있고, 다보탑은 장엄성이 두드러진 이형탑(異形塔)의 형태다.
쌍탑식 가람의 경우,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나 법신사리를 모신 영묘(靈廟)로서의 의미 이상은 가지고 있지 않는데 불국사에서 석가탑과 다보탑을 지금처럼 동서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사리 봉안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는 불국(佛國)의 상징세계가 펼쳐져 있다. 즉 법화경(法華經, 妙法蓮花經의 준말)의 “석가여래 상주설법”(釋迦如來 常住說法)과 “다보여래 상주증명”(多寶如來 常住證明)의 장면을 구현시킨 것이다.
무얼 증명하고 찬탄했다는 소릴까? 법화경에 나와 있는 대로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데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 나타나 설법 내용이 옳다고 증명했다는 것, 즉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인 것이다. 따라서 '석가탑'이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이유임과 동시에 이 명칭의 준말이기도 하다. 요컨대 석가탑은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석가여래를 형상화 하고, 다보탑은 부처의 설법 내용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찬탄하는 다보여래를 형상화 한 것이다.
석가탑은 한때 백제인 아사달과 아사녀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인 무영탑(無影塔, 그림자 없는 탑)이라고도 불리고, 다보탑은 그림자가 있어 유영탑(有影塔)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불국사의 본전인 대웅전(大雄은 부처의 열 가지 명호 중의 하나이고, 대웅전은 말 그대로 석가모니불상을 모신 본당의 명칭)과 다보탑과 석가탑, 속계와 불국토를 이어주는 다리인 청운교와 백운교 등의 건축물들과 탑의 기둥(석주) 및 돌들이 세월의 무게에 깎여 이전보다 훨씬 더 고색창연한 느낌을 더해줬다. 아마도 대웅전은 단청 작업을 다시 해서 노화를 늦추고 면모도 일신해야 할 때가 된 게 아닌가 싶었다. 기단과 탑신에도 여타 수리하거나, 보정해야 할 곳도 눈에 많이 띠었고, 심지어 “불국사 안내문”의 일본어 소개 글엔 정확하지 않은 용어들까지 보였지만 요즘 불국사 역시 사정이 어려운지 예전만 같지 않다는 절집 소식을 들은 터에 내겐 예사롭지 않았다.
일행들이 불국사를 뒤로 하고 찾은 곳은 석굴암이었다. 과거 나의 졸시에서 인도의 데칸 고원에 비유된 토함산에서 동해의 일출 자리를 바라보고 조영된 석굴암의 미적 아름다움과 조형의 과학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서 멀대가 그걸 다시 언급한다는 게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서 설명을 생략한다. 석굴암으로 향한 일행들은 걸음을 재촉했지만 나는 여러 번 갔던 곳이라는 핑계로 차에서 휴식을 취했다.
석굴암 견학에 이어 우리가 탄 버스는 포석정으로 이동해갔다. 전복의 모양과 같다 해서 전복 포자를 붙여 명명한 포석정(鮑石亭)은 왕공 귀족들이 물을 흐르도록 돌로 만든 작은 수로에 술잔을 띄어놓고 시를 짓는데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그 술을 마시면서 놀던 유흥지였다. 이런 일화와 관련이 있지만, 나에게 포석정은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 이미지가 남아 있는 곳이다. 신라의 패망과 관련된 것이다. 신라 55대 경애왕이 927년 9월 이맘 때 이곳에서 비빈, 종친들과 연회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곳으로 말 발굽 먼지를 일으키면서 쳐들어온 후백제 견훤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자결을 강요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옛날 고사가 떠오른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출전) 신라가 완전히 망한 것은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순왕이 그 뒤 고려 시조가 되는 왕건에게 항복하면서부터였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 와 보고 그 뒤로는 못 와 봤으니 50년도 더 된 세월의 덧없음을 느끼게 해주는 포석정에 서보니 찰나 같은 시간이었지만 불교의 무상과 穢土의 권력무상이 새삼 부감돼 왔다. 그런 세월의 무상감이 반영된 탓인지 거의 다 풍화로 마모가 돼 있는 포석정의 돌 사이로 신라의 영화는 온 데 간데 흔적이 보이지 않고 주연상에 희희낙락하는 신라 왕공 귀족들의 모습과 후백제군의 말발굽 소리가 동시에 오버랩되면서 어른거릴 뿐이었다.
哦, 歲月的轉瞬即逝
初秋的陽光不尋常!
雖一切有情者皆必滅
我們又要去哪裡呢?
無論走到哪裡京鄉新聞社友會將永遠存在!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초추의 양광이 예사롭지가 않구나!
무릇 일체의 유정은 필멸이라지만
우리 또한 이렇게 왔다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딜 가든 경향신문 사우회는 영원하리다!)
탐방 여행의 대미는 황남동에 위치한 거대한 고분군인 대릉원 내의 천마총이었다. 천마총의 내부 유물은 모두 실물이 아니라 복제품으로 전시돼 있었다. 그럼에도 이 유물들을 통해 내가 평소 알고 있던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예컨대 신라 6부족 세계의 국가 권력구조,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유물로서 멀리 서역 너머 카스피해와 흑해 유역 일대 지역에서 건너왔다는 민족유래설, 또 그들에게서 전래된 유리잔, 금관과 사리함, 곡옥 등의 유리 및 옥과 금제 유물들이 5~6세기에 집중적으로 이곳 서라벌 땅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천마총은 우리의 자자손손 찬연히 빛날 신라 천년의 기와 문화가 응결된 결정체였다. 신라 시대 중기 문화의 精華이기도 하다.
천마총 내부 관람을 마지막으로 모든 탐방이 끝났다. 우리 일행은 대릉원에서 멀지 않은 청온채라는 식당에서 육회를 미나리에 버무린 별미로 저녁 식사를 한 후 바로 서울로 귀경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발지였던 서울 교대역에 도착하니 밤 11시 반이었다. 사우회장의 말 대로 전철 막차가 끊길지 모르니 인사도 간단하게 한 마디씩 하고 각자도생하자 했지만, 웃자고 하는 소리이고 모두 늦은 밤 귀갓갈에 안전과 평안함을 간구한 것이리라. 나 역시 그렇게 소망한다.
2024. 9. 24. 24:00
지하철 3호선 구파발행 전동차안에서
雲靜 초고
9. 25. 17:37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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